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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소못 소랑햄수다

정미영 수필가 “소못 소랑햄수다.”제주도 동백나무 수목원인 카멜리아힐에서 장식용 족자에 쓰인 문구를 본다. 정말 사랑합니다, 라는 뜻의 제주도 방언이란다. 나는 곧장 동백나무 꽃말을 떠올려본다.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역시 필연성 높은 소품이군! 수목원 관리자가 숨겨 놓은 퀴즈문제를 나 혼자 맞힌 것처럼 값싼 자기도취에 빠져 나무 사이를 걷는 내내 뿌듯해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꽃향기를 따라 친구의 애틋했던 첫사랑이 떠올라 내 마음이 어지럽다.친구는 지독한 몸살을 앓았다. 스쳐가는 바람에도 마음이 들뜨는 대학 새내기, 사랑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상대는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 사랑은 사치라고 했다. 그래도 친구는 멈추지 않고 가슴앓이를 했다. 슬픈 시만 골라 읽고 가슴 먹먹해지는 노래만 들었다. 떨어지는 꽃잎에도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사랑을 떠올렸다.어느 날, 가느다란 손가락을 잘근 씹으며 선운사 동백꽃을 봐야겠다고 했다. 발끝을 내려다보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더니 무릎을 세우고는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두었다. 친구의 작은 몸집 어디에 그토록 많은 눈물이 숨어 있었는지,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이 큰 눈물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시나브로 잊히는 듯했다. 동백꽃이 질 때쯤, 친구는 다시 선운사에 가고 싶다고 했다. 저러다 자그만 몸이 형체도 없이 삭아 내릴 것만 같아 지켜보는 내가 조바심이 났다. 어쩌면 선운사에 가서 동백꽃을 실컷 보고 가슴 가득 채우고 나면 힘든 사랑을 완벽하게 잊어버리지 않을까.우리는 기어이 고창 선운사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 안에서 우리 둘은 침묵했다.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이 오히려 힘들게 할 것 같아 어색해도 참았다. 그 대신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눠 끼고 송창식의 ‘선운사’ 노래에 몰입했다.‘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가던 길에 갑자기 비가 흩뿌렸다. 내리는 빗소리가 내 마음을 착잡하게 했다. 꽃이 또 떨어지겠구나, 괜스레 안타까웠다. 맑은 날 붉게 벙근 꽃봉오리를 보는 것이 훨씬 좋을 텐데. 노랫말처럼 바람 불어 설운 것보다 비가 와서 더 설운 날이 되면 어쩌나 애가 탔다. 내 마음을 모르는 비바람이 속을 휘휘 젓고 다녔다.다행히 도착할 즈음 비가 그쳤다. 멋스러운 선운산의 풍경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선운사 입구에서 절 뒤쪽 산자락에 빽빽이 들어선 삼천 그루의 동백나무 속에 친구가 부디 아픈 사랑을 묻을 수 있기를 바랐다.친구는 꽃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토록 간절히 원해 찾아왔지만 막상 보려니 두렵단다. 한 자락 남아 있던 그리움이 낱낱이 바람에 흩날려 사라질까 무섭다고 했다. 친구의 몸 속 깊은 곳에 고여 있던 그리움이 흔들리고 있었다.나뭇가지에서 막 떨어지는 꽃송이가 있었다. 꽃의 추락이었다. 꽃잎이 한 장씩 떨어지지 않고, 꽃봉오리째 툭 떨어져서 슬프게 느껴졌다. 내 눈에는 꽃이 질 때가 되어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가장 화려할 때 떨어지는 것 같아 더욱 애절해 보였다.친구의 사랑도 왠지 동백꽃을 닮은 듯했다. 피었다가 떨어지는 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식어간 첫사랑이었다. 그녀의 나이 스물, 빛나게 푸르러야 할 사랑이 금세 이울고 있었다.동백꽃 화가로 유명한 강종열 화백의 그림 속을 노닐 듯 까멜리아힐을 걷다가, 머리 위로 떨어지는 꽃잎에 고개를 든다. 꽃자리를 손끝으로 매만지면서 문득 생각해 본다. 꽃이 져야 열매를 맺듯, 기쁜 사랑이나 아픈 사랑을 경험한 후에 내적 성장을 이루는 것이 우리네 인생사라는 것을. 그러니 친구든, 가족이든,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눠주는 일에 인색하지 않아야겠다. 소.못.소.랑.햄.수.다.

2022-02-16

④ 일상의 소중한 실천, ‘낚시면허’이야기

캐나다에서 취미낚시를 하려면 ‘면허’(fishing licence)를 구입해야 한다. 낚시 방법과 잡을 수 있는 어종, 어종 크기 등 정해진 조건을 지키고 필히 따라야 한다. 몰랐다는 변명은 수십만 원에 달하는 벌금으로 이어진다. 미국과 독일 등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독일은 낚시 면허를 따기 위해 시험까지 친다고 한다. 수산자원과 해양생태계를 보호하려는 이들의 노력에 놀라면서 동시에 ‘낚시면허’ 뒤에 숨은 내막이 궁금해진다.사실 캐나다는 30년 전 ‘대구 어장’으로 유명한 그랜드뱅크스(Grand Banks)의 폐쇄를 경험했다. 대구와 청어가 풍부해 세계적인 어장으로 손꼽히던 뉴펀들랜드의 그랜드뱅크스는 1950년대 트롤어선(trawl)이 등장하면서 고갈되기 시작했다. 바닥을 훑어가며 서식지를 쓸어가는 트롤방식의 어업은 수 백 톤에 달하는 대구를 잡아들이고 새끼와 산란장을 무너뜨렸다. 끝없이 계속될 듯한 만선의 풍요는 1980부터 이상 징후를 보이다 결국 1990년 완전 고갈됐다. 캐나다 정부는 1992년 어장을 폐쇄했고, 4만 명에 달하는 종사자들도 직장을 잃었다. 이는 미국의 조지뱅크까지 여파를 끼쳐 인근 어장이 폐쇄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특정 어종의 고갈은 비단 캐나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도 그 많던 쥐치와 명태가 고갈됐다. 이는 어획량의 감소와도 연관된다. 마구잡이 혼획과 남획이 이어지면서 개체수 자체가 급격히 줄었다. 서식지를 파괴해가면서 치어와 알밴 물고기까지 잡아들였던 과거가 이끌어 낸 현실이기도 하다.여기에 폐어구 등 해양쓰레기와 기후변화까지 더해져 수산자원 고갈 시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해양쓰레기의 30%에 달하는 폐어구는 유령어업(ghost fishing)이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버려진 폐그물이 바다 중간층을 떠다니며 물고기를 잡는다. 잡힌 물고기는 살점으로 다른 물고기를 유인하고 또 다른 물고기가 잡히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폐그물은 수산자원의 피해로만 그치지 않는다. 선박의 프로펠러 감김 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조난 등 해양사고를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로 매년 증가세다.수산자원이 고갈되고 해양생태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시그널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원인을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 시행하는 과정이 매년 반복되지만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지속가능한 어업에 관한 화두와 낚시 면허제 도입 등 다양한 대안이 제시되지만 현실 적용은 언제나 그렇듯 더디다. 특히 낚시 면허제 도입은 어업인과 취미 낚시인들의 반목과 갈등으로만 치부될 뿐 해양생태계 전체를 바라보는 판단은 유보된다.낚시인구가 700만 명을 넘어서고, 낚시 예능이 인기를 끌면서 취미 낚시는 하나의 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예능에서 소비되는 낚시의 재미와 경제적 이점만 취할 뿐, 취미낚시로 인한 자원 고갈과 해양오염 문제는 논의되지 않는다. 취미낚시로 잡힌 수산물이 우리나라 전체 어획량의 15%가량을 넘어선다는 게 현장의 주장이다. 공식집계가 되지 않아 어림잡은 수치이지만 전문가 의견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낚시에 사용되는 봉돌(낚싯줄 끝에 매다는 작은 쇳덩이)이나 낚시인들이 버리고 가는 쓰레기양도 결코 적지 않다. 어업인과 취미 낚시인, 관광객 등 누구 하나 무너지는 해양생태계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현미작가 바다는 공유자원이다. 공유자원은 흔히 고전경제학에서 말하는 ‘목초지의 비극’으로 결말이 난다. 누구도 관리하지 않기에, 결국은 버려져 황폐해진다는 논리다. 이에 제3의 대안을 제시, 노벨경제학상을 탄 정치경제학자가 있다.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 그녀는 목초지와 산림, 어장 등 ‘공유의 비극’ 사례를 분석, 해법을 제시했다. 지역 공동체가 나서 공유자원 관리 시스템을 운영하고 동시에 자발적인 감시와 모니터링 기능을 강화하는 것. 합리적인 해법이지만 우리나라 현실 적용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의 작은 실천들이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씨스피라시-SEASPIRACY’는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 지속가능한 어업의 이면을 파헤친다. 지속가능한 어업 표준을 획득한 거대 기업들이 실상은 에코라벨만 받을 뿐 불법 현장을 외면한다는 것이다. 태국과 일본, 페루 등 전 세계의 어업현장을 고발하며 상업적인 어업 시스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되묻는다. 해양생태계를 살리기 위해서는 거대기업들이 판매하는 수산물의 섭취를 줄여야하지 않을까하고 말이다.‘역량과 품격을 갖춘 해양선도국가 실현’, 해양수산부가 발표한 국가비전이다. 역량은 충분한 듯하다. 고출력에 어군탐지기, 위성항법장치 등 첨단화된 어획 역량은 이미 차고 넘친다. 이제는 품격이다. 적어도 금지 어종이나 금어기, 금지체장 정도의 지식을 알고 취미낚시를 즐겼으면 한다. 낚시면허제가 언제쯤 생길지 알 수는 없으나, 제도가 생기 전까지 수산자원이 버텨주길 간절히 바래본다.

