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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소통의 방식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다수의 국어국문학과에는 ‘문학기행’이라는 이름으로 문학작품 속 배경이나 작가를 기념하는 문학관을 찾는 행사가 있다. 필자도 학부 시절 순천과 광주 일대를 답사한 기억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답사 프로그램은 축소되거나 폐지되는 것이 현실이다. 세상의 변화 속에서 문학 현장을 찾는 것에 대한 무용론이 교수와 학생들 사이에서 폭넓게 공유되고 있기 때문이다.지난주 학부생 40여 명과 목포로 2박 3일 문학답사를 다녀왔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중단된 문학답사가 부활하는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신청마감 3일 전까지 신청자가 10명을 넘지 않아서 취소하기 직전까지 몰렸지만, ‘졸업요건’을 강조하며 학생들을 독려한 끝에 간신히 출발할 수 있었다. 애초에 대다수 학생은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첫째 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당황스러운 경험을 했다. 식사를 일찍 마친 학생들이 삼삼오오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하더니 조금 시간이 지나자, 절반 이상이 빈자리가 되었다. 둘째 날 저녁도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은 식사를 마치면 같은 테이블의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피하는 쪽을 택했다. 뿐만이 아니라, 둘째 날부터 일정이 빡빡하다는 말이 들려온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다.학생회장을 통해 들은 말은 이랬다. 우선 날씨가 문제였다. 2박 3일 일정의 첫날은 무더위로, 둘째 날은 비로 인해서 축축하게 젖은 옷을 입고 답사를 진행해야 했다. 이에 따라 학생들이 쉽게 피로감을 느꼈던 것이다.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와 한 조를 이루어 이동하고 방을 함께 써야 하는 것도 문제였다. 낯선 존재와 2박 3일 동안 가깝게 지내는 것이 불편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어색함을 참으며 타인을 알아갔다면, 지금 학생들은 스마트 폰에 의지해 그 시간 자체를 회피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둘째 날, 우리 조 학생들과 이동 중에 소나기를 만나서 카페로 이동했다. 주문한 음료가 나오자 우리는 커다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그러자 학생들은 당연한 듯 각자의 스마트 폰을 꺼내서 무엇인가를 했다. 몇 분의 침묵이 흘렀을까. 견디지 못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지금은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순간 학생들 사이에 흐르던 어색한 공기만은 또렷하게 떠오른다.현재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의 의사소통 방식은 과거와 완전히 다르다. 스마트 폰에 익숙한 세대로 낯선 사람과 만나서 자신을 드러내며 대화하는 방식이 서툰 것이 사실이다. 또한, 코로나19 바이러스를 겪으며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 자체를 배운 적이 별로 없다. 그러니 어색함과 불편함에 성급하게 말을 하거나 혼내기보다는 잠시 기다려 줄 필요가 있다. 마지막 날 학교에 도착하고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우리 조 학생들을 보니, 내가 2박 3일 동안 너무 조급하게 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학생들은 속도는 조금 늦더라도 각자의 방식으로 타인과 소통하고 있었다. 이번 답사는 나에게 학생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2023-05-24

형평운동 100주년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올해로 형평운동 100주년이 되었다. 1923년 4월 25일 진주에서 창립한 형평사는 12년 동안 ‘백정’에 대한 차별철폐와 자강을 위한 운동에 힘썼다. 형평운동 100주년을 맞아 진주에서는 기념 학술대회 및 전시회가 개최되었지만, 형평운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매우 낮은 편이다.‘3·1 운동’과 같은 민족해방 운동이나 ‘5·18 민주화 운동’과 같은 민주화 운동과 결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민족독립 운동이나 민주화 운동은 여전히 진행 중인 사건이며 이에 대한 국가적 관심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반면 형평운동이 내건 신분제 폐지는 이미 지난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다고 인식하기 쉽다.법적인 신분제 폐지가 일상에서의 차별까지 없애지 못하는 상황은 100년 전에도 유사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공식적인 신분제가 폐지되었지만, 백정에 대한 실질적 차별은 지속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본은 백정을 제도권으로 편입시켰지만, 백정들은 경제적 수탈로 받아들였다. 민간에서의 신분 차별이 이어져 왔음은 물론이다. 요컨대 1923년 형평사 창립은 사회적 소수자인 백정이 자신들에 대한 차별 철폐와 인간적 존엄을 지키기 위한 인권 운동의 시발점이었다.형평운동을 인권의 관점에서 재정의한다면, 당장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장애인이나 성소수자 등에 대한 차별이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차별금지법’조차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경제 양극화에 따른 새로운 신분제의 출현을 목격하고 있다. 2015년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된 ‘흙수저/금수저’와 같은 신조어는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1920년대 반형평운동에 중심에 농민이 있다는 사실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양반에게 차별받아 온 농민이 백정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차별을 되돌려주는 상황은 일견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백래쉬를 겹쳐 읽으면 논리 구조가 일치한다.차별받아 온 존재들이 자신의 인권을 지키고자 일어날 때, 기존의 문화구조에 익숙한 주체들의 혐오와 차별의 움직임이 생겨난다는 점에서 100년을 초월하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류의 본령이다’로 시작하는 조선형평사 주지문(主旨文)은, 안타깝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비록 백정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못하는 현실과 백래쉬 현상이 웅변하듯 한국 자본주의 100년 역사의 본질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그럼에도 희망을 읽어낼 수 있다면 진주를 전국에 알린 ‘어른 김장하’ 선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형평기념사업회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선생은 형평운동 70주년을 기념하며 ‘진정한 개혁과 민주화를 앞당겨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일에 형평정신 곧 평등사상을 바탕삼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형평운동 100주년을 맞아 다시 한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어른 김장하’에 대한 전국적 관심은 우리의 무의식에 있는 평등에 대한 그리움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3-05-10

대학의 위기와 교육의 목적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지난 4월 10일 교육부의 ‘인문사회 융합인재양성사업’ 보도 자료가 배포되었다. 이 사업은 3~5개 대학으로 연합체를 만들어서 5개 대주제(디지털/환경/위험사회/인구구조/글로벌·문화)에 맞는 융합 교육과정 개발을 목표로 하며, 지역 대학 위기 상황을 고려하여 비수권 대학이 연합체의 40% 이상이 되도록 규정했다. 연합체의 대학에 150억을 지원하는, 인문사회 영역 지원 사업으로는 상당히 큰 규모이다.사업 공고가 나오자 대학 간 눈치 싸움이 시작되었다. 학교 차원의 TF팀이 꾸려지고 단과대학을 중심으로 합종연횡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4월 10일 공고가 나고 불과 2주 만에 신청을 마감하는 일정이지만, 24시간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던 연구자들의 몸이 즉각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당연히 주제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방향성을 토의할 시간은 없다. 본 신청까지 아직 한 달이 남았다지만, 최소 세 개 대학의 여섯 학과가 충분한 협의를 거쳐서 어떤 결과를 도출하기에는 촉박한 일정이다.지역 대학은 글로컬 사업의 여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던져진 이 사업으로 더욱 분주하다. 글로컬 사업이 추구하는 학과 간 혹은 학교와 지역 간 칸막이를 없애는 문제의식과 연합체를 구성하여 학교 간 전공 간 칸막이를 제거한다는 이 사업의 취지는 동일하다. 정부는 지역 대학의 위기, 나아가 대학의 위기를 다양한 층위에 포진해 있는 칸막이를 치워버리는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융합’의 문제의식이 대학가에 등장한 것은 오래된 일이지만, 100억이 넘는 예산을 가지고 속도전으로 밀고 나오는 경우는 처음이다. 정부는 지역 대학의 위기를 해결해야 한다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문제가 하나 더 추가되어서 속도를 높이는 것일까. 최근 정부의 교육 정책이 지역 대학의 위기를 심화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교수·연구자들의 연대와 고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장은 그 연대체에 힘을 실으며 함께 나가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다.하지만 이번 정부의 정책은 인문사회 분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액수의 돈을 노골적으로 가시화한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사업을 기획한 정부의 의도가 무엇인지, 사업 이후에 우리 지역과 우리 대학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를 질문하지 않고, 눈앞의 숫자에 몸을 움직이려는 사람들이 있다. 대학의 위기가 일상화된 지금, 유례없는 돈이 투입되는 사업에 작은 과실 하나라도 따 먹으려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이를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생활인으로서 교수, 연구자들의 심리와 이 시대 대학의 존재 이유를 생각하면, 오히려 정부에 고마움을 표시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선택과 집중’이라는 글로컬 사업의 방향성이 암시하듯, 이 제도는 돈 중심의 사고를 더욱 확장하는 것에 기여할 가능성이 크다. 대학이 취업을 위한 기관이듯, 대학의 논리도 돈 중심으로 변하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닌 사회가 이미 도착한 것인가. 이런 시대에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

