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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현지인도 반한 경주 옹심이·메밀전 맛집

어릴 적부터 옹심이를 좋아한다. 쫄깃한 식감이 좋아 먹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놓치지 않는다. 맛집 중에 최고 맛집은 태백 황지시장 안에 자리한 부산옹심이다. 음식이 사람을 줄 세우는 것을 이해 못 하는데 태백에서 1시간 줄을 서서 기다려보았다. 최근 지인 두 명이 추천한 옹심이 가게가 있어서 찾아갔다. 경주는 2025년 APEC 이후 언제나 붐빈다. 특히 주말이라 길게 줄을 설 거라고 해서 오픈런했다. 오전 11시부터 영업 시작이라 아침부터 준비해서 가는 길에 친정엄마까지 모시고 가도 오픈이 20분 남았다. 바로 근처에 석탈해왕릉과 백률사가 있어서 둘러보기로 했다. 높이 올라갈 시간은 안되어 입구 석상만 보고 돌아왔다. 경주메밀촌옹심이마을 주차장은 겨우 한 대만 주차 가능이라 동네 골목길에 적당히 대야 한다. 다행히 가까이 어린이 공원이 있고 주변에 주차할 수 있었다. 주택가 골목길에 이층, 우리가 1등인가 했더니 앞에 한 팀이 있었다. 앉고 싶은 자리에 앉자마자 차를 내왔다. 옹심이칼국수, 옹심이만, 메밀전 세 가지를 주문했다. 들기름막국수 맛이 궁금했는데 다음에 오면 맛보리라 뒤로 미뤘다. 에피타이저로 보리밥이 애교스럽게 담겨 김치 두 종류와 함께 먼저 나왔다. 자리마다 놓인 설명을 읽으니, 양념장과 김치를 넣고 비벼 먹으라고 했다. 우리 테이블에 양념장이 보이지 않았고 보리밥의 맛을 느껴보려고 비비지 않고 입에 넣고 오래 씹었다. 들기름 향이 확 돌았다. 아마 밥을 푸기 전에 들기름 한 방울 넣고 담았나 보다. 뒤따라 메밀전이 나왔다. 이렇게 얇게 부치다니, 그래서인지 바싹한 식감이 먼저 느껴졌다. 메밀 향도 구수해 마지막 한 입까지 맛있게 먹었다. 가격이 특히 착했다. 전이 다 끝나기 전에 옹심이와 옹심이칼국수도 나왔다. 겨울 날씨에 딱 어울리는 뜨끈한 국물 요리다. 말랑말랑하면서도 탱글한 식감이 맘에 들었다. 국물은 자극적이지 않아 남기지 않고 다 마셨다. 심심한 국물 간에 딱 어울리는 자박김치가 이 집의 매력이었다. 시골 할머니가 숭덩숭덩 별 신경 안 쓰고 해주시던 겉절이 같은 느낌이라 자꾸 손이 갔다. 옹심이는 쌀이 부족한 시절 국에 넣어 먹었는데, ‘새알심’의 방언으로, 쌀로 만든 새알심이나 감자로 만든 새알심을 모두 ‘옹심이’라 불렀다. 처음에는 팥죽의 새알심처럼 작고 동그랗게 만들었으나, 시간이 오래 걸려 수제비처럼 크게 떼어 넣는 방식으로 변했다. 감자로 만들어 저렴했기 때문에 현재에도 국물 요리에 고명으로 넣어 먹는다. 보통 3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앙금 없는 감자떡처럼 속이 꽉 찬 옹심이가 있고, 만두 소를 채워 만든 옹심이가 있다. 최근에는 감자를 거칠게 갈아 다른 첨가물 등을 섞어 감자의 서걱이는 식감을 주는 방식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으나 이는 사실상 감자수제비나 다름없다. 먹거리가 부족했던 옛 선조들이 겨우내 삭힌 감자에서 나온 녹말을 활용하여 영양분을 보충하기 위해 만든 음식이었다. 다음 해 농사를 위해 항아리에 넣어두었던 씨감자 중 상하여 사용하지 못하는 감자를 골라내어 완전히 삭히면 그 감자녹말을 얻을 수 있다. 겨우내 통째로 삭힌 감자에서 얻어낸 녹말을 반죽한 뒤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채소 국물에 끓여 먹던 것이 감자옹심이의 유래이다. 이처럼 다른 첨가물 없이 산골에서 삭힌 감자 자체에서 받아낸 녹말 100%를 활용한 쫄깃한 식감의 감자옹심이가 전통적인 방식이다. 가게 앞에 손님들이 겨울이라 기다리는 것이 불편할까 싶어 비닐로 막을 쳐 놓았다. 6년 동안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아서인지 여전히 단골들이 찾아온다. 오래 그 맛을 유지하길 바란다. 경북 경주시 초당길155번길 11, 054-777-6162. /김순희 시민기자

2026-01-20

사라지는 우리 동네 가게들

늘 지나치는 곳이었다. 자주 가지는 않았지만 아주 가끔 카페에 앉아 나만의 은신처를 누리며 책을 읽다 가기도 했다. 번화가가 아닌 아파트 뒷골목에 자리하고 있지만 갤러리를 겸한 3층의 제법 규모가 있는 카페였다. 언제라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을 것 같은 당당한 모습이었다. 지난 15일 오후, 학원에서 아이를 데리고 오는 길에는 입구에 주차금지라는 표시와 함께 주차장이 깔끔하게 비어 있었다. 근처에 차를 세우고 카페 앞으로 다가서니 출입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2021년 5월에 시작한 저희 카페가 2025년 12월 31일 자로 영업을 종료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카페에 보내주신 사랑에 감사드립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안내문에는 그동안 감사하다는 주인장의 마지막 인사가 진심으로 느껴졌지만 섭섭하고 아쉬운 마음이 더 컸다. 카페가 예스 키즈존이라 어린아이를 둔 엄마들도 눈치 보지 않고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카페를 자주 이용했던 김정미(37·포항시 북구 창포동)씨는 “집 가까이라 아기띠 해서 편하게 마음 놓고 다니던 곳이었다. 근처에 새로운 카페가 생겨도 노 키즈존이라 가지 않는다. 여기가 공간도 넓고 아이들을 위한 좌식 테이블도 있어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는데 정말 아쉽다”라고 말했다. 동네를 지나다니다 보면 가게 앞에 ‘영업종료’, ‘상가임대’, ‘임대문의’라고 붙은 안내문을 자주 본다. 포항 시내도 물론이고 동네 상가 밀집 지역도 마찬가지다. 슬프지만 빈 가게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 같다. 지난주 동네 산책에서도 그랬다. 방학이라 학원 차량이 운행하지 않아 아이를 데려다주고 데려와야 하는 상황이다. 아파트 안 작은 도서관에서 학원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다 점심시간이라 밖으로 나왔다. 한 시간 남은 시간 동안 어슬렁 동네 산책을 하기로 했다. 학원가와 주택가를 지나 식당이 즐비한 도로로 걸었다. 점심시간 오가는 사람들로 붐벼야 할 시간인데 식당 앞의 주차장은 텅 비었다. 혹시 휴무인가 싶어 가게 앞을 들여다보니 그렇지도 않다. 가게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아기 의자도 잘 비치되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종업원인 듯한 분이 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연신 들여다보고 계신다. 주인장 얼굴과 이름을 내건 가성비 좋은 고깃집이든 엄마 손맛의 밥집이든 가볍게 먹기 좋은 분식집도 똑같이 오가는 사람이 없다. 팬데믹 이후, 최근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경기의 실제를 보여주고 있었다. 조용한 식당가가 걱정되는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도로 반대쪽의 샤브샤브 집이나, 프랜차이즈 햄버거와 카페 집은 주차하고 막 입구로 들어가는 사람이 여럿이다. 가게마다 상황은 다르겠지만 여기서도 양극화의 냄새가 풍겼다. 동네 가게는 그 지역에서 나고 자란 고향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 자주 가는 수선집이나 세탁소, 미용실, 정육점은 시민기자에겐 그런 곳이다. 돌아보니 함께한 시간이 많이 쌓였다. 가게를 찾는 사람과 가게를 지키는 주인장은 딱딱한 느낌의 프랜차이즈보다 서로의 안부를 챙기는 정겨움이 있다. 사람들 간의 정이 얇아진 지금에도 정을 말할 수 있는 곳이다. 그 안에서 함께한 가족들의 눈물과 실패의 이야기도 스며있을 것이다. 자주 가던 우리 동네의 가게가 사라진다는 것은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 슬픔이다. /허명화 시민기자

2026-01-20

복주머니에 담은 ‘붉은 말’의 해

내가 아주 어렸을 때, 할머니는 쪽찐 머리에 비녀를 꽂고 치마저고리를 입은 채 생활하셨다. 한복에는 주머니가 있지 않으니 허리춤에는 항상 복주머니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색은 바래 있었고 매듭은 단단하여 그 주머니는 쉬 열리지 않았다. 마치 열리지 않게 묶어둔 것처럼. 복주머니는 할머니의 하루를 따라다녔다. 텃밭에 갈 때도, 장에 나설 때도, 마루에 앉아 바느질을 할 때도, 곰방대에 담뱃재를 담을 때도 말이다. 드물게 그 주머니가 열렸던 날은 첫째 손주가 상장을 받아오거나 우리들이 설날 세배를 드리거나 제사상에 오를 청주를 살 때 정도였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복주머니는 물건을 넣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보다는 주로 정초나 특별한 날에 선물하여 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라고 했으며 새해맞이 선물로 복주머니를 차면 “일 년 내내 좋지 않은 기운을 쫓고 만복이 온다고 하여 친척이나 자손들에게 나누어 주는 풍습이 성행하였다”라고 한다. 부적과 같은 의미의 이 장신구를 매우 귀하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할머니의 허리춤에서 그 시절을 함께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붉은 말’의 해 병오년 새해를 맞았다. 우리 지역에서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인사를 흔히 하지만 더불어 “무탈하시라.”라는 말도 많이 건넨다. 수다스럽지 않은 경상도 사람 특유의 덕담이자 복을 기원하는 방식이다. 안동은 오래도록 유교적 생활 질서와 공동체 문화가 이어져 온 곳이다. 이곳에서 복은 개인의 행운이라기보다 집안과 마을의 안녕을 뜻한다. 그래서 복을 드러내기보다 감추었고, 앞세우기보다 곁에 두었다. 경박스럽게 다리를 떨면 복 날아간다고 하고, 깨작거리며 먹으면 복 없다고 하고, 불행이 거듭되면 박복하다고 했다. 허리춤 안쪽에 매달려 야무지게 매듭을 지었다가 정말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쓰였던 복주머니처럼 복을 귀하고 조심스레 다뤘다. 복은 소유하거나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고 함께 지켜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 작은 주머니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복주머니처럼 필요할 때 힘이 되어 주는 한 해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경북매일 독자분들, 올 한 해도 무탈하시기를.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백소애 시민기자

2026-01-20

겨울에는 시래기 된장국이 최고

대구와 경상도 지방에서는 무를 수확하고 난 다음 무청과 김장을 하기 위하여 배추를 다듬고, 겉잎을 다듬어 시래기를 만들어 두었다가 채소가 부족한 겨울에 많이 먹는다. 말린 시래기를 푹 삶아 물에 며칠 우려낸 다음 껍질을 벗긴 무시래기와 배추 시래기를 된장국에 넣어 끓여 먹으면 얼음이 꽁꽁 언 겨울에도 시원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도시에서는 시래기를 만들기도, 보관하기도 쉽지 않겠지만 겨울철 별미로 시래기 된장국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무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지방에서는 무청을 잘라 이를 모아 다듬어서 말린다. 우리나라 강원도 양구 펀치볼 마을에서는 시래기를 전문으로 생산하기 위해서 명태를 말리는 덕장같이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널려진 무청이 영하의 매서운 바람에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부드러운 시래기가 된다고 한다. 양구에서는 시래기가 효자다. 지난해 농가 262곳에서 2025t의 시래기를 생산해 250억 원의 소득을 올렸다. 이곳에서는 시래기를 만드는 무씨까지 개발해서 심는다고 한다. 시래기 무씨는 무는 작지만 잎이 잘 자라며, 무는 모두 버린다고 한다. 양구에서는 우리나라 전 지역으로 시래기를 택배로 보내는데 지난해부터는 미국 일본 등으로 수출도 시작했다고 한다. 무와 배추 시래기에는 식이섬유와 비타민이 풍부해서 겨울철 채소가 부족할 때 우리 조상들은 영양소로 섭취했다. 요즘은 영양은 높고 칼로리는 낮아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각광을 받는다. 강원도 양구에서는 시래기를 이용한 추어탕, 시래기 밥, 시래기 만두, 시래기 콩비지 탕 등의 음식을 개발해서 인기를 얻고 있다. 이를 양구 음식이라 자랑한다. 대구와 경상도 지방에서는 멸치 육수를 우려낸 물에 된장을 조금 넣고 끓여 먹는 시래기 국과 시래기 밥을 잘해 먹는다. 겨울의 진미 시래기 국을 한번 끓여 겨울의 입맛을 살려 보면 어떨까. /안영선 시민기자

