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불빛도 산그림자도 잃어버렸다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헛되이 던진 돌멩이들,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내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칠갑산 중턱의 호수인 겨울 천장호 가를 거닐며 시인은 그 호수의 마음을 읽어내고 있다. 호수에 돌을 던지듯 우리는 세상을 향해 영욕의 헛된 손짓들을 수없이 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무리 돌을 던져도 가슴을 열지 않는 완강한 호수처럼 세상은 인간의 부질없는 손짓에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진실되게, 참참히 세상의 중심을 향한 우리의 손짓이 이어진다면 세상은 그 속내를 보여주지 않을까. 시인
2013-12-13
끝물 복숭아 만원어치가 한 광주리다그중 예사 놈과 달리먼저 눈에 들어오는 놈 있다몸 구부려 들어보니새가 쪼아 먹은 흔적이 역력하다부리로 콕콕 쪼다바삐 어딜 떠난 사이주인이 수확해 왔던 모양새의 주인과 나와의 겸상이라니이즈음, 세상 분간 안 되는 나도깊게 물러 터진 자리에향내 물씬 배이려나만원어치 산 복숭아 알맹이들 속에는 새가 쪼아 먹은 흔적이 역력한 복숭아가 들어있었는가 보다. 새는 복숭아 그 단물을 찍어먹다 어디로 바삐 떠난 걸까. 그리고 그걸 수확해온 과수원 주인은 왜 그것을 버리지 않았을까. 세상사가 다 그런건 아닐까. 최선을 다해 살아가다보면 온전히 챙기지 못하고 뭔가 모자라고 삐뚤어져 있고 상한 데가 있지만 그것은 그런대로 깊게 밴 맛과 멋이 있는 것이다. 그 속에서 그윽한 향내가 풍겨나는 것이다.시인
2013-12-12
백로인지 두루미인지 모를 새 한 마리어두운 바다에서 날아오다 나를 보더니곧장 선회해서 어두운 바다로 돌아갔다새는 내가 그렇게 불편했던 것일까얼마 전 어느 저녁 이 길에서 있었던흉흉한 사건을 새도 들은 것일까괴한에게 납치당해 영문 모를 죽음을 당한한 여인의 혼이 벌써 저 새가 된 것일까아, 먼 수평선에 점점이 뜬 배들드문드문 불 밝히고 한치 잡이에 열중인데새조차 유턴해서 달아나버린 종달리 바다에서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괴한일 수 있겠구나 생각에성산포까지의 바닷길을 살살 걸어갔다작년인가 제주 올레길에서 트레킹하던 한 여자가 살해되었다. 평화의 섬 제주에 조성된 아름답고 평화로운 둘레길에서 사람이 상한 것이다. 가슴 아픈 일이고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새들도 곧장 선회해서 날아오지 않고 어두운 바다로 날아가버린다고 생각하는 시인은 나도 누군가에겐 괴한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조심조심 성산포 바닷길을 걸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무서운 세상이다.시인
2013-12-11
지리산 깊은 골짝에서나볼 수 있다는 곰취도심속 텃밭에서 고개를 쳐 들고무심히 대하는 네가 싫다반가워 다가서는 거리만큼고개를 흔들며 나를 모른다하지만네 뿌리 내린 텃밭을 보니왠지 낯설다우왁스런 누군가의 손에청청했을 네 생이 송두리째 뽑혀져그 땅에 심겨진 것처럼이곳에서 정들지 못한 채오십 나이 넘어 살고 있다만이 땅이 낯선 것은너나 매 한가지 아닌가지리산 깊은 골짝에서 자생하는 곰취가 어느 날 도심의 어느 텃밭에서 자라고 있음을 본 시인은 반가움보다도 왠지 낯설고 어울리지 않음을 느낀다. 생육의 조건들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의 삶 또한 다름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쉰이 넘도록 여러 삶의 여건들에 만족하지 못하고 정들지 못하고 낯설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식물도 풍토가 맞아야하거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어떤가 생각해봄직한 아침이다. 시인
