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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 영(盈)에 돌아볼 권(眷) 길 영(永)에 권세 권(權) <Ⅲ>

등록일 2022-04-18 19:31 게재일 2022-04-19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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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이건욱

명패를 닦은 뒤 안경 닦이 천을 서랍에 다시 넣으며 영권은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인호냐? 나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배경소리가 시끄러웠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여기 노인 회관에 행사가 있어 나와 있습니다. 조금 시끄럽습니다.

영권 대신 지역구 행사에 참석한 모양이었다.

-그렇구나. 수고가 많다. 다른 게 아니고 너 최근에 필립 만난 적 있냐? 최만식 회장의 아들 말이다.

인호가 대답을 했다.

-아니요. 뭐, 특별히 만날 일이 없어서. 딱히 친할 이유도 없고. 아버지와 같이 만날 때 빼고는 따로 만난 적 없습니다. 나이도 저보다 열 살인가 정도 많을 겁니다. 아마.

인호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영권은 이마를 찌푸렸다.

-그래, 그래. 알겠다. 하여튼, 앞으로는 필립과 연락도 하고 그래라. 아무래도 나 보다는 젊은 너와 더 이야기가 잘 통하지 않겠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집안이다. 알겠지?

인호와의 통화가 끝난 뒤 영권은 비서관을 불렀다. 따로 말하지 않더라도 중간중간 경찰서에 연락해서 만식의 사건에 대해 확인하라 일렀다. 좀 더 자주 만났어야 해. 영권은 중얼거렸다. 영권과 만식은 일 년에 한 두 번씩 자식들을 데리고 골프를 치거나 여행을 가곤 했다. 자식들끼리 친해지라는 의미였지만, 자식들 사이에도 나이 차이가 좀 났다. 그나마 그것도 최근에는 뜸했다. 아이들 데리고 와 봤자 짐만 돼. 만식은 이렇게 말하며 혼자 왔었다. 둘이 성별이 달랐으면 결혼이라도 시켰을 텐데. 영권은 딸이 없는 것이 아쉬웠다.

 

-인공 폐 이식 수술을 받겠다.

만식이 필립에게 통보하던 날 그 자리에 안나가 있었다. 필립은 인공 폐 이식 수술을 반대했다.

-어떻게 그런 문제를 상의가 아니라 통보를 하는 것입니까?

필립의 목소리가 컸다.

-그 연세에 마취와 수술을 견딜 수 있을지, 수술하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 아닙니까?

-아직은 견딜 수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지금 있는 폐로도 충분히 숨 쉴 수 있으신 것 아닙니까? 암에 걸린 것도 아니고 왜 멀쩡한 장기를 인공 장기로 바꾸려 하시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필립이 말을 덧붙였을 때 만식은 필립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제 말씀은 다른 뜻이 아닙니다.

필립이 설명을 하려 했지만 만식이 말을 끊었다.

-나가라. 여기서. 지금. 당장.

필립은 방을 나갔다. 만식은 손을 더듬어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방문 쪽으로 집어던졌다. 핸드폰이었다. 소파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 만식은 곁에 서 있던 안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소파의 팔걸이에 걸터앉은 안나의 배를 쓰다듬다 안나의 허리에 머리를 기댔다.

-우리 아기가 많이 놀랐겠구나. 미안하구나.

안나가 만식의 아이를 가지게 된 것은 인공 장기들 덕분이었다. 그것들이 있어 만식은 안나를 만났고 안나를 안았다. 그것들이 없었더라면 살아있었을까? 젊은 안나를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신체적인 능력이 남아있었을까? 또한 그것들은 안나 뱃속 아기의 탄탄한 인생을 보장해 줄 것들이었다. 오십이 넘은 아들을 쫒아내고 아들의 머리 뒤로 핸드폰을 집어던질 수 있는 팔십 노인의 기세는 뱃속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나 스스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때까지 지속되어야 했다.

-앞으로 사십 년은 더 살아야지. 우리 막내가 결혼할 때까지는 살아 있어야지. 인공 폐까지 달게 되면 가능할 게야.

만식은 안나를 옆자리로 오게 했다. 오른손으로 안나의 머리 뒤 팔베개를 하고 왼손으로는 안나의 잠옷 상의의 단추를 풀며 안나의 귀에 속삭였다.

안나가 가진 것 중 제일 좋은 것은 몸이었다. 균형 잡힌 몸매와 탄탄한 근육, 필요한 곳에 자리 잡은 적당한 양의 지방조직들. 아비와 어미가 안나에게 내려준 유일한 우성의 것들이었다. 안나는 좋은 몸을 보여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남학생들과 오빠의 친구들로부터 제법 많은 구애를 받기도 했고, 그들 중 일부와는 사랑 비슷한 것을 해보기도 했지만 안나는 그 중 누구와도 미래를 약속하지 않았다. 그들의 숫기 어린 고백과 치기로 가득한 맹세들은 안나가 보기에는 너무 싼 것들이었다.

또래의 남자들이 안나의 미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안나가 벌어올 수 있는 약간의 돈과 몸을 원할 뿐이었다. 혼자 살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찌질한 인생 둘이 모인다고 더 나아지는 건 아니니까. 서로 원망이나 하겠지. 부둥켜안을수록 상처가 깊어지는 것, 난 싫어. 안나는 툭툭 던지듯 말하곤 했다.

/ 소설가 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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