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수업의 학기 말은 고되다. 35명 수강생이 쓴 글을 읽고 대면 피드백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 1명에 30분. 단순계산으로 17.5시간, 2학점 수업의 8주 분량이다. 서면 피드백으로 대체할 수도 있지만, 학생과 직접 만나서야 가능한 질문을 포기할 수 없어서 대면 피드백을 고집하고 있다. 이번 학기에는 에세이와 칼럼이 첨삭 대상이다.
문제는 에세이였다. 예상대로 대학 신입생이 쓴 에세이의 상당수는 대학 입시 과정에서 느낀 고민과 단상으로 가득했다. 부모님과의 갈등, 국문과에 대한 주변의 조소 등 20년 전 내가 대학 입시를 할 때와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었다. 30분 단위의 상담에 피로감이 몰려오던 늦은 오후. 어느 여학생 순서가 되었다. 여학생의 글은 에세이와 일기의 경계에서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하고 있었다. 한 문장에 눈이 갔다. ‘고등학교 때까진 성적이 제일 우선이다. 일단 공부부터 하고 대학교에 들어가서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라.’ 이 문장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딸에게 건넨 부모의 말이었다. 학생은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 했고, 꿈을 포기시키고 진로를 정하라는 부모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이 문장은 나도 고등학교 시절 숱하게 들은 말이다. 여학생의 부모님도 고등학교 시절 적지 않게 들었을 것이다. 나는 이른바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이 통하던 마지막 세대이다. 고등학교 시절 막노동꾼 서울대 수석합격자의 수기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1996)를 읽으며 공부에 대한 열의(?)를 되살리던 기억이 뚜렷하다. 그러니까 그 시절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에 입학하면 성공신화를 쓸 가능성이 있었다. 2022년 현재는 어떤가? 등록금을 걱정해야 하는 학생과 부모의 스펙으로 상당한 이력을 채운 학생의 미래가 갖는 거리감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우리 모두 아는 바와 같이 개천에서 더이상 용은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많은 부모가 고등학교에서는 공부만 하고 대학에 가서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명백한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현실적인 이유로 공부해서 대학에 가는 것이 아이의 미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일 테다. 꼭 명문대가 아니라도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라는 의식이 여전히 작동하는 까닭이다. 어째서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 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지만, 유독 대학 진학과 관련한 사고는 조금도 바뀌지 못한 것일까?
그 여학생은 자신의 고민과 분노에 공감하는 나의 말을 듣자마자 눈물을 쏟았다. 휴지를 건네는 것 말고는 별로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고등학교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다면 대학에 와서도 하기 어렵다. 그러니 제발, 공부부터 하고 대학에 가서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말은 하지 말자. 의도야 그렇지 않겠지만, 이제 그 말은 언어폭력에 불과하다. 우리는 의도하지 않은 언어폭력을 행사하며 20년 동안 변하지 않은 이 사태의 공범자로 살아왔는지 모른다. 이제는 그 사슬을 끊어버릴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