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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그 길밖엔 없어 <Ⅰ>

-결국 인공 콩팥 시장의 최대 소비자는 노인들이니까요. 생체 시험이라는 것이 결국은 소비자와 비슷한 조건에서의 결과를 얻기 위한 것이거든요. 젊은 사람한테 인공 신장을 달았더니 부작용 없이 오래 살더라. 이런 결론은 당장은 의미가 없는 거지요. 그런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하는 시간도 길고. 지금 인공 장기회사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육십오 세 이상 혹은 칠십 세 이상 환자들에게 시술했더니 부작용도 없고, 효과도 좋고, 오래 살더라.’ 같은 결론이지요. 또 있습니다. 인공 콩팥 이식 수술을 받고 나서 치명적인 결과, 예를 들면 수술 받은 사람이 죽는다든지 하는 일이 생겨도 노인이면 다른 이유를 가져다 붙이기 편하잖아요. 나중에, 아주 나중에 시장이 포화되면 그때는 고개를 돌려 젊은 환자들도 쳐다보겠지만. 뭐, 세상이 그렇습니다.의사를 만나고 돌아온 허 형사는 컴퓨터에서 우현에 관한 자료를 찾아냈다. 우현은 허 형사가 조사했던 사건의 주범이었다. 인공 장기 회사에서 자사의 인공 장기를 사용해 달라 부탁하며 인공 장기 금액의 십오 퍼센트를 현금으로 의사에게 제공했던 사건이었다. 그 돈의 배분을 두고 의사들 사이에서 벌어진 폭행 사건을 조사하다 드러났다. 우현은 그 회사의 영업사원이었다. 우현의 단독 범행으로 사건은 종결되었다. 우현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전체 금액이 컸었다.허 형사가 우현에게 다시 전화를 했을 때는 우현이 실형을 살고 나온 뒤였다. 경찰에서 조사받는 동안 내가 제법 잘 대해 줬었지. 녀석이 혼자 뒤집어쓰려는 게 눈에 보였지. 우현이라면 아내의 인공 장기 이식에 대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허 형사의 전화를 받은 우현이 다음 날 허 형사를 만나러 왔다.-그렇지 않아도 언제 한 번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려 했었는데, 먼저 전화를 주시다니. 감사합니다.-좋은 일로 만났던 것도 아닌데. 내가 잘못한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렇게 찾아와줘서 고마워요.허 형사가 우현을 보며 말했다.-아닙니다, 아닙니다. 좋은 일, 나쁜 일이 어디 있습니까? 허 형사님과 저와의 인연이 있을 뿐이지요. 그것보다 사모님 몸이 좋지 않다 하셨지요.우현이 서둘러 말을 꺼냈다.-사모님이라 할 것까지는 없고. 집사람이 1형 당뇨 환자야. 그런데 콩팥 기능이 한계에 다다랐다 하더라고. 의사가.허 형사가 그동안의 일을 우현에게 이야기했다. 아내의 증상, 의사가 했던 말들, 선택할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 허 형사가 이야기하면 우현은 그렇지요, 아, 맞는 말씀입니다, 하고 맞장구를 치며 들었다. 허 형사가 하는 이야기를 끊지 않고 모두 들은 우현이 말했다.-전화 정말 잘하셨습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인공 장기 이식입니다.감옥에서 나온 뒤 우현은 인공 장기 거래 업체를 세웠다.-허 형사님도 짐작하고 있으시겠지만, 어디 그 일이 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참, 허 형사님을 믿으니까 드리는 말씀인데 지금 이거 사건 조사하시는 것 아니지요? 저를 다시 잡아가려는 건 아니겠지요?-오늘은 형사가 아니라 환자의 보호자로 상담하는 거야.허 형사가 답을 했다. 우현이 말을 이었다. 당시 회사에서 우현에게 내건 조건에 관한 이야기였다.-회사에서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저 혼자 뒤집어쓰는 것으로 사건이 종결되기를 원했습니다.우현은 그 대가로 무엇을 줄 수 있는지 회사에 물었다고 했다.-그랬더니 겨우 오 년 치 월급을 퇴직금 조로 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렇게는 못 한다고 했지요.우현이 요구한 것은 회사로 들어오는 중고 인공 장기의 거래를 독점할 수 있는 권리였다. 회사에서 수거한 중고 인공 장기를 아주 저렴한 가격에 인수해서 외국에 다시 되팔거나 국내에 공급할 수 있는 독점권을 달라는 것이었다. 회사와 우현은 십 년간의 독점권과 삼 년 치의 월급, 정상적인 퇴직금 지급으로 합의를 했고, 우현은 감옥으로 들어갔다. 감옥에서 나온 우현은 인공 장기 거래 업체를 세웠다.-중고?허 형사가 고개를 갸웃했다.-네. 누군가가 한 번 쓴 것이니까 중고지요. 하지만 기능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안전도 그렇고.우현은 입술을 삐쭉거리고 양쪽 어깻죽지를 들어보였다.-그래도 누가 한 번 쓴 건데. 다른 것도 아니고 몸에 들어갔다 나온 건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허 형사가 우현에게 다시 물었다.-네. 그렇다니까요. 세척을 하거든요. 세척을 하고 나면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세포 하나, 단백질 한 조각 남겨놓지 않거든요. 제가 이거 한 지가 올해로 만 오 년이 다 되어 갑니다. 문제가 있었으면 벌써 난리가 났겠지요. 저는 벌써 이 사업을 접었을 거고. 주로 중국 쪽으로 많이 넘어가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제품의 질이나 부작용 관련해서 컴플레인을 받아 본 적 없다니까요.우현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반복했다, 허 형사는 중국이니 그런 것 아니냐, 노인들한테 쓴 것이니 부작용이 생겨도 알지 못했던 것 아니냐며 물었다./김강 소설가

2022-07-11

올림퍼스의 노예들 <Ⅷ>

필립은 술을 잘 마셨다. 훨씬 젊은 노마와 대작을 하면서도 쉽게 취하지 않았다. 취해서 내뱉는 말인가 싶어 들어보면 앞뒤도 맞고 과하게 나가지도 않았다. 마치 준비해 두었던 말처럼 부드럽고 막힘이 없었다. 취기가 오른 노마가 필립을 형님이라 불렀다. 필립은 새엄마의 오빠니 노마는 외삼촌이고 자기는 조카가 아니냐며 농담을 했다. 그러고는 노마에게 술을 사라, 외삼촌이 술을 사야 한다 말하고는 껄껄 웃었다.-외삼촌, 하시는 일은 어떻습니까? 편합니까?-몸이 편하고 안 편하고는 중요한 게 아니지요.노마는 붉은 얼굴을 이리저리 흔들며 대답했다.-내가 조카, 아니 형님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요. 나이 든 사람들, 노인들 말이에요. 내가 나이 좀 먹었네 하는 사람들 모두 신 같아요. 신 알아요? 영원히 사는 것들. 올림퍼스 산 꼭대기에 있다가 내려 온 거죠. 아니지, 올림퍼스 산 전체를 땅으로 끌어내린. 그러면 나는 뭐냐? 신들을 먹여 살리는 노예죠. 죽어라 일하는 노예. 그 노예의 꿈이 뭔지 아세요? 신이 되는 거예요. 어렵지 않아요. 일찍 죽지만 않으면, 시간만 보내다 보면 저절로 나이가 들고 노인이 되고 신전에 들어가 있겠지요. 힘센 신이든 이름 없는 신이든. 형님이 들으면 기분 나쁠 수도 있는데, 하긴 오늘 내가 형님 기분 살피면서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실 얼마 전까지 형님의 아버지를 인조인간이라 불렀거든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형님의 아버지, 그러니까 최 회장님은 그저 단순한 인조인간이 아니에요. 신이죠. 힘이 아주 센. 아, 그걸 내가 이제 알았네요. 이제 알았어.노마는 혀가 꼬인 채 이야기했다. 술잔을 빙글빙글 돌렸고 테이블 밑으로 떨어뜨릴 뻔했던 술잔을 필립이 잡았다.-우리가 좀 많이 마셨지. 이제 일어날까? 더 마실까?-아니, 형님. 이제 시작이죠. 그런데 형님은? 형님은 뭐랄까? 아닌데? 신의 아들 느낌은 안 나는데. 형님은 뭐죠? 형님, 형님은 정체가 뭐예요?-나? 나 최만식의 아들 최필립이지. 힘도 없고 뭣도 없는 노예. 참, 그러면 내 친구 한 명 부를까? 술은 세 명이 먹어야 맛이 나거든. 불러도 되지?-친구요? 형님이 부르신다면 저야 뭐.-인호, 인호라고 있어. 국회의원 쫄따구이자 아들, 평생 쫄따구.다음날 안나가 노마에게 전화를 했다. 필립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무엇을 얻었는지 물었다. 노마는 필립이 좋은 사람이라 대답했고 안나는 그게 뭐냐며 화를 냈다. 노마는 다시 만나기로 했으니 그때 다짐받으면 된다고 안나를 달랬다. 안나는 노마의 말이 끝나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걱정 하지 마, 잘 될 거야. 내가 알아서 잘 할게. 오빠만 믿어. 노마는 안나에게 문자를 보냈다.허 형사는 이 사건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어떻게 끝이 나든 중요하지 않았다. 인공 장기의 ‘인공’이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이 년 전 세상을 떠난 아내가 생각났다. 허 형사의 아내는 당뇨병 환자였다. 인슐린을 분비하지 못하는 1형 당뇨.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녀가 그렇게 태어났을 뿐.허 형사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당뇨병 환자가 겪게 될 합병증들에 대해, 환자들의 가족이 감당해야 할 것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깟 당뇨병 따위야.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완치할 수 없다지만 인슐린 주사 맞으며 잘 관리하다 보면 완치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겠지. 개발되지 않아도 되고. 조금 불편할 뿐이지. 당뇨병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다.어느 날부터 아내의 몸이 붓기 시작했다. 가끔은 숨이 차다고도 했다. 발등부터 시작된 부종이 정강이까지 올라왔을 때 의사가 보호자를 찾았다.-콩팥 기능이 한계에 다다라갑니다. 투석이든 인공 콩팥이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생체 신장 이식을 받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요즘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늘어난 거지요.허 형사가 의사에게 물었다.-자기 콩팥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전혀 없나요?의사가 대답했다.-어차피 무슨 선택을 하든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미리 준비하시라 말씀드리는 겁니다. 옛날에는 자기 콩팥을 쓸 수 있을 때까지 쓰다가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다른 방법을 찾았지만 요즘은 트렌드가 바뀌었습니다. 인공 콩팥이 워낙 잘 나와서요. 가능한 빨리 하는 것이 다른 장기의 합병증을 예방한다는 보고도 있고.혈액 투석을 권하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였다.-일주일에 두세 번씩 병원을 방문하는 것, 쉽지 않는 일입니다. 게다가 환자의 심장이나 다른 혈관에 부담을 주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투석을 시작하면 평균적으로 십 년 뒤에는 결국 사망하거나 혹은 이식을 받아야 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을 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니까요.의사는 인공 콩팥 이식을 권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허 형사의 월급으로 감당할 수 없었다.-시술비나 인공 콩팥의 가격도 그리고 보험 여부도 제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서. 나이라도 많다면 인공 장기 회사에서 지원을 받거나 새로 나온 모델을 시험하는 조건으로 달아 보기라도 할 텐데.의사는 미안한 듯 말끝을 흐렸다.-병을 치료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김강 소설가

