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명징한 총성과 내 포효(咆哮)가 맞닥뜨려 침엽수림들의 따가운 비명이 쓰러지고 쌓인 눈 더미들이 하얗게 겁에 질릴 날은 올 것입니다. 숨가쁜 입김이 눈사태처럼 헝크러져 꼭 한번은 그대와 내가 그 눈 더미 속에 함께 묻힐. 그대 가슴의 살이 파헤쳐지고 내 가슴의 핏톨이 흩어져 눈더미 속에서 우리 서로의 가슴을 부둥켜안을 그런 굶주린 화약(火藥)같은 날이. (부분 발췌)이 시인에게 사랑은 폭발하는 것, 과격하고 두려운 그 무엇이다. 사랑의 갈구는 이 “굶주린 화약”이 터지길 기다리는 것이다. 이 화약이 터질 때, 사랑하는 그대와 나는 서로를 죽이면서 해체되어 용해되고 섞여버릴 것이며, 너와 나의 구분도 없어질 것이고, 결국 함께 묻힐 것이다. 죽음과 같은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불러오는 것, 삶의 찬란한 폭발-사랑-을 불러오는 것이 이 시인의 과격한 사랑법이다. 문학평론가
2022-03-02
나무들이 마주서서 악수를 한다얼어붙은 겨울 강을 건너왔느냐고반갑다고수많은 가지와 가지들이 손을 마주잡고 흔드는4월 윤중로에는말없는 말들이 하얀 뭉게구름으로 피어오르고구경나온 발걸음도 뭉게구름봄날이 쏟아낸 군상들, 더러는 둘이 너댓이 모여앉아싸목싸목 봄을 베어 먹는다스피커가 토해내는 비발디의 봄이짤랑짤랑 은방울 소리 꽃길을 가고내 속에 잠들었던 홍매화 꽃망울 하나꿈틀꿈틀 기어 나와늙은 벚나무 가지 위에 올라앉는다새로운 생명을 출산하는 자연의 생성력은 자연물들이 무조건적으로 서로 주고받기 때문이다. 이 생성력은 위의 시에서처럼 도시의 일상 풍경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겨울을 견뎌낸 나무들이 악수를 하고, 나무의 가지들도 서로 손을 잡는다. 봄의 생명력이 ‘윤중로’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구경나온 사람들의 발걸음에도 생명력이 지펴 뭉게구름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홍매화 꽃망울 하나’가 ‘꿈틀꿈틀’ 태어난다. 문학평론가
2022-03-01
나무 잎사귀 사이로하늘 한 자락 만져본다한 송이 솜털구름그리움인양 서럽다차가운 새 한 마리솜털구름에 문양을 남기며나뭇잎 속으로 숨는다마음에 머문새의 잔영푸드득,사랑이 날아왔다촉각을 통해 시인과 세계는 육체적으로 교통한다. 그 교통은 몸에 새겨진 기억들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하늘을 만지니 보드라움이 느껴진다. 그 하늘엔 ‘솜털 구름’이 떠 있기에. 솜털 구름의 촉감은 당신 몸의 부드러움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 이젠 당신의 몸을 만질 수 없기에, 그 그리움은 서러움을 낳는다. 그때 새 한 마리가 “나뭇잎 속으로 숨”으며 구름에 남긴 문양이 “새의 잔영”으로 시인의 마음에 머문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한다는 깨달음! 문학평론가
2022-02-27
벌레 먹은 자리 먼저 타올라붉어진잎맥 푸른 언저리여운처럼 가슴에 남아아득히 푸른 길 따라가 보면아직도 그 체온 잔잔히내 손에 남아 있다바람이 불어와 그 사랑 흙에 묻히고메마르게 부서져 흩어지기 전에푸르렀던 꿈금빛으로 뿌리는 오후의한 그루 나무이고 싶다시인은 사라지고 있는 낙엽들의 꿈이 금빛이라고 믿는다. 삶의 막바지에서 찬란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시인은 잎들을 떨어뜨리는 나무처럼 사라지는 기억들과 사랑을 찬란하게 발산하며 사라지고 싶다는 욕망을 품는다. 시인 역시 아직 파괴되지 않은 꿈들을 찾아 기억하고 시화(詩化)하여 빛내고 싶은 것이다. 이제 살 힘이 소진되어 낙하하지만 푸른 꿈들을 간직하면서 금빛으로 화하는 낙엽처럼. 문학평론가
