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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22) 선(善)

“불도 바람도 삶도 죽음도 그대의 선행은 결코 지우지 못한다”라고 붓다는 말씀하셨다. 선행은 참 숭고하리만큼 귀하고 보배스러운 것이며 공자께서도 “남의 선을 보면 미치지 못한듯 하라”하셨다. 세상이 각박하다. 비정한 이 사회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이 시대에 사는 것 자체가 복 없는 인연 탓인지하고 생각하게 되고 뉴스를 보기가 불안할 정도다. 너무 자주 접해지는 악행의 소행에 정신 건강까지 다칠까 두려운 실정이다. 사실 명확히 빠르게 보도하는 것이 언론의 전부이겠지만 가려져야 할 부분은 가려졌으면 할 때도 많다. 착하다라는 한마디의 말은 능력이 없어도 있어 보이고, 선하다는 말은 젊은이에게 자신감처럼 느껴지는 것, 나에게 인식된 그릇된 생각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참 귀하게 여기는 한마디이다.노자도 도덕경에서 물을 최고의 선에 비유하였고(上善若水) “물이 선이 되는 까닭은 만물을 소생 양육시키고 물은 겸허히 낮고 메마르고 깊고 더럽고 깨끗함을 가리지 않고 낮은 곳으로 흐른다”라는 도인의 경지에 들었다. 몇 년 전 80살이 지난 한 시인의 연하장 글귀를 시인의 책 제목을 빌어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라는 글씨를 써보낸 적도 있다.내 자신이 하고 있는 서예작업 또한 한자로는 달리 쓰지만 소리 `선(Line)`을 조합하여 만든 물상의 조합이다. 수업시간에 선을 자꾸 긋다 보면 사람은 선(善)해지고, 선해지고 나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명확한 지견력(知見力)을 가지게 되고 스스로 정확히 자신을 볼 수 있다.禪의 경지에 든다고 선(善)을 지극히 강조하고 있다. 내가 하는 모든 수업 시간 설명이 나를 위한 강렬한 외침이며 처절한 반성이기도 하다. 내 주변에 선한 사람 많아 좋다. 나도 본받아 선해지고 싶다. “좋은 사람은 좋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고 좋지 않은 사람은 좋은 사람의 거울이다”라고 하였다. 반대편의 것을 자기의 스승과 거울로 삼을 줄 알며 버려지는 사람이 없이 구제하는 경지에 이를 것이다. 다산(茶山) 선생께서도 명재상 채제공에게 “할 수 있는 한 선을 행하라”하셨고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자기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라 하셨다. “선을 택해 굳게 지켜라” 선에 밝지 못하면 성실치 못한 것이며 악의 뿌리가 일어선다.선과 악을 구분하는 사회는 비정한 사회이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않는 미묘하고 깊은 단계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름다운 것도 추한 것도 없는 자연스러운 이상향의 세계가 될 것이다. 어느 때 참 귀하고 소중하며 나를 혁명할 수 있는 여러 글자 중에서 善을 선택하여 당호를 `好善齊`라고 지어 쓰기도 하였다. 생각만큼이라도 선해보고 싶다. 남의 선행을 보면 미치지 못한듯하라는 공자님의 말씀이 참 귀하고 무겁게 자리 매김하는 아침이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08-05

(21) 言忠信行篤敬 (언충신행독경)

