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회사는 우현에게 책임을 져 달라 부탁했다. 우현 개인이 실적을 올리기 위해 한 일로 진술해주기를 바랐다. 우현과 회사는 협상을 했고 결국 우현은 자신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했노라 진술했다. 실형을 선고받았다. 우현은 안나가 기다려 줄 것이라 믿었다. 이 년이면 돼. 이 년이면 금방이야. 안나가 품에 안겨 울기라도 하면 이렇게 말해 줄 생각이었다. 안나는 울지 않았다.
-이 년 동안 내가 어떻게 바뀔지 나도 몰라. 오빠를 사랑하지만, 사랑이 곧 결혼은 아니지. 인생에 사랑이 한 번만 있는 것도 아니고. 잘 다녀와. 뒷일은 그때 가서 보자고. 지금 이렇다 저렇다 헛된 약속을 하지는 않을게.
우현과 안나의 첫 번째 이별이었다.
형기를 마치고 감옥에서 나온 우현이 다시 안나를 찾았을 때 안나는 여전히 혼자였다. 이 년 동안 몇몇 남자들과 교제를 하기는 했었지만 동거나 결혼에 이를 정도의 관계는 아니었다. 다시 만난 첫날 안나가 말했다.
-오빠를 기다리겠다 말한 적 없어. 하지만 오빠만큼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은 사실이야.
우현이 안나에게 가졌던 섭섭함은 그렇게 사라졌다. 다시 만난 기념으로 간 여행에서 둘은 꼬박 이틀을 숙소에서 나오지 않았다. 엉겨 붙은 채 서로를 탐했다. 힘이 떨어지면 잠을 잤고, 눈을 뜨면 다시 엉겨 붙었다.
-새로 사업을 시작했어. 사업이 자리를 잡으면 너를 데리러 갈게. 이제는 이야기해야지. 노마에게도, 너의 부모님께도.
우현이 말했을 때, 안나가 대답했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결정한 것 없어. 내가 말했지. 사랑이 곧 결혼은 아니라고. 오빠. 너무 서두르지 마. 너무 밀어붙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 아직 어려.
이제는 안나를 알 것 같았다. 이미 한 번 헤어져 본 적 있는 터라 안나가 동기 남자와 밥을 먹거나 선배 오빠라며 술을 같이 마셔도 우현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우현이 신경을 쓰는 것은 딱 한 가지였다. 안나의 직업.
안나의 전공은 사학과였다. 우현은 안나가 전공을 살려 취직하기를 원했다. 대학원에서 공부를 더 하는 것도 괜찮은 길이라 여겼다. 보습학원 선생님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상상이었고, 지방자치단체들의 역사관 큐레이터가 되는 것도 멋진 일이라 생각했다. 엄마와 아내의 직업으로 적당했다.
안나의 생각은 달랐다. 안나는 자신의 전공에 흥미가 없었다. 다들 가는 대학이라서 간 것이고, 성적에 맞추어 들어간 전공일 뿐이었다. 안나는 몸에 더 자신이 있었다. 아비와 어미가 물려준 우월한 몸을 활용하고 싶었다. 피트니스모델이 되거나 헬스트레이너가 되려했다.
-나는 헬스트레이너, 피트니스 모델 둘 다 싫어. 나는 네가 네 전공을 살려서 직업을 선택했으면 좋겠어.
우현이 말했다.
-나는 내 전공이 싫은걸. 좋아하지도 않는 것으로 평생 직업으로 삼으란 말이야? 안나가 되물었다.
-그래도 피트니스 모델이 뭐고, 헬스트레이너가 뭐냐?
우현이 인상을 썼다.
-왜? 그게 어때서? 요즘 사람들이 자기 건강을 얼마나 살피는데. 사람들 건강에 도움도 되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고. 도대체 반대하는 이유가 정확히 뭐야?
안나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난 다른 사람들이 네 엉덩이, 네 가슴, 네 허벅지를 힐끔거리는 게 싫어. 그게 어쩌다 있는 일이 아니고 매일매일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게 더 싫은 거야. 큐레이터나 선생님. 얼마나 좋아. 엄마나 아내의 직업으로는 딱 이지. 내 마음, 내 기분을 모르겠어?
우현이 대답했다.
-오빠. 웃긴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아. 우현 오빠가 날 정말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구나.’ 할 줄 알았어? 나. 그런 생각 안 들어. 오히려 ‘이 사람도 어쩔 수 없는 한국 남자구나.’ 하는 생각만 들어. 내 몸이야. 내가 자랑스러워하는. 오빠도 내 몸 때문에 날 좋아하기 시작한 거잖아. 안 그래? 남들이 내 몸을 힐끔거리든 정면으로 쳐다보든 나를 보고 있으면 나는 오히려 자신감이 생기고 기분이 좋아져. 내가 자신감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좋아. 그러니 더 잘할 수 있는 거고. 그리고 내가 왜 벌써부터 엄마나 아내로서의 역할, 이미지를 생각하면서 직업을 골라야 하는데? 듣고 보니 순전히 오빠 중심인 거잖아.
두 번째 이별이었다.
둘은 또 다시 만났다. 다시 만난 안나는 인정받는 헬스트레이너가 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우현이 먼저 연락했다. 안나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감당해야지, 감당할 수 있어. 궤도에 오른 사업이 자신감을 주었다.
-오빠가 걱정했던 대로 힐끔거리며 곁눈질하는 남자들, 많아.
안나가 웃었다.
-그 사내들 덕분에 내가 월급을 조금 더 받고 있지. 뭐 나쁘지 않아. 지들이 내 몸을 상상하며 어디서 무슨 짓을 하건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그래도 내 몸에 터치하는 것은 칼같이 자르고 있어.
이번에는 우현도 같이 웃었다.
-어, 웃네. 오빠도 이제 조금 바뀌었나 보네.
웃고 있는 우현을 보며 안나가 말했다.
-바뀌어야지. 그래야 모시고 살지. 우현이 대답했다.
-그래, 그럼 내가 다시 만나주지. 오빠 집 어디야.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는 것 아니지? 오늘 오빠 집에 가자. /김강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