2022-02-24
멀리 선 나무가 평화스러워 보여도몸을 만지면 상처투성이이네.바다가 멀리서 태평한 듯 보여도발을 디디면 파도가 그의 상처이네.강물이 조용히 명상에 든 것은굵은 비가 울고 간 후이고갈대가 하얗게 꽃을 흔듬은밤새 찬바람과 싸운 끝이네.자연은 슬픔을 꽃으로 피우네.사람만이 슬퍼서 병이 나네그리고 병이 깊을 때,그의 영혼은 그늘의 새순 같은 詩가 되네.자연은 평화롭게 존재하지 않는다. 상처투성이 나무, 바다의 상처인 파도, 굵은 비의 울음, 찬바람과 싸우는 갈대, 이 모두는 중생의 삶처럼 슬픔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연은 사람과는 달리 병나지 않는다. 슬픔을 꽃으로 승화시키기에. 반면 슬픔 속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아픈 영혼은 ‘새순 같은 시’를 낳는다. 그리고 그 시는 사람이 꽃 피우는 나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새순-을 틔울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2-23
이보리 외투에 금빛단추가 반짝인다오랫동안 묵혀 있던 지친 희망이옷장 문을 열 때면 빛을 보낸다외투 군데군데 좀이 슬고단추를 채우던 기억도 잊혀졌지만아이보리색 외투는 옷장 한쪽을 지키고 있다어둠 속에서도 떠날 줄 모르고내게 가끔씩 20W의 빛을 보낸다이젠 통 어울릴 것 같지도 않고재활용 할 수도 없는데온 몸으로 햇살 받기를 꿈꾸고 있다내 속으로 끌어안고 있는타오르는 그리움설레이는 사랑이란 단어처럼분리되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는 이 미련들20와트 희망의 빛을 보내는 금빛단추. 이 단추를 달고 있는 외투는 아직 지워지지 않은 여러 기억들을 안고 있다. 그리움이나 설레는 사랑과 같은 정념들. 포기되길 강요당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정념들. 이 정념들을 품고 있는 기억들이 단추의 빛을 만든다. 그 단추를 단 이 기억 상자-외투-는 사랑과 그리움이 활짝 피어날 수 있기를 기다리며 ‘햇살 받기’를 꿈꾼다. 모든 기억과 정념들을 밝게 드러낼 햇살을. 문학평론가
2022-02-22
덕진 연못에 가면오색천으로 옷을 기워 입은 사람이 단소를 분다크고 작은 천조각을 아무렇게나 이어붙였다명주천에 무명천, 두꺼운 모직천도 보인다얇고 두꺼운 천들을 모아 붙여 울퉁불퉁하다흠집을 한 실이 동아줄이니 더욱 편편하지 않다듬성듬성한 바늘 땀으로 실밥마저 늘어져 있다꽃잎이 조금씩 열린다차차로 물 위에 연꽃이 뜬다봉오리는 이미 보이지 않는다누더기, 남루.천지를 끌어안은 사람이 단소를 분다물 위에서 연꽃이 고요하다.“천지를 끌어안은 사람”이 부는 단소 소리는 물을 깨운다. 물은 연꽃을 띄우고 그 꽃잎을 조금씩 열게 한다. 모두가 부처인 새로운 세상이, 대동세상이 열리기 시작한다. 물고기들이 자유롭게 희희낙락거릴 수 있는 세상, 자유로운 세상이 장엄하게 도래하기 시작한다. 선재동자처럼, 물은 온갖 버려진 존재들이 굴러다니는 세상을 돌면서 어루만지고는, 저기 연못이 되어 ‘연꽃-화엄 세상’을 새로이 열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2-02-21
우리나라의 기운이서로부터 시작하여대관령에서 불끈 솟았다가동해로 내리닫는 곳봄은 아련함이 아니다노곤함도 아니다바람이다청록색 바다,이빨 드러낸 파도다힘과 힘의 부딪힘이다대관령과 동해가 온 몸으로 부딪혀미친 듯이솟구치는 것이다.시인은 대지에서 태어나는 생명의 탄생에서 소나무의 어떤 뒤틀림을 투시한다. 이 시인에겐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은 새로움을 창출하려는 의지와 이를 억제하려는 세상 사이에 벌어지는 강렬한 투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 ‘봄’은 서쪽에서 시작하여 동쪽의 끝에 다다르는 생명의 기운과 영동 바다 사이의 “힘과 힘의 부딪힘”으로 인해 거대하게 “이빨 드러낸” 파도가 “미친 듯이” 솟구치는 계절이다 문학평론가