매일 몇 번씩 만나고 읽는 작품 중에 이런 작품이 계단에 걸려 있다. “성냄을 거두고 욕심을 막아라. 말을 삼가고 음식을 절제하라. 이것이 인생의 큰 방비요 마음 공부의 큰 사업이라”하는 글귀이다. 몇 번씩 보기만 할 뿐 나의 실천행이 안 되다 보니 내 것이 되지 않는다. 성냄, 욕심, 말조심, 음식절제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인생살이에서 삶의 질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보약이다. 이러한 실천의 덕목은 우리에게 적당한 삶의 여유와 심리적 평화를 만들어주는 자양제인 것이다.공자께서는 `위령공편`에 위의 내용과 세밀하게 덪붙이듯 말하고 있다. 자장(子張)이 세상 살아가는 도리에 대해 묻자 “말이 성실하며 신의가 있으며 행동이 돈독하여 공경스러워야 하며 비록 오랑캐의 나라에서도 살아갈 수 있고 말이 성실하지 못하여 신의가 없고 행동이 돈독하지 못하고 공경스럽지 못하면 비록 고향이라 할지라도 살아갈수 있겠느냐”하셨다. 이것이 `언충신행독경`이다.믿음과 행실은 수레바퀴의 두 축이며 세상을 건져올리는 영약인 것이다. 믿음은 가치관 종교 사람 등에 대한 진리를 받아들이는 개인적 심리상태이며 신념과 신앙, 신심 즉 믿는 마음인 것이다. 나의 예술행위도 나의 완전한 믿음의 실천행이다. 나의 믿음은 나의 생각이 되고 생각은 말이 되고 내 행동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내 가치가 된다. 곧 “나의 가치는 내 운명이다”라고 한 간디의 절규가 들린다.信은 사람의 말을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이다. 말 자체가 약속이다. 그것이 곧 사람의 도리이며 예이지만 세상을 지탱하는 것에 상당 부분이 빈말(虛言)이라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행동에 대해서는 돈독과 공경을 머리 위에 놓았다. 독실한 행동은 몸을 삼가할 줄 아는 지혜인 것이다. 공경이라는 자체가 가끔은 굴종일 때도 있지만 굴종은 치욕이다. 도덕은 어디론가 이주해 버린 요즘 같은 험한 세상에 누군가를 존경과 공경의 대상으로 모시고 살 수 있다면 이것 또한 가이없는 무량대복이다.살다보면 말이 그저 의미없는 말일 때도 많다. 말은 하지 않았을 때가 힘이며 때에 맞는 적합한 말은 힘이며 약이고 세간의 나침반이다. 그러나 말을 통해 자신을 다시 담금질 할 수 있다. 말은 말을 뛰어넘어야 하고 더 중요한 것은 말을 통한 자기생활의 실현과 자기화(自己化)에 독실한 행동에 매진해야 한다.말로서 바위를 고개 숙일 수는 있어도 뭇 인간들의 스승이 될 수 없다. 가르치고 사는 일이 직업이 되다 보니 말을 통한 자신의 삶이 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늘 무겁고 많이 부끄러워진다.뜨거운 여름 태양볕 아래 잘못된 생각을 말리고 입을 다물어야 겠다. 내가 말하고도 실천하지 못한 아픈 말들과 어설픈 행동에 대해 깊이 반성하는 한여름밤이 속절없이 아프게만 깊어간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07-29

(20) 九思九容(구사구용)

살면서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구절이 있다. 나의 인생에 큰 힘이 되고 축이 되는 구절들이 나를 잡아둔다. 그 중에 하나가 구사구용(九思九容)이다. 구사구용의 내용과 비슷한 내용인 사잠을 고문진보에도 소개하고 있다. 문심조룡의 주(註)에 잠(箴)은 병을 고치는 침(針)의 뜻이며 설문해자에서도 잠은 침(鍼)과 같다고 풀이하고 있다.箴은 경계하고 근본으로 삼으라는 뜻이다. 그중에 정정숙(程正叔)의 四箴은 視, 廳, 言, 動으로 천하의 명문장으로 손색이 없다. 또한 장온고의 大寶箴에서도 “하늘이 인간의 선악을 모를리 없습니다. 하늘은 저 높은곳에 있으면서도 인간 세상 모든 죄와 업을 알고 있습니다. 악행은 당연 즐거움을 다해서는 안됩니다. 즐거움이 다하면 반드시 슬픈일이 생기는 법입니다. 마음가는대로 욕심을 부려서는 안됩니다. 욕심을 마음껏 부리면 반드시 재화가 일어납니다”라고 강조하고 있다.정정숙의 사잠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파악하는 수양법과 외물에 끌려 본심을 잃게 된다라고 하였고 청잠에서는 사념(邪念)을 물리치고 진실한 마음의 지킴과 예가 아니면 듣지말고 단언했고 언잠에서는 말은 사상의 표현도구이기에 남과의 충돌 평정을 잃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다.율곡 이이는 격몽요결에서 “구용(九容)보다 몸가짐에는 더 중요한 것이 없고 배움에 나아가고 지혜를 더하는데는 구사(九思)구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자기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수습하는데는 구용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며 학문을 진보시키고 지혜를 더하는데는 구사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고 했다.그럼 구용은 발은 무겁게 놀려야하며 손은 공손히, 눈은 단정하게, 입은 다물고, 목소리는 조용하게 내야하며, 머리는 곧게 가져야 하며, 기운은 엄숙히, 얼굴빛은 씩씩하고 반듯하게 서 있어 보여야 한다. 그리고 구사는 물건을 볼때는 밝은 것을 생각하고 소리를 들을때도 얼굴빛은 온화하게, 몸모양은 공손히, 일할때는 공경함을, 의심이 나는 일이 있으면 남에게 물어보고, 화가 날때는 어지러운 것을 얻는 물건이 있으며 의를 생각하라, 하셨다. 이것은 자기관리와 대인관계의 예의에 대한 완전에 이르는 정답이며 행동강령인 것이다. 이 귀한 것들을 생각만 하고 게을리 한다면 귀신도 이룰 수 없다. 깊이 새기고 새기면 총기가 되고 총명이 된다. 마음속에만 붙잡아놓고 놓아두지만 말고 앉은 자리에 좌우로 보고 새긴다면 바른생각 바른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종합 비타민이 될 것이 틀림없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07-22

