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장을 할 것입니다.
필립이 말을 꺼냈다. 선산에 안장하거나 납골당에라도 모셔야 하지 않겠느냐? 작은아버지와 친지들은 입을 대고 싶었겠지만 그들은 지쳐있었다. 칠십 대 후반의 노인들이 삼일장을 오롯이 견뎌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필립의 뜻대로 될 일이기도 했다.
필립은 만식을 꼭 닮아 있었다. 한번 마음을 정하면 좀처럼 바꾸지 않았다. 아집이라 말하기에는 근거가 명확했고 일방적이라 말하기에는 대화와 설득의 과정을 중시했지만, 그럼에도 결론은 자신의 뜻대로 되어 있었다. 필립의 뜻을 꺾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만식이었다. 두 사람은 자주 의견이 부딪혔다. 필립의 정원에 모란을 심는 것부터 회사의 운영과 미래에 대한 계획, 투자 등의 문제까지, 거의 모든 방면에서 그들은 의견이 달랐다. 너희들은 걱정하지 말거라. 우리는 아주 조금 의견이 다를 뿐이다. 둘 사이의 의견 대립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가족들에게 만식은 말했다.
나는 너의 아버지가 아니냐. 내 돈으로 하는 것이지 않느냐. 어차피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지. 만식은 간단하고 유치한, 그러나 치명적인 말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필립과 마주 앉았다. 나와는 아주 조금 다를 뿐이지 않느냐. 네가 양보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만식이 물었다. 그 작은 차이가 모여 큰 흐름이 되는 것입니다. 필립은 말하고 싶었지만 번번이 말하지 못했다. 고개를 끄덕였고 만식은 주위의 가족들 혹은 임원들을 둘러보며 웃었다. 필립은 만식의 웃음이 흐뭇함인지 비웃음인지 구별하기 힘들었다. 너의 세상이 오거든 너의 뜻대로 해라. 만식은 필립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필립은 그 말을 믿었다. 나의 세상은 반드시 오지, 내 뜻대로 할 수 있겠지. 또 한 가지, 그 세상이 저절로 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두드리지 않고 소리가 나기를 기대할 수는 없지. 가만히 있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형이 죽은 후 필립에게 주어진 것들이 늘어났다. 형이 했던 역할을 대신하는 것만큼 필립의 세상이 넓어졌다. 하지만 필립은 주어진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얻어냈다는 성취감보다는 하고 싶다는 바람이 더 컸다. 올해에는 이것이 다음 해에는 저것이 주어졌지만 기대와 욕망은 주어진 것을 넘어섰다. 눈앞에 있지만 손에 닿지 않는 것,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얻을 수 있는 것, 누군가의 손에서 나에게로 전해져야만 하는 것에 대한 갈망이 커져 갔다. 만식은 너의 세상이라는 말로 필립을 달래려 했지만 만식이 인공 장기를 하나씩 달 때마다 필립의 세상은 한 걸음씩 멀어졌다.
-반은 저희 집 정원에 있는 회화나무 아래에, 반은 서울 사옥 정문 앞의 소나무 아래에 모실 것입니다. 정원에 있는 회화나무는 아버지께서 손수 심으신 것입니다. 제가 모란을 심으려 했던 자리였지요. 집안에 정승이 나도록 해주는 나무라 하시며 심으셨습니다. 아직 정승이 나지는 않았지만 직접 심으신 뜻을 기리고 싶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자손이 성장해가는 것을 보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서울 사옥 정문 앞의 소나무는 오 년 전 양산 통도사 계곡에서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소나무가 버텨온 세월만큼 회사가 오래도록 위로 뻗어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이셨습니다. 건강한 노인의 상징이라고도 하셨지요. 그 아래에 모시겠습니다.
칠 년 전 여름 필립과 만식은 통도사에 있었다. 통도사의 담을 옆으로 두고 흐르는 작은 계곡 맞은 편 줄지어 선 노송을 함께 보았다. 허허, 그 참, 허허. 그 참. 만식은 굽히지 않고 하늘로 솟아 있는 노송들을 보며 연신 감탄의 말을 뱉어냈다. 오랜 세월 꼿꼿하게 자리를 지키며 스님들의 독경 소리를 들었을 것 아닙니까? 저들이 곧 부처가 아니겠습니까? 만식은 옆에서 안내를 하던 주지스님과 필립을 번갈아 보며 이야기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한 분야에서, 한 위치에서 오랫동안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다 보면 도를 깨치게 되는 거지요. 요즘은 제가 꼭 그런 사람이 된 기분입니다. 팔 수도 없는 것이며 가져가기도 힘들 것이라는 스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만식은 계곡의 노송 한 그루를 옮겨와 심었다.
그날 필립은 노송 아래의 것들을 보았다. 계곡의 노송들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 아름이 넘는 지름을 가진 노송들이 서로 간격을 두고 서 있을 뿐이었다. 이제 막 자라난 어린 소나무도, 노송의 허리춤까지 따라잡은 청년의 소나무도 없었다. 오로지 노송들만이 계곡의 깊이만큼 솟아 있었다. 그중 한 그루를 옮겨 오던 날 필립은 그 빈자리에서 자라날 새 소나무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