2013-12-10
아직도 길을 걸으며 무수한 꿈을 꾼다. 서울에 있는 딸애한테서 전화만 와도, 수화기를 든 채 꿈을 꾸고, 내일 오전에 예초기 한번 돌려야지, 하는 생각만 해도 그냥 꿈을 꾼다. 멍 하니 강물을 바라보다, 풀쩍 뛰는 잉어를 보는 그 짧은 순간에도 꿈을 꾼다. 붙잡고 싶은 것이다. 붙잡히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마다 벗겨지는 허물, 양파 같은, 그 마지막 텅 빈 꿈의 경계에 이르고 싶다. 망망한 바다의 그 경계를 넘고 싶다.인간의 바람과 욕망은 끝이 없다. 어쩌면 평생을 무수한 바람의 꿈을 꾸면서, 그 꿈속에서 살다 가는 것이 인생일는지 모른다. 금방 이뤄질 수 있는 사소하거나 쉬운 것에서부터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꿈에 젖어 있는 것이 인생이다. 사실이지 그 꿈은 헛된 것이 아니라 에너지원이고 꿈의 실현을 위해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아닐 수 없다.시인
2013-12-09
저무는 모서리 끝으로귀뚜라미 운다경경경(輕輕輕)…방바닥에뒹굴다 멎은 시계 초침경경경(輕輕輕)…달빛에 바랜아이놈의헌 신발 한 짝경경경(輕輕輕)…녹슨 시간 위로귀뚜라미가 운다하루가 저무는 풍경을 녹슨 시간으로 바라보면서 귀뚜라미를 중심으로 버려진 시계의 멎은 초침과 아이의 헌 신발 한 짝과 연결시키면서 소멸한 한 모습을 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경경경이라는 불경의 낭송 소리와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치환하는 시인의 발상이 경쾌롭고 재밌다. 깊어가는 가을 밤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귀 기울여보고 싶어진다. 시인
2013-12-06
한 소년이 내 어깨에 기대어 잠 들었다버스는 흔들리고햇볕은 내리쬐고달콤한 잠 속으로 소년은 자꾸만 빠져 가는데어깨는 점점 축축해진다남의 땀을 싫어하지만피할 수는 없는 일내 어깨에 기대어 내가 잠들 수는 없으니까잠들기 위해누군가의 어깨가 간절히 필요할 때가 있으니까우리 몸은 누군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니까버스에서 한 소년에게 어깨를 내주며 느끼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시인의 말처럼 우리 몸은 누군가의 영혼을 위로하고 힐링하기 위해 존재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도 때로는 힘들고 어려울 때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할 때가 있다. 혹은 누군가에게 기대어 푸근히 잠들거나 안식하고 싶을 때가 있다. 소년에게 어깨를 내주고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가지만 시인은 오히려 편안한 안식과 평화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3-12-05
오랜만에 비 오시는 소리가 하도 좋아베란다 쪽으로귀를 열어놓고 있다가어라,오늘은 새가 안 우네?비가 와서 안 우나?비가 오면 새는 어쩌지?오전 내내새의 안부가 궁금하였다오랫동안 삶의 근처에서 울음소리를 툭툭 던져 넣어 주던 새. 비가 와서 그런지 날아오지도 새소리를 들려주지도 않아서 시인은 내내 새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사실은 시인의 마음속에 궁금해지는 것은 새 뿐만 아니리라. 모처럼 비가 와서 목을 축이고 되살아나는 것들도 있고 비가 와서 새처럼 날지 못하고 웅크리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또 무엇이 있는 것이다. 그 모두의 안부가 궁금한 시인의 눈이 참 따스하게 느껴진다.시인