(19) 불혹(不惑)의 나이

장수사회가 되면서 죽고 사는 일에 대한 여러 가지의 일들이 생겨나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죽고 사는 문제는 우리가 반드시 안고 가야 하는 가장 큰 대사이지만 마땅한 대책도 없이 평균수명만 늘어났다. 이러한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의 생을 정리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인생도 왔던데로 돌아가기 위해 인생의 졸업식을 해야 한다. 공자께서는 15, 30, 40, 50, 60, 70세를 정확히 진단하셨고 삶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말씀하셨다. 이는 간략한 자기소개서이며 자기 학습의 지견력에 대한 견해의 변화이다.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흔히 이 시대를 백세인생이라 하지만 나이의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삶의 질이 문제이다. 공자께서 평생 존경의 대상으로 모셨던 춘추전국시대 위나라 대부(大夫) 거백옥(遽伯玉)은 “내 나이 50이 되어 지난 49년간 삶이 잘못되었다”고 말해 이후 50세를 지비(知非)라 하셨고 그의 삶은 군자에 이르렀다. 또한 다산 선생께서도 시에서 “거백옥은 49세에 잘못을 알았지만 나는 십년 더 젊으니 더욱 바랄 수가 있네. 이제부터 힘써 큰 허물을 없게하리라”하셨다.돌이켜보면 지금도 멍하지만 40세 때 생각과 모든 공부가 부족하기 그지없는 단계의 삶이었던 것 같다. 50세를 흔히 이제 앞산을 올려 볼 수 있는 나이라고 한다. 자식 뒷바라지, 부모님 봉양, 사회적 관계의 삶, 자신의 발전을 위한 공부, 모두 다 중요하겠지만 진정 자신의 삶을 성숙하기 위한 노력은 게을리 한 것 같아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반성이 크게 따른다. 흘러가는 물에는 두 번 손 씻을 수 없듯이 다시 먼 산을 올려볼 일이다. 그곳에 나를 안아줄 길이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허물을 줄이고 삶의 건전성을 위해 다시 시작해 보는 것이다.치열한 공자의 학습 진행 과정 처럼 세월만 믿지 말고 속지도 말고 희망이나 꿈이라는 단어에도 기대하지 말고 지금 이 자리에서 당차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밝음에서 어둠으로 가는 늙음이 문제되지 않는다. 더할수록 마음마저 떠난 무욕의 삶이 아름다워질 때 나의 평생 글씨 공부도, 작품도 세상의 청량제이며 모든 이에게 삶의 길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설 때, 나의 붓질도 미혹함이라는 단계를 넘어서게 될 것이다. 나의 형상과 정신에 혹됨이 없는 글씨에 공자께서 말씀하신 `불혹(不惑)`을 담고 싶다. 그 속에 정신적 완성의, 가이 없는 열락의 행복이 있을 것이다.두렵다라는 마음보다 믿으면서 가보지 않은 길을 위해 길을 나선다. 우리 모두를 `답게`만들어 놓을 위대한 시간은 새로운 시작, 지금 이 시점이다. 혹시라도 무겁게 지고 안고 있는 나 자신의 미혹함이 있다면 불혹처럼 쉽게 두고 나 자신에게 용기와 힘을 주고 한 생각을 크게 바꾸어 볼 일이다. 가시밭 길을 헤치고 지나야만 치자 꽃 향기 나는 다른 세상이 밝게 문을 열어 놓을 것이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07-15