2022-07-04

올림퍼스의 노예들 <Ⅶ>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 최 회장의 아들이 오십 대의 중년이라 해도 할 이야기는 해야 하는 거니까. 안나의 오빠로 이 자리에 왔으니까. 노마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필립의 얼굴을 보았다. 노마가 말을 하려는 순간 필립이 손을 들었다. 카페의 종업원을 불렀고 주문을 했다. 그리고 먼저 입을 열었다.-말씀하시지요.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노마는 필립의 깍듯한 말투가 신경에 거슬렸다. 게다가 먼저 말을 꺼낼 기회를 빼앗긴 참이었다.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예. 얼마 전 늦은 밤에 안나가 전화를 해서는 아무 말 없이 울기만 하다 끊었습니다. 다음 날 이유를 캐물으니 아드님께서 안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셨다고. 회장님이 아드님께 한 이야기라 하던데.-그랬군요. 안나 씨가 그 이야기를 오빠에게 했군요. 마음이 많이 상했나 봅니다. 그럴 만하지요. 하지만 그런 뜻으로 전한 것은 아닙니다. 아버님이 그 말을 전하라 하신 것도 아니고.필립은 종업원이 가져다 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왼팔을 팔걸이에 올려둔 채 몸을 뒤로 기댔고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오른손으로는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습관인 듯 했다. 노마가 말을 할 때는 가만히 있던 손이 필립이 이야기할 때면 어느새 배에 가 있었다.-이 카페는 다즐링이 제일 맛있습니다. 다음에는 이것도 한 번 드셔보십시오. 어쨌거나 안나 씨 마음이 상했다면 유감입니다. 생각하시는 그런 뜻은 아니었으니까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막말로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그런 뜻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우리 집,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님의 뜻이 그러하니 안나 씨도 마음적으로 혹은 현실적으로 준비하시라 이런 이야기였지요. 아버지께 바라는 것이 있다면 지금 해 놓는 것이 좋다. 뭐 이런 충고의 뜻이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버지는 제가 안나 씨에게 그 이야기를 한 것을 모르십니다.-아니요. 두루뭉술하게 말 돌리지 마시고 정확히 회장님이 뭐라고 하신 겁니까?-정확하게라. 토씨 하나 빼지 않고 그대로 듣고 싶으십니까? 흠, 그러지요. 하지만 안나 씨에게 그대로 전하지는 마십시오. 좋지 않을 겁니다. 안나 씨에게 제가 말한 것은 수위를 조절한 것입니다. 들은 그대로 전하면 충격이 클 것 같아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아이이기는 하지만 내가 가진 것, 회사 그 어느 것도 손을 댈 수 없도록 하겠다. 걱정하거나 신경 쓰지 말거라. 안나는 그저 노리개일 뿐이다. 놀다 보니 아이가 생긴 것이고. 내게 저 모자는 딱 그만큼이다.필립은 노마가 글자 한 자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도록 천천히 이야기했다.-노리개라니, 그게 무슨 말? 이런 씨, 그게 말이, 말이.노마가 큰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를 둘러보다 옆에 있던 쿠션을 들어 빈 의자 위로 내동댕이쳤다. 카운터에서 주문을 하던 손님과 주문을 받던 카페 직원이 멈칫 했다. 잠시 노마와 필립을 보다 다시 주문을 했고 주문을 받았다.-아니, 제가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고 회장님, 아니 아버님이.필립은 노마의 두 팔을 잡아 당겨 앉혔고 바닥에 떨어진 쿠션을 들고 와 노마 옆에 놓았다.-그러니까요. 회장님 말입니다. 회장님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자기 아이를 가진 여자한테. 아드님께 할 말은 아니지만 본부인도 없는 판에 옛날 말로 안나가 첩도 아니고. 회장님 집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 안나도 귀하게 자란 아이입니다. 그리고 안나 인생에 대해서는 한 치의 고려도 없으신 것 아닙니까?노마는 필립의 콧등이 아주 잠깐 찌푸려지는 것을 보았다.-그러게요.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저의 아버지지만 너무 한 거죠. 이것 참. 그래서 안나 씨에게 넌지시 알려드린 겁니다. 인간적으로. 챙겨 놓을 것이 있으면 챙겨 놓으시라고.필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노마는 화를 내면서도 필립이 고마웠다.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솔직하고 진심 어린, 그리고 보기 드문 공정한 사람이라 확신했다.-우리 아버지는, 아버지는 저에게도 그런 분이십니다. 회장 아들이니 제가 사장 정도 될 것 같지요? 아닙니다. 이제 전무입니다. 전무가 어디냐 할 수도 있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공채 사원도 어느 정도 능력이 있으면 제 나이 정도에 될 수 있는 것이 전무입니다. 그래도 회장 아들인데, 나이 오십 둘에 전무가 뭡니까? 전무가. 솔직히 말해서 안나 씨 뱃속의 아이를, 제가 저 애는 내 동생이다 하고 마음먹고 뭔가를 해주고 싶어도, 뭔가를 약속하고 싶어도 아버지가 안 된다 하시면 못 하는 거지요. 저도 많이 안타깝습니다.노마는 필립이 불쌍해 보였다.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웠다. 누가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 건지. 누가 누구를 불쌍히 여겨야 하는 건지. 누가 누구를 위로해야 하는 건지.필립이 노마에게 술 한 잔 하지 않겠냐 물었다. 노마는 거절하지 않았다. 둘은 자리를 옮겼다.술잔을 앞에 두고 필립의 신세 한탄이 계속 이어졌다. 필립은 오른 손으로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어린 시절부터 형과 어머니가 죽은 이야기까지, 그리고 늙지만 죽지 않는 아버지 이야기까지 늘어놓았다. 노마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아이고, 정말요? 따위의 추임새를 넣으며 필립의 말을 들었다.-그래도 창업주 일가니 주식이라도 있을 것 같지요? 필요한 만큼, 딱 아버지가 필요한 만큼의 주식만 줍디다. 우호 지분 정도. 따라갈 수는 있으나 거스르지 못할 딱 그만큼./김강 소설가

2022-06-27

올림퍼스의 노예들 <Ⅵ>

물론 부모가 돈이 많으면 조금 편하기는 하겠지. 없는 부모를 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 하지만 그건 우리가 녀석들에게 주고 싶은 만큼만, 내려주는 만큼만이지. 내가 어느 정도 내려줄지 나도 알 수가 없지. 어쨌건 뭔가 위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건 옳은 자세가 아니잖아? 누군가 내려주기만을 바라는 것 말이지. 마치 당연한 듯 말이야. 쉽지 않겠지만 스스로 구해야지. 우리처럼. 그러다 또 안 되면 어때. 나이 들 때까지 버티면 되지.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명칭인데, 노년 기본 소득보다는 노년 기본 수당이 조금 더 마음에 들어. 기본 소득이라고 하면 뭔가 공짜로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야. 기본 수당, 이렇게 부르면 과거든 현재든 나의 공헌에 대한 대가, 당당하게 요구해도 되는 뭐 그런 것. 알잖아? 그런 기분.방송에서, 인터넷에서, 사람들의 대화에서 반복되고 덧붙여지고 재생산되는 이야기였다. 노마의 아비는 어디선가 누군가로부터 들었을 이야기를 자기 것인 양 했다. 당신이 만든 이야기가 아니지 않느냐 굳이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복습을 하듯 들었다. 자신들의 편안한 노후가 자신들의 과거로부터 전해진 것이라 믿었다. 이른 아침 길을 나선 아들과 딸이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아이들? 우리의 시절보다 훨씬 나은 시절을 사는 거지. 그렇지 않아? 그들은 그렇게 여겼다. 그들의 아비 어미가 살았던 세상보다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더 낫다고 굳게 믿는 것처럼.신이네, 신. 시동을 걸고 네비게이션 검색을 하던 노마가 중얼거렸다. ‘우리가 예전엔 혹은 우리도 예전에는’과 같은 탄생 신화를 가지고 ‘너희가 뭐라 해도’라는 힘으로 세상을 움직이며 ‘너희도 언젠가는’이라는 희망을 몸소 나타내는 신. 그리스 로마의 신과 차이가 있다면 이들은 그 수가 많았다. 전체 인구의 40%가 신이다. 나는 신전을 관리하는 시종 말단이거나 올리브 농장의 일꾼 정도 되겠네. 아니, 노예인가? 노마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끼익, 소리가 났다.노마는 최 회장의 아들을 만나면 먼저 화부터 내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최 회장 아들 정도 되는 사람의 눈에는 교양 없는 행동으로 보이겠지만 이럴 때는 무식하게 나가는 것이 더 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젊은 여자 배를 부르게 해 놓았으면 책임을 져야지. 뭐라고? 아이는 내 아이가 맞는데 결혼은 할 수 없다고? 그게 말이야? 노마는 소리를 지르고 삿대질을 하는 상상을 했다. 최 회장 아들이 얼굴을 붉히며 ‘일단 앉으시지요.’라든지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자리를 옮기시지요.’하며 어정쩡한 자세로 마주 선다면 더욱 기세를 올려도 된다. 내가 말이야. 회사 사옥 앞에서 일인 시위를 할 참인데 그 전에 통보라도 해주려고 보자 그랬어. 이렇게 말을 던지는 거다. ‘무슨 일인 시위까지.’하며 굳은 얼굴로 쳐다보겠지. 아니, 이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게 없나. 이게 일인 시위할 일이 아니면 뭐가 일인 시위할 일이야. 사람이 죽어 나가야 되는 거야? 찻잔을 집어 던지거나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쳐야 한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오면 안 된다. 이건 기선을 잡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화풀이를 하려고 만나는 것이 아니다. 화풀이가 목적이었으면 안나가 마이걸이 되었을 때, 최 회장의 아이를 가졌을 때 했어야 했다. 당당해야 한다. 노마는 정장이 아닌 작업복을 입고 나온 것이 잘한 선택이라 생각했다. 내 직업이 어때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노동자와 부자 아버지를 둔 금수저의 만남이 되는 거지. 게다가 그 부자 아버지는 노동자의 어린 여동생을 임신시켰고.-혹시 안나 씨 오빠?노마의 옆으로 한 중년 남자가 다가와 섰다.-네, 그런대요.고개를 돌린 노마가 처음 본 것은 검은 벨트의 황금색 H자 버클이었다. 회색 양복바지를 동여매고 있었다. 바지가 내려가지 않게 붙잡고 있는 것인지 아랫배가 쳐지지 않게 버텨주고 있는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무슨 일이 생기건, 언제 어느 때 건, 그게 무엇이든 꽉 붙잡고 있을 것은 분명했다. 작은 키와 삼각형의 상체. 노마는 최 회장의 아들이 대리인을 보냈다고 생각했다. 변호사를 보낸 건가? 이러면 버럭 하고 화를 낼 수 없다.-아드님이 직접 나오시는 줄 알았는데.‘아드님’이라니. ‘나오시는’이라니. 노마는 자신이 뱉은 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콧등과 이마를 찌푸리고 있는 노마에게 중년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처음 뵙겠습니다. 제가 최 회장 아들 최필립입니다. 기대했던 모습이 아닌 가 봅니다.-아, 아. 네에. 저는 아드님이라 해서 저보다 나이가 약간 많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짐작보다 연배가 훨씬 높아 보이셔서.노마는 화를 내지 못했다. 얼굴을 본 첫 순간부터 공격적으로 나갔어야 하는데, 상대방이 당황하게 만들었어야 하는데.-하하. 그렇군요. 저희 아버님 연세가 여든 일곱입니다. 저는 오십 둘이고. 제가 서른둘이면 되겠습니까? 이해가 되시지요? 하긴 안나 씨 뱃속에 있는 아이도 우리 아버지의 자식이니 아버지의 나이로 자식의 나이를 짐작할 수는 없겠군요.필립은 짧은 미소를 보인 후 테이블 위 놓인 노마의 찻잔을 들여다보았다./김강 소설가

2022-06-20

올림퍼스의 노예들 <Ⅴ>

/삽화 이건욱 -그래. 이 녀석이 말귀를 못 알아먹는 것 같아. 귀에 대고 소리를 높여야 겨우 움직인다니까. 신제품이라면서 귀는 내 귀하고 비슷해. 들리는 대도 못 들은 척하는 건지. 사람 자식처럼 말이야.가끔 있는 경우였다. 말의 패턴과 음성의 높낮이 등을 인식하고 구별하는 센서나 프로그램의 문제일 가능성이 높았다. 생산 공장에서 처음 설정해놓은 조건을 사용자에 맞게 바꾸지 않아 발생한 일일 수도 있었다. 설정이나 반응조건만 살짝 손을 대면 되겠지만 노마는 먼저 구조적인 이유가 있는지 살펴야 했다.-조금 시간이 걸리겠습니다. 저 신경 쓰지 마시고 다른 일, 하실 일 있으시면 일 보십시오.-그래도 집안에 누가 들어와 있는데 신경을 안 쓸 수가 있나. 나는 저 뒤 소파에 앉아 있을 테니 자네야말로 신경 쓰지 말고 일 보게.노마의 곁에 서 있던 노인은 거실 뒤 소파로 가 앉았다. 티브이를 켰다. 시사프로가 방영되고 있었다. 티브이의 음량이 높았다.-우리가 가진 것이라고 해야 건물 하나, 살고 있는 집 한 채 밖에 없는데 재산세를 올리는 것이 말이 돼?노인이 말했다. 노마는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네? 하고 대답을 했다. 곧 노인의 혼잣말임을 알았다.-결국 우리 같은 노인네들 돈 뺏어 가는 것밖에 더 돼? 우리가 젊어서 낸 세금이 얼만데. 차라리 소득세를 조금 더 올려야지. 그게 맞지.세금 관련된 주제의 방송이었다.-기사 양반은 어떻게 생각해?노인이 물었다. 노마는 대답을 하지도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로봇을 수리하느라 듣지 못한 척 로봇을 살폈다. 로봇은 구조적으로는 이상 없었다. 이상 없습니다, 당장 말하고 일어서도 되는 일이었지만 노마는 서두르지 않았다. 일찍 마친다고 일찍 퇴근하는 것은 아니다.-다음 선거에서는 무조건 노인들에게 혜택을 많이 주겠다는 당을 찍어야 해. 기사 양반도 언젠가는 늙을 것 아니야. 그때를 생각하면서 지금 잘 판단해야지. 길게 보고 표를 줘야 해. 노인들 표에다가 기사 양반 같은 젊은 표까지 합치면 안 될 일이 없지. 그렇지 않아? 하긴 젊은 사람들 표까지 필요하겠어? 노인들 표만 제대로 모여도 충분하지. 아무렴.노마가 자신의 이야기를 듣든 말든 노인은 상관하지 않고 이야기했다. 노마도 노인이 말을 하든 말든 자신의 일을 했다. 노마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노인도 흥이 나지 않는 듯했다. 한동안 티브이의 패널들 목소리만 울렸다. 가만히 있던 노인이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전화기를 찾아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노마는 노인의 통화가 끝나면 로봇의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방문 관리를 마칠 참이었다.이번 달까지 벌써 세 달째야. 곧 다음 달로 넘어가. 그러면 네 달째고. 이러면 안 되지. 월세를 많이 받는 것도 아니고, 오 년째 그대로인데. 날짜라도 지켜줘야지. 내가 참다 참다 전화하는 거야. 그래그래, 알아. 어렵지. 다 어렵지. 어렵지만 지킬 것은 지켜야지. 젊은 사람이 일 처리를 이렇게 하면 안 돼.노인의 전화가 끝나고 노마는 노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구조적으로는 이상 없다는 이야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로봇이 노인의 말투와 음성의 크기, 발음의 특성 등을 학습해서 명령을 정확하게 수행하게 된다는 이야기, 그 시간을 기다릴 수 있으면 그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설명을 했다. 혹시 기다릴 여유가 없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노인에게 맞게 약간 수정해 드릴 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무슨 말이야? 조금 쉽게 설명을 해 봐.-한 달 정도 이 로봇과 꾸준히 대화를 하시면 로봇이 저절로 어르신 말을 알아듣게 됩니다.-그러면 내가 이 녀석을 가르치는 거잖아. 로봇 회사는 아무것도 안 하는 거네.-잘 배우는 로봇을 만들어 드린 거지요.노마는 신발을 신은 뒤 노인에게 인사를 했다. 노인이 노마에게 물었다.-내가 다음 주부터 한 달간 제주도에 가 있을 건데 저 로봇 그냥 두어도 되는 거지? 지난번 로봇은 그냥 두어도 알아서 잘하던데. 이번 것도 그렇겠지?노마는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다 문득 아비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집에서, 바깥에서 대화의 소재가 떨어지면 아비가 습관처럼 꺼내는 이야기였다. 복지회관에서 만난 노인들과 공원이든 찻집이든 앉아 시간을 보내는 중에도 빠지지 않고 꺼내들었다.지금까지 이런 세상은 없었단 말이지. 다 같이 놀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열심히 일한 자 이제 쉬어도 된다는 거지. 그 녀석들 말대로 전 국민 기본 소득으로 했어 봐.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놀자 판이 되었을 거잖아. 젊었을 때는 열심히 일해야지. 그래야 노년을 즐길 자격이 생기는 거야.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지. 젊어서 고생했다고 편안한 노후를 보장해준 때가 있었나? 고생한다고 돈이 벌어지나? 지금은 젊었을 때 돈을 벌어 놓지 못해도 누구나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게 해주니 얼마나 좋아. 부모가 돈을 많이 벌어 놓지 않았다고 원망하는 그런 자식들 있지? 웃긴 짬뽕들이지. 요즘 같은 세상에 부모가 돈이 좀 있다 해서 그게 자기들 것이 될 것 같아. 내가, 자네가 언제 죽을 줄 알아서. 다 내 것이지./김강 소설가