2022-02-16

공약 대결에 집중하는 대선후보들 긍정적

대선 공식 선거운동 첫 날인 지난 15일 여야 주요 대선 후보들이 일제히 대구를 찾아 ‘TK(대구경북)공약’ 유세전을 벌였다. TK지역은 전통적인 보수정당 홈그라운드로 여겨져왔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비교적 다양한 지지성향을 보여 여야 정당으로부터 격전지로 분류되고 있다. 이 때문에 각 후보들은 첫날 일정부터 TK지역을 중요시하며 유세화력을 집중했다.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이날 대구 동성로에서 ‘대구 대전환 선대위’ 출정식을 갖고 “대구·경북의 개혁 정신을 반드시 실천하겠다”고 밝히면서, KTX 대구 도심 구간 지하화, 대구 군기지 이전, 통합신공항 2028년까지 추진, 대구취수원 다변화 등 ‘TK 7대공약’을 발표했다.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이날 오후 동대구역 광장에서 처음으로 홍준표 선대위 고문과 함께 대구 유세를 했다. 윤 후보는 당내 경선 당시 홍준표(대구 수성을) 의원이 제시한 공약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활주로 3천800m 규모의 국비 공항 건설, 대구공항 후적지 두바이식 개발, 포항 포스코 수소경제센터 설립 등의 공약을 발표했다. 윤 후보는 “포스코 본사 이전을 막아달라”는 홍 의원 제안에 “포항을 (서울)강남으로 만들겠다”며 해결을 약속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는 지난 14일에 이어 15일에도 TK지역 유세를 이어가며 “세계 초일류 과학기술 5개를 만들어서 삼성전자와 같은 세계적인 대기업 5개를 만들고, 우리나라가 경제 5대 강국에 들어가게 하겠다는 게 저의 ‘555공약’이다. 그 뿌리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강조했다.이날 대선후보들의 TK 유세현장은 각 정당 지지자들과 시민들이 대거 몰려 축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이재명·윤석열 두 후보가 지난 2020년 2월 대구에서 코로나 집단감염 사태가 발생했던 당시의 신천지논란과 대구봉쇄 발언을 두고 난타전을 벌이긴 했지만, 상대후보에 대한 네거티브전은 가급적 자제하는 모습이었다.유력 대선후보들이 오랜만에 해당지역에 집중하는 정책공약 대결을 펼치며 지지를 호소하는 모습에 유권자들도 박수를 치며 환영하는 반응을 보였다.

2022-02-16

지방소멸기금, 지자체 파격적 전략 나와야

정부가 인구소멸위기에 처한 자치단체의 인구감소 대응책으로 올해부터 연 1조원의 지방소멸대응 기금을 마련해 인구감소 위기를 맞고 있는 전국 지자체에 지원키로 했다. 올해 정부 기금을 지원받는 지자체는 전국적으로 89곳이다. 경북은 안동시 등 위험지역 16곳과 관심지역 2곳을 포함해 모두 18개 시군이 이에 해당된다. 지원금은 광역단체 25%, 기초단체 75%로 배분되며 사업의 타당성이나 효율성을 평가해 잘하는 곳은 더 많이 준다는 계획이다.경북도는 2022년과 2023년에 걸쳐 광역분 848억원을 포함 5천468억원의 기금이 확보될 것으로 보고 지난 15일 해당 시·군 관계자의 전략회의를 가졌다. 특히 이번 소멸대응 기금은 정부가 내려주는 하향식이 아닌 지자체 스스로가 구체적인 대응전략을 마련해 평가 받는 상향식이어서 지자체 대응력이 기금확보의 중요한 잣대가 된다.자치단체가 수립한 계획이 창의적이고 실천 가능하며 얼마나 효율적인지를 평가를 통해 따져 보겠다는 것이다.매년 수천억원의 재정을 지원받는 자치단체로서는 상대적 평가를 받아야 하는 만큼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 더 많아졌다. 계획이 지방소멸 대응이라는 목적에 잘 부합해야 함은 물론 지역적 특성과 효율성 그리고 타 지자체와의 경쟁력 등 전반적으로 고려할 요소가 많아졌다. 과거 지자체가 남발한 출산장려금 같은 수준의 정책으로는 큰 점수를 얻기 어려워진 것이다.인구소멸 대응전략이 지자체의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개선될 만큼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만 재정의 낭비를 줄이고 효과는 최대한 살려라는 뜻이다.경북은 23개 시·군 중 18개 시·군이 인구소멸의 위험이 상존하는 전국 최고 위험지역이다. 그동안 지자체마다 이에 대응하는 전략을 짜 봤지만 효과는 별무였다. 수도권 집중이라는 근본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좋은 해법을 구할 수 없는 현실적 어려움도 있다.하지만 처음으로 시작하는 정부의 인구소멸대응기금 지원이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지자체 차원의 대응 방법도 과거와 다른 파격적 변화가 필요한 때다.

2022-02-16

ESG 경영

ESG 경영은 기업의 비재무적 요소인 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를 중시하는 경영방식을 가리킨다.최근 들어 기업이 투자 의사를 결정할 때 기업의 재무적 성과만을 판단하던 전통적 방식과 달리 장기적 관점에서 기업 가치와 지속가능성에 영향을 주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등의 비재무적 요소를 충분히 반영해 평가한다.기업의 ESG 성과를 활용한 투자 방식은 투자자들의 장기적 수익을 추구하는 한편, 기업 행동이 사회에 이익이 되도록 영향을 줄 수 있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기업과 투자자의 사회적 책임이 중요해지면서 세계적으로 많은 금융기관이 ESG 평가 정보를 활용하고 있다. 영국(2000년)을 시작으로 스웨덴, 독일, 캐나다, 벨기에,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서 연기금을 중심으로 ESG 정보 공시 의무 제도를 도입했다.UN도 2006년 출범한 유엔책임투자원칙(UNPRI)을 통해 ESG 이슈를 고려한 사회책임투자를 장려하고 있다.우리나라에서는 2021년 1월 금융위원회가 오는 2025년부터 자산 총액 2조원 이상의 유가증권시장 상장사의 ESG 공시 의무화가 도입되며, 2030년부터는 모든 코스피 상장사로 확대된다고 발표했다.최근 한국ESG연구소는 아파트 붕괴사고가 발생한 광주 화정아이파크의 시공사인 HDC현대산업개발에 대해 ESG통합 등급을 기존 B에서 C로 하향 조정했다. 연구소는 지주사인 HDC에 대해서도 HDC현대산업개발의 평가와 연계해 통합 ESG등급을 B+에서 B로 하향했다.바야흐로 기업이 환경·사회·지배구조 등의 사회·윤리적 가치를 신경써야 살아남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2-02-16

유권자의 시간

제20대 대통령 선거의 막이 드디어 올랐다. 각 정당 대선후보들은 선관위에 등록을 마치고 어제부터 22일간의 공식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확성기 유세와 현수막 게재, 신문, TV광고 등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한 합법적 방법이 모두 동원되는 치열한 선거전이 본격화된 것이다.선거는 나의 생각을 잘 반영해 정치를 잘 이끌 대표자를 뽑는 일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선 국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대표적 방법의 하나로 선거를 꼽는다. 그래서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 부른다.나를 대신해 정치해 줄 대표를 잘 뽑아야 국가나 지역도 발전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능력이 부족하거나 도덕적이지 못한 대표를 뽑게 되면 나라 정치가 엉망이 될지 모른다. 특히 모든 권력이 집중된 대통령 선거는 더 신중하게 생각하면서 후보를 잘 결정을 해야 후회가 없다.대한민국 헌법 1조 2항에는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하고 있다. 국민의 대표자에게 위임된 권력이 특정인이나 정치인, 권력집단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민주주의를 뜻하는 Democracy는 고대 그리스어 demos(민중)와 kratia(지배)의 합성어다. 곧 민중에 의한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다.민주적 절차를 통해 권력을 잡은 자가 잘못된 정치를 하면 그 결과는 고스란히 국민 몫이 된다. 잘못된 정책으로 예산이 낭비되면 그 빚을 국민이 갚아야 한다.국민이 가진 권력을 위임할 대통령을 뽑을 날이 이제 20일 정도 남았다. 어떤 후보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공평하고 국민의 삶을 윤택하게 할 것인지 냉철하고 지성적 판단으로 지켜보아야 한다. 유권자의 시간이 돌아왔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 후회없는 선거를 하여야 할 것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2-02-15

포스코 서울행은 포항 경제 위기 낳는다

대구경북연구원은 지난 14일 발표한 ‘대경 CEO 브리핑’에서 “포스코그룹 신설지주사(포스코홀딩스)와 싱크탱크인 미래기술연구원을 포항에 설립하면 생산유발효과와 부가가치 유발액이 3천200억원에 달하고, 취업 유발 인원도 1천744명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브리핑자료에 따르면, 결국 그룹지주사와 싱크탱크가 서울에 설립되면 포항은 이 같은 경제 효과를 몽땅 서울에 빼앗기게 된다는 얘기다. 브리핑 자료는 “그동안 포스코가 미래동력사업으로 공을 들여온 AI, 수소 에너지, 탄소 중립 분야 신규투자에서도 포항이 배제될 가능성이 있으며, 지역산업 생태계에서 대기업이 빠져나가 산·학·연 연계에 균열이 생기면서 인재양성과 취업의 선순환 고리도 악화할 것”으로 내다봤다.이와 함께 포항지역에 신규 법인 설립 가능성이 낮아 향후 세수 확보에도 큰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전망했다. 대구시와 경북도의 출연기관인 대경연구원의 브리핑자료는 신뢰성이 있는 만큼, 포항시민들로선 포스코그룹 지주사의 서울설립을 결사적으로 막아야 할 명분이 생겼다.‘서울포스코’ 사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연일 쏟아지고 있다. 지난 14일 포항시 남구 포스코 포항제철소를 방문한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후보는 “포스코는 기업의 고향인 포항을 떠나서는 안되고 지주사 본사는 포항에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포항본사유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경북도내 시·군의회 의장들도 이날 의성군의회에서 월례회를 열고 “지난 50여년간 경북도민과 포항시민의 희생과 협력으로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포스코가 지역민과의 어떠한 소통도 없이 지주사 전환을 의결한 것은 철저히 지역민을 무시한 처사”라는 입장문을 발표했다.대경연구원이 내놓은 자료에서 보듯이, 포스코홀딩스와 그룹 싱크탱크가 포항에 둥지를 틀 경우 국민기업인 포스코그룹의 지역균형발전에 대한 인식은 전 국민이 평가할 것이다. 주요 대선후보들도 모두 ‘서울포스코’ 사태에 대해 반대의견을 밝힌 만큼, 포스코그룹은 빠른 시일 내 전향적인 의사결정을 하기를 바란다.

