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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강 작가의 연재소설 ‘Grasp reflex’ 읽고

신문 연재소설이 전작소설의 창작보다 어려운 건 ‘독자와의 약속’을 지켜야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닐지.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스타일과 집필 패턴을 조절하며 쓰는 게 가능한 전작소설(여러 회로 나누지 않고 한꺼번에 발표하는 작품)과 달리 연재소설은 ‘매일, 혹은 매주 같은 시간에 신문 구독자들이 작품을 읽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마지막까지 이어가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창작될 수밖에 없다.그러기에 이전 신문 연재소설은 많은 에피소드를 낳았다. 1974년 시작돼 10년을 ‘한국일보’에 게재된 황석영 작가의 장편소설 연재 ‘장길산’.지금처럼 이메일이나 SNS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황석영은 원고지에 급하게 쓴 1주일, 혹은 2주일 분량의 작품을 자신이 기거하던 도시의 버스터미널에서 서울로 가는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맡기며 “이걸 늦지 않게 한국일보 편집국에 전달해주시오”라고 부탁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할 정도다.소설가 김강(50)은 2년 전 인터뷰를 진행하며 만났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며 그에게서 본 것은 문학을 향한 진정성과 성실함이었다.향후 김 작가의 문장이 동시대 평론가와 독자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지는 지금으로선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그러나, 한 가지. 누구보다 바쁘게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 작품을 써내는 문학을 향한 그의 열정은 작품 마감 일자, 그러니까 자신의 소설을 읽는 사람들과의 약속 지키기로 이어질 게 분명한 듯했다.대부분이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기에 자신을 중심축에 놓고 사는 소설가와 시인들. 김강의 성실성은 보편 예술가들 사이에선 쉽게 발견하기 힘든 미덕으로 다가왔다.그것이었다. “소설을 연재하고 싶다”는 김 작가의 제의를 본지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른바 ‘연재 펑크’가 없을 것이라 믿었던 것.예측은 엇나가지 않았다. 김 작가는 연재가 계속된 11개월 동안 단 한 번도 ‘원고 마감 시간’을 지키지 않은 적이 없다.올 1월 첫 주 시작된 연재소설 ‘Grasp reflex’는 11월까지 지속됐고, 적지 않은 독자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았다. 이는 김강의 동시대적 문제의식을 공감하고 공유한 이들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아닐까?“텍스트는 텍스트로서 받아들이면 된다”는 게 현대 소설을 이해하는 가장 유효한 방법이다.그러니, “나는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이 소설을 썼다”라는 작가의 부연이나 “이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잣대는 어떤 문학이론에서 발견할 수 있고, 소설가가 이걸 통해 말하고자 하는 건 이러저러한 것이다”라는 구구절절한 비평도 여기서는 그닥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긴 기간 연재된 김강의 소설 ‘Grasp reflex’를 따라 읽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다종다양한 지향을 가지고 삶을 이어온 사람들의 버릴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는 명명백백한 욕망을 서술·묘사하고 있다.돈과 권력을 독점한 이들의 ‘불사(不死) 욕망’, 거기에 얹혀 자신의 삶을 우화등선(羽化登仙)시키고 싶은 이들의 ‘신분상승 욕망’, 그것이 자신의 이익과 연관된다면 혈친도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의 ‘돈에 대한 욕망’….21세기 현대화된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와 그 속을 유령처럼 헤매 다니는 등장인물들이 가득한 김강의 소설 ‘Grasp reflex’는 어둡고 음습하게 읽힐 수도 있는 작품이다.그럼에도 이 연재소설이 마냥 절망적인 디스토피아(Dystopia)의 문학적 재현에 그치지 않고, 어둠 속에서도 존재해온 희미한 빛으로 은유되는 ‘희망’의 한 조각을 보여줄 수 있는 건 김 작가의 태생적 ‘낙관성’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동서와 고금을 통틀어 낙관(樂觀)이란 미래에 관한 긍정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그걸 가진 이들만이 낙관을 이룰 수 없게 만드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사회적 조건과 싸울 수 있는 것 아니겠나.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소설가를 포함한 예술가들은 ‘모두가 낙관 속에서 사는 웃음 가득한 세상’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을 터.어쨌건 이로써 본지에서의 연재는 끝났다. 머지않아 김강의 첫 경장편 ‘Grasp reflex’는 책으로 모습을 바꿔 또 다른 독자들과 만날 것이다.작품의 제목이 어떻게 바뀌건 2022년 경북매일에 연재된 소설 ‘Grasp reflex’와 소설가 김강의 문학적 미래를 축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끝/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2-11-28

연재를 마치며

올 1월부터 본지에 연재된 소설 ‘Grasp reflex’가 지난주 끝을 맺었다. 연재를 시작할 즈음 김 작가는 “두 개체가 조우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우연의 방식이거나 혹은 한 개체가 다른 개체가 있는 곳으로 한 발 내딛는 것. 쓰는 이와 읽는 이의 경우는 어떤가?”라고 물으며, “우연은 차치하자. 자, 여기 문학이 있으니 와서 보시오. 하며 좌판에 앉아있는 것은 아닌가? 쓰기만 하시오, 내가 찾아가겠소. 이런 그대를 기다리는 것은 아닌가? 이 지점에서 나의 고민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기다리지 않겠다. 일어나야겠다. 걸어야겠다”는 소설가로서의 결심을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이제 연재가 마무리되는 시점. 아래는 작가가 보내온 원고 ‘연재를 마치며’다. 문학에 관한 김강 작가 나름의 정의와 앞으로의 출간 계획까지가 담겨 있기에 가감 없이 게재한다. 편집자 주이야기가 내게 와 나의 손을 빌려 문자로 모습을 드러내고 나의 입을 통해 마지막 문장으로 세상에 나왔을 때, 누군가가 나를 보았다면 ‘기괴한 표정이다’라 말했을 것입니다.그때 나는 반가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을 어찌하지 못했습니다.입 꼬리를 바짝 올리면서도 눈은 아래를 향했고 찌푸린 미간 탓에 양쪽 관자놀이의 피부가 당겨졌지요.왼쪽 가슴이 쿵쿵쿵 뛰었는데 그것이 기뻐서인지, 아니면 두려워서인지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기다렸던,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기에 반가울 수밖에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 책임감, 같은 것들이 반가움과 함께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글을 쓰는 이는 곧 글을 전하는 이 이어야 합니다.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전한다는 전제는 글을 쓰는 일이 단순한 오락을 넘어 선한 행위, 존재할 가치가 있는 어떤 일이 되도록 강제합니다. 그것은 쓰는 이, 그의 손을 빌려 나타난 이야기에 의미를 입히고 살아 숨 쉬게 합니다. 진정한 마침표가 됩니다.또한 그 전제로 인해 작가는 자신이 내어 놓은 글이 만나게 될 독자를 염두에 두게 되고 자신이 내어 놓은 글이 그들의 생각과 행동에 미칠 영향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됩니다. 물론 그것은 글쓰는 이 자신의 관점에서지요. 쓰는 이는 독자를 보아가며, 눈치를 보며 타인의 입맛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바꾸는 부류가 아니니까요.어떤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할 것인가?그 지점에서 오랫동안 머물렀습니다.어느 순간 기회가 왔고, 마침표를 찍은 지 제법 시간이 지난 이야기를 달랠 수 있었습니다. 내게는, 나와 이야기에게는 경북매일신문 연재가 그 기회였습니다.한 가지 바람이 있습니다.저에게 주어졌던 이 기회가 다른 글 쓰는 이에게도 마땅히 주어지기를 기대합니다.글을 쓰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을 즈음 어느 자리에서 누군가 내게 물었습니다.“당신에게 문학은 무엇입니까?”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저에게 문학은 질문입니다. 진실과 당위에 대한 질문입니다.”진실은 기억의 영역이며 당위는 미래의 영역입니다.기억 속에서 찾아낸 진실, 그 진실은 당위의 근거이며 미래를 예정합니다. 기억으로부터 미래가 시작됩니다.이 장편소설은 지금 우리 세계, 다가올 우리 세계에 대한 질문입니다.2022년이 지나고 2023년에 들어설 무렵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비로소 제게는 다음 질문을 준비할 시간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한동안 저는 그것을 이야기로 내어놓는데 열중할 것입니다.한 가지 바람이 있습니다.이 장편소설이, 저의 질문이 많은 사람들과 만나기를 바랍니다. 독자 여러분의 응원을 기대합니다.촌스럽지만 꼭 하고 싶은, 이 자리가 아니면 하기 힘들 것 같은 감사 인사를 위해 지면을 빌립니다.지난 1년여 동안 매주 화요일자 경북매일 신문을 모으고, 저의 연재소설을 가위로 오려 스크랩을 만드신 아버님께, 매주 화요일 ‘아들, 파이팅!’, 문자를 보내주신 어머님께 감사드립니다.가장 든든한 후원자이며 관리자인 그녀와 두 아이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매주 연재소설을 읽고 격려의 말씀을 전해주신 독자여러분을 잊지 않겠습니다.마지막으로 쉽지 않은 시기에 귀한 지면을 소설가에게 내어준 경북매일신문, 편집자께 고개 숙여 인사드립니다.한 가지 바람이 있습니다.세상 모든 이들에게,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에게 따듯한 새해, 2023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22-11-21

누구나 마땅한 일을 하는 겁니다 <Ⅰ>

/삽화 이건욱 안나는 한 손으로 부른 배를 받쳐 들고 우현을 맞이했다. 부은 두 눈을 남은 한 손으로 훔치며 우현의 앞에 섰다. 검은 상복 아래 하얀 버선이 보였다.-왔어?우현이 안나에게 말했다.-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언젠가 아니, 조만간 볼 수 있겠다 싶었지만.-무슨 말이야?-노마가 네 이야기를 했었거든. 모두 다. 늙은 회장이 죽은 것도.-그랬어? 그랬구나. 오빠가 다 말했구나. 말하지 말라 했는데.안나는 노마의 영정을 보며 눈을 흘겼다. 노마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웃고 있었다. 영정 앞 피어오르던 향 연기가 잠깐 흔들렸다.-이제 어떻게 할 거야?우현이 안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고 안나는 우현의 손등을 쓰다듬었다.-뭘 어떻게 하겠어. 아이가 클 때까지는 죽은 듯 지내야지. 노마 오빠와 약속했었어. 그때까지는 조용히 착하게 있기로.-그래? 내가 도움이 될 일이 있을까?-지금 답을 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알다시피 지금 상중이니. 아무튼 와 줘서 고마워. 전화번호는 그대로인거지? 내가 전화할게. 이 배 좀 꺼지고 나면 같이 밥도 먹고.우현은 전화하겠다는 안나의 말이 빈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안나는 꼭, 곧 전화를 할 것이었다. 전화든, 뭐든 받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노마가 왜 그 차를 운전했는지 궁금했지만 안나도, 노마의 부모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 일과 관계가 있는 걸까? 이번에는 왜 내게 말하지 않았던 걸까? 그 일은 나 혼자 무덤까지 가지고 가면 되는 건가? 우현은 되묻기만 했다. 답을 줄 이도 없었다. 당장은 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기도 했다. 노마가 사라졌으니 우현은 그 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 같았다. 약간은 후련했다.-들으셨습니까? 팀장님?허 형사가 박 팀장의 방으로 들어왔다.-뭐 말이야? 국회의원 죽은 것? 자동차 사고라면서. 익사라 하던데.박 팀장은 쌓인 결재 서류를 뒤적이며 대답했다.-네. 자동차 사고고 익사이긴 한데요. 운전자가 있었습니다. 운전자도 사망했는데요, 소속이 올더앤베러 직원이랍니다. 올더앤베러 직원이 왜 그 차를 운전했는지,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운전석과 뒷자리 안전벨트, 둘 다 불량이었다는 것도 이상하고요.-최 회장 사건과 관계있다는 거야?-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느낌이 조금 그래서요. 회사에 문의하니 휴가 중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유족들은 휴가였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고요. 올더앤베러에 취직한지도 얼마 안 되었다는데. 더 캐볼까요?-뭘 더 캐. 조금 있어봐. 뭘 캐려고 해도 단서가 있어야지. 느낌이 좀 그렇기는 하지만 감으로 수사할 수는 없잖아. 더구나 우리 관할도 아닌 것을. 관계가 있다면 최 회장 사건 수사하다보면 연결고리가 나오겠지.최 회장 사건 수사는 답보상태였다. 허 형사는 더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가 없어 답답하던 참이었다. 국회의원 사건을 조사하다 보면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관할이 달랐다. 명백한 고리가 있거나 단서가 있다면 협조요청을 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것 하나 없이 무턱대고 수사에 관여할 수는 없었다. 우현이나 족쳐야겠어. 중국 쪽이든 국내 쪽이든 인공 폐에 대해 뭔가 나오겠지. 사고팔았을 테니까 뭐든 흔적이 남아 있겠지. 허 형사는 중얼거리며 자리로 돌아왔다.인호는 일어나 필립을 맞이했다.-이런 황망한 일이 있습니까? 큰일을 하셔야 할 분인데 이리 가시다니. 일단 절부터 하겠습니다.영권의 영정에 향을 피우고 절을 한 필립은 인호와 맞절을 한 뒤 마주 앉았다. 취재 중이던 기자들이 몰려와 주위를 둘러쌌다.필립이 인호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의원님 빈자리가 큽니다. 상심이 크시겠지만 빨리 털고 일어나셔야지요. 지역민도, 정치권도 모두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제 힘 닿는 데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인호는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현장에서 올더앤베러 직원도 같이 발견되었다면서요?필립은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근처에 있던 기자와 눈인사를 했다.-그러게 말입니다. 그 직원이 왜 의원님과 함께 있었는지, 왜 운전을 했는지 알 수가 없네요. 알아보니 마침 그 전날부터 휴가를 냈었다고 하던데.-아마도 면접 중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님이 운전기사를 바꾸려 하셨거든요. 운전기사는 보고 듣는 것이 많은 자리이니 직접 보고 뽑아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아무튼 그 직원 가족들도 황망하기는 마찬가지겠지요. 그렇지 않아도 그쪽 빈소에도 들릴 예정입니다. 어쨌든 우리 직원이었으니 잘 챙겨 보내야지요. 그게 마땅히 제가 할 일입니다. 누구나 마땅한 일을 하는 거지요. 아이고, 뒤에 줄을 많이 섰네요. 일어나겠습니다. 다음에 조용히 뵙겠습니다.자리에서 일어선 필립과 인호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가벼운 포옹을 했다. 필립은 신을 신은 뒤 장례식장 복도에 늘어선 화환을 둘러보다 빈소로 돌아가지 않고 서 있는 인호를 보았다.-무슨?-형님이 좋은 말씀을 해 주셔서요. 그 말을 곱씹느라.-무슨 말을?-누구나 마땅한 일을 한다는 말씀 말입니다.-아, 그 말. 돌아가신 제 아버님이 즐겨 하시던 말입니다. 맞는 말이지요. 누구나 마땅한 일을 하는 겁니다. /김강 소설가