(18) 中庸(중용)의 德(덕)

공자께서는 말씀하셨다. “중용의 덕은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지극하도다. 그러나 이 덕을 가진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지 오래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평상(平常)의 뜻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지속성의 깊은 뜻도 가지고 있다. 삶에서 너무나 중요한 위치에 존재하기에 중용은 어느 곳에서나 가장 중심의 자리에 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기울지도 채워지지도 않는 완전 접점의 삶의 형태 버릇처럼 `중용의 도`와 `중용의 덕`을 삶의 토대와 기초석에 의미를 두고 자신을 몰아쳤던 것은 우리모두 작금의 현실이다.중용 또한 시대적 상황에 따른 제각기의 다른 해석은 의미변용보다 그것의 위대성에 있다. 덕이란 단어 또한 정체성이 모호하고 단정된 정의를 내리기는 쉽지 않다. 왜 덕이 있어야 하며 그 덕은 무엇을 위한 것이며 덕이 우리를 어떻게 끌어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지만 오래된 번역은 `인간적 탁월함`에 두었던 것이다.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능력과 지적능력, 재물, 심지어 탁월한 행운도 필요하다.동양철학서 중 사서의 하나인 중용에서는 “지나치거나 모자랄 것 없이 도리에 맞는 것이 중(中)이며 양극단의 회피 극단적인 것을 배제 하고 평상적이며 불변적인 것이 용(庸)”이라고 한다. 이러한 중용의 덕은 유교에서도 크게 강조하였다. 실천적 의미가 강조되고 현실성과 심지어 자기 긍정적 의미까지 확대해 볼수 있으며 시중(時中) 또한 중용의 다른 의미인것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공자는 또한 “나는 지혜롭다고 하나 중용을 택해도 한 달을 가슴에 지닐줄 모른다. 안회는 중용을 택하였다면 가슴속에 넣고 놓지않았다. 그리고 한번 옳다하면 죽을때까지 고집을 하며 처자식 붙들고 가는 듯한다”라고했다. 사서 중에 가장 관념적이며 철학적인 논리서가 중용이다. 33장으로 구성된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논어 옹야편에 중용의 덕됨을 깊이 새기며 나의 붓질은 항상 철저한 중봉의 운필이 가장 깊숙이 자리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의 삶에 중용이라는 고귀한 한 글자에 한 번 매여보는 것도 탁월한 인간됨의 생활을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욕심이겠지만 늘 나의 생활에 같이 동행하기를 바랄 뿐이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07-08

(17) 君子不器(군자불기)

사람은 쓰임의 능력이 정해져 있을까? 그릇도 한가지 용도로 국한되어 있지 않다. 그릇은 생각의 문제이며 사유의 물상을 담아내는 일이다. 여기에서 그릇은 단순형상의 그릇이 아닌 정신 함량과 사유의 몫을 담고 기르고 숙성시키는 것이다. 덕을 함양하고 완성하고자 하는 사람은 한 가지 재주에 편중되지 않아야 하며 어디에서든지 쓰임과 우러러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옛말씀에 “큰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작은 말에 투철한 것을 소기(小器)라 하였으며, 작은 말을 버리고 큰 말에 기뻐함을 대기(大器)라 하며, 큰 말을 들어 크게 쓰고 작은 말을 들어 작게 쓰면 그것은 불기(不器)”라 하셨다.또한 주희는 즉석에서 “덕을 이룬 선비는 본체가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고 작용이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기에 단지 한 가지 재주 한가지 기예를 갖추는데 그치지 않는다”하셨다. 한 가지에 치중되지 않고 두루 갖추어 원만한 사람은 약에 쓰려고 해도 만나기 쉽지 않다. 어찌 군자만 불기가 되어야 하겠는가.작은 그릇으로는 큰 물을 담을 수 없고 한정된 생각으로는 백화만방의 꽃을 피울 수 없다. 공자는 뛰어난 제자인 자공에게 “너는 그릇(器)이다. 그것도 중요한 제상에 오를만한 아름다운 그릇이다”라고 공야장(公冶長)에 말한다. 불기(不器)는 자신을 닦은 뒤에 많은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는 지도자적 덕성이며 한계가 보이지 않는 무한의 역량이다. 공자께서도 자신의 그릇을 “도의 이론 지식이야 남만 못하랴마는 양심적으로 살며 도리를 몸소 실천하는 것은 내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라는 자평의 말씀, 그만큼 실천이 어렵다”라고 겸손하셨다.나의 성정과 예술작품이 고루하지 않고 늘 발전적으로 순화되길 바라기만을 손놓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한정되지 않는 사고, 나 스스로 뭐라고 정하는 순간 나라는 에고(ego)만이 존재하고 남을 위한 수용성은 사라지고 나의 그릇의 크기는 한정된다. 군자의 그릇은 크기와 용도를 정한 바가 없다. 그릇의 크기는 사람을 담는 마음의 넓이와 같다. 넉넉한 마음을 가진 자와 가없는 그릇을 가진 자와 한 나절 만이라도 같이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07-01