2022-02-15

이차전지산업진흥원 포항 설립 기대한다

포항시가 제2반도체라 불리는 이차전지·배터리산업 육성에 집중하고 있는 가운데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이차전지산업진흥원의 포항 설립을 추진하고 있어 성사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한국이차전지산업진흥원은 이차전지분야 연구개발과 이차전지 중장기 종합 RD과제 발굴, 이차전지산업 국내외 거버넌스 구성 등 이차전지·배터리산업 육성과 발전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연구기관이다.포항은 2019년 7월 정부로부터 국내 최초로 차세대 배터리리사이클링 규제자유특구로 지정을 받으면서 이젠 배터리산업의 선도도시로 부상하고 있는 곳이다. 규제자유특구 지정으로 포항에는 에코프로, 포스코케미칼, GS건설 등 국내 배터리 빅3 기업이 이미 투자를 시작했고, 그 외 관련기업들의 투자유치가 속속 이뤄지면서 지난해 관련분야의 투자규모가 3조5천억원에 달했다.지난해 10월에는 폐배터리를 수집 재활용하는 이차전지종합관리센터를 포항 블루밸리산단내에 준공해 경북도 폐자원 거점수거센터 기능도 갖추었다.포항은 지금 철강중심 산업도시에서 배터리 선도도시로서 산업의 지형을 빠르게 바꾸어가고 있다. 특히 포항시가 이차전지산업진흥원 설립을 정부보다 앞서 추진하고 있는 것은 배터리산업 선도도시로서 산업의 전주기생태계 조성 필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규제없이 자유로운 기술개발이 가능한 규제자유특구 지정과 함께 유망 생산기업의 입주, 또 연구기관의 존치 등 배터리산업과 관련한 인프라의 집중은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필연적 요소다.전기차 시장은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산업이다. 전기차 사용 핵심부품인 배터리 산업의 세계시장 선점과 글로벌 경쟁력을 위해선 국책 연구기관의 포항 설립은 당연한 귀결이다. 지방소멸과 관련 20대 대선의 큰 이슈로 등장한 국가 균형발전 정책과도 흐름을 같이하고 있어 관련부처의 과감한 정책 결정이 필요하다.포항시는 국책연구기관의 포항 설립이 당위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만큼 정치권과 협력해 정부를 설득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2022-02-15

호랑이 기운으로, 호랑이 걸음으로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아무도 증명할 수 없지만, 오히려 증명할 수 없어서 / 과연 영험한 짐승은 뭐가 달라도 다른 게로군 / 해마다 번연히 실패할 줄 알면서도 / 가슴속에 호랑이 발자국 본을 떠오는 이들이 / 줄을 잇는다고 치자 눈과 함께 왔다 / 눈과 함께 사라지는, 가령 / 호랑이 발자국 같은 그런 사람이”손택수 시인의 시집 ‘호랑이 발자국’(창비, 2003)에 실린, 같은 제목의 시 ‘호랑이 발자국’의 마지막 일곱 행이다. 현재 한반도 땅에서는 더 이상 야생의 호랑이가 발견되지 않는다. 일제의 조선얼 말살 정책으로 호랑이를 다 잡아 없앴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못났던 탓이기도 하겠지만, 일본은 참 몹쓸 짓을 많이도 했다. 존재하지 않는 호랑이의 발자국 본을 어떻게 뜰 수 있을까마는, 시인의 머릿속에는 영험하면서도 용맹한 한국 호랑이가 자리 잡고 있을 것이고, 마음의 산하 한겨울 눈속을 발자국 선명히 남기며 웅자한 자태로 거닐고 있으리라.2022년 1월 1일이 되자마자 호랑이해를 운위하였지만 실은 음력 1월 1일인 설날부터가 임인년의 시작이다. 동양 철학에서 우주만물의 운행과 변화 모습을 설명하려는 이론이 오행(五行)론인데, 오행을 색깔로 나타내면 청(靑) 적(赤) 황(黃) 백(白) 흑(黑)의 다섯이 되고 십간(十干) 중 갑을(甲乙)은 파랑, 병정(丙丁)은 빨강, 무기(戊己)는 노랑, 경신(庚辛)은 하양, 임계(壬癸)는 검정과 짝이 된다. 그러니까 신축년(辛丑年)이었던 작년은 흰 소의 해였고, 임인년(壬寅年) 올해는 검은 호랑이의 해가 되는 것이다. 설이 지나고 지난 밤에는 정월 대보름 달까지 보았으니 호랑이 걸음으로 보름길을 걸어 온 셈이다.음양오행은 동양 사상의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인의 삶에 깊이 뿌리내리고 정신세계의 한 줄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서, 오랜 세월을 거쳐 온 확률과 통계의 선험적·경험적 이론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한치 앞도 모르는 인간이기에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하고 현생이건 내세건 더 나은 삶을 위해 절대자나 그 어떤 초월적 존재에 의지하려는 믿음은 기성종교와 무속을 막론하고 이어져 왔다. 음양과 오행을 사주팔자와 연관 지어 인생사 길흉화복을 점치고 무속적으로 풀이하려는 시도들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문제는 대선 정국 정치권을 중심으로 속 뒤집힐 썩은내를 풍기며 무속 논란이 퍼져가고 있는 것이다. 건강한 정신에 기반을 두고 합리적 이성으로 헤치고 풀어내야 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어려운 문제들을 미신과 무속에 기대어 해결하려고 하는, 어쩌면 고민 없는 안이한 자세는 질타받아 마땅하다. 호랑이 걸음도 좋고 호시우보(虎視牛步)도 좋다. 정치권과 사회 곳곳에서 호랑이 기운과 냉철한 이성으로 앞서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 혹, 현재가 어둡다 하더라도 절망할 일은 아니다. 칠흑같은 어두움 속에서도 호랑이의 눈은 빛나고 단단한 네 발은 비탈도 골짜기도 마다하지 않음을 우리는 아니까.그리고 우리 각자는 ‘해마다 번연히 실패할’지언정 호랑이 발자국 하나쯤은 마음에 새기며 올해를 살아갈 일이다.

2022-02-15

아름다운 동행

조현태​​​​​​​수필가 영국에 ‘데프 레퍼드’라는 유명한 록 밴드 멤버 중에 ‘릭 앨런’이란 드러머가 있었다. 그는 1984년 12월 31일 자동차 전복사고를 당했다. 병원에서는 최선의 치료를 했지만 왼쪽 팔은 절단할 수밖에 없었다. 드러머란 양쪽 손과 발을 모두 바쁘게 움직여야 드럼 세트를 취급할 수 있는데 한 쪽 팔로 드럼을 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앨런은 퇴원할 날이 가까워지는 만큼 실의와 낙심이 쌓여만 갔다. 그가 지금껏 가장 신나게 할 수 있는 일이 드럼 연주였으니까.그가 퇴원한 후, 데프 레퍼드 멤버들이 찾아왔다. 건강은 회복되었으니 드럼을 계속 연주해야 한다고 독려했다. 릭 앨런은 ‘한 쪽 팔로 어떻게 드럼을 연주할 수 있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나 멤버들은 ‘아직 오른팔이 있으니 괜찮다’고 용기를 주며 계속 같이하자고 했다. 이미 드럼을 연주하는 기술은 익혀진 상태이고 한쪽 팔이 없다는 것만 다를 뿐이라고 했다. 남은 한쪽 팔로도 연주할 수 있는 드럼을 제작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끝내 포기하지 않도록 설득하던 멤버들은 릭 앨런을 위해서 한 팔로도 칠 수 있는 드럼을 만들기로 했다. 왼손으로 치지 못하는 쪽은 페달을 연결해서 밟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은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기에 충분한 작업이었다.멤버들의 배려와 도움에 감동한 릭 앨런은 이를 악물었다. 특별히 주문한 드럼 세트에 앉아 나머지 한 쪽 팔로 드럼을 치기 시작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8시간 이상 눈물겨운 연습을 했다. 멤버들도 외팔이 드러머 릭 앨런을 돌보아 주며 연습에 동참했다. 릭 앨런만의 특수한 드럼을 1년간 맹연습한 결과, 전과 같은 드럼 연주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아무도 그가 명 드러머로 재기하리라고 믿지 않았지만 데프 레퍼드는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도전한 4년 후에는 1천200만 장이 넘는 앨범 판매고를 올렸다. 그 엄청난 판매고는 록 밴드의 연주실력 만으로 이룬 결과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이 서로 믿고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워 주는 ‘아름다운 동행’의 결정체가 아닐까 한다. 록 음악을 좋아하는 애호가들도 데프 레퍼드의 재기 사연을 알고 있었을 터이니까.당사자 스스로 용기를 가지기도 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함께하며 서로 밀고 당겨주는 참여의식이 더 큰 용기를 만들어낸다. 특히 대한민국 국민이 하나로 뭉쳐 보여주는 협력과 의지력은 세계 어느 국민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필자도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우리나라는 반 토막으로 허리를 잘린 채 강대국들의 눈치 보며 설움 받던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보란듯이 극복한 지금의 조국은, 국민은 참으로 자랑스럽다.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도 함께 응원하고 깊은 관심으로 격려해주는 동행의식이 작동하고 있다. 곧 다가올 대통령 선거도 대한민국이 또 한 번 도약할 수 있도록 진정한 사랑과 격려로 아름답게 뭉쳐서 데프 레퍼드의 재기와 같은 성공신화를 이루어야겠다고 기대해 본다.