2022-11-14

바닥에는 검은 진흙이 &lt;Ⅷ&gt;

-그렇구나. 알았다. 기분은 좀 어떠냐? 요즘은 어디에 마음을 쓰고 있느냐?영권이 인호에게 물었다.-아버님께서 말씀하셨던 운이라는 것을 시험해보고 있습니다.-내가? 내가 운을 이야기한 적 있느냐?-예. 저번에 남해에서. 이런저런. 아버님의 좋은 운이 지속되셨으면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고맙구나. 잘 다녀 오거라.인호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나갔다. 많이 섭섭한가 보군. 남해에서의 대화를 아직 기억하고 있다니. 이 년이나 지난 일을. 영권이 혼잣말을 했다. 영권은 마음이 불편했지만 딱히 달리 할 것은 없었다.전화가 왔다. 필립이었다.-웬일이신가? 우리 다음 주에 만날 텐데?-네. 만나야지요. 제가 차를 보내겠습니다. 공개된 곳에서 뵙기가 좀 그래서 조용한 곳으로 마련해두었습니다. 편안히 오시면 됩니다.-알겠네.약속한 날 저녁 필립이 보낸 차가 왔다. 회사에 소속된 차는 아닌 듯했다. 나름 철저하군. 생각보다 믿음이 가는데. 어쩌면 제 아비보다 낫겠어. 영권은 뒷좌석에 기대 필립과 나누어야 할 이야기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차는 서울을 벗어나 강원도 쪽으로 향했다. 운전사가 운전석 창을 열었다. 무겁고 싸늘한 밤공기가 차 안으로 들어왔다.영권이 웃옷의 단추를 채우며 말했다.-춥지 않은가? 나는 좀 추운데.-아, 넵. 차 안 공기가 탁한 것 같아서요. 곧 닫겠습니다. 죄송합니다.물어보지도 않고 문을 열다니 기본이 안 되어 있군.태극기를 들고 앞장서 걷고 있는 가이드 뒤로 시의원들이 삼삼오오 그룹을 지어 따라가고 있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가이드의 음성이 들렸다.-지금 보고 계신 이 강의 이름은 네바 강입니다. 생페테르부르크를 가로지르는 큰 강이죠. 강물의 색을 한 번 보시겠어요? 잘 보시면 강물의 색이 푸르지가 않고 검을 것입니다. 이건 강바닥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도시가 건설되기 전, 이 근처는 모두 늪이었다고 합니다. 도시를 건설하면서 강이 형성되었는데요. 그래서 늪의 검은 흙들이 강의 바닥을 이루고 있습니다. 물이 검은 것이 아니라 바닥이 검어서 강이 검게 보이는 거지요. 거꾸로 생각하면 물이 맑아서 그렇다는 뜻도 됩니다. 깊이가 이십육 미터 정도 됩니다. 생각보다 깊지요?넓고 깊은 강의 표면이 바람에 흔들렸다. 흔들리는 표면은 파도가 되어 강 가장자리의 벽으로 와 부딪쳤다.-빠지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여기는 깊고 물살이 빨라서 사고가 잘 납니다.가이드의 주의가 있었다. 자유 시간 십오 분을 줄 테니 둘러보시라는 말과 함께 가이드의 음성은 사라졌다. 인호는 강의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강물의 색을 보고 싶었다. 가이드의 말처럼 검었다. 검은 강 위로 은색의 물방울들이 튀었다.지금쯤이겠지. 깊고 검은 강을 바라보며 인호는 생각했다. 저 강 아래 깊은 곳에 검은 진흙들이 있을 줄 어찌 알겠어. 누군가 설명해주지 않는다면 절대로 알 수가 없지. 이 강물을 모두 마셔버리거나, 전부 바다로 쓸어낸다면 몰라도. 아니면 강으로 들어가 바닥까지 내려가 보거나. 그렇지. 바닥은 아무도 몰라. 아버지,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이제 강바닥을 한 번 보셔야지요. 바닥에는 검은 진흙들이 있답니다.이번에는 떨리지 않았다. 물건을 들어낼 일이 없으니 지난번보다 쉬운 일이라 생각했다. 직접 해야 할 일도 아니었다.노마는 백미러로 영권을 보았다. 뒷좌석 등받이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저기, 의원님.-뭔가?-안전벨트를 매시겠습니까? 가는 길이 조금 험해서 그럽니다.-험한 길을 험하지 않게 가야 베테랑 운전사인 것 아닌가? 최필립 회장, 그래 이제는 회장이라고 불러도 되겠지. 최필립 회장이 고용한 운전사면 베테랑일 텐데.-베테랑입니다. 이제 곧 베테랑에게도 험한 길에 들어설 것입니다.-알겠네.영권은 뒷좌석 안전벨트를 찾아 매었다. 딸칵 소리가 났다.운전하다 물속으로 들어가면 되는 거야. 그리고 뒤돌아보지 말고 나와 그러면 돼. 필립이 말했었다. 그러면 되는 일이었다.왼편으로 검은 저수지가 보였다. 이윽고 무언가 수면을 흔들며 저수지로 들어갔다. 어둠 속 수면에 비친 달빛이 부서졌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 이곳, 여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어. 부서진 가드레일이 말해주었지만 거들떠보는 이는 없었다.이틀 뒤 보좌관이 영권의 실종신고를 했다. CCTV를 분석한 경찰이 강원도의 한 저수지에서 영권이 타고 있던 차량을 건져냈다. 영권의 차가운 몸에서 오직 한 곳 왼쪽 가슴속 인공 심장만이 굳은 핏덩이를 애써 밀어내고 있었다. /김강 소설가

2022-11-07

바닥에는 검은 진흙이 &lt;Ⅶ&gt;

간혹 출근 시간 필립은 회사 사옥의 소나무 앞에서 소나무를 바라보며 서 있기도 했다. 어깨를 낮추어 뒤로 제치고, 턱을 아래로 당겨 내린,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필립을 보며 직원들은 만식에 대한 그리움이라 여겼지만 필립은 만식을 그리워한 적 없었다. 말하고 싶었다. 이 일은 이렇게 할 것이고 저것은 저렇게 처리할 것입니다. 듣고 싶었다. 나무 아래 만식의 대답을. 해답은 네가 알지. 나는 들어주기만 할 뿐이지. 만식은 생전에 이렇게 말해준 적 한 번도 없었다.필립이 늦은 퇴근을 하는 날이면 소나무는 회사를 나서는 필립의 등 뒤로 선선한 바람을 불어주었다. 겨울이 오면 세찬 바람을 막아 줄 소나무였다.필립은 소나무를 지나치며 혼잣말을 하곤 했다. 이제야 아버지로 오셨군요.-이제 다시 편해지셔야지요. 저도 이제 상황 파악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이리저리 살펴보니 아버님이 작은아버님과 함께 하신 일이 제법 되던데. 이제 제가 집행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필립의 말에 영권이 웃었다. 크게.-우리 조카님이 아버님의 유지를 받든다 하니 이제야 내 마음이 편해지네.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맙네. 고마워. 그래 그 젊은 아가씨 뱃속의 아이는 어떻게 하기로 했나?-제 동생입니다. 아버님이 생전에 말씀하신 것도 있고.변호사에게 맡겨놓았거나 금고에 보관해 둔 유언장은 없었다. 만식이 필립을 만나 안나의 뱃속 아이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 유언이 되었다.필립은 만식의 부탁 중 가능한 것들은 모두 들어 줄 생각이었다. 필립은 아이가 건강하고 똑바르게 자라도록 도와야 했다.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노마와의 약속이기도 했다. 하지만 부탁과 약속은 그것들을 행하는 자의 의지에 기댄 것들이다.아이가 건강하고 똑바르게 자라 무엇을 하게 될지는 나중의 문제다. 그것 또한 필립에게 달려 있었다.-한번 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필립이 회전의자에 등을 기대며 물었다.-봐야지. 어디서 볼까? 나야 조카님이 편한 시간, 편한 장소면 다 좋아. 요즘 의회 일정도 없고.-다음 달 십오 일부터 이십이 일 사이에 편하신 시간을 말씀 주시면 그에 따르겠습니다. 저는 십육 일 정도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선물 준비하는 시간이 좀 필요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렇습니다. 수행원 없이 만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요즘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그래야겠지. 어디 보자. 그러면 내가 일정을 한번 확인하고 다시 말씀을 드리겠네. 뭐 특별한 일은 없을 거야. 어디서 볼까? 공이나 한번 칠까? 아니야. 조카가 공은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더라고. 술은 어때? 술 좋아하나?-작은님 뜻하시는 대로 다 따르겠습니다만, 수행원 없이 만나려면 이번에는 특별한 일정은 안 만드시는 것이.-듣고 보니 그렇군. 알겠네.필립과 영권은 서로 전화를 먼저 끊으라며 실랑이를 했다. 결국 영권이 전화를 먼저 끊었다.영권과 통화를 끝낸 필립은 다시 인호에게 전화를 걸었다.-나야. 날짜를 잡았어. 먼저 말했던 대로 십육 일 만나기로 했어. 내용은 이전과 비슷하니까 모두 같이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너에게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을게. 굳이 듣고 굳이 알아서 좋을 건 없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을게. 넌 어때? 진행해도 되겠어?-네. 이미 마음먹은 일인걸요. 형님도 감당하셨잖아요.-그래, 그러면 러시아 가기 전에 들러서 얼굴이나 한번 뵙고 가도록 해. 어찌되었건 할 건 해야지.영산에서 아드님이 올라왔습니다.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모니터에 메시지가 올라왔다.들어오라 해.인호가 방으로 들어와 영권 앞에 섰다. 영권이 고개를 들어 인호의 얼굴을 보았다.-살이 좀 빠졌나 보다. 얼굴의 턱 선이 보이는 구나-요 며칠 동안 잠을 설쳐서 그렇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인호는 자신의 턱을 손으로 만지며 대답했다.-그래 무슨 일이냐?영권이 인호에게 물었다. 약속이나 전화 없이 영산시를 벗어나 영권의 사무실까지 오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이틀 뒤 러시아에 갑니다. 영산시 시의원들 연수에 동행하기로 했습니다.-벌써 시간이 그리되었나? 십오 일인가?영권은 책상 달력을 보며 말했다.-네. 일주일 일정입니다. 인천공항으로 출국하는 거라서 조금 일찍 올라왔습니다. 이번에는 출발하기 전 아버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새삼스럽구나. 최 회장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십육 일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 혹시 같이 보겠느냐? 수행원 없이 만나기로 했지만, 너는 내 아들이니. 러시아 가는 것 취소하고. 연수 동행이야 한 번쯤 빠져도 되잖아?-아닙니다. 아버님 혼자 만나십시오. 필요 이상으로 깊이 알고 싶지 않습니다./김강 소설가

2022-10-31

바닥에는 검은 진흙이

필립의 잔에 붓고 남은 양주를 자기 잔에 부으며 인호가 말했다.-널 못 믿는 거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 이런 일이 한두 번이었냐. 조그마한 시에 틀어박혀 행사나 치르고 노인들 밥이나 챙겨주고 있으니 다른 일을 맡기기에는 네가 부족하다 생각하는 거지.-기회를 줘야 할 수 있지. 기회조차 주지 않는데 뭘 할 수 있겠어.인호가 필립의 말에 발끈하며 대답을 했다.-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아니잖아. 어쨌든 생각보다 일이 쉬워질 것 같아. 억지로 기회를 만들지 않아도 될 것 같고. 이쪽에서 준비되면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어. 일단 약속을 잡고 만나는 것까지는 내가 할 거야. 이후에는 다른 사람이 해야지. 이번에도 노마가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아. 이번 기회에 정리할 것도 정리하고. 아직 날짜를 잡지는 않았어. 아무래도 인호, 네가 우리나라에 없을 때가 좋을 것 같은데. 너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말해줘, 지금. 장소는 좀 더 생각해볼게. 이번에는 물건을 꺼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괜히 이상한 방향으로 주목을 받을 것 같아서. 이리저리 번거롭기도 하고.인호는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보았다.-다음 달 십오 일부터 일주일간 러시아 출장이 있어. 영산시 시의원들 데리고 한 바퀴 도는 출장.인호가 스케줄 표를 보며 말했다.-그러면 그렇게 날짜를 잡는다. 십육 일 정도에 만나자고 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정해지면 다시 연락 줄게-그런데 노마는? 괜찮겠어?인호는 문득 노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달아오른 노을을 보며 노마가 말했었다. 언젠가 우리 인간이 화성에 가는 날이 오겠죠? 화성은 노을이 파란색이라던데. 화성에서 제일 높은 산 이름이 뭔 줄 아세요? 올림퍼스래요, 올림퍼스. 그러면 화성에도 신들이 살고 있는 걸까요? 지긋지긋한 지구를 떠나 화성으로 가도 소용없는 건가요?-노마는 왜?-갑자기 노마가 했던 화성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생각 많이 하지 마. 이번 기회에 보내주면 돼. 화성에 먼저 가 기다리고 있어라, 하지 뭐. 궁금증도 풀고. 좋겠네.-꼭 그래야 하나? 노마까지?인호는 맥주잔을 비웠다.-그래야지. 녀석이 그러더라고. 따지고 보면 호해도 나쁜 놈이라고. 아니 따질 필요도 없다고.-호해?-응, 호해. 그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더군. 기분도 살짝 상하고. 굳이 핑계를 대자면 그런 이유야.나는 호해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늙고 병들어 죽음에 든 진시황을 보며 웃었겠지. 겉으로는 아니더라도 말이야. 진시황 이야기 알지? 들어 본 적은 있겠지. 신하들이 불로초를 찾아 진시황에게 바쳤다면, 불로초를 먹은 진시황이 불사의 몸이 되었다면 호해의 마음은 어땠을까? 언젠가 필립이 노마에게 말했다. 그럼요. 저도 읽을 만한 것, 들을 만한 이야기는 다 듣고 자랐습니다. 노마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아니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호해도 나쁜 놈이잖아요. 그렇지 않아요?-알았어. 형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형이 하겠다는데 반대할 생각은 없어. 그저 물어본 거야. 궁금해서. 그러면 노마한테 약속한 것도?-그게 애초에 가능한 일이었겠어?-그렇지? 그래. 그런데 형.-말 해.인호가 필립에게 물었다.-직접 만나서 약속 잡을 거야?-아니, 만날 필요까지는 없지. 전화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왜?인호는 필립의 아랫배를 가리키며 말했다.-형은 마음에 없는 말을 하거나 불안할 때 아랫배를 쓰다듬는 습관이 있어. 기억해. 조심하라고.필립이 영권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가지 않아 영권이 전화를 받았다.-작은아버님. 잘 지내셨습니까. 저 필립입니다.-아이고. 잘 지낼 이유가 있나. 형님이 안 계시니 마음도 몸도 편하지가 않네. 조카님은 어떤가? 아버지 빈자리가 생각보다 크지?큰 몸통에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가 컸다. 원래 크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유난히 힘을 주어 크게 말하는 것 같았다. 필립은 귀에서 전화기를 떼어 스피커폰 모드로 바꿨다.-아. 네. 그렇지 않아도 하루 네 번 꼬박꼬박 뵙고 있습니다.집을 나설 때 귀가할 때, 그리고 회사에 출근할 때 퇴근할 때. 필립은 그렇게 하루 네 번 만식을 보았다. 만식이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자주 마주했다. 두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당당한 걸음걸이를 보여주려 애썼다./김강 소설가

