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는 헬스트레이너였다. 상류층을 대상으로 하는 스포츠센터 소속으로 일하던 중 만식의 집으로 출장을 갔다. 만식을 담당하던 트레이너가 교통사고로 자리를 비웠을 때였다. 트레이닝을 받은 지 두 달이 되었을 때 만식이 안나에게 제안을 했다. 스포츠센터 그만 두고 내 개인 트레이너가 되는 게 어때? 원한다면 지낼 방도 마련해주지. 충분한 급여와 기대 이상의 자유 시간, 조건이 나쁘지 않았다. 안나는 만식의 개인 트레이너가 되었다. 그래도 남잔데, 한 번 더 생각해봐. 안나의 어미가 말했었다. 아빠보다 더 나이 든 할아버지니 걱정 마. 안나는 여행 가방에 속옷을 넣으며 대답했다. 아들이 하나 있다는데 같이 사는 것은 아니니 그것도 걱정할 것은 아니라 했다.
사귀던 남자가 반대했다. 안나는 그 남자와 헤어졌다.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만식의 집으로 짐을 옮기던 날 안나는 자신을 위해 준비된 방에서 만식이 직접 골랐다는 침대에 앉았다. 차라리 잘 되었어. 헤어질 이유가 필요했어. 엉덩이로 매트리스의 쿠션을 확인하며 혼잣말을 했다.
만식은 건강한 남자였다. 규칙적인 트레이닝과 의료진의 정기적인 관리 그리고 인공 장기들이 만식의 건강을 지키고 있었다. 트레이닝 중 만식의 옆구리에 안나의 손이 스쳤을 때, 안나의 가슴이 만식의 등에 닿았을 때, 안나가 허리를 숙여 시범이라도 보일 때면 만식의 몸은 뻣뻣해졌고 얼굴은 붉어졌다. 잠시 동안은 숨을 쉴 수 없었고 어지러웠다. 인공 심장만이 아무 일 없는 듯 규칙적으로 뛰었다. 저 나이에도? 안나는 놀랐다. 그리고 궁금했다. 일부러 몸을 대어 보기도 했고 몸매가 드러나는 운동복을 입고 만식의 눈앞에서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만식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주저앉거나 몸을 돌려 허공을 보면서도 힐끔거렸다. 안나는 만식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안나와 만식의 운동시간은 놀이 시간이 되었다. 놀이는 둘 사이를 친근하게 만들었고 친근함은 둘의 나이를 잊게 만들었다.
건강과 재산을 가진 수컷들이 다음으로 관심을 가질 것은 뻔했다. 권력, 그리고 여자. 젊은 여자를 두고 젊은 남자와 늙은 남자가 경쟁하기 시작했다. 늙었지만 육체적으로 밀리지 않고 충분한 부를 가지고 있다면 젊은 남자와 겨루어 볼 만했다. 젊은 여자의 입장에서는 둘 사이를 견줄 만했다. 암컷에게 수컷의 건강함이란 자신과 자식들을 잘 보살필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했다. 가죽 자켓을 입은 백발의 노인이 빨간 오픈카의 운전석에 앉아 경적을 울리고, 길을 걷던 젊은 남자가 놀라 몸을 피하고, 운전석 옆자리의 젊은 여자가 젊은 남자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입꼬리를 올리는 장면은 티브이 광고 속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안나도 그랬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젊은 남자와 사귀며 그의 집에서 지내는 것보다 전 부인과 사별한 돈 많은 늙은 남자와 사귀며 그의 집에서 지내는 것이 더 나아 보였다. 만식과 잠자리를 같이 하면서도 안나는 자신이 몸을 팔고 있다 생각하지 않았다. 서로 주고받은 감정에서 우러난 자연스러운 것이라 여겼다. 상대가 젊은 남자가 아니라는 것? 그게 어때서? 그 뿐이었다. 사람들은 안나와 같은 여자를 마이걸이라 불렀다.
안나는 가끔 스스로에게 물었다. 사랑은? 사랑? 사랑이야 언제든. 나는 아직 젊잖아. 대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만식은 안나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 날 필립에게 안나를 소개했다.
-내 아이를 가졌다. 너의 동생인 셈이지. 새엄마라 부르라 하지 않겠다. 하지만 네 아버지의 여자고 네 동생의 엄마다. 기본적인 예의는 갖추어 주었으면 좋겠다.
안나는 만식의 곁에 붙어 앉은 채 필립을 보았다.
-그 헬스트레이너?
필립이 물었다.
-그렇게 되었다.
만식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애들 엄마에게서 여자 트레이너가 상주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습니다만 이런 것도 하시는 줄은 몰랐네요. 그게 가능하다니. 아버지도 대단하십니다. 옆에 계신 분도 대단하시고. 아들 불러 자랑하실만하네요. 요즘 말하는 마이걸, 뭐 그런 겁니까? 아이고, 부러워라. 부럽습니다, 진정.
-그런 것이 아니다. 비꼬지 말거라.
만식의 곁에 꼭 붙어 앉아있던 안나가 자리를 고쳐 앉았다.
-축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부르셨습니까? 손녀 보기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하긴, 잘 되었네요. 언젠가 아버지 손녀가 삼촌이든 고모든 하나 있었으면 좋을 텐데 하고 아쉬워한 적 있었거든요. 아버지의 손녀에게 꼭 전해드리겠습니다. 삼촌이 될지 고모가 될지 알 수 없지만 할아버지가 널 위해 선물 하나 만드셨다고. 너하고 나이가 비슷한 할머니도 한 분 생겼다고.
의자의 손잡이를 딛고 일어서려는 만식의 손을 안나가 잡았다. 안나가 필립에게 말했다.
/ 김강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