2022-06-13

올림퍼스의 노예들 <Ⅳ>

노마는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소리 지르지 마. 창피하게.안나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노마에게 작게 말하라 시늉을 했다. 노마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쓸데없는 말 말고 제대로 말해봐. 너는 뭐라고 대답했는데?-그 사람이 나한테 직접 말한 것은 아니고 그 사람이 그 사람 아들에게 그렇게 약속했대. 그 사람 아들이 내게 이야기해줬어.-뭐라고? 그러면 회장 아들이 협박을 한 거야? 이거, 이거 딱 그림이 그려지네.안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야. 그런 게 아니고, 알고 있어라 내게 귀띔을 해 준거야. 알아서 살 궁리를 하라 말해준다는 느낌이었어. 갑자기 당하고 나서 놀라지 말라는 그런 뉘앙스. 그리고 그 사람 아들 그 사람과 안 친해. 부자지간인데 잘 보면 무슨 원수 같아.-안 친하기는 뭘 안 친해.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도 부자지간이지. 가족끼리 싸우다가도 제삼자 앞에서는 달라지는 게 사람이야. 네가 아직 순진해서 잘 모르는 거야. 이것들이 교묘하게 말이야.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순진한 사람을 가지고 놀려고 하네. 그 자식이 뭣 하러 널 위해 그런 것을 말해주겠냐? 혹시나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시끄럽게 하지 말라. 그거잖아.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거지. 이런 나쁜 놈. 너, 그 자식 전화번호 알지? 전화번호 내게 보내. 내가 한 번 만나야겠어.안나는 그 자식이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다시 물었고 노마는 인조인간 말고 인조인간의 아들을 말한 것이라 대답했다.-만나서 뭐라 할 건데?-걱정하지 마. 무턱대고 싸우지는 않을 테니까. 정확한 뜻과 의도를 확인해야지. 그 쪽에서 뭘 줄 수 있는지 확인도 하고 다짐도 받아야지. 지금까지는 그냥 있었는데 안 되겠어.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야겠어. 넌 모른 척하고 가만있어. 전화번호나 보내.노마는 자신을 바라보는 안나의 눈길, 여동생이 보내는 신뢰와 감사의 눈빛에 마음이 약간 누그러졌다. 화제를 돌렸다.-참, 인조인간 수술이 언제라고 했지? 벌써 병원도 다 정하고 그랬나?-아직 날을 정하지는 않았어. 출시 예정인 신제품이 있는데 그걸 기다리고 있대. 왜? 꽃이라도 보내시게?-꽃 같은 소리 하기는. 위험한 수술은 아닌 거지?-갑자기 걱정을 해주고 그래? 인조인간 어쩌고 하더니.-어찌 되었던 조카의 아버지가 될 사람이니 건강해야 하잖아. 의료사고 같은 것 생겨서도 안 되고. 혹시 너, 우현이 기억나? 내 친구. 우리 집에도 제법 놀러 왔었잖아. 같이 영화도 보러 가고 그랬는데.-기억하지. 그런데 왜?-그 녀석이 인공 장기 관련 사업을 하거든. 인조인간이 수술을 받는다기에 그 녀석 생각이 잠깐 났어. 그 녀석을 도와줄까 하고. 안 되겠지? 인조인간은 정품으로 들어온 최고급만 쓰겠지?-우현 오빠한테 내 이야기 한 거야? 오빠가 말한 거야? 여동생이 마이걸이 되었다고. 미쳤어?안나가 발끈했다. 노마는 손사래를 쳤다.-아니야, 아니야. 설마 내가. 그냥 한 번 해본 생각이야. 정말이야. 그 녀석은 아무것도 몰라.-절대로 말하면 안 돼. 그런 일 생기면 오빠하고 나 사이는 끝이야. 그리고 아무튼. 돈이 문제가 아니야. 이번에 이식받으려는 것은 인공 폐인데 신제품이야. 중고가 없어. 다른 곳에서는 구할 수도 없고. 그리고 오빠는, 오빠 조카의 아빠가 되는 사람 수술인데 중고를 권하려 했단 말이야?안나는 자신이 마이걸이 된 것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노마를 다그쳤고 노마는 이전에도, 앞으로도 그런 일 없을 것이라 다짐했다. 노마는 문득 궁금했다.-안나, 너 우현이 중고를 취급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나는 중고라고 말한 적 없는데.안나는 예전에 노마가 이야기해준 적 있다며 벌써 깜빡깜빡하는 것이냐 놀렸다.그날 노마가 맡은 곳은 스무 군데였다. 점심시간을 포기하고 안나를 만났었다. 오전에 일곱 집을 돌았으니 오후에 열세 곳을 방문해야 했다. 오후 첫 방문 수리는 카페 근처의 아파트였다. 현관 벨을 누르고 한참을 기다렸다. 노인의 발걸음이다. 모니터로 노마를 확인하고 현관까지 걸어오는데 제법 시간이 걸린다. 방 안에 있었다면 더할 것이다. 노마는 기다리는데 익숙했다. 문이 열렸고 노마가 현관으로 들어섰다. 현관 입구에 서 있던 노인이 노마를 아래위로 살폈다.-기사 양반 기다리느라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노마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았다. 약속한 시간보다 십오 분 정도 빠른 방문이었다.-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일단 로봇부터 보겠습니다.노인은 노마를 가정용 로봇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로봇은 거실 한쪽에 세워져 있었다. 최근 출시된 신제품이었다.-바꾸신 지 얼마 안 되었군요.노인은 그걸 어떻게 아느냐 감탄을 했다.-제 일인데요. 어르신이 접수하실 때 말씀주시기도 했고요. 신제품은 원래 고장이 잦습니다. 다음부터는 신제품이 출시된 후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교체하십시오. 그래야 생산과정이나 개발과정에서 놓친, 뒤늦게 발견된 오류 같은 것들이 교정된 제품을 쓰실 수 있을 겁니다.노마가 로봇을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로봇의 골격이나 외관에는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어르신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 하셨지요? /김강 소설가

2022-06-06

올림퍼스의 노예들 <Ⅲ>

노마는 아비의 인생이 부러웠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고 ‘언젠가’에 뛰어들어 본, 그럼에도 아이들은 알아서 컸고 아내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다달이 나오는 노년 기본 소득의 혜택으로 버티어 온 아비의 인생이 진정한 삶이라 여겼다.노인이 아닌 모든 세대가 합심하여 그의 여생을 등에 지고 어깨에 메어 줄 것이다. 물론 아비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 먹을 수 있을 때까지는 열심히 먹어야 한다. 입을 수 있을 때까지는 열심히 입어야 하고 나다닐 수 있을 때까지는 열심히 나다녀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돌아가고 세상이 돌아가야 돈이 생기고 돈이 생겨야 아비를 업을 수 있으니까.하지만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 아비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살 테니까. 그런 사람이니까. 그게 사람이니까.그에 비하면 노마, 자신의 인생은 보잘 것 없었다. 예정대로라면 앞으로도 한동안 보잘 것 없을 인생이었다. 유망한 직업이라 해서 로봇공학을 전공했지만 유망한 직업은 그들, 세상의 방향을 정하고 세상을 움직이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직업을 뜻했다.떠오르는 산업이라 누군가 말했지만 그것은 그 누군가에게 돈이 되는 산업이라는 말이었다. 누군가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에게 돈이 되는 산업이라 말한 적 한 번도 없었다. 진실을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진실은 누가 말해주는 것이 아니니까. 진실을 들여다보지 못한 자,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학점 평점 3.9로 로봇공학과를 졸업한 노마의 직업은 로봇관리사였다. 로봇을 렌탈해서 사용하고 있는 가정을 정기적, 부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관리하고 잔 고장을 수리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열에 아홉은 노인들만 사는 집이거나 노인들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노마의 집에도 가정용 로봇이 하나 있었다. 안나의 아비 앞으로 지급된 로봇 보조금 덕분이었다. 노마의 급여는 입고 먹고 마시고 그리고 세금을 내기에 딱 적당했다.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독립할 여유는 없었다.노마는 결혼을 하더라도 노마 쪽이든 배우자 쪽이든 부모님과 함께 지낼 생각이었다. 동거하는 가족 중 노인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받을 수 있는 혜택이 많았다.자식들은 어떻게든 노인이 된 부모와 함께 있으려 했고 노인이 된 부모들은 자식들과 같은 집에 살아주는 것을 그들이 자식들에게 줄 수 있는 큰 선물 중 하나라 여겼다. 선물은 주는 사람 마음에 달렸다.결혼도 쉬운 과제는 아니다. 노마가 만났던 상대들은 노마와 연애는 하더라도 결혼을 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결혼이라는 이름을 씌운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었다. 같이 일어나 일하러 나가고 돌아와서는 몸을 섞는 그런 하루의 연속일 텐데. 그 이상의 것들, 늦은 아침에 일어나 발코니의 창을 열고 시원한 바람을 느끼는 것, 허리를 감싸 안은 그 사람의 손과 팔에서 방금 내린 커피향이 나는 것, 아이가 깰까봐 까치발을 하고 방으로 들어가 여행 가방을 싸는 것, 휴가지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아이와 함께 창밖을 바라보는 것, 하루 대 여섯 시간의 노동으로 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없다면 굳이 결혼할 이유가 없었다. 아이를 가지는 것은 더더욱.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 노마는 진정한 사랑이라 믿었던 한 여자에게 청혼을 했다. 노마가 출장 나갔던 어느 노인 부부의 집에서 만난 노인성 질환 관리사였다. 그 여자가 대답했다.-너랑? 왜?-그래서? 넌 왜 울었는데? 인조인간이 뭐라 했어?-그렇게 부르지 말라 했잖아.-인조인간 맞잖아. 인조인간 맞지. 내려놓을 때가 되면 내려놓기도 해야 하고 갈 때가 되면 갈 줄도 알아야지. 사람이 말이야. 그 모든 것 붙잡고, 그것도 모자라 손가락에 걸리는 모든 것들을 움켜쥐는 거잖아. 그건 됐고. 그래, 인조인간이 뭐래?노마는 안나가 만식의 집으로 들어갈 때부터 만식을 인조인간이라 불렀다. 아이의 아빠이니 그렇게 부르지 말라 안나가 부탁했지만 노마는 들은 척 만 척이었다.-결혼식도, 혼인 신고도 할 생각이 없데. 아이는 자기 아이라 인정하겠지만 그 이상을 바라지는 말래. 결혼식이니 혼인 신고니 하는 것들을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막상 그 말을 듣고 나니 속상한 거야. 속으로는 기대를 했었나 봐. 섭섭하고 서러워지고. 그래서, 그래서 오빠한테 전화를 했지.안나는 천천히 한 마디씩 간격을 두어가며 말했다. 전날 울었던 탓인지 의외로 담담했다.-뭐? 그게 무슨 말이야? 전 마누라도 죽고 없다면서. 자기 자식까지 가졌으면 당연히 부인으로 인정해줘야지. 새파랗게 어린 여자를 데리고 가면서 결혼식도 안 한다고? 누가 동네방네 소문을 내래? 양가 가족들만이라도 불러서, 조용하게라도 말이야. 당신들의 딸이, 너의 여동생이 팔려 가는 것 아니라고. 강제로 끌려가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너를 사랑해서 데려간다고, 같이 살고 싶어서 그런다고 위로 아닌 위로라도 해줘야 하는 거잖아. 그게 우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아니야? 넌?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김강 소설가

2022-05-30

올림퍼스의 노예들 &lt;Ⅱ&gt;