2022-10-24

바닥에는 검은 진흙이 &lt;Ⅴ&gt;

꼭 새로워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 아들이 아버지 대신 잘 해왔으니까 하는 말이지. 세상에 저런 효자가 어디 있나?인호를 잘 아는 사람이 인호를 감쌌다.국회의원 선거잖아. 효자 뽑기 대회가 아니고. 국회의원으로서 잘하는 것과 아들로서 잘하는 것은 다르지. 효자를 뽑는 선거라면 김인호를 당연히 뽑아주지. 하지만 이건 국회의원 선거야. 누가 뭐래도 국회의원은 중앙에서 정치력이 있어야지. 김 의원이 지역구에 잘 내려오지는 않지만 중앙에서 잘하잖아. 그만한 거물이 되는 게 어디 쉬워?입바른 사람의 바른 말은 인호의 귀에도, 영권의 귀에도 들어갔다. 영권이 인호를 불렀다.오랜만에 남해에 가서 공이나 한 번 치자.라운딩을 마치고 둘은 해안가를 찾았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았다.네가 이번 국회의원 선거를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이냐?인호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며 영권이 물었다.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 선거에는 제가 출마해야 합니다. 이제는 영산시를 제게 내려주십시오.인호는 ‘양보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려다 말을 바꾸었다. 무례한 표현이라 생각했다.지금 네가 네 입으로 내려달라 말했듯이 다른 사람도 그렇게 본다. 누가 보아도 지역구 세습으로 보이지 않겠느냐.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세습에 대해 반감이 많다. 너의 좋은 의지가 좋게 해석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게 무슨 말이냐. 선거에서는 지면 안 된다. 떨어지기 위해서 하는 선거는 없다. 선거와 정치는 오기로 하는 것이 아니다.대답을 준비하고 있었던 듯 영권이 말했다. 그러고는 테이블을 손톱으로 두드리며 인호의 얼굴을 보았다. 인호는 다른 지역구에라도 출마할 수 있게 해 달라 말했지만, 영권은 허락하지 않았다.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국회의원이 된 예도 없을뿐더러, 감당할 수 있는 돈도 없고, 그리고 인호가 다른 지역구에 출마하는 것은 그 지역구를 기반으로 한 다른 국회의원에게 도리가 아니라 말했다. 인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있던 의자를 뒤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인호가 말했다.이번에 나가지 않으면 앞으로도 기회가 없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김영권이나 김인호나 똑같다 그럽니다. 여기에 갇히면 저의 정치는 시작도 못해 보고 끝나는 겁니다.영권은 인호에게 일어서라 말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인호를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너의 정치라. 인호야. 너는 정치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인호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정치란 사람들이 갈등 없이 만족하며 살 수 있는 제도와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짧으면서도 단호했다. 인호는 스스로 만족했다. 그러나 영권의 대답은 달랐다.틀렸다. 너는 아직 정치를 모르는구나.그러면 무엇입니까?인호가 물었다.내가 답해주마. 정치는 권력을 가지기 위해 행하는 모든 것들이다.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냐의 구별은 의미 없다. 너는 권력에 대한 의지가 있느냐? 권력을 잡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다면 너는 정치를 할 자격이 없다. 사람들? 스스로 목자 잃은 양이라 칭하는 것들은 권력의지를 확인하는 순간 순한 양이 되어 울타리로 들어온다. 그들은 정치의 결과물이지 목표가 아니다.영권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인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인호야. 너의 인생에 너의 정치라는 것은 애초에 없었다. 정치인 김영권의 아들로 태어난 순간부터 김영권의 아들 김인호만 있을 뿐이지. 정치인 김영권을 위해 네가 있는 것이다. 정치를 하라고 너에게 지역구 관리를 맡긴 게 아니다. 이십년 전 너를 지역구로 내려 보내면서 정치를 배우라 말하지 않았다. 너는 정치인 김영권이 거목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름이 되어야 하는 거다. 그게 너의 이번 생이다. 너의 정치? 너의 정치라는 것이 가능하려면 나와의 인연이 끝나고 나서야 가능하겠지. 내가 내 입으로 이 말을 하게 하다니. 내 아들이지만 너도 참 딱하다.영권은 말을 끝내고 인호를 일으켜 세웠다. 일어선 인호는 고개를 돌려 바다를 보았다. 썰물이었다. 해가 지는 방향으로 바닷물이 빠져나갔다. 물이 빠져나간 자리에 검고 거칠은 암초들이 덩어리지어 나타났다.썰물이네요. 저 아래에 검은 바위들이 저렇게 많이 놓여 있는 줄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알고 계셨습니까?이 년 전 그날. 남해였다.-이번에는 그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어.인호와 필립이 만났다. 만식의 장례를 치른 지 열흘 정도 지났을 때였다.-연락이 왔다고? 먼저?인호가 물었다. 필립이 고개를 끄덕였다.-만나자고 하더라.-나보고 친해지라 해놓고 자기가 먼저 전화하는 건 뭔데?/김강 소설가

2022-10-17

바닥에는 검은 진흙이 &lt;Ⅳ&gt;

그게 다 살기가 팍팍해져서 그래. 요즘은 남자고 여자고 다 일을 해야 되니까. 이런 것 듣고 다닐 여유가 없어진 거지. 우리 아들 내외만 해도 그래. 둘이 열심히 일하는데도 점점 나아지는 것 같지가 않아. 얼마나 딱해 보이는지. 그렇다고 내가 뭘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재산이라고 해봐야 아파트 하나, 고향에 조그만 언덕 하나 있는 것을. 그렇다고 덜컥 걔들한테 줘버릴 수도 없잖아. 나도 죽을 때까지 쥐고 있을 것이 필요하니까.아니 지금, 아파트 하나, 산도 하나 있다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은근히.니들은 왜 말만 섞으면 꼭 그렇게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나가는 거야?어쨌든 젊은 사람들이 불쌍해. 나는 사실 요즘 버스 타는 것도 미안해. 젊은 사람들한테. 우리가 하는 게 뭐 있나? 맨날 먹고 놀면서 시간 보내는 거잖아. 다들 뒤늦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내가 냅네.’ 하고 있잖아. 돈 한 푼 안 내면서 버스도 타고, 강의도 듣고, 놀러 다니고, 매달 통장에 돈도 들어오고. 그거 다 젊은 사람들이 벌어서 낸 세금이잖아. 염치없이 받아먹기만 하는 것 같아서 영 맘이 편치 않아. 이러자고 늙은 것은 아닌데 말이야.우리가 왜 하는 게 없어. 이렇게 모였다가 수업 끝나면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하면서 돈 쓰잖아. 몰려다니면서 여행도 하고. 옷도 사 입고. 식당, 커피숍, 여행사, 옷가게까지 다 젊은 사람들이 하는 건데? 우리가 공짜만 쫓아다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 마. 기분 나빠. 우리도 젊었을 때 열심히 일했거든. 세금도 많이 냈고.그 식당이랑 커피숍에서 월세 받아먹잖아. 자네가. 자네가 건물주잖아.또 왜 이래. 그러면 월세를 받지 말라는 말이야? 그리고 월세 보다 더 한 것이 그, 그 뭐냐, 프랜차이즈 본사에서 받아가는 돈이라던데.내 말이 그 말이야. 그 프렌차이즈 회장도 대부분 우리 같은 노인이잖아. 이리저리 젊은 사람들만 불쌍한 거지. 그러니 생각 좀 하자고. 누가 일하고 누가 세금 내서 우리가 사는지. 이 답답한 양반아.그럼 어떡하라고. 때 되고 나이 들면 알아서 죽으라고? 목을 매달기라도 하란 말이야?자리에 앉아 있던 노인들이 나누는 대화였다. 젊은 사람 찾는다는 인호의 말이 시작이었다. 매해, 매번 비슷한 대화들이 반복되었다.어르신! 어르신들! 이러지 마시고요. 오늘은 제가 쏘겠습니다. 팥빙수라도 드시러 가시지요.중간에 말을 끊거나 중재를 해 분위기를 바꾸는 것은 인호의 몫이었다.20년 전 영권이 인호에게 자기 대신 지역구를 관리해 볼 것을 권했다. 인호는 실습이라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지역구를 물려받을 것이고 머지않아 국회의원이 되리라, 그렇게 여겼다. 어느 분야든 십 년 정도면 관록이 생기고 전체적인 흐름을 볼 수 있는 시야가 생긴다. 그렇게 십 년이 지났다. 영권의 나이가 육십 대 후반, 곧 칠십 대에 접어들 때였다. 이제 쉬셔도 될 만하다 생각했다.너는 네 스스로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느냐?인호가 30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뜻을 밝히자 영권이 물었다.아버님이 보시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겠지만, 그동안 지역구의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듣고 나누었습니다. 제가 영산시를 위해, 또 우리나라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 같습니다. 이제는 저의 정치를 해보고 싶습니다.인호은 영권의 질문이 형식적인 것이라 믿었다. 자신이 그동안 지역구를 관리하며 쌓아온 것을 영권이 모를 리 없었다.넌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지역구에서 노인들과 웃으며 노닥거린다고 그게 정치라 생각하느냐. 복지를 위해 몇 가지 정책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실행시킨 것이 정치라 생각하느냐. 그건 공무원도 할 수 있고, 네가 아닌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거라.인호가 아닌 영권이 30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를 했고, 영산시 국회의원으로 당선이 되었다. 영권이 인호에게 너는 정치를 모른다, 말했지만 영산시에서 얻은 영권의 표는 인호가 만들어내고 지킨 표였다.내가 어디 자네 아버지가 좋아서 찍은 줄 아는가? 얼굴 못 본 지 오래된 양반인데. 자네가 워낙 잘하니까 찍었지. 자네 정말 효자야. 효자.선거가 끝난 후 만난 유권자들이 인호에게 한 말이었다. 아이고, 아닙니다. 인호는 웃으며 대답했지만 아쉬움은 더욱 컸다. 자네가 워낙 잘하니까, 라는 말만 인호의 귀에서 맴돌았다. 인호에게 자신감과 확신을 주는 말이었다. 인호의 자신감과 확신이 커져갈수록 영권에 대한 섭섭함도 같이 커졌다.다음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왔다. 사람들이 영권과 인호에 대해 말했다.김 의원도 좀 그래. 그 정도 했으면 충분하지 않나? 이제 아들에게 내려주어도 되지 않아?무슨 말이 그래? 국회의원 자리가 세습하는 자리인가? 자기가 물려주고 싶다 하면 우리가 뽑아줘야 하는 거야? 그리고 김영권이나 김인호나. 그게 그거 아니야? 새로울 것도 없겠구만.영산시에서 인호는 이미 신선한 존재가 아니었다. 영권만큼 익숙한 사람이었다. 영산시에서 인호는 인호가 아니기도 했다. 인호가 나타나면 의례히 영권의 대리인이라 생각했다.