2023-04-26

세월호 참사 9주기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오는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 9주기이다. 9년이 흐르도록 사고의 원인은 밝혀지지 못했고 책임자 처벌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안산에 조성하기로 한 생명안전공원은 첫 삽도 뜨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교통사고 운운하던 여당의 유력 정치인은 여전히 그 소신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에 쓰인 돈을 예산 낭비라고 비판하거나 자식을 잃은 부모를 비아냥거리는 시선도 변하지 않았다.세월호 참사는 9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사회적 재난을 대하는 사회의 구조와 인식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전히 기억하고 그 의미를 되짚어보아야 할 대상이다. 2014년 참사가 일어났을 당시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수많은 말과 글이 이어졌고, 참사 이전과 이후가 달라져야 한다며 무엇을 바꿀지를 적어놓는 사람도 많았다. 당시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으나 그 눈물이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사죄의 표시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무엇보다 온라인에 익명으로 숨어 있던 혐오 세력이 가시화된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2014년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 단식투쟁 중이던 유가족들 바로 앞에서 극우 세력이 폭식 투쟁을 진행했다. 이 사건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여 음지에서 존재하던 혐오의 감정이 광장으로 가시화되고 미디어를 통해 여과 없이 공유됐다는 점에서 ‘혐오 사회’의 제도화를 알리는 것이었다. 시간의 속도 앞에서 변화를 다짐하던 사람들의 의지도 약해져 갔다. 약해진 의지와 혐오라는 감정은 멀리 있지 않았다.세월호의 출항부터 침몰까지의 과정, 언론의 오보, 이후 이 모든 사건에 대한 국가 권력의 대응까지를 살펴보면, 우리 사회 구조 전반에 걸친 문제를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폭식 투쟁이 상징하듯 제도와 개인의 감정이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세월호 참사는 국가 권력이 자행 혹은 묵인하는 폭력의 메커니즘이 평범한 일상에 얼마나 깊게 개입했는지를 여실히 드러냈다.2022년 발생한 이태원 참사는 세월호 참사로 드러난 우리 사회의 인식과 판단의 문제가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시켜주었다. 이번에도 국정조사까지 진행했지만, 사고원인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고 자식을 잃은 부모에 대한 혐오성 발언도 등장했다. 사회적 참사를 개인의 일탈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보는 시각도 유사하다. 9년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나? 자본을 위한 국가 정책이 개인의 삶과 깊게 결부되며 비슷한 유형의 참사가 반복되고 있는 상황은 우연이 아니다.이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킬까?’가 아니라 ‘우리는 왜, 바뀌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사고의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은 익숙하다. 하지만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 왜 사회는 그리고 우리는 바뀌지 않을까? 질문을 이렇게 던지면 조금 다른 것이 시야에 들어올 수 있다. 바뀌지 못하는 이유를 찾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부터 논의하자.

2023-04-12

지역 대학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지난 수업시간에 ‘지방-대학생’이란 정체성에 대한 학생들의 발표를 들었다. 어느 학생의 발표 요지는 이랬다. 진주에서 나고 자란 학생은 고등학교 시절, 보통의 학생들처럼 명문대 진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지역의 거점국립대에 오게 되었고, 속상한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역에 대한 애착으로 곧 극복할 수 있었다.문제는 대학생이 되고 나서 발생했다. 진주 출신임을 밝혔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타인들의 불편한 시선이 경상국립대를 다닌다고 하면 쏟아진 것이다. 그 학생은 대학생이 되고 학벌주의를 체감한 것이다. 서울 명문대 출신의 사람을 진주에서 만난 걸 영광으로 생각하라는 어떤 어른의 말에, 자기 위치를 실감했다는 경험담은 강의실을 침묵으로 이끌었다.정부가 지역 대학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으로 제시한 글로컬 사업에 지역 대학의 존폐를 건 경쟁이 시작되었다. 처음 추진 계획이 발표되고 두 달도 되기 전에 공모를 마감하는 등 졸속 추진에 대한 비판이 다각도에서 제기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지적했듯, 대학 지원에 대한 지자체의 의지와 인식, 지역 국립대와 사립대의 규모나 이해관계 등을 고려하면 글로컬 사업의 한계는 명확하다. 하지만 글로컬 사업의 근본적인 문제는 정부의 책임회피이다. 지자체와 지역 대학이 연합해서 혁신의 방안을 찾으라는 명분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기실 그 이면에는 지역 대학이 외면받는 원인을 분석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정부의 실질적 무능이 자리 잡고 있다.학벌주의가 여전히 득세한 우리나라에서 지역에 일자리가 늘어난다고 서울로 가는 학생들을 막을 수 있을까? 출생률 감소로부터 시작한 지역 대학의 위기는 ‘학벌주의’가 상징하는 서열화 된 의식 구조를 해결해야 극복할 수 있다. 20~30대가 결혼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가 서열화된 사회의 구조로부터 생겨난 불안과 분노라는 정서에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지역 대학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에 깃들어 있는 서열화된 의식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를 개혁해야 하는 과제는 지자체가 아니라 국가가 맡아야 마땅하다. 사회의 여러 측면이 중층적으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태어난 지역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학생들이 자신의 삶과 노력이 부정당하는 기분을 느끼지 않게 해야 한다. 자신의 삶을 존중해주는 사회적 시선이 마련될 때, 지역 청년이 지역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 지자체와 대학이 연계해서 지역 산업을 발전시키는 일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학벌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학생들은 학령인구가 줄어들면서 생긴 수도권 대학의 정원을 채우기 위해 서울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서울대 100개 만들기’와 같은 대학 서열화를 뒤흔들 수 있는 정책과 그 정책이 시민들의 마음에 파고들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지역 대학의 위기는 단순히 경제문제로만 소급되지 않는다. 급조한 정책으로는 문제만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2023-03-29

