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전화, 음성 꽃동네 봉사활동 각종 수상하고 상금은 어려운 이에게 기부
유가형(劉家兄) 시인은 쉰여섯의 늦깎이로 시단에 등단했다. 대구작가콜로퀴엄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작가콜로퀴엄 도서관이 세워지자 관장을 맡아 사람과 책, 그리고 시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시를 하는 사람이면 그가 봉사 활동가로서 살아온 삶을 잘 안다. 그는 그의 이름처럼 집안의 맏형같이 남을 돕거나 굳은 일에는 언제나 앞장섰다. 경남 거창 출신으로 올해 만 80세의 나이지만 열심히 살아온 탓인지 나이 든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유가형 시인은 봉사활동을 많이 하게 된 배경이 있나요.
△1950~60년대 산골에 살던 고향을 빨리 떠나고 싶어 대구에서 공장에 다닌다는 총각의 선이 들어오자 산골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에 결혼을 했습니다. 공장을 일구는데 함께 노력했는데 고생도 많이 했죠. 다행히 공장이 잘 돌아가 다른 공장도 인수하고 돈을 벌게 되자 어려운 사람을 돕고자 했던 것입니다.
-생명의전화 봉사는 언제부터 하셨는지.
△1985년부터 40년을 했어요. 그 당시만 해도 밤 근무할 사람이 없어 밤 근무를 거의 혼자 했죠. 30년은 밤 근무 10년 정도 낮 근무했어요. 처음 하면서 세상의 물정을 몰라 어려운 일도 많이 당했지만 보람도 많았어요. 생명의전화를 붙들고 많은 사람들의 고민을 들으며 깨우친 바도 큽니다. 감사하다는 전화도 많이 받았어요. 그것이 바로 보람된 일이라 할 수 있죠.
-음성 꽃동네 봉사활동도 오래 하셨죠.
△약 30년 전에 음성 꽃동네 입구 돌에 새겨진 “얻어먹을 힘만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그 말이 저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습니다. 지금까지 음성 꽃동네와 인연을 맺어오고 있습니다. 편도 4시간이 걸리는 소록도를 작은 티코를 끌고 20여 년을 다녔으며, 나중에는 봉고차를 빌려서 갔다가 자고 오기도 했습니다. 그 후 ‘나무를 찾아 나를 찾아서’란 모임에서 소록도 중앙공원 갔을 때 교회 장로님을 통해 그곳 사람들의 어려운 사연을 듣고 많이 울었어요. 2016년 이불 10채를 보내준 뒤로는 내 몸도 아팠고, 지금은 약간 소원해진 셈이죠.
유가형 시인은 방글라데시의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 아이들의 소식에 마음이 아파 친구 세 명과 함께 적지 않은 금액을 두 아이에게 10년간 후원했다. 대구 생명의전화 30주년 기념 ‘유가형 청실홍실민화전’을 열고, 그 수익금 전액을 생명의 전화에 기부하기도 했다.
정무장관 및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 대구시민상 수상, 고려대 청야봉사상, 코오롱그룹 오운문화재단 우정 선행상을 수상했다. 상금은 받을 때마다 자비를 보태어 복지 기관이나 어려운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그의 왕성한 문학 활동과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활동으로 그의 시비도 곳곳에 많이 세워졌다. 도동 시비 동산과 거창 중앙공원, 대구 북구 운암지, 칠곡 석적 호국 망정마을 평화 광장에 가면 그의 시비를 구경할 수 있다.
/유병길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