아비의 말을 어미가 가로막았다.-당신은 그런 허풍 좀 떨지 말아요. 당신이 그만한 돈이 있은 적 있어요? 돈은 쥐꼬리만큼 밖에 없는 사람이 일만 크게 벌여서는. 그거 감당한다고 당신은 몸으로 때우고 우리는 안 입고 안 먹어서 때우고.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지. 그건 그렇고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건데요?아비는 어미를 슬쩍 쳐다보고는 안나의 부은 손 등에 왼손을 얹었다.-안나 네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은 아니다. 사는데 정답이 있나. 네 인생이 이렇게 흘러가는 건가 보다. 그 정도 되는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너를 그리 대하지는 않았겠지. 자기 관리도 잘할 것이고. 부인과 사별하고 혼자 있으니 바람을 피우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어떤 방식이든 네 인생에 도움이 되겠지. 최 회장 정도 되면 꼬리치는 여자도 많았을 테고 어떤 여자든 만날 수 있을 텐데, 그게 너라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어쨌든 잘 모셔라.-지금 아버지가 되어서 딸에게 할 소리에요?어미가 아비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아비는 안나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덕분에 우리 집 형편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그건 정말 아니야. 나나 너의 엄마나 지금이 딱 좋다. 모자란 것도 더 가지고 싶은 것도 없다. 그저 너의 인생이 조금 더 나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너의 오빠가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으면 더 좋을 것이고.아비가 말을 덧붙였고 안나는 손등에서 아비의 손을 들어 내렸다. 어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이 양반아, 가슴에 손을 얹고 이야기하소. 아이고, 이 미친 것아, 어디 할 일이 없어서.어미는 안나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지만 안나는 꼿꼿이 앉아있었다. 안나가 몸을 세워 버틴 탓이기도 했지만 어깨를 잡은 엄마의 힘 또한 밥주걱으로 손 등을 내리치던 그 힘이 아니었다. 아비가 안나의 손 등에 다시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안나야, 뭐라 말을 해 보거라, 네가 무슨 잘못을 한 것은 아니라니까.노마는 안나의 뺨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우리 집 왜 이래요? 아빠가 그렇게 말하면 제가 고마워요, 하고 말할 줄 알았어요? 저 친딸 아니에요? 제가 부자 늙은이의 마이걸이 되어서 우리 집에 뭘 가져오면 되는 건데요? 지금 미리 말하세요.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고.노마는 안나가 왜 우는지 궁금했다. 아비가 손바닥으로 안나의 뺨을 올려붙였으면 안나는 웃었을까? 노마는 안나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딸을 부자 늙은이에게 팔아넘겨야 할 정도로 집안 형편이 힘든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안나가 마이걸이 된 것은 아니라 믿었다. 그럴 안나도 아니었다.다음 날 어미가 안나를 불렀다.-이왕 그렇게 살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잘해라. 네가 생각하는 그런 뜻으로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고.안나는 어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성실한 노동이 정당한 결과와 함께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던 안나의 아비는 ‘언젠가’에 가족들의 미래를 걸었다. 언젠가 개발될 것들, 언젠가 이용될 것들, 그리고 언젠가 대박이 날 것들을 찾아다녔다. ‘지금 당장 여기’가 중요하다고 가족들이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지금 당장 조금의 이익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처럼 살아간다면 원하는 미래는 오지 않아. 다른 사람과 똑같은 미래를 가질 뿐이지. 우리는 달라야 해. 안나의 아비는 고집했다. 아비는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들고 ‘언젠가’를 쫓아다녔다. 심해의 광물 자원 개발, 성층권에서의 태양광 개발, 아프리카의 부동산 개발 등. 아비가 가진 재산은 ‘언젠가’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다. 투자자들의 모임 어느 한 구석에라도 앉을 수 있으면 감사한 일이었다. ‘언젠가’는 번번이 아비를 배신했다. ‘언젠가’로부터 배신을 당했다는 것을 아비가 깨닫게 될 즈음 그의 호주머니에 남아있는 것은 없었다.‘지금 당장 여기’의 세계로 돌아온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이 참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언가를 가지겠다, 무언가를 이루겠다, 무언가를 물려주겠다를 버리니 마음도 몸도 편안해졌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탐하지 않는 한 다달이 들어오는 노년 기본 소득이면 충분했다. 이게 말이야. 투자한다고 돌아다닐 때는 푼돈처럼 보였는데 말이야. 나쁘지 않아. 아주 요긴해. 좋은 제도야. ‘언젠가’를 찾아 돌아다니지만 않는다면 개인용 차량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언제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공공교통수단들이 도처에 있었다. 그것도 공짜로.나이가 곧 돈이었다. 괜한 욕심을 내었어. 이렇게 편한 세상을 그저 살기만 하면 될 것을. 안나의 어미가 법적으로 노인이 되는 해를 손꼽아 기다릴 뿐이었다./ 김강 소설가

2022-05-23

올림퍼스의 노예들 &lt;Ⅰ&gt;

노마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육아도서를 집어 들었다. 엄지손가락으로 책 모서리를 훑었다. 한 장 한 장 넘어가는 종이의 부드러운 감촉이 손가락 끝으로 전해졌다.-몸은, 음, 좋지 않지. 무거워. 우리 엄마는 어떻게 두 번이나 애를 낳을 생각을 했을까? 한 번도 이렇게 힘든데. 쌍둥이가 아니라서 천만다행이지 뭐야. 쌍둥이 가진 임산부들 정말 존경해야 해. 아기는 잘 자라고 있대. 그런데 뭔지 말을 안 해주네.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없지만.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건데. 먹고 싶은 거? 정말 많지. 많은데, 그 많은 것들 다 먹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입덧도 없다는 말이지. 나, 다 대답한 것 맞지?-그 늙은이가 잘해주는 거지? 네가 말하는 것을 보니 잘해주나 보네.-돈의 힘이지. 이것 봐라. 나 반지 받았다. 이거 다이아다. 요 며칠 우울해서 눈물샘을 살짝 비워줬지. 그걸 보더니 그 사람이 사줬다.안나는 노마 쪽으로 왼손을 내밀어 흔들었다.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카페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상상했던 것보다 안나는 훨씬 더 밝아 보였다. 괜한 걱정을 했나?-그 사람? 그 사람이라. 돈이 좋기는 좋네. 다이아만 사는 게 아니라 네 맘도 샀네. 그건 그렇고 이게 뭐야? 이렇게 밝아도 되는 거야? 엊저녁에는 사람을 그렇게 걱정시키더니. 지금 이 모습? 조울증이야? 아이를 가지면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더니. 그런 거야? 전화 받은 누구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는데 전화 한 누구는 마음 편하게 푹 잔 얼굴이네. 울상을 보는 것보다는 낫지만. 이러면 오빠가 허탈하잖아.안나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왼손을 접어 거둬들이며 말했다.-동생이 오빠 붙잡고 좀 울었기로서니 그걸 조울증이라 그러냐? 그러면 내가 누구 붙잡고 울까? 엄마? 아빠? 가당키나 해?노마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고개를 끄덕이다 툭 하고 내뱉었다.-하긴.안나가 만식의 마이걸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안나의 아비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집안을 서성이다 밖으로 나갔다. 안나의 어미는 이불을 깔고 돌아누웠다. 안나가 엄마, 하고 불렀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고, 아이고. 들릴 듯 말 듯 신음 소리만 방 안을 채웠다.저녁 무렵 밖으로 나갔던 안나의 아비가 돌아왔다.-저녁 안 먹을 거야? 모처럼 애들도 다 있는데.-당신은 지금 밥 생각이 나요?안나의 어미가 누운 채 고개를 돌려 아비를 보았다.-이미 벌어진 일인 것을. 우리가 이런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일단 밥이라도 먹으면서 이야기합시다. 듣기도 하고.아비는 어미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앉혔다. 어미는 주방으로 가 저녁을 준비했다. 안나가 어미를 도우려 주방에 들어갔다. 말없는 어미 옆에서 멋쩍게 서 있다 싱크대 옆 수저통에서 수저를 꺼내 짝을 맞췄다. 밥통에서 밥을 퍼 그릇에 담던 어미가 갑자기 밥주걱으로 안나의 손 등을 내리쳤다.-손 대지마. 이년아. 저리 가. 오늘 저녁이 이 집에서 먹는 마지막 밥인 줄 알아.안나는 오른손 등이 부어 수저를 쥘 수 없었다. 왼손으로 숟가락을 들어 밥을 먹었다. 손은 왜 그래? 아비가 물었지만 안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노마는 밥그릇과 싸움이라도 하듯 씩씩거리며 밥을 퍼먹었고 어미는 밥이 목구멍을 넘어가지 않는다며 물을 부어 말아 먹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갈 무렵 아비가 물었다.-최만식이라고 했나?-네.-우리가 아는 올더앤베러 회장 최만식이 맞냐?-네, 맞아요.-부자지?-네?마주보기 싫어 고개를 숙이거나 핸드폰을 뒤적이던 노마와 어미, 그리고 안나까지 아비를 보았다.-나이가 좀 많기는 하지만 나쁜 일을 해서 돈을 번 사람은 아니라 들었다.-그게 좀 많은 나이에요?어미가 끼어들었지만 아비는 말을 이었다.-우리 같은 노인들을 위해 물건을 만든다 하더라. 아마 좀 전까지 당신이 깔고 누워있던 찜질패드도 그 회사에서 만든 것이지 싶은데. 늙은 것이 죄는 아니지. 아무렴, 절대. 부인과는 사별했고 지금은 혼자고. 아들이 하나 있기는 한데 회사나 집안에서 힘을 쓰지는 못한다네. 최 회장이 좀처럼 일을 내려주지 않는다 하더라고. 게다가 최 회장이 그렇게 건강하단다. 건강 하나는 타고 났다는데, 사람들 말로는.-당신이 그런 것을 어떻게 알아요?어미가 물었다.-사람들에게 물어봤지. 예전에 같이 동업하던 박 사장, 채 사장, 김 실장한테. 그 사람들은 아직 현직에 있으니까 아는 게 있을 것 같아서. 들어보니 최 회장이 나하고 동업을 할 뻔한 적 있었더라고. 당신 기억나? 그, 왜, 있잖아, 백두산에 지열발전소 지어서 중국, 북한에 전기를 팔아보려고 했던 사업 말이야. 거기에 최 회장이 투자하는 것을 검토했었데. 최 회장이 결론 내리기 전 사업이 뭉개졌고. 그랬지. 거, 참. 괜찮은 아이템이었는데./ 김강 소설가

2022-05-16

마이걸 &lt;Ⅲ&gt;

안나는 사랑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의 사랑이라 말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만식의 기분을 고려한 것이었다. 만식도 알고 있겠지. 그렇다고 미워하거나, 일부러 말을 꺼내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라 할 수 있는 감정도 아니었다. 그것을 사랑이라 말할 수 없을 뿐이었다. 만식은 안나에게서 안나는 만식에게서 서로 필요한 것을 얻었다.-짓궂으시네요. 이 상황에서 대답 안 하면 사랑하지 않는 게 되잖아요. 우리 아이의 아빠고, 저를 엄마로 만들어 주신 분이에요. 제게는 소중한 분이십니다. 저는 그분의 아이를 가졌어요.필립이 웃었다. 안나는 웃음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사랑 따위에 대한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말씀을 들어보니 아버지가 안나 씨를 사랑하는 것은 맞나 보네요. 아버지가 안나 씨에게 아이를 낳아달라고 하셨으니. 하하. 농담입니다. 결혼식은? 혼인 신고는 어떻게 하신 답니까?결혼식? 혼인 신고? 이게 궁금했던 건가? 만식이 결혼식이나 혼인 신고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 없었다. 안나도 마찬가지.-아마도 이야기 꺼내지 않으셨을 겁니다. 아버지의 아이를 가지는 것과 아버지의 부인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지요. 그 문제에 대해서만은 아버지도 생각이 많을 겁니다. 얽혀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지요. 사실 지난 번 인공 폐 이식을 할 것이라고 제게 말씀하셨던 그 다음날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아버지께서 부르셨지요. 그 자리에서 아버지께서 제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 젊은 여자를 너의 새엄마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결혼식은 물론이고 혼인 신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젊은 여자가 언제까지 내 곁에 있을지, 내가 언제까지 그 여자를 내 곁에 둘지 알 수 없지 않느냐. 하지만 뱃속의 아이는 다르다. 그 아이는 나의 아이이며 너의 동생이다. 그러니 더 이상 이 문제로 시끄러운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해하실까봐 말씀드리는 건데 아버지께서 하신 약속은 제가 요구한 것 아닙니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꺼내신 약속입니다.치즈의 비린 맛이 속에서 입으로 올라왔다. 안나는 휴지를 들어 침을 뱉어내었고 입술을 닦았다. 만식으로부터 들은 적 없는 이야기였다. 안나는 만식이 자신을 무척 아낀다 생각했었다. 아니었나? 안나는 자신을 바라보던 만식의 눈길을 떠올렸다.아이를 가지지 않았다면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겠지만, 돌이킬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의 엄마로 살아야 한다. 안나는 뱃속의 아이를 아빠 없는 아이로 키우고 싶지 않았다. 구십 살이 다 되어가는 아빠일지라도.-그렇군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잘 알겠습니다.필립이 치즈 케이크를 더 드시라 권했다.-맛이 비려요.안나는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옆으로 밀었다.-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단지 안나 씨에게 스스로의 인생을 생각할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선의로. 그리고 남자 형제가 한 명 있던데. 이름이 ‘노마’던가요?안나는 필립이 오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았다. 뒷조사를 했을 수도 있고. 그랬다 하더라도 따질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만식이 필립에게 했다는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네. 하나 있는 오빠지요. 로봇 관리사예요. 지금은 보잘 것 없어도 학교 다닐 때는 제법 수재 소리를 들었어요. 몇몇 공모전에 나가서 상도 탔구요.-아. 네. 그렇더군요. 사이보그와 인간형 로봇이 주 전공이었더군요. 공부도 꽤 했던데. 요즘 젊은 사람들 삶이 다 그렇지요.지난밤 안나가 울었다. 왜 그러냐. 노마가 다그쳤지만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흐느끼다 입을 열었다. 오빠, 밤늦게 미안해. 그러고는 전화를 끊었다. 노마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 노마는 안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굴 좀 보자, 오랜만에.카페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는 안나의 배가 제법 불러 보였다. 저것이, 뭐가 아쉬워서. 노마는 안나의 선택에 동의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노마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안나 뱃속에는 이미 늙은이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고 그 아이는 안나가 원한 아이이기도 했다. 노마가 테이블 맞은편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자 안나는 허리를 세워 앉았다.-왔어? 오빠, 오랜만이네.노마는 손을 내저었다.-아니야. 그대로 기대고 있어. 우리 사이에 무슨 예의야. 네 몸 편한 대로 앉아있어. 몸은 좀 어때? 아이는 잘 크고 있대? 먹고 싶은 것은 없어? 입덧은 안 하고?-그렇게 많은 걸 한꺼번에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안나는 등 뒤로 쿠션 두 개를 받히고 다시 기대며 말했다.-그런가? 뭐, 대답은 한꺼번에 하지 않아도 돼. / 김강 소설가