포스트 코로나 시대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4년 만에 마스크 없이 맞이한 3월 초의 캠퍼스는 아름다웠다. 마스크 없이 캠퍼스를 활보하는 학생들의 웃음소리는 기분 좋게 느껴졌고, 3월 첫 수업을 앞두고는 설레기까지 했다. 마스크 없이 진행하는 수업에서 느껴지는 시원함은 마스크와 동거했던 지난 시간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잔뜩 움츠렸던 몸과 마음이 이제야 기지개를 켜는 기분이었다.하지만 이런 마음은 연구실로 걸려 온 전화 한 통에, 개강 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무너지고 말았다. 2023학번 신입생이 퉁명한 목소리로 자퇴하고 싶다며 전화를 한 것이었다. 대학에 온 지 한 주, 두려움과 설렘 속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바쁠 신입생과 자퇴,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어떻게 조합될지를 상상하며 면담 날짜를 잡았다.학생은 한눈에 봐도 마음이 아픈 학생이었다. 서울에서 진주로 왔지만, 여전히 일상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중학교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았으며 입원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도 진주에 있는 것과 큰 차이는 없지만, 그래도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어느 곳에 있으나 마찬가지라면, 자퇴는 언제라도 할 수 있으니 대학에 조금 더 머무르길 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는 상담 내내 불안한 눈동자로 울고 있던 학생을 진주에 남겨뒀을 때, 생겨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두려움에 학생의 자퇴 원서에 서명했다.나는 아직도 그 학생이 어떤 생각으로 대학에 진학했는지, 또 어떤 이유로 자퇴를 선택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 학생은 대학에 온 지 불과 일주일 만에 내린 자퇴라는 선택과 학교와 집 어느 곳도 편하지 않다는 자신의 발언이 모순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는 학생의 발언이 여전히 선명한 이유는, 선생으로서 나의 시각은 그 학생의 상황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명료히 알려주기 때문이다.나는 상담을 하는 동안 그 학생에게 함께 이겨내자는 말을 몇 차례 했다. 좋은 의도를 가진 것이었지만, 그 학생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말이다. 어떤 목적을 전제로 나름 합리적 선택이라고 제안한 나의 말은 이미 ‘이해 가능한’ 수준을 넘어선 학생의 상황에는 전혀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가지고 있는 학생에게 합리적 판단을 해야 하는 대학 선생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여전히 무기력하다.마음이 아픈 학생들이 많아지고 있다. 대학도 이를 인지해서 상담프로그램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학생이 상담프로그램을 직접 찾기는 어려우며 이미 그 단계를 넘어선 학생도 존재한다. 상담프로그램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급격한 출산율 저하로 지방 소멸론이 일상이 된 시대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최근 몇 년 정신이 병든 대학생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당연히 그 병은 어린 시절부터 누적된 고통이 성인이 되어 터진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우리 사회는 사회적 고통을 겪고 있는 학생들에게 공감할 역량을 가지고 있을까.

2023-03-15

졸업 시즌의 교훈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매년 2월은 졸업 시즌이다. 올해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비대면으로 개최되었던 졸업식이 3년 만에 대면으로 열리게 되었다. 우리 대학에서는 본부 졸업식에 이어서 각 단과대학 졸업식이 개최되었다. 학과장 보직을 맡은 나는, 단과대학 졸업식에서 우리 학과 졸업생 학사모의 수술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겨주는 역할을 맡았다.그런데 막상 졸업식에 참석한 우리 학과 학생을 대면하니 어색했다. 학과에 부임하고 곧바로 코로나 국면에 접어들면서 많은 학생을 만나지 못한 까닭이다. 게다가 나는 학사모의 수술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기는 것의 의미를 미처 알지 못해서, 혼란스러운 분위기에서 학생들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고 주어진 임무를 끝냈다. 다른 학과장들이 활짝 웃으며 학사모의 수술을 넘기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막연하게 알 수 있었다.저녁에는 지도하는 학부생 세미나 모임의 졸업생 축하 파티를 했다. 며칠 전 세미나 반장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는 이랬다. 졸업식에 맞추어 세미나 날짜를 잡았다는 것. 2학년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서 졸업하는 선배를 위한 꽃다발을 준비하고, 일부 학생은 축하 케이크를 샀다는 것.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졸업생 중 한 명은 세미나를 오랫동안 했지만, 성실히 참석하지 않는 학생이었고, 다른 한 명은 지난 학기에 처음 들어와서 함께 활동한 기간 자체가 짧았다. 내 기준으로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축하 파티를 준비할 만큼의 교감이 있지 않았다.모임 시작 전 연구실로 찾아온 졸업생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평소 크고 작은 대외활동을 많이 한 학생으로 우리 모임에 충실하지 못했던 이유도 워낙 다양한 활동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그 학생은 우리 세미나에 성실하게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취업을 위한 모임에서는 말하기 어려운 자신의 고민을 진솔하게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그제야 나의 고정된 시선으로 학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우리 세미나는 정해진 책을 읽고 토론을 한다. 어쩌면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전문 비평가가 될 것이 아니라면 이론을 엄밀하게 읽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성적’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책을 읽고 토론하며, 세미나를 마친 후에는 술 한 잔을 나누며 속내를 이야기하는 것이 학생들의 일상에 도움이 되고 있었다. 비록 누군가와 보낸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고민을 공유했다는 사실만으로 학생들은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대학을 졸업한 대부분 학생이 설렘보다는 두려움을 더 많이 느끼는 시대가 되었다. 어딘가에 취업하지 못하고 졸업을 마주한 학생들의 두려움을 얼마만큼이나 짐작할 수 있을까. 끝나지 않는 경쟁의 수레바퀴를 몸으로 체감한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제부터라도 책을 매개로 술 한 잔 나누며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는 세미나를 만들어야겠다. 아니 정확히 말해 나만 생각을 바꾸면 된다.