2026-01-18

(인터뷰)봉사의 여왕 유가형 시인

유가형(劉家兄) 시인은 쉰여섯의 늦깎이로 시단에 등단했다. 대구작가콜로퀴엄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작가콜로퀴엄 도서관이 세워지자 관장을 맡아 사람과 책, 그리고 시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시를 하는 사람이면 그가 봉사 활동가로서 살아온 삶을 잘 안다. 그는 그의 이름처럼 집안의 맏형같이 남을 돕거나 굳은 일에는 언제나 앞장섰다. 경남 거창 출신으로 올해 만 80세의 나이지만 열심히 살아온 탓인지 나이 든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유가형 시인은 봉사활동을 많이 하게 된 배경이 있나요. △1950~60년대 산골에 살던 고향을 빨리 떠나고 싶어 대구에서 공장에 다닌다는 총각의 선이 들어오자 산골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에 결혼을 했습니다. 공장을 일구는데 함께 노력했는데 고생도 많이 했죠. 다행히 공장이 잘 돌아가 다른 공장도 인수하고 돈을 벌게 되자 어려운 사람을 돕고자 했던 것입니다. -생명의전화 봉사는 언제부터 하셨는지. △1985년부터 40년을 했어요. 그 당시만 해도 밤 근무할 사람이 없어 밤 근무를 거의 혼자 했죠. 30년은 밤 근무 10년 정도 낮 근무했어요. 처음 하면서 세상의 물정을 몰라 어려운 일도 많이 당했지만 보람도 많았어요. 생명의전화를 붙들고 많은 사람들의 고민을 들으며 깨우친 바도 큽니다. 감사하다는 전화도 많이 받았어요. 그것이 바로 보람된 일이라 할 수 있죠. -음성 꽃동네 봉사활동도 오래 하셨죠. △약 30년 전에 음성 꽃동네 입구 돌에 새겨진 “얻어먹을 힘만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그 말이 저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습니다. 지금까지 음성 꽃동네와 인연을 맺어오고 있습니다. 편도 4시간이 걸리는 소록도를 작은 티코를 끌고 20여 년을 다녔으며, 나중에는 봉고차를 빌려서 갔다가 자고 오기도 했습니다. 그 후 ‘나무를 찾아 나를 찾아서’란 모임에서 소록도 중앙공원 갔을 때 교회 장로님을 통해 그곳 사람들의 어려운 사연을 듣고 많이 울었어요. 2016년 이불 10채를 보내준 뒤로는 내 몸도 아팠고, 지금은 약간 소원해진 셈이죠. 유가형 시인은 방글라데시의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 아이들의 소식에 마음이 아파 친구 세 명과 함께 적지 않은 금액을 두 아이에게 10년간 후원했다. 대구 생명의전화 30주년 기념 ‘유가형 청실홍실민화전’을 열고, 그 수익금 전액을 생명의 전화에 기부하기도 했다. 정무장관 및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 대구시민상 수상, 고려대 청야봉사상, 코오롱그룹 오운문화재단 우정 선행상을 수상했다. 상금은 받을 때마다 자비를 보태어 복지 기관이나 어려운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그의 왕성한 문학 활동과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활동으로 그의 시비도 곳곳에 많이 세워졌다. 도동 시비 동산과 거창 중앙공원, 대구 북구 운암지, 칠곡 석적 호국 망정마을 평화 광장에 가면 그의 시비를 구경할 수 있다. /유병길 시민기자

2026-01-18

동화사 부속암자 염불암을 찾아

새해 11일 일기예보에 전국적으로 많은 눈이 내린다는 소식을 듣고 기자는 학원출판사 임종복 대표와 함께 좋은 작품을 기대하며 아침 일찍 동화사로 출발했다. 눈이 올 때쯤이면 사진작가들은 눈 풍경을 담기 위하여 마음이 바빠진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간밤에 눈은 잠시 뿌리고 말았다. 눈이 오지 않아 동화사 경내에 들린 우리는 염불암으로 가보자며 무작정 올라갔다. 동화사는 6개의 산내 암자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145개의 말사를 운영한다. 염불암(念佛庵)은 동화사의 부속 암자 중에서 이름이 난 대한불교 조계종의 산내 암자이다. 동화사에서 약 3km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염불이라 함은 부처님 이름을 외우며 마음을 집중하는 수행이고 암(庵)은 작은 절을 뜻한다. 928년 경순왕 2년에 영조 선사가 염불암을 창건했다. 이후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가 중창하는 등 여러 차례 보수, 재건이 이루어졌다, 1438년 세종 때, 1621년 광해군 때도 중수되었다. 근대에는 1936년. 1962년 등에도 중건하면서 현재의 전각들이 자리 잡았다. 염불암에는 현철 스님(81 도감)과 김우년 거사께서 계셨고 공양간에는 2명의 공양주가 있었다. 현철 노스님께서는 작년 11월 중순 동화사 제31대 주지 선광 스님 취임 후 오셨다. 노스님은 우리를 데리고 법당 앞에까지 나오셔서 염불암의 역사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다. 염불암은 전면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뒤편 산봉우리의 이름은 염불봉이며 바로 아래에는 옛 광석대 절터가 남아 있다고 했다. 염불암 좌측 옆길로 들어가면 일인석 (一人石) 오인석 (五人石)이 자리잡고 있다면서 꼭 가봐야지만 이곳에 온 또 하나의 추억이 된다는 설명을 했다. 927년 공산전투는 고려 태조 왕건의 재위 10년째 전투인데, 공식 표기는 태조 10년(927)이다. 견휜이 신라 경주를 함락하고 오던 길에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맞서 싸우다가 고려군이 크게 패했다. 장수 신숭겸, 김락 등 많은 병사들이 전사하고 왕건은 목숨을 가까스로 부지했다. 염불암 뒷 길에 현재 보존되어 있는 오인석은 이들 장수들이 앉아 궁리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바위다. 그리고 50m 정도 더 위로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일인석 바위는 넓은 면적 덕분에 적을 피할 수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바위다. 삼국사기나 고려사에는 지묘동, 파군재, 독좌암, 안심, 반야월로 피했다는 내용이 있다. 염불암은 전해져오는 말로 한 승려가 바위에 불상을 새기려 발원했는데, 7일간 안개가 끼었다가 사라진 뒤 바위에 불상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지금의 법당 뒤에 있는 큰 바위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 이곳에 암자를 짓고 염불암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통일신라 시대의 마애불과 보살상으로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지정되어 있다. 법당 앞마당에는 고려시대 보조국사가 세운 13층 청석 돌탑이 있다. 현재는 원래 모형 중 일부인 4층까지만 남아 있고 나머지 부분은 모형을 얹어놓았다고 한다. (대구시 유형문화재 19호) 조선 후기인 1841년의 불화도 남아있다. 극락전 오른쪽 뒤에는 염불바위가 있다. 염불바위의 남면에는 문수보살, 서면에는 아미타불이 조각되어 있다. 이 불상들은 문수보살이 조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염불암 상좌 성천스님은 출타 중이라 만나지 못했다. 동화사 눈 구경을 목적으로 왔으나 눈구경은 못했지만 염불암에 대한 소중한 지식을 얻은 것은 그나마 행운이다. /권정태 시민기자

2026-01-18

(방종현 시민기자의 유머산책)낭만선생의 건망증

’‘까똑’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지인을 약속 장소에 오전 9시 30분까지 기다리라고 일러두었던 참이었다. 일주일 동안 제대로 쉬어볼 틈도 없이 시간을 쪼개며 사는 낭만선생은 본인이 생각해도 역마살이 낀 게 분명하다. 어쩌다 시간이 나서 집에 있을라치면 좀이 쑤신다. 오늘도 시니어 대학에 강의가 있어 준비하던 참이었다. 시간을 지체해 마음이 다급해진 낭만선생은 수강생들에게 나누어줄 신문과 수업자료, 핸드폰 등을 주섬주섬 챙겨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 자가용 문을 열며 들고 있던 폰을 운전석 지붕 위 올려둔 채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낭만선생의 하루는 언제나 시간과의 전쟁이다.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 얼마를 달리다가 지인한테 출발했다는 소식을 알리려고 핸드폰을 찾았으나 눈에 띄질 않았다. 차 안을 샅샅이 뒤졌건만 그림자도 보이질 않는다. 수업시간에 수강생에게 사진 찍는 법에 대하여 전수해야 할 게 있는데 핸드폰이 없으니 큰일이 아닌가? 마음이 초조해진 낭만선생은 가던 길을 멈추고 차를 돌려 아파트에 들어왔다. 경비실을 찾아 폰 번호를 가르쳐주며 걸어달라고 부탁하고 지하 주차장에 들어가니. 어디선가 가냘프게 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차 안에서 울리는 소리 같았다. 문을 열고 있을 만한 곳을 이를 잡듯이 뒤졌건만 손전화기는 보이지 않는다. 차 문을 열고 나와 차 지붕 위를 보니 가까스로 차 위에 아슬하게 얹혀 있는 게 아닌가? 시동을 걸고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오르막을 달렸는데도 떨어지지 않고 용케 붙어 있었다. 휴~~ 하고 한숨을 돌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운수대통하지 않았는가! 차가 달리는 속도에 의해 땅에 떨어지는 날엔 분명 폰은 박살이 났을 테고 그 안에 들어있는 오만가지 정보는 얼마이며 오늘 수업으로 채택한 과목은 난감한 처지에 놓일 것은 뻔한 이치이니 이건 신께서 도우신 게 분명했다. 하느님 부처님 옥황상제님께 감사를 표한다. 낭만선생의 실수는 어디 이뿐이더냐? 하루는 아내가 서문시장에 볼일이 있으니 같이 가달라고 부탁해 푹푹 찌는 날씨에 얼른 다녀온다 싶어 차를 몰고 서문시장 주차장에 주차해 두었다. 아내와 낭만 선생은 이것저것 식품이며 필수품을 사서 여유작작하며 지상철을 타고 얼마를 갔을까. 열차 내에서 어떤 부인 둘이서 실수한 얘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 곁에서 듣던 아내가 “여보 우리 자가용 타고 오지 않았어요?” 순간 정신이 번쩍 든 낭만선생 “맞다, 우리 차를 가지고 왔지” 하며 두 내외는 부리나케 내려 다시 서문시장 주차장으로 갔다. 승용차가 겸연쩍게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타고 온 자가용은 팽개치고 사람만 따로 가다니?, 부창부수라 어찌 두 내외가 똑같이 까먹을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두 내외의 케미가 천생연분이거나 대프리카의 더위 탓이라 자위해 본다. 하루는 수업 중 글씨가 잘 안 보여 안경을 닦았다가, 잠시 후 안경이 사라졌다. “내 안경 어디 갔지?” 수강생, 한 사람이 말했다. “선생님, 머리 위 한번 만져보세요.” 그랬다. 안경은 머리 위에 있었다. 강의실은 웃음바다가 됐고, 낭만선생은 멋쩍게 말했다. “이게 바로 머리 위 패션이지요.” 그의 실수는 때론 수업보다 더 큰 배움이 된다. “완벽하려고 하면 웃음을 잃어요. 실수도 삶의 향기지요.” 그의 말처럼, 살아간다는 건 잊어가는 순간에도 서로를 발견하는 일이다. 낭만선생은 오늘도 수업 준비를 하며 다짐한다. “이번엔 절대 안 깜빡하리라.” 그러나 잠시 후 또 외친다. “어이쿠, 내 핸드폰 또 어디 갔지?” 그의 실수는 끝이 없고, 그 웃음도 끝이 없다. /방종현 시민기자

2026-01-18

노블레스 오블리주, 안성기라는 이름이 남긴 것

안성기라는 이름 앞에서 문득 하던 일을 멈춘다. 그의 빈소가 마련됐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실제로 만나본 적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마치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지인을떠나보내는 듯 마음 한켠에 먹먹함이 인다. 영화 ‘겨울나그네’ 속 현태(안성기 분) 얼굴이 불현 듯 스쳐 지나간다. 그가 출연하는 영화를 보고 나설 때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하게 정리되곤 했다. 그것은 영화의 결말이나 연기의 기교 때문이라기보다 그 배우가 지닌 삶의 태도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묘한 안도감을 주던 그 편안함이 그를 ‘국민배우’로 만들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최근 들어 유년 시절부터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통해 친숙한 이들의 부고가 잦다. 그들이 스크린에서 울고 웃던 시간은 우리가 숨 고르기 하며 살아 온 삶의 시간과 겹쳐있다. 함께한 세월 속에서 이들은 대중의 삶에 배경음악 같은 존재들이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음에도 이들의 이름 앞에서 느끼는 감정은 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슬픔을 넘어 살아 온 시간의 일부가 말없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게 한다. 안성기의 소식이 특히 그러하다. 한 연예인의 소식이 이토록 먹먹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개인에 대한 애도를 넘어 오랫동안 믿어왔던 묵직한 안정감이 사라지는 느낌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전쟁과 분열, 경제의 흔들림 그리고 서로를 향한 날 선 말들. 오르지 않은 것이 없는 물가 앞에서 마트 카트에 물건 하나 담는 일조차 망설여지는 요즘이다. 평안함보다 불안이 일상이 된 시대에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믿음을 주는 얼굴을 찾는다. 안성기는 그런 존재였다. 영웅을 연기해도 요란하지 않았고 평범한 인물을 연기해도 초라하지 않았던 배우. 스크린 속 그의 모습은 늘 ‘그래도 세상은 아직 견딜만하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던진다. 그저 존재만으로도 이웃처럼 편안했던 사람. 그는 그렇게 우리 곁에 머물다 떠났다. 대중의 삶에 또 하나의 배경음악 같은 존재, 가수 조용필은 죽마고우였던 그가 영면에 든 날도 콘서트 무대에 오른다. 고인의 애창곡이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며 세상과의 약속을 지킨다. 요란한 애도 대신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60년 우정의 깊이를 드러낸다. 그래서 더 먹먹하다. 스크린 밖에서의 그의 모습은 생전 아들에게 쓴 편지글에서 드러난다. ‘항상 겸손하고 정직하며 넓은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이 세상에서 참으로 바꿀 수 없이 필요한 것은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이 글은 아들에게만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남긴 말이 되었다. 그 가르침이 헛되지 않아 그가 남긴 적지 않은 재산을 유족들이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정했다는 놀라운 소식은 훈훈함 속에서 깊은 울림을 남긴다. 그가 마지막으로 들렀다는 서울 명동성당. ‘겨울나그네’의 현태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장례미사는 이미 끝났지만 그의 온기가 아직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만 같아 그곳을 찾는다. 한참을 그렇게 서성거려 본다. 요란하지 않게 책임을 다하고 앞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가장 필요한 자리에 머무는 것. 우리가 안성기라는 이름에서 배워 온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어쩌면 그런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국민배우 안성기. 그의 이름 앞에서 조용히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박귀상 시민기자