2022-02-15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지금 우리 학교는’(이하 ‘지우학’)이 화제다. 방영 초기에는 폭력성이 논란이 되었다면, 지금은 이 작품이 ‘오징어 게임’의 위상을 이어받을 K-콘텐츠가 될 수 있을지가 화제다. 어쩌면 이런 저런 논란은 필연적인 것일지도 모른다.논란의 핵심에는 ‘지우학’이 학생들의 모습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가 있다. 10대들을 재앙 속에 밀어 넣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전시하며, 그에 대한 윤리적 부담을 회피하기 위해 세월호에 대한 알레고리를 차용하고 있다는 경향신문 위근우의 비판이 대표적이다. 그는 ‘지우학’이 스펙터클을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방식을 포르노에 비유하며 강도 높게 비판한다.위근우의 문제제기는 타당하다. 분명 작품은 개연성과 핍진성에 있어 세월호 사건에 대한 윤리적 부채에 상당 부분을 기대고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우리가 마주한 현실의 문제에 대해 어떠한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때문에 위근우가 해당 칼럼의 말미에서 이 작품에 대해 “디스토피아를 향한 무기력의 학습”이라 평가하는 부분은 핵심을 짚어낸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왠지 모를 찜찜함이 남는다. 우리는 과연 ‘지우학’을 잘못된 재현 양상의 예로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정녕 ‘지우학’은 우리 사회의 트라우마를 건드림으로써 모자란 부분을 보충할 뿐인 재난 포르노에 불과한 것일까?작품에서 ‘미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꼭 살아남으라고, 그래서 고3이 더 힘든가, 좀비가 더 힘든가 어디 한 번 말해보라고. 좀비보다 수능이 중요하고, 좀비에게 죽는 게 대학 못가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는 이 캐릭터를 통해, ‘지우학’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면서도 극명하다. 진짜 재난은 ‘좀비’가 아니라, 이전에도 이후에도 있을 평범한 현실이라는 것. ‘좀비’는 비가시적이었던 구조적 폭력을 가시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좀비가 없을 때에도 이들은 서로를 물어뜯고 반목하며 배제해야만 했으며, 사회는 그들에게 결과로서의 ‘생존’을 강조할 뿐 그 과정은 알려주지 않는다.같은 맥락에서 ‘지우학’이 고통을 재현하는 방식이 지나치다고, 혹은 신파를 위한 소재로 다룰 뿐이라 평하는 것은 타당한 것일까? 자식을 구하기 위한 행동으로 인해 좀비가 되어 도리어 자식을 위협하거나, 혹은 자식을 구하기 위해 희생하는 학부모의 모습은 학교폭력의 당사자인 학생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해 죽음으로 내몰거나, 혹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아이를 구하려 시도하는 현실의 모습과 닮아 있지 않은가.더불어 학생이 같은 또래 학생을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 삼으며 자살로 내모는 장면이나, 폭력의 구조를 개인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해 절망하는 모습 역시, 현실에 대한 충실한 재현의 결과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모든 장면을 신파, 내지는 고통 포르노라 일갈하는 것은, 그와 같은 현실의 일부를 도려내거나 혹은 자신이 논지에 타당한 방식으로 재현하라는 억지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물론 그와 같은 재현의 방식에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우학’이 그러한 사건의 재현에 있어 고심하지 않았다는 비판은 너무 가혹하다. 작품은 분명 그와 같은 피해자의 모습을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비추며 이들의 고통을 다각화하여 재현하고자 노력한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렇다면, ‘지우학’은 피해자의 고통을 순간의 스펙터클을 위한 소재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담론을 위한 이니시에이션을 시도하고 있다 평가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다음의 이야기로는 나아가지 않은 채, 서둘러 잘못되었다 말하고 단죄하기만을 원하는 것인가. 우리가 사건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길을 막는 것은 그와 같은 재현이 아니라, 그것을 향한 성급한 일갈과 단죄의식인 것은 아닌가.문제는 또 있다. 비록 ‘지우학’이 잘못된 방식으로 누군가의 고통을 재현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렇게라도 우리는 사건을 재현하고 반성하며 계속적인 의미화를 해나가야 한다. 한 작품을 향해 “역해진다” 비난하며 대상을 성역화하여 박제하는 것은 우리가 더욱 경계해야 하는 영역이다.그와 같은 반응 그 어디에 ‘더 나은 현실’을 위한 대안적 상상력이 있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그는 그 역함에 대한 해답마저도 지금, 우리, 학교에 요구하며 단지 일침을 가하는 논자로 남길 원하는 것일까. 그것이 칼럼리스트에게 요구되는 덕목이기 때문일까? 그와 같은 일침으로 인한 고통에 칼럼리스트는 무엇을 책임질 수 있을까?

2022-02-15

시시하고 치사한

최근 친구에게서 “회사는 자아실현을 하는 곳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회사에서 뭔가를 이뤄내겠다는 생각으로 임하게 되면 상처받는 상황에 부딪히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온 힘을 다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 쓸모없는 취급을 받거나 옆자리의 동료가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었을 때의 상실감을 견디기 위해서는 매사에 최선을 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그렇다면 왜 회사를 다니는 거야?”내 물음에 그는 이토록 한심한 질문을 하는 것도 재주라며 혀를 츳츳 찼다. “돈 벌려고 다니지.” 그렇게 말하는 친구의 얼굴이 조금 구겨졌던 것도 같다.“그렇지만 월급은 진짜 돈이 아니야.” 그가 덧붙였다. 회사를 다니는 이유는 돈 때문이지만 월급은 진정한 돈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며 되묻자 그는 내가 진정한 사회인이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고 답했다.그러니까 그가 설명하는 회사에 다니는 이유는 ‘시드머니’를 벌기 위함이었다. 정당한 노동으로 받는 돈으로는 내 집 마련은커녕 남의 집에 얹혀사는 일조차 쉽지 않다고. 코인이나 주식을 통한 ‘한 방’을 바라는 수밖에 없다고. 그러한 ‘한 방’으로 경제적 자유를 얻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자아실현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과연 그랬다. 친구는 시 쓰는 일을 사랑하는 청년이었지만 그것을 통해 돈을 벌고 있지 않았다. 시를 쓰는 것보다 사무실로 출퇴근하는 것이 더 돈이 되었다. 회사에서 온종일 일하는 것보다 클릭 몇 번으로 주식을 사고파는 것이 더 돈이 되었다. 그러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는 돈을 버는 일이 무언가에 굴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것보다 훨씬 더 대단하고 숭고한 일을 해야만 한다는 마음이었다. 이런저런 일을 제안받으면 ‘고작 이거 벌자고 이런 일을 해?’ 하고 거절하기도 했다.고고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행색은 궁색해졌으며 작은 일에도 쉽게 초라해졌다. 수많은 작가들이 예술가이기 전에 생활인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경험했던 오만한 시간이었다.그 누가 돈 버는 일을 편안하게 여길 수 있을까. 타인에게 불편한 이야기를 들어가면서 고개를 숙이는 것.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별 수 없이 타협하고 마는 것. 그보다 더 불편하고 곤란한 상황들이 넘쳐흐르는 것이 다름 아닌 돈 버는 일이다. 그리하여 월급날의 통장을 보면 뿌듯함보다 허망함이 앞선다. 꼭 이렇게 살아야 할까. 더 멋있게 살 수는 없는 걸까.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산다는 게 참 시시하고 치사하게 느껴진다.그럴 때면 문명의 이기가 닿지 않는 어느 깊은 산속에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떠다니는 구름을 바라보며 유유자적 살고 싶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휴식을 만끽하고 싶다.그러나 이러한 욕망은 오션뷰가 펼쳐진 호텔에 놀러 가고 싶다거나 아이폰의 새로운 시리즈를 가지고 싶다는 것과 다름없다. 안빈낙도의 삶이야말로 기득권만이 가질 수 있는 기만적인 태도다. 템플스테이를 체험하기 위해서 드는 돈을 듣고 입이 딱 벌어졌더랬다. 고요와 평화를 만끽하는 것도 이제는 그만큼의 돈을 지불해야 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나는 벗어날 수 없다. 백화점과 커피숍, 요란한 옷을 파는 상가로부터. 밖을 나서면 가장 먼저 쾌적하고 세련된 곳을 찾게 되고 무가치한 소비를 하면서도 자본주의에 비판의식을 가진다. 매일매일 이중성을 경험하고 계속해서 실패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친구는 나름의 방식으로 이 어지러운 세계를 돌파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실에 비관하는 대신 돈 버는 일과 자아실현을 위한 일을 완전히 갈라놓는 것을 택했다. 그것은 몇 배나 힘든 싸움이지만 동시에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사회 구조 속에 놓인 가련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청년 세대는 꿈도 희망도 없는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희망을 꿈꾸기 때문에 각자의 돌파구를 찾고 있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그들이 찾아낸 해결책이 과연 옳다고 할 수 있는가. 혹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어느 쪽도 쉽게 판단 내릴 수 없다.요즘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에는 이런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누가 주식으로 얼마를 벌었대. 코인으로 대박 난 친구는 얼마 전에 퇴사했다더라. 로또 당첨되고 싶다. 돈 많은 백수가 되고 싶다. 아아, 머릿속엔 오직 돈, 돈 생각뿐이야. 그런 이야기에 깔깔대다가도 순식간에 우울해진다. 결국엔 또 돈으로 귀결되는 이야기구나. 그것 참 시시하고 치사하다, 하고 끝내기엔 너무도 찜찜한 기분이다.

2022-02-15

‘ESG경영’

남광현​​​​​​​대구경북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지난 1월 11일 신축공사 중이던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 광주 화정 아이파크 아파트가 붕괴됐다. 이 사고로 공사인력 1명이 사망했고, 5명이 실종됐는데, 아직도 매몰자 1명과 실종자 1명을 구조·수색하고 있다.이 사고 여파로 시공사인 HDC현대산업개발의 정몽규 회장은 책임을 통감하고 23년간 유지한 최고 경영자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공정률이 약 60% 정도로 투입된 공사비가 1천500억원에 달하는데 전면 철거를 하면 입주 지연 보상금과 재시공 비용 등 손실 액수는 최대 4천억원으로 도급액인 2천557억원을 무려 1천443억원을 초과한다.사고원인 조사 결과에 따라 높은 처벌도 감수해야 하고 소비자로부터 외면받게 되면서 장기적으로 이 기업은 쇠락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사고 발생 불과 2주 후에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은 안전조치 의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경우 본사의 안전보건관리체계 미흡으로 경영진을 바로 처벌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코로나19가 유발한 비대면 사회로의 환경변화로 수많은 취약한 기업들이 문을 닫았다. 또한 날로 심각해지는 기후위기에 대응하고자 전 세계 많은 국가와 지자체 그리고 기업들이 2050탄소중립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지난 4일 대선 후보 간 첫 TV토론회에서 크게 주목받은 ‘RE100’ 즉, 2050년까지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의 100%를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한 글로벌 캠페인에도 많은 기업이 자의나 타의로 인해 동참하고 있다. 심지어 이 토론회에서는 노동조합이 추천한 이사가 회사의 경영에 참여하게 되는 노동이사제의 도입에 대한 찬반 토론도 뜨거웠다.유럽연합(EU)은 역내로 수입되는 제품 가운데 역내 제품보다 탄소배출이 많은 제품에 세금을 부과하는 조치인 ‘탄소국경조정제도’를 곧 시행한다고 한다.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다.이제 기업들은 기술개발과 효율화로 이윤 창출을 극대화하던 경영행태에서 친환경제품을 사용하고 산업재해를 예방하며, 투명한 지배구조를 도입해야 하는 대전환기에 직면하게 되었다.즉, ‘기업경영을 안정적으로 지속시키기 위해서는‘환경(Environment)과 사회(Social)를 헤치는 의사결정(Governance)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다. 대전환의 시기에 기업들은 ‘성장중심’ 경영에서 ‘지속가능’ 경영으로 패러다임 전환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지속가능 경영이란, 기업의 경제적·사회적·환경적 책임을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진하는 경영 패러다임을 가리킨다. 이제 100년 이상 장수기업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세계적으로 열풍이 불고 있는 ESG기반의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한 기업경영체계가 도입되어야 한다.작년 10월말 대구상공회의소가 보름간 대구지역 내 375개 기업에 대하여 ESG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기업 10곳 중 6곳이 ESG경영의 도입 필요성을 체감한다고 응답하였다. 이제 우리 대구와 경북의 기업들에도 ESG경영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것 같다.