2023-03-01

애도의 조건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학내 포털의 ‘경조사’ 게시판에는 부고와 결혼 소식이 올라온다. 부서의 구성원이 상을 당하거나 결혼을 하면 부서의 장이 게시판을 통해 알리는 구조다. 경조사의 주체는 정규직 교수와 직원이 제일 많다. 계약직 직원으로 추정되는 경우도 발견되었지만, 비정규직 교수의 사례는 발견하기 어려웠다. 게시판에 글을 올릴 수 있는 경조사 주체의 제한이 없으니, 올리는 사람의 무의식이 작동할 결과일 것이다.게시판에 올라오는 경조사의 주체는 대부분 나와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만큼 애도·축하의 마음이 생겨나기 어렵다. 그렇다면 부서 구성원들만 공유해도 될 법한 경조사를 학내 전체 구성원에게 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학내 구성원의 슬픔을 나누고 애도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기쁨과 슬픔의 경중을 따지기는 어렵지만, 보통 슬픔에 더 많은 사연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인간은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타인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 능력은 쉽게 얻을 수 없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지난 2월 5일은 이태원 참사 100일이 되는 날이었다. 유가족협의회는 100일 추모대회를 광화문광장에서 개최하려 했으나 서울시는 불허하고 경찰까지 동원해서 천막 설치를 막았다. 경찰과의 대립 끝에 시민분향소는 서울광장에 설치되고 추모대회는 간신히 개최되었다. 주디스 버틀러는 “부고는 한 사람의 삶이 공적으로 애도가능한 삶 및 국가적 자기인식의 상징이 되거나 되지 못하게 하는 수단”으로 만드는 방법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버틀러의 논의는 미국에 의해 발생한 전쟁 사상자에 대한 애도가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에 대한 통찰이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경찰은 왜,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를 막는 것일까?작년 10월 29일 이태원에서 목숨을 잃은 159명에 대한 애도는 사적인 동시에 공적인 장으로서 우리의 일상을 다시 인식하는 행위이다. 여전히 우리는 참사가 발생하기 전부터 예견되었음에도, 왜 경찰이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는지 알지 못한다. 이를 밝혀내야 하는 국회의 국정조사특위는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나고 말았다.국가 권력이 사회적 참사 규명을 두려워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 규명을 둘러싼 지난 일들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듯, 국가 권력은 자신들의 기득권 보호를 위해 참사를 우연한 사고로 위장한다. 위장을 위한 지배 권력의 작동과정에서 희생자들의 사회적 고통이 심화하는 공통점도 있다. 이를 어떻게 막아낼 수 있을까?애도의 조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애도는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애도는 현실 인식의 결과이다. 이태원 참사는 사고인가? 참사인가? 각각의 인식론에는 전혀 다른 힘이 개입하고 있다. 그 힘의 정치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해야 한다. 이것이 이루어지고 나야 희생자에 대한 올바른 애도가 가능하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의 시간은 국가 시스템에 질문을 던지는 공적 행위가 이루어진 과정이다.

2023-02-15

마스크를 벗다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지난 1월 30일부터 실내 마스크 착용이 의무에서 권고로 바뀌었다. 2020년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우리를 덮친 이후, 마지막 남은 일상의 제약이 해제된 것이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마스크 착용이 권고로 바뀌어도 착용하겠다는 사람이 많지만, 이제 코로나19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들어가고 있다.2020년 1월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주었을까? 우선 ‘비대면’으로 요약되는 변화는 기술혁신의 시간을 앞당겼다. 대학은 비대면 강의라는 초유의 상황에 직면했으며, 교수들은 ‘줌(ZOOM)’이라는 테크놀로지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학술대회도 학(學)+술(酒)이 만나는 시간이 아니라 각자의 공간에서 줌을 통해 만나는 시간이 되었다.사회적 거리두기와 영업시간 단축으로 자영업자들의 고통이 심화되는 가운데, 자산 가격이 급등한 상황도 빼놓을 수 없다. 코스피는 2020년 3월 저점을 형성한 뒤 급등하여 2021년 초 3천300포인트를 넘었다. 이를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주식시장에 뛰어들어 ‘동학개미’라는 신조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저금리 상황과 맞물리며 이른바 ‘영끌족’이 등장하고 부동산 가격은 급등했다. 이러한 국면에서 유튜브의 경제 관련 채널은 큰 인기를 얻었으며 재테크는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되었다.이제, 다시 일상을 되찾았지만 역사는 거꾸로 흘러가지 않는다. 2022년 우리는 자산 가격의 급락을 경험했지만, 급등하는 물가는 현금 가치가 얼마나 빠르게 떨어질 것인지를 알려주었다. 극단적인 저출산 국면에서 연금 고갈 소식이 연일 들려오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이는 곧 물가 상승률을 상쇄하고 노후 대비도 할 수 있는 자산 증식에 대한 관심이 꺼지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한편 우리는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환경에 대해 숙고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이동이 멈추자 대기가 깨끗해지는 경험은 그간 인류의 진화가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새삼 확인시켜주었다. 어느 순간 매년 경험하는 이상 기후는 인류의 미래가 지금과는 다르게 진행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것만인가? 단절된 삶은 누군가에게는 이득을 주었지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큰 고통을 주었다.코로나 국면을 벗어나고 있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할까? 나의 자산을 관리하고 노후를 준비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일상의 구조를 질문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진화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구조를 이해하고 다른 방식으로 직조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일상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을 인식할 수 있는 힘이다.기후위기와 사회적 약자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아니 늘 우리 주위에 존재하지만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가시화되지 않는 것이다. 코로나 국면에서 학습한 문제 중에서 무엇을 기억해야 할지 고민해보길 바란다. 코로나19 이후, 우리는 변해야 한다.

2023-02-01

예정된 미래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지방대학에서 근무하다보니 출산율에 민감한 편이다. 내가 근무하는 곳은 국가거점국립대학으로 주변의 사립대학에 비해 형편이 조금 나은 편이지만, 조금씩 위기의식이 커지고 있다. 올해부터 우리 대학은 ‘탄력정원제’라는, 경쟁력이 없는 학과의 정원을 인기 있는 학과에 배분하는 제도를 시행한다. 인문대학에 정원 미달인 학과가 있는 까닭에, 입시철이면 경쟁률을 확인하는 버릇이 생겨났다.1인 가구는 세계적 추세이지만 출산율이 1이 안 되는 나라는 OECD 국가 중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출산율 감소는 한국 고유의 문화인 셈이다. 통계에 의하면 2005년 이후 43만 명 이상을 유지하던 연도별 출생아 수는 2016년 40만 명 수준으로 떨어지고 이후 급감하여 2022년 25만 명 수준이 되었다. 출생아 수가 43만 명 이상을 유지하던 시절 태어난 아이가 대학에 입학하는 현재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2016년 출생아가 대학에 입학하는 2035년 이후의 상황은 상상조차 두렵다.출산율의 급격한 감소라는 한국적 문화 현상에 대한 치밀한 분석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과거와 현재를 돌아볼 때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여권의 유력 정치인이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가 정당 내부의 역학관계에 따라 사직하면서 널리 알려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2005년 출범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2005년은 40만대 후반을 유지하던 출생아 수가 43만으로 급격히 떨어지며 위기감이 고조되던 시점이다. 이후 현재까지 단체는 유지되었지만, 출생아 수는 20만대로 진입했다. 이 정도면 진작 해체해야 마땅한 조직이다.2023년에 출생아 수는 어디까지 또 떨어질까? 어쩌면 출생아 수를 늘릴 고민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에 적응할 준비를 하는 편이 현명한 것일 수 있다. 사람과 로봇이 함께 어울릴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점점 심각해지는 ‘고독사’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뭐 하나 쉽게 답하기 어려운 난제이다. 우리는 이런 물음에 답을 찾을 준비가 되어있나.입학정원 감소라는 정해진 미래를 앞두고 대학개혁은 필요하다. 문제는 그 방법이다. 산업 동향과 취업률을 우선 고려하는 것이 현재의 방향성이다. 그런데 한국 대학은 20년 전부터 비슷한 방향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우리의 자화상이다. 인문학은 20년 전에도 지금 현재도 위기다. 산업과 자본의 시각에서 인문학은 언제나 불필요한 지식이었기 때문이다.‘시각’을 바꾸어야 한다. 정치의 수단으로 저출산 문제를 다루어서는 지금까지 그랬듯 문제해결은 불가능하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대학개혁은 눈앞의 산업 동향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에 대한 진단과 앞으로의 변화 방향에 대한 협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가령 앞서 제기한 미래 사회 로봇과 인간의 공존이나 고독사 문제에 대한 질문과 그 해법을 찾는 곳이 대학이 되어야 한다. 시각을 바꿔야 예정된 미래를 조금이라도 웃으며 맞을 수 있을 것이다.