(16) 君子三變(군자삼변)

가끔 자신의 모습은 모르면서 주변 지인들이 이러했으면 좋겠다라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때도 많다.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침의 사표로서, 배우는 사람은 배우는 자의 본분에서, 주인은 주인으로서, 손님은 손님으로서의 제각기 격을 갖춘다면 세상은 다스림없는 다스림 속에 어짐의 사회가 펼쳐질 것이다. 제각기 모습과 생각속에 태어난 몫으로 제 인생을 산다고 하지만 만나면 만날수록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 그를 만나는 것만이 아니라 그를 통해 나를 환히 들여다 보게 되면 숱한 배움과 반성의 기회를 갖기도 한다. 공자는 자하의 물음에 “사람은 엄숙하고 따뜻하고, 말은 언제나 명확 간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중한 기품과 무게가 있고 그가 있으면 주변이 밝아지고 환해져야 하고 땅과 바다가 모두를 생육시키고 안아주듯이 만인 포용의 애정을 가지고 돈독히 쓰다듬어야 하며 전하고자 하는 말이 과장되고 분에 넘치지 않도록 간단명료하면 좋다”라고 했다.대부분의 사람은 엄숙하면 온화함이 적고 온화하면 말이 명확치 못하기도 하다. 그지없이 부족한 사람들이 이러한 세가지를 억지로 갖추려 하는가. 자신을 찾는 아름다운 행보에 스스로 저절로 되어주길 바라면서 치열한 수행의 자세로 삶을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 돌고 있는 팽이에 채찍을 가하면 더 완전성 있게 도는 것과 같이 사람의 못된 천품도 잠시만 놓아버리면 제자리로 돌아가버리는 못된 회복탄력성의 속성이 있다. 우리는 흔히 가르침을 주는 사람을 스승이라 한다. 가르침을 준다고 해서 모두 스승이라 부를만큼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진정 배우는 사람의 자세는 배움을 통해 새 것을 끌어내는 법을 배워서 가르치는 스승과 같이 필적 동행하는 것이며 그를 뛰어넘고자 하는 의욕도 그를 거듭 다스리는 방법이다. 나는 아침마다 마주하는 거울옆에 이렇게 써 놓았다. “옛 사람의 마음을 스승 삼을뿐 자취는 스승 삼지 않겠다”고. 그들의 필적을 흉내만 내지는 않을 것이다.서예작품도 처음에 접하면 거칠고 질박하듯 두텁게 마르듯 당긴 획의 깊이와 중량감은 서예를 모르는 이에게는 낯설기만 하겠지만 좋은 작품은 보면 볼수록 헤어지기 싫은 귀한 사람이 주는 매력만큼이나 끌어주는 기운이 있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06-24

⒂ 繪事後素 (회사후소)