2022-05-09

마이걸 &lt;Ⅱ&gt;

-우리 둘 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어요. 이이에게 너무 뭐라 하지 마세요.만식이 안나의 손등을 토닥였다.-우리? 이이? 허, 참. 저는 갑니다. 알아서들 하시고. 그런데 아가씨, 뱃속의 아기가 저의 동생이라는 것은 확실한 겁니까?안나는 필립의 말에 화를 내지 않았다. 만식의 손을 자신의 배에 가져다 대며 빙긋이 웃었다.-누구든 상상할 수 있는 일이지요. 하지만 그걸 증명하겠다며 나서고 싶지는 않아요. 제 뱃속의 아기는 우리가 함께 만들어낸 생명이 분명하니까요. 손끝으로 만식의 눈가 주름 결을 어루만지며 안나가 덧붙여 말했다.-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아이의 엄마는 알아요.만식의 며느리가 다른 친지들과 함께 찾아와 무슨 말이든, 무슨 짓이든 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필립도 그날 이후 안나의 임신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안나는 만식의 힘이라 여겼다. 안나는 뱃속의 아이에게 ‘증거’라는 태명을 붙였다. 만식이 무슨 증거냐 물었다. 안나는 배를 내려 보며 대답했다.-우리의 사랑, 당신의 건강, 그리고 당신이 가진 힘.당신이라, 사랑이라, 나쁘지 않군. 만식은 안나의 볼을 쓰다듬었다.인공 폐 이식을 받겠다 만식이 필립에게 통보한, 문을 나서는 필립에게 핸드폰을 던진 그날로부터 한 달이 지났을 때 안나와 필립이 만났다. 필립이 먼저 안나에게 연락을 했다. 안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뭐라 이야기하든 흘려들을 거야, 마음먹었다. 만식은 강했고, 만식 앞에서 필립은 둘째 아들에 불과했다. 필립이 안나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든 그것은 단순한 협박일 뿐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라 여겼다.필립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안나는 마주 앉은 필립의 눈가에서 깊은 주름을 보았다. 그도 늙는 중이었다. 많이 닮았네. 늙는 것까지. 하긴, 그의 아들이니까. 내 뱃속의 아이도 그렇겠지. 그래야 해. 아니, 똑같아야 해.-일전에는 제가 말이 좀 지나쳤습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에게 화가 나기도 했고, 섭섭하기도 했던 거지요.부드러웠다. 만식의 목소리가 단호함이 배어 있는 저음이라면 필립의 목소리는 완곡함, 이해, 배려 이런 것들이 섞여 있는 저음이었다.-아니에요. 충분히 그러실 수 있지요. 제게도 많이 화나셨을 거예요. 저라도 그랬을 걸요.안나는 필립이 안쓰럽기도 했다. 만식의 옆에서 보고 들은 상황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보고를 하거나 결재를 받기 위해 만식의 집으로 찾아온 직원이 간혹 필립의 의견을 전하거나 필립이 이렇게 지시했다 이야기하면 만식은 크게 화를 냈다. 이 회사가 누구 것인데 그 녀석의 의견을 묻느냐? 내가 그 녀석에게 지시할 권한을 주었느냐? 너는 누구의 직원이냐? 대답 한 마디 하지 못한 직원은 만식의 서재 한구석에서 진땀을 흘리다 돌아갔다. 만식이 먼저 물어보지 않는 한, 경영에 관한 필립의 의견을 만식에게 전하지 않는 것이 올더앤베러의 불문율이었다.-동생은 잘 크고 있지요?필립이 안나 뱃속의 아이를 동생이라 불렀다. 안나는 필립의 호의에 고맙기도 했지만 필립의 태도가 바뀐 것이 의아했다.-이렇게 갑자기 바뀌신 이유가?필립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쿵쿵 소리를 내며 잔을 내려놓는 만식과 달리 필립이 잔을 내려놓을 때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안나. 이름이 안나 맞지요? 이게 뭐 안나 씨 잘못이겠습니까? 뱃속의 아이가 잘못이겠습니까? 잘못이라 할 것 없지요. 그럴 수 있는 세상이니까. 그저 내 입장에서 좀 답답한 일이기는 하지요. 그렇다고 화를 낼 정도는 아닙니다. 왕조 시대도 아니고, 세자 자리를 두고 싸우는 것도 아니니. 하긴 세자 자리라 해도 별 볼 일 없는 자리니 탐낼 일도 아니지만. 이번 일로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건강한지 확인도 했고. 허허. 우리 아버지 정말 대단하지요?필립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안나는 빙긋이 미소만 지었다. 필립이 차 말고 다른 것도 드시라 권했고 안나는 치즈 케이크 한 조각을 주문했다. 안나는 스푼으로 케이크 모서리를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필립이 물었다.-우리 아버지, 사랑합니까? 지금 안나 씨 이러는 것 사랑입니까?안나는 스푼을 내려놓은 뒤 필립을 바라보았다. 되물었다.-무슨 뜻으로 물으시는 건지?-무슨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 그대로 궁금해서요. 삼십 대 초반 젊은 여자와 팔십 대 후반 늙은 남자의 뜨거운 사랑인 건지. 아니면…….처음 받아 본 질문은 아니었다. 만식의 마이걸이 되면서부터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익히 들어온 질문이었다. 만식의 아이를 가지자 사라진 질문이기도 했다.-아니면 뭐요?눈썹 사이를 찡그리며 안나가 물었다. 치즈의 비린 맛 때문이었다.-솔직한 안나 씨의 감정을 알고 싶어서 그럽니다. 물론 엄마로서의 감정, 뱃속 아이를 사랑하고 지켜주고 싶은 마음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다를 수 있으니까요. 아버지를 사랑해서 곁에 있고 아이를 가진 건지 아니면 편안한 인생을 위해서 선택한 길인지. 아, 그렇다 하더라도 안나 씨를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도 인생이지요. 그리고 여기서 안나 씨가 어떻게 대답하시더라도 아버지에게 말씀드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시구요. 진정한 사랑이라 대답하시면 당연히 전해드리지요. 내키지 않으시면 대답 안 하셔도 됩니다./ 김강 소설가

2022-05-02

마이걸 &lt;Ⅰ&gt;

안나는 헬스트레이너였다. 상류층을 대상으로 하는 스포츠센터 소속으로 일하던 중 만식의 집으로 출장을 갔다. 만식을 담당하던 트레이너가 교통사고로 자리를 비웠을 때였다. 트레이닝을 받은 지 두 달이 되었을 때 만식이 안나에게 제안을 했다. 스포츠센터 그만 두고 내 개인 트레이너가 되는 게 어때? 원한다면 지낼 방도 마련해주지. 충분한 급여와 기대 이상의 자유 시간, 조건이 나쁘지 않았다. 안나는 만식의 개인 트레이너가 되었다. 그래도 남잔데, 한 번 더 생각해봐. 안나의 어미가 말했었다. 아빠보다 더 나이 든 할아버지니 걱정 마. 안나는 여행 가방에 속옷을 넣으며 대답했다. 아들이 하나 있다는데 같이 사는 것은 아니니 그것도 걱정할 것은 아니라 했다.사귀던 남자가 반대했다. 안나는 그 남자와 헤어졌다.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만식의 집으로 짐을 옮기던 날 안나는 자신을 위해 준비된 방에서 만식이 직접 골랐다는 침대에 앉았다. 차라리 잘 되었어. 헤어질 이유가 필요했어. 엉덩이로 매트리스의 쿠션을 확인하며 혼잣말을 했다.만식은 건강한 남자였다. 규칙적인 트레이닝과 의료진의 정기적인 관리 그리고 인공 장기들이 만식의 건강을 지키고 있었다. 트레이닝 중 만식의 옆구리에 안나의 손이 스쳤을 때, 안나의 가슴이 만식의 등에 닿았을 때, 안나가 허리를 숙여 시범이라도 보일 때면 만식의 몸은 뻣뻣해졌고 얼굴은 붉어졌다. 잠시 동안은 숨을 쉴 수 없었고 어지러웠다. 인공 심장만이 아무 일 없는 듯 규칙적으로 뛰었다. 저 나이에도? 안나는 놀랐다. 그리고 궁금했다. 일부러 몸을 대어 보기도 했고 몸매가 드러나는 운동복을 입고 만식의 눈앞에서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만식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주저앉거나 몸을 돌려 허공을 보면서도 힐끔거렸다. 안나는 만식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안나와 만식의 운동시간은 놀이 시간이 되었다. 놀이는 둘 사이를 친근하게 만들었고 친근함은 둘의 나이를 잊게 만들었다.건강과 재산을 가진 수컷들이 다음으로 관심을 가질 것은 뻔했다. 권력, 그리고 여자. 젊은 여자를 두고 젊은 남자와 늙은 남자가 경쟁하기 시작했다. 늙었지만 육체적으로 밀리지 않고 충분한 부를 가지고 있다면 젊은 남자와 겨루어 볼 만했다. 젊은 여자의 입장에서는 둘 사이를 견줄 만했다. 암컷에게 수컷의 건강함이란 자신과 자식들을 잘 보살필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했다. 가죽 자켓을 입은 백발의 노인이 빨간 오픈카의 운전석에 앉아 경적을 울리고, 길을 걷던 젊은 남자가 놀라 몸을 피하고, 운전석 옆자리의 젊은 여자가 젊은 남자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입꼬리를 올리는 장면은 티브이 광고 속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안나도 그랬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젊은 남자와 사귀며 그의 집에서 지내는 것보다 전 부인과 사별한 돈 많은 늙은 남자와 사귀며 그의 집에서 지내는 것이 더 나아 보였다. 만식과 잠자리를 같이 하면서도 안나는 자신이 몸을 팔고 있다 생각하지 않았다. 서로 주고받은 감정에서 우러난 자연스러운 것이라 여겼다. 상대가 젊은 남자가 아니라는 것? 그게 어때서? 그 뿐이었다. 사람들은 안나와 같은 여자를 마이걸이라 불렀다.안나는 가끔 스스로에게 물었다. 사랑은? 사랑? 사랑이야 언제든. 나는 아직 젊잖아. 대답에 망설임은 없었다.만식은 안나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 날 필립에게 안나를 소개했다.-내 아이를 가졌다. 너의 동생인 셈이지. 새엄마라 부르라 하지 않겠다. 하지만 네 아버지의 여자고 네 동생의 엄마다. 기본적인 예의는 갖추어 주었으면 좋겠다.안나는 만식의 곁에 붙어 앉은 채 필립을 보았다.-그 헬스트레이너?필립이 물었다.-그렇게 되었다.만식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애들 엄마에게서 여자 트레이너가 상주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습니다만 이런 것도 하시는 줄은 몰랐네요. 그게 가능하다니. 아버지도 대단하십니다. 옆에 계신 분도 대단하시고. 아들 불러 자랑하실만하네요. 요즘 말하는 마이걸, 뭐 그런 겁니까? 아이고, 부러워라. 부럽습니다, 진정.-그런 것이 아니다. 비꼬지 말거라.만식의 곁에 꼭 붙어 앉아있던 안나가 자리를 고쳐 앉았다.-축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부르셨습니까? 손녀 보기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하긴, 잘 되었네요. 언젠가 아버지 손녀가 삼촌이든 고모든 하나 있었으면 좋을 텐데 하고 아쉬워한 적 있었거든요. 아버지의 손녀에게 꼭 전해드리겠습니다. 삼촌이 될지 고모가 될지 알 수 없지만 할아버지가 널 위해 선물 하나 만드셨다고. 너하고 나이가 비슷한 할머니도 한 분 생겼다고.의자의 손잡이를 딛고 일어서려는 만식의 손을 안나가 잡았다. 안나가 필립에게 말했다./ 김강 소설가

2022-04-25

찰 영(盈)에 돌아볼 권(眷) 길 영(永)에 권세 권(權) &lt;Ⅲ&gt;

