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반, 누렇게 빛이 바랜 편지봉투에 담겨진그 속에서 20년을 보냈을 것이다봉숭아물을 백반 없이 들이나갖다주꾸마투명한 백반 알갱이를 잘게 부순다봉숭아꽃잎과 으깨지는 붉음이여더 붉어지는 꽃무좀으로 천시당한 발톱에 고이 얹었다화관을 쓴 발가락들부끄러워 저희들끼리 킬킬 댄다마디 굵은 손가락에 족두리를 올린다남새스럽다며 손사래를 친다붉은 손톱 밑 검은 때자국이 선명하다퇴행성관절염으로 굽어가는 손가락들손톱은 죽어서도 자라는가어머니의 젊음은 손톱뿐이다고단하고 힘겨운 한 생을 살아오신 어머니의 손톱과 발톱에 고운 봉숭아 꽃물을 들이며 시인은 그 한 많고 고단한 어머니의 생을 들여다보며, 억척같이 건너온 세월, 그 그윽한 생의 향기에 딸은 젖어들고 있다. 모녀지간, 가슴과 가슴으로 눈빛과 눈빛으로 흐르는 따스하고 아름다운 정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시인
2014-01-14
지리한 장맛비 잠시 숨 고르는 사이교실 창틈으로 포로롱 날아든 잠자리 한 마리시험지 받아들고 미로를 헤매던 아이들일제히 잠자리가 그리고 간 자리에 눈길을 준다유리창 너머 파란 하늘로 쏜살같이 날갯짓하다부딪히고 다시 부딪히고아이들은 활자와 도형이 종횡무진하는 길 위에서가도가도 막은 창 다시 가도 막은 창파닥거리는 잠자리에게도가쁜 숨 몰아쉬는 아이들에게도출구는 없다우리 아이들에게는 출구가 없다. 유리 수족관 같은데 갇혀 치열한 입시전쟁에 심신을 고갈시키고 있다. 고개 젖혀 하늘을 바라볼 여유도, 높은 산봉우리에서 함성을 지르는 호쾌함도, 조용히 동서고금이 명서를 읽으며 사색하고 깊이 사유하는 진지함도 찾아볼 수 없고 기대할 수도 없는 참으로 갑갑한 현실 속에 갇혀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시인의 말처럼 가도 가도 막은 창 밖에 없는 현실이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시인
2014-01-13
빗소리가 삼만 평 비산비야를 적시는 곳밥 먹다말고 혼자 짧게 훌쩍였다는 노파가고사리 돋는 소리 엿들으며 살았다던 한 칸 움막그 움막 폭삭 삭아 흔적 없는 자리조막조막조막조막짧은 문장의 황홀한 구걸의 손들극약처럼 아찔한 문장이다너는 너무 오래 혼자 우는 젖은 문법이었구나다시, 유목의 긴 시절이 올 것 같다햇 봄, 돋아나는 고사리의 모습을 조막조막한 짧은 문장의 황홀한 구걸의 손들이라 표현한 시인의 시선이 재밌고 따사롭다. 봄비 속에 새 생명의 순을 내 놓는 고사리. 가만히 혼자 우는 문법이라고 말하는 시안이 깊다. 맞다 이제는 긴 유목의 시간을 걸어가야할 것이고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헤쳐나가야할 것이다.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시인
2014-01-10
지난 봄 새순 말려 띄운작설(雀舌)을,늦가을 해어름에 비로소 뜯네기다려도 올 이 없는 산 중 삶인데고이고이 간직해온 심사는 뭘까뒤뜰엔 산수유 열매가 붉어메꿩 몇 마리 부리 쪼는데찌르레기 샘물 찍어 하늘 바래듯늦가을 홀로 앉아 차를 마시네기다려도 올이 없는 외진 산방(山房)에가을 산과 대좌하여 드는 작설은지난 봄 이슬에 젖은 찻잎이오늘은 서릿발에향기도 차네새봄의 작설 한 줌을 늦가을 산방에서 우려마시며 시인은 외로움과 기다림에 눈을 감는다.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아득한 그리움 끝을 물고 새들은 날아갈 것이고 쓸쓸히 가을꽃들도 떨어질 것이다. 서릿발 차가운 시간을 건너가는 머언 기다림은 무엇을,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아침이다.시인
2014-01-09