2026-01-15

대구 예술인의 흔적을 만나는 시간

2주 전 주말 수창청춘맨숀에 다녀왔다. 대구 중구 수창동에 자리한 수창청춘맨숀은 한때 KT&G 연초제조창 직원들의 사택으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도시 재생 과정을 통해 리모델링된 이곳은 과거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긴 채 청년 문화예술을 위한 창작 플랫폼으로 재탄생했다. 낡은 주택 구조를 유지한 채 전시장과 문화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데, 오히려 이러한 구조적 특징 덕분에 이곳은 더욱 예술적으로 느껴졌다. 수창청춘맨숀에서는 전시회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가 진행되고 있다. 이번 전시는 대구 근현대 예술사를 구성해 온 인물들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하여, 관람객들이 예술을 더욱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기록과 연표로만 남아 있던 예술가의 생애를 오늘의 감각으로 해석함으로써 과거와 현재가 예술을 매개로 연결되는 지점을 만들어내고, 같은 지역 예술인의 일생을 감상하며 예술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했다. 이번 전시는 무용가 고(故) 김상규와 성악가 김귀자, 두 예술가의 삶과 예술 세계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김상규는 광복 이후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한국 근대 무용의 기반을 다진 인물이다. 혼란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그는 춤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언어를 구축했고, 대구 무용계의 출발점이 되는 역할을 했다. 그의 삶은 예술이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시대를 견디게 하는 신념이었음을 보여준다. 김귀자는 대구 출신의 성악가로, 해외 유학을 통해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받은 뒤 귀국해 무대와 교육, 예술 행정 전반에서 활동해 왔다. 특히 오페라 분야에서 꾸준한 활동을 이어오며 지역 음악 문화의 성장에 기여해 왔다는 점에서 그의 예술 인생은 현재진행형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김귀자의 그간 공연과 인터뷰 영상도 함께 볼 수 있어 성악에 대한 그의 혼을 엿볼 수 있다. 전시는 두 예술가가 마주했던 시대의 분위기와 내면의 감정을 청년 예술가의 언어로 풀어낸다. 회화, 설치, 영상 등 다양한 매체로 구성되어 이들의 예술적 행적을 다각도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통해 관람객은 과거의 예술가를 ‘기억해야 할 인물’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와 대화를 나누는 존재로 만나게 된다. 특히 이번 전시에 참여한 청년 예술가들은 수창청춘맨숀이라는 공간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주거 공간이었던 흔적 위에 놓인 작품들은 예술가의 삶과 공간의 기억을 겹쳐 보이게 하며, 예술이 특정한 무대가 아닌 삶의 자리에서 비롯된 것임을 환기한다. 수창청춘맨숀에서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오는 2월 27일 금요일까지 열린다. 입장료 없이 누구나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니, 대구 예술인의 삶을 함께 느껴보기를 추천한다. /김소라 시민기자

2026-01-15

엄마의 떴다방

SNS를 살피다 요즘 부쩍 눈에 띄는 교육 광고를 만났다. 망설임 끝에 상세 내용을 클릭하니, 본 교육에 앞서 상품 홍보가 진행된다는 안내가 붙어 있었다. 오래전 비슷한 강의에서 홍보 뒤에 이어졌던 훌륭한 강연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나만 정신 차리면 된다’라는 다짐을 방패 삼아 참가 신청을 했다. 교육 당일, 넓은 교육장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다들 나처럼 ChatGPT에 관심이 있어 모인 모양이었다. 연령층은 다양했고 차림새들도 말끔했다. 모두가 기대에 찬 눈빛이었다. 늘씬한 몸매에 목소리가 카랑카랑한 아나운서가 무대로 나오더니, 본 교육에 앞서 70분간 상조 상품 홍보를 시작했다. 호기로웠던 나의 다짐은 유명 브랜드의 특전과 크루즈 여행이라는 달콤한 유혹 앞에 이내 무너졌다. 홀린 듯 세 계좌를 계약하며 가입서를 쓰던 찰나, 잊고 있던 친정엄마의 얼굴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엄마의 칠십 대 후반, 동네마다 ‘홍보관’이 유행이었다. 노인들을 불러 모아 노래와 춤으로 흥을 돋우고 생필품을 나눠주던 그곳에 시어머니와 엄마도 매일 얼굴도장을 찍으셨다. 시어머니는 어쩌다 휴지 한 묶음을 받아오는 것에 만족하셨지만, 엄마는 달랐다. 인덕션과 세라믹 주방용품 등 고가의 제품과 건강식품이 하나둘 늘어날수록 가족들의 표정은 굳어졌다. 쓰지도 않을 물건이 방 한쪽에 잔뜩 쌓여가는 것을 보자 화가 치밀었다.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나는 쓰지도 않을 걸 왜 자꾸 사 모으냐고 엄마를 다그쳤다. 엄마는 그 사람들이 살뜰히 챙겨주는 게 고마워서 사 주는 것이라 했다. 홍보관에 들어서면 “엄마, 엄마”라고 반갑게 맞아주고, 안아주고 업어주기까지 하는데 너희가 언제 나한테 그래봤느냐고 되물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의 외로움을 살피지 못했던 자식들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우려는 곧 현실이 되었다. 어느 날 엄마는 이름도 생소한 업체에 120만 원이라는 목돈을 내고 상조까지 가입하셨다. 의심스러운 마음에 연락해 보았으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즉시 찾아간 홍보관은 이미 철수한 상태였다. 인터넷 어디에도 그런 회사는 없었다. 사기였다. 그동안 사 모은 물건값이 천만 원을 훌쩍 넘긴 데다 상조 사기까지 당한 엄마에게, 나는 어른이 어떻게 그런 사기를 당하느냐고 몰아세웠다. 어린 동생을 나무라듯 소리치는 내 옆에서 엄마는 소리 없이 울기만 하셨다. 믿었던 그들에 대한 엄마의 배신감과 상실감을 나는 차마 살피지 못했다. 이른바 ‘떴다방’이라 불리는 수법은 지금도 여전히 노인들의 외로움과 친절에 대한 갈망을 미끼 삼아 물건을 팔고 가족 사이를 갈라놓는다. 교육을 빌미로 상품을 홍보하는 지금의 방식이 그때의 떴다방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를까. 현장 특전을 강조하며 당장 계약하지 않으면 손해라고 부추기는 진행자의 말에 휩쓸려 세 계좌나 가입한 나처럼, 엄마 역시 그 순간 가입하지 않으면 큰 손해라고 믿었을 것이다. 자신의 가입으로 그 사람에게 조금의 이익이라도 돌아가기를 바랐을 엄마의 심정을 이제야 이해할 것 같다. 뻔한 속임수에 넘어갔다고 기어코 울음을 터뜨릴 때까지 마구 다그치던 그때가 후회스럽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엄마는 우리 곁을 떠나셨다. 바쁘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맡기고도 쥐꼬리만 한 용돈만 쥐여주던 못난 딸. 이제 혼자 있는 날이면 나도 엄마처럼 외로움에 몸을 떤다. 엄마의 당혹스러웠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지만,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홀 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 사이에서 좌중을 휘어잡는 진행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서둘러 상조 가입신청서를 쓰고 있는 지금에야 나는 자식들의 무관심에 쓸쓸했을 그때의 엄마를 다시 만난다. /손정희 시민기자

2026-01-15

친구들과 약속 장소였던 맘모스 제과점

맘모스제과에서 보자. 안동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약속했을 것이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친구와 만나려면 집으로 전화를 걸거나 직접 찾아가야 했다. 스무 살에 공중전화로 친구 집에 전화를 하니 친구는 없고 어머니가 받으셨다. ‘르네상스’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달라고 말씀드리니 잘 못 알아들으셔서 ‘르, 네, 상, 스’라고 한 글자씩 띄워 찬찬히 알려드렸다. 다행히 늦게라도 약속 장소로 친구가 왔고, 엄마가 뭐라는지 못 알아듣게 이름을 중얼거리셔서 짐작으로 되짚어 온 곳이 우리 아지트 르네상스였다. 우체국이나 은행 이름이었다면 연세 많은 어머니 귀에 쏙 박혔을 것이다. 그 시절 우린 약속 장소를 우체국 앞으로 정했다. 작은 도시에 하나뿐이라 누구나 아는 장소니까. 지금은 우체국이 동네마다 있어서 어느 지점이라고 하지 않으면 정시에 만나기 힘들지만, 80년대 포항에서 10대에서 20대를 지나온 사람이라면 분명 거기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포항의 우체국 같은 곳이 안동 맘모스제과였다. 1974년부터 현재의 자리에서 영업 중인 지역 대표 제과점이다.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여행 및 레스토랑 전문 안내서인 미슐랭 가이드 그린가이드와 론리플래닛 등에 소개되어 더 유명해졌다. 안동찜닭 골목과 갈비 거리 중간에 자리해서 점심을 고기로 배를 채운 뒤 후식을 먹을 장소로 안성맞춤이다. 이 집의 가장 인기 메뉴는 크림치즈가 가득한 크림치즈빵과 향긋한 유자파운드다. 주말과 휴가철은 가게 앞에 길게 줄을 서서 빵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크림치즈빵을 사려는 손님들이 대부분이라 한 사람당 가져갈 빵을 제한하기도 한다. 찾아간 날이 영하의 날씨라 거리가 한산했고 시간이 일요일 오후 4시가 넘어가니 웨이팅은 필요 없었다. 때마침 금방 구워진 빵을 진열 중이어서 운이 좋았다. 함께 간 친구들 몫으로 두 개씩 포장하고, 가게 안에서 커피를 곁들여 먹으니, 빵은 쫄깃하고 쏟아져나오는 치즈는 짭짤하니 고소했다. 역시 빵은 따끈할 때 먹어야 제일 맛있다. 안동에 갈 때마다 꼭 들러 여러 종류의 빵을 맛보았다. 수업이 있어서 갔다가 가게 안에 자리가 부족해 포장해 와서 근처 카페에서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먹었던 라즈베리가 들어간 도넛은 향기가 일품이었다. 동료들과 나눠 먹으니, 양이 아쉬워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러 포장해 왔다. 아버지 산소가 안동에 있어서 명절이면 꼭 다니러 간다. 올 추석에도 갈비 골목에서 고기를 먹고 맘모스제과에 찾아가니 여전히 손님으로 가득했다. 빵은 다 팔려 진열장이 텅 비었고 파운드케이크도 조각 케이크도 없었다. 롤케이크만 남은 상태라 두 줄을 사서 자리에 앉아 친정엄마와 동생네 식구들까지 대가족이 나눠 먹었다. 어머나, 남은 게 롤케이크뿐이라 억지춘향으로 산 롤케이크가 부드럽게 입안에서 사라졌다. 두 줄이 금방 동이 났다. 진열장에 남은 한 줄을 얼른 달려가 결재하고 포항으로 돌아오는 길에 영덕에 들러 맘모스제과의 빵을 좋아하는 언니 댁에 내려주고 왔다. 이 외에도 고품질 재료를 사용한 케이크와 발효종을 이용한 유럽 빵, 선물용 과자 등 다양한 제품이 준비되어 있다. 50여 석의 카페테리아형 좌석에서 신선한 원두를 사용한 커피음료와 여름에는 4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땅콩 맛 밀크쉐이크 등도 즐기실 수 있다. 검색해서 찾으면 맘모스제과와 맘모스베이커리 이렇게 두 곳이 나온다. 베이커리는 본점이고 제과가 분점이다. 안동 문화의 거리에 맘모스베이커리가 있으니 헷갈리지 않길 바란다. 경북 안동시 문화광장길 34 맘모스베이커리, 0507-1438-6019. /김순희 시민기자