명패를 닦은 뒤 안경 닦이 천을 서랍에 다시 넣으며 영권은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인호냐? 나다.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배경소리가 시끄러웠다.-예. 무슨 일이십니까? 여기 노인 회관에 행사가 있어 나와 있습니다. 조금 시끄럽습니다.영권 대신 지역구 행사에 참석한 모양이었다.-그렇구나. 수고가 많다. 다른 게 아니고 너 최근에 필립 만난 적 있냐? 최만식 회장의 아들 말이다.인호가 대답을 했다.-아니요. 뭐, 특별히 만날 일이 없어서. 딱히 친할 이유도 없고. 아버지와 같이 만날 때 빼고는 따로 만난 적 없습니다. 나이도 저보다 열 살인가 정도 많을 겁니다. 아마.인호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영권은 이마를 찌푸렸다.-그래, 그래. 알겠다. 하여튼, 앞으로는 필립과 연락도 하고 그래라. 아무래도 나 보다는 젊은 너와 더 이야기가 잘 통하지 않겠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집안이다. 알겠지?인호와의 통화가 끝난 뒤 영권은 비서관을 불렀다. 따로 말하지 않더라도 중간중간 경찰서에 연락해서 만식의 사건에 대해 확인하라 일렀다. 좀 더 자주 만났어야 해. 영권은 중얼거렸다. 영권과 만식은 일 년에 한 두 번씩 자식들을 데리고 골프를 치거나 여행을 가곤 했다. 자식들끼리 친해지라는 의미였지만, 자식들 사이에도 나이 차이가 좀 났다. 그나마 그것도 최근에는 뜸했다. 아이들 데리고 와 봤자 짐만 돼. 만식은 이렇게 말하며 혼자 왔었다. 둘이 성별이 달랐으면 결혼이라도 시켰을 텐데. 영권은 딸이 없는 것이 아쉬웠다.-인공 폐 이식 수술을 받겠다.만식이 필립에게 통보하던 날 그 자리에 안나가 있었다. 필립은 인공 폐 이식 수술을 반대했다.-어떻게 그런 문제를 상의가 아니라 통보를 하는 것입니까?필립의 목소리가 컸다.-그 연세에 마취와 수술을 견딜 수 있을지, 수술하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 아닙니까?-아직은 견딜 수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지금 있는 폐로도 충분히 숨 쉴 수 있으신 것 아닙니까? 암에 걸린 것도 아니고 왜 멀쩡한 장기를 인공 장기로 바꾸려 하시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얼마나…….필립이 말을 덧붙였을 때 만식은 필립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제 말씀은 다른 뜻이 아닙니다.필립이 설명을 하려 했지만 만식이 말을 끊었다.-나가라. 여기서. 지금. 당장.필립은 방을 나갔다. 만식은 손을 더듬어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방문 쪽으로 집어던졌다. 핸드폰이었다. 소파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 만식은 곁에 서 있던 안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소파의 팔걸이에 걸터앉은 안나의 배를 쓰다듬다 안나의 허리에 머리를 기댔다.-우리 아기가 많이 놀랐겠구나. 미안하구나.안나가 만식의 아이를 가지게 된 것은 인공 장기들 덕분이었다. 그것들이 있어 만식은 안나를 만났고 안나를 안았다. 그것들이 없었더라면 살아있었을까? 젊은 안나를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신체적인 능력이 남아있었을까? 또한 그것들은 안나 뱃속 아기의 탄탄한 인생을 보장해 줄 것들이었다. 오십이 넘은 아들을 쫒아내고 아들의 머리 뒤로 핸드폰을 집어던질 수 있는 팔십 노인의 기세는 뱃속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나 스스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때까지 지속되어야 했다.-앞으로 사십 년은 더 살아야지. 우리 막내가 결혼할 때까지는 살아 있어야지. 인공 폐까지 달게 되면 가능할 게야.만식은 안나를 옆자리로 오게 했다. 오른손으로 안나의 머리 뒤 팔베개를 하고 왼손으로는 안나의 잠옷 상의의 단추를 풀며 안나의 귀에 속삭였다.안나가 가진 것 중 제일 좋은 것은 몸이었다. 균형 잡힌 몸매와 탄탄한 근육, 필요한 곳에 자리 잡은 적당한 양의 지방조직들. 아비와 어미가 안나에게 내려준 유일한 우성의 것들이었다. 안나는 좋은 몸을 보여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남학생들과 오빠의 친구들로부터 제법 많은 구애를 받기도 했고, 그들 중 일부와는 사랑 비슷한 것을 해보기도 했지만 안나는 그 중 누구와도 미래를 약속하지 않았다. 그들의 숫기 어린 고백과 치기로 가득한 맹세들은 안나가 보기에는 너무 싼 것들이었다.또래의 남자들이 안나의 미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안나가 벌어올 수 있는 약간의 돈과 몸을 원할 뿐이었다. 혼자 살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찌질한 인생 둘이 모인다고 더 나아지는 건 아니니까. 서로 원망이나 하겠지. 부둥켜안을수록 상처가 깊어지는 것, 난 싫어. 안나는 툭툭 던지듯 말하곤 했다./ 소설가 김강

2022-04-18

찰 영(盈)에 돌아볼 권(眷) 길 영(永)에 권세 권(權) &lt;Ⅱ&gt;

사무실로 들어가는 박 팀장의 뒤를 쫓아가며 허 형사가 말했다.-아들이 뭐?박 팀장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직계 유가족으로 아들이 하나 있는데요. 위로 형과 어머니가 다 사고로 죽었답니다. 그런데 두 번 다 사고 현장에 그 아들이 있었습니다. 유일한 목격자이기도 하고. 형이 죽었을 때는 같이 차를 타고 있다가 혼자 살았고요.-그래? 이번에 외국 출장 나갔다는 그 아들?-네.-그러면 용의자는 아니네.-그게 아니고, 인생이 참 그렇다는 이야기지요. 형이 죽는 현장에 있었지요, 잠깐 다른 일 하는 사이에 어머니는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고, 이번에는 외국에 가 있는 동안에 아버지가 살해를 당했으니. 기구한 인생에 기구한 집안이지요.영권은 경찰서장과 통화를 끝낸 후 전화를 내려놓았다. 무조건 잡으라고. 그것도 빨리. 그게 당신이 할 일이잖아. 큰 소리를 내어서인지 목이 간지러웠다. 가래가 목 안쪽에 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으흐헉크. 억지로 한 기침에 가래가 튀어나와 명패에 붙었다. 노랬다. 허, 좋으면 나도 하려 했는데 말이야. 그는 만식이 이식받은 인공 폐의 성능과 만식의 경과를 본 후 인공 폐 이식을 받으려 했었다. 그의 심장은 이미 인공 심장이었다. 협심증 진단을 받고 관상동맥우회로수술과 나노 로봇 시술, 스텐트 시술 사이에서 고민하던 영권에게 만식이 인공 심장 이식을 권했다. 그는 만식의 조언을 따랐고 만족했다.영권은 티슈를 뽑아 가래를 훔쳤고 안경 닦이 천을 꺼내 명패를 닦았다. 은근한 초록의 옥에 금으로 새겨진 이름. 국. 회. 의. 원. 김. 영. 권. 만식이 선물해준 명패였다. 몇 대 국회의원인지 숫자는 쓰여 있지 않았다. 계속할 건데 번거롭게 숫자를 왜 쓰나? 할 때마다 새로 만들려면 아까워. 만식은 영권과 눈을 맞추며 영권의 손에 명패를 쥐어주었다. 삼십 년 전의 일이었다. 영권은 이후로 삼십 년간 명패를 바꾸지 않았다. 값이 만만치 않은 고급의 명패라 새것으로 바꿀 필요가 없기도 했고, 삼십 년째 같은 명패를 사용하는 검소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가 필요하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만식에게 보이기 위해서였다. 정치인으로서 영권을 믿고 후원해준 만식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당신이 만든 정치인이니 끝까지 책임지라는 뜻이기도 했다.영권의 원래 이름은 영달이었다. 국민을 위해서 일하겠다는 정치인의 이름이 영달이 뭐냐며 만식이 권한 이름이 영권이었다.-유권자들이 물어보면 ‘찰 영盈자에 돌아볼 권眷자라 말하시게. 항상 뒤를 돌아보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채우라는 뜻입니다.’하고 대답하고. 스스로 다짐할 때는 ‘길 영永자에 권세 권權자, 영원한 권력이다.’하고 생각하시게. 권력은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하네. 한 번 잡은 것은 절대로 내어놓지 마시게.영권이라 이름을 지어주며 만식이 말했었다.정치를 시작한 이래로 일곱 번의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그중 두 번의 선거를 제외하고 다섯 번의 선거에서 영권은 승리했다. 그 두 번 중 한 번은 정치권의 물갈이 열풍을 피하기 위한 불출마였고, 나머지 한 번은 국민 기본 소득 개헌 정국에서 던진 정계은퇴라는 승부수였다. 물론 그는 정계를 떠나지 않았다.선거에서 패한 적 없는 그였다. 그의 득표율은 시간이 지날수록 올라갔다. 노인 인구가 늘어나는 만큼이었다. 그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선거에서 질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노인들의 표, 노인이 될 유권자들의 지지만 굳게 쥐고 있으면 될 일이었다. 영권의 소속 상임위가 삼십 년째 노인복지위원회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이제는 좀 더 큰 자리에 오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다섯 번째 국회의원 당선 후 후원인 모임에서 한 지지자가 말했다. 그렇지. 옳소. 이곳저곳에서 찬성의 말들이 쏟아졌다. 영권이 두 손을 들었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영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좀 더 큰 자리에 오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십 년 이십 년 앉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오르고 나면 내려와야 합니다. 그 자리까지 올랐던 사람이 다시 국회의원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제 이름이 뭡니까? 영권입니다. 영원한 권력. 지금 높은 자리에 오르면 영원한 권력이 되지 못합니다. 나중에,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맨 마지막에, 이번에 하고 나면 더 이상 못하겠구나, 저세상으로 가겠구나 싶을 때, 그때 높은 자리에 오르겠습니다. 그래야 제가 살아 있는 시간 중 일 분 일 초의 빠짐없이 여러분을 도와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말씀해주신 그 말들, 마음들. 기억하겠습니다. 그때까지 변치 않으실 것이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그가 말을 하는 중에 여러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가 말을 마치자 모두들 일어나 박수를 쳤다. 후원회장인 만식은 끝까지 함께 할 것이라며 영권과 러브샷을 했었다. 그런데 만식이 죽다니. 영권은 아쉬웠다. 그리고 슬펐다. 잠깐, 아주 잠깐.만식은 갔지만 만식의 돈은 그대로 남았다. 장례식장에서 만식의 유일한 자식, 필립의 얼굴을 보았다. 담담한 표정이었다. 목이 쉬지도 눈두덩이 부어 있지도 않았다. 만식의 아들이 아니었던가. 이 정도에 감정이 흔들릴 집안이 아니다. 필립은 조용한 장례를 원했겠지만 영권은 그럴 수 없었다. 필립 앞에서 강한 분노와 규탄의 말을 쏟아냈다. 후원자들에게 보이는 결기였다. 필립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소설가 김강

2022-04-11

찰 영(盈)에 돌아볼 권(眷) 길 영(永)에 권세 권(權) &lt;Ⅰ&gt;

허 형사가 메모지에 그림을 그려가며 박 팀장에게 설명을 했다.-만약에 출발부터 다른 차를 타고 갔다면? 그럴 가능성은 없어?허 형사가 컴퓨터에 영상 하나를 띄웠다.-이게 병원 지상, 지하 주차장 CCTV 전체 영상입니다. 살펴봤는데 지상, 지하 주차장 그 많은 자리를 두고 CCTV 사각지대에 주차가 되어 있었나 봅니다.피해자 차량이 어디에 있었는지 보이지가 않아요. 여기 보시면 피해자가 보입니다. 피해자도 자기 차를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한참 동안 지하 2층 주차장을 돌아다니더라고요. 그러다가 여기서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이 구역에는 CCTV가 없다 하네요. 피해자가 보이지 않은 시점 후로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차량을 살폈는데 이십 분 정도 있다가 피해자 차량이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이십 분이면 좀 길지 않아?-길죠. 무슨 일을 한 건지 알 수도 없고. 주차하러 들어오고 나가는 차량이 워낙 많은 곳이라 시간대를 맞추어서 살피기는 애초에 불가능하고. 큰 회사의 회장이나 되는데 혼자 퇴원하게 둔 것도 이해가 안 되고. 일이 그렇게 되려고 하니 그렇게 된 건가 싶기도 하고.-왜 혼자 퇴원했다는데? 마우스가 왜 이래?박 팀장이 마우스로 영상을 확대하려 했으나 마우스가 말을 듣지 않았다.-아까부터 이상하더니. 건전지가 다 되었나 봅니다. 갈아놓겠습니다. 왜 혼자 퇴원하게 두었는지 물어봤지요. 인공 폐 이식 수술을 받은 후 한참 동안 입원을 했답니다.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 상태가 되어 퇴원을 했는데 피해자가 다른 사람에게 운전대를 안 맡기는 성격이라네요. 나이가 팔십 일곱인데도 자기가 운전할 수 있다고 아무도 나오지 말라고 했답니다.담당 교수가 그러는데 마지막 회진을 돌 때 그랬답니다.혼자 퇴원해서 회사에 깜짝 출근을 할 거라고. 그래야 평소에 직원들이 어찌하고 있는지 볼 수 있다고.하나 있는 아들은 해외 출장을 갔고 사실혼 관계이던 여자는 산전 진찰을 갔었답니다. 하필 그날.-산전 진찰? 무슨 말이야? 손주 며느리도 아니고 사실혼 관계? 팔십 일곱이라 안 했어? 내가 잘못 들은 거지?-그게, 마이걸이랍니다. 마이걸. 나 같은 홀아비는 피해자 가족이나 용의자들 쫓아다니고 구십이 다 되어가는 노인은 어린 여자하고 그러고 있고. 세상이 그런 거지요, 뭐. 임신까지 시켜가면서. 임신이 가능하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 사건 별로 재미없습니다. 나는 왜 사나 싶기도 하구요.의자에서 일어난 박 팀장은 허 형사의 등을 토닥였다. 담배나 한 대 피우러 가자며 허 형사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하여튼 이거 빨리 끝내자. 위에서 말 나왔다. 빨리 그리고 반드시 범인을 잡아내라고.허 형사는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빨았다가 뱉어냈다.-그게 재촉한다고 됩니까?박 팀장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서장님한테 전화가 온 모양이야. 김영권이라고. 국회의원. 있잖아, 지난번 전 국민 기본 소득 국민 투표 부결시킨 그 국회의원. 피해자와 관계가 깊었던 모양이야. 범인을 반드시, 빨리 잡아내라고 서장님에게 닦달을 했나 봐. 그 국회의원이 지금 여당 실세라며?허 형사는 담배꽁초를 종이컵 바닥에 문질렀다.-김영권요? 국민 기본 소득 부결시키고 노인 기본 소득으로 바꿔 통과 시킨 그 사람이지요? 거기도 나이가 팔십이 다 되었을 겁니다.팔십이 다 되어가는 정치가와 구십이 다 되어가는 부자라. 친할 수밖에 없겠네요. 지들이 다 해 처먹고 있으니.혼자 먹으면 심심했을 거고. 니미, 젊은 나는 똥이나 닦고 있고. 아, 갑자기 이 사건 수사하기 싫어지네. 팀장님, 이 사건 다른 팀 주면 안 됩니까? 아니면 뭉개다가 미제사건으로 처리해버리든지.박 팀장은 두 손으로 허 형사의 양쪽 어깨를 주물렀다. 김강 작가 2017년 제21회 심훈문학상 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 ‘여행시절’(공저) ‘당신의 가장 중심’(공저) 등을 썼다. -그렇지. 그래도 어쩌겠냐. 우리 일인 것을. 그러니까 빨리 끝내고 다른 사건 해결하러 가야지.허 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 팀장의 손을 어깨에서 내리며 대답했다.-네, 압니다. 알지요. 그냥 기분이 그렇습니다.둘은 경찰서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박 팀장이 앞서서 계단을 걸어 올라갔고 허 형사가 뒤를 따랐다.-팀장님, 이상한 게 또 있습니다. 굳이 왜 시신이 발견되도록 두었냐는 겁니다. 어디에 묻어버리거나, 물속에 던져버려도 될 것을 굳이 옷을 다시 입혀 차에 태웠냐는 거지요. 일부러 발견되기를 원했던 거잖아요.-그러네. 단순한 사건이 아닐 수도 있겠어. 범인을 잡으면 꼭 물어보자고.-지금 농담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왜 그랬는지 추측이라도 해야 범인을 잡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아들이….