다스려야 할 슬픔이 너무 많아기어이 꽃은제 몸을 찢고야 말았다다가오지 마다가오지 마입술을 앙다물고 참아보아도혈관을 타고 흐르던 아픔은줄기에 잎에 가시로 돋아났다보금자리도 없이 새끼를 낳은설운 짐승의 눈빛으로홀로 형극(荊棘)의 길을 가는온몸 가시를 세운 멍든 얼굴오늘은오늘이 길을 가는 거라고염천의 하늘 아래조심조심 눈꺼풀을 연다호수면을 가득 덮은 물풀들 사이에 철갑을 두른 듯 튼실한 줄기에서 피어나는 꽃. 닥지닥지 가시를 붙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꽃 한 송이를 피워올리는 아름다운 연꽃에 시인의 마음이 가닿아 있다. 수많은 시련과 아픔을 감내하고 피워올린 꽃이기에 더욱 아름답고 값진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좋은 환경과 여건 속에서의 성공이나 성취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역경을 딛고 일궈낸 성공이나 성취는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것이고 소중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시인
2014-01-08
푸른 물만 뽑아내던 물푸레회사 자판기가 창고로 밀려나고 수선집 담벼락엔 석양을 걸친 플라타너스가 박음질 되었다 노루박 박음질이 막 끝난 배내옷 밑그림은 어렵게 따온 햇살과 강아지풀이란다 치맛단을 꿰러온 필화댁 우스갯소리에 몇 년 전 묵은 이불에서 뜬금없이 박태기잎이 돋아나고 사과밭에 새참 배달 가는 여자, 손에 든 둥근 세상이 마냥 흔들린다 베갯잇에 단풍 물든 산은 낮게, 산 그림자는 주름노루발로 바꾸어 프릴 만드는 걸 잊지 않는다 산을 베개 삼아 누운 가을 문장 툭, 툭 실밥 터지듯 붉게 타들어간다몹시도 뜨겁고 힘들었던 시간을 물고 거칠게 몰아치는 태풍의 생채기가 걸쳐져 있는 가을은 곱다. 시련과 역경의 시간이 길고 깊을수록 그것을 감내하고 극복하고 오는 결실을 참으로 소담스럽고 아름다운 것이다. 시인은 힘겨움을 견딘 자연과 인간의 시간들에 마음을 쏟아내고 있다. 석양에 비친 그림자의 풍경도 소홀히 하지 않는 시안이 참 따숩고 그윽하다. 시인
2014-01-07
속창 다 빼고 빈 몸 허공에 내걸렸다원망 따위는 없다지독한 목마름은 먼 나라 얘기먼지 뒤집어써도 그만바람에 흔들려도 알 바 아니다바짝 마르면 마를수록맑은 울음 울 뿐산사의 추녀 끝 풍경소리가 날리어가는 쪽에 목어가 헤엄치고 있다. 속창을 다 빼고 빈 몸으로 허공을 향해 저어가고 있다. 지독한 목마름도 원망도 없이 어디론가 목어는 헤엄쳐가고 있다. 인생이란 어쩌면 절집의 한켠에서 어딘가로 헤엄쳐가는 목어와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기를 비우고 또 비우고 차오르는 욕망과 집착을 벗어버리고 무욕의 정신 하나로 헤엄쳐가는 것이 우리의 한 생이 아닐까.시인
2014-01-06
또 고막 사이로 어둠이 가득 고였다모로 눕자 예민해진 소리들이 누렇게 흘러나와들리지 않는 소리로 바뀌었다난 다만 작고 희미해지는 것이 안타까웠을 뿐씨이잉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깜깜해진소리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을 뿐어둠을 연습하는 어떤 몸짓과는 달랐다들어야하는 것들을 생각할 때마다가없는 마음을 생각했다 내가 듣고 싶은 건세상에 없는, 세상에 늘 있는 엄마얼마나 파고들어야 들릴까저 따뜻한 소란을 흘려주는 회리 소리의사는 빛으로 소리를 쏘았다돌돌 말려 들어갈수록 빛이 닿지 못하는 고막의소실점 너머, 맨 처음소리 하나 가질 수 있다면나는 이 귀머거리의 나날이 좀 마음에 든다귀의 통증을 통해 어쩌면 심각한 상태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지만 시인은 거기에 머무르고 주저하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갈수록 떨어지는 청력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으로 듣고 소통하는 법을 익혀나가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아무리 시끄러운 소리도 시인의 마음이라는 고막을 통과하면 평안하고 평화롭고 따스한 소리로 환치되고 있음을 본다.시인