2026-01-13

졸업 이야기

1월, 해가 바뀌고 새로운 달이 시작되자 학교의 졸업식이 새 소식처럼 전해진다. 졸업은 마지막의 아쉬움과 다시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시간이기도 하다. 지난 8일, 목요일은 둘째 아이의 중학교 졸업식이 있는 날이었다. 코로나가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시기에 시작한 아이의 중학교 생활이 순간순간 떠올랐다. 미리 준비한 꽃다발을 안고 학교로 향했다. 늦지 않은 시간임에도 운동장에선 밀려오는 차량 맞이로 바쁜 모습이었다. 강당에 들어서니 1층에선 학교의 오케스트라 연주가 식전 행사로 막 끝났고 2층에선 먼저 자리를 잡은 부모님들로 앉을 자리가 없었다. 학생 수가 많은 학년이라서 축하하러 온 사람들도 더 많아 보였다. 오전 10시 반이 되자 사회자 선생님의 개식사를 시작으로 졸업식은 순서대로 흘러갔다. 교장선생님과 내빈들의 축하한다는 말이 가득한 시간이 지나고 마지막으로 3학년 담임선생님들의 졸업 인사 동영상이 이어졌다. 스크린에는 선생님들의 조금은 귀여운 모습과 특별히 아이의 담임선생님은 공룡 캐릭터 옷을 입은 모습에 많은 웃음을 주었다. 그리고 졸업가를 부르는 시간이었다. 졸업가는 가수 주니엘의 ‘내일이 아름답도록’이라는 곡이었다. 헤어짐의 아쉬움보다 미래를 향해 희망을 주는 느낌의 청아한 곡이었다. 명랑한 졸업식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아이의 졸업식을 보며 예전 나의 졸업식을 떠올렸다. 기억에 남는 졸업식은 처음 졸업이라는 걸 맛본 국민학교 졸업식이었다. 졸업식이 가장 큰 행사이기도 해서 겨울 방학이 끝나고 개학해서는 내내 졸업식을 연습했었다. 2주 동안 연습하며 이제 중학생이 된다는 마음에 조금 우쭐하기도 했다. 졸업식 당일이 되자 창가의 테이블은 지역 유명 인사로 채워졌다. 늘 그렇듯 마지막엔 다 일어서서 졸업가를 불렀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로 시작되었던 졸업식 노래였다. 그땐 그 노래가 얼마나 마음을 울렸는지.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훌쩍 우는 아이들도 많았다. 유치원을 다니지 않아서 첫 졸업을 맞는 아이들에겐 헤어진다는 게 얼마나 마음을 울게 만들었는지 연신 눈물을 흘렸다. 6학년 담임선생님의 눈가도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촉촉했다. 정말 빛나는 졸업식이었다. 지금이야 언제라도 볼 수 있으니 헤어짐의 아쉬움이 예전만 못하겠지만. 졸업식 후엔 부모님들이 자리를 만들어주셔서 친구들과 함께 짜장면을 먹었던 희미한 기억이 있다. 아이에게 졸업식에서 기억에 남는 게 뭐냐고 물었다. 아이는 상을 받는 것도 좋지만 꽃다발을 받는 게 더 기분 좋다고 대답한다. 그 꽃다발을 들고 친구들과 사진을 찍는 모습이 예뻤다. 생각해 보니 평소에는 꽃다발을 주고받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왁자한 사람들 소리를 빠져나와 우리는 짜장면집으로 향했다. 짜장면을 처음부터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근처의 붐비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피하고 싶었다. 짜장면집도 마찬가지로 함께 졸업한 학교 아이들의 가족들 몇몇이 눈에 띄었다. 역시 졸업식엔 짜장면이지 한다. 아이의 초등학교 졸업식은 마스크 낀 코로나 때여서 여럿이 모여 식사가 어려웠었다. 돌아오는 차에서 아이는 중학교 3년을 어떤 추억으로 남겼을까 생각한다. 서로의 아침을 깨우고 함께 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아이의 중학교 시절은 이제 추억으로 남았다. 앞으로 맞이할 고등학교 생활도 많은 이야기와 추억이 오래오래 쌓이길 바란다. /허명화 시민기자

2026-01-13

‘교토 1일 투어’에서 떠올린 생각들

급히 결정된 가족 첫 해외여행. 국외 여행은 처음이다 보니 아이의 체력 및 컨디션을 걱정해 가까운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예상대로 꽤 많은 사람들이 공항을 채우고 있었다. 새벽부터 움직여 피곤할만도 한데 아이는 첫 해외여행에 대한 설렘으로 구름 밖에 보이지 않는 비행기 밖을 내내 신나게 구경했다. 1시간이 조금 지나자 이내 도착 알림이 들려왔다. 첫날은 호텔 주변을 비롯 도보로 이동가능한 곳을 다녀보기로 했다. 급히 정한 여행이다 보니 여행 기간이 일본의 연휴 기간과 맞물린다는 사실을 놓쳐버렸다. 그 덕에 여행 시작부터 어마어마한 인파와 함께였다. 도톤보리에 이르자 밀려다닐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현지인부터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까지 지금껏 본 인파 중 최고였다. 둘째 날은 아이의 바람으로 유명 테마파크를 방문했다. 최대 190분까지 대기시간을 보여줄 정도로 이곳도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그리고 여행 3일 차 내심 기대하던 교토 1일 투어가 시작되었다. 예전에 한번 다녀온 교토지만 한적하고 조용했던 기억에 다시금 찾게 되었다. 물론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설 전날이라 유명 관광지 특히 절은 설 연휴 특수를 제대로 맞고 있었다. 청수사의 경우 오래된 역사와 규모 그리고 오가는 길에 위치한 상가가 유명하다. 경주 사람이어서인지 아무래도 불국사가 생각났다. 불국사는 절 아래 주차장이 있고 상가들과 도로를 두고 구분되어있다. 청수사의 경우 절과 주차장 사이에 상가들이 몰려있다. 골목골목 무수한 상가들을 지나야 오갈 수 있는 구조다. 오직 도보로만 이동이 가능하다. 각각의 장단점은 있겠으나 관광객 소비 증진 쪽에서 본다면 청수사 쪽이 유리하다. 절과 상가는 단어만으로는 어울리지 않지만 간판 색상 제한이나 고도제한 등으로 문화재를 해치지 않고 자연스레 녹아있었다. 체류 제한 시간이 두 시간이었는데 그날 교토 투어 중 가장 많은 여비를 지출했다. 연이은 상가들에서는 대부분 먹거리들을 판매 중이었는데 겨울이라 쌀쌀해진 날씨에 저절로 따뜻한 음식을 찾게 되었다. 추운 날씨지만 많은 사람들이 말차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어느 순간 손에 아이스크림이 쥐어져 있었다. 대부분의 찻집과 식당은 자리가 빈 곳이 없었다. 적어도 이곳에 불황은 없어 보였다. 한편 주차장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동안 황리단길 내에 차로가 없어지면 상가가 더 활성화될 거라 말이 있었다. 청수사 상가들이 그 대답이 될 것 같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갈수록 더 인기를 끌고 있는 황리단길과 도심 재생의 요청이 간절한 원도심 상가 사이엔 공영 주차장이 위치해 있다. 그곳에 주차한 뒤 황리단길로 갈 경우 주차장을 다시 지나 원도심으로 들어간 기억이 거의 없다. 황리단길붐 이전에 조성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당시엔 원도심 진입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관광지마다 그곳에서만 살 수 있는 유명 캐릭터 한정 상품들도 눈에 들어왔다. 다음 코스였던 금각사에서는 과거 방문 때 구입했던 고양이 캐릭터 부적을 다시금 샀다. 한정판은 사소한 것조차 설레게 하는 힘이 있다. 금 20kg으로 칠해졌다는 금각사를 보고 있으니 순금으로 만들어진 6개의 금관이 떠올랐다. 관광도시로 알려져 있으나 주변에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드문 현실 또한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금박이 아닌 순금을 갖고 있으나 그들처럼 수익을 얻지 못하는 것일까? 여러 의문과 발바닥 통증으로 마무리된 교토 방문기는 2만3000보를 채우고 끝이 났다. /박선유 시민기자

2026-01-13

바다를 건넌 진리의 돌

김해 가락국 수로왕비릉은 따뜻한 햇살 아래 세월의 깊이를 머금은 채 고요한 기운을 품고 있다. 경내로 이어지는 길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능선을 따라 천천히 오른다. 그 길 끝자락 오른편에는 아담한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데, 바로 파사각이다. 파사각 안에는 세월의 풍화를 고스란히 견딘 작은 돌탑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파사석탑이라 불리는 이 탑은 단순한 석조물이 아니라, 바다를 건너온 허왕후의 여정과 신앙, 그리고 진리가 응축된 상징물이다. 이 탑은 허왕후가 먼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야로 올 때 배에 싣고 왔다고 전해진다. 음력 5월, 어린 허왕후는 부모의 명을 받들어 머나먼 항해 길에 올랐다. 그러나 노여운 파도는 쉽사리 배의 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허왕후의 아버지는 딸의 평안과 무사 귀환을 기원하며 파사석탑을 배에 실어 보냈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탑을 싣자, 배는 균형을 되찾고 거친 파도를 가르며 순조롭게 항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탑은 ‘진풍탑’, 곧 바람과 파도를 잠재우는 탑으로도 불렸다. 인도 타밀 사회에는 자녀가 먼 길을 떠날 때 파사돌을 몸에 지니게 하는 풍습이 있다. 파사돌은 악을 물리치고 신의 가호를 불러온다고 믿어졌다. 때로는 가루로 빻아 의식이나 축제 때 두 눈썹 사이에 바르기도 했다. 이러한 신성과 염원의 돌이 허왕후와 함께 바다를 건너온 것이다. ‘파사’라는 이름은 범어에서 유래한 말로, 진리를 드러낸다는 뜻을 지닌다. 한자로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파사석탑은 단순히 이국에서 온 돌이 아니라, 왕비의 여정과 신앙, 그리고 진리를 상징하는 탑이라 할 수 있다. ‘삼국유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이 탑이 허왕후가 서역에서 가져왔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가야에 도착한 뒤 파사석탑은 한동안 보관되다가, 5세기 질지왕 대에 호계사로 옮겨졌다. 그러나 조선 고종 때 호계사가 폐사되면서 탑은 다시 방치될 위기에 놓였다. 이때 김해 부사 정현석이 나서 허왕후릉 곁으로 옮기게 했고, 오늘날 파사각에 안치되어 보호를 받게 되었다. 파사석탑은 원래 5층이었으나 현재는 6층으로 남아 있다. 이는 허왕후가 여분의 파사석을 가져왔고, 훗날 추가로 쌓았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파손과 마멸이 심하지만, 측면에는 연화문 같은 문양이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 있다. 학술 조사 결과, 이 돌은 인도 아유타국 지방에서만 나는 돌이며, 구조 또한 인도 석굴사원의 양식과 유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약 이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거의 원형을 유지해 온 파사석탑은 단순한 전설의 유물이 아니라, 가야와 인도, 그리고 불교 문화 교류의 생생한 증거이다. 국가 지정 문화재로 승격되어 마땅한 가치를 지닌 유산이기도 하다. /김성문 시민기자

2026-01-12

“묵향과 칼끝으로 여는 제2의 인생드라마”

수십 년간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은행에서 딱딱한 숫자만 다루며 고객의 자산을 관리하던 한 지점장이, 이제는 은은한 묵향과 나무의 결을 어루만지는 예술가로 변신해 지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봉사를 실천하고 있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주인공은 바로 사단법인 한국서각협회 하광원(73) 청도지부장이다. 하 지부장은 청도 각남면 출신으로 은행 지점장으로 퇴직하기까지 수도권에서만 40여 년간 잔뼈가 굵은 정통 ‘금융 맨’이다. 그의 고향 사랑은 어느 누구보다 눈물겹다. 현직에 있을 때도 매주 주말이면 서울에서 청도까지 고향을 찾아 선산을 관리하며 부모님이 남긴 집과 토지를 관리하곤 했다. 정년퇴직 후에 서울에서 함께한 모든 일들을 뒤로 하고 귀향하여 붓과 칼을 잡았다. 평소 손재주가 좋은 그는 현직에 있을 때도 고향 집을 본인이 직접 설계, 건축하였으며 서각 및 서예 분야 각종 국내 대회 및 세계 대회에 참여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그런 그가 이제는 귀향한 지 십여 년이 되다 보니 서예의 유려한 선과 서각의 깊은 입체감을 터득하고 인생의 참된 즐거움을 찾게 됐다고 웃음 짓는다. 평소 사람을 좋아하고 봉사를 즐겨하는 그의 품성은 제2의 인생을 개인의 취미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타고난 재주와 스스로 익힌 능력을 함께 나누길 결심하고 고향 집을 헐어 작품을 진열하는 갤러리로 리모델링하였다. 그의 고향 ‘청도 함박리’ 이름을 따 ‘청함갤러리’라 지었다. 그는 현재 ‘청함갤러리’와 청도향교 등에서 향서회, 복각회, 남서회, 청각회, 청서회 등 5개 단체 40여 명의 회원을 지도하며 서각의 불모지 청도 지역에서 서예·서각의 저변을 넓히는 데 앞장서고 있다. 평소 정이 많은 그는 갤러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사자성어 서예작품을 즉석에서 무료로 써서 증정하며 전 군민 가훈 써주기 운동도 벌이고 있다. 지난해 12월 23일부터 1주일간 전시한 ‘청호락 전시회’는 지역 인사 1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히 개최되었다. ‘청호락’은 청도를 좋아하고 즐기자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번 전시회에는 그가 십수 년간 지도한 문하생들이 작품을 내놓았다. 박성곤 청도군의회 부의장은 “사회적 성공을 마다하고 귀향하여 시간과 사재를 털어가며 지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키워 주는 하 지부장이 감사하다”고 전했다. 하 지부장은 “퇴직 후 삶을 고민하는 많은 분에게 서예와 서각이 제2의 인생을 꽃피우는 훌륭한 동반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최종식 시민기자