팔일편에 “아름답게 웃는 얼굴에 보조개가 예쁘네. 아름다운 눈의 맑은 눈동자가 선명하구나. 흰비단으로 광채를 내도다”라는 말이 있다. 소이위현혜(素以爲絢兮)란 본래 비단 바탕에 채색한다는 말인데 제자 자하가 “흰비단으로 광채를 낸다”라고 잘못 안 것이다. 공자는 자상히 일러준다. “그림 그리는 일은 먼저 바탕이 있는 뒤에 색을 칠해 다듬는 것이다” 자하는 “예 알겠습니다. 예(禮)가 뒤라는 말씀이군요”라는 답에 공자는 크게 성숙한 소견에 흐뭇해 하면서 “나를 일으키는 자가 자하로다. 비로소 너와 더불어 시(詩)를 말할 수 있게 되었구나”라고 덧붙인다. 상상만해도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요 수준높은 예술 드라마이다.내 자신도 숱하게 많은 한자 중에서 좋아하는 자 몇 자 중에 이 글자가 포함되기에 차실 이름이나 인연되는 가까운 사람들의 호에 한 두번 써본 경험도 있다. 흰 색깔 본디 라는, 말 꾸밈없는 그 자체라는 순수. 지금 나의 붓글씨의 형상도 기울였다가 바로 세웠다가 모았다가 해체 했다 억지 춘향격으로 다듬어져가고 있다. 언제쯤이면 나의 본래 성품 그대로 나타날 수 있을까. 혹시 위선과 가식된 포장은 아닌지 늘 살펴본다.찻자리에 가끔 초대 받아가면 첫 마디가 “비싼 차입니다. 얼마주고 샀다”라는 말에 그만 차의 맛이 사라져버리고 어쩔줄 몰랐던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였다. 먼저 차의 성품이 바탕되어야 차맛이 온전할 것인데 같이 한 시간이 아쉽고 물로 배만 채운 격이 되어버린다.`회사후소`에서 한자의 어원 상으로 본디 소(素)는 전서에서 사(絲)와 석(昔)으로 이루어져 있어 석은 처음초(初)와 통하여 처음의 뜻이며 누에고치에서 갓 자아낸 원래 하얀실이란 뜻에서 본디 바탕, 희망, 정성, 평상심 등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장식없는 거문고를 소금(素琴)이라고 하며 화장하지 않은 얼굴을 소면(素面), 반찬없는 음식을 소찬(素餐) 이라고 한다.또한 노자 도덕경의 견소포박(見素抱撲)이라는 단어도 우리에게 소박하게 다가온다.우리의 삶은 한정된 시간을 목숨을 담보로 얻어낸 절대적인 것이다. 짧은 두레박으로 깊은 우물의 물을 길러 올 수 없기에 바탕을 잘 다듬어야 생명력이 길고 오래간다. 노년기의 얼굴과 건강도 젊었을 때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며 썩은 나무로는 조각할 수 없듯 억지로 끼어 맞추지 말아야 한다. 바탕이 좋은 사람을 보면 따라 하고 싶고 그 삶이 탐나고 닮고 싶다.착근을 잘한 벼는 바람에 흔들리지만 뽑혀지지 않고 실한 열매를 맺는다. 튼튼하고 좋은 바탕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빛이 되어주길 바랄 일이며 회사후소의 깊은 뜻을 다시한번 안아 새기는 일은 삶의 바탕에 성심을 다하는 일이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06-17

⒁ 화(和)

