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내린다. 창가에 앉아 있으면 비릿한 물의 냄새가 난다. 올해는 비와 관련된 사고가 많았으므로 젖은 아스팔트나 짙게 물든 나뭇잎을 바라보는 일이 그리 유쾌하지 않다.
그저 창문에 달라붙은 빗방울이 한 곳에 오래 맺혀 있는 장면을 응시한다. 가늘고, 연약하고, 지나치게 투명한 비. 세상 위로 두터운 솜이불이 덮인 듯 침울하고 잠잠하다.
변화하는 계절에 앞서 해야 하는 몇 가지의 일이 있다. 첫째는 지금 살고 있는 낡은 집에 외풍 새지 않도록 창문 보수 공사를 해야 한다. 찬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PVC 재질의 얇은 투명막을 창문 표면에 붙이고, 틈 사이사이엔 ‘뽁뽁이’라 부르는 롤에어캡을 촘촘히 두른다. 그리고 지난 봄 한 쪽에 잘 개켜두었던 두꺼운 천을 가져와서 그 위를 덮는다. 그럼 투명막과 뽁뽁이가 가려져서 훨씬 보기 좋다.
간단 보수가 끝났다면 옷장 깊은 곳에 넣어두었던 가을 옷을 꺼낸다. 세탁해야 하는 옷과 그만 버려야 하는 옷들을 분류한다. 지나치게 상태가 좋은 건 중고 장터에 팔기도 하고, 영 상태가 엉망인건 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부지런히 집 안을 움직이다보면 어느새 금방 배고파진다. 가을 더위는 여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금새 열이 오르고 금방 식는다.
근사한 식사를 차리기엔 미처 체력이 도와주지 않고, 그렇다고 간단히 끼니를 때우기엔 아쉬울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감자를 얇게 썰어 버터와 우유를 넣고 푹 끓여내는 감자 수프다. 감자의 은은한 단맛과 부드럽고 느끼한 크림의 맛이 어우러져 단짠딴짠한 맛이 잘 살아있는데다 따스한 목넘김이 좋은 요리다.
재료 준비는 간단하다. 버터 한 두어 조각, 양파, 감자, 우유, 크림, 체다 치즈 정도만 있으면 된다. 중간 크기의 감자 2-3개를 찬 물에 잘 씻은 다음 얇게 썬다. 한손에 단단하게 잡히는 감자의 촉감도 좋지만, 무엇보다 울퉁불퉁한 감자를 찬 물에 부드럽게 흘려 흙탕물을 씻겨 낼 때의 기분이 좋다.
짙은 갈색의 껍질을 벗겨내 하얗고 미끌미끌한 감자의 속을 드러내는 과정 또한 케케묵은 반복의 일상을 반짝이게 닦아내는 기분이 든다.
재료 준비가 다 됐다면 준비한 냄비에 버터를 넣고 녹힌 뒤 양파 한 개를 썰어 넣는다. 양파의 단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올 때쯤 썰어둔 감자와 종이컵 기준 물 2컵을 넣고 10분 정도 익힌다. 감자가 쉽게 으깨질 정도로 익었다면 우유 2컵 반과 생크림 2컵을 넣는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우유’와 ‘생크림’이다. 우유나 크림 대신 물을 넣으면 특유의 고소한 풍미와 감칠맛이 줄어든다. 불을 끄고 한 김 식힌 뒤에 끓인 감자를 믹서기에 넣어 간다.
나는 스프에 감자가 어느 정도 씹히는 걸 좋아해서 제형을 봐가며 적당히 갈아준다. 간 감자 수프를 다시 냄비에 담고 모짜렐라 치즈 2장을 넣어 2분 정도 더 끓이면 완성이다.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후추나 파슬리를 뿌려 먹거나, 빵 두어 조각을 곁들이면 훌륭한 식사가 된다.
이렇게 만든 감자수프는 마트에서 파는 수프 팩과는 또 다른 맛이다. 물론 손이 많이 가고 재료를 준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만들어 먹는 수프는 재료 본연의 맛이 하나하나 살아 있다. 게다가 보글보글 수프가 끓을 때의 소리와 냄새는 백 마디의 여러 말보다 따스한 위로가 되어 다가온다. 잘 만들어진 감자 수프가 그릇에 담긴 모양새는 순하고도 무해해서 절로 긴장이 풀어진다.
가을은 부엌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은 계절이다. 재료를 물에 씻고 다듬으며 내가 내는 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그럼 여름 내내 멈추어 있던 주방을 다시금 닦고 빛내어 윤택하게 만드는 듯한 기분이 된달까.
그간 소음으로 느껴지던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조금씩 새곤 했던 수도꼭지의 물방울 소리, 인상 찌푸려졌던 뜨거운 불이 이제 더는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겨울을 대비해 음식을 구비해 두는 가을 다람쥐처럼, 생활의 애정과 부지런함을 품고선 가을의 한복판으로 나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