2022-02-14

22일간의 대접전…민심은 정책에 쏠린다

3월 9일 실시되는 제20대 대선 공식선거운동이 15일부터 시작된다. 공식 선거전 기간에는 자동차와 확성장치를 이용한 공개장소 연설·대담, 거리 현수막 게시 등이 가능해져 국민들이 선거분위기를 몸으로 체험할 것이다. 이번 선거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 간 대혼전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선거 전문가들이 “이렇게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선거는 처음 본다”고 분석할 정도다. 지금까지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이·윤 후보가 35∼40% 선에서 박빙 경합을 하고 있다. 일부 조사에서 윤 후보가 오차범위 밖 격차를 보이는 결과가 나오기는 하지만, 안정적인 흐름을 보이지 않아 앞으로 돌발변수에 따라 판세가 요동칠 가능성이 농후하다.막판 판세를 뒤흔들 최대 변수는 야권후보 단일화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는 지난 13일 후보등록 후 윤석열 후보에게 국민여론조사방식으로 후보 단일화를 하자고 제안했지만, 아직 갈 길은 먼 것 같다. 윤 후보 측에서 국민여론조사를 할 경우 여권지지자들이 이재명 후보에게 유리한 후보를 선택하는, ‘역선택’ 가능성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윤석열 후보는 “안 후보가 정권교체를 위한 대의차원에서 제안한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서도 여론조사 단일화방식에 대해선 “아쉬운 점이 있다”고 밝힌 이유다. 그렇지만 안 후보가 먼저 단일화 제안을 한 것은 평가를 받을 만한 태도다. 서로 만나다보면 후보들이 직접 만나 담판지을 여지도 생길 수 있다.공식선거운동 기간 중 단일화 협상과정이 최대 이슈로 부상되겠지만, 이외에도 후보 배우자를 둘러싼 리스크, 최소 3차례 예정된 TV토론회, 코로나 확산으로 인한 젊은 층 투표율 하락 등도 판세를 예측하기 힘든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유권자들은 지금까지의 대선캠페인이 네거티브전으로 일관된 만큼, 본선에서는 국정비전과 정책공약이 주 의제로 등장하길 기대하고 있다. 국가현안인 지역균형발전과 코로나 위기 극복, 산업혁신, 일자리 확보, 부동산문제, 외교안보, 정치사법개혁등에 대한 후보들의 입장을 듣고 투표장으로 가길 원하기 때문이다.

2022-02-14

포항경주공항 출범, 관광 활성화로 이어져야

오는 7월 14일부터 포항공항의 이름이 포항경주공항으로 바뀐다. 포항시와 경주시가 지역 상생협력 차원에서 추진한 공항명칭 변경 사업이 지난 9일 국토부 항공정책위원회 심의를 통과한 것이다. 특히 국토부의 명칭변경 승인이 공항 활성화를 바라는 지역 의견을 적극 수렴했다는 점에서 명칭변경에 따른 공항 활성화에도 관심이 크다. 1970년 건설된 포항공항은 경북 유일의 공항이지만 항공 수요부족으로 민간항공 유치가 지지부진했다. 52년 역사 속에 포항∼제주, 포항∼김포의 항로가 여러 번 개설되고 중단되었다. 그러다 2020년 포항시는 공항 활성화, 경주시는 관광 활성화를 목적으로 양 도시가 공항명칭 변경에 합의했다. 경주시는 공항에 경주라는 이름을 넣음으로써 공항을 보유한 관광도시 이미지를 획득하고 포항은 국내 최대 관광도시인 경주와 협력함으로써 공항 활성화를 기대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포항공항은 1997년 연간 이용객 112만명을 정점으로 계속 추락해 지금은 연간 이용객이 6만∼9만명 정도에 머물러 있다. 포항경주공항의 명칭변경은 이처럼 추락하는 이용객 수를 끌어올려 경북 동해안 중심공항으로 발전시켜야 하는데 특별한 목적이 있다. 단숨에 이용객 수를 늘릴 수야 없지만 경주관광과 연계한다면 좋은 성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2025년 완공 예정인 울릉공항과의 연계도 포항공항의 입지를 확고히 할 수 있는 기회다.그러기 위해선 포항공항으로의 접근성부터 개선해 나가야 한다. 현재 포항공항과 경주 보문단지와의 도로 여건은 경쟁공항인 울산공항보다 못하다. 포항공항에서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두시간 걸려 보문단지에 도착한다면 공항의 명칭변경은 무의미하다. 경북 유일의 포항공항을 지역의 중심공항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지금부터 시작돼야 한다.통합신공항과 포항경주공항, 울릉공항 등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어 대구경북의 하늘 길을 열어간다면 경제적 파급력도 클 것이다. 포항경주공항 활성화 전략에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겠다.

2022-02-14

구하라법

구하라법은 양육의무 져버린 나쁜 부모가 사망한 자녀의 재산을 상속받지 못하도록 하는 민법 개정안이다. 이 법은 지난 2019년 11월 25일 사망한 연예인 구하라의 친오빠 구호인 씨가 국민청원으로 추진하고 있는 법안이다.구 씨의 생모는 20여 년간 연락을 끊고 지내다가 구하라가 세상을 떠나자 나타나 유산의 절반을 요구했다. 민법 1004조에 따르면 자식이 사망하면 제1 상속권자는 친부모가 된다. 살해하거나 유언장을 위조하는 등 제한적 경우 상속결격 사유를 인정하지만, 여기에 부양 의무 태만과 관련된 조항은 없다. 20대 국회 법사위에 계류돼 있다.구하라법이 통과되지 못한데는 법무부가 내용은 비슷하지만 ‘구하라법’과는 완전히 반대 개념인 ‘상속권상실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취지의 개정안을 제출했기 때문이란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더불어민주당 서영교 의원이 대표발의한 ‘구하라법’은 부모가 아이를 키우지 않은 경우, 자녀가 사망했을 때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자연적·원천적으로 없어지게 된다. 하지만 법무부가 주장하는 ‘상속권상실제도’는 본인 사망 전, 양육하지 않은 파렴치한 부모를 상대로 재판을 청구한 후 승소해야 한다. 유가족도 소송할 수 있지만, 사망 후 6개월만 가능하다.대한변협과 서울변호사회 등 법조계와 시민단체들은 서 의원의‘구하라법’에 찬성한다. 법무부안은 자신을 돌보지 않은 부모에게 소송을 걸어야 하는 방식인데다 자녀가 언제 죽을 줄 알고 소송을 제기하며, 아이가 죽기 전에 키우지 않은 부모를 상대로 재판을 청구하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법무부의 탁상공론식 법안이 국민들의 발목을 잡고있다는 지적이 따갑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2-02-14

노송(老松) 아래 아무것도 없었다 (Ⅰ)

달고 묵직한 향이 흘러내렸다. 국화 향은 장례식장 입구와 빈소를 바닥부터 채웠고 만식이 누워있는 관보다 높은 곳까지 쌓였다. 만식이 가지고 갈 마지막 기억은 국화 향이었다. 조의금 함에서 새어나온 지폐의 냄새가 약간 섞이는 정도면 충분했다.조문객들이 문을 열 때마다 바람이 들어와 국화 향을 흔들었다. 필립의 코끝에 국화 향이 닿으면 필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세 걸음 앞으로 나가 영정 앞의 향로에 향을 더 피웠다. 국화 향이 흔들린 틈으로 다른 무언가가 들어갈 것 같았다. 필립은 만식이 국화 향과 지폐, 향로의 향을 제외한 다른 냄새를 기억하는 것이 싫었다. 이를테면 안나와 그 자식의 냄새. 비록 필립이 약속한 삶들이기는 했지만.필립은 두 번째 자식이었다. 안나의 뱃속에 세 번째 자식이 있었지만 그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안나와 그 자식을 어찌 대할지는 오로지 필립과 필립이 얻게 될 것들에 달려 있었다. 물론 필립은 약속을 잊지 않았다. 만식과의 약속, 노마와의 약속 모두. 지키지 못할 약속을 왜 하나? 회의석상에서, 직원과의 공식적인 대화 자리에서 필립이 즐겨 쓰던 말이었다.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고 결국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필립은 그런 날이면 당사자를 불러 술을 사주고 어깨를 토닥였다. 약속은 어기라고 있는 거지, 그렇지 않아? 이렇게 말하며.들어가 좀 쉬세요. 몇몇 사람들이 안나에게 말했다. 안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리 내 울지는 않았지만 쉼 없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울다가 지치면 반대편 벽을 보거나 한숨을 내뱉으며 어휴, 하고 신음 소리를 냈다. 필립은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만식의 영정을 올려다보거나 방바닥을 내려다볼 뿐이었다.가깝지 않은 사람들, 조문객들 중 일부는 안나가 필립의 아내인지 필립의 여자 형제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필립에게 직접 묻지 않았다. 자신들의 테이블로 돌아가 묻고 상상했다. 필립 또한 나서서 설명하지 않았다. 안나를 아는 사람에게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고 안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저 여자는 왜 빈소에 두는 거냐? 상복까지 입히고.필립이 화장실에 들어서자 뒤따라온 외삼촌이 물었다. 오래전 죽은 누이의 남편 빈소임에도 찾아와 조문을 하고 허드렛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고마운 일임에는 분명했지만 필립은 고맙다 말하지 않았다. 필립의 경험에서 외가의 삼촌은 친가의 삼촌에 비해 기능이 떨어지는 어떤 것이었다. 어릴 적에는 용돈과 재미에 있어 그랬고 나이가 들어서는 필립과 만식에게 기대는 정도에 있어서 그랬다.벌써 세 번째 같은 것을 물었다. 여전히 누이의 자리라 생각했던 곳에 다른 여자가 서 있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지만 안나의 자리는 필립이 판단할 일이었고 결정한 일이었다. 필립에게는 외삼촌이 와 있는 것이나 안나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나 같았다. 둘 다 장례식장 외벽 우수관을 감고 오르는 질긴 넝쿨이었다.-아버지 가시는 자리를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냥 둘 생각입니다. 이젠 그만 물으십시오.바지 지퍼를 올리고 세면대로 향하는 필립의 뒤에서 외삼촌이 말했다.-네가 엄마에게 어찌 이럴 수 있냐?필립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손을 씻은 후 종이 타올로 손을 닦고 거울을 보았다-그러니까요. 엄마의 아들인 제가 결정한 일이니 그냥 계시라고요. 저도 웃으며 결정한 것은 아니니.자정을 넘어서자 조문객의 수가 줄어들었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내일은 오늘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 분명했다. 만식은 죽었지만 만식이 하던 일은 남았고 만식이 가졌던 것들 또한 남았다. 누군가 이어가야 할 일, 누군가가 가질 것들. 필립이 그 누군가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자리에 와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필립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안나를 보았다. 얼굴이 부어 있었다. 뱃속에 아이가 있는 젊은 여자가 버티기에 힘든 하루였다. 황당하겠지, 슬프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저 여자 오늘 조금 많이 울었지. 정말 아버지를 사랑한 건가? 아니면 뱃속의 아이 때문에 그러는 건가? 필립은 안나의 감정과 생각이 궁금했지만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안나의 감정과 생각을 안다고 해서 바뀔 것은 없었다.-오늘은 더 이상 오실 분이 없을 것 같네요. 들어가서 좀 쉬세요. 내일은 오늘보다 힘든 하루가 될 겁니다.안나는 잠깐 머뭇거리다 일어섰다.-그러면 조금만 쉬었다 오겠습니다. 회장님께서도 눈 좀 붙이시는 것이. 조금이라도.회장님이라. 지금 나더러 회장이라 부른 건가? 허, 참. 알 수 없는 사람이네. 필립은 빈소 옆 작은 방으로 들어가는 안나를 보며 생각했다. 김강 작가 2017년 제21회 심훈문학상 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 ‘여행시절’(공저) ‘당신의 가장 중심’(공저) 등을 썼다.