2022-02-20
두터운 표피 속에 모든 가능성을 깊이 저장하고순수의 알몸 하나로겨울을 버틴다살아오는 동안 만났던 벗들의 마음을이웃들이 보여주던 따듯함을지난해 보았던 크고 작은 슬픈 이야기들을마음의 갈피에 갈무리한다푸른 가지 위에 날아와 쉬어가던 산새들어딘가로 떠나버린 산골에서안으로 외로움을 삭이노라면 더욱 단단해지는 갑옷그 속에서 값진 꿈을 빚어빛나는 모습으로 부활하려 한다나무는 외로움을 삭이는 중에 “더욱 단단해지는 갑옷”을 만들고 더 나아가 “값진 꿈을 빚어”낼 줄도 안다. 거기에서 시인은 “빛나는 모습”을 발견하고 ‘부활’의 모습을 인지한다. 시인은 나무가 내뿜는 빛 속에서 부활하는 법을 배운다. 외로움을 삭이고 꿈꾸고 상상하기. 시 쓰기는 부활을 위한 실천이다. 나무와 시인이 시 쓰기를 통해 동화될 때 시인의 존재 전화는 이루어지기 시작하며, 그는 새로이 부활한다. 문학평론가
2022-02-17
지금 내게 바람은바짝 마른 파동파동치는 고통이다세상은 바짝 마른 굉음으로 가득하다유리창과 문짝과 지붕과 벽들이공중에서 부딪친다바람의 일격! 바람의 이격! 바람의 삼격!부러진 굴뚝이 부서진 책상 위에 쓰러져 있다나는 두 눈 벌겋게 뜬 채쩍쩍 갈라져 해체된다해체되어바짝 마른 해일 속을 떠다닌다우수도 갈망도 없이이 시에서 황사는 고통의 상태를 의미한다. 시인에게는 그 상태가 세상이다. 바람이 가지는 가벼운 이미지, 상승 이미지는 여기에서 찾을 수 없다. 황사가 지나가면 날카로운 망이 지나가는 것처럼 만물은 분쇄되며, 결국 ‘나’마저 황사에 의해 “쩍쩍 갈라져 해체”되어 “우수도 갈망도 없이” 떠다니게 된다. “바짝 마른 해일”로 뒤덮인 이 세상에서 “부서진 책상 위에 쓰러져” 쓰는 시란 ‘공포의 기록’과 같으리라. 문학평론가
2022-02-16
떨리는 먹물 한 방울로 내 미망을 점안하였습니다.삼라만상엔 없는 형상을 하나 만들었습니다.그렇게 미망의 불을 하나 만들었습니다.표적이 없는 내 마음을 향하여 불의 활을 당겼습니다.드디어 강물은 흐르고 불길은 타오릅니다.배는 떠나고 끊어진 밧줄도 먼 바다로 떠나고내가 찍은 먹물 한 점에서 불의 날개가 퍼덕거립니다.내가 그린 바위는 깨지고 물소리는 부서집니다.내가 쓴 글씨는 목청을 떨고 있습니다.마음 한 자리엔 시퍼렇게 서슬이 피어 오릅니다.어둠 속에 버렸던 개울 물 소리가 돌아와 빛납니다.아 버렸던 내 마음이 무명에서 돌아와흐느끼고 있습니다.미망의 불 한 점, 점안 하나를 통해 모든 것이 불타오르지만 결국 고요 속의 개울물 소리만 남는다. 어떤 미지의 형상 하나―점안 하나―의 발견은, 저 무명 세계로의 추락을 통해 튀어 오르는 불꽃들을 만들 것이다. 그 불꽃들은 모든 현상들을 휩쓸어갈 터, 시의 위력은 이렇듯 막강하다! 하지만 타고 있는 그 불꽃들이 다 소진될 땐 어디선가 들려오는 개울물 소리만 들릴 것이다. 그리고 흐느끼는 마음. 문학평론가
2022-02-15
들바람푸른 도화지에인주 자국 남겼다두 점색 고운자국그 옆에눈치 보며 앉아 있는까치하늘 도화지에낙관두 개.절제된 발언 뒤에 흐트러짐 없는 여백이 자리 잡고 있는 시다. 단정한 여백은 쌓인 흰 눈을 볼 때 느끼는 깨끗함을 독자에게 느끼게 해준다. 투명해 보이기까지 하는 여백의 깨끗함은 사심을 버리는 마음의 훈련, 사사로움 없는 시선을 유지하려는 시정신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이 되기’를 통해 그러한 시선은 획득될 수 있다. 현현하는 세계에 대해 새로움과 경이로움을 느끼며 전 존재가 뒤흔들리는 체험으로 이끌 수 있는 아이의 순진무구한 시선 말이다.문학평론가