2026-01-12

12월에 떠난 백두산 등정

작년 12월 대구에서 백두산 천지 구경을 위해 2박3일 일정으로 김해공항에서 연길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2시간여 비행 끝에 중국 땅에 도착하니 함께 할 일행은 모두 29명이었다. 대구에서는 시민기자와 90세 장진필 사진작가 두 사람뿐이었다. 장 작가는 계명문화대학 사진학과 명예교수로 계시면서 연세에 비해 건강한 체력을 가지신 분이다. 두만강 강변공원을 거치면서 중국과 북한이 두만강을 경계로 삼는 중조(中朝) 국경지대에 도착했다. 가이드가 강변 아래에 지어진 건물 쪽으로는 절대로 내려가면 안 된다고 하여 돌아보니 두만강을 경계로 파란색은 북한 쪽, 노란색은 중국 쪽으로 표시돼 있었다. 이곳 도문광장에는 시민들이 나와 궁중무예 같은 율동으로 운동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주변에는 조형물에는 많은 글들이 새겨져 있었다, “각 민족이 석류씨 처럼 서로 꼭 끌어안고 단결하자”는 등의 내용이다. 중국이 민족 통합을 강조하는 정치적 메시지다. 석류씨처럼 단결한다는 표현이 이색적이었으나 중국에서 자주 쓰는 비유법이라 한다. 여러 민족이 하나의 공동체로 긴밀히 결속하자는 뜻이다.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속하는 이곳에는 한족, 조선족, 만주족 등 다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여행 첫날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가곡 선구자에 등장하는 연변의 일송정 소나무 관광은 날이 어두워 구경하지 못했다. 가이드의 안내로 금수학 호텔에서 1박을 했다. 호텔 주변에 행여 촬영할 것이 있는지 살펴보던 중 눈사람을 금형으로 찍어내는 특별한 장면을 만났다. 금형으로 찍은 눈사람은 모두 관광 홍보용으로 관광지로 옮겨진다고 했다. 연길은 백두산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여행사는 6인승 봉고차로 천문봉까지 등정해서 도보로 5분 가면 천지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다만 현지 기상 변화에 따라 천지구경을 못할 수도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다음날 아침 가이드는 “백두산 천지의 기후변화로 갈 수가 없다”는 통보를 해왔다. 오늘은 장백폭포만 보고 내려온다는 것이다. 울창한 자작나무와 은사시나무 숲 사이로 곧게 뻗은 도로를 따라 장백폭포로 갔다. 가는 곳마다 제설차들이 분주하게 다니고 있었다. 장백폭포 주차장에서부터 폭포까지는 약 1km 거리다. 일부 여행객들은 눈 위를 달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우리 팀들은 예약이 되지 않아 도보로 이동했다. 한참 오르다 보니 장 교수가 보이지 않았다. 오르막 빙판 길이라 뒤쪽에 처졌있었다. 가이드는 장백폭포 전망대까지 도착한 상태라 오토바이 관리인에게 부탁하였더니 우리 가이드를 통해 눈 오토바이를 타게 해주어 간신히 전망대까지 같이 이동하게 되었다. 폭포 주변은 이미 꽁꽁 얼었고, 중앙 부분 폭포는 물줄기가 세차게 흘러내렸다. 일 년 내내 물줄기는 쉬지 않고 내린다고 했다. 두 갈래로 흘러내린 물줄기는 송화(松花)강으로 흘러가며 북한에서는 이를 “비룡(飛龍)폭포” 라고 부른다. 장 교수와 폭포의 여러 장면을 촬영하고 두 사람만의 기념 촬영도 했다. 내려오는 중간 부분에 노천 온천지대가 있었다. 온천수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하여 나는 다시 그곳으로 향했다. 용암수는 최고 온도가 82도나 된다. 바깥 찬 공기와 용암수가 마주치니 물안개가 하늘로 뻗어나가는 풍경이 정말 장관이다. 주변 나무들은 상고대를 입고 있어 더욱 멋진 장면들이 연출되었다. 일행들은 환호를 지르며 감탄을 연발했다. 연길의 해란강 호텔에서 숙박하고 간단한 쇼핑 후 귀국길에 올랐다. /권정태 시민기자

2026-01-12

(시민기자 단상) 송구영신, 서로에게 건네는 희망의 인사

한 해의 문을 닫고 새로운 해의 문턱에 서면 우리는 저마다의 발자국을 돌아봅니다. 때로는 부족했던 순간이 떠오르고 예상치 못한 시련에 흔들렸던 기억이 스칩니다. 돌이켜 보면 그 모든 시간을 견디고 서로를 버티게 한 힘은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킨 평범한 시민들의 책임감이었습니다. 정치적 혼란은 민생의 숨통을 죄고, 갈등은 타협을 밀어냅니다. 목소리가 커질수록 지혜가 커지지 않는 현실이 서글플 때가 많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누가 이겼냐”보다 “무엇이 옳으냐”를 묻는 성숙함이 필요합니다. 건강한 민주주의는 승패의 기록이 아니라, 공공선을 향한 인내의 기록으로 만들어집니다. 지난해 우리는 자연의 경고 앞에서도 겸손해야 했습니다. 산불과 같은 대형재난은 한순간에 삶의 터전을 앗아갔습니다. 세계 경제의 파고도 거칠었습니다. 미국의 관세정책 변화는 수출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를 흔들었고, 기업과 노동자 모두에게 무거운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희망을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위기 앞에서 서로를 향해 손을 내미는 시민의식이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골목 상점에서 밤늦도록 불을 켜고 내일을 준비하는 소시민들, 묵묵히 현장을 지키는 노동자들, 돌봄과 봉사로 이웃을 살피는 손길이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기둥이 되어 왔습니다. 새해에는 비난보다 경청이, 경쟁보다 협력이 조금 더 앞서기를 소망합니다. 다른 생각을 틀린 생각으로 몰아붙이기보다, 다름 속에서 더 넓은 해답을 찾는 성숙함이 우리 모두의 태도가 되었으면 합니다. 공동체는 누군가가 대신 지어주는 건축물이 아니라,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조금씩 보태는 벽돌 위에 세워집니다. 골목과 직장, 학교와 가정에서 시작되는 작은 변화가 사회 전체의 방향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이웃을 먼저 살피는 배려, 규칙을 존중하는 문화, 공정한 기회를 만들려는 노력이 모이면 내일은 점점 희망으로 바뀔 것입니다. 지난해 우리는 적지 않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 경험은 상처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교훈이 되었습니다. 위기 때마다 서로를 잊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힘을 바탕으로, 새해에는 “가능성의 대한민국”을 한 걸음 더 앞으로 옮겨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송구영신의 시간에 새해에는 각자의 삶이 조금 더 안전하고, 수고가 정직하게 보답받으며, 노력하는 이가 존중받는 사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작지만 꾸준한 변화가 모여 모두가 자랑스러워할 내일을 만들어 가길 소망합니다. 우리 모두의 용기와 지혜에 따뜻한 응원의 박수를 보냅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희망을 향해, 천천히 그리고 굳건하게 함께 걸어갑시다. /석종출 시민기자

2026-01-12

대구 죽곡하우젠트아너스빌 노인회, 불우이웃돕기 성금 기탁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에 위치한 죽곡하우젠트아너스빌 노인회(회장 김성호)는 지난 8일 아파트 노인정에서 입주자대표, 관리소장, 이장, 노인회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다사읍에 불우이웃돕기성금 107만원을 기탁했다. 본 노인회는 605세대의 그리 크지 않은 아파트단지지만 매년 회원들이 휴지 줍기 등 자치활동과 한해동안 아끼고 절약한 돈으로 쌀, 라면 등 생필품을 기탁하고 있어 다른 아파트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권성열 다사읍장은 “지역의 소외 계층에 관심을 가지고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도 나눔 활동을 실천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앞으로도 꾸준한 이웃사랑을 실천해 주실 것을 당부했다. 김성호 노인회장은 “우리 노인회의 작은 정성이지만 다사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기탁활동을 하게 됐다”고 말하고 우리 지역 주민들과 함께하는 따뜻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봉사와 나눔 활동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경제 환경 속에서 얼어붙은 나눔 활동이 풀뿌리 지역사회 아파트 노인들에게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잔잔한 감동을 준다. 참석한 회원들은 “나눔 활동이 계속돼 다른 지역에서도 전파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최종식 시민기자

2026-01-11

병오년 적토마, 붉은 기운에 희망을 싣다

새롭게 맞이한 2026년. 병오(丙午)년 말띠 해다. 그것도 붉은 말, 적토마의 해다. 천간 ‘병(丙)’의 방위는 남쪽이며 색은 붉은 색, 오행으로는 화(火)에 해당한다. 삼국지에서 여포가 탔다는 적토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렸다고 전해지는 명마(名馬)다. 병오년이 상징하는 붉은 기운의 에너지가 유독 강렬하게 다가온다. 해마다 띠의 방위와 색이 달라지는 것은 천간의 위치 변화 때문이다. ‘갑·을’은 동쪽, ‘병·정’은 남쪽, ‘무·기’는 중앙, ‘경·신’은 서쪽, ‘임·계’는 북쪽에 위치한다. 동은 푸른색(木), 남은 붉은색(火), 중앙은 노란색(土), 서는 하얀색(金), 북은 검은색(水)이다. 이 질서에 따르면 2027년 정미(丁未)년은 ‘붉은 양’의 해가 된다. 음양오행 사상은 시간과 자연, 인간의 삶을 하나의 질서 속에서 이해하려는 오래된 지혜다. 음양과 오행은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요일에서도 순환한다. ‘월·화·수·목·금·토·일’은 하늘에 떠 있는 천체의 이름이다. 고대인들은 이 천체들이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는 신성한 힘을 가졌다고 믿었다. 요일 순서가 태양계 행성 배열과 다른 이유는 ‘플래니터리 아워(Planetary Hour)‘라는 고대의 천문 계산법 때문이다. 이는 하루를 지배하는 행성의 순환에서 비롯된 체계다. 이 7일 체계는 불교 경전과 함께 중국을 거쳐 동아시아로 전해진다. 이름을 지을 때 음양오행의 상생을 따지고, 날짜를 육십갑자로 헤아리게 했던 이 철학 체계는 중국 고대 제나라 사람 추연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유교문화가 확산되면서 이 사상은 동아시아 전반으로 퍼진다. 건곤과 팔괘로 이루어진 ‘주역’ 역시 음양오행 이전에 성립된 책이지만 유교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음양오행 사상과 결합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체계를 이루게 된다. 교수들이 올해의 사자성어를 주역에서 뽑았다. ‘변동불거(變動不居)’다. 세상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는 뜻으로 한국 사회가 처한 불확실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중소기업계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을 선택해 불확실성 속에서도 쉼 없이 전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세종시는 ‘승풍파랑(乘風破浪)’을 통해 위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세 좋게 헤쳐 나가겠다는 태도를 보인다. 각자의 방식으로 변화의 시대를 건너려는 의지가 담긴다. 경북매일의 신년휘호는 ‘정통인화(政通人和)’다. ‘정치는 통하고 사람은 화합하길’ 바라는 염원으로 붓을 들었다는 솔뫼 정현식 선생의 말처럼 혼탁한 정치가 맑아지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거친 필획 속에 담겼다. 피할 수 없는 변화를 이끄는 주체는 결국 사람이다. 병오년 적토마의 기운은 변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변화를 감당하는 우리의 자세를 묻고 있다. 지식인들이 앞 다투어 나라를 걱정하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결코 태평성대라 할 수 없다. 그러나 변화의 시대는 동시에 새로운 도약의 기회이기도 하다. 병오년 새해 첫날, 해맞이를 위해 새벽잠을 설치며 포항시 북구 흥해읍 오도리 사방기념공원으로 향한다.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 촬영지였던 묵은봉 정상에 어스름 홍반장의 배가 보인다. 추위도 아랑곳 않는 사람들. 붉은 해가 구름 사이에서 고개 내밀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지고 새해의 안녕을 기원하며 저마다의 소망을 가슴에 품는다. 적토마처럼 힘차게 도약하는 한 해가 되기를, 흔들려도 멈추지 않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붉은 기운에 작은 희망을 실어 이 땅의 안녕을 기원해본다. /박귀상 시민기자