2022-10-10

바닥에는 검은 진흙이 &lt;Ⅲ&gt;

영산시는 노인 복지에 있어서는 항상 다른 지역보다 한발 앞서 있었다. 노인들의 의료보험 본인 부담금을 지자체가 모두 부담하는 정책, 노인 전용 무료 급식 식당의 개설, 노인용품 바우처 제도 등의 정책이 전국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이었다. 영산시에서 먼저 정책을 시행하면 주위의 다른 시에 사는 노인들이 볼멘소리를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의 다른 시에서도 영산시에서 하고 있는 정책을 흉내 냈다.영산시에서 인호는 영권의 대리인이었다. 인호는 영권을 대신해서 영산시장을 만나고 정책을 건의하고 관철시켰다. 영산시에서만 다섯 번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 영권의 아들, 인호의 건의는 영산시장에게는 명령과 같았다. 시장이 인호의 건의를 거부할 명분도, 필요도 없었다. 예산이 부족합니다. 시장이 이야기하면 인호는 영권을 통해 해결해 주었다. 다른 시의 시장이나 국회의원이 영권을 찾아와 왜 영산시만 그렇게 혼자 튀려고 하느냐. 혼자 가지 말고 협의해서 같이 가야 하는 것 아니냐, 불평을 하는 날이면 영권은 인호에게 전화를 걸어 수고했다, 칭찬을 했다.영산시에서는 노인과 관련된 행사가 끊이지 않았다. 가로등과 현수막 거치대에는 거의 매일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있었고, 주말이면 문화회관이나 운동장의 주차장에서는 빈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실버 건강 걷기 대회부터 실버 마라톤, 실버 문학 대전, 실버 음악 대전, 실버 미술 대전, 실버 사진 대전, 실버 연극제, 실버 예술 주간, 실버 체전까지. 그리고 이 모든 행사들을 총 정리하는 실버 대제전까지.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도시 이름이 실버라 생각했을 것이다.영산시는 노년의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 곳이었다. 노인들은 생업에서 자유로워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찾아다녔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산책을, 아침 식사를 한 뒤 텃밭에 물을 주고 탁구장이나 배드민턴 코트에 들러 운동을 하는 것. 노인 급식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집에서 쉬거나 작업을, 저녁은 동호회 활동을 하는 것이 그들의 하루 일과였다. 주말에는 동호회에서 만난 지인들의 다른 행사를 찾아 응원을 하고, 행사가 없는 날은 찻집에 모여 담소를 나누거나 문학기행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야 살맛나는 세상이라 생각했다. 건강한 노인들의 이야기였다.건강하지 못한 노인들의 삶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정기적인 병원 방문과 약물의 복용을 도와주는 도우미들이 있었다. 그들은 병원이나 약물 복용뿐만 아니라 병을 앓고 있는 노인과 독거노인들의 식사나 잠자리 등을 살펴 주었다. 남아 있는 약의 개수를 살펴 규칙적으로 약을 복용했는지 살폈고, 냉장고의 내용물과 부식의 잔량으로 노인의 식사를 확인했다. 정기적인 산책과 일조 시간의 확보 등도 도우미들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일시적인 질환, 예를 들면 장염이라든가, 가벼운 감기라 하더라도 신청만 하면 단기로 도우미들이 배정되어 서비스를 제공했다. 영산시에서 모든 경비를 감당했다.더욱 힘든 노인들, 거동이 힘든 노인들은 시에서 운영하는 요양병원 혹은 만성 질환자 관리 병원에 입원을 시켜서 치료했다. 질병의 치료만 담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노년을 관리했다. 병원 내에서도 병원 밖과 마찬가지의 활동들, 기본적인 인간관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했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죽음의 순간을 함께 했다.건강한 노인이든 건강하지 않은 노인이든, 노인들의 활동은 지역 경제에도 도움이 되었다. 병원의 운영과 도우미들, 각종 행사를 위한 기반 시설의 운영 등 공공기관을 통한 고용의 증대와 각종 행사의 개최, 각종 단체에 대한 지원금, 질환의 치료, 약물 및 입원비용의 지급 등 공공기관의 지출 증가는 결국 지역민의 소득으로 이어졌다. 사적으로는 노인들이 각종 동호회에서 배우는 각 분야에 필요한 용품들, 행사를 치르기 위한 장소들, 식사 및 뒤풀이 등. 하다못해 축하 꽃다발까지. 노인들이 움직이는 모든 지점에서 소비가 있었다. 이 모든 소비에 내가 있지. 인호는 그렇게 생각했다.중앙 정가에서 활동하는 영권과는 달리 인호는 지역사회에 밀착하려 했다. 몇몇 동호회에 가입하여 활동을 한 것 뿐 아니라 시에서 주최한 각종 강좌에 개인 자격으로 신청을 해 수강을 했다. 다른 수강생과 똑같이 연단에 나가 자기소개를 하고 수업을 듣고 질문을 하고 뒤풀이에 참석했다.그중 인문학 교실은 그가 처음부터 기획을 하고 사람을 모아 십칠 년째 유지해오고 있는 모임이었다. 주제 선정부터 강사 섭외까지 인호가 직접 했다. 졸업생이 사백여 명이 되었으니 작은 모임은 아니었다. 인호는 노인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함께 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생각했다. 틈 날 때마다 젊은 사람 어디 없냐며 모임에 참석한 노인들에게 진담 반 농담 반 섞어 이야기했다.그러게. 이, 삼십 년 전만 해도 이런 모임에 와서 자리를 둘러보면 군데군데 젊은 사람이나 가정주부들이 보였었는데 말이야. 나만 해도 그렇지. 그때는 가정주부였으니까. 아무리 바빠도 수요일 저녁은 나의 시간 이렇게 정해놓았었지. 남편한테 애들 맡기고 강의 들으러 쫓아다녔었는데. 요즘에는 이런 자리에서 애 엄마들 보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니까./김강 소설가

2022-10-03

바닥에는 검은 진흙이 &lt;Ⅱ&gt;

그날 저녁 잠자리에서 필립의 아내가 물었다.-당신. 하나 물어봐도 돼요?-뭘?-안나 씨 뱃속의 아이. 아버님 아이 맞아요?-당신, 정말.-아니. 안나 씨도 아버님 아이가 맞다 말하긴 했는데. 아버님 나이가 워낙 많으셨으니까. 믿기지가 않아서. 혹시 다른 사연이 있나 하고. 당신하고는 관계없는 거죠?-또 쓸데없는 상상. 제발 그러지 마.-당신이 너무 챙기는 것 같아서.-당신, 나 몰라?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복잡한데, 당신이라도 좀 도와주면 안 돼? 어휴.필립은 베개를 고쳐 돌아누웠다. 필립의 아내도 한숨을 쉬며 반대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날 밤 필립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내 때문은 아니었다. 영권의 일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했다.노마는 필립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안나의 문자를 보며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문자를 받은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틈이 날 때마다 핸드폰을 열어 문자를 확인했다. 오빠로서 할 일을 했다는 뿌듯함, 필립에 대한 감사 등의 감정이 섞여 노마를 웃음 짓게 했다. 안나는 필립의 집에서 아이를 낳을 것이다. 필립은 아이를 자신의 동생으로 인정한다 말했었다. 그리고 안나의 인생은 이제 필립의 선택이 아니라 안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말을 덧붙였었다. 필립이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내 생각을 이야기할게. 안나 씨는 아직 젊어. 그래서 안나 씨를 어떻게 하겠다. 안나 씨는 어떻게 해야 한다. 이런 결정을 미리 내리고 싶지 않아. 안나 씨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 물론 아이는 낳아야겠지. 소중한 생명이니까. 내 동생이기도 하고. 아이는, 아이의 삶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을 거야. 우리 집안의 남자로 인정해 줄 거니까. 내가 우리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이었어. 그런데, 내가 아들이 없어. 무슨 말인 줄 알겠지? 노마는 그 아이의 외삼촌이고. 그렇지?만식이 퇴원하기 나흘 전 필립이 오른손으로 아랫배를 문지르며 했던 이야기였다.성공적인 삶에는 몇 번의 운이 필요하지. 의지와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절대 아니야. 운이라는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돈이나 의도하지 않게 발생한 기회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 다행히 벌어지지 않은 일들, 분노나 좌절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하려 했지만 하지 못한 것들, 마침 그 자리에 그가 없었다거나 누군가 끝까지 말렸다거나, 네가 앉으려는 자리에 주인이 없는 것도 너의 운이야. 이미 그 자리에 누군가 서 있다면, 그것도 네가 맞서 싸울 누군가가 아니라면 너는 그 자리에 갈 수 없는 거지. 결코. 네가 너의 정치를, 그것도 훌륭하게 해내려면 그런 운도 필요해. 하지만 그런 면에서 너는 운이 없어. 일단 내가 비켜주지 않을 거니까. 내가 너의 아비이고 너보다 먼저 정치를 시작했으니까.이 년 전 남해였다. 영권이 인호에게 했던 말이었다. 말을 했던 영권도, 말을 들었던 인호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다음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영권은 인호의 손을 잡았다.괜찮으냐?인호은 영권의 손을 슬며시 떼어냈다.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서울로 올라온 인호는 필립을 만났다. 인호가 필립에게 먼저 전화를 했다.많이 섭섭하셨겠네.인호로부터 남해에서의 일을 전해들은 필립이 말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인호가 대답했다.좌절감이 더 가깝다고 해야 할까요? 섭섭한 것과는 좀 다른 것 같아요.한잔 마시고 다 잊으시라, 그렇게 이야기하지는 않을게요. 하지만 일단 오늘은 한 잔 마셔요.필립이 인호의 잔에 술을 채웠다.형님이라고 해도 되죠? 형님은 제게 말 놓으세요. 제가 한참 어린 동생입니다.필립이 채워주는 술을 받으며 인호가 말했다.그전까지 인호와 필립은 아버지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었을 뿐이었다. 인호는 영권과 함께, 필립은 만식과 함께 그렇게 네 명이 라운딩을 가진 적이 몇 번 있기는 했지만 인호와 필립이 따로 자리한 적은 없었다.힘들지요? 뒷바라지만 하는 것. 언젠가 필립이 인호에게 말했다. 저만치 영권과 만식이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큰 양산을 받쳐 들고 그들 옆에 서 있는 캐디와 웨지 클럽을 들고 그들을 쫓아가는 캐디를 쳐다보며 필립이 인호의 어깨를 툭 쳤다.힘들거나 마음이 편치 않을 때 전화해요. 동병상련 아닌가. 저분들 흉이라도 보게.필립이 먼저 명함을 건넸다.모든 곳에 인호가 있었다.인호는 이십여 년 전부터 아버지를 대신해 아버지의 지역구인 영산시를 관리해 왔다. 많은 행사들에 빠짐없이 방문하여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께서 바쁘신 관계로, 하고 말을 시작하면 노인들은 바쁘시지. 큰일 하시는 분이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김강 소설가

2022-09-26

바닥에는 검은 진흙이 &lt;Ⅰ&gt;

오빠. 나. 이 집 비우려고. 넓은 집에 혼자 지내려 하니 겁도 나고, 이 집에 남아 있을 명분도 없고. 오빠. 나 어떻게 해? 부른 배를 받쳐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는 거야?안나가 노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노마의 답을 기다리며 안나는 자신이 보낸 문자를 다시 읽었다. 엄마는 슬리퍼로 등짝을 후려칠 것이고, 아빠는 돌아 앉아 담배만 피워댈 것이 분명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소파로 몸을 옮겨 등을 기댔다.조금만 더 기다려봐. 필립 형님이 방법을 만들어 본다고 했어. 약속을 했으니 뭔가 말이 있겠지.노마에게서 답이 왔다.몰라. 이번 주까지 기다려보고 별말 없으면 나갈 거야.안나는 노마에게 답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덮었다. 필립 형님? 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다음날 필립의 아내가 왔다.-우리 집 양반이 애 낳을 때까지 우리 집에 들어와 있으라 그러시네요. 그 몸으로 친정으로 돌아가는 것도 좀 그렇고, 이 넓은 집에 혼자 있는 것도 그렇고. 나더러 임산부 케어를 하랍니다.필립의 아내가 안나를 보며 말했다. 장례식장에서도 안나를 챙겨주던 그녀였다.-그래도 될지?안나가 물었다.-몸이 좀 힘들겠어. 친정에 돌아가 봐도 별수 없을 것이고. 싫은 소리만 듣겠지. 간단하게 중요한 짐만 싸요. 오늘 같이 집으로 들어가게. 짐은 내일 사람들 보내서 옮기면 되니까. 내가, 마음이 왔다 갔다 해. 그러니까 빨리 가야 해요.친정이라는 그녀의 말에 안나는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필립의 아내는 안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를 어째, 이를 어째. 안나는 눈물을 흘렸고 필립의 아내는 한숨을 내뱉었다.-아들이래요.어깨를 들썩이던 안나가 울음 끝에 말했다.필립이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회화나무를 마주하고 아내가 서 있었다.-여기서 뭐해?필립이 아내의 옆에 나란히 서며 물었다.-사내아이래요.-무슨 말이야?-안나 씨 뱃속의 아기. 이번에 산부인과 가니 말을 해주더래요. 아버님은 벌써 알고 계셨다 그러네요. 아버님이 다른 사람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 부탁을 하셨다 하네요. 안나 씨한테조차. 그래도 혹시나 잊어버리셨을까 싶어 지금 아버님께 알려드리는 중이에요. 당신이 있는데도 사내아이를 기다리셨잖아요. 대놓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내가 손자를 낳지 못한 것을 많이 섭섭해 하셨어요. 살아계셨으면 무척 좋아하셨겠지요. 그래서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당신 말대로 안나 씨 데리고 왔어요. 일단 애 낳을 때까지 만이라도 같이 있자고 했어요.필립의 아내가 나지막이 말했다. 목소리가 무거웠다.-그래요. 알겠어. 잘했네. 고마워.-지금 안나 씨, 자고 있으니까 조용히 들어가세요. 어째 우리 딸이 저렇게 된 것처럼 마음이 그래요.바람이 불어왔다. 반쯤 접힌 회화나무 잎들이 박수치 듯 흔들거렸다. 현관으로 향하던 필립의 아내가 발걸음을 멈췄다. 필립을 돌아보며 말했다.-가끔 당신 없이 혼자 있는 밤이면 회화나무 아래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아요.-무서워?필립이 물었다.-아니요. 그냥 소리가 나는 것 같을 뿐이에요. 오히려 같이 계신 것 같아서 마음이 편안할 때도 있어요. 누군지 아니까.필립의 아내가 대답했다. 덧붙여 말했다.-아버님이 살아계실 때보다 더 가까이 계신 것 같지 않아요?안나와 필립이 저녁 식탁에 마주 앉았다. 필립의 아내는 안나의 옆에 앉았다. 입에 맞지 않더라도 많이 먹어야 한다며 필립의 아내는 안나의 숟가락에 반찬을 올렸고, 안나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숟가락을 들었다. 필립이 자기 앞에 있던 오이소박이 접시를 안나 앞으로 밀었다.-이것도 좀 먹어 보세요. 우리 집사람이 이거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합니다. 시원하니 맛있어요.안나가 고개를 들어 필립을 보았다. 필립의 아내도 필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감사합니다. 저도, 아기도, 오빠도. 오빠에게 이야기 들었습니다. 로봇 관리사 그만두고 올더앤베러 로봇연구실로 들어가기로 했다고.무슨 말이야? 필립의 아내가 눈짓으로 물었다.-실력이 좋다 하더라고. 실력이 좋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있나. 어차피 우리 회사도 주력사업으로 검토하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고. 그쪽으로 경험도 많으니 회사에 제법 도움이 될 거야. 어찌 되었건 이것도 인연 아닌가, 인연.-회장님도 챙겨주시지 않았던 건데. 저희 부모님도 많이 고마워하세요. 감사합니다.안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부정한 자세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필립의 아내는 안나의 허리와 어깨를 붙잡고 다시 앉혔고, 필립은 안나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 안나가 자리에 앉자 필립이 말했다.-우리 이건 확실히 하도록 하지. 안나 씨나, 뱃속의 아기, 그리고 오빠 노마 씨까지는 나의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들은 해 줄 생각이야. 하지만 안나 씨 부모님은 달라. 나는 안나 씨 부모님까지 인연을 넓힐 생각이 없어. 알겠지. 기억해줬으면 좋겠어./김강 소설가