2013-12-04
뼈들의 고분군화장장에서 갓 구워낸흰 치아, 흰 목, 흰 내장, 흰 다리, 흰 척추, 동그란 손등과 발등간간이 물살에 씻기지만 그 때조차도 평상(平常)의 자세를 바꾸지 않는저 슬몃 , 미소성탄 전날, 오후 2시의 해는 따뜻한 남방(南方)차가운 몸을 햇살의 창(窓)에 맡기고 이 세상 더는 부러울 것도 없다는 표정으로도란도란 볕을 쬐네죽음은 또 다른 몸으로의 이사어떤 어린 뼈들은 홀연히 일어나서 새로운 시간 속으로 흘러간다맑은 명호강의 물 속에서 빛나는 자갈들을 표현하면서, 시인은 영원을 향하고 있어 보인다. 죽음이란 한낱 다른 몸으로 이사 가는 것쯤으로 여기며 시인은 불멸의 시간, 영원을 지향하고 있는 듯하다. 차가운 강물 속이지만 투영되는 햇살의 창에 몸을 맡기고 이 세상 어떤 것도 부러워하지 않고 도란도란 자기들의 한 생을 살아가는 저들에게서 생의 겸허한 교훈을 얻는다.시인
2013-12-03
내가 태어나 할머니와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곳대지의 아들딸, 흙의 자손이던아버지와 어머니께서 고이 잠드신 곳낮이면 해가 떠올라 곡식들 키우고밤이면 달이 비추어 그리움 더한 곳아 사랑! 사랑하지 않고는 금방이라도터져버릴 것 같은 큰 울음보따리 하나고향이라는 말을 무심코 발음하다보면 어떤 서러움 같은 것이, 뜨거운 무엇이 내면 깊은 곳에서 치고 오름을 느낄 때가 있다. 생명의 요람이요 원천이고 출발점이기 때문이리라. 태어나고 양육 성장된 내 정체성의 무늬가 깊이 새겨진 곳이 고향이다. 늘 그립고 고맙고 마음이 향하는 곳이다. 고향을 떠올리다 보면 가만히 눈시울이 뜨거워져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거기에는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큰 울음보따리 하나가 떠억하니 놓여있기 때문이다.시인
2013-12-02
행복하냐 하길래 그렇다고 했다시인인 척 뻥치지 말라고 한다곰팡내 나는 책장을 무심히 넘기다가간간 뾰족이 연필 깎는 생이라고비 맞으며 수런수런 콩 포기 옮기다가때때로 개울물 탐방거리는 초막의 한 때슬프냐 해서 그렇다 하니 시인인 척 한다고납작해진 영혼의 종잇장 위 물오리 떼밥숟갈 흐릿해지는 페이지마다 돋아나는 시(矢)시인이 느끼는 행복, 슬픔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리라. 곰팡내 나는 책장 넘기며 뾰족하게 연필을 깎으며 시인은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깊은 슬픔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비 맞으며 수런수런 콩 포기 옮기다가 때때로 개울물 탐방거리는 전원에서의 한 때도 마찬가지다. 그게 인생이다. 슬픔도 행복도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어디서 무엇을 하더라도 어떻게 느끼고 마음먹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리라.시인
2013-11-28
시끄러워 잠이 깼다창유리에 달라붙은 반투명의 아우성떼 지어 엉키며 부풀리며 퍼져나가며쉴 새 없이 휘돌며 되울리는 메아리조차 자욱하다고요가 이렇게도 소리칠 수 있다니고요의 목청이 이렇게도 깊고도 요란할 수 있다니고요의 목소리가 내설악을 통째로 삼켜버릴 수 있다니귀를 틀어막고 우왕좌왕하다 보니먼데 산봉우리 하나가 모가지만 내놓은 채 허우적거린다세상은 거대한 안개바다깊이 모를 대해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아우성만끼리끼리 휘돌며 메아리치고 되받아친다한나절을 기다려 나가보니산자락 자락마다 선혈이 낭자했다단풍은 절정, 피비린내 진동하는 전쟁터였다밝은 시인의 귀에는 쉴 새 없이 휘돌며 되울리는 아우성이 들린다. 그것을 시인은 고요의 메아리라고 일컫는다. 깊고 요란한 고요의 목청이 온통 내설악을 집어삼켜버린 것에 놀라고 있다. 날이 밝고 산을 오를수록 그 고요는 가을 내설악의 아름다운 단풍바다로 다가오고 있다. 밝은 시인의 마음의 귀와 역동적인 시인의 시상전개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시인
