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웠다. 우리 아버지가 왜 이리 가벼워, 왜 이리 가벼운 거야? 눈물을 흘리며 관을 붙잡아야 했지만 필립은 그러지 않았다. 그 무거운 것들을 속에 넣고 계셨어. 내 가슴과 등을 묵직하게 누르던 아버지의 무게는 그것들의 무게였어. 그것들이 사라지니 이렇게 가볍지 않아? 만식의 시신은 속을 파낸 통나무 같았다. 속을 다 파낸 통나무로 배를 만든다 했지. 그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겠어. 필립을 태운 만식의 영구차는 넓은 강 위로 놓인 다리를 건넜다.
사옥 정문 앞 노송 아래에 절반을 묻었다. 직원들이 나와 그 광경을 보았다. 일부는 울기도 했고 일부는 소름끼친다며 겉옷을 고쳐 입었다.
임원 중 한 명이 물었다.
-회사는 어떻게 할지?
-회장님 안 계신다고 회사가 망하는 건 아닙니다. 회장님이 회사를 그렇게 만드시지도 않았고. 회장님이 돌아가셨어도 회사는 그대로입니다. 하던 대로 하면 됩니다.
필립이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당분간은 후계 따위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해주세요. 부회장님이 있으시니 부회장님 중심으로 운영하시면 됩니다. 제가 어찌할지는 조금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겠습니다.
누구도 후계에 대해 묻지 않았지만 필립은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집 정원의 회화나무 아래에 나머지 반을 묻은 후 필립은 작은아버지 부부와 친지들을 배웅했다. 형도, 어머니도, 이제 아버지까지.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는 쓸쓸함, 서러움. 하루 정도는 그런 기분을 느껴야 할 것 같았다. 회화나무 아래를 보며 ‘아버지’ 하고 나지막하게 불렀다. 눈물이 따라 나올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입꼬리가 양쪽으로 당겨졌다. 콧구멍 안 깊은 곳 목 안으로부터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필립의 머리는 양쪽으로 흔들거렸고 오른발은 박자를 맞췄다. 필립은 만식과의 추억을 떠올리기 위해 애를 썼지만 떠오른 것은 회사의 조직체계와 운영에 대한 것이었다. 오래된 고민이었다.
-저.
안나였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반대쪽에는 아내가 안나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안나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호칭을 어떻게 할지. 사모님이라 부를게요. 사모님께 정식으로 인사드린 적 없지요. 장례식장에서는 인사를 드릴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제 이름은 안나예요, 안나. 사흘 동안 많이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을 가져다주신 것, 다리를 주물러주신 것 모두 감사해요. 여자로서, 아이를 가져본 여자로서 저를 살펴봐 주셨어요. 그리고 회장님, 저와 저의 아이는 어찌할지 말씀을 기다릴게요. 욕심 부리지 않겠습니다.
필립은 안나의 두 눈에 고인 눈물을 보았다. 닦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곧 자기가 할 일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손수건을 건넨 것은 필립의 아내였다.
-그러니까 허 형사, 현장에 남겨진 것 중에는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없단 말이지?
박 팀장이 허 형사의 책상으로 다가왔다.
-피해자의 것을 제외하고 남겨진 지문도 없습니다. 혈흔이 있기는 합니다만 모두 피해자의 것입니다. 많지도 않고요. 사실 그것도 이상합니다.
허 형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박 팀장이 허 형사에게 커피를 건넸다.
-앉아, 앉아서 이야기하자고. 커피 한 잔 하면서.
박 팀장은 옆자리의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피해자가 병원에서 타고 나간 본인의 차량에서 살해된 채로 발견이 됐는데 혈흔이 얼마 없다는 겁니다. 다른 곳에서 살해된 후 시신이 발견된 장소, 차로 옮겨졌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장기를 꺼내는 작업을 차 안에서 하기는 힘드니까 어딘가 다른 곳에서 범행을 저질렀다 볼 수 있지요. 문제는 어디서 했느냐 인데요. 차량이 고속도로 진입 톨게이트를 통과한 것과 차량 발견지의 도착 톨게이트를 통과한 것까지 확인을 했는데 그 시간이 빠듯합니다. 다른 뭔가를, 이를테면 장기를 꺼내거나 할 그런 시간이 안 되거든요. 장기가 한두 개도 아니고. 하이고, 완전 인조인간이더군요. 간, 폐, 콩팥, 관절, 심장까지. 다 인공 장기예요.
-조금만 더 살았으면 머리만 빼고 다 바꿨겠네. 역시 돈이 좋기는 좋네. 결과는 좋지 않지만 말이야. 하여튼, 그러면 이쪽 톨게이트를 지나기 전에 다른 차량이나 장소로 옮겨졌거나 저쪽 톨게이트를 지나서 옮겨졌거나. 그럴 수 있는 거네.
박 팀장이 허 형사를 보며 말했다.
-가능하죠. 그런데 그게 잡히는 게 없습니다. 병원에서부터 톨게이트까지의 차량 동선에 있는 CCTV를 다 살펴봤는데 특별한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쪽도 마찬가지고. 게다가 무슨 비밀이 그리 많았는지 썬팅을 심하게 해놓아서 차량 안을 볼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