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내 포털의 ‘경조사’ 게시판에는 부고와 결혼 소식이 올라온다. 부서의 구성원이 상을 당하거나 결혼을 하면 부서의 장이 게시판을 통해 알리는 구조다. 경조사의 주체는 정규직 교수와 직원이 제일 많다. 계약직 직원으로 추정되는 경우도 발견되었지만, 비정규직 교수의 사례는 발견하기 어려웠다. 게시판에 글을 올릴 수 있는 경조사 주체의 제한이 없으니, 올리는 사람의 무의식이 작동할 결과일 것이다.
게시판에 올라오는 경조사의 주체는 대부분 나와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만큼 애도·축하의 마음이 생겨나기 어렵다. 그렇다면 부서 구성원들만 공유해도 될 법한 경조사를 학내 전체 구성원에게 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학내 구성원의 슬픔을 나누고 애도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기쁨과 슬픔의 경중을 따지기는 어렵지만, 보통 슬픔에 더 많은 사연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인간은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타인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 능력은 쉽게 얻을 수 없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5일은 이태원 참사 100일이 되는 날이었다. 유가족협의회는 100일 추모대회를 광화문광장에서 개최하려 했으나 서울시는 불허하고 경찰까지 동원해서 천막 설치를 막았다. 경찰과의 대립 끝에 시민분향소는 서울광장에 설치되고 추모대회는 간신히 개최되었다. 주디스 버틀러는 “부고는 한 사람의 삶이 공적으로 애도가능한 삶 및 국가적 자기인식의 상징이 되거나 되지 못하게 하는 수단”으로 만드는 방법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버틀러의 논의는 미국에 의해 발생한 전쟁 사상자에 대한 애도가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에 대한 통찰이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경찰은 왜,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를 막는 것일까?
작년 10월 29일 이태원에서 목숨을 잃은 159명에 대한 애도는 사적인 동시에 공적인 장으로서 우리의 일상을 다시 인식하는 행위이다. 여전히 우리는 참사가 발생하기 전부터 예견되었음에도, 왜 경찰이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는지 알지 못한다. 이를 밝혀내야 하는 국회의 국정조사특위는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나고 말았다.
국가 권력이 사회적 참사 규명을 두려워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 규명을 둘러싼 지난 일들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듯, 국가 권력은 자신들의 기득권 보호를 위해 참사를 우연한 사고로 위장한다. 위장을 위한 지배 권력의 작동과정에서 희생자들의 사회적 고통이 심화하는 공통점도 있다. 이를 어떻게 막아낼 수 있을까?
애도의 조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애도는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애도는 현실 인식의 결과이다. 이태원 참사는 사고인가? 참사인가? 각각의 인식론에는 전혀 다른 힘이 개입하고 있다. 그 힘의 정치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해야 한다. 이것이 이루어지고 나야 희생자에 대한 올바른 애도가 가능하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의 시간은 국가 시스템에 질문을 던지는 공적 행위가 이루어진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