2026-01-08

무심한 행정과 버려진 생명의 풍경

아침에 눈을 뜨면 산책으로 하루를 연다. 새해 들어 매일 한 시간, 빠른 걸음으로 걷겠다고 스스로와 약속했다. 오늘도 칼바람에 몸은 깃털처럼 휘청거리고 뺨은 차갑지만, 정신만은 숫돌에 간 듯 선명해져 매호지로 향한다. 연못으로 가는 시멘트 길 위를 걸으며 발바닥에 전해지는 감각, 차갑고 딱딱하다. 요즘 곳곳에 황톳길을 만들어 맨발 걷기 열풍이 한창인데 이곳은 도리어 얼마 남지 않은 흙길을 시멘트로 덮어버렸다. 숨 쉬던 땅의 숨통을 막아버린 무심한 행정 앞에서, 시멘트 바닥보다 딱딱하고 냉정한 탄식이 입가에 맴돈다. 드디어 매호지에 들어섰다. 연못 주변은 오직 바람만이 쓸쓸히 산책자를 맞이한다. 걷기에만 집중하려 해도 눈길은 자꾸 주변 풍경에 머문다. 볼 것이 없다. 포장된 바닥 위로 한겨울 추위에 말라버린 연대와 아무렇게나 쓰러진 나무들이 눈에 거슬린다. 지난 11월 연못 주위에 무질서하게 자라던 나무들을 베어낼 때만 해도 환영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작업은 거기까지였다. 뒤처리 없이 방치된 잔해들이 가슴을 마구 때린다. 근 일 년 만에 이 길을 다시 찾았을 때, 매호지의 풍경은 그야말로 밀림이었다. 산발한 여인의 머리칼처럼 얽히고설킨 나무들과 잡풀들이 연못가를 뒤덮어 연못 안을 들여다볼 수조차 없었다. 그나마 가장자리에 어우러진 갈대와 억새 군락만이 지친 눈을 달래줄 뿐이었다. 청송과 대구를 오가는 분주한 일정 속에, 일이 없을 때면 집안으로만 숨어들었다. 체중계 위의 숫자를 보고서야 ‘이러다간 안 되겠다’라는 위기감에 밀려 나오게 된 산책길이었다. 문득 일여 년 전, 연못가에 조명이 설치되던 날이 떠오른다. ‘생각을 담는 길’이라는 팻말이 붙고 무궁화가 심어졌던 그 길, 기증자의 이름표를 소중히 목에 걸고 있던 나무들은 어느새 잡풀의 기세에 눌려 있었다. 몇 그루는 겨우 푸르게 서 있었지만, 대부분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듯 애처로워 보였다. 관리 주체인 농어촌공사나 수성구청에 민원이라도 넣어야겠다고 다짐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며칠 후 다시 나갔을 때, 연못가엔 기계 소리가 요란했다. 인부들이 부지런히 나무를 베어내고 있었다. 늦었지만 이제야 제 모습을 찾겠구나 싶어 반가운 마음이었다. 하지만 연못을 한 바퀴 돌고 나니 기쁨은 곧 걱정으로 변했다. 조경의 미학도 생명에 대한 예우도 없는 그들의 노동은 거칠었다. 서툰 이발사의 가위질처럼 매호지를 단숨에 까까머리 중학생의 몰골로 만들어버리고 있었다. 봄이면 고운 머리칼을 휘날리던 버드나무도, 새색시처럼 다소곳하던 이름 모를 꽃나무도 이미 쓰러져 있었다. 갈색 추억을 선물하던 갈대와 백색의 억새마저 무참히 무너져 내렸다. 주민들을 위해 ‘생각을 담는 길’이라 명명하고 조명을 세우며 무궁화를 심었던 정성은 어디로 갔을까. 정성스럽게 쓴 편지를 구겨버리듯, 그 길은 이제 무표정하고 건조한 폐허처럼 변해버렸다. 그래도 뒤처리는 따르겠거니 믿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한 달이 훌쩍 지났다. 그때 잘려 나간 나무들은 여전히 연못 쪽으로 꼬꾸라진 채, 일부는 물속에 잠겨 서서히 말라 있다. 한곳으로 모으거나 치우는 최소한의 예의조차 생략된 현장, 시간이 흘러 제풀에 썩어 거름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그들의‘뒤처리’였던 모양이다. 지자체는 무언가를 계획하고 만드는 일에는 능숙하다. 하지만 그것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일에는 서툴다. 매호지 역시 그렇다. 정작 그 안에 깃든 풍경을 돌보는 일에는 눈을 감았다. 이제라도 매호지에 방치된 나무들을 수습하고, 끊어진 경관의 맥을 다시 짚어주었으면 한다. 주변이 깔끔히 정리되고, 매호지가 생명이 숨 쉬는 공간으로 돌아오기를. 그 길 위에서 마주한 이들이 환하게 웃게 되기를 마음속 깊이 바란다. /손정희 시민기자

2026-01-08

새해에는 반짝이는 별 하나 품고 살자

다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돈의 많고 적음과 지식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시간만큼은 철저히 공평하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졌던 2025년 365일을 다 썼다. 그리고 다시 새날이 주어졌다. 반칠환 시인은 새는 날고 말은 뛰고 굼벵이는 굴렀는데 모두 한날 한시에 새해 첫날에 도착함을 새해 첫 기적이라고 했다. 우리에게 기적의 시간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 모두들 2025년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을 것이다. 그 덕분에 새해에 다다르는 기적을 얻었다. 이제 주어진 이 귀한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새해 벽두에는 모두 결심을 하고 각오를 다진다. ‘새해에는 목표한 것을 꼭 이루리라’. ‘새해에는 못해본 것을 꼭 하리라. 모두의 가슴이 벅찬 소망으로 가득하다. “우리 삶이 먼 여정일지라도/걷고 걸어 마침내 하늘까지는 가야 한다/닳은 신발 끝에 노래를 달고/걷고 걸어 마침내 별까지는 가야 한다//우리가 깃든 마을엔 잎새들 푸르고/꽃은 칭찬하지 않아도 향기로 핀다/숲과 나무에 깃들인 삶들은/아무리 노래해도 목쉬지 않는다/사람의 이름이 가슴으로 들어와/ 마침내 꽃이 되는 걸 아는 데/ 나는 쉰 해를 보냈다/ 미움도 보듬으면 노래가 되는 걸 아는데/나는 반생을 보냈다/ ···. /먼지의 세간들이 일어서는 골목을 지나/성사(聖事)가 치러지는 교회를 지나/빛이 쌓이는 사원을 지나 / 마침내 어둠을 밝히는 별까지는/나는 걸어서 걸어서 가야 한다” (이기철 시 ‘별까지는 가야 한다’ 부분) 시인은 삶의 여정이 만만치 않더라도 별을 바라보는 눈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말한다. 비록 사는 일이 꿈만 먹고는 살 수 없지만 누구에게나 가고 싶은 별이 있다. 그 별의 모양은 누구에게나 다를 것이다. 발 디딘 이 지구에서 하루하루 생활을 이어가도 마음은 지향하는 별을 잃어버리지 말고 살라고 한다. 우리에겐 해맑았던 때가 있었다. 작은 풀잎의 사랑스러움에 초롱초롱 눈을 빛내고 나비를 쫓아 팔랑대던 때가 있었다. 그 마음을 다시 기억한다면 우리의 생활이 조금은 덜 팍팍하리라. 많은 이들의 새해 소망이 돈 많이 벌게 해달라는 것이라 조금 서글프다. 물론 밥이 중요하지만 꿈도 필요하다. 생계를 위해 열심히 시간을 쓰다가 한 번씩은 내가 가고자 했던 별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자. 가슴 속에 반짝반짝 꺼지지 않는 나만의 별 하나를 품고 산다면 사는데 힘이 될 것이다. 병오년은 불기운이 강한 해라고 한다. 그만큼 자신이 목표한 것에 매진하면 이룰 수 있는 기운이 크다고 한다. 모두 꿈꾸었던 것을 차근차근 이루어가는 날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슴 속에 반짝이는 별을 잊지 않기를 기원한다. 우리가 어떤 자리 어떤 곳에 있더라도 나만의 별이 있다면 용기를 잃지 않을 것이다. /엄다경 시민기자

2026-01-08

대경시민언론위원회 새 집행부 구성

대경시민언론위원회(위원장 방종현)는 2026년 새 집행부 구성을 마치고, 지난 5일 대구 중구 삼덕동 진석타워 회의실서 첫 이사회를 개최했다. 이날 이사회에서 위원회는 건전한 언론 환경 조성을 위한 감시 기능을 강화하고, 언론 본연의 역할인 정의와 공공성을 지키기 위해 격려와 비판을 병행해 나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특히 권력과 재정이 집중된 수도권 일극주의로 빚어지고 있는 중앙언론의 독과점에 대해 지역언론시민단체로서 견제와 감시 역할을 다하기로 결의했다. 중앙 언론의 비대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그라들고 있는 지방언론의 기능을 살리기 위한 시민운동도 펼치기로 했다. 이날 대경시민언론위원회는 지방언론은 그 지방의 고유한 목소리와 다양한 의견을 표출하는 언로(言路)로 지방자치를 완성하는데 크게 기여한다데 인식을 같이했다. 또 지역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선 지방언론의 활성화가 필수며 지방권력을 감시하기 위해 지방언론이 건전하게 발전하여야 한다고 밝혔다.. 대경시민언론위원회는 사단법인 대구·경북 중견언론인 모임이 운영하는 언론 아카데미 수료생들이 주축이 된 단체로, 현재 회원 수는 약 70명이다. 집행부는 방종현 위원장을 중심으로 유호일 수석부위원장, 손수여·배이희 부위원장이 활동하고 있으며, 박성근 사무국장, 김윤숙 재무국장, 최종식 편집국장이 실무를 맡고 있다. 한편, 대경시민언론위원회 위원들은 인터넷 신문 「대경뉴스」 기자로도 참여하며 지역 사회의 공정한 여론 형성과 언론 감시 활동에 힘쓰고 있다. 방종현 시민기자

2026-01-07

우리 동네에 마음이 가는 찻집이 있다

자주 가는 찻집이 있다. 집 가까이 있어서 걸어가면 좋은 거리이다. 가게 안 곳곳에 주인장이 오래전부터 하나씩 간직해 온 애장품이 가득하다. 아기자기한 소품을 구경하는 데만 한참이 걸린다. 그 물건이 태어날 때는 소소한 쓰임새였지만 오래 간직하니 이제는 다시 구하기 힘든 귀한 보물이 됐다. 향이 좋은 홍차와 조각 케이크를 주문해 놓고 새끼손톱만 한 나무로 만든 직인부터 다리가 달린 오래된 소형 텔레비전, 벽에 붙은 기하학적인 무늬의 욕실 발 매트, 창가에 꽃병인가 하고 다가갔더니 책으로 변신하는 팝업북, 이런 소품을 보다 보면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다. 이 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소품이라면 책이다. 테이블 옆에 나지막하게 놓은 책꽂이에 꽂힌 아롱다롱한 책등이 멋진 인테리어다. 제목을 자세히 보니 주인장의 취미가 보였다. 홍차, 쿠킹, 바느질, 가드닝에 관한 책들이 등을 나란히 하고 엎드렸다. 창가에 놓인 부케북이 어여뻐서 인터넷을 뒤져 온라인 서점에서 찾아 주문했다. 우리 집 거실에 또 친구 이사, 생일 선물로 주니 다들 색다른 선물이라 좋아했다. 사장님의 센스를 구경하다 보니 음료를 자리에 가져다주셨다. 얼그레이 더하기의 바스크 치즈케이크는 느끼하지 않고 고급스러운 맛이다. 독서팀에서 연말 송년회를 이 자리에서 한 이유도 바스크 치즈케이크 때문이다. 회원 모두가 좋아하는데, 그중에 당 수치를 신경 써야 해서 케익이 먹어선 안 되는 첫 번째 금지 목록인 회원이 송년회 하루 자신을 위해 이 집 케이크을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프랑스 고메버터(발효버터), 유기농 밀, 쌀가루, 유기농 설탕, 비정제 원당, HACCP 인증 농장 무항생제 유정란, 유기농 NON GMO 전분, 겔랑드 천일염, 직접 로스팅한 견과류, 수제 시럽 등 건강하고 좋은 재료만 가득가득 담아 맛있으면서도 몸에도 좋은 디저트를 직접 만들어 판매하는 착한 디저트 맛집 ‘얼그레이 더하기’, 가능한 손님들에게 좋은 것을 판매하려 애쓰는 사장님의 노력이 내놓는 음료와 디저트에 묻어난다. 작은 테이블 수는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 책 읽기나 대화 나누기에 적합한 카페다. 우리 집에서 걸으면 5분 거리라 자주 가는 곳이다. 포항에 여행 와서 우연히 들를 수 있는 곳에 자리하지 않고 동네 골목에 숨어 있다. 최근에 두호시장 근처에 있다가 두호공원 앞으로 이전 했다. 공원에 주차장이 넓어 주차하기 편하고, 맨발 걷기 하는 사람들과 산책하는 주민들이 조용히 오가는 곳이라 접근성이 더 좋다. 바스크 치즈케이크, 수제 그래놀라, 쌀 디저트, 르뱅쿠키, 사브레쿠키 등 맛있는 디저트 종류도 많지만, 커피 원두도 다양하게 사용하는 데다 푸딩, 밀크티, 수제청 등 음료 종류도 많다. 포항 수제 디저트 전문점 ‘얼그레이 더하기’는 현재 MBC 라디오 정오의 희망곡 협찬도 하고 여성아이병원 산후조리원 납품 중이다. 누군가에게 ‘얼그레이 더하기’ 수제 쿠키를 선물하면 먹어보고 여기 찐 맛집인데 어디에 있냐고 물어온다. 얼그레이 사브레, 발로나 초코칩, 고메버터 사브레, 피스타치오 사브레-부드럽게 달콤한 쿠키, 오독오독 씹는 맛이 좋은 피스타치오 사브레가 자신의 취향이라던 지인은 이곳을 한번 찾더니 단골이 됐다. 맛도 맛이지만 선물한다고 하면 포장도 남다르다. 쿠키 박스도 아기자기한 모양과 특이한 무늬라 한눈에 마음을 뺏기고 만다. 한가로이 책을 읽으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다 보면, 금방 새로 만든 쿠키나 케이크를 시식해 보라고 들고 와 후기를 묻는다. 지금도 맛있는데 매번 레시피를 기록하며 좀 더 건강한 디저트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장님의 손길이 곱다. 경북 포항시 북구 삼흥로100번길 36 1층, 0507-1455-0685. /김순희 시민기자