2014-01-03
그이와 악수하고 있으면이 사람 목젖이나 가슴 어디쯤잘 간직해두었던 따순 눈물들손금 따라 흘러나와 나까지 적시고문득 눈길 들어 올려다보면얼굴 가득 순한 웃음에나는 고만 부끄러워지는데내 손에 붙잡힌 여린 뼈마디들이가만가만 속삭인다괜찮아요저도 부끄러운 게 많아요그이와 악수하고 나면가만히 막걸리가 묵고 잡다가만히 건내는 악수. 손바닥을 감싸 쥐는 그 짧은 순간이지만 시인은 손바닥 가득 타고 흘러오는 상대의 안온한 인간미와 풋풋하고 알싸한 사랑을 느낌을 고백하고 있다. 악수를 하면서 상대방의 얼굴이나 눈빛을 바라보지 않아도 맞잡은 손의 온기를 통해 진지하고 진실된 사람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비단 시인에게만 있는 통찰력은 아닐 것이다.시인
2014-01-02
비오는 날 너에게 전화를 했다잘 지내니?잘 있어요. 잘 계시지요?응. 나도 잘 있어….잘 지내지 못한다는 걸 서로 알고 있다말의 통로인 전선이 비에 젖고 있었다전화로 안부를 물어오거나 물을 때가 있다. 이 시처럼 잘 지내지도 못하고 뭔가 일이 꼬이고 어려움에 봉착해 있음에도 있는 대로 말하지 못하는 심정을 가져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안녕하지 못하고 힘든 일에 빠져있거나 어려움에 들어있는 것을 알면서도 확인하려들지도 않고 그냥 괜찮으냐고, 괜찮다고 묻고 답하는 경우가 많다. 말의 통로인 전선이 비에 젖듯이 안부를 묻고 답하는 서로의 마음도 젖어들 것이 분명하다.시인
2013-12-31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나는 시인이 못 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서울역 앞을 걸었다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그런 사람들이엄청난 고생 되어도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그런 사람들이이 세상에서 알파이고고귀한 인류이고영원한 광명이고다름 아닌 시인이라고나의 정체성에 대한 답은 어렵고 특별한 것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우리가 발 디디고 살아가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이 시의 요체다. 나의 하루 하루에 그 답이 있다는 것이다. 남대문 시장 같은 삶의 현장에서 나는 누구냐에 대한 답을 찾을 수있다는 것이다. 고생스럽고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의 시인이라는 시인의 말에 귀 기울여봄 직하지 아니한가.시인
2013-12-30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얐습니??봄은 벌써 늦었습니다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머 일즉 왔나 두려합니다철모르는 아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 들은 체 하얐더??