2013-11-27
오래된 화석이 있었다모진 풍파에도단단히 박힌 뜻 꺾이지 않다가젊음을 염치없이 통째로 씹은 죄예술이 유치한 거라며 씹고 뱉은 죄인생의 단맛을 좇아다닌 죄로어느 날 번개를 맞고밑둥치부터 까맣게 뽑혀나갔다나의 양심이 뽑혀져 나가고철거덩 은빛 보정물이수갑처럼 채워졌다치과에 누워 치료를 받거나 혹여라도 발치를 하는 날은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우리 생에 이빨처럼 깊이 우리의 몸에 깊이 뿌리를 박고 함께해온 것이 또 있으랴. 비록 뽑혀나간 이빨이라 할지라도 지난 시간들 속에서 그의 역할은 대단했다. 보정물이 수갑처럼 채워지기까지 나와 함께한 수많은 시간들과 젊음을 통째로 씹은 죄라고 표현하듯이 청춘의 시간을 함께한, 은밀한 서사에 끼어 든 적이 있는 이빨을 보내며 그를 단죄하는 시인의 인식은 특별하다.시인
2013-11-26
달이 뜨지 않아도나 이 자리에 섰습니다아침 이슬 내릴 때까지해가 비치지 않아도나 이 자리에 섰습니다하얀 안개 들이킬 때까지삶은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삶은 떠도는 구름 같은 것폭우가 기습 공격 가해오고땡볕이 갈증 포탄 쏟아도내 가는 삶의 앞길에달이 뜨지 못하는 날과해가 비치지 못하는 날에도나 이 자리에 섰습니다그 누가 뭐라하여도여리고성이 무너지길 기다리는하늘 향한 뜨거운 마음 있기에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한 자리를 지켜가는 삶을 자세를 달맞이꽃에서 찾는 시인의 눈길 마음길에 깊이 동의케하는 시이다. 살다보면 앞길이 캄캄하여 달도 해도 비치지 않는 시련과 형극의 길이 가로놓일지 모른다. 그러나 꿋꿋이 자기의 본분과 삶의 의미를 새기며 그 자리를 지켜가는 강강한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있다. 달맞이꽃 같은 사람들이.시인
2013-11-25
바람이 분다 은행잎이흩날린다내 마음속 빈 의자에황홀한 몸짓으로 떨어진다나를 버리라 한다나 물들어고운 낙엽이 되어이리저리 바람결 따라해매다가적멸 문턱에 놓인 의자에고이 눕는다푸른 잎으로 흔들리며 우리의 눈과 마음을 시원하게 하던 은행잎. 가을이 되어 노랗게 물든 낙엽이 되어 여기 저기 떨어져 구른다. 자연의 순리대로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인생, 우리에게도 푸르른 청춘의 시간들이 자욱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적멸의 문턱에 놓인 의자에 앉아 지난 삶을 돌아볼 때가 올 것이다. 여기 저기 떨어져 뒹구는 고운 은행잎들을 보면서 말이다.시인
2013-11-22
어두운 복도 끝에서 괘종시계 치는 소리1시와 2시 사이에도11시와 12시 사이에도똑같이 한 번만 울리는 것그것은 뜻하지 않은 환기, 소득 없는 각성몇 시와 몇 시의 중간 지대를 지나고 있는지알려주지 않는다단지 무언가의 절반만큼 네가 왔다는 것돌아가든 나아가든 모든 것은 너의 결정에 달렸다는 듯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죽을 때까지 기억난다서른 살. 이 나이의 양마저 시인이 말하는 어떤 기준의 중간이고 틈이고 사이이다. 꼭히 서른이라는 수치에 국한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런 사이, 틈에서 실존적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이제 남은 생은 그런 실존적 존재가 지닌 몫이다. `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 죽을 때까지 기억난다`라는 진술은 그런 실존의 시간에 관련된 개체적 윤리에서 비롯된 것이다.시인
