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 연재소설 ‘Grasp reflex’
아비의 말을 어미가 가로막았다.
-당신은 그런 허풍 좀 떨지 말아요. 당신이 그만한 돈이 있은 적 있어요? 돈은 쥐꼬리만큼 밖에 없는 사람이 일만 크게 벌여서는. 그거 감당한다고 당신은 몸으로 때우고 우리는 안 입고 안 먹어서 때우고.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지. 그건 그렇고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건데요?
아비는 어미를 슬쩍 쳐다보고는 안나의 부은 손 등에 왼손을 얹었다.
-안나 네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은 아니다. 사는데 정답이 있나. 네 인생이 이렇게 흘러가는 건가 보다. 그 정도 되는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너를 그리 대하지는 않았겠지. 자기 관리도 잘할 것이고. 부인과 사별하고 혼자 있으니 바람을 피우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어떤 방식이든 네 인생에 도움이 되겠지. 최 회장 정도 되면 꼬리치는 여자도 많았을 테고 어떤 여자든 만날 수 있을 텐데, 그게 너라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어쨌든 잘 모셔라.
-지금 아버지가 되어서 딸에게 할 소리에요?
어미가 아비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아비는 안나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덕분에 우리 집 형편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그건 정말 아니야. 나나 너의 엄마나 지금이 딱 좋다. 모자란 것도 더 가지고 싶은 것도 없다. 그저 너의 인생이 조금 더 나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너의 오빠가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으면 더 좋을 것이고.
아비가 말을 덧붙였고 안나는 손등에서 아비의 손을 들어 내렸다. 어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양반아, 가슴에 손을 얹고 이야기하소. 아이고, 이 미친 것아, 어디 할 일이 없어서.
어미는 안나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지만 안나는 꼿꼿이 앉아있었다. 안나가 몸을 세워 버틴 탓이기도 했지만 어깨를 잡은 엄마의 힘 또한 밥주걱으로 손 등을 내리치던 그 힘이 아니었다. 아비가 안나의 손 등에 다시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안나야, 뭐라 말을 해 보거라, 네가 무슨 잘못을 한 것은 아니라니까.
노마는 안나의 뺨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우리 집 왜 이래요? 아빠가 그렇게 말하면 제가 고마워요, 하고 말할 줄 알았어요? 저 친딸 아니에요? 제가 부자 늙은이의 마이걸이 되어서 우리 집에 뭘 가져오면 되는 건데요? 지금 미리 말하세요.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고.
노마는 안나가 왜 우는지 궁금했다. 아비가 손바닥으로 안나의 뺨을 올려붙였으면 안나는 웃었을까? 노마는 안나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딸을 부자 늙은이에게 팔아넘겨야 할 정도로 집안 형편이 힘든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안나가 마이걸이 된 것은 아니라 믿었다. 그럴 안나도 아니었다.
다음 날 어미가 안나를 불렀다.
-이왕 그렇게 살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잘해라. 네가 생각하는 그런 뜻으로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고.
안나는 어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성실한 노동이 정당한 결과와 함께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던 안나의 아비는 ‘언젠가’에 가족들의 미래를 걸었다. 언젠가 개발될 것들, 언젠가 이용될 것들, 그리고 언젠가 대박이 날 것들을 찾아다녔다. ‘지금 당장 여기’가 중요하다고 가족들이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지금 당장 조금의 이익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처럼 살아간다면 원하는 미래는 오지 않아. 다른 사람과 똑같은 미래를 가질 뿐이지. 우리는 달라야 해. 안나의 아비는 고집했다. 아비는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들고 ‘언젠가’를 쫓아다녔다. 심해의 광물 자원 개발, 성층권에서의 태양광 개발, 아프리카의 부동산 개발 등. 아비가 가진 재산은 ‘언젠가’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다. 투자자들의 모임 어느 한 구석에라도 앉을 수 있으면 감사한 일이었다. ‘언젠가’는 번번이 아비를 배신했다. ‘언젠가’로부터 배신을 당했다는 것을 아비가 깨닫게 될 즈음 그의 호주머니에 남아있는 것은 없었다.
‘지금 당장 여기’의 세계로 돌아온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이 참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언가를 가지겠다, 무언가를 이루겠다, 무언가를 물려주겠다를 버리니 마음도 몸도 편안해졌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탐하지 않는 한 다달이 들어오는 노년 기본 소득이면 충분했다. 이게 말이야. 투자한다고 돌아다닐 때는 푼돈처럼 보였는데 말이야. 나쁘지 않아. 아주 요긴해. 좋은 제도야. ‘언젠가’를 찾아 돌아다니지만 않는다면 개인용 차량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언제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공공교통수단들이 도처에 있었다. 그것도 공짜로.
나이가 곧 돈이었다. 괜한 욕심을 내었어. 이렇게 편한 세상을 그저 살기만 하면 될 것을. 안나의 어미가 법적으로 노인이 되는 해를 손꼽아 기다릴 뿐이었다.
/ 김강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