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그려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설에 대히고 `너는 언제 피었니` 하고 물었습니다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시인은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는 자신의 마음을 좀 더 애절하게 전달하기 위해 `님을 기다리는 여인`의 가면을 썼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예쁘게 꾸미고 기다리던 경대 위에 야속하게도 꽃잎만 떨어지고 있어 애닯은 시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만해 한용운의 우주와 자연, 사람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가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시인
2013-12-27
언덕 위에 조선소나무슬그머니 손을 뻗어하늘의 흰 구름을끌어당기고 있다흰 구름도 내심싫지만은 않았던지응댕이를 돌려대 주면서마주 이끌리고 있다그렇다! 나도 이젠흰 구름이나 공손히받들고 서 있는 한 그루조선소나무였으면 싶다조선소나무에 걸리는 흰 구름. 그들의 어우러짐은 얼마나 자연스럽고 정겹고 평화로운가. 조선소나무처럼 공손히 구름을 받들고 살겠다라고 말하는 시인은 여생을 그리 무위자연으로 살다가고 싶어서 인지 모른다. 얼마나 가파르고 살벌하고 절뚝거리는 불구의 삶이 팽팽히 흐르는 우리네 삶을 향해 던지는 잠언이 아닐까.시인
2013-12-26
올겨울 제일 춥다는 소한(小寒)날남수원 인적 끊긴 밭 구렁쯤마음을 끌고 내려가항복받든가아니면내가 드디어 만신창이로 뻗든가몸 밖으로 어느 틈에 번개처럼 줄행랑치는저눈치꾸러기 그림자마음을 다스린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시인은 소한날 차가운 겨울 밭 구렁에서 분분하고 시끌벅적한 마음을 꺼내 항복을 받든가 아님 굴복을 하든가 결단을 내고 싶다는 말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바르게 다잡으려고 애쓰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그게 그리 쉽지 않음도 시의 뒷 부분에서 볼 수 있다.시인
2013-12-24
세월 속에는바람이 벼린 칼날이숨겨져 있나부다그러지 않고서야 어찌저 늙은 소나무가하얀 피눈물을다리께 젖도록 울겠는가민족현실과 민중적 생명력을 노래해온 시인이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며 깊은 침묵에 들고 있다. `세월 속에는 바람이 벼린 칼날`이 숨겨져 있고, 하여 하얀 피눈물을 다리께 젖도록 울었던 존재는 늙은 소나무이기도 하고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가만히 눈 감고 지난 시간들을 생각해보고 싶은 아침, 아슴아슴 가슴에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시인
2013-12-23
폭풍한설에 풍경소리마저 얼어붙은 겨울 산사에서온 밤을 통째로 우는 건 문풍지뿐이다문의 틈새를 살고 있으나 사실은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이다솜이불이 깔린 따뜻한 아랫목에 몸을 누이고바람 타는 생을 마감하고 싶은 것이다하지만 바람이 멈추고 울음을 그쳐도 문풍지는 문풍지안으로 들어 갈 수가 없다차라리 바람에 온몸을 치떠는 것이몸부림치며 우는 것이, 살아있는 이승의 시간인 것을안이어서도 안 되고 밖이어서도 안 되는안과 밖의 경계를 살아야 하는 문풍지안도 밖도 아닌 경계에 서 있는 것들의 슬픔, 그 아픔의 존재론적 성찰이 깊은 작품이다. 시인도 그런 운명적 존재가 아닐까. 늘 경계의 그늘을 들여다보고 엿보아서는 안되는 세상의 비밀을 이미 알아버린, 결코 축복이 아닌, 경계에 선 사람들, 그런 고난에 찬 삶이 시인들의 원죄와 같은 숙명이 아닐까하는 느낌을 주는 시다.시인
2013-12-20
