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가 인라인 스케이트를 배우기 시작하며 주말에는 아이와 함께 경기장에 나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경기장에 온 부모는 자신의 아이가 스케이트를 타는 것을 보며 90분의 강습 시간을 기다린다. 수업은 상급·중급·초급으로 구분해서 진행되지만, 초급반의 경우 아이들 실력 차이가 제법 난다. 이제 처음 강습을 받기 시작한 아이와 스케이트를 배운지 두 달이 넘은 아이는 같은 초급반이지만, 도저히 함께 배우기 어려울 정도의 실력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구조에서 생겨났다. 처음 배우는 아이들은 자주 넘어진다. 하지만 초급반 강사는 다른 아이들을 지도하느라 넘어지는 아이 한 명을 챙겨줄 수가 없다. 보통의 부모는 넘어진 아이를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보지만, 일부의 부모는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경기장 안으로 달려온다. 90분의 시간은 귀한 우리 아이를 향한 부모의 마음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시간이다. 그 시간이 불편해진 나는 경기장 주변을 달리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지만, 아이의 요청에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우기 어렵다.
얼마 전 학과의 학생회장과 이야기하다 학생회비 사용처를 묻는 학부모의 전화를 자주 받는다는 말을 들었다. 학생회비의 사용처는 투명하게 학생들에게 공개하지만, 학생-부모 사이의 소통이 제대로 안 되자 답답해진 부모가 학생회장에게 직접 연락을 한 것이다. 이 정도는 귀여운 상황이다. 학생회 활동의 적절성까지 따지는 부모가 있다니, 이쯤이면 자식 사랑이 남다르다고 생각하며 넘어가기에는 석연치 않다.
2010년대 중반, 교수에게 아이의 성적 이의신청을 한 엄마 이야기를 듣고 크게 놀란 적이 있다. 좀 더 시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그런 부모는 존재한다. 아니 이제 부모는 대학에서 아이가 겪는 크고 작은 문제를 직접 나서서 해결해주는 존재로 자리 잡았다. 중·고등학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부모가 직접 대입을 설계하고 자식이 따라가지 못할 때 생기는 갈등은 너무 많아서 열거하기도 힘들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낙오한 아이들은 상처받고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된다.
왜, 넘어진 아이가 스스로 일어나게 지켜보지 못하는 것일까? 왜, 성인이 된 자식이 겪는 어려움까지 해결해주려고 하는 걸까?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서 원인을 분석하기 쉽지 않다. 일단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입시 위주의 대한민국 교육이 만든 결과라는 점이다. ‘공부’하기도 부족한 아이를 위해 공부 이외의 일은 아예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모의 열정(?)을 온전히 부모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지만, 그들은 적지 않은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의 시대에는 공부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요즘 대학이 강조하는 ‘플립러닝’이나 문제해결기반학습(PBL)은 이런 문제의식을 반영한 수업 방법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스스로 생각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갑자기 생겨나지 않는다. 우리 아이를 위한 길이 무엇인지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