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형평운동 100주년이 되었다. 1923년 4월 25일 진주에서 창립한 형평사는 12년 동안 ‘백정’에 대한 차별철폐와 자강을 위한 운동에 힘썼다. 형평운동 100주년을 맞아 진주에서는 기념 학술대회 및 전시회가 개최되었지만, 형평운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매우 낮은 편이다.
‘3·1 운동’과 같은 민족해방 운동이나 ‘5·18 민주화 운동’과 같은 민주화 운동과 결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민족독립 운동이나 민주화 운동은 여전히 진행 중인 사건이며 이에 대한 국가적 관심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반면 형평운동이 내건 신분제 폐지는 이미 지난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다고 인식하기 쉽다.
법적인 신분제 폐지가 일상에서의 차별까지 없애지 못하는 상황은 100년 전에도 유사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공식적인 신분제가 폐지되었지만, 백정에 대한 실질적 차별은 지속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본은 백정을 제도권으로 편입시켰지만, 백정들은 경제적 수탈로 받아들였다. 민간에서의 신분 차별이 이어져 왔음은 물론이다. 요컨대 1923년 형평사 창립은 사회적 소수자인 백정이 자신들에 대한 차별 철폐와 인간적 존엄을 지키기 위한 인권 운동의 시발점이었다.
형평운동을 인권의 관점에서 재정의한다면, 당장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장애인이나 성소수자 등에 대한 차별이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차별금지법’조차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경제 양극화에 따른 새로운 신분제의 출현을 목격하고 있다. 2015년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된 ‘흙수저/금수저’와 같은 신조어는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1920년대 반형평운동에 중심에 농민이 있다는 사실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양반에게 차별받아 온 농민이 백정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차별을 되돌려주는 상황은 일견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백래쉬를 겹쳐 읽으면 논리 구조가 일치한다.
차별받아 온 존재들이 자신의 인권을 지키고자 일어날 때, 기존의 문화구조에 익숙한 주체들의 혐오와 차별의 움직임이 생겨난다는 점에서 100년을 초월하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류의 본령이다’로 시작하는 조선형평사 주지문(主旨文)은, 안타깝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비록 백정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못하는 현실과 백래쉬 현상이 웅변하듯 한국 자본주의 100년 역사의 본질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희망을 읽어낼 수 있다면 진주를 전국에 알린 ‘어른 김장하’ 선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형평기념사업회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선생은 형평운동 70주년을 기념하며 ‘진정한 개혁과 민주화를 앞당겨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일에 형평정신 곧 평등사상을 바탕삼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형평운동 100주년을 맞아 다시 한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어른 김장하’에 대한 전국적 관심은 우리의 무의식에 있는 평등에 대한 그리움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