신발을 던져 개를 쫓으려 한 적이 있다 신발을 던져 닭을 쫓으려 한 적 있다 신발을 던져 자식을 쫓으려 한 사람을 알고 있다 골목 밖으로, 있는 힘껏 신발을 집어던지던 사람을 알고 있다 자식을 향해 던지려던 외짝 신발을 거머쥐고 되돌아서던 그 사람을 알고 있다 한없이 안으로 오므려지던신발도 없이, 대책도 없이맨발로 쫓겨나던 그 자식의 맨발바닥을 알고 있다이 시를 읽으면 왠지 가슴이 먹먹해지고 시려옴을 느낀다. 왜일까? 시인이 말한 신발을 던지는 일들을 많이도 보았고 우리도 그랬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이리라. 신발 던져 개나 닭을 쫓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을 향해 그것도 자식을 향해 신발을 던져 쫒아내는 어버이의 그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피눈물을 머금고 던지려다 끝내 던지지 못하고 돌아서는 이 땅의 어버이들을 우리는 많이 보았고 지금도 그런 가슴 아픈 서사가 우리 삶의 주변에는 있다. 읽어도 읽어도 가슴 한 쪽이 미어짐을 느끼는 시이다.시인
2013-12-19
겨울이 넉넉히 머물다 가도록 채곡히 오지랖을 여민다 서걱이며 청춘을 울었던 시간들 바람결에 흘려보내고청명한 가을볕에 돋아 오르는 새하얀 몸 꽃들새벽바람에 하얗게 풍장(風葬)해 버린다함부로 꺾이지도 무너지지도 않고뜨겁게 어깨 걸고 거친 눈바람 속을 걸어삼동을 건넌다푸르게 어우러져 풍성한 생명의 시간을 보낸 갈대숲에 깃드는 가을볕을 보면서 시인은 거친 눈바람 몰아치는 엄동의 시간을 서서 견딜 힘겨운 시간들을 떠올리고 있다. 자연에서 인생의 한 면을 떠올리고 있는 깊이가 느껴지는 시다. 우리네 인생도 그렇지 않는가. 충일한 생명감으로 건너온 청춘의 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인생의 후반부를 무욕의 정신으로 자기에게 남아있는 소유에 대한 헛된 욕망들을 다 떨쳐버리고 순순히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삶의 자세를 갈대숲에서 찾아내 세상을 향해 가만히 건네고 있다.시인
2013-12-18
지북산 몰랑에 뻐꾸기 울면 산비둘기 구구대는 장사슴목골달랑 한마지기 옹사리밭에아부지는 들컹들컹 쟁기질하고 어무니는 쪼락쪼락 풋콩을 딴다가다 한 모금 또 가다 한 모금 촐랑촐랑 줄어가는 막걸리심부름한 쪽박 샘물로 덧채우던 아이가 아지랑 묏등 앞에 바알갛게 엎드렸네한 사발 거뜬 비우신 아부지“오늘 막걸리는 왜 이리 싱겁다냐?”그 소웃음소리 지금도 들리네여수 부근의 작은 섬 초도(풀섬)가 고향인 시인의 고향에 얽힌 작고 정겨운 서사가 중심을 이루는 작품이다.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 막걸리 심부름을 다녀오면서 홀짝 홀짝 마셔버린 탓으로 물을 탄 막걸리를 마시고는 오늘 막걸리는 왜 이리 싱거우냐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넉넉하고 구수한 말씀에 고향의 안온하고 흥겨운 맛과 멋을 느낄 수 있는 시가 아닐 수 없다. 아득히 그리운 곳, 떠올려보면 괜시리 눈물 머금어지는 고향이다. 이 땅 어딘들 그런 아버지가 계시지 않겠는가.시인
2013-12-17
공중(空中)이란 말참 좋지요중심이 비어서새들이꽉 찬저 곳그대와그 안에서방을 들이고아이를 낳고냄새를 피웠으면공중이라는말뼛속이 비어서하늘 끝까지날아가는새떼공중은 비어있다. 그러나 막연히 비어있는 공간만은 아니다. 비어 있어서 얽매이지 않고 무한한 자유와 여유를 간직한 곳이다. 그 순수하고 자유로운 공간에서 아이낳고 살아가고 싶다는 시인의 순수한 마음을 본다. 그리고 새떼들은 그냥 그 공간을 향유하고 있는 것도 아님을 말하고 있다. 새들은 그곳에 살기위해 그들의 부질없는 무게들을, 뼛속까지 비워내고 거기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온갖 소유에 얽매인 우리네 인간들에게 던지는 암시가 깊다.시인
2013-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