2026-01-06

신년 계획이 늘 똑같다는 건

해마다 사람들은 새해를 보람 있게 보내기 위한 신년 계획을 세운다. 건강을 위해 운동과 다이어트를 계획하고 자기 계발을 위한 배움, 부자 될 결심으로 하는 투자와 저축 등도 빠지지 않는 단골 신년 계획이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돌아보면 용두사미(龍頭蛇尾)처럼 실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새해의 기운을 받아 세우는 다짐은 괜히 기분이 좋다. 그래서일까. 뫼비우스의 띠처럼 매번 돌아오는 새해지만, 올해도 시민들은 떠오르는 첫해를 보며 각자가 품은 소망들이 잘 이루어지길 바랐다. 시민기자의 새해 계획은 보통 11월 말쯤 새 다이어리를 사는 것으로 시작된다. 스마트폰에 다이어리 앱이 설치되어 있어도 문구점에서 다이어리를 고르는 순간은 누구보다 알찬 새해를 맞이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원하는 다이어리를 구입한 후에는 첫 장에 내 마음에 새기는 짧은 글을 적고 다음 장에 새해 계획을 썼다. 다이어리를 펼칠 때마다 다짐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올해도 꾸준한 운동과 독서, 글쓰기, 영어 공부가 새해에 계획한 것들이다. 몇 안 되는 이 계획들은 어딘가 익숙한 약속의 문장들이다. 아마 지난해도 몇 년 전에도 한 비슷한 다짐이었을 거다. 특별한 것 없는 새해 계획이다. 지난해를 다시 돌아보면 배우고 싶었던 사진과 멈추었던 영어를 다시 시작한 해이기도 했다. 영어는 한동안 잊고 지냈다. 하지만 자주 보는 여행 유튜브 채널에서 영어를 우리말처럼 자연스레 하고 있는 유튜버의 모습에 자극이 되었다. 번역기를 쓰기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어렵지 않게 말하면 그만큼 해외여행에서 외국인들과의 대화도 풍성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시작하게 된 영어 앱. 얼마간의 비용도 지불하고 자신 있게 시작했지만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침마다 어서 시작하라고 울리는 소리와 순위에 민감해져 4개월 만에 멈추고 말았다. 스마트폰으로 자주 사진을 찍다 보니 간단하게라도 사진을 배우고 싶었다. 스마트폰 사진찍기 수업이 커뮤니티센터에 있는 걸 보고 반가운 마음에 지난해 5월부터 수강했다. 사진 수업이 어떻게 이루어질까 궁금했는데 사진을 잘 찍는 첫 번째가 카메라를 잘 닦는 것이라고 강사는 말했다. 그다음은 흔들리지 않게 스마트폰 잡는 바른 자세를 강조했다. 그리고 자신이 찍고자 하는 주제를 잘 잡고 관찰하고 바라보기를 수업할 때마다 이야기했다. 사진을 늘 급하게 찍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12월까지 8개월간의 수업을 마치고 나니 머릿속에 남는 것은 주제를 잘 잡는 것과 단순화를 하라는 거였다. 더하기만 할 줄 알았던 일상에서 이걸 적용해 보기로 했다. 올해도 비슷한 새해 계획들. 멈추었던 영어를 이어가고 운동과 독서와 글쓰기도 계속하기로 한다. 여러 해가 지나도 비슷하거나 똑같은 다짐들이다. 작심삼일이 되더라도 특별한 것 없이 같은 계획들이 이어진다는 건 어쩌면 평범한 다짐들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바뀐다고 인생이 확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새해를 맞아 뭔가 거창한 계획을 새로 세울 필요도 없다. 지난해에 저질 체력을 끌어올리려고 시작한 달리기를 올해도 꾸준히 이어갈 것이다. 영어는 대면으로 할 수 있는 수업을 신청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새로운 것을 더하지 않기로 했다. 과한 목표를 정하지 않고 올해도 꾸준히 해야 할 것들로 채웠다. 새해엔 모두가 조금 더 성장하고 빛나는 날들이기를. /허명화 시민기자

2026-01-06

천주교 최초 수덕자 홍유한과 후손 순교자 13인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 문수산 중턱 우곡성지. 한국 가톨릭 최초의 수도자 농은 홍유한(1726~1785) 선생이 모셔져 있는 그곳은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공간이다. 홍유한은 조선 후기 천주교를 뿌리내리게 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칠극(七克)’의 교리에 따라 28년 동안 천주교 수계생활하였다. 홍유한은 풍산홍씨 명문가, 정조임금 외갓집인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나 1750년경부터 순암 안정복, 녹암 권철신 등과 함께 당시 유행했던 서양 서적인 ‘천주실의’ ‘칠극’ 등 서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1757년 한양 생활을 청산하고 충청도 예산으로 내려가서 혼자 18년간 ‘칠극’에 따른 수계생활을 하였고 이후 소백산 아래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에서 10년 동안 수덕생활을 하였다고 전해져 온다. 우곡성지는 1993년 홍유한의 묘소를 발견해 천주교 성지로 개발되었고, 신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많이 찾는 곳이 되었다. 우곡성지에는 홍유한 동상, 홍유한 후손 순교자 현양비, 예수성심상, 농은 쉼터, 홍유한 묘소, 순교자 13위 가묘, 칠극의 길, 사제관, 청소년야영장 등이 조성되어 있다. 홍유한의 후손 가운데는 그의 뜻을 이어 신앙생활 하던 중 박해로 인한 순교자들이 13명이나 된다. 신유박해 때 홍정호, 홍낙민, 한국 최초의 여성회장 홍필주의 어머니 강완숙, 홍필주, 정조임금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동생 홍낙임, 기해박해 때 홍재영, 홍봉주 부인 삼조이, 홍봉주 등이 바로 그들. 가톨릭 최초의 수덕자 홍유한이 실천했던 ‘칠극’의 정신은 신앙인이 아니어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이라 여겨진다. 홍유한 동상 앞에는 칠극에 대한 설명과 칠극의 길이 있다. ‘칠극’이란 스페인 출신 판토하(1571~1618) 신부가 쓴 교리서다. 홍유한은 세례를 받지는 못했지만 칠극을 지키며 살았다고 한다. 제1극 복오(伏傲)는 교만을 억누르다는 의미. 제2극 평투(平妬)는 질투를 가라앉히다, 제3극 해탐(解貪)은 탐욕을 풀다, 제4극 식분(熄忿)은 분노를 없애다, 제5극 색도(塞饕)는 탐을 내어 먹고 마시는 것을 막아내다, 제6극 방음(防淫)은 음란함을 막아내다, 제7극 책태(策怠)는 게으름을 채찍질한다는 걸 의미한다.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깨끗한 문수산의 자연환경 속에 자리 잡은 우곡성지 옆 계곡엔 봉화군이 운영하는 문수산 자연휴양림이 있고, 초입에는 유명한 다덕약수관광지가 있어 관광객과 자연휴양림을 찾는 일반인들도 많이 다녀가는 곳이다. 봉화 천주교 우곡성지는 산이 에워싸고 계곡이 흐르는 조용한 산골로 마음을 쉬게 하는 자연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신앙인이 아니어도 지난 역사 속 묵직한 무게를 느끼게 하는 순교자들의 삶과 마주하고 애잔함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공간이다. 우곡성지 아래엔 아담한 시거리 마을이 있다. 10호도 안 되는 산골마을로 길섶으로 깊숙한 계곡물 소리가 들리고, 잘 닦여진 산길에 짙은 소나무 숲이 있다. 그렇기에 호젓하면서도 청량감 넘치는 곳이 바로 우곡성지다. /류중천 시민기자

2026-01-06

‘경상도지리지’ 발간 600주년 기념 특별전

국립대구박물관은 지난해 11월 25일부터 오는 2월 22일까지 조선시대 지리지(地理誌)를 주제로 한 특별전 ‘사람과 땅, 지리지에 담다’를 전시하고 있다. 이번 특별전은 올해로 발간 600주년을 맞은 ‘경상도지리지’의 탄생을 기념하고자 마련됐다. 전시장에서는 ‘세종실록지리지’와 ‘대동여지도’,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지리지(모사본)’, ‘대구달성도’, ‘대구부읍지’ 등 87건 198점의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다. 총 4부로 구성된 이번 전시를 통해 조선시대 국가 통치의 기반이 된 자료는 물론 옛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도 살펴 볼 수 있다. 1부 전시 ‘사람과 땅’에서는 선조들이 땅 위에 새긴 삶의 흔적들을 살필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425년 세종의 명으로 편찬된 ‘경상도지리지’다. 이는 경상도의 사회·경제 상을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지리지로 당시의 행정구역, 연혁, 지세, 인구, 세금, 특산물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가로 45㎝, 세로 85㎝ 크기에 달하는 경상도지리지는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인 서지학자 마에마 교사쿠가 그 무게를 달아봤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방대한 분량이다. 또한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명시한 ‘세종실록지리지’와 더불어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공개되며, 암행어사가 휴대했을 법한 소형 지도 등 실용적 유물도 만날 수 있다. 2부 ‘숫자로 보는 국가’는 조선이 철저한 기록과 통계의 나라였음을 보여준다. 관람객들은 각종 인구·토지·군사 지표를 통해 조선의 국가경영 방식을 가늠할 수 있다. 당시의 주민등록등본 격인 ‘준호구(准戶口)’ 및 각 고을의 토지와 세금 등 상세한 통계를 담은 ‘읍지(邑誌)’가 눈길을 끈다. 특히 왕과 일부 대신만 열람할 수 있었던 일종의 ‘국정 빅데이터’인 ‘만기요람’에는 국가의 재정부터 무기고의 칼과 총의 개수까지 정밀하게 기록돼 있다. 이 밖에도 산송(묘지 소송)을 위해 그린 ‘산도(山圖)’와 토지 매매 문서 등은 당시 땅을 둘러싼 치열한 사회상을 반영한다. 노비에게 몰래 땅을 팔아먹은 스님을 고발하는 문서도 보인다. 3부 한글 지도첩 ‘전지도’는 독도를 ‘방산도’로 표기했다. 한자 ‘우산도(于山島)’의 ‘우(于)’자를 ‘방(方)’자로 오독해 기록한 흔적이라 한다. 또한 지도의 거리 기점을 한양이 아닌 대구로 삼은 ‘해좌일통전도’도 볼 수 있다. 또 고산자 김정호의 대작들을 한자리에 모은 공간도 볼 수 있다. ‘대동여지도’는 물론, 대동여지도보다 7000여 개의 지명이 더 수록된 ‘동여도’, 그리고 대동여지도 제작의 기반을 다진 필사본 지도인 ‘동여’를 만날 수 있다. 4부 ‘사람과 삶의 흔적’은 기록의 행간에 스며든 삶의 모습들을 조명한다. 시문과 인물, 고적 자료를 중심으로 땅을 터전 삼아 희로애락을 나누었던 옛 사람들의 생생한 흔적을 만날 수 있다. 한편 박물관 측은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한 해설 QR코드, 시청각 장애인을 위한 촉각 체험물과 수어 해설 영상, 전시장 중간의 퀴즈 코너 등을 마련했다. /안영선 시민기자