2022-02-14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 낸 추억들이 밟히고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진눈깨비 뿌리던 날, ‘나’는 거리를 걷고 있다. 거리에서 그는 “취한 사내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정거해 있는 ‘빈 트럭’을 본다. ‘구두 밑창’으로 “추억들이 밟히”는 소리와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밟히는 소리도 듣는다. 저 진눈깨비 내리는 거리의 외롭고 쓸쓸한 모습이 시인의 기억들을 불러온다. 외로운 빈 트럭과 쓸쓸하게 쓰러지는 취한 사내들에 대한 묘사와 시적 화자의 어린 시절들을 불러오는 회상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문학평론가
2022-02-13
나는 달의 감식가,평생 달을 맛보도록 되어 있다멀리 좁은 길들이 꿈틀거렸다나는 손을 뻗어 안 보이는 곳까지그들을 쓰다듬어주었다길들은 이내 온순해졌다둑을 핥으며 들불이 번지고 있었다둥근 달이 안개 속에 떠 있었다나는 달을 깊숙이 빨아들였다하늘이 캄캄해지고 길들이 어둠 속에서 낮아졌다몸이 환해졌다내가 둥글게 떠오르고 있었다‘나’는 밤의 세계와의 회통에 성공한 능수능란한 마녀 같은 이다. 그가 길들을 쓰다듬으면 이내 길들은 온순해지는 것이다. 길이 미래를 상징한다면, 이제 미래는 이 ‘나’의 것이다. ‘나’는 “달을 깊숙이 빨아들”이고는 역설적으로 새롭게 생명의 빛을 내뿜어 몸이 환해진다. 죽음을 들이마심으로써, 즉 주체의 해체를 감행함으로써, ‘나’는 세계와 동화되고 새로운 삶을 향해 달처럼 “둥글게 떠오”르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2-10
산에서 내려와서아파트촌 벤치에 앉아한 조각 남아 있는 육포 안주로맥주 한 병을 마시고지하철을 타러 가는데아 행복하다!나도 모르겠다불행 중 다행일지행복감은 늘 기습적으로밑도 끝도 없이 와서그 순간은우주를 온통 한 깃털로 피어나게 하면서그 순간은시간의 궁핍을 치유하는 것이다.시간의 기나긴 고통을잡다한 욕망이 낳는 괴로움들을완화하는 건 어떤 순간인데그 순간 속에는 요컨대 시간이 없다술 한 잔 하고 “지하철을 타러” 갈 때 ‘기습적으로’ 닥치는 행복감은 우리도 자주 경험하는 감정이다. 시인은 바로 그 순간이 “우주를 온통 한 깃털로 피어나게” 한다고 말한다. ‘시간의 궁핍’을 치유하는 것은 행복감이 “밑도 끝도 없이” 밀려드는 어떤 순간이다. 이 “시간이 없”는 ‘순간’은 시간에 사로잡힌 삶을 치유한다. 그 순간은 우주를 가볍게 피어나게 하며, 우리들이 그 우주와 즐거이 교통할 수 있게 한다. 문학평론가
2022-02-09
비가 내린다.흠씬 젖는 육체와 정신이 없고그 사이가 흥건하다. 사랑이여 이대로사이와 사이만 남아 가시화하는거울과 거울의 대면 속으로내 모든 것을 너의 것으로펼쳐다오.난해한 육체의 꽃잎과 꽃잎과 또 꽃잎과겹쳐지는 꽃잎들과육체적인 정신의 꽃잎들과단 한마디, 등 뒤에 네 숨결과비에 젖은 육체와 정신이 사라지고 그 사이만 흥건히 남아 있다.시인은 사랑에게 청원한다. 거울과 거울의 사이와 사이, 그 대면 속에 “내 모든 것을 너의 것으로/펼쳐”달라는 청원. 이 ‘내 모든 것’이란 무엇인가? 거울과 거울 사이에서, 육체와 정신 사이에서 겹쳐지는, “육체적인 정신의 꽃잎”이다. 사랑은 그 “내 모든 것”을 “등 뒤에 네 숨결”로 펼칠 수 있다. 이 꽃잎을 역사 또는 삶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문학평론가
2022-02-08