2013-11-21
월 열나흘 가을 달이보경사 문수암 뒤뜰을 어정대다어찌하여 그만어느 노승이 밀봉해둔곡차 한 옹기 발견하고는갈지자로 하늘 길 가다가쉬를 보는데발정난 내연산이 불쾌하다가을이 깊어지는 내연산 풍경을 그린 재밌는 작품이다. 스님들의 구도(求道)와 수행(修行)의 그윽함이 묻어나는 절집의 그림 한 장에서 무릎을 탁 치고 싶은 시인의 상상력과 해학적 접근을 마주치면서 가만히 미소를 머금게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인간과 우주가 일체되어 스르르 겨울로 흘러가는, 시를 참참히 읽다보면, 시인이 빚어낸 또 하나의 아름다운 행성에 얹혀 아득히 흘러가고 있는 느낌이다.시인
2013-11-20
단발머리에 머리띠 꽂고어머니, 지팡이에 업혀재 넘어 절에 가신다혼자서는 쓸쓸하다고,혼자서는 눈물겹다고,초승달도 함께 가신다연로하신 어머니, 하얀 머리카락 단촐하게 자르고 딸들이 꽃아 준 머리띠 하고 지팡이 짚고 절집 오르신다 어머니. 남편 일찍 여의고 아이들 다 떠나가버린 쓸쓸한 한 생을 마감해 가는 이런 어머니들이 이 땅에는 많다. 쓸쓸하고 눈물겨운 노년의 삶이 참으로 힘겨운 고갯길을 오르는 것 같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 외로운 길을 초승달도 함께 가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시인
2013-11-19
보랏빛 감도는 자개무늬 목덜미를어리숙이 늘여 빼고 어린 비둘기길바닥에 입 맞추며 걸음 옮긴다박카스 병, 아이스케키 막대, 담뱃갑이비탈 분식센터에서 찌끄린 개숫물에 배를 적신다창문도 변변찮고 에어컨도 없는 집들거리로 향한 문 활짝 열어놓고미동도 않는다우리나라의 길을 따라서 샛길 따라서썩 친숙하게빛바랜 셔츠, 발목 짧은 바지동남아 남자가 걸어온다묵직한 검정 비닐봉지 흔들며 땀을 뻘뻘 흘리며햇볕은 쨍쨍보랏빛 감도는 자개무늬 목덜미 반짝도시빈민들이 모여 가난하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해방촌의 풍경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는 시이다. 그러나 가만히 음미해보면 평범한 순간을 세밀한 언어와 느낌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평범한 시가 아니다. 무정물의 사물들에 생명을 불어넣고 활기차게 생동하는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감각과 인식을 일깨워 놓는 좋은 작품이 아닐 수 없다.시인
2013-11-18
산이 무척 깊어졌다땀을 닦으러 잠시 숲 모퉁이 깊은 곳으로들어서자 갓 피어난 산수유 한 떨기와멀리서 개 짓는 소리가 산을 컹컹 울렸다산이 깊을수록 먼 개 짖는 소리는 가깝다한 자락 소슬바람이 지나쳤다한 떨기 산수유가 파르르 떨린 것이소슬바람 때문인지개 짖는 소리의 컹컹 하는울림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았다시인은 존재의 근원을 갈구하며 끝없이 맴돌고 찾아다니는 존재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시인은 끊임없는 방황과 모색의 길에 나선 존재이리라. 이 시 또한 그런 탐색과정의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시인은 산속에서 갓 피어난 산수유 한 떨기와 만나기도 하고 멀리 개 짖는 소리와 만나기도 한다. 이런 만남을 통해서 시인은 이미 다른 어떤 곳으로 향한 걸음을 시작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시인
2013-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