2023-01-18

새해에 다시 읽는 ‘난쏘공’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거리두기 없는 3년 만의 연말로 들떠있는 작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조세희 선생이 세상을 떠나셨다. ‘난쏘공’은 교과서에 수록될 만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지만, 1970년대 산업화 시대 노동자 계급의 소외를 다룬 작품으로 잘못 알려진 감이 있다. 백만 부가 넘게 판매되었지만, ‘난쏘공’에 깃든 작가의 시각은 아직 제대로 공유되지 못했다.‘난쏘공’은 대기업과 법이 지배하는 현실에 노동이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지를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설의 후반부에 노동자가 칼로 대기업 회장을 찌르고 재판을 받는 장면은 법이 지배하는 현실에 대한 격렬한 저항의 메시지다. 전직 대통령의 사면과 수십억의 벌금 면제 과정을 보고 있으니, 1980년대 후반 탈옥수에 의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극단적 선택밖에는 답이 없는 것일까?새해에는 ‘난쏘공’의 주인공이 아닌 ‘신애’에게 주목하고 싶다. 신애는 ‘난쏘공’에서 난장이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나이에게 칼을 휘두를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인물이지만, 속편 ‘시간여행’에서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쉰두 평짜리 아파트로 이사했으며, 냉방기를 사다 놓을 정도로 경제적 풍요를 이루었다. 작가 조세희는 신애라는 인물을 통해 ‘나이-듦’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더 많은 자본을 획득하는 것이 ‘나이-듦’의 전부가 되는 것과 국가가 공정 혹은 합법이란 이름으로 합리화하려는 것의 정체를 인식하고 경계할 필요가 있겠다.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처럼 긴밀하게 연결된다. 작가는 ‘행복은 마음의 상태이기 때문에 달수도 없는 것이다. 어른들은 그것을 달아 나타내기 위해 지수화의 기술 개발을 꾀했고 결국은 마음의 상태를 몸무게처럼 달아 킬로그램으로 적고 있다. 그래서 난장이의 이야기를 썼다.’고 말한 바 있다.모든 것을 수치화하고 비교하는 우리의 마음을 새해에는 조금 더 들여다보고 개선할 방법을 찾아야겠다. 거창한 이념이나 목표가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과 더 많이 만나고 이야기하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정신 건강이 안 좋고 무엇인가에 쫓기듯 생활하는 대학생들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조세희 작가가 ‘난쏘공’에서 읽어 낸 대한민국의 현실이 시간이 지나며 극단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 같다.이런 의미에서 올해에는 자본을 얻는데 별 도움이 안 되더라도, 조세희 선생의 ‘난쏘공’과 같은 고전을 좀 더 읽고, 세상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길 기원한다. 이것이 조세희 선생이 ‘난쏘공’ 이후 소설 창작을 중단하고 서북 탄광에서 광부들의 사진을 찍어 기록해둔 이유일 것이다. 세상의 변화는 눈부시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그늘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그늘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넓고 깊어지고 있다. 빛 속으로 들어가려 아등바등하기보다 그늘진 곳에서 사람들과 함께 쉬며 다른 내일을 기약하는 2023년이 되길 희망한다.

2023-01-04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윤석열 정부가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핵심으로 하는 ‘문재인 케어’를 건보 재정을 파탄내는 포퓰리즘 정책으로 규정하며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정부의 시각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다. 정확한 팩트를 확인하고 따지는 일은 중요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이번 논란의 본질이 아닐 수 있다.돈 때문에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의 수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는 명제는 반론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돌아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코로나19’ 가 한창 유행하던 당시에 미국의 코로나 검사 비용은 400만 원에 육박했다고 한다. 정부가 건강보험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에 맡긴 탓이다. 그러니까 세계 최강 미국에서 국가가 전 국민을 대상으로 의료 보장을 해주는 것은 비효율적인 행위일 뿐이다.미국의 사례를 따라갈 것이 아니라면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OECD 수준으로 높이는 것은 당연한 순서다. 이 과정에서 생겨나는 문제는 적절한 해결책을 찾아 개선하면 될 일이다. 보장성 강화 정책에 부작용이 있다고 물줄기를 바꾸자는 것은 자본과 경쟁의 논리, 즉 시장 중심의 사고방식이 국민의 건강을 대상으로도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할 뿐이다.최근 집안 어른이 갑자기 쓰러져서 간병비로 하루에 최소 13만원 이상을 지급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거동이 어렵거나 대소변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면 일일 간병비는 더 올라간다. 간병비로 한 달에 400만원을 감당할 수 있는 집이 얼마나 있을까. 간병비를 부담하기 어려운 집에서 환자가 발생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날까? 알다시피 간병비 부담을 줄이기 위한 공동 간병인 제도는 문재인 케어의 대표적인 성과이다.나는 정부가 폐기하려는 문재인 케어의 구체적인 항목을 알지 못한다. 다만,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결국 죽음을 맞는 사람이 생기지 않게 국가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국가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느냐에 따라 평범한 국민의 삶과 죽음의 경계가 결정된다. 다시 묻자. 가야만 하는 길이 비바람으로 엉망이 되었다고 목적지가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것이 올바른 선택인가? 처음부터 다른 목적지로 갈 마음이 있었던 것 아닌가?지난 16일은 ‘이태원 참사’ 49재였다. 여전히 여당 일각에서는 그날의 참사를 이태원에 나간 대학생 아이들을 말리지 못한 부모 책임으로 돌리려는 시각에 존재한다. 100명이 넘는 시민이 서울의 한복판에서 죽었지만, 시스템에 대한 성찰은 조금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나는 이태원 참사에 대한 정부의 태도와 건강보험 보장성을 폐기하려는 시각이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2022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2023년은 경기침체가 본격화되며 유례없이 힘든 한 해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팽배하다. 새해에는 부디 각개전투가 아니라 공동의 전선이 마련될 수 있기를! 국가에 기대하지 말고, 내 가족의 건강과 함께 우리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새해가 되길 기원한다.