2022-02-14

풍경과 소리, 오감 밀도 가득한 서부극

영화 장르 중에서 특정 지역과 시대가 중심이 되는 것이 바로 ‘서부극’이다. 공간적으로 한정되어 있고, 시간적으로 특정 시대가 주류를 이루며 형성된 장르다. 전초가 있고, 그 전초를 기반으로 유사한 패턴의 이야기와 구조가 반복되면서 전형이 만들어진다. 패턴과 전형은 무수한 작품들을 쏟아내면서 장르로 굳어진다. 이후 서부극이 시들해지면서 공간과 시대를 이탈한 변주된 작품들이 등장하고 새로운 스타일과 내용을 함유한 ‘서부극’이 만들어진다. 장르는 변용을 통해 진화하며 명맥을 잇는다.서부극은 그리 길지 않은 미국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물이다. 특정한 국가의 시대적·공간적 이야기가 세계적인 장르로 형성된 것이다. 그간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던 서부극의 시대적 배경은 1850년대 골드러시와 미 대륙 횡단 철도 개통, 1860년대 벌어진 남북전쟁 전후가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악당과 보안관, 인디언, 역마차, 총격씬, 황량한 사막을 질주하며 말을 타고 달리는 추격씬, 현상금과 금을 찾는 이들이 클리셰(Cliche·전형적, 의례적 의미)로 각인되었다. 이 속에 정의와 복수, 대결의 다양한 내용들이 자리잡는다.서부극은 공간적 장르다. 그 시대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사실에 기반하거나 상상을 동원하여 엮는다. 공간적 해석 속에서 그 공간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전형이 형성되었으며, 액션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강도’의 수위를 조절하여 왔다.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퍼스트 카우’는 공간을 약간 비껴서 ‘강도’를 낮춰버린 서부극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운다. 서부극이면서도 서부극의 전형이 등장하지 않는다. 먼저, ‘퍼스트 카우’의 공간은 다르다. 182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그간의 서부극이 다루었던 시대적 배경 이전이며, 오리건주라는 북서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직은 공격적인 서부 개척이 일어나기 이전이며, 백인들의 숫자보다 인디언의 숫자가 많은 곳. 모뉴먼트 밸리가 등장하는 황량한 서부가 아니라 춥고 습한 울창한 숲이 배경이 되며, 끼니를 걱정하는 초라한 행색의 유랑노동자가 등장한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비껴선 공간에서 기존 서부극에서 다루지 않았던 다른 것으로 공간을 채운다. 식량을 얻기 위해 버섯을 따는 모습과 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 낙엽을 밟는 소리와 새들과 풀벌레 소리 등 미세한 소리와 장면으로 채운다.‘퍼스트 카우’의 공간은 익히 보아왔던 서부극의 공간이 아니라 자연의 미세한 소리와 풍경에 집중한다. 대사는 절제되었으며 톤을 높이지 않는다. 정의와 복수, 의리의 내용을 제거하고 일용할 양식을 나누는 우정과 연대가 있다. 절제된 대사는 날카롭지 않고 따뜻하다. 궁핍한 삶에 끼니를 걱정할지라도 사소한 대화의 와중에서도 진솔한 눈빛이 오간다.느슨할 것 같지만 긴장이 전혀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 긴장은 기존의 서부영화와는 결을 달리한다. 긴장은 차분하게 상승되었다가 조용히 내려 앉는다. 결을 달리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영화의 프롤로그에서부터 분명히 밝히고 있다.영화가 시작되면 현재의 오리건주 컬럼비아 강을 타고 들어오는 화물선을 천천히 오랫동안 보여준다. 그러다가 개와 산책을 하던 한 여성이 강변에서 나란히 누워 있는 두 구의 해골을 발견한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서 앞에 있는 나무를 쳐다보니 새들이 지저귀고 여성은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우며 200년 전의 이야기로 들어간다. 이후 전개되는 이야기는 해골을 발견한 여성의 상상일 것이다. 프롤로그에서 시작된 장면과 내용은 영화의 결말과 내용이 맞닿아 있지만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기존의 공간을 멀리 벗어나 있는 이 영화에 감독은 그때 그 시절 당연히 존재했었을 것들의 일상으로 채운다. 바느질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정성껏 빵을 굽는 궁색한 일상의 모습. 작은 장면들, 미세한 소리와 잔잔한 전개 속에서 펼쳐지는 긴장감이 서정시와도 같은 서부영화로 등장했다./(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2-02-14

포스코, 신뢰회복이 우선이다

전준혁 경제팀장 포스코가 배당금 관련 주주들의 불만으로 시끄럽다. 포스코는 최근 보통주 1주당 5천원의 연말 현금배당을 실시한다고 공시했다. 지난해 분기 배당 1만2천원까지 포함하면 2021년 총 배당금은 주당 1만7천원 수준인 셈이다. 총 배당금 규모만 1조2천856억원으로, 이는 2020년 총 배당금 6천203억원보다 2배 늘었고 포스코 자체적으로도 역대급 금액이다. 그런데 주주들은 왜 불만일까.포스코는 지난 2020년부터 올해까지 연결배당성향 30%를 유지하겠다고 했다. 지주사 전환을 앞두고 시끄러웠던 당시에도 최정우 회장은 공개 주주서한을 통해 “2022년까지 연결배당성향 30% 수준을 유지할 것”이라고 재확인시켜줬다.이런 가운데 2021년 포스코는 최대 실적을 견인하며 연결기준 순이익이 전년대비 302.5%나 증가한 7조1천960억원을 기록했고, 약속대로라면 7조원이 넘는 순이익의 30%(주당 2만8천500원 이상)를 배당해야 했다. 그러나 이 수치가 19% 수준에 그치자 불만이 터져 나왔다.주주들은 금전적인 이익보다 포스코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에 기분이 상했다. 기업 상황이 각종 대내외적 여건에 따라 바뀔 수는 있는데, 충분히 설명할 기회가 많았음에도 전혀 소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우연인지 몰라도 배당 결정이 지주사 전환을 결정짓는 임시 주주총회 이후에 일어났다는 것도 논란이다. 30%란 수치가 찬성표를 위한 미끼였다는 비난이 나오는 이유다.이러한 태도 탓에 불거진 포스코의 본질적인 ‘신뢰’문제는 현재 포항지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포스코 지주사 전환’과도 맞닿아 있다.포스코는 “지역에 해를 끼치는 것은 없다”고 선을 긋고 있지만, 정작 주민들의 시각은 냉담하다. 심지어 “지방 분권에 역행하는 일”이라는 프레임과 함께 정치권이 가세하며 포항은 물론 전국적인 이슈로 번지는 모양새다.포스코는 이제 신뢰회복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무너진 신뢰 속에서는 아무리 약속을 해봤자 ‘공염불’일 뿐이다. 포스코의 어려움은 포항의 어려움이고, 포항의 발전은 포스코의 발전이다. 만약 포스코가 ‘양치기 소년’이 된다면, 지역민 역시 포스코의 손을 더는 잡아주지 않음을 명심해야 한다./jhjeon@kbmaeil.com

2022-02-14

手不釋폰(?)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계절의 시계는 어김없이 가고 있다. 지척에서 기웃거릴 듯한 봄날은 서둘지 않고 기다림과 설레임 속에 차분한 걸음으로 오고 있다. 한결 포근해진 날씨에 이른 봄맞이라도 하듯 모처럼 보경사 인근의 산을 찾았다. 인적이 드문 산언저리에는 메마른 낙엽이 군데군데 쌓여 있었고 부러진 나뭇가지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겨울가뭄이 심해선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들리는 바스락거림이 눈 밟는 소리 마냥 정겹게 여겨졌다.봉긋하게 쌓인 낙엽더미를 지날 때마다 무릎까지 차오른 눈밭을 걷듯 푹푹 밟아 보기도 하고, 한아름의 낙엽을 공중으로 날려 눈처럼 맞기도 하다가, 푹신한 낙엽더미에 그대로 드러누워 낙엽을 이불 삼는 재미가 쏠쏠했다고나 할까? 그렇게 한적한 산길에서 장난도 치고 익살을 부리며 한참 오르다 보니 어느새 산마루에 이르렀다. 탁 트인 시야에 송라와 월포지역이 손에 잡힐 듯 들어오고 그 뒤로 동해 바다가 푸른 실루엣으로 드리워졌다. 오후의 햇살 속에 올망졸망 발 아래로 펼쳐진 멋진 광경을 사진으로 남기려 했으나 아뿔싸, 산행 전부터 줄어들던 폰 배터리가 벌써 소진돼버려 그냥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등산 초입부터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산을 오르며 갖가지 재미에 빠지다 보니 한동안 폰을 의식하지 못한 것 같다. 정상 주변을 돌아 하산하며 폰의 시달림(?)없는 산행 내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훨씬 많았음은 불문가지였다. 스마트폰은 어느새 일상이 되어 휴대폰 이상의 많은 의미를 갖게 된지 한참이나 됐다. 아침에 잠에서 깨자마자 보는 것도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거의 온종일 손에서 떠나지 않는 것도 휴대폰이니,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글을 읽으면서 부지런히 공부한다는 뜻의 수불석권(手不釋卷)이 요즘은 너나없이 ‘수불석폰’이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만큼 스마트폰의 활용성과 의존도, 영향력이 커진 셈이다.문명에는 빛과 그림자가 존재하듯이 시대의 총아 같은 스마트폰에도 명암이 있기 마련이다. 온갖 소통이며 정보, 지식, 콘텐츠 등을 언제 어디서나 활용할 수 있는 디지털 기기는 분명 우리의 일상에서 편리함과 유용함을 주는 도구지만, 여러 부작용과 위험성에 노출돼 경계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길을 걷는 사람들을 일컫는 ‘스몸비 현상’을 스마트폰 사용자의 95%가 경험한다는 통계와 운전 중 스마트기기 사용율이 42%로 높아져 갈수록 사고발생과 위험을 증가시키고 있다 하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순간의 방심과 실수가 사고로 이어지듯이, 스마트폰 과의존이나 미디어 중독 예방을 위한 디지털기기 거리두기로 자기조절능력을 향상시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휴대폰에 구애됨없이 5시간여 산행을 하는 동안 짧게나마 자연을 보는 여유와 눈을 새롭게 가진 것 같다. 스마트폰과 멀어질수록 자연과 가까워지고, 수불석권할수록 세상 속에서 정을 나누며 지혜와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을….

