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영옥
내 방 벽에 귀기울이면 강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벽과 벽지 사이로 찰랑찰랑 스며드는 물소리
꽃무늬 벽지의 마르지 않는 습기 사이로
슬리퍼 한짝 떠내려가고
짙은 안개가 조금씩 범람하는 방을 지나간다
(중략)
벽지 속 강물을 건너시는 아버지
끝내 벽은 사라지지도 않고
꽃무늬 벽지의 꽃들이 피어나고 시들어간다
어느날 벽지 속 강물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들리지 않는 물소리,
벽은 이제 바삭거리는 쎌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낸다
꽃무늬 벽지의 꽃들이 폐허 속에서
더욱 환한 꽃을 피운다 (부분)
위의 시에서 ‘벽’은 기억의 끝에서 마주치게 되는 현실로서 나타난다. “끝내 벽은 사라지지도 않”는 것이다. 어린 시절 기억 속 아버지는 메마른 벽지 같은 지금 현실엔 존재하지 않는다.(시인은 이 현실을 ‘폐허’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 벽지의 꽃무늬가 시인의 몽상을 유도하며, 기억과 현실 사이의 막인 ‘꽃무늬 벽지’는 그나마 시인이 현재의 삶을 견디며 몽상의 ‘환한 꽃’을 피울 수 있는 장소가 돼준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