2022-09-19

그 길밖엔 없어 &lt;Ⅹ&gt;

허 형사는 아내가 죽던 날이 생각난 듯 왼손으로 턱을 괴었다.-그렇지요. 대부분 그렇다 하더라고요. 이게 현금을 바로 주니까 그런 일이 생기는 거죠. 상처 입은 사람들 손에 현금을 쥐여 주니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 좀 그렇지요. 그게 어떤 돈입니까? 자기 가족들이 달고 있던 장기를 판 돈 아닙니까? 살아 있는 사람 마음을 긁기에는 충분하지요. 얼마 되지는 않지만.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 더 그렇게 만들지요. 하룻밤에 써 버리기에 딱 적당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현금으로 안 줍니다. 계좌로 쏘지요. 이게 그런 것이. 통장에 들어온 돈을 다시 뽑아 쓰는 게 의외로 힘들거든요. 하하.웃을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우현은 어쩔 수 없었다.-웃어서 죄송합니다.우현이 말을 덧붙였다.-아니야. 이젠 괜찮아. 시간이 좀 지나니 마음이 편해지더라고. 웃어도 돼. 그건 그렇고. 뭐 들은 것 없어?허 형사가 물었다.-네? 올더앤베러 회장 사건 말입니까?-내가 우현 씨 만나서 물어볼 것이 다른 게 뭐 있겠어? 뭐라도 들은 게 있거나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말 좀 해줘.허 형사가 우현의 입을 바라보았다.-하아. 도움이 될 만한 것이라. 일단 저에게 들어온 물건은 없습니다. 보통 물건이 들어오면 이식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바로 수술을 받거든요. 사건 후로 인공 장기 이식 수술을 받은 사람들을 살펴보는 것도 한 방법이지 싶습니다. 방금 말씀드렸지만 사건 이후에 제가 연결했던 수술들은 그 사건하고는 관계없는 것입니다. 괜히 엮지 마십시오. 또 보자. 뭐가 도움이 될까요. 수사 내용을 조금 알아야 제가 말씀드릴 것이 더 있지 싶은데요. 제게 말씀해주실 것은 없습니까?허 형사가 담배 한 개비를 새로 입에 물었고, 우현이 불을 붙였다.-음. 별로 진척된 것이 없으니까 우현 씨에게 도움을 청하는 거지.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시체가 발견된 차량이나 그 주위가 범행 장소는 아닌 것 같아. 시간이 안 맞아. 인공 폐가 신제품이라 그 폐에서 보내오는 신호가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아도 대강의 거리를 알 수 있다 하더라고. 추정해보니 남해안 쪽 어딘가에서 범행을 했던 것 같아.우현이 붙여준 담배의 끝이 발갛게 타들어 가는 것을 보며 허 형사가 말했다.-그래요? 보통 GPS나 그런 것은 없는데.-그렇지. 그런데 이번에 그 폐는 신제품이라 작동이 잘 되는지 어떤지 모니터링을 하려고 달아 놓았다 하더라고. 기계가 작동을 멈추면 신호가 오지 않고, 기계가 켜지면 신호가 오고. 그렇지 않아도 저번 주에 제조회사에서 연락이 왔어. 다시 기계가 켜졌다고.허 형사가 담배 끝을 후 하고 불었고 우현은 물을 마셨다. 그리고 말했다.-그러면 끝난 것 아니에요? 신호를 따라가서 찾으면 되겠네요.-그게 아니야. 신호를 분석하면 대강의 거리는 나오는데 정확한 위치를 말해주지는 않거든. 거리로 보면 중국이나 일본이라네. 그런데 어디를 돌아다니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거지. 신호 추적기 같은 것을 가지고 일본이나 중국으로 건너가 돌아다니면서 찾으면 몰라도. 말이 쉽지. 그걸 어떻게 하나. 어딘지 알아서? 설령 가까이 가더라도 누군지 알기 힘들다네. 대강의 위치만 아는 거지.허 형사가 코끝을 찡그리며 대답했다.-어쨌든 물 건너간 거네요.-그렇지.-으음. 제가 요즘은 국내 일만 하다 보니 그쪽으로 주로 누가 하는지 잘 몰라요. 다만 하나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일본이나 중국 쪽은 아닐 수도 있다는 거. 일본은 중고 물건을 잘 안 쓰는 나라고, 중국은 이 년 전부터 경계가 워낙 삼엄해서 물건들이 들어가기 어렵거든요. 공안들이 뜯어가는 것이 많기도 하고. 제가 중국 쪽 비즈니스를 접은 이유도 그겁니다. 오히려 그 정도 거리라면 러시아나, 몽골 뭐 이런 곳도 염두에 두실 필요가 있을 겁니다. 말하고 보니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이야기네요.우현은 말을 하면서 허 형사를 살폈다. 우현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기도 했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아니야. 좋은 충고야. 일본, 중국이 어떤지는 나보다 우현 씨가 더 잘 알잖아. 고마워. 그런데 지난번 내게 보낸 문자 말이야. 무슨 뜻이야?우현의 말이 끝나자말자 허 형사가 물었다.-아. 네. 다른 뜻은 아닙니다. 제가 뭐라고 보냈는지 기억도 잘 안 나네요. 허 형사님이 제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나 싶어서 좀 강하게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허 형사는 아이스 커피의 얼음을 어금니로 부숴 먹었다. 뿌드득.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아닙니다. 문자로 보내다 보니까 좀 딱딱해졌었나 봅니다. 오해하기 딱 좋지요. 이래서 마주 앉아 애기를 나눠야 한다니까요. 그래서 제가 연락드린 것 아닙니까? 하하. 우현이 너스레를 떨었지만 허 형사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허 형사가 입을 열었다.-그래서? 우리 집사람이 가지고 있던 콩팥이 어디서 온 건데?-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언제 어디서 수술했는지도 기억이 안 납니다. 그냥 기억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 것뿐입니다. 이미 지난 일을 뭘 알려고 그러십니까?우현은 자신을 바라보는 허 형사의 눈을 피해 천장의 선풍기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이어서 덧붙여 말했다.-안 바쁘십니까? 저도 형사님과 오래 앉아 있으면 안 좋습니다. 그만 일어나시지요. 커피값은 제가 내겠습니다.허 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현은 계산대로 가서 계산을 했고, 허 형사는 커피숍의 문밖에서 우현을 기다렸다. 우현이 문을 열고 나오자 허 형사가 말했다.-잘 마셨어. 참고할 만한 이야기도 고맙고.-별말씀을. 그러면 저 먼저 가겠습니다.우현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돌아서서 가려는 우현을 허 형사가 불러 세웠다. 그리고 물었다.-참. 우현 씨. 전에 그렇게 말했었잖아. 이식 수술할 때 의사 옆에서 보조를 직접 선다고. 말이 보조지, 자기가 거의 다 한다고 했지 않나?-아, 예. 그거요? 제가 그냥 허세를 좀 부린 거지요. 제가 감히 어떻게.-아니야. 그런 게 아니고. 그러면 뗄 줄도 아는 거지?-네?/김강 소설가

2022-09-12

그 길밖엔 없어 &lt;Ⅸ&gt;

그날의 술자리를 기억해낸 우현이 노마에게 물었다.-그래서 그날 내가 한 말을 믿고 지금 이런 일을 벌이는 거야? 나한테 미리 말도 없이?-꼭 그런 건 아닌데. 네가 한 말이 생각나기는 했지. 내 주위에 이 방면으로 아는 사람이 너 말고 없잖아. 그리고 그 늙은이한테 너도 악감정이 있지 않냐. 내가 뒷이야기 하나 더 해줄까?우현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노마가 낯설었다. 이 녀석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무슨 이야긴데?-안나 임신했다. 그 늙은이의 아이란다.-임신? 그게 가능해?-임신했다니까. 가능하냐고 물을 문제가 아니지. 이미 현실인데.우현은 늙은이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안나는 왜 피임을 하지 않은 거지? 설마 임신이 되겠어? 그렇게 생각한 건가? 우현은 안나의 생각이 궁금했다. 노마에게 다시 물었다.-그러면 아이 아빠를 죽이는 거잖아. 안나는 어떡하라고? 아이는? 안나도 알아?-당연히 안나는 모르지. 알면 날 가만 두겠냐? 아이는 일단 낳아야지. 그다음 문제는 다음에 생각하고. 늙은이의 자식인데 뭐가 걱정이야. 친자 확인하면 다 나올 건데. 걱정 안 해도 돼. 늙은이 재산이 좀 되니까 물려받는 것도 제법 될 거야.우현은 노마의 대답을 들은 뒤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창밖을 보기도 했고, 자고 있는 늙은이를 쳐다보기도 했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쉰 뒤 노마에게 물었다.-내가 얻는 건 뭔데? 복수?-넌 얻는 게 많지. 인공 장기, 복수, 그리고 운 좋으면 안나. 장례 치르고 나면 안나에게 연락해 봐, 예전하고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겠어? 아이는 안나와 네가 같이 키워도 되고 아니면 그 집안에 맡겨버려도 되고. 물론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야. 안나 하고 상의해 봐야지. 작업을 할 차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빨리 가야 해. 좀 밟는다.노마가 속도를 높이자 우현의 몸이 뒤로 쏠렸다.-이거 너 혼자 계획한 것 아니지?우현이 다시 물었다.-너, 그리고 내가 하는 거지.노마가 대답했다.-그런 대답 말고.우현이 노마를 다그쳤다.-더 이상 묻지 마라. 넌 나까지만 알고 있는 게 좋은 거지.직원이 다시 돌아왔다.-특별한 일은 없었고?우현이 물었다.-네. 특별한 말 없었습니다. 지난번 물건들도 모두 시술했는데 작동이 잘 되고 있답니다. 참. 그것도 이식했답니다, 폐. 이제 사무실로 출발하면 되는 거지요. 사장님.신경 써 주어서 고맙긴 해. 그래도 어쩌겠나. 내 직업이 형사인 것을. 우현 씨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도록 할 게. 얼굴 한 번 봤으면 하는데. 가능할 것 같으면 연락 줘.허 형사에게서 문자가 왔다. 우현이 허 형사에게 문자를 보낸 지 일주일 만이었다. 나는 물건을 회수하고 넘긴 것뿐이야. 이 업계에서 일을 하려면 지켜야할 비밀이기도 하지. 나는 아는 게 없는 거지. 실제로도 그렇고. 그러니 해줄 말도 없는 것이고. 그런데 왜 이리 불편하지? 목구멍에 뭔가 걸린 것 같단 말이야. 기분이 더러워. 우현은 몇 차례 헛기침을 했고 손으로 가슴팍을 두드렸다. 문득 궁금해졌다. 허 형사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우현이 허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저 우현입니다.-고마워. 그래. 만나주기로 한 거야?-네엡. 이렇게 간곡히 청하시는데 제가 어찌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대신 저를 만났다는 사실만 비밀로 해 주시면. 불법적인 일을 하고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형사 만나고 다닌다는 소문나면 이 업계에서 끝입니다.-알았어. 걱정 마.우현과 허 형사가 마주 앉았다. 반 팔 면티와 청바지를 입은 허 형사가 갈색 구두를 신고 있었다.-하아. 천하의 허 형사님 패션이. 쥑입니다요. 사모님 코디입니까?우현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마누라, 죽었어. 이 년 전에.허 형사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아니 어쩌다가. 가만 있자. 그러면 이식받은 지 삼 년 만에 돌아가신 거네요. 아이고. 이를 어째. 죄송합니다. 제가 그것도 모르고 실수를 했습니다. 아이고. 미인이셨는데. 아직 젊으신데. 아이고.허 형사의 눈치를 보며 우현이 호들갑을 떨었다.-괜찮아. 내가 말을 안 해 준 거니까. 좀 조용히 말해.우현의 호들갑이 신경에 쓰이는 듯 허 형사가 주위를 둘러보았다.-이식받은 콩팥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하긴 그랬으면 제게 먼저 연락을 주셨겠지만.-다른 문제로. 알겠지만 당뇨가 어디 한두 군데 이상이 생기는 게 아니잖아.허 형사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아 당겼다가 내쉬었다. 회색 연기가 테이블을 벗어나 옆 테이블로 넘어갔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커플이 인상을 썼다. 우현이 허 형사 대신 고개를 숙였다.-그렇기는 하지요. 그런데 저는 왜 몰랐을까요? 인공 장기 이식받으신 분이 사망하면 저 같은 업자에게 연락이 오는데. 아마 다른 업자에게 연락이 먼저 갔나 봅니다. 이 상황에서 드릴 말씀이 아니기는 하지만, 장기 값은 받으셨지요?-장기 값. 받기는 받았지. 받은 날 저녁에 다 써버려서 그렇지. 룸에서 술 먹고 이차 가고. 그렇게 다 써버렸어. /김강 소설가

2022-09-05

그 길밖엔 없어 &lt;Ⅷ&gt;