2022-12-21

사교육과 학벌사회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이라 부를 만큼, 빠르고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 세계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비록 IMF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이후 대한민국은 위기를 넘어서고 첨단기술을 소유한 강국으로 탈바꿈했다. 삶의 질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향상된 것은 당연한 결과다.모든 것이 바뀐 것처럼 보이지만,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바뀌지 않은 것도 존재한다. 바로 사교육이다. 알다시피 대한민국은 1970년대부터 고교평준화정책, 과외 금지정책, 교육방송 강화, 선행학습 금지 등 다양한 정책과 규제로 사교육 시장의 팽창을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학벌주의’로 요약되는 지배 이념을 조금도 개선하지 못한 까닭이다.첫째 아이가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아내와 돌봄 공백에 대해 이야기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유치원은 오후 6시까지 아이 돌봄을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은 오후 1시에 아이들을 귀가시킨다. 방과 후 학습이 있다지만 맞벌이에 아이가 2명이 있어야 간신히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우리 집 같은 외벌이 가정은 조금 나은 형편이지만, 누구의 도움조차 받을 수 없는 맞벌이 부부는 아이가 하교하는 1시부터 6시까지, 학원 시간을 빈틈없이 맞추어야 한다.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여성의 경력단절이 일어나는 이유다.돌봄 단절을 해결하기 위해 사교육을 활용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일단은 중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좀 복잡하다. 돌봄 공백을 해결하기 위한 선택이라지만 아이에게 다양한 경험을 시켜서 좀 더 경쟁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려는 부모의 욕망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아이를 경쟁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려는 욕망이 나쁘다는 소리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경쟁력의 실체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가 한 달에 100만원에 육박하는 사교육비를 통해 얻게 되는 경쟁력이란 무엇일까?2020년 기준 중소기업 월평균소득이 259만원이다. 지역대학 취업자의 대다수가 중소기업인 점을 감안하면 지역대학 출신에게 경쟁력 있는 아이를 키우는 일이란 불가능에 가깝다. 맞벌이가 필수인 시대가 된 이유이다. 새삼스러울 것 없다고? 대한민국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학벌사회가 새롭지는 않지만, 우리는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부의 양극화가 심화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는 곧 아이의 운명이 태어나면서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2016년 학벌 사회의 문제점을 고발해 온 시민단체 ‘학벌없는사회’는 자진해산하며, 학벌은 여전히 교육 문제의 핵심이지만, 학벌이 곧 권력을 보장하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의 사교육 시장은 뜨겁고 학벌주의는 공고하다. 사교육에 대한 거부감으로 아이를 대안학교 보냈다가 대학입시를 앞두고 인문계로 전학시킨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사교육 시장의 바깥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학벌 중심=서울 중심의 카르텔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2022-12-07

생각하지 못하는 아이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큰 아이가 인라인 스케이트를 배우기 시작하며 주말에는 아이와 함께 경기장에 나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경기장에 온 부모는 자신의 아이가 스케이트를 타는 것을 보며 90분의 강습 시간을 기다린다. 수업은 상급·중급·초급으로 구분해서 진행되지만, 초급반의 경우 아이들 실력 차이가 제법 난다. 이제 처음 강습을 받기 시작한 아이와 스케이트를 배운지 두 달이 넘은 아이는 같은 초급반이지만, 도저히 함께 배우기 어려울 정도의 실력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문제는 이런 구조에서 생겨났다. 처음 배우는 아이들은 자주 넘어진다. 하지만 초급반 강사는 다른 아이들을 지도하느라 넘어지는 아이 한 명을 챙겨줄 수가 없다. 보통의 부모는 넘어진 아이를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보지만, 일부의 부모는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경기장 안으로 달려온다. 90분의 시간은 귀한 우리 아이를 향한 부모의 마음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시간이다. 그 시간이 불편해진 나는 경기장 주변을 달리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지만, 아이의 요청에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우기 어렵다.얼마 전 학과의 학생회장과 이야기하다 학생회비 사용처를 묻는 학부모의 전화를 자주 받는다는 말을 들었다. 학생회비의 사용처는 투명하게 학생들에게 공개하지만, 학생-부모 사이의 소통이 제대로 안 되자 답답해진 부모가 학생회장에게 직접 연락을 한 것이다. 이 정도는 귀여운 상황이다. 학생회 활동의 적절성까지 따지는 부모가 있다니, 이쯤이면 자식 사랑이 남다르다고 생각하며 넘어가기에는 석연치 않다.2010년대 중반, 교수에게 아이의 성적 이의신청을 한 엄마 이야기를 듣고 크게 놀란 적이 있다. 좀 더 시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그런 부모는 존재한다. 아니 이제 부모는 대학에서 아이가 겪는 크고 작은 문제를 직접 나서서 해결해주는 존재로 자리 잡았다. 중·고등학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부모가 직접 대입을 설계하고 자식이 따라가지 못할 때 생기는 갈등은 너무 많아서 열거하기도 힘들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낙오한 아이들은 상처받고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된다.왜, 넘어진 아이가 스스로 일어나게 지켜보지 못하는 것일까? 왜, 성인이 된 자식이 겪는 어려움까지 해결해주려고 하는 걸까?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서 원인을 분석하기 쉽지 않다. 일단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입시 위주의 대한민국 교육이 만든 결과라는 점이다. ‘공부’하기도 부족한 아이를 위해 공부 이외의 일은 아예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모의 열정(?)을 온전히 부모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지만, 그들은 적지 않은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과학기술의 시대에는 공부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요즘 대학이 강조하는 ‘플립러닝’이나 문제해결기반학습(PBL)은 이런 문제의식을 반영한 수업 방법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스스로 생각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갑자기 생겨나지 않는다. 우리 아이를 위한 길이 무엇인지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2022-11-23

국가란 무엇인가?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또, 다시 상상하기 어려운 참사가 발생했다. 10월 29일 밤, 이태원에서 안타까운 목숨을 잃은 156명 중 10~20대가 116명이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8년, 당시 고등학생이던 아이들은 20대 중반 청년이 되어 다시 비극을 맞게 된 것이다. 8년 전 참사를 겪으며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했던 국가는 왜, 다시 이런 사태를 막지 못했을까? 참담한 마음이 너무 커서 애도를 표하기조차 어려운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당일 밤,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는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서울 한복판에 늘어선 구급차와 길거리에 누운 사람들의 모습은 그로테스크했다. 이후 보도를 종합하면 참사가 발생하기 이전부터 시민들의 신고가 이어졌지만, 무슨 이유인지 경찰은 신고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배 안에 갇혀 있던 아이들을 구하지 못하고 주변을 빙빙 돌기만 하던 해경의 모습이 겹쳐지는 대목이다.세월호 참사 당시 대통령의 행적에서 배운 탓일까? 참사 발생 이후에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정부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당일 밤부터 대통령이 주재한 대책회의가 열렸으며 희생자를 위한 지원 대책이 발표되었다. 용산구가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고 국가 애도기간이 지정되었다. 대통령은 국가 애도기간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우리는 국가가 시민의 안전을 지켜줄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믿음을 전제로 시민들은 국가가 자신을 통제하는 것에 따른다. 경제적 이익이나 권력자의 안위 따위가 아니라 시민의 안전이 우선이라는 사실은 상식에 속한다. 문제는 이런 기본적인 인지 능력을 갖추지 못한 자들이 권력을 손에 넣을 때 발생한다. 요컨대 8년 동안 조금도 나아지지 못한 대한민국의 현실은 권력자들의 인식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용산구청장과 행정안전부 장관, 국무총리 등의 적절하지 못한 발언에 대한 많은 비판이 이어졌다. 그들은 곧 사과했지만, 그 사과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말은 자신의 평소 사고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 글은 정제할 시간이 있지만, 말은 무의식이 매개 없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참사 초기 이번 사태의 희생자를 ‘이태원 사고 사망자’로 명명한 것은, 이번 참사를 바라보는 정부의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법적인 주최가 없다는 이유로 중립적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정부의 (무)의식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놀러 나간 사람들에게 정부가 장례비와 위로금을 지원하는 것에 대한 반대 여론이 조직적으로 조성되고 있다. 법을 빌미로 참사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시각이 정부와 대중들 사이에서 폭넓게 공유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노동현장에서 청년들의 억울한 죽음이 이어지고 있지만 ‘중대재해 처벌법’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대기업과 자본의 이익을 우선하기 때문이다. 8년 전 세월호 참사 당시에도 동일했다. 이제 다시, 시민들의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2022-11-09

