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나. 이 집 비우려고. 넓은 집에 혼자 지내려 하니 겁도 나고, 이 집에 남아 있을 명분도 없고. 오빠. 나 어떻게 해? 부른 배를 받쳐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는 거야?
안나가 노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노마의 답을 기다리며 안나는 자신이 보낸 문자를 다시 읽었다. 엄마는 슬리퍼로 등짝을 후려칠 것이고, 아빠는 돌아 앉아 담배만 피워댈 것이 분명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소파로 몸을 옮겨 등을 기댔다.
조금만 더 기다려봐. 필립 형님이 방법을 만들어 본다고 했어. 약속을 했으니 뭔가 말이 있겠지.
노마에게서 답이 왔다.
몰라. 이번 주까지 기다려보고 별말 없으면 나갈 거야.
안나는 노마에게 답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덮었다. 필립 형님? 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음날 필립의 아내가 왔다.
-우리 집 양반이 애 낳을 때까지 우리 집에 들어와 있으라 그러시네요. 그 몸으로 친정으로 돌아가는 것도 좀 그렇고, 이 넓은 집에 혼자 있는 것도 그렇고. 나더러 임산부 케어를 하랍니다.
필립의 아내가 안나를 보며 말했다. 장례식장에서도 안나를 챙겨주던 그녀였다.
-그래도 될지?
안나가 물었다.
-몸이 좀 힘들겠어. 친정에 돌아가 봐도 별수 없을 것이고. 싫은 소리만 듣겠지. 간단하게 중요한 짐만 싸요. 오늘 같이 집으로 들어가게. 짐은 내일 사람들 보내서 옮기면 되니까. 내가, 마음이 왔다 갔다 해. 그러니까 빨리 가야 해요.
친정이라는 그녀의 말에 안나는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필립의 아내는 안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를 어째, 이를 어째. 안나는 눈물을 흘렸고 필립의 아내는 한숨을 내뱉었다.
-아들이래요.
어깨를 들썩이던 안나가 울음 끝에 말했다.
필립이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회화나무를 마주하고 아내가 서 있었다.
-여기서 뭐해?
필립이 아내의 옆에 나란히 서며 물었다.
-사내아이래요.
-무슨 말이야?
-안나 씨 뱃속의 아기. 이번에 산부인과 가니 말을 해주더래요. 아버님은 벌써 알고 계셨다 그러네요. 아버님이 다른 사람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 부탁을 하셨다 하네요. 안나 씨한테조차. 그래도 혹시나 잊어버리셨을까 싶어 지금 아버님께 알려드리는 중이에요. 당신이 있는데도 사내아이를 기다리셨잖아요. 대놓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내가 손자를 낳지 못한 것을 많이 섭섭해 하셨어요. 살아계셨으면 무척 좋아하셨겠지요. 그래서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당신 말대로 안나 씨 데리고 왔어요. 일단 애 낳을 때까지 만이라도 같이 있자고 했어요.
필립의 아내가 나지막이 말했다. 목소리가 무거웠다.
-그래요. 알겠어. 잘했네. 고마워.
-지금 안나 씨, 자고 있으니까 조용히 들어가세요. 어째 우리 딸이 저렇게 된 것처럼 마음이 그래요.
바람이 불어왔다. 반쯤 접힌 회화나무 잎들이 박수치 듯 흔들거렸다. 현관으로 향하던 필립의 아내가 발걸음을 멈췄다. 필립을 돌아보며 말했다.
-가끔 당신 없이 혼자 있는 밤이면 회화나무 아래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아요.
-무서워?
필립이 물었다.
-아니요. 그냥 소리가 나는 것 같을 뿐이에요. 오히려 같이 계신 것 같아서 마음이 편안할 때도 있어요. 누군지 아니까.
필립의 아내가 대답했다. 덧붙여 말했다.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보다 더 가까이 계신 것 같지 않아요?
안나와 필립이 저녁 식탁에 마주 앉았다. 필립의 아내는 안나의 옆에 앉았다. 입에 맞지 않더라도 많이 먹어야 한다며 필립의 아내는 안나의 숟가락에 반찬을 올렸고, 안나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숟가락을 들었다. 필립이 자기 앞에 있던 오이소박이 접시를 안나 앞으로 밀었다.
-이것도 좀 먹어 보세요. 우리 집사람이 이거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합니다. 시원하니 맛있어요.
안나가 고개를 들어 필립을 보았다. 필립의 아내도 필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감사합니다. 저도, 아기도, 오빠도. 오빠에게 이야기 들었습니다. 로봇 관리사 그만두고 올더앤베러 로봇연구실로 들어가기로 했다고.
무슨 말이야? 필립의 아내가 눈짓으로 물었다.
-실력이 좋다 하더라고. 실력이 좋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있나. 어차피 우리 회사도 주력사업으로 검토하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고. 그쪽으로 경험도 많으니 회사에 제법 도움이 될 거야. 어찌 되었건 이것도 인연 아닌가, 인연.
-회장님도 챙겨주시지 않았던 건데. 저희 부모님도 많이 고마워하세요. 감사합니다.
안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부정한 자세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필립의 아내는 안나의 허리와 어깨를 붙잡고 다시 앉혔고, 필립은 안나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 안나가 자리에 앉자 필립이 말했다.
-우리 이건 확실히 하도록 하지. 안나 씨나, 뱃속의 아기, 그리고 오빠 노마 씨까지는 나의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들은 해 줄 생각이야. 하지만 안나 씨 부모님은 달라. 나는 안나 씨 부모님까지 인연을 넓힐 생각이 없어. 알겠지.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김강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