세 번째 만남의 기간은 앞선 두 번 보다 짧았다. 안나가 만식의 상주 트레이너가 되어 만식의 집에 들어가면서 그들의 만남은 끝났다. 우현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누군가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허락할 수 없어.우현이 말했다.-아니, 살림을 살러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돈 많은 부자의 개인 트레이너가 되는 것일 뿐이야. 방 내주고 밥 먹여주고, 돈도 준다는 데 왜 안 된다는 거야? 남는 시간은 내가 자유롭게 쓸 수 있다고 확인도 받았다니까.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구십이 다 돼가는 노인네야. 무슨 걱정이야?조금만 더 세게 나가면 안나가 포기할 것 같았다.-아니.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지금 결정해. 상주 트레이너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든지 나를 포기하든지.우현의 말에 안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대답했다.-오빠는 여전하구나. 바뀐 게 아니었네. 내 인생이라고. 분명히 말했지. 오빠가 허락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어디에 뭘 가져다 붙이는 거야. 결정할게. 지금으로선 오빠를 포기할 수밖에 없네.이번에는 정말로 마지막인 것 같았다. 처음에는 감옥 생활에 적응하느라 견딜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사업에 몰두하느라 잊고 지낼 수 있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매일 안나의 얼굴이 떠올랐고, 자신이 했던 말을 후회했다. 그때 왜 그렇게 말했던 것인지.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건지. 안나는 우현의 전화를 받지 않았고 문자에 답을 하지도 않았다.그렇게 몇 달이 지난 후, 결국 우현은 노마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노마에게 그동안의 일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안나와 다시 만날 수 있게 주선해 달라 부탁할 생각이었다.-웬일이냐? 사업은 잘되고?오랜만에 만난 노마였다.-사업은 뭐. 그냥 그렇지.우현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무슨 소리. 나도 다 듣는 소리가 있거든. 아이고, 부러워라. 나는 월급쟁이에, 집안 꼴도 말이 아니고. 오늘 네가 쏘는 거지? 나 비싼 거 먹어도 되지?메뉴판을 살피며 안주를 고르는 노마에게 우현이 물었다.-집안이 뭐? 무슨 일 있어?안주를 고르던 노마가 한숨을 쉬었다.-그게, 이거 부끄러워서 어디에 말도 못하겠고. 그래도 네 녀석은 우리 집을 좀 아니까. 글쎄 안나가, 안나라는 녀석이 말이야.-안나가 뭐? 말해봐.-그 녀석이 마이걸이 되었다, 마이걸이. 안 되겠다, 오늘 소주 먹자. 소주노마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고 우현은 숨을 멈췄다. 마이걸이라니. 상주 트레이너라고 했는데.-상주 트레이너 아니었어? 그러면 그 팔십 넘은 노인의 마이걸이 되었단 말이야?-글쎄 그렇다니까. 어, 그런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노마가 우현에게 물었고 이번에는 우현이 한숨을 쉬었다. 노마는 우현의 움켜쥔 주먹을 보았다.-니들 둘, 혹시?그날 우현은 노마에게 안나의 고등학교 시절부터 최근까지 있었던 일을 말했다. 우현, 네가 어떻게 나를 속일 수 있냐. 내 동생에게 어찌 그럴 수 있냐. 노마가 화를 내며 우현에게 따졌지만 분노와 섭섭함, 배신감의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그때 도움을 청하지 그랬어. 그랬으면 바로 결혼이라도 시켜버렸을 것 아니냐.노마가 우현에게 말했다.-안나가 조금 더 있다 말하자 그랬어. 그리고 그때는 나도 자신이 없었고. 네가 항상 말했었잖아. 다른 건 몰라도 네가 아는 수컷에게는 안나를 시집보내지 않을 거라고. 너하고 절교를 해야 안나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친구들한테 말하고 다닌 것 기억 안 나냐?우현이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고 노마는 우현의 잔에 소주를 부었다.-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이 녀석을 어째?-아버지는 뭐래? 가만히 있으셨어? 어머니는?우현이 물었다.-삶에 정답은 없단다.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인생이란다. 잘 모셔라, 그러더라. 듣다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하고.-그게 무슨 말이냐.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인생이라니. 네가 오빠냐?노마의 대답에 우현이 화를 냈다.-이 녀석이 왜 나한테 이래. 내가 그랬어? 듣고 보니 네 녀석이 안나 간수를 잘 못한 거네. 어쩔 거야? 응? 내 동생 어쩔 거냐고?안주로 시킨 두부김치가 나왔지만 둘 중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고 술잔만 비워댔다. 번갈아 가며 마시고 따랐다. 세 병째 소주를 주문했을 때 우현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죽여 버릴 거야. 이 노인네.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다 늙어가지고 뭐하는 짓이야.급하게 마신 탓에 술기운이 오른 노마가 우현을 쳐다봤다. 우현의 얼굴은 타는 듯 붉었다.-말로만. 안나 하나 붙잡지 못하면서 사람을 죽인다고? 인마, 네가 아무리 인공 장기 팔아먹고 다니지만 사람 죽인다는 이야기는 함부로 하면 안 돼. 인마.노마가 물 잔에 소주를 따라서 우현에게 건넸다. 우현은 물 잔을 들어 단번에 비웠다. 그리고 말했다.-내가 못 할 것 같지? 나 잘해. 장기 떼고 붙이는 것, 웬만한 의사보다는 나을 걸. 내가 다 가르치잖아, 의사들.-그러면, 너 진짜로 죽일 수 있어?쉰 소리와 허풍, 비아냥거림, 울음으로 그날 술자리는 끝났다. /김강 소설가

2022-08-29

그 길밖엔 없어&lt;Ⅶ&gt;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회사는 우현에게 책임을 져 달라 부탁했다. 우현 개인이 실적을 올리기 위해 한 일로 진술해주기를 바랐다. 우현과 회사는 협상을 했고 결국 우현은 자신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했노라 진술했다. 실형을 선고받았다. 우현은 안나가 기다려 줄 것이라 믿었다. 이 년이면 돼. 이 년이면 금방이야. 안나가 품에 안겨 울기라도 하면 이렇게 말해 줄 생각이었다. 안나는 울지 않았다.-이 년 동안 내가 어떻게 바뀔지 나도 몰라. 오빠를 사랑하지만, 사랑이 곧 결혼은 아니지. 인생에 사랑이 한 번만 있는 것도 아니고. 잘 다녀와. 뒷일은 그때 가서 보자고. 지금 이렇다 저렇다 헛된 약속을 하지는 않을게.우현과 안나의 첫 번째 이별이었다.형기를 마치고 감옥에서 나온 우현이 다시 안나를 찾았을 때 안나는 여전히 혼자였다. 이 년 동안 몇몇 남자들과 교제를 하기는 했었지만 동거나 결혼에 이를 정도의 관계는 아니었다. 다시 만난 첫날 안나가 말했다.-오빠를 기다리겠다 말한 적 없어. 하지만 오빠만큼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은 사실이야.우현이 안나에게 가졌던 섭섭함은 그렇게 사라졌다. 다시 만난 기념으로 간 여행에서 둘은 꼬박 이틀을 숙소에서 나오지 않았다. 엉겨 붙은 채 서로를 탐했다. 힘이 떨어지면 잠을 잤고, 눈을 뜨면 다시 엉겨 붙었다.-새로 사업을 시작했어. 사업이 자리를 잡으면 너를 데리러 갈게. 이제는 이야기해야지. 노마에게도, 너의 부모님께도.우현이 말했을 때, 안나가 대답했다.-나는 아직 아무것도 결정한 것 없어. 내가 말했지. 사랑이 곧 결혼은 아니라고. 오빠. 너무 서두르지 마. 너무 밀어붙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 아직 어려.이제는 안나를 알 것 같았다. 이미 한 번 헤어져 본 적 있는 터라 안나가 동기 남자와 밥을 먹거나 선배 오빠라며 술을 같이 마셔도 우현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우현이 신경을 쓰는 것은 딱 한 가지였다. 안나의 직업.안나의 전공은 사학과였다. 우현은 안나가 전공을 살려 취직하기를 원했다. 대학원에서 공부를 더 하는 것도 괜찮은 길이라 여겼다. 보습학원 선생님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상상이었고, 지방자치단체들의 역사관 큐레이터가 되는 것도 멋진 일이라 생각했다. 엄마와 아내의 직업으로 적당했다.안나의 생각은 달랐다. 안나는 자신의 전공에 흥미가 없었다. 다들 가는 대학이라서 간 것이고, 성적에 맞추어 들어간 전공일 뿐이었다. 안나는 몸에 더 자신이 있었다. 아비와 어미가 물려준 우월한 몸을 활용하고 싶었다. 피트니스모델이 되거나 헬스트레이너가 되려했다.-나는 헬스트레이너, 피트니스 모델 둘 다 싫어. 나는 네가 네 전공을 살려서 직업을 선택했으면 좋겠어.우현이 말했다.-나는 내 전공이 싫은걸. 좋아하지도 않는 것으로 평생 직업으로 삼으란 말이야? 안나가 되물었다.-그래도 피트니스 모델이 뭐고, 헬스트레이너가 뭐냐?우현이 인상을 썼다.-왜? 그게 어때서? 요즘 사람들이 자기 건강을 얼마나 살피는데. 사람들 건강에 도움도 되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고. 도대체 반대하는 이유가 정확히 뭐야?안나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난 다른 사람들이 네 엉덩이, 네 가슴, 네 허벅지를 힐끔거리는 게 싫어. 그게 어쩌다 있는 일이 아니고 매일매일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게 더 싫은 거야. 큐레이터나 선생님. 얼마나 좋아. 엄마나 아내의 직업으로는 딱 이지. 내 마음, 내 기분을 모르겠어?우현이 대답했다.-오빠. 웃긴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아. 우현 오빠가 날 정말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구나.’ 할 줄 알았어? 나. 그런 생각 안 들어. 오히려 ‘이 사람도 어쩔 수 없는 한국 남자구나.’ 하는 생각만 들어. 내 몸이야. 내가 자랑스러워하는. 오빠도 내 몸 때문에 날 좋아하기 시작한 거잖아. 안 그래? 남들이 내 몸을 힐끔거리든 정면으로 쳐다보든 나를 보고 있으면 나는 오히려 자신감이 생기고 기분이 좋아져. 내가 자신감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좋아. 그러니 더 잘할 수 있는 거고. 그리고 내가 왜 벌써부터 엄마나 아내로서의 역할, 이미지를 생각하면서 직업을 골라야 하는데? 듣고 보니 순전히 오빠 중심인 거잖아.두 번째 이별이었다.둘은 또 다시 만났다. 다시 만난 안나는 인정받는 헬스트레이너가 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우현이 먼저 연락했다. 안나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감당해야지, 감당할 수 있어. 궤도에 오른 사업이 자신감을 주었다.-오빠가 걱정했던 대로 힐끔거리며 곁눈질하는 남자들, 많아.안나가 웃었다.-그 사내들 덕분에 내가 월급을 조금 더 받고 있지. 뭐 나쁘지 않아. 지들이 내 몸을 상상하며 어디서 무슨 짓을 하건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그래도 내 몸에 터치하는 것은 칼같이 자르고 있어.이번에는 우현도 같이 웃었다.-어, 웃네. 오빠도 이제 조금 바뀌었나 보네.웃고 있는 우현을 보며 안나가 말했다.-바뀌어야지. 그래야 모시고 살지. 우현이 대답했다.-그래, 그럼 내가 다시 만나주지. 오빠 집 어디야.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는 것 아니지? 오늘 오빠 집에 가자. /김강 소설가

2022-08-22

그 길밖엔 없어&lt;Ⅵ&gt;