2022-04-04

노송(老松) 아래 아무것도 없었다 (Ⅵ)

가벼웠다. 우리 아버지가 왜 이리 가벼워, 왜 이리 가벼운 거야? 눈물을 흘리며 관을 붙잡아야 했지만 필립은 그러지 않았다. 그 무거운 것들을 속에 넣고 계셨어. 내 가슴과 등을 묵직하게 누르던 아버지의 무게는 그것들의 무게였어. 그것들이 사라지니 이렇게 가볍지 않아? 만식의 시신은 속을 파낸 통나무 같았다. 속을 다 파낸 통나무로 배를 만든다 했지. 그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겠어. 필립을 태운 만식의 영구차는 넓은 강 위로 놓인 다리를 건넜다.사옥 정문 앞 노송 아래에 절반을 묻었다. 직원들이 나와 그 광경을 보았다. 일부는 울기도 했고 일부는 소름끼친다며 겉옷을 고쳐 입었다.임원 중 한 명이 물었다.-회사는 어떻게 할지?-회장님 안 계신다고 회사가 망하는 건 아닙니다. 회장님이 회사를 그렇게 만드시지도 않았고. 회장님이 돌아가셨어도 회사는 그대로입니다. 하던 대로 하면 됩니다.필립이 덧붙여 말했다.-그리고 당분간은 후계 따위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해주세요. 부회장님이 있으시니 부회장님 중심으로 운영하시면 됩니다. 제가 어찌할지는 조금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겠습니다.누구도 후계에 대해 묻지 않았지만 필립은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집 정원의 회화나무 아래에 나머지 반을 묻은 후 필립은 작은아버지 부부와 친지들을 배웅했다. 형도, 어머니도, 이제 아버지까지.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는 쓸쓸함, 서러움. 하루 정도는 그런 기분을 느껴야 할 것 같았다. 회화나무 아래를 보며 ‘아버지’ 하고 나지막하게 불렀다. 눈물이 따라 나올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입꼬리가 양쪽으로 당겨졌다. 콧구멍 안 깊은 곳 목 안으로부터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필립의 머리는 양쪽으로 흔들거렸고 오른발은 박자를 맞췄다. 필립은 만식과의 추억을 떠올리기 위해 애를 썼지만 떠오른 것은 회사의 조직체계와 운영에 대한 것이었다. 오래된 고민이었다.-저.안나였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반대쪽에는 아내가 안나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안나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호칭을 어떻게 할지. 사모님이라 부를게요. 사모님께 정식으로 인사드린 적 없지요. 장례식장에서는 인사를 드릴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제 이름은 안나예요, 안나. 사흘 동안 많이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을 가져다주신 것, 다리를 주물러주신 것 모두 감사해요. 여자로서, 아이를 가져본 여자로서 저를 살펴봐 주셨어요. 그리고 회장님, 저와 저의 아이는 어찌할지 말씀을 기다릴게요. 욕심 부리지 않겠습니다.필립은 안나의 두 눈에 고인 눈물을 보았다. 닦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곧 자기가 할 일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손수건을 건넨 것은 필립의 아내였다.-그러니까 허 형사, 현장에 남겨진 것 중에는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없단 말이지?박 팀장이 허 형사의 책상으로 다가왔다.-피해자의 것을 제외하고 남겨진 지문도 없습니다. 혈흔이 있기는 합니다만 모두 피해자의 것입니다. 많지도 않고요. 사실 그것도 이상합니다.허 형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박 팀장이 허 형사에게 커피를 건넸다. 김강 작가 2017년 제21회 심훈문학상 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 ‘여행시절’(공저) ‘당신의 가장 중심’(공저) 등을 썼다. -앉아, 앉아서 이야기하자고. 커피 한 잔 하면서.박 팀장은 옆자리의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피해자가 병원에서 타고 나간 본인의 차량에서 살해된 채로 발견이 됐는데 혈흔이 얼마 없다는 겁니다. 다른 곳에서 살해된 후 시신이 발견된 장소, 차로 옮겨졌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장기를 꺼내는 작업을 차 안에서 하기는 힘드니까 어딘가 다른 곳에서 범행을 저질렀다 볼 수 있지요. 문제는 어디서 했느냐 인데요. 차량이 고속도로 진입 톨게이트를 통과한 것과 차량 발견지의 도착 톨게이트를 통과한 것까지 확인을 했는데 그 시간이 빠듯합니다. 다른 뭔가를, 이를테면 장기를 꺼내거나 할 그런 시간이 안 되거든요. 장기가 한두 개도 아니고. 하이고, 완전 인조인간이더군요. 간, 폐, 콩팥, 관절, 심장까지. 다 인공 장기예요.-조금만 더 살았으면 머리만 빼고 다 바꿨겠네. 역시 돈이 좋기는 좋네. 결과는 좋지 않지만 말이야. 하여튼, 그러면 이쪽 톨게이트를 지나기 전에 다른 차량이나 장소로 옮겨졌거나 저쪽 톨게이트를 지나서 옮겨졌거나. 그럴 수 있는 거네.박 팀장이 허 형사를 보며 말했다.-가능하죠. 그런데 그게 잡히는 게 없습니다. 병원에서부터 톨게이트까지의 차량 동선에 있는 CCTV를 다 살펴봤는데 특별한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쪽도 마찬가지고. 게다가 무슨 비밀이 그리 많았는지 썬팅을 심하게 해놓아서 차량 안을 볼 수가 없습니다.

2022-03-28

노송(老松) 아래 아무것도 없었다 (Ⅴ)

-수목장을 할 것입니다.필립이 말을 꺼냈다. 선산에 안장하거나 납골당에라도 모셔야 하지 않겠느냐? 작은아버지와 친지들은 입을 대고 싶었겠지만 그들은 지쳐있었다. 칠십 대 후반의 노인들이 삼일장을 오롯이 견뎌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필립의 뜻대로 될 일이기도 했다.필립은 만식을 꼭 닮아 있었다. 한번 마음을 정하면 좀처럼 바꾸지 않았다. 아집이라 말하기에는 근거가 명확했고 일방적이라 말하기에는 대화와 설득의 과정을 중시했지만, 그럼에도 결론은 자신의 뜻대로 되어 있었다. 필립의 뜻을 꺾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만식이었다. 두 사람은 자주 의견이 부딪혔다. 필립의 정원에 모란을 심는 것부터 회사의 운영과 미래에 대한 계획, 투자 등의 문제까지, 거의 모든 방면에서 그들은 의견이 달랐다. 너희들은 걱정하지 말거라. 우리는 아주 조금 의견이 다를 뿐이다. 둘 사이의 의견 대립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가족들에게 만식은 말했다.나는 너의 아버지가 아니냐. 내 돈으로 하는 것이지 않느냐. 어차피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지. 만식은 간단하고 유치한, 그러나 치명적인 말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필립과 마주 앉았다. 나와는 아주 조금 다를 뿐이지 않느냐. 네가 양보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만식이 물었다. 그 작은 차이가 모여 큰 흐름이 되는 것입니다. 필립은 말하고 싶었지만 번번이 말하지 못했다. 고개를 끄덕였고 만식은 주위의 가족들 혹은 임원들을 둘러보며 웃었다. 필립은 만식의 웃음이 흐뭇함인지 비웃음인지 구별하기 힘들었다. 너의 세상이 오거든 너의 뜻대로 해라. 만식은 필립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필립은 그 말을 믿었다. 나의 세상은 반드시 오지, 내 뜻대로 할 수 있겠지. 또 한 가지, 그 세상이 저절로 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두드리지 않고 소리가 나기를 기대할 수는 없지. 가만히 있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형이 죽은 후 필립에게 주어진 것들이 늘어났다. 형이 했던 역할을 대신하는 것만큼 필립의 세상이 넓어졌다. 하지만 필립은 주어진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얻어냈다는 성취감보다는 하고 싶다는 바람이 더 컸다. 올해에는 이것이 다음 해에는 저것이 주어졌지만 기대와 욕망은 주어진 것을 넘어섰다. 눈앞에 있지만 손에 닿지 않는 것,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얻을 수 있는 것, 누군가의 손에서 나에게로 전해져야만 하는 것에 대한 갈망이 커져 갔다. 만식은 너의 세상이라는 말로 필립을 달래려 했지만 만식이 인공 장기를 하나씩 달 때마다 필립의 세상은 한 걸음씩 멀어졌다.-반은 저희 집 정원에 있는 회화나무 아래에, 반은 서울 사옥 정문 앞의 소나무 아래에 모실 것입니다. 정원에 있는 회화나무는 아버지께서 손수 심으신 것입니다. 제가 모란을 심으려 했던 자리였지요. 집안에 정승이 나도록 해주는 나무라 하시며 심으셨습니다. 아직 정승이 나지는 않았지만 직접 심으신 뜻을 기리고 싶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자손이 성장해가는 것을 보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서울 사옥 정문 앞의 소나무는 오 년 전 양산 통도사 계곡에서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소나무가 버텨온 세월만큼 회사가 오래도록 위로 뻗어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이셨습니다. 건강한 노인의 상징이라고도 하셨지요. 그 아래에 모시겠습니다. 김강 작가 2017년 제21회 심훈문학상 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 ‘여행시절’(공저) ‘당신의 가장 중심’(공저) 등을 썼다. 칠 년 전 여름 필립과 만식은 통도사에 있었다. 통도사의 담을 옆으로 두고 흐르는 작은 계곡 맞은 편 줄지어 선 노송을 함께 보았다. 허허, 그 참, 허허. 그 참. 만식은 굽히지 않고 하늘로 솟아 있는 노송들을 보며 연신 감탄의 말을 뱉어냈다. 오랜 세월 꼿꼿하게 자리를 지키며 스님들의 독경 소리를 들었을 것 아닙니까? 저들이 곧 부처가 아니겠습니까? 만식은 옆에서 안내를 하던 주지스님과 필립을 번갈아 보며 이야기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한 분야에서, 한 위치에서 오랫동안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다 보면 도를 깨치게 되는 거지요. 요즘은 제가 꼭 그런 사람이 된 기분입니다. 팔 수도 없는 것이며 가져가기도 힘들 것이라는 스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만식은 계곡의 노송 한 그루를 옮겨와 심었다.그날 필립은 노송 아래의 것들을 보았다. 계곡의 노송들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 아름이 넘는 지름을 가진 노송들이 서로 간격을 두고 서 있을 뿐이었다. 이제 막 자라난 어린 소나무도, 노송의 허리춤까지 따라잡은 청년의 소나무도 없었다. 오로지 노송들만이 계곡의 깊이만큼 솟아 있었다. 그중 한 그루를 옮겨 오던 날 필립은 그 빈자리에서 자라날 새 소나무를 생각했다.

2022-03-21

노송(老松) 아래 아무것도 없었다 (Ⅳ)