기술과 인간의 공존에 대한 물음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지난 15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의 카카오 데이터 센터 화재로 관련 업무가 갑작스럽게 중지된 시간, 나는 줌(ZOOM)으로 열린 회의와 학술대회에 참석하는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간사와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학술대회를 진행하던 중 갑자기 메시지 전송이 되지 않았다. 최근 스마트 폰의 이상 징후가 자주 느껴지던 상황이라 급하게 데스크톱으로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낑낑대는 동안 화재로 인한 업무 마비 가능성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이전에도 데이터 센터 화재로 일상이 정지되는 순간이 있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2018년 11월, 서울 서대문구 KT 아현지사 화재로 일대의 망을 사용하는 기기들이 장애를 일으켰던 경우이다. 당시에도 보상 문제가 대두되고 데이터 센터의 중요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당시의 기억을 잊고 공기처럼 데이터가 존재할 것이라 믿으며 살아왔다.이번 사태는 이전에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그쳤던 불편함이 오래 지속되었다는 점, 카카오라는 플랫폼이 문제의 중심에 서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카카오의 은행과 모빌리티 등은 대부분 24시간 안에 복구되었지만, 메일은 사태가 나고 4일이 지나서야 복구되었다. 다음 메일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다른 메일로 우회하거나 중요한 메일을 수신하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정부가 이번 사태를 국가 기반 통신망의 위기로 규정하며 카카오의 독점을 문제 삼고 나선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어딘가 어색하다. 카카오라는 사기업과 국가 통신망이라는 공공성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IT 기술의 진보가 더욱 가속화될 미래에 국가의 역할은 거대 기업의 독점을 방지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이번 일을 겪으며 첨단 기술의 이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언제든 이번 사태가 반복될 수 있다는 점에서 예민하게 들여다볼 문제이다.거의 모든 사람이 갑작스런 불편함을 겪으며 시스템의 문제를 떠올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첨단 기술의 등장은 언제나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한다. 카카오가 상징하는 IT 기술의 진보는 일상의 근본을 바꿔놓았다. 터치 몇 번으로 은행 업무를 마치고 쇼핑을 하거나 택시를 호출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언제나 매끄럽고 흔들림 없이 진행될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이번 사태가 보여주는 바, 그 믿음은 사실상 허구에 가깝다. 단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기술의 진보를 만들고 기계가 매끄럽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의 개입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기술의 미래에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카카오 플랫폼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산업의 특징도 바로 ‘인간’의 자리가 점점 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혁신으로 생각했다. 기술의 미래에 인간이 개입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 생각한 까닭이다.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는 어떻게 가능할지,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설정해야 하는 시점이다.

2022-10-26

인플레이션의 시대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올해 2월 시작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8개월 넘게 지속되고 있다. 애초의 예상과 다르게 우크라이나의 선전이 이어지며, 러시아의 핵 사용에 대한 공포까지 감지되는 상황이다. 한편 지난 8개월 우리는 유례없는 인플레이션을 맞이해야만 했다.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는 8%를 상회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미 연준은 올해 기준금리를 연속해서 3번이나 0.75%를 올렸다. 유럽의 소비자물가지수는 에너지 대란의 영향으로 마침내 10%를 넘겼고, 한국의 물가도 30년 만의 최고치를 달성했으며 이에 따라 한국은행도 전례 없는 금리 인상을 했다. 전 세계가 역사적인 고물가, 고금리 시대를 맞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전쟁은 경제 위기를 가져온다. 지금의 경제 위기는 전 세계가 펼친 ‘코로나19’와의 전쟁,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이 겹치며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세계가 자국 중심주의로 회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소련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러시아의 광기는 두말할 나위가 없으며, 미국은 자국의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급격하게 올리는 과정에서 세계적인 경기침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무시하고 있다. 나아가 미국은 자국 기업이 해외에 공장을 건설하는 것을 제한하고 반도체 등 주요 산업의 제품을 중국으로 판매하지 못하는 법안을 공표했다.글로벌 시대에 자국 중심주의가 회귀하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의 일상에서 이런 변화는 자산 가격의 급락으로 표현된다. 불과 2년 전 코로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 세계가 살포한 현금으로 우리는 유동성 잔치를 즐겼다. 잔치에 탑승하지 못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벼락거지’라는 말이 유행처럼 떠돌기도 했다. 이제는 다시 주식에서 예금으로 자금이 이동하고 있다. 주식과 부동산 가격 하락 뉴스가 매일 들려오며 개미 투자자들의 미래도 암흑 속에 쌓여있다.자국 중심주의로의 회귀는 경제 위기를 유동성으로 해소하려는 현대 자본주의의 속성에서 생겨난 것이다. 2016년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결정과 2017년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펼친 미국 중심의 정책은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다는 목적을 공유했다. 처음부터 ‘공동의 이익’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코로나 위기를 겪으며 미국이 살포한 달러로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이 올 수 있다는 경고가 있었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발등에 떨어진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어쩌면 지금의 상황은 위기가 닥치면 막대한 유동성으로 극복하려는 정책이 어떤 한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막대한 유동성이 곧 현금 살포를 의미하는 상황에서 달러 패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자국 중심주의는 곧 다른 국가들의 더 큰 위기를 초래한다. 이런 점에서 세계 평화를 위해 만들어진 UN이 미국의 금리 인상 자제를 촉구한 것은 상징적이다. 우리는, 그리고 세계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차분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2022-10-12

지방에서 산다는 것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내가 사는 혁신도시는 전형적인 계획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전체 지역이 아파트 단지별로 구획되고 단지와 맞닿는 상가에는 마트와 음식점, 병원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차로 10분만 나가면 거짓말처럼 넓은 들판과 산이 펼쳐진다. 젊은 사람들은 혁신도시에서 살려고 하지만 혁신도시의 아파트 가격은 2년 만에 100%가 급등해버려서 이제는 쉽지 않은 일이 되어 버렸다.분할된 공간은 도시의 경제 양극화를 의미한다. 혁신도시에는 (수도권에 비하면 한참 저렴한 가격이지만) 호가 10억이 넘는 아파트에 살며 외제 차를 운전하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지만, 구도심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규모의 아파트도 많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도시의 비어 있는 공간에 아파트를 올리는 작업이 진행 중이고, 그 아파트가 완공되면 경제 양극화는 더욱 심화 될 것이다.올해 여름 아이들을 데리고 잠자리를 잡으러 다녔다. 근처의 어느 공원을 가도 잠자리 떼를 쉽게 발견할 수 있으니 아이들도 잠자리 잡기가 어렵지 않은 환경이다. 매달 보름달을 마치 망원경으로 당겨온 듯한 크기로 관찰하는 즐거움도 여전하다. 내년에는 시에서 텃밭 분양을 받을 계획도 세웠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아이들을 언제 서울로 유학 보낼지 고민하고 있다. 지방의 30만 도시에서 아이 키우기에 대한 불안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자 엄마와 함께 수도권으로 올라가서 주말 부부가 된 동료 교수들의 이야기도 들려온다. 나 같은 수도권 출신들에게는 공간의 분할만이 아니라 마음의 분할도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지난 24일 서울에서 ‘기후정의 행진’이 있었다. 주최 측 추산 3만5천명이 운집한 집회에는 청년, 노동, 장애, 농민 등의 단체가 동참했다. 한때 ‘자연보호’라는 추상적 명제로 기후위기를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기후위기는 불평등과 착취의 문제로 우리의 삶에 깃들어 있다. 지난 8월 기록적인 폭우로 반지하에 살던 사람들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았던 것처럼 기후위기는 사회의 가장 약한 사람들을 먼저 공격한다.기후위기가 일국적인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위기라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있다. 불과 1년 전 대홍수로 큰 위기를 겪었던 유럽은 올해에는 전례 없는 폭염을 견뎌야 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파키스탄에서는 40일간 비가 멈추지 않고 내려서 국토의 절반 이상이 물에 잠기고 1천5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기후위기는 경제 성장 중심의 정책을 펼쳐 온 국가 권력과 나의 신체와 욕망을 물질을 좇는 것으로 귀속시킨 주체에 대한 경고이다. 기후위기는 효율성과 편리성, 그리고 자산 증식만을 추구했던 우리 삶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기후위기가 포괄하는 삶의 습성을 인식하고 변화의 필요성을 공유하는 것이 당장 필요하다. 지방에서 산다는 것은, 자기 분열의 메커니즘을 뚜렷이 인식하는 과정이다. 이 분열을 어떻게 봉합할 것인가? 기후위기가 삶에 파고든 시점에서 실체 있는 고민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 말이다.