-왜 이러냐? 로봇 관리사가 힘들어? 우리 회사에서 영업이나 뭐 그런 거 할래? 내가 취직시켜줄게. 지금이라도 차 돌려서 올라가자. 너 이렇게 한 번 발들이면 못 돌아온다. 너 지금 네 목소리가 떨리는 것 느끼지? 그거 오랜만에 담배 피워서 그런 것 아니야.우현이 앞좌석으로 고개를 내밀며 녀석에게 말했다. 녀석은 힐끗 우현을 한 번 돌아보았다.-저 인조인간을 차에 태울 때 벌써 발을 들인 거야. 저 인조인간 나 알아. 이미 돌아가긴 글렀어. 아, 몰라. 이미 우리는 직진이야. 직진. 이 길밖엔 없어 그러니 네가 나 좀 도와줘야겠다. 너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고.-거기에 왜 나를 가져다 붙여. 나 물건 네 개 정도 없다고 사는 게 힘들어 지거나 그러지 않아. 이런 경우 말고도 물건은 널렸어. 도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냐? 어? 이런 게 내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우현이 앞좌석을 잡아당겼다 놓으며 흔들었다.-그게 꼭 인공 장기만의 문제는 아니야. 잘 봐. 누군지 알겠어? 하긴 네가 얼굴을 보고 누군지 알기는 힘들겠지. 기억 나냐? 올더앤베러 최 회장이라고. 안나를 마이걸로 만든 늙은이. 내가 처음 너에게 말했을 때 네가 찾아가 죽여 버릴 거라고 했었잖아. 그 늙은이야. 팔십 일곱 살짜리. 그때 네가 이야기했었지. 니들 둘 사이에 있었던 일들. 안나가 나에게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 내가 물었었잖아? 진짜로 죽일 수 있냐고.안나가 고등학생이었을 무렵 우현은 대학생이었다. 전공 과제를 하느라 노마의 집에 들렀던 우현이 안나를 보았다. 교복을 입은 안나가 아니라 평상복을 입은 안나는 우현에게 학생이 아니라 여자였다. 우현은 안나를 마음에 품었다. 핑계거리만 생기면 노마의 집을 찾아왔다. 과제 때문일 경우도 있었고, 그저 놀기 위해 온 날도 있었다. 저녁밥을 얻어먹고 안나가 귀가하는 늦은 시간까지 기다렸다. 노마와 같이 거실에 앉아 있는 우현이 안나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가끔은 노마와 우현, 안나가 섞여 같이 주말을 보내기도 했다.곁눈질로 안나를 보기 시작했던 우현이 안나의 얼굴을 마주하는데 익숙해질 즈음, 셋이서 새로 나온 영화를 보러 갔다.-남매가 영화 보러 가는데 내가 왜 끼어?-얘랑 둘이서 가면 무조건 싸워. 다른 사람 한 명 있어야 돼.노마가 한 번 더 권했다.-같이 가요. 오빠.안나까지 나서서 잡아끌자 못 이긴 척 따라나섰다. 안나를 중심으로 노마와 우현이 좌우로 나누어 앉았다. 영화를 보던 중 노마가 화장실에 갔다. 안나가 우현에게 귓속말을 했다.-우현 오빠, 겁쟁이구나.잠시 후 우현은 안나의 손을 잡았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영화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안나의 손이 무척 부드러웠다는 것. 우현이 안나의 손을 움켜쥐자 안나가 우현의 손을 풀고 다시 깍지를 끼었다는 것만 기억했다. 영화가 끝나고 들렀던 카페에서도 안나의 눈은 우현을 향했다.집으로 돌아와 노마와 우현은 맥주를 마셨다.-내가 마실 것은 없잖아.안나가 노마에게 말했다. 노마가 음료수를 사러 간 사이 안나와 우현은 첫 키스를 했다.-처음 보았을 때부터 너를 좋아했어.우현이 안나에게 고백을 했다.-알고 있었어요.안나는 우현의 입술을 손으로 닦아주었다.며칠 후 우현은 차를 빌렸다. 안나의 학교 정문 앞에서 안나를 기다렸다. 지나가는 길에 생각이 났고 마침 하교 시간이라 그저 한 번 기다려보았다는 우현의 변명을 들으며 안나가 웃었다.-오빠, 저 보러 왔다고 말해도 돼요.우현은 안나의 집 근처 골목에 차를 세웠다. 트렁크를 열어 준비했던 꽃다발과 편지를 안나에게 건넸다.-정식으로 고백을 하고 싶었어. 안나. 너를 좋아해. 안나, 네가 대학생이 되면 너의 남자 친구가 되고 싶어.우현이 수줍게 고백을 했다. 안나가 대답했다.-오빤 벌써 내 남자 친구인걸요.안나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우현은 인공 장기 회사에 취직을 했다. 번듯한 직장을 가진 남자 친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았다. 동급생 남자들이 밥과 커피를 사줄 때 우현은 여행을 같이 갈 수 있었고 남자 선배들이 영화를 보여줄 때 우현은 뮤지컬 표를 들고 나타났다. 안나가 졸업을 하면 안나의 부모와 노마에게 정식으로 말할 생각이었다. 안나와 결혼 하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우현은 그날을 상상하며 혼자 연습을 하곤 했다.사건이 터졌다. 리베이트 사건이었다. 우현의 회사는 인공 장기를 공급하면서 거래가격의 십오 퍼센트 정도를 담당 의사에게 현금으로 되돌려 주었다. 불법이었지만 익숙한 관행이었다. 의사들은 의례히 받는 것이라 여겼고, 회사는 어차피 들어가는 마케팅 비용이라 여겼다. 주는 쪽, 이를테면 영업사원들이 퇴사하면서 리베이트 장부를 가지고 회사를 협박한다거나, 협박하다 여의치 않으면 경찰에 투서를 한다거나 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출발점이 달랐다. 리베이트를 주는 쪽이 아니라 받는 쪽에서 문제가 생겼다. 한 종합 병원의 이식 외과에 제공한 리베이트를 그 과의 과장이 혼자서 유용을 했다. 과에 속해 있던 의사들이 공정한 분배를 요구했다. 과장은 과 전체의 이름으로 들어온 것이니 과장이 알아서 관리하겠다며 맞섰다. 언쟁과 날카로운 신경전이 반복되던 중 회식 자리에서 서로에게 술잔을 던졌고 주먹다짐을 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했고 술이 깨지 않은 한 의사의 입에서 리베이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폭력 사건에서 리베이트 사건으로 바뀌었다. /김강 소설가

2022-08-15

그 길밖엔 없어 &lt;Ⅴ&gt;

허 형사에게 문자를 보내고 난 후 우현은 핸드폰을 차의 대쉬보드 위로 던졌다. 핸드폰은 앞 유리까지 미끄러졌다. 운전을 하고 있던 직원이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려 우현의 얼굴을 보았다.-운전이나 해.우현은 앞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앉아있었다. 비가 내렸다. 좌우로 움직이는 와이퍼 사이로 이정표가 보였다.-여기서 제일 조심해야 해. 올 때마다 헷갈린단 말이야. 한두 번 와 본 길이 아닌데 말이지. 오른쪽 왼쪽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180도 다른 곳으로 가게 된다고. 알지? 우리는 직진이야, 직진. 그 길밖엔 없어. 언제더라? 지난번에 길을 잘못 들어서 고생했어. 바이어는 다시 돌아가 버렸고. 안 좋은 일이 생긴 줄 알고 말이야. 그때 손해가 좀 컸어.우현의 말을 들으며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도착하면 뒷좌석에 있는 캐리어만 전해주고 와. 누군지 알지? 전에 봤잖아. 나는 오늘 내리지 않을 테니까. 혼자서 해보라고.-직접 주시지 않고요? 지금까지 한 번도 다른 사람 손에 맡기신 적 없으셨는데요.힐끗 우현을 돌아본 직원이 말했다.-그냥. 오늘은 왠지 걔들 얼굴 보면 짜증이 날 것 같아서 그래. 말만 들어도 토할 것 같아. 가져다주기만 하면 돼. 돈은 이미 받았으니까. 깨끗이 씻었으니까 달기만 하면 된다고 말해주고. 우리말로 해도 알아들을 거야. 노래나 한번 틀어봐. 좀 신나는 걸로.직원이 틀어준 빠른 박자의 노래들이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첫 곡으로 돌아왔을 때 차가 멈췄다. 직원은 차에서 내려 캐리어를 가지고 갔다. 우현은 의자를 뒤로 젖혔다. 시발. 쓸데없이 전화질이야. 혼잣말을 내뱉었다. 하필 허 형사야. 알아들었겠지? 문자를 괜히 보냈나? 보내지 말걸. 취소할 수도 없고. 우현은 혼잣말을 주고받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낮은 잿빛 구름 아래로 검고 넓은 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한동안 내릴 비였다.그 녀석 때문이야. 녀석이 보자고 했을 때 무슨 일인지 먼저 물어봤어야 하는 건데. 그날 가지 말았어야 했어. 젠장.그날 바람이 많이 불었다. 낮은 기온은 아니었지만 바람 때문에 제법 쌀쌀했다. 우현은 휴게소 안으로 들어가 어묵 한 그릇을 시켰다. 어묵이랑 건더기는 그대로 둔 채 국물만 홀짝거렸다. 녀석에게서 전화가 왔다.-다 와 간다. 십 분 정도 후에 도착할 거야. 화장실 앞쪽으로 나와 있어. 머뭇거릴 시간 없으니까 검정색 SUV가 서거든 바로 타. 알아볼 수 있게 왼쪽 창에 노란색 스티커를 붙여 놓았어.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녀석이 전화를 끊었다. 이런 녀석이 아닌데. 무슨 일이지? 우현은 괜히 나왔나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왼쪽 창에 노란색 스티커를 붙인 SUV가 우현의 앞에 섰다. 우현이 앞 좌석의 문을 열었다. 담배 냄새가 확 하고 몰려나왔다. 차에 올라타려 하자 녀석이 ‘뒷자리’하고 말했다. 우현은 녀석을 쳐다보았다. 녀석은 다시 짧게 말했다. 빨리.-너 다시 담배 피우냐?뒷자리에 올라타며 우현이 물었다.-오늘만 피우기로 했다.녀석이 뒤를 돌아보았다. 녀석의 목소리가 떨렸다. 뒷자리에는 노인 한 명이 타고 있었고 자는 듯 보였다.-뭔데?우현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선물이지. 부탁이기도 하고.녀석이 가속 페달을 밟으며 대답했다.-무슨 말이야?우현은 노인과 녀석을 번갈아 보았고 녀석은 앞자리에서 작은 가방을 들어 우현에게 건냈다.-일단, 가방에서 5cc짜리 주사기 꺼내서 한 대만 놓아줘. 다 재 놓았어. 거기 보면 주사액이 채워진 주사기가 있을 거야. 중간중간 봐가면서 계속 줘. 도착하려면 제법 더 가야 하니까. 너 주사 놓을 줄 알잖아.-무슨 일인지 말해줘야 놓지.우현이 다시 녀석에게 물었다.-일단 한 번만 먼저 놓아줘. 아, 그놈. 참, 말 많네. 너 언제부터 이렇게 말이 많았냐?녀석이 우현을 다그쳤다. 우현은 가방에서 주사기를 꺼내어 노인의 어깨에 주사를 놓았다.-뭐냐 하면.녀석이 이야기를 시작했다.-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기계다 생각해. 죽여야 하는데 그냥 죽이기에는 아깝더라고. 인공 장기가 몸 안에 몇 개 들어 있거든. 그래서 널 불렀지.-무슨 말이냐?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장기를 떼어내란 말이야. 나더러?우현이 목소리를 높였다. 녀석이 대답했다.-네가 장기를 떼어내기 전에 죽은 사람이 될 거야. 그것까지는 너에게 시키지 않을게. 걱정하지 말고. 그런데 내가 한 번도 사람을 죽여본 적 없거든. 네가 옆에서 방법을 가르쳐줘. 내가 할 테니까. 장기를 떼어내기 가장 좋은 방법으로 죽이면 되잖아. 그치?우현은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너 왜 이러냐? 나야 만나는 인간들이 원래 그런 놈들이니 놀랍지 않지만, 네가 이러는 건 좀 의왼데? 무슨 일이야? 원한이야? 아니면 뭔데?백미러로 우현의 얼굴을 보며 녀석이 대답했다.-너. 살 좀 찐 것 같다. 사업이 잘된다고 하더니만 진짜구나. 네 사업에 보탬이 되라고 내가 노력 좀 하는 거다. 거기 있는 것 안에 인공 장기 네 개가 들어 있다. 네 개나. 그러니 저게 인간이냐? 죽어야 할 때 죽지 않고 계속 사는 것. 인조인간이지, 인조인간. 그래서 내가 죽여주려고 하는 거다. 아마 죽고 나면 고마워할지도 모른다./김강 소설가

2022-08-08

그 길밖엔 없어&lt;Ⅳ&gt;

박 팀장은 담뱃불을 손으로 튕겨냈다. 종이컵에 꽁초를 넣었다.-그러면 올더앤베러 소유 차량에서 범행이 일어났다는 거잖아. 내부자가 관련되어 있다는 말이야?-그렇게 단언해서 말할 수는 없지요.허 형사는 대답을 한 후 종이컵에 남아 있던 커피를 마저 마셨다.-그건 그렇지. 진주 공장에 갈 때 같이 가자. 나도 도와줄게.-팀장님은 그냥 여기 계십시오. 같이 가봤자 걸리적거리기만 합니다.허 형사가 벤치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야, 뭐라고? 아직 삐져 있는 거야? 사내자식이. 야, 거기 서봐.박 팀장도 허 형사를 따라 벤치에서 일어났다. 허 형사를 쫓아갔다.-사람이 따라오면 기다려주기도 하고 그래야지.박 팀장이 숨을 헐떡였다.-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허 형사가 이야기했다.-중고 인공 장기 말입니다. 한 번 사용한 인공 장기라 하더라도 다시 사용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시 사용하려면 정해진 시간 내에 특수한 세척을 해야 다른 사람에게 사용할 수 있답니다. 설명이 어렵던데, 인공 장기에 처음 사용했던 사람의 세포 같은 것이 남아 있어도 안 되고, 또 무균상태로 만들기 위해 소독하는 과정 등이 필요하고. 하여튼 몇 가지 이유 때문에 특수한 세척을 해야 한답니다.-그렇겠네. 재사용하는 것 자체가 찝찝하잖아. 인공 장기를 달면서 중고를 쓰겠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신기해.박 팀장이 옆 책상의 의자를 끌고 와 허 형사의 책상 옆에 자리를 잡았다.-간혹 있다 하네요. 신품과 중고 가격 차이가 많이 나니까. 어쨌든 이 특수 세척이 필요한 데, 이 특수 세척을 할 수 있는 기계가 수거업체, 그리고 제조 회사에만 있답니다. 이게 쉽게 들여오거나 만들 수 있는 기계가 아니랍니다. 그렇다고 기계를 밀수해 와서 쓸 만큼 시장이 넓은 것도 아니고. 결국 병원이 아닌 곳에서 불법 인공 장기 이식 시술을 하더라도 수거 업체나 제조 회사의 세척을 거쳐야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 이후로 지금까지 수거 업체나 제조 회사에서 세척한 인공 장기가 없답니다.허 형사의 말을 듣고 있던 박 팀장이 허 형사의 말을 끊었다.-잠깐만. 세척을 해놓고 안 했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것 아니야? 아니면 아직 세척하러 오지 않았거나. 무조건 수거 업체나 제조 회사를 거쳐야 한다면 분명히 들통 날 텐데. 다른 방법이 있는 것 아니야?허 형사는 잠시 박 팀장을 쳐다본 뒤 말을 이었다.-그러니까요. 이제 말하려고 하는데. 제발, 좀. 제 말 좀 끊지 마십시오. 팀장님은 그게 제일 이상한 습관입니다. 사람 말을 끝까지 듣고 있지를 않습니다. 어쨌든 그런 것을 살펴볼 수 있는 방법으로 기계의 사용 횟수를 보는 것이 있습니다. 기계가 몇 번 돌아갔는지 기계 자체에 기록이 되어 있기는 한데, 장기 하나를 세척할 때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세척을 하는 경우도 있어서 기계가 돌아간 횟수로는 불법 세척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이 세척에 필요한 약품의 사용량을 보는 것인데. 이것도 사용량을 서류 조작하거나 평소에 세척을 하면서 조금씩 따로 모아놓았다가 사용을 했다면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어차피 남아 있는 양을 보는 것이라서 내부직원이 관계되어 있다면 알 수 없는 일입니다.-무슨 말이야.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잖아.박 팀장이 허리를 뒤로 젖혔다.-그렇기는 한데요. 수거 업체나 제조 회사의 서류와 기록이 모두 진짜라 가정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시간상으로 보았을 때 아직까지 제품을 세척하지 않았다면 재사용할 수 없다 하더라고요. 재활용하려면 어떻게 해서든 세척을 했어야 하는 거지요.-범행의 목적이 인공 장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되나?허 형사가 씩 웃으며 박 팀장의 얼굴을 보았다.-그렇지요. 제 말이 그겁니다. 전혀 다른 사건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인공 장기 관련 사건인 것처럼 보이게 말이죠. 시체를 다시 가져다 놓은 것까지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인공 장기만 노린 놈들이라면 시체를 다시 가져다 놓을 필요는 없지요.-그렇지. 그럴 수도 있겠네. 하지만, 어쨌든 인공 장기가 사라졌잖아. 다른 목적이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인공 장기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도 없지. 두 가지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인공 장기와 복수, 이런 식으로 말이지. 그리고 녀석들은 자기들이 시체를 다시 가져다 놓은 사실을 우리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말하자면 범행 장소를 헷갈리게 하려고 일부러 시체를 가져다 놓았을 수도 있지.박 팀장이 허 형사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을 이었다.-허 형사, 아니, 우리 허 형사가 그 신호음인가 뭔가의 신호 강도에 대해서 알아내지 못했다면 우리는 여태 범행 장소도 오리무중이었을 것 아니야. 다행히 우리 허 형사가 아주 똑똑한 덕분에 알게 되었지. 여러 가지 가능한 이야기들이 있으니 모두 염두에 두자고. 인공 장기 매매도 포함해서 말이야. 중국 같은 외국으로 빼돌렸을 가능성, 수거 업체나 제조 회사의 기록이 조작되었을 가능성, 재활용하려다 여의치 않아서 접었을 가능성. 모두 다 있는 거니까. 그런데, 어쨌든 말이야. 허 형사. 인공 장기 관련해서 전문가가 다 된 것 같아. 정말이야. 신호니 세척이니 등등. 너무 잘 아는 것 아니야? 대단해. 앞으로 비슷한 사건들이 많이 생겨날 텐데. 우리도 전문가가 한 명 생긴 것 같아. 든든해.박 팀장은 인공 장기가 목적이 아닐 수도 있다는 허 형사의 말에 동의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인공 장기 관련해서 허 형사가 알아낸 사실들에 대해 칭찬을 했다. 허 형사는 박 팀장의 말이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아내의 죽음과 맞바꾼 것들이었다./김강 소설가