-백주 대낮에,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노인을 상대로 한 범죄라는 것도 치가 떨리는 일이지만, 그 목적이 인공 장기를 탈취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에 놀라고 더욱 화가 납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슬픔 그리고 큰 분노를 느낍니다. 약속하건데 반드시 범인들을 찾아낼 것입니다. 지구, 아니 우주 끝까지라도 쫓아가야지요. 잡아와서 법정 최고형으로 죗값을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슬픕니다. 정말 슬픕니다. 오늘 우리는 큰 어른을 잃었습니다. 이제 누가 있어 우리 어르신들을 위한 배려와 봉사의 길을 보여주겠습니까?카메라 플래쉬의 불빛이 사방에서 터졌다. 불빛을 배경으로 영권이 필립에게 다가왔다. 필립은 고개를 숙였고 영권은 두 팔로 필립을 안았다. 필립의 등을 토닥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들은 병원과 경찰서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삼십 분 후 영권은 급한 일정이 남아 있다며 장례식장을 떠났다. 영권을 배웅하고 돌아온 필립에게 아내가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만식의 얼굴이었다. ‘노인을 위한 기업, 올더앤베러의 창업주 최만식 회장 영원히 잠들다.’라는 메인 기사 아래 여러 개의 기사들이 달리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만식의 일생과 애도의 기사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차츰 만식의 사인에 대한 보도들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어 만식이 이식받은 인공 장기까지, 이런 일이 없었다면 백삼십 살은 거뜬했을 것이라는 주치의의 인터뷰까지. 급기야 인공 장기가 검색어 1위를 차지했다. 필립은 보고 싶지 않았다. 아내에게 핸드폰을 돌려주고 눈을 감았다. 엄지손가락으로 귀 뒤를 누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아내가 필립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눈을 뜬 필립에게 아내가 보여준 것은 기사 아래에 달린 댓글이었다.얼마나 오래 살려고 한 거야? 도대체.영원히 살려고 했구만.완전 인조인간이네 인조인간.그러면 아들은 몇 살인거야? 아버지가 계속 살았으면 회사는 언제 물려받게 되는 거야? 찰스 황태자야?필립은 아내의 핸드폰을 빼앗아 바닥으로 던져버렸다.-지금 뭐 하자는 거야? 지금 꼭 이런 것 봐야겠어?당황한 필립의 아내는 핸드폰을 줍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아버지 앞이다. 큰 소리 내지 말거라.작은아버지가 말했다.-이 사람은 항상 이런 식이에요.필립의 아내는 작은아버지와 친지들에게 하소연을 했다. 필립은 빈소에서 나와 신을 신었다. 몇몇 기자들이 질문을 하며 마이크를 들이밀었지만 손사래를 치며 밖으로 나왔다.필립은 주차장을 빙 둘러 걸었다. 선선한 저녁 바람이 낮의 열기를 가라앉히고 있었다. 필립의 마음도 가라앉았다. 아내에게 화를 낸 것이 미안하기도 했고 영권을 먼저 말리지 못한 자신을 탓하기도 했다. 어차피 벌어질 일이었어. 필립은 큰 숨을 내쉬고 걸음을 돌렸다. 인기척이 있었다. 안나였다. 장례식장 안에만 있자니 그녀도 답답했을 것이다.-힘드시죠?목례를 하고 지나치는 필립에게 안나가 말을 걸었다.-…….-앞으로 사십 년은 더 사실 것 같았어요. 건강하게. 그 정도면 저와 뱃속의 아이가 스스로 사는 법을 배울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제게 다른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필립은 대답하지 않았다. 안나가 말하는 동안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하현달이 초승달로 바뀌고 있었다. 곧 그믐이겠군.-예정일이 십일월 이십이 일이라고 했던가요?필립이 물었다.-제가 말씀 드린 적 있었나요? 어떻게 아시고.-몸조리 잘하세요. 지난번 말씀드린 대로, 아버님께서 당부하신 대로 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면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김강 작가 2017년 제21회 심훈문학상 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 ‘여행시절’(공저) ‘당신의 가장 중심’(공저) 등을 썼다. 필립은 빈소로 돌아왔다. 아내는 돌아앉아 있었다. 바닥으로 내팽개쳤던 핸드폰도 그대로였다. 필립은 핸드폰을 가지고 와 아내의 손에 쥐어주었다. 아내는 눈을 흘겼고 필립은 미안하다 말했다.검색어 1위가 바뀌어 있었다. 인공 장기는 세 번째로 밀려났고 1위는 최만식 회장 2위는 올더앤베러였다. 생전 만식이 했던 인터뷰가 모 방송에서 방영되고 있었다. 올더앤베러, 부르기 좋아서 만든 이름 아닙니다. 나이가 들수록 삶은 나아져야 합니다. 그들이 만든 세상에서 그들이 누리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티브이 속 만식은 티브이 화면 바깥을 응시하며 오른 주먹을 들어 보였다. 티브이 방송을 보던 조문객들이 박수를 쳤다. 그들을 둘러보던 필립은 문득 조문객들이 모두 노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들이 아니었다면 제법 쓸쓸한 장례식장이 되었겠어. 필립은 피식 웃었다.

2022-03-14

노송(老松) 아래 아무것도 없었다 (Ⅲ)

이십이 년 전 필립의 형이 죽었다. 패러글라이딩을 하러 가던 중이었다. 새로 산 패러글라이더를 싣고 달리던 차가 호수에 빠졌다. 필립은 운전석 차창으로 빠져 나왔지만 형은 그러지 못했다. 차는 무거웠고 호수는 깊었다. 필립이 다시 호수 속으로 몸을 던졌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섯 시간 뒤 형은 차와 함께 올라왔다. 안전벨트를 그대로 매고 있었다. 다른 세상으로 가는 길에서도 안전벨트가 생명줄이라 여긴 듯 보였다. 그날 만식이 변했다. 아니, 원래 그랬는지도 모른다. 필립이 모르고 있었을 뿐. 형의 자리에 서니 만식이 보였다.이후 만식은 영원히 살기로 마음먹은 사람 같았다. 그것도 건강하게. 그는 건강에 관한 모든 것을 직접 챙겼고 수명 연장과 관계된 새로운 것들을 찾아다녔다. 만식이 기댔던 것은 의학 기술이었다. 새로운 기술과 신소재를 앞세운 인공 장기 업체들은 고가의 상품을 사용할 수 있는 돈 많고 절실한 소비자가 필요했고 만식은 자신의 건강을 유지하고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효과적인 기술을 원했다. 새로운 기술과 소재들은 만식이 지불한 금액만큼 효과가 있었다. 만식이 여든이 되었을 때 만식의 심장과 만식의 콩팥 중 하나와 만식의 간, 그리고 관절의 일부는 만식이 태어날 때 가지고 왔던 그것들이 아니었다.큰아들이 죽은 후 만식은 담배를 끊었지만 담배에 대한 두려움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내가 담배 냄새를 맡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나는 담배가 가장 무서워. 만식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비흡연은 올더앤베러의 채용조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여태까지 피웠던 담배가 어디 가겠어? 언젠가는 내 목을 붙잡고 늘어지겠지. 만식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 말했지만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기다리지는 않았다. 유난히 미세먼지 농도가 높았던 올해 봄, 한 달 정도 객담과 기침이 지속되자 만식은 수술을 선택했다. 의사의 만류는 의미가 없었다.성공적인 인공 폐 이식 수술 후, 만식이 퇴원하던 그날 사고가 났다. 닷새 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던 만식이 사라졌다. 만 삼십육 시간 후 동해안의 자그마한 부두에서 만식과 만식의 차가 발견되었다. 필립은 만식이 숨진 채 발견된 그날 만식의 시신을 받지 못했다. 유족의 동의와 관계없이 부검이 진행되었다. 경찰은 만식의 인공 심장과 인공 콩팥, 인공 간, 그리고 새로이 이식받은 인공 폐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만식은 자연 그대로의 인간이 되어 돌아왔다. 이틀 전이었다.-그 참, 그렇지 않아도 형님께 조심하시라 말씀드렸었는데. 인공 장기를 노리는 나쁜 놈들이 있다 하더라고. 형님에게 그런 일이 생길 줄이야. 오래도록 건강하게 살자고 몸에 단 것들이 아니냐. 그런데 그것들 때문에 죽는 일이 생기다니. 참.-경찰이 조사하고 있으니 기다려봐야지요. 결과를 바꿀 수는 없으니.-그래, 경찰 쪽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고?-형사 한 명이 찾아오기는 했습니다. 짧게 이야기만 나누었습니다. 아주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상이 끝나기 전에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습니다.필립은 조용히 만식의 상을 치르고 싶었다. 만식이 어떻게 죽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세상의 주목을 받는 것이 싫었다. 만식의 죽음보다 인공 장기에, 사라진 인공 장기들보다 그 인공 장기들이 만식의 몸속에 있었다는 사실에 더 관심을 가질 것이 뻔했다.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 경찰서에 불려 다니는 것, 잊힐만하면 다시 무덤 속에서 불려 나오는 것, 필립은 원하지 않았다. 뭐가 중요해? 죽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지. 사람들의 무관심을 원했다. 어떻게 돌아가셨냐는 조문객들의 질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모호한 대답을 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사라진 인공 장기들은 필립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장례를 치르려면 떼어내야 하는 것들, 애초에 달지 말았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김강 작가 2017년 제21회 심훈문학상 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 ‘여행시절’(공저) ‘당신의 가장 중심’(공저) 등을 썼다. 필립은 가족과 친지들에게도 만식의 죽음에 대해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말라 신신당부를 했다. 한 명의 조문객이 방문하기 전까지는 필립이 뜻하는 대로 흘러갔다.-아이고, 이게 무슨 일입니까? 지난주에 문안 인사를 드렸을 때만 해도 웃는 얼굴로 덕담도 하고 그랬는데.영권. 만식이 후원회장으로 있던 국회의원이다. 정치에 입문할 때부터 만식의 후원을 받았다. 영권의 뒤로 인호가 서 있었다. 필립은 인호와 눈을 맞췄다. 인호는 빙긋이 웃음을 지었고 필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이게 무슨 일입니까? 형님.필립은 영권을 말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영권이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었다. 무릎을 꿇은 채 영정을 바라보고 있는 영권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필립이 영권을 안고 빈소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영권이 몸을 돌렸다. 영권의 일정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을 향해 포즈를 취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2022-03-07

노송(老松) 아래 아무것도 없었다 (Ⅱ)

안나가 방으로 들어가자 작은아버지가 낮은 목소리로 필립에게 안나를 어찌 할 것인지 물었고 다른 친지들도 한 마디씩, 마찬가지로 조용히 거들었다. 정식으로 혼인을 한 것도 아닌데 왜 빈소에 세워두느냐는 이야기, 앞으로 안나와 안나 뱃속의 아이를 어찌 대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필립은 일일이 대꾸하지 않고 들었다. 필립의 대꾸가 없자 작은아버지도, 친지들도 더 이상 이야기를 잇지 못했다. 그들의 얼굴을 둘러본 필립이 입을 열었다.-아버지의 아이를 가진 여자입니다. 그 아이는 작은아버지의 세 번째 조카이기도 합니다. 아버지 가시는 길에 인사는 하도록 두어야지요. 이후에 어찌 대할지는 아직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삼일 상중 첫날입니다. 지병을 앓다가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황망한 일인데 어찌 이리 많은 생각들을 하십니까. 이러지들 마십시오. 빈소에서 조문객을 맞이하는 일, 쉬운 일 아닙니다. 저 여자가 감당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감당하게 할 것입니다.필립은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방 안에서 잠을 청하고 있을 안나가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다.안나는 필립과 필립의 작은아버지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안나는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쓰러지듯 누웠고 잠을 청할 겨를도 없이 잠이 들었다. 안나는 꿈을 꾸었다. 만식이 찾아와 아이를 안고 가는 꿈이었다. 아이는 두고 가. 안나는 소리를 질렀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만식을 쫓아가던 안나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고 잠이 깨었다. 핸드폰 벨이 울리고 있었다. 엄마에게서 온 전화였다.-그깟 산전 진찰이야 하루쯤 미루면 될 것을. 수술 전부터 수술 후 회복할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옆에서 간병을 하면 뭐해. 그 하루로 도로아미타불이 된 것 아니냐. 넌 그날 같이 있었어야 해. 끝까지 그 늙은이 곁에 있었어야지. 그 늙은이의 재산 중 넘겨받은 것이 하나라도 있어? 절대 죽지 않을 것처럼, 늙지 않을 것처럼 병원을 쫓아다니면 뭣해. 이렇게 가버렸잖아. 지금 후회하면 뭣하냐. 아이고, 네 팔자도, 애 팔자도. 이왕 그렇게 살겠다고 마음먹었으면 좀 더 신경을 썼어야지.이왕 그렇게 살겠다고 마음먹었으면.안나가 만식을 만난다는 것을 안 그날부터 엄마의 입에서 떠나지 않는 말이었다. 이 모든 것은 네가 선택한 것이지. 그렇지 않니? 하고 다짐을 받는 말 같았다.엄마는 내가 그 사람과 같이 있다가 무슨 일이라도 당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러길 바란 거야? 다행이라고, 마침 산전 진찰이 그날이라 내가 무사할 수 있었다고 말해주면 안 돼? 안나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하지 못했다.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다.머리맡을 더듬어 생수병을 찾았다. 일어나 앉아 물을 마신 뒤 가방에서 휴대용 청진기를 꺼냈다. 배꼽 아래에 갖다 대고 볼륨을 키웠다. 천천히, 규칙적으로 뛰고 있는 아이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안나는 왼손으로는 방바닥을 짚은 채 오른손으로 배를 쓰다듬었다. 당신. 이러면 안 돼. 나에게, 우리 아기에게 이러면 안 돼. 다시 꿈속으로 들어가 만식에게 따지고 싶었다.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생전에 만식이 했던 말들, 노마가 전해준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문득 필립의 말이 떠올랐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힘든 하루가 될 것입니다.’ 길고 힘든 하루.-아드님 나이가 올해 어떻게 되지요?둘째 날 저녁이었다. 필립이 식사를 하고 있는 조문객들에게 인사를 하던 중이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오랜 거래처 사장이 물었다.-말씀 놓으십시오. 이제 겨우 오십 둘입니다.-오십 둘이라. 회장님이 올해 여든 일곱이셨지 않나?맞은편에 앉아 소고기국에 밥을 말고 있던 또 다른 조문객이 물었다. 김강 작가 2017년 제21회 심훈문학상 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 ‘여행시절’(공저) ‘당신의 가장 중심’(공저) 등을 썼다. -네, 맞습니다. 여든 일곱. 하지만 몸과 마음은 청춘이셨습니다.-그렇지. 정정하셨지. 삼십 년은 더 거뜬히 사실 것 같았는데. 안타까워, 안타깝고말고. 아드님 나이도 적지 않네. 회장님 밑에서 일을 배우고 있다고 듣기는 했지. 필립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자란 것 없으신지 무엇이든 말씀하시라는 말을 남겨 놓고 빈소로 돌아왔다. 빈소로 돌아온 필립이 자리에 앉았다. 털썩, 소리가 났다. 작은 아버지가 필립의 무릎을 손으로 감쌌다.-네가 고생이 많다. 하나 있던 형도 사고로 보내고, 어머니도 그렇게 가고, 이제 혼자 남았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이 짠하다. 마음을 굳게 가져라. 네가 이제 우리 집안의 기둥이다. 형님이 너의 이름을 필립이라 지으신 것을 보면 이리 될 줄 예상하셨나 보다. 갑작스럽게 가시기는 했어도 형님에게 여한은 없지 싶다. 동생 둘을 먼저 보내고도 제법 사셨지. 하고 싶은 것도 다 해보셨을 것이고, 아닌가? 조금 억울하시려나? 건강하게 오래도록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는데 이렇게 가다니, 이러시려나? 아무튼 힘을 내거라. 이제 곧 내 차례다. 허허.

2022-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