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 연재소설 ‘Grasp reflex’
간혹 출근 시간 필립은 회사 사옥의 소나무 앞에서 소나무를 바라보며 서 있기도 했다. 어깨를 낮추어 뒤로 제치고, 턱을 아래로 당겨 내린,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필립을 보며 직원들은 만식에 대한 그리움이라 여겼지만 필립은 만식을 그리워한 적 없었다. 말하고 싶었다. 이 일은 이렇게 할 것이고 저것은 저렇게 처리할 것입니다. 듣고 싶었다. 나무 아래 만식의 대답을. 해답은 네가 알지. 나는 들어주기만 할 뿐이지. 만식은 생전에 이렇게 말해준 적 한 번도 없었다.
필립이 늦은 퇴근을 하는 날이면 소나무는 회사를 나서는 필립의 등 뒤로 선선한 바람을 불어주었다. 겨울이 오면 세찬 바람을 막아 줄 소나무였다.
필립은 소나무를 지나치며 혼잣말을 하곤 했다. 이제야 아버지로 오셨군요.
-이제 다시 편해지셔야지요. 저도 이제 상황 파악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이리저리 살펴보니 아버님이 작은아버님과 함께 하신 일이 제법 되던데. 이제 제가 집행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필립의 말에 영권이 웃었다. 크게.
-우리 조카님이 아버님의 유지를 받든다 하니 이제야 내 마음이 편해지네.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맙네. 고마워. 그래 그 젊은 아가씨 뱃속의 아이는 어떻게 하기로 했나?
-제 동생입니다. 아버님이 생전에 말씀하신 것도 있고.
변호사에게 맡겨놓았거나 금고에 보관해 둔 유언장은 없었다. 만식이 필립을 만나 안나의 뱃속 아이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 유언이 되었다.
필립은 만식의 부탁 중 가능한 것들은 모두 들어 줄 생각이었다. 필립은 아이가 건강하고 똑바르게 자라도록 도와야 했다.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노마와의 약속이기도 했다. 하지만 부탁과 약속은 그것들을 행하는 자의 의지에 기댄 것들이다.
아이가 건강하고 똑바르게 자라 무엇을 하게 될지는 나중의 문제다. 그것 또한 필립에게 달려 있었다.
-한번 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필립이 회전의자에 등을 기대며 물었다.
-봐야지. 어디서 볼까? 나야 조카님이 편한 시간, 편한 장소면 다 좋아. 요즘 의회 일정도 없고.
-다음 달 십오 일부터 이십이 일 사이에 편하신 시간을 말씀 주시면 그에 따르겠습니다. 저는 십육 일 정도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선물 준비하는 시간이 좀 필요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렇습니다. 수행원 없이 만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요즘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
-그래야겠지. 어디 보자. 그러면 내가 일정을 한번 확인하고 다시 말씀을 드리겠네. 뭐 특별한 일은 없을 거야. 어디서 볼까? 공이나 한번 칠까? 아니야. 조카가 공은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더라고. 술은 어때? 술 좋아하나?
-작은님 뜻하시는 대로 다 따르겠습니다만, 수행원 없이 만나려면 이번에는 특별한 일정은 안 만드시는 것이.
-듣고 보니 그렇군. 알겠네.
필립과 영권은 서로 전화를 먼저 끊으라며 실랑이를 했다. 결국 영권이 전화를 먼저 끊었다.
영권과 통화를 끝낸 필립은 다시 인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날짜를 잡았어. 먼저 말했던 대로 십육 일 만나기로 했어. 내용은 이전과 비슷하니까 모두 같이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너에게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을게. 굳이 듣고 굳이 알아서 좋을 건 없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을게. 넌 어때? 진행해도 되겠어?
-네. 이미 마음먹은 일인걸요. 형님도 감당하셨잖아요.
-그래, 그러면 러시아 가기 전에 들러서 얼굴이나 한번 뵙고 가도록 해. 어찌되었건 할 건 해야지.
영산에서 아드님이 올라왔습니다.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니터에 메시지가 올라왔다.
들어오라 해.
인호가 방으로 들어와 영권 앞에 섰다. 영권이 고개를 들어 인호의 얼굴을 보았다.
-살이 좀 빠졌나 보다. 얼굴의 턱 선이 보이는 구나
-요 며칠 동안 잠을 설쳐서 그렇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인호는 자신의 턱을 손으로 만지며 대답했다.
-그래 무슨 일이냐?
영권이 인호에게 물었다. 약속이나 전화 없이 영산시를 벗어나 영권의 사무실까지 오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이틀 뒤 러시아에 갑니다. 영산시 시의원들 연수에 동행하기로 했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리되었나? 십오 일인가?
영권은 책상 달력을 보며 말했다.
-네. 일주일 일정입니다. 인천공항으로 출국하는 거라서 조금 일찍 올라왔습니다. 이번에는 출발하기 전 아버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새삼스럽구나. 최 회장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십육 일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 혹시 같이 보겠느냐? 수행원 없이 만나기로 했지만, 너는 내 아들이니. 러시아 가는 것 취소하고. 연수 동행이야 한 번쯤 빠져도 되잖아?
-아닙니다. 아버님 혼자 만나십시오. 필요 이상으로 깊이 알고 싶지 않습니다.
/김강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