2022-08-01

그 길밖엔 없어 &lt;Ⅲ&gt;

지금 무엇을 어떻게 조사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를 통해 뭔가를 알아보려 하지 마십시오. 인공 장기까지 달았던 사람들이 그저 쉽게 죽겠습니까? 사모님이 받은 인공 콩팥은 하늘에서 뚝 떨어졌겠습니까? 사모님 장기는 어디서 왔는지 아십니까?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다른 것은 다 까먹어도 사모님 콩팥이 어떻게 왔는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 형사님을 이용해 먹지는 않았습니다. 형사님께 빚진 것이 없었다면 형사님을 제법 괴롭혔지 싶습니다. 그러니 이런 일로 제게 전화하지 마십시오. 형사님은 그저 물어보는 것이겠지만 저는 취조당하는 기분입니다. 그리고 저는 형사님의 정보원이 아닙니다. 허 형사님께 부탁드리는 말씀입니다. 제가.허 형사의 아내에게 이식했던 인공 콩팥은 교통사고를 당한 노인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허 형사의 아내와 마찬가지로 당뇨로 인한 신부전으로 투석을 하고 있던 노인이 이식받아 육 개월 정도 사용했던 콩팥이었다. 콩팥을 바꿔 단다고 당뇨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질은 훨씬 나아졌을 것이다. 이틀에 한 번씩 혈액 투석을 하기 위해 병원을 찾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그런데 육 개월밖에 더 살지 못했다.아들이랑 백화점에 가는 길이었데. 갑자기 끼어드는 차를 피하려다 방호벽을 들이박은 거지. 설상가상으로 조수석 에어백이 작동을 안 한 거야. 아들은 찰과상, 아버지는 사망. 그렇게 된 사연이야.물건을 넘겨주던 병원의 직원이 우현에게 해 준 이야기였다.하여튼 우현 씨는 물건 냄새를 잘 맡는단 말이야. 중고 물건이 나올 줄 어찌 알았을까? 얼마 전에 우현 씨가 전화로 혹시 물건 나오면 꼭 먼저 연락 달라 했었잖아. 응급실에서 인공 장기 환자 사망이 있다고 콜이 오는데 우현 씨 생각이 바로 나더라고.병원 직원이 덧붙여 말했었다. 직원의 안주머니에 하얀 봉투를 넣어주며 우현이 대답했다.무슨 그런 큰일 날 말씀을 하십니까. 이식 기다리던 환자가 운이 좋은 거지요. 이건 감사의 표시구요. 이번에는 조금 더 넣었습니다. 유가족에게는 제가 직접 이체하겠습니다. 계좌번호만 보내주십시오.돈이 된다는 소문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여러 신생 업체가 덤벼들던 시기였다.박 팀장이 허 형사의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허 형사가 고개를 들었다. 박 팀장의 손에 종이컵이 두 개 들려 있었다. 박 팀장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까딱하고는 종이컵을 내밀었다.-한 대 피우자고.-바쁩니다.허 형사가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야, 허 형사. 아직 삐져 있는 거야? 왜 그래, 사나이가. 풀어.박 팀장이 종이컵을 든 팔로 모니터를 가리며 말했다.-삐지다니요. 왜 이러십니까.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담배가 웬 말입니까? 여기 폴더 안에 들어 있는 파일들 안 보이십니까? 일일이 다 확인해야 합니다. 둘이서. 내가 형사로 온 건지 모니터 요원으로 온 건지. 방해하지 마시고 혼자 가서 피우십시오. 열심히. 조심하십시오. 커피 쏟아지면 오늘 작업한 것 다 날아갈 수도 있습니다.허 형사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박 팀장의 팔을 모니터 밖으로 빼냈다.-미안해. 그래서 이렇게 커피 뽑아 왔잖아. 그리고 천천히 해도 된다 했잖아. 자, 한 대 피우러 가자니까.허 형사가 고개를 들었다. 박 팀장이 웃고 있었다.-이번에는 안 풀려고 했는데. 아이 씨.허 형사는 한 마디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 팀장은 허 형사의 손에 종이컵을 쥐어주고는 허 형사의 어깨를 툭 쳤다. 밖으로 나온 박 팀장과 허 형사는 주차장 뒤쪽 벤치에 앉았다.-그래. 뭐 나온 것 좀 있어?박 팀장이 허 형사가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여 주며 물었다.-뭐가 나왔다고 말하기는 좀 그런데요. 올더앤베러의 공장이 진주에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사건 당일 진영휴게소에 서 있던 컨테이너 수송차량이랑 다른 트럭들 중에 올더앤베러 소유의 차들이 많았습니다. 올더앤베러에 전화해서 물어보니까 거의 주차장처럼 사용한답니다. 진주랑 가까워서 거기서 빈차로 대기하고 있다가 필요하면 진주로 와서 실어나가고, 일 없으면 휴게소에 세워놓고. 운전기사는 개인차량으로 진영 휴게소에 출퇴근하듯이 왔다 갔다 하는 경우가 많답니다.허 형사는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들이마신 뒤 내뱉었다. 박 팀장이 허 형사의 무릎에 손을 얹었다.-수고하네. 지겨운 일 맡겨서 미안하다. 들어보니 아직 뭐 특별한 진척이 있는 것은 아니네. 그지?-진척이 있을 리가 있습니까? 이제 겨우 CCTV 파일 중 육십 퍼센트 정도 보았는데요. 일단 모두 살피고 나서 특별한 내용이 있든 없든 진영 휴게소와 올더앤베러 진주 공장에 한 번 다녀올 예정입니다. 사건 당일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휴게소의 같은 자리에 있는 컨테이너나 트럭들도 살펴보고, 휴게소에 없는 차량들은 진주 공장에 가서 살펴봐야겠습니다. 아직 다 본 것은 아니지만, 일반 승용차에서 범행을 저지르기에는 좁을 것이고. 지금까지 본 것 중에 승합차가 오랫동안 서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저는 왠지 컨테이너 트럭이나 냉동 탑차 같은 것이 범행 장소로 유력할 것 같습니다. /김강 소설가

2022-07-25

그 길밖엔 없어 &lt;Ⅱ&gt;

허 형사를 안심시키기 위해 한참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우현이 고개를 돌려 한 차례 한숨을 내쉰 뒤 허 형사를 보았다.-다른 대안이 없으신 것 아닙니까? 인공 콩팥 이식을 받기는 받아야겠고 신품을 쓰기에는 비용이 부담스럽고 그런 것 아닙니까? 완전한 조건을 원하신다면 중고를 쓰시면 안 되지요.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이거 다 불법입니다. 알고 계시지요? 주위 경찰 동료들에게는 비밀로 하셔야 합니다. 이식을 받으시든 받지 않으시든. 허 형사님을 믿겠습니다.결국 허 형사의 아내는 중고 인공 콩팥을 이식받았다. 지방의 한 준 종합 병원의 수술실에서 우현이 데리고 온 외과 의사가 수술을 했다.-너무 걱정 마십시오.의사를 따라 수술실로 들어가던 우현이 허 형사에게 말했다.수술이 끝난 후 병실로 찾아온 우현에게 허 형사가 물었다.-어떻게 구한 콩팥인지?우현은 정말로 듣고 싶은 것이냐 되물었고 허 형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이식을 받은 후 허 형사의 아내는 건강을 되찾은 듯 보였다. 부종도 조절이 되었고, 간간이 반복되던 구역도 사라졌다. 주치 의사가 인공 신장 이식을 받았는지 물었고 허 형사는 그렇다 대답했다. 어디서 받았는지, 무엇을 이식 받았는지 의사는 캐묻지 않았고 허 형사도 말하지 않았다.아내의 당뇨가 나은 것은 아니었다. 인공 콩팥 이식으로 콩팥의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다른 합병증들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콩팥이 기능을 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다른 장기들 또한 기능이 좋았을 리 없었다. 심장과 뇌의 혈관들, 손과 발의 신경들에 합병증이 생겼다. 인공 심장과 인공 췌장 등의 이식을 받으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현이 말을 했지만 허 형사와 그의 아내는 더 이상의 수술을 원하지 않았다. 중고였음에도 인공 콩팥을 이식받는데 들어간 비용이 적지 않았다. 이미 그들의 삶은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다.인공 콩팥 이식 수술을 받은 지 삼 년이 되던 해 허 형사의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심혈관 합병증으로 인한 사망이었다. 투석을 시작하면 평균 잔여 수명이 십 년입니다. 십 년 안에는 결국 사망하거나 혹은 이식을 받아야 합니다. 아내를 납골당에 남겨 두고 돌아오며 허 형사는 주치 의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허 형사가 다시 우현의 자료를 찾아 꺼낸 것은 박 팀장이 한 말 때문이었다. 허 형사는 어느 정도 수사가 진행이 된 뒤 인공 장기 브로커들을 만나볼 생각이었지만 인공 장기관련 브로커를 먼저 만나보라는 박 팀장의 충고를 무시할 수 없었다. 일을 대강 하는 것처럼 보여도 박 팀장은 베테랑이었다.우현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아이고. 오랜만입니다. 어쩐 일이십니까? 우리 허 형사님이 전화를 다 주시고. 사모님은 좀 어떠십니까?우현은 허 형사의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굳이 허 형사가 우현에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 허 형사가 뭐라 대답할지 머뭇거리는 사이 우현이 말을 이었다.-요즘 심장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췌장은 조금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아직 상품이 많이 나오지 않은 탓에. 그래도 허 형사님 일이라면 제가 꼭 만들어 드려야지요. 사모님 일인데. 당연히 그래야지요.허 형사는 잠깐 망설이다 물었다.-폐는? 인공 폐도 나왔다던데. 혹시 물건 있어?헛기침을 몇 차례 한 후 우현이 대답했다.-사모님 일로 전화하신 게 아니네요. 폐는 무슨 이유로 찾으실까? 제가 의사는 아니지만 이쪽 계통에서 일한 지가 제법 되거든요. 폐하고 당뇨하고는 크게 관계가 없는데. 사모님이 담배를 피우시는 것도 아니고. 물건이 필요한 것이 아니시구나. 그냥 묻고 싶으신 거구나. 그걸 이렇게 돌려 물으시네.눈치가 빨랐다. 허 형사는 자신이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다른 뜻은 아니고. 사건을 하나 맡았는데 인공 폐 이야기가 나와서. 그저 궁금해서. 혹시 우현 씨가 들은 이야기가 있나 해서.-우현 씨는 무슨. 씨까지 붙이십니까? 그냥 우현이라 하면 됩니다. 저도 뉴스 정도는 보고 삽니다. 혹시 얼마 전 있었던 올더앤베러 최 회장 사건 말씀입니까? 허 형사님 담당 사건입니까? 그게 말입니다, 말하자면.허 형사가 우현의 말을 끊었다.-바로 아네? 올더앤베러 사건인 줄.-당연하지요. 업계에서는 벌써 이야기가 한 바퀴 돌았지요. 그 모델의 인공 폐 이식은 처음이었거든요. 작동을 잘할지 어떨지가 관심의 대상이었는데. 좀 허무하게 되었습니다.-우리 전화로 이러지 말고 잠깐 보는 건 어떨까? 잠시만 만났으면 하는데.우현이 대답했다.-만날 필요까지야. 저는 고객 아니면 만날 일 없습니다. 특히 형사하고는. 제 직업이 브로커인데 공권력과 만나고 다녀서야 되겠습니까? 대답부터 드릴게요. 저는 그 사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관계도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제 되었지요? 전화 그만 끊어야겠습니다. 사모님께도 안부 전해주시고요.-잠깐만.이미 전화가 끊긴 뒤였다.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만 갈 뿐 우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잠시 후 우현으로부터 문자가 왔다./김강 소설가

2022-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