2022-09-28

합계 출산율 0.75의 시대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추석을 맞아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부모님 집을 방문하며 아이들을 데리고 대형 쇼핑몰을 찾았다. 반려동물 출입이 자유로운 쇼핑몰에는 수많은 종류의 강아지와 각양각색의 반려견 유모차가 즐비했다. 물론 아이들도 적지 않게 보였지만, 반려견과 반려견 유모차의 수도 만만치 않았다. 대기업이 만든 복합 쇼핑몰에서 아이와 반려동물이 뒤엉킨 장면은 기괴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생명으로 동물을 인식하는 것이 보편화 된 시대이다. 도나 해러웨이는 ‘반려종 선언’에서 반려동물과 인간의 소통은 인간 중심주의를 극복한 새로운 인간, 즉 포스트 휴먼의 탄생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반려동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통계청은 지난 달 24일 2022년 2분기 합계출산율이 0.75라고 발표했다. 2018년 대한민국의 합계출산율이 처음으로 1 아래로 떨어졌고, 이로 인한 위기감이 팽배했지만 이후에도 출산율은 급격하게 떨어지기만 한 것이다. 지난 6월 출생아 수는 통계청이 월간 출생아수를 발표한 1981년 6월 이후 가장 최소인 1만8천830명이며, OECD 국가 평균 합계출산율이 약 1.6명인 것을 고려하면 대한민국이 얼마나 빠르게 아이를 낳지 않는 국가로 변화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더욱 심각한 것은 출산율 저하 문제를 우리 모두 알고 있으며,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오랜 시간 투입했지만 반등의 여지없이 아이를 낳지 않는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소비’의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내가 쇼핑몰에서 느낀 기괴함의 정체도 바로 이것이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유모차에 태워진 잔뜩 멋을 낸 반려견과 그 주인의 모습에서 아이를 위해서라면 빚을 내서라도 원하는 것을 해주는 부모를 떠올리는 것은 오독일까? 소비 자본주의 시대에 돈이 사랑을 대리한다는 의식이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정작 아이 혹은 반려동물과 어떻게 깊게 교감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돌봄에 수반되는 헌신이 사회적 관계의 재구성으로 나아가기 어렵다는 말이다.최근 오픈 서베이가 발표한 ‘Z세대 트렌드 리포트’에 따르면 한국의 Z세대 62.7%가 행복을 위해 소득과 재산이 가장 중요하다고 답한 반면, 미국의 Z세대는 인간관계와 우정을 꼽았다. 출산이 파산의 지름길이라는 Z세대의 인식을 단적으로 확인시켜준 결과이다. 개인이 체감하는 사회적 관계 혹은 가치를 재구성해야 합계 출산율의 반등을 이룰 수 있다.그 시작은 국가와 사회가 아이를 부모와 함께 키운다는 의식을 젊은 세대가 가질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함께 살아가는 대상이 꼭 구별 짓기를 통해서야 주체성을 드러내는 ‘사람’일 필요도 없다. 이질적인 대상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 문화가 형성될 때 출산율의 반등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돌봄은 이질적인 두 주체가 연결되는 과정이자 새로운 세상을 함께 가시화하는 시간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2022-09-14

폭력의 구조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뒤늦게 넷플릭스에서 ‘소년심판’을 보았다. 자식을 잃었지만 가해자가 촉법소년이란 이유로 제대로 처벌되지 못한 아픔을 간직한 심은석 판사와 소년원 출신 차태주 판사를 중심으로 몇 개의 에피소드가 속도감 있게 전개되어서 총 10회를 정주행하고 말았다. 드라마는 소년들의 불행한 환경에 초점을 맞춰 옹호하거나 그들의 범죄를 파고들어 촉법소년 연령을 낮춰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지도 않는다.‘소년심판’은 우리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라는 사실을 전달한다. 차태주를 교화하여 판사가 되는 것에 결정적 역할을 한 강원중 부장판사는 ‘문광고 시험지 유출사건’에 아들이 관련되어 본인의 정계 진출에 걸림돌이 되자 사건을 편파적으로 진행한다. ‘무면허 뺑소니’ 사건에서 백미주는 몰카 사건의 피해자이지만 무면허 뺑소니 방조 혐의에 자유롭지 못하다. 곽도석은 백미주를 위해 몰카 사건을 해결하려다 죽음에 이른 피해자이지만, 무면허 운전으로 누군가를 죽게 만든 가해자이기도 하다.한병철은 ‘폭력의 위상학’에서 오늘날 폭력은 가시성에서 비가시성으로, 실재성에서 잠재성으로, 육체성에서 심리성으로 이동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현재의 폭력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전이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소년심판’의 강원중과 그의 아들이 교육 시스템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된 배경에는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나와 내 주변을 지키려는 욕망이 놓여있다. 그 절박한 목적 앞에 누군가의 고통은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지난 21일 경기도 수원에 사는 세 모녀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자살하는 비극적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2014년 발생한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과 판박이로 우리 사회의 복지 시스템이 갖는 허점을 보여준다고 한다. 왜 이런 비극은 되풀이될까? 복지 시스템 미비를 거론하는 것은 문제의 절반만 바라보는 것이다. 가령 완벽한 복지 시스템을 구축하면 이런 비극은 발생하지 않을까?안타깝게도 비극은 되풀이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폭력은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시스템은 인간의 내면을 장악하여 자신을 폭력의 가해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의 주춧돌인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 사회의 양극화는 고정된다. 이런 구조에서 좀 더 나은 환경에 올라타고 싶다는 욕망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이 공동의 목표가 될 때, 자본의 궤도에 올라타지 못한 사람들은 혐오의 시선을 견디다 자신을 파괴할 수 있다.‘소년심판’의 소년들은 가난한 집안 혹은 부유한 부모의 철저한 외면 속에서 성장했다. 후자의 부모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과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자식을 외면한 부류이다. 그래서 소년들은 외친다. 부모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고. 환경이 범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사회적 폭력의 가해자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죽음 앞에 월세를 내지 못해서 죄송한 마음이 드는, 바로 그 내면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2022-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