아이는 한 손으로 젖을 움켜쥐고넓은 들에서 하늘로 무너지는강을 보고 있다강에는 강물이 흐르고물속에서 날개가 젖지 않은새 한 마리가강을 건너가고 있다두개의 시선이 존재한다. 강을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뒤의 연)과 그 아이를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시선(앞의 연). 이 시는 대상 세계를 그림처럼 묘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읽어보면 기묘한 초현실주의 회화를 보는 듯한 착란적인 느낌을 준다. 이는 “하늘로 무너지는/강”이나 “물속에서 날개가 젖지 않은”이란 모순적 표현 때문일 텐데, 이를 통해 이 시는 대상 묘사로서는 이룰 수 없는 독특한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는 보이는 세계와 화해하거나 안주할 수 없는 시인의 고투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문학평론가
2022-02-07
아무도 모르게 달려온 시간들이들녘에 깔려 밤을 재촉한다길게 울며 언덕을 내려가는염소들은 이제 밤을 볼 것이다구름들은 추억을 볼 것이다더욱 급하게 시간들은 들을뒤덮고 염소와 나무들은어둠속에 있다 우리는모두 어둠속에 있다걸어온 길의 발자국을 기억하는데도우리는 숨가쁘다 대지는 신음으로가득하다 언제 우리는 밤과 함께독이 될 수 있으리오낮에서 밤으로 뒤바뀌는 시간, 이제 구름들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몸을 감출 것이다. 우리가 걸어왔던 흔적들인 발자국도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게 될 것이며 풍경은 그야말로 적막과 망각 속으로 빠져들어 갈 것이다. 시인은 새벽이 아니라 밤과 함께 더 깊어지는 시간, 우리가 독이 되는 시간을 기다린다. 종말에 대한 예감으로 가득 차 있는 위의 시는 밤으로 표상되는 정지된 시간을 전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2-02-06
때까치는 무리짓지 않는다혼자서 행동한다꽃이 있는 공간을 날지 않는다한 마리 새가잎 진 느티나무 아득한 우듬지외로운 높이에 이를 때까지투명한 가을 하늘 전부를가랑잎 뒹구는 스산한 계곡 캄캄한 깊이를노을에 물든 날개를 흔들며단독자처럼 혼자서 건너지 않으면 안된다이 시는 ‘혼자서’ “가을 하늘 전부”와 “계곡 캄캄한 깊이”를 건너고자 하는 시인의 강인한 의지와 포부가 단호하게 표명되고 있다. 시인이란 대상을 변용시켜 내면화하고 삶의 의미와 무의미를 감당해내면서 드러내는 이다. 그것은 ‘외로운 높이’에 이르거나 ‘캄캄한 깊이’에 들어가 보지 않으면 이루어내지 못할 일, 이 시는 시를 쓰면서 부딪치게 되는 ‘아득한’ 세계와 씨름하는 시인의 고독을 잘 보여준다. 문학평론가
2022-02-03
받기로 한 돈이 입금되지 않은 날짧은 전화 한 통으로 약속이 깨진 날미안하다는 한마디로 인연이 다한 날밤새 핀 줄도 몰랐던 꽃들이 죄 져버렸고끓어 넘칠 듯한 신열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고나는 문득어떤 굴욕에도 반응할 것 같지 않은물기 없는 고목들의 한숨을 상상했고그저 따신 밥 먹고 제 영혼을 이불 속에 가두어아직 철없는 아이들을 향해 끝내 유치한 뉴스를 향해입바른 소리나 해대는 소심한 가장의 잔소리나는 후회보다 끈질긴 습관이 싫은데오늘 하루 양심 없이 하늘만 청명했고나는 아무것도 아닌 나였고시인의 삶은 현재 “밤새 핀 줄도 몰랐던 꽃들이 죄 져버”린 시간에 놓여 있다. 삶의 꽃은 져버렸고, 그래서 삶은 “소심한 가장의 잔소리”만 아이들에게 해대는 습관이 지배하게 되었다. 즉 “나는 아무 것도 아닌 나”가 되었다. 하나 시인은 이 현실에 체념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몸에 신열이 난 것은 그가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굴욕에 반응하지 않는 ‘고목’과 같은 삶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