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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걸 <Ⅲ>

등록일 2022-05-09 19:47 게재일 2022-05-1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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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이건욱

안나는 사랑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의 사랑이라 말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만식의 기분을 고려한 것이었다. 만식도 알고 있겠지. 그렇다고 미워하거나, 일부러 말을 꺼내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라 할 수 있는 감정도 아니었다. 그것을 사랑이라 말할 수 없을 뿐이었다. 만식은 안나에게서 안나는 만식에게서 서로 필요한 것을 얻었다.

-짓궂으시네요. 이 상황에서 대답 안 하면 사랑하지 않는 게 되잖아요. 우리 아이의 아빠고, 저를 엄마로 만들어 주신 분이에요. 제게는 소중한 분이십니다. 저는 그분의 아이를 가졌어요.

필립이 웃었다. 안나는 웃음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사랑 따위에 대한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말씀을 들어보니 아버지가 안나 씨를 사랑하는 것은 맞나 보네요. 아버지가 안나 씨에게 아이를 낳아달라고 하셨으니. 하하. 농담입니다. 결혼식은? 혼인 신고는 어떻게 하신 답니까?

결혼식? 혼인 신고? 이게 궁금했던 건가? 만식이 결혼식이나 혼인 신고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 없었다. 안나도 마찬가지.

-아마도 이야기 꺼내지 않으셨을 겁니다. 아버지의 아이를 가지는 것과 아버지의 부인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지요. 그 문제에 대해서만은 아버지도 생각이 많을 겁니다. 얽혀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지요. 사실 지난 번 인공 폐 이식을 할 것이라고 제게 말씀하셨던 그 다음날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아버지께서 부르셨지요. 그 자리에서 아버지께서 제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 젊은 여자를 너의 새엄마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결혼식은 물론이고 혼인 신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젊은 여자가 언제까지 내 곁에 있을지, 내가 언제까지 그 여자를 내 곁에 둘지 알 수 없지 않느냐. 하지만 뱃속의 아이는 다르다. 그 아이는 나의 아이이며 너의 동생이다. 그러니 더 이상 이 문제로 시끄러운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해하실까봐 말씀드리는 건데 아버지께서 하신 약속은 제가 요구한 것 아닙니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꺼내신 약속입니다.

치즈의 비린 맛이 속에서 입으로 올라왔다. 안나는 휴지를 들어 침을 뱉어내었고 입술을 닦았다. 만식으로부터 들은 적 없는 이야기였다. 안나는 만식이 자신을 무척 아낀다 생각했었다. 아니었나? 안나는 자신을 바라보던 만식의 눈길을 떠올렸다.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면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겠지만, 돌이킬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의 엄마로 살아야 한다. 안나는 뱃속의 아이를 아빠 없는 아이로 키우고 싶지 않았다. 구십 살이 다 되어가는 아빠일지라도.

-그렇군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잘 알겠습니다.

필립이 치즈 케이크를 더 드시라 권했다.

-맛이 비려요.

안나는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옆으로 밀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단지 안나 씨에게 스스로의 인생을 생각할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선의로. 그리고 남자 형제가 한 명 있던데. 이름이 ‘노마’던가요?

안나는 필립이 오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았다. 뒷조사를 했을 수도 있고. 그랬다 하더라도 따질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만식이 필립에게 했다는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네. 하나 있는 오빠지요. 로봇 관리사예요. 지금은 보잘 것 없어도 학교 다닐 때는 제법 수재 소리를 들었어요. 몇몇 공모전에 나가서 상도 탔구요.

-아. 네. 그렇더군요. 사이보그와 인간형 로봇이 주 전공이었더군요. 공부도 꽤 했던데. 요즘 젊은 사람들 삶이 다 그렇지요.

 

지난밤 안나가 울었다. 왜 그러냐. 노마가 다그쳤지만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흐느끼다 입을 열었다. 오빠, 밤늦게 미안해. 그러고는 전화를 끊었다. 노마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 노마는 안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굴 좀 보자, 오랜만에.

카페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는 안나의 배가 제법 불러 보였다. 저것이, 뭐가 아쉬워서. 노마는 안나의 선택에 동의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노마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안나 뱃속에는 이미 늙은이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고 그 아이는 안나가 원한 아이이기도 했다. 노마가 테이블 맞은편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자 안나는 허리를 세워 앉았다.

-왔어? 오빠, 오랜만이네.

노마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그대로 기대고 있어. 우리 사이에 무슨 예의야. 네 몸 편한 대로 앉아있어. 몸은 좀 어때? 아이는 잘 크고 있대? 먹고 싶은 것은 없어? 입덧은 안 하고?

-그렇게 많은 걸 한꺼번에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

안나는 등 뒤로 쿠션 두 개를 받히고 다시 기대며 말했다.

-그런가? 뭐, 대답은 한꺼번에 하지 않아도 돼.

/ 김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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