2026-01-04

대구에도 힐링하기 좋은 대나무 숲길이 있다

대나무 숲길이라 하면 으레 울산이나 담양 등을 떠올린다. 우리 대구에도 대나무 숲길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보았다. 2호선 강창역과 대실역 사이 강창교 아래 울창하게 뻗어있는 대나무 숲이 있다. 대실 역에 내려 시내 강창교 쪽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닿는다. 이곳은 달성군이 지난 2021년 코로나19에 지친 주민들의 힐링을 위해 야심차게 조성한 ‘죽곡, 댓잎 소릿길’이다. 이 지역은 옛날부터 대나무가 많아 지명도 죽곡(대실)이다. 아쉽게도 숲길이 강창교 다리 아래에 숨어 있어 자동찻길로는 잘 보이지 않아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 4년 전 설치 당시에 총 길이 800미터에 대나무 8000본을 심었지만 지금은 수십 배에 이르는 울창한 대나무 숲으로 변모했다. 주위에 대구 12경으로 유명한 강정보와 물 문화관 디아크가 있어 하루 코스의 힐링 장소로 안성맞춤이다. 이곳 주민들에게는 조깅 장소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입구 문주에 ‘죽곡 댓잎 소리길’이란 글자가 기자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바람에 댓잎이 내는 ‘싸그락 싸그락’ 소리 들으며 좌우에 우거진 대나무숲 길을 걷는다고 생각하니 마치 내가 신선이 된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서니 까마득하게 길게 뻗은 숲길이 꽉 막혔던 내 마음을 뻥 뚫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더욱이 맨발 길로 조성돼 있어 직접 맨발로도 걸어보았다. 땅의 기운이 온몸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좌우에 대나무로 엮어 만든 울타리가 정감을 느끼게 했고 길을 가다 힐링 장소로 설치한 조형물들이 이색적이었다. 군데군데 대나무 침대, 대나무 의자가 있어 죽림욕을 즐길 수 있게 하여 기자도 한번 침대에 누워 보았다. 온몸을 대나무 숲에 맡기니 내가 주인처럼 느껴졌다. 숲속 작은 광장에는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조형물 팬더 가족이 정답게 앉아있고 작은 음악회라도 펼칠 수 있는 연단도 마련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단 둘아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앙증맞은 독서대가 있어 앉아 보기도 했다. 입구에 마련된 쉼터에는 ‘당신의 뱃살은 표준입니까?’라는 뱃살 측정대가 나이 대 순으로 만들어져 있어 눈길을 끌었다. 찌든 마음을 식힐 수 있고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있는 2호선 역세권에 있는 ‘죽곡 댓잎 소릿길’을 시민들이 많이 이용했으면 한다. /최종식 시민기자

2026-01-04

“지나온 굽이길, 한 권의 유산이 되다”

고령사회로 접어들며 노년의 삶의 질과 자아실현이 중요한 사회적 과제로 떠오르는 가운데 평범한 어르신들의 인생을 기록으로 남긴 뜻깊은 결실이 지역사회에 잔잔한 감동을 전하고 있다. 대구 비원노인복지관(관장 권덕환)은 구랍 29일 복지관 대강당에서 ‘나다운 삶을 위한 치유 글쓰기’ 자서전 교실 평가회 및 책 발간 기념식을 개최했다. 이번 행사는 2025년 1·2기 과정에 참여한 네 분의 어르신이 5개월간의 글쓰기 여정을 마치고 각자의 삶을 담은 자서전 출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단순한 프로그램 종료를 넘어, 평생을 가족과 사회를 위해 살아온 어르신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돌아보고 기록으로 완성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했다. ‘나다운 삶을 위한 치유 글쓰기’는 어르신들이 기억과 감정을 글로 표현하며 정서적 안정과 자아 존중감을 회복하도록 돕기 위해 기획된 프로그램이다. 특히 과거를 회상하고 이를 글로 정리하는 과정이 인지 기능을 자극해 치매 예방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낸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수업은 작법 기술보다 삶 그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 어르신들은 어린 시절의 기억부터 생업의 현장, 기쁨과 아픔이 교차했던 인생의 굽잇길을 원고지 위에 한 줄 한 줄 풀어냈다. 지난 5월부터 12월까지 이어진 긴 여정은 방종현 지도교수와 김윤숙 강사의 세심한 지도 속에 진행됐으며 처음에는 글쓰기를 어려워하던 참여자들도 점차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마음을 열었다. 교실은 어느새 배움터를 넘어 공감과 연대의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완성된 자서전을 손에 쥔 네 분의 어르신은 깊은 감회를 전했다.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책으로 남길 수 있어 보람차다”, “과거를 정리하며 나 자신을 다시 만나는 시간이었다”, “잊고 지냈던 기억이 되살아나 삶이 단단해졌다”는 소회는 글쓰기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삶을 치유하는 과정임을 보여줬다. 현장에서 프로그램을 함께한 은윤수 사회복지사는 “글쓰기를 통해 어르신들이 자부심을 되찾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큰 감동을 받았다”고 전했다. 방종현 지도교수 역시 “자서전은 문장력이 아니라, 정직하게 자신의 삶을 마주하는 용기로 완성된다”며 “이번 발간은 노년의 삶 또한 존중받고 기록돼야 할 소중한 역사임을 일깨운다”고 평가했다. 비원노인복지관은 이번 성과를 바탕으로 어르신들의 삶과 경험이 다음 세대에 전해질 수 있도록 기록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한 줄의 기억에서 시작해 한 권의 인생으로 완성된 이번 자서전 교실은, 노년기 역시 여전히 성장하고 기록될 수 있는 아름다운 시간임을 증명하며 지역사회에 깊은 울림을 남기고 있다. /장혜숙 시민기자

2026-01-04

(방종현 시민기자의 유머산책)한국인은 왜 ‘삼세판’에 목숨을 거는가

한국인의 삶은 ‘3’이라는 숫자의 거대한 그물망 속에 놓여 있다. 단순한 숫자의 나열을 넘어, 3은 우리 민족에게 우주를 이해하는 틀이자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법칙이며, 나아가 삶의 고비마다 중심을 잡아주는 심리적 지지대 역할을 해왔다. 흔히 쓰이는 ‘삼세판’이라는 말 속에는 한 번의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두 번의 우연에 기대지 않으며, 세 번의 과정을 통해 정당한 결과를 수용하겠다는 우리만의 독특한 철학이 담겨 있다. 우리 조상들은 우주의 근본 원리를 ‘천지인 삼재(天地人 三才)’에서 찾았다. 하늘(天)과 땅(地),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人)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세상이 온전해진다고 믿었다. 이는 단지 추상적인 관념에 머물지 않고 우리네 인생관으로 확장되었다. 인생을 전생, 금생, 후생의 ‘삼생(三生)’으로 나누어 바라본 것이 대표적이다. 이번 생이 다소 고달프더라도 다음 생이라는 희망의 여지를 남겨두는 여유, 그것은 3이라는 숫자가 주는 구원이기도 했다. 인간관계와 사회 구조 역시 3의 굴레를 벗어나지 않는다.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면 친가, 외가, 처가(혹은 시가)라는 ‘삼족(三族)’의 관계망이 형성된다. 과거 대역죄인에게 내린 ‘삼족을 멸한다’는 형벌은 3이 한 개인을 둘러싼 완결된 세계를 의미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종교와 사상 또한 마찬가지다. 유교의 도덕적 뼈대인 ‘삼강(三綱)’, 불교의 ‘삼존불’과 ‘삼매경’, 기독교의 ‘삼위일체’에 이르기까지, 3은 성스러움과 진리를 상징하는 숫자로 군림해 왔다. 아이의 탄생 순간부터 3의 서사는 시작된다. 아이를 점지하는 ‘삼신할미’의 존재와 출산 후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며 산모와 아이를 보호하는 ‘삼칠일(21일)’의 관습은 과학적 회복기와 맞물려 3이 생명의 숫자임을 증명한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으로 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작심삼일’이라는 인간적인 빈틈을 허용하는 것 역시 3이 가진 묘한 매력이다. 사흘을 넘기지 못하는 의지력을 탓하기보다 3이라는 마디를 통해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는 셈이다. 국가 운영과 법치에도 3의 원리는 엄격하게 적용된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삼정승’ 체제는 오늘날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으로 이어졌고, 사법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삼심제도’는 억울함이 없도록 세 번의 기회를 보장한다. 놀이문화에서도 단판 승부보다는 ‘삼판양승’을 선호하는 것이 우리네 정서다. 한 번의 승부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세 번의 과정을 통해 진정한 승자를 가리는 문화는 공정함과 끈기를 동시에 존중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일상의 의식주와 예술적 균형에서도 3은 빛을 발한다. 하루 세 끼를 챙겨 먹는 식습관, 제사 때 술을 세 번 올리는 헌작, 빛과 색의 삼원색이 조화되어 만물의 색을 만들어내는 원리가 그러하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전 “하나, 둘, 셋!”을 외치는 짧은 순간은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찰나의 집중력을 상징한다. 솥발이 세 개일 때 지형에 상관없이 가장 완벽한 수평을 잡듯, 3은 불안정한 현실 속에서 가장 견고한 안정을 찾아내는 마법의 숫자다. 유비가 제갈량을 영입하기 위해 세 번 찾아간 ‘삼고초려’나, “참을 인(忍) 자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는 격언은 3이 인내와 진심의 척도임을 보여준다.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된 3·1 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3인, 그리고 마지막을 장식하는 ‘만세삼창’의 울림 역시 우리 민족의 정기가 3이라는 숫자와 결합할 때 얼마나 큰 폭발력을 갖는지 상기시킨다. 결국 3은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타인과 소통하며 스스로를 다스리는 삶의 방식 그 자체다. 하나는 외롭고 둘은 대립하기 쉽지만, 셋이 모이는 순간 비로소 안정적인 삼각형의 구조가 완성된다. 치우치지 않고, 넘치지 않으며, 흔들리되 무너지지 않는 균형점. 우리가 오늘도 회식 자리에서 “딱 세 잔만!”을 외치고(비록 그것이 삼차까지 이어질지언정), 고단한 삶 속에서도 ‘삼세판’의 기회를 꿈꾸는 것은 3이라는 숫자가 가진 무한한 포용력과 회복 탄력성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3은 한국인에게 가장 완벽한 삶의 핑계이자, 끝내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희망의 마침표다. /방종현 시민기자

2026-01-04

명량해협 울돌목에서 성웅 이순신을 만나다

울돌목에서 나라를 위해 고뇌하는 이순신을 만난다. 그의 손에는 예외 없이 들고 있는 익숙한 장검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지도를 움켜쥔 채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극도로 불리한 조건 앞에서 분노보다 책임을 먼저 떠안았던 장수. 끝없이 고뇌하는 그의 뒷모습은 400여 년이 흐른 지금 이 순간에도 묘하게 든든함을 준다. 13척의 배로 130여 척의 적선(敵船)과 맞서야 했던 그의 시선은 바다를 두려워하지도 얕보지도 않는다. 포항에서 남해 끝 전남 진도군까지 다섯 시간을 달린다. 선뜻 나서기 쉽지 않은 거리지만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우리들의 이순신’ 전시를 본 후 명량대첩의 현장인 울돌목에서 그와 마주하고 싶다는 일념이 먼 거리를 감내하게 한다. 울돌목은 변함없이 거친 조류에 바닷물이 뒤집히며 용트림을 한다. 직접 함선을 건조하고 군량미 조달과 부상병, 피난민까지 먹여 살리며 전투에 임했다는 이순신은 국내에서 가장 작은 동상으로 돌아와 당시 형용할 수 없이 급박했던 상황을 재현한다. 전율이 인다. 이순신의 기운이 감도는 진도군과 해남군을 둘러보기 위해 관광지도를 펼친다. 누구는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지도를 움켜쥐었고 누구는 저 하나 삶의 무게를 덜고자 지도를 펼친다. 가까이 벽파정에 오르니 ‘이충무공벽파진전첩비'가 눈에 들어온다. 거북이 등에 우람히 올라선 비석은 그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다는 듯 우리 땅, 우리 바다를 향해 우뚝 서 있다. 나란히 서서 바다를 보니 그냥 뭉클하다. 이어 찾아간 신비의 바닷길. 모세의 기적은 계절마다 나타나는 시간이 달라 겨울에는 보기가 힘들다며 4월 축제를 기약하라는 안내를 듣지만 섭섭지 않다. 바닷길이 열린다는 앞바다에 고깃배들이 장난감처럼 옹기종기 떠 있는 평화스러운 풍경만으로도 충분히 신비스럽다. 일몰이 아름답다는 세방낙조로 향하는 길, 차창 너머로 언뜻 스친 팽목항. 이 바다에서 또 다른 잊지 못할 희생과 마주한다. 먹먹해져오는 가슴을 달래고자 잠시 들러 그들을 위해 묵념을 올린다. 날씨가 흐려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없었지만 아쉽지 않다. 해비치 카페에서 따끈한 커피 한 잔으로 추위를 녹이며 바라 본 서해바다는 일몰 없이도 매우 아름답다. 고산 윤선도의 녹우당과 소치 허련의 운림산방에서 그들의 정신세계를 탐하고, 법정 스님 생가 터에서 스님이 손수 만들었다는 나무의자에 잠시 앉아 마음의 짐 덜어내 본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끝없이 이어지던 겨울 햇살 먹은 배추와 파, 당근, 시금치들을 완도군 오일장에서 만난다. 남도 음식이 맛있는 이유는 이미 재료에서 완성된 느낌이다. 차 트렁크가 넘치도록 장을 본다. 진도를 떠나기 전 다시 찾은 울돌목. 급히 흐르는 조류는 여전히 무섭게 용트림을 하고 있다. 이순신의 고뇌하는 동상을 본다. 장검을 움켜쥐고 광화문을 늠름히 지키는 거대한 동상만큼이나 지도를 움켜쥐고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이 작은 동상의 뒷모습에서도 위풍당당의 전율이 같은 무게로 흐른다. 남도의 바다는 그렇게 오늘도 역사 속에서 숨 쉬고 있었다. 다사다난했던 을사년 한 해가 저물고 병오년 새해가 밝았다. 역사는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의 삶 속에서 계속 숨 쉰다. 울돌목에서 만난 이순신의 고뇌는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크고, 그리고 깊게 숨을 고르며 이순신 장군의 후손답게 당당히 새해를 향해 걸음 내딛는다. /박귀상 시민기자

2026-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