2022-02-14

제조 설비관리와 기본적인 思考

엄주선포스코 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중국 의학사에 있어서 실존 인물 중 가장 명의로 전국시대 편작(扁鵲)을 꼽는다. 사람들은 그를 죽은 사람도 살려낼 정도라고 하여 ‘신의(神醫)’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집안 3형제가 모두 의사였으며 소문을 들은 위(魏)나라 군주가 편작에게 “3형제 중 누가 가장 의술이 뛰어나오?”라고 물었다.편작은 뜻밖에도 “큰 형이 가장 뛰어나고, 둘째 형이 그 다음이며, 제가 가장 떨어집니다”라고 하였다. 이유인즉 “큰 형님의 의술은 병의 증세가 나타나기 전에 근본원인을 사전에 제거하여 예방하며, 둘째 형님은 병의 초기 증세를 치료하며, 본인은 중병만 주로 치료하여 침을 꽂고 피를 뽑고 약을 쓰고 수술을 하는 등 법석을 떨기 때문에 유명하다고 하였다.제조 설비를 정비하는 사람도 의사에 비견 될 수 있다. 설비가 아프면 의사처럼 치료도 하지만 이상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활동과 설비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제조 공정에서 주체는 사람과 설비이다. 설비의 안정은 생산, 품질, 원가 모두를 만족하게 하는 핵심이며 설비에 이상이 발생하면 조치하기 위해 많은 인력과 자원이 투입되어 비용이 증가한다. 또한 P사의 10년간 재해를 보면 절반 가량이 이상 조치 과정에서 발생하므로 재해예방을 위해서도 설비의 안정은 매우 중요하다.이런 설비관리에 들어가는 총 정비비는 ‘설비신뢰도’와 ‘정비력’에 의해서 결정된다. 설비신뢰도는 설비도입 시 대부분 결정되며 비용이 많이 들수록 신뢰도는 높아진다. 설비 가동 중에는 ‘고장이 얼마나 안나는가’와 ‘고장시 얼마나 빨리 수리하는가’로 신뢰도를 판단하며 지표는 MTBF(Mean Time Between Failures)와 MTTR(Mean Time To Repair)을 사용하고 있다.설비신뢰도의 대부분은 초기 도입 시 결정되므로 설비 운영 중에 총 정비비를 좌우하는 것은 ‘정비력’이다. 정비력은 인원과 기술력의 관계로 표현한다. 많은 인원으로 기술력이 낮으면 비용이 증가하고, 적은 인원이라도 기술력이 높으면 비용은 줄어든다. 그러므로 총 정비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사람의 정비기술력을 높여야 하는 것이다.필자가 지도하는 P사의 모 정비부서 리더는 부임 후 조직의 소통과 자신감을 심어 주기 위해 고민하다 사람의 역량 향상에 집중하였다. 5년 이하 저근속 직원은 최근 7년간의 장애사례집을 발간하여 학습과 자율 리포트를 작성하도록 하고, 전문 부서 파견 근무와 전문가 초청 교육은 물론 장인, 명장과 같은 모범 선배 양성을 지속 하였다. 그 결과 학습을 통해 정비기술력이 향상되고 더 많은 문제의 발굴과 개선이 이루어지며 성취감과 보람을 느끼는 선순환 체계가 형성되었고 설비장애율이 0.11에서 0.05로 220% 개선되었다고 한다.동양 한의학은 사람의 체질과 습관을 바꾸어 병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정비인의 역할 중 가장 큰 부분도 설비가 건강하도록 환경과 체질을 바꾸어 고장을 예방하는 것이며 그래도 예기치 못한 이상이 발생하면 빠르게 조치하는 능력으로 그 중심에 정비기술력이 높은 사람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2022-02-14

단일화는 빠를수록 효과적이다

김진국 고문 이번 대통령 선거의 시대 정신은 뭘까. 11일 저녁 대선후보 토론을 보면 딱히 잡히는 것이 없다. 서로 약점을 공격한 게 전부다. 미래 비전을 말하는 사람이 없고, 관심을 두는 사람도 드물다. 당장 관심사는 정권교체냐 정권 유지냐다.여론조사에서도 드러난다. 지난주 리서치뷰 조사에서 정권교체 지지(56%)가 정권 재창출 의견(36%)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문재인 대통령의 직무평가에 대해서도 긍정 평가(40%)보다 부정 평가(57%)가 훨씬 많다. (이하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참조) 비슷한 추세다.문 대통령은 지난주 “아무리 선거 시기라고 하더라도, 정치권에서 갈등과 분열을 부추겨서는 통합의 정치로 갈 수가 없다”고 말했다. “진영 간의 적대를 증폭시키고, 심지어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적대와 증오를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정작 진영 간 적대를 키운 게 누군가.문 대통령은 지난달 종교 지도자들에게 “(통합과 화합은)당연히 정치가 해냈어야 할 몫이지만, 저를 포함해서 (정치권이)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심각한 국민 분열을 인정했지만, 그 책임은 정치권 전체로 희석했다. “제 머리는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청사진으로 가득 차 있다”, “5월 10일은 진정한 국민통합이 시작되는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했던 취임사는 그냥 좋은 말을 붙여놓은 데 불과했다.촛불 이후 국민통합의 기회를 진영정치로 몰아갔다. 상식이 사라졌다. 임기 내내 정적에게는 잔인할 만큼 용서가 없었고, 같은 진영에는 봄바람이었다. 비서실에 선물한 ‘춘풍추상’(春風秋霜)도 그저 멋있는 글귀일 뿐이었다. 조국 사태 이후 그나마 남은 가능성까지 깡그리 무너졌다. 총선 때는 위성정당으로 협력 세력의 몫까지 약탈했다.공정이 무너지고, 견제할 세력은 없고, 헌정 제도도 마비됐다. 검찰, 법원, 국회…. 일자리는 마르고, 새 특권층이 설쳤다. 청년층이 절망했다. 그나마 지지율이 받쳐주는 건 극심한 편 가르기로 ‘대깨문’을 만든 덕분이다. 정권교체만 하면 이 상황이 나아질까. 또다시 보복과 뒤집기를 반복하지 않을까.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준비된 후보가 아니다. 정권교체를 위해 선택됐을 뿐이다. 집권하면 적폐 청산하겠다는 윤 후보의 말에 문 대통령이 발끈했다. 의도된 오독으로 보인다.하지만 ‘적폐 청산’은 집권 뒤 예상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윤 후보 지지에는 그런 기대도 많이 깔려 있지 않을까.거기에 그치면 불행이다. 냉엄한 국제 환경이 집안싸움만 할 때가 아니다. 경제 상황도 살얼음이다. 촛불은 국민 다수를 하나로 만들었지만 문 정권이 전리품을 독식했다. 정권교체 열망도 마찬가지다. 그 안에는 ‘적폐’ 청산뿐 아니라 진영정치 타파와 상식의 회복, 미래의 비전이 함께 녹아 있다. ‘연합정부’, ‘공동정부’를 생각하게 된다.국민은 현명하다. 지난주 한국갤럽 조사를 보면 지지도는 윤석열(37%)-이재명(36%)-안철수(13%)다. 그러나 호감도는 안철수(37%)-윤석열(34%)-이재명(34%)이다. 윤 후보를 지지하는 건 정권교체를 실현할 가능성이 큰 거대 정당 후보이기 때문이다. 겸손해야 한다. 힘을 모아야 한다.김대중 전 대통령(DJ)은 김종필 전 총리(JP)의 협조를 얻으려 정성을 다했다. JP의 청구동 자택까지 찾아갔다. DJ가 여론조사에서 선두였을 때다. 이회창 후보 측은 ‘숨어 있는 5%’를 꿈꾸며 승리를 자신했다. DJ는 끝까지 최선의 수를 찾았다. 그는 ‘호랑이가 토끼를 잡을 때도 사력을 다한다’라고 말했다. ‘샤이 이재명’ 주장도 있다. 자만해서 이긴 선거는 보지 못했다.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어제 선관위에 등록하고, 윤 후보에게 여론조사에 의한 단일화를 제안했다. 안 후보는 명분 없이 철수하기 어렵다. 다당제로 ‘새 정치’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도 강하다. 그런데도 단일화를 제안한 것은 국민의힘 논평대로 상당히 긍정적이다. 여론조사 제시가 단일화를 깨려는 생각보다 명분을 찾는 것으로 보인다. 명분을 살려야 이탈 표를 줄일 수 있다. 단일화는 투표 직전까지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본사 고문

2022-02-13

모든 것이 공(空)하다고?!

김규종 경북대 교수 ‘반야심경’을 암송하다가 앞부분에서 딱 막힌다. “관자재보살이 반야심경을 깊이 행하실 때 오온(五蘊)이 모두 공함을 밝게 보시고 일체(一切)의 고액(苦厄)을 넘어섰다.” ‘반야심경’첫머리에 나오는 이 구절이 명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반야심경’ 260글자의 본질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오온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다섯 가지를 뜻한다.우리를 포함한 세상 만유의 존재 형식과 실체가 색이다. 색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 수이며, 받아들인 바에 따라 생각을 일으킴이 상이다. 생각에 따라 행동함을 행이라 하고, 행동의 결과를 판단하는 것이 식이다. 예를 들어보자.강의실에 강아지가 들어온다. 나도 수강생들도 강아지를 본다. 강아지가 색이다. 강아지를 보고 모두 마음이 불편하다. 강의 도중에 왜 강아지가 들어온단 말인가. 누가 주인인가?! 그런 불편한 마음이 수다. 그리하여 나는 강아지를 쫓아내기로 마음먹고 실천에 옮긴다. 강아지를 쫓아낸 행위가 행이다. 강아지를 쫓아낸 것을 판단해보니 조금 지나쳤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식이다.여기서 색수상행식, 즉 오온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시간적 순차성에 따라 이루어졌다. 육하원칙에 충실한 과정을 모두 거친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인과율이 적용된 게다. 그런데 이 모든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 모두가 공하다는 것이 관자재보살의 깨달음이다. 그리하여 관자재보살은 세상의 온갖 고통과 괴로움을 건넜다는 것이다.그런 까닭에 더욱 이해할 수 없다. 분명히 내 눈으로 강아지를 보고 강의실 밖으로 몰아낸 다음, 그 행위를 후회한 나의 일련의 행동이 왜 공하단 말인가?!한 가지는 확실하게 다가온다. 지금까지 내가 노력해온 독서와 사유, 인식이 가져온 지식으로는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오온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붓다가 설하신 ‘반야지혜(般若智慧)’와 내가 추구해온 얕은 지식의 범주가 양립하기 불가능한 까닭이다.그런데 깨달음은 엉뚱한 서책에서 온다. ‘우주의 구조’를 읽다가 대면한 차원의 문제가 실마리를 제공한다. 우리는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이 조합된 4차원 세계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는다. 그런데 초끈이론은 9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이 조합한 10차원을, M-이론은 10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이 조합된 11차원 세계를 주장한다. 여기서 무릎을 친다.붓다가 말하는 전생과 사후의 여섯 세계가 확연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천상, 아수라, 인간, 축생, 아귀, 지옥의 여섯 공간이 그것이다. 그것을 심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던 내가 초끈이론의 주장과 만나니 눈앞이 환해진 것이다. 시간개념이 없는 개미는 3차원 공간이 아니라, 2차원 면을 움직이는 존재다. 개미에게 인간의 4차원 세계를 말하면, 개미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오온에서 10차원으로 전화(轉化)하는 과정을 보면서 각자 간직한 지식과 관습 혹은 지혜의 깊이와 너비가 얼마나 다를 것인지, 생각하니 새삼 가슴 서늘해진다.

