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 연재소설 ‘Grasp reflex’
-그렇구나. 알았다. 기분은 좀 어떠냐? 요즘은 어디에 마음을 쓰고 있느냐?
영권이 인호에게 물었다.
-아버님께서 말씀하셨던 운이라는 것을 시험해보고 있습니다.
-내가? 내가 운을 이야기한 적 있느냐?
-예. 저번에 남해에서. 이런저런. 아버님의 좋은 운이 지속되셨으면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고맙구나. 잘 다녀 오거라.
인호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나갔다. 많이 섭섭한가 보군. 남해에서의 대화를 아직 기억하고 있다니. 이 년이나 지난 일을. 영권이 혼잣말을 했다. 영권은 마음이 불편했지만 딱히 달리 할 것은 없었다.
전화가 왔다. 필립이었다.
-웬일이신가? 우리 다음 주에 만날 텐데?
-네. 만나야지요. 제가 차를 보내겠습니다. 공개된 곳에서 뵙기가 좀 그래서 조용한 곳으로 마련해두었습니다. 편안히 오시면 됩니다.
-알겠네.
약속한 날 저녁 필립이 보낸 차가 왔다. 회사에 소속된 차는 아닌 듯했다. 나름 철저하군. 생각보다 믿음이 가는데. 어쩌면 제 아비보다 낫겠어. 영권은 뒷좌석에 기대 필립과 나누어야 할 이야기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차는 서울을 벗어나 강원도 쪽으로 향했다. 운전사가 운전석 창을 열었다. 무겁고 싸늘한 밤공기가 차 안으로 들어왔다.
영권이 웃옷의 단추를 채우며 말했다.
-춥지 않은가? 나는 좀 추운데.
-아, 넵. 차 안 공기가 탁한 것 같아서요. 곧 닫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물어보지도 않고 문을 열다니 기본이 안 되어 있군.
태극기를 들고 앞장서 걷고 있는 가이드 뒤로 시의원들이 삼삼오오 그룹을 지어 따라가고 있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가이드의 음성이 들렸다.
-지금 보고 계신 이 강의 이름은 네바 강입니다. 생페테르부르크를 가로지르는 큰 강이죠. 강물의 색을 한 번 보시겠어요? 잘 보시면 강물의 색이 푸르지가 않고 검을 것입니다. 이건 강바닥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도시가 건설되기 전, 이 근처는 모두 늪이었다고 합니다. 도시를 건설하면서 강이 형성되었는데요. 그래서 늪의 검은 흙들이 강의 바닥을 이루고 있습니다. 물이 검은 것이 아니라 바닥이 검어서 강이 검게 보이는 거지요. 거꾸로 생각하면 물이 맑아서 그렇다는 뜻도 됩니다. 깊이가 이십육 미터 정도 됩니다. 생각보다 깊지요?
넓고 깊은 강의 표면이 바람에 흔들렸다. 흔들리는 표면은 파도가 되어 강 가장자리의 벽으로 와 부딪쳤다.
-빠지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여기는 깊고 물살이 빨라서 사고가 잘 납니다.
가이드의 주의가 있었다. 자유 시간 십오 분을 줄 테니 둘러보시라는 말과 함께 가이드의 음성은 사라졌다. 인호는 강의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강물의 색을 보고 싶었다. 가이드의 말처럼 검었다. 검은 강 위로 은색의 물방울들이 튀었다.
지금쯤이겠지. 깊고 검은 강을 바라보며 인호는 생각했다. 저 강 아래 깊은 곳에 검은 진흙들이 있을 줄 어찌 알겠어. 누군가 설명해주지 않는다면 절대로 알 수가 없지. 이 강물을 모두 마셔버리거나, 전부 바다로 쓸어낸다면 몰라도. 아니면 강으로 들어가 바닥까지 내려가 보거나. 그렇지. 바닥은 아무도 몰라. 아버지,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이제 강바닥을 한 번 보셔야지요. 바닥에는 검은 진흙들이 있답니다.
이번에는 떨리지 않았다. 물건을 들어낼 일이 없으니 지난번보다 쉬운 일이라 생각했다. 직접 해야 할 일도 아니었다.
노마는 백미러로 영권을 보았다. 뒷좌석 등받이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저기, 의원님.
-뭔가?
-안전벨트를 매시겠습니까? 가는 길이 조금 험해서 그럽니다.
-험한 길을 험하지 않게 가야 베테랑 운전사인 것 아닌가? 최필립 회장, 그래 이제는 회장이라고 불러도 되겠지. 최필립 회장이 고용한 운전사면 베테랑일 텐데.
-베테랑입니다. 이제 곧 베테랑에게도 험한 길에 들어설 것입니다.
-알겠네.
영권은 뒷좌석 안전벨트를 찾아 매었다. 딸칵 소리가 났다.
운전하다 물속으로 들어가면 되는 거야. 그리고 뒤돌아보지 말고 나와 그러면 돼. 필립이 말했었다. 그러면 되는 일이었다.
왼편으로 검은 저수지가 보였다. 이윽고 무언가 수면을 흔들며 저수지로 들어갔다. 어둠 속 수면에 비친 달빛이 부서졌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 이곳, 여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어. 부서진 가드레일이 말해주었지만 거들떠보는 이는 없었다.
이틀 뒤 보좌관이 영권의 실종신고를 했다. CCTV를 분석한 경찰이 강원도의 한 저수지에서 영권이 타고 있던 차량을 건져냈다. 영권의 차가운 몸에서 오직 한 곳 왼쪽 가슴속 인공 심장만이 굳은 핏덩이를 애써 밀어내고 있었다. /김강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