2022-02-13

인공지능(AI)-인간의 승리일 뿐

서의호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 지난 4일 개막한 ‘2022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열기를 더하고 있다.베이징 올림픽은 현대 과학기술의 현란한 전시장이 될 전망이다. 5세대(5G), 인공지능(AI), 클라우드 컴퓨팅 등 혁신적인 기술이 경기장 곳곳에 도입돼 더 안전한 경기 진행과 정확한 판정은 물론,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을 돕는다고 한다.조직위원회는 대회 기간 내내 각 경기장에 다양한 종류의 AI 로봇을 배치한다. 선수들과 경기장 근무자들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는 모니터링 로봇, 소독 로봇, 배송 로봇 등이다.개회식에서 선을 뵌 간결하면서도 다양한 AI 기법의 활용은 전 세계의 흥미를 돋우었다.한국의 2018 평창올림픽에서도 세계 최초 5G, 이동통신 서비스를 비롯하여 편리한 사물인터넷(IoT), 초고화질(UHD), 가상현실(VR) 서비스 등 AI 기반의 각종 기술이 선을 보였다.AI 기반 통·번역 앱인 ‘지니톡’은 공식 지정하여 음성, 이미지 문자, 장문의 텍스트 번역까지 해주는 등 총 9개 언어를 지원하고 있다.과연 AI는 인간을 완전히 대신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인간과의 대결에서 이긴다면 그런 AI는 누구의 승리인가?튜링 테스트 (Turing Test)라는 말이 있다.기계의 지능이 인간처럼 독자적인 사고를 하거나, 의식을 가졌는지 인간과의 대화를 통하여 확인하는 시험법이다. 이 테스트는 현재 로봇 등 인공지능 연구에서 기계의 독자적 사고 여부를 판별하는 주요 기준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튜링 테스트는 1950년 영국의 수학자이자 암호 해독가인 알랜 튜링(Alan Turing)이 발표한 ‘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란 논문에서 처음 소개되었다.기계의 지능이 인간에 필적하는지 판별하는 ‘튜링 테스트’를 제대로 통과한 인공지능이 아직은 드물다.2014년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첫 사례가 나왔다고 영국 레딩대학교가 발표하였다. 레딩대학교는 전날 영국 왕립학회에서 이 대학 시스템공학부와 유럽연합(EU)의 재정지원을 받는 로봇기술 법제도 연구기관 ‘로보로’가 개최한 ‘튜링 테스트 2014’ 행사에서 이런 판정이 나왔다고 전하였다.이 대학에 따르면 경쟁에 참가한 프로그램 중 ‘유진 구스트만’이라는 슈퍼컴퓨터에서 돌아가는 ‘유진’이라는 프로그램이 이 기준을 통과하였다는 것이다.한편, 2016년 세계의 관심 속에 한국에서 개최된 세계 최정상의 기사인 이세돌 9단과 구글이 개발한 바둑 컴퓨터 프로그램 알파고의 대결은 전설적으로 남아있다.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인류 대표인 이세돌 9단과 구글 딥마인드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결은 싱겁게 4승 1패의 알파고 승리로 끝났다.AI는 컴퓨터 과학의 다른 분야와 직간접으로 많은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현대에는 정보기술의 여러 분야에서 인공지능적 요소를 도입하여 그 분야의 문제 풀이에 활용하려는 시도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자연어처리, 로봇원리, 전문가시스템, 이론증명, 신경망 이론 등이 인공지능의 분야인데 이 중에서 구글의 딥마인드는 신경망 이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딥마인드가 신경망 이론으로 알파고를 개발하기 이전 2006년에 등장한 딥러닝은 뇌의 구조를 재현한 인공지능 기술을 추진하는 혁신적인 기술로 주목받았다.자율자동차 개발도 AI의 눈부신 발전을 배경으로 속도를 내고 있다.알파고를 개발한 구글의 ‘자율주행 자동차’가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애플도 무인 전기자동차를 개발하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AI의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주장도 힘을 얻는다.‘유진’ 프로그램의 튜링 테스트 통과도 과장되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고, 알파고도 학습한 적 없는 경우 맞닥뜨리면 터무니없는 결과를 보여준다는 비판과 함께 1패를 당할 때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다.중국, 미국, 일본 등 전 세계에서 자율주행차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자율주행차는 상용화가 머지않았다는 예측이 나오기도 했으나, 업계에서는 상품성 있는 차량이 출시되기까지는 최소 5년은 더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국제자동차기술협회에 따르면 자율주행 기술은 0에서 5까지 6개 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운전자 개입이 필요하지 않은 4단계 이상을 진정한 의미의 자율주행으로 본다. 현재 상용화된 자율주행은 운전자를 보조하는 수준인 2단계다.인간과 AI의 대결, 누가 이기든 사실상 인간의 승리일 뿐이라는 구글 슈밋 회장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인간이 AI에 진다 하여도 그 AI는 인간이 만든 프로그램일 뿐이다.사실상 AI는 인간의 승리일 뿐이다.인간이 위대하다는 것을 우리는 계속 믿고 싶을 뿐이다.

2022-02-13

카펫을 깔며

카펫을 깔았다. 아이들 호흡기에 좋지 않다고 해서 한동안 수납장 속에 넣어 두었었다. 정해진 공간에 넣기 바빠 카펫의 형편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구석진 곳에 넣기 위해 여러 번 겹접었다. 오랜만에 펼쳐 놓으니 판판하지 않다. 접혔던 선이 선명하다. 자근자근 눌러서 가라앉히려 해도 조금 지나면 등허리가 불룩 튀어나온다. 울룩불룩한 카펫 위를 아이들이 뛰어다닌다. 그 등쌀에 이리저리 밀릴까 봐 소파 발을 빌어 한 귀퉁이씩 눌러 놓았다. 식구들이 번갈아 가며 등도 대주고 엉덩이로 따뜻하게 품어줘야 할까 보다. 며칠은 그렇게 달래야지.달래야 할 것은 카펫만이 아니다. 요즘 내 마음이 마음이 아니다.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오래 접혔던 카펫을 펼친 것처럼, 아무리 혼자 삭히려 해도 쉽지 않다. 올해로 결혼 십이 년째인 나는 그동안 부부싸움이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남편의 성격이 느긋하고 참을성이 많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싸움을 피하고 싶은 내 마음도 물론 한몫했다. 내 어릴 때, 부모님은 자주 말다툼을 했다. 늘 작고 사소한 것들로 누가 옳으니 그르니 티격태격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나는 결혼하면 절대 싸우지 않으리라, 특히 자식 앞에선 그러지 말자고 다짐했었다.그 다짐이 조금씩 무너지더니 며칠 전엔 새벽이 될 때까지 목소리 높여가며 싸움을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둘째 아이가 아직도 한글을 깨치지 못한 것이 꼬투리가 되었다. 남편은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고 했다. 급기야 시어머니는 자신을 일곱 살에 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잘 가르쳤다면서, 나와 비교하기까지 했다. 언성이 높아질 만하자 남편은 아이들 잘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다.아이들이 잠들자 남편은, 요즘의 내 모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면서 다시 말을 꺼냈다. 결혼 전의 다소곳하던 모습은 다 어디 갔냐고 했다. 자신이 상상하고 기대했던 현모양처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어 실망스럽다며 한숨을 토했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다. 난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멀다. 남편이 원하는 모습에 나를 맞추려고 했을 뿐이다. 수납장에 맞춰 카펫을 접어 넣듯이.십 년이 한계였나 보다. 나는 참아 왔던 말들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자기는 하루가 멀다하고 늦게 들어오면서, 어쩌다 내가 약속이 있어 나가면 왜 빨리 들어오라고 시간을 정해 주느냐, 그러지 마라. 내가 시댁에 하는 만큼 당신은 처가에 했느냐, 똑같이 해라. 내 하는 것의 반만 해도 사위 잘 봤다고 동네 소문이 날 것이다. 둘째가 한글 모르는 것도 내 탓만 하지 마라, 아이들 교육을 엄마 혼자 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아빠도 참여해서 같이 키우자….’ 카펫이 등허리를 곧추세우며 수납장 속에서의 시간을 성토하듯이 나는 남편에게 가슴속에 접어두었던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꼬깃꼬깃해진 채 쏟아져 나온 말들은 남편 앞에서 파르르 떨고 있었다. 남편은 얼버무리듯 그만 자자며 자릴 피했다.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크기를 재는 자기만의 자가 한 개씩 있지 않을까? 남편을 만나면서 나는 재단사가 되었다. 그 사람의 마음에 내 마음을 대보곤 했다. 모양이 맞지 않아도 가위질은 차마 못 해 이리저리 내 마음을 겹접었다.‘접었다’라는 표현이 맞다. 내 생각은 접어서 마음속 수납장에 넣어 두었다. 색종이는 접어서 비행기로 날리고 예쁜 꽃을 피워 빛나게 할 수도 있지만, 마음은 접으면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다. 마음 접었다함은 거의 포기했다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제때제때 풀어야 한다. 작은 생채기라 해서 돌보지 않고 접어두었더니 나도 모르는 새 가슴 한켠에 쌓였나 보다. 그런 상처쯤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나아질 거라 여겼다. 내색하지 않으니 남편 또한 내가 어떤 불만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싸우지 않겠다는 애초의 내 다짐이 오히려 문제를 만든 셈이었다. 카펫에 누워 남편과 못다한 이야기를 나눠야겠다. 싸움이 아닌 대화를 말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카펫의 구겨진 자리가 펴지듯 내 마음도 편안해질 것 같다. /김순희(수필가)

2022-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