점으로 시작되고 한 점을 거두어 들이면서 완결되는 것이 서예작품이다. 최소단위인 한 점은 우주 삼라만상을 담는 형상이며 작가의 혼신의 정신 발로이다. 살아있는 자가 죽은 글씨를 쓰지 말라고 하는 말은 무의미하게 최소한 점을 찍지말고 점을 쓰라는 말과도 같다. 획은 점들이 모여 이룬 것이고 선과 선이 모여 글자를 이루고 화합하여 이룬 글자는 작품이 된다. 한 획 속에 인생의 삼막이 있고 한 작품속에 희로애락 젊음 늙음 만용 성실 오만 편견 지식 지혜 모든것이 다 들어 있다. 명작은 한 점과 한 획이 소홀함이 없이 짜여진 절대적인 화합의 결정체이다. 서로 등 내어주고 어깨 벌려주고 끌어 안아주는 우리들의 따스하고 정감어린 토담집 담벽의 이상하지만 밉지않는 결합의 조화가 참 오랫동안 기분이 좋아진다. 획과 획의 비우고 채워주고 양보해주는 덕분에 그 자리가 환해지고 비로소 글자가 반야꽃이 되어 피는 것이다.이런 작품 본 적이 언젠가 있었다. 기업에서 몇 십주년 기념 사보집의 표지에 작품을 부탁하였다. 글제도 준비하지 않은 부탁인지라 나는 논어의 글귀에서 `화이귀(和而貴)`를 작품으로 완성했다. 기업에 노사의 관계만 어찌 화합의 조화가 귀하겠는가. 인간의 관계는 물론이고 음악 시 자연현상 등 살아있는 것이나 죽은 것이나 모두가 사물과의 어울림이 중요하다. 다투지 않고 시샘치 않는 그 조화의 묘미가 바로 질서이며 정도이며 상생이다.서예가의 삶을 살다보면 남의 부탁으로 작품 제작이 가끔 있다. 한 폭의 작품을 부탁받는 경우에 나는 많은 글귀 속에 화(和)라는 단어를 잘 사용한다. 쉽고 단순한 것 같지만 평생 가지고 살아도 쉽지 않는 귀한 것이다.한참 지나버린 나의 결혼 때만 하더라도 주변 서예인들이 축하의 글씨 작품이 많았지만 그중에 和와 敬을 작품으로 한 것을 걸어두고 새기고 살고 있다.和라는 글자는 어원적으로 온화 화목 조화 따뜻 응하다 화답 대답의 의미이며 和는 會와 같이 만난다로 쓰여 사람의 목소리와 목소리가 조화를 이룬다의 뜻에서 파생되어 화목하다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좋고 좋은 것 중에 “내 논에 물들어가는 소리와 식구들 입에 밥 들어가는 일이다.”공자는 학이편에서 “예의 쓰임은 조화를 귀히 생각한다.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조화의 중요성만 알고 예를 절제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행하지 말아야 한다” 하셨다.귀한 예도(禮道)의 조화로운 행함, 그것이야 말로 참 아름답고 맛나는 일이다. 이른 저녁 이 한 글자만 생각해도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는 묘한 힘이 있다. 이것이 작품과 글자의 기운이고 문자향이고 서권기이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06-10

自己爲學(자기위학)

하늘보다 높은 이치 깨는 일이 공부다. 사는 일 만큼 어려운 공부가 어디 있겠는가. 사는 일은 언제나 죽음을 담보로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사는 동안 우리는 어떤 행위든지 하고 산다. 이 일이 대사(大事)이며 공부인 것이다. 경전을 읽고 수행을 하고 두꺼운 백과사전을 펴고 접고 읽는 일, 정보의 바다에 빠지고 사색없이 검색하고, 죽은 지식을 더듬어 가는 이런 것들이 공부가 아니다. 사는 것 자체가 작두날을 타는 아찔한 공부인 것이다. 논어 헌문편에 “자신을 위한 참된 공부”를 강조하고 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부 말고 자신의 성정을 위한 참 공부를 해야 한다. 지식 노동자가 아는 것만큼 세상을 윤택하고 슬기롭게 하는 것은 아니다. 노자는 “아는 것 때문에 거짓말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세상은 혼탁해진다”고 했다. 참된 공부는 무엇일까? 마음의 내재된 성숙을 기르고 함양하는 정신적 도야의 과정인 것이다. 지식을 자신의 정신 수양과 사회 기여와 순화보다는 사회적 출세의 수단과 남을 속이고 그릇된 행위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큰 문제이다. 배워서 남을 주어야 한다. 큰 배움은 자신의 성숙은 물론 남들에게 돌려주었을 때 진정 제대로 배운 것이다.“위로는 큰 지혜를 깨우치고 아래로는 뭇 중생을 위해 지혜를 나누어야 한다”는 붓다의 가르침이 참 깊은 말씀이라 생각된다. 지식은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스스로 주인된 의식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에 모든 것을 안다고 해도 다 알 수가 없고 알려고 해도 다 알 수 없다. 남의 지식 아무리 꿰뚫고 살아도 하는 행동이 무례하면 모르는 것보다 못하다. 아는 사람이 위험천만 할 때가 더 많다. 세상에 가장 큰 도둑은 지식을 이용한 잡된 도둑이다. 그 중에서 나라 구한다고 줄지어 큰소리 친 몇몇 사람들이 끝에 가는 곳이 거의 정해져 있다. 포토존 앞에서 받은 것 없다고 한 사람들이 대부분 독방에서 시간을 보내고는게 참된 일로서 세상에 돌려주어야 한다.“나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내게 이로운지는 생각해 보지 않는다”라고 한 선현의 말씀이 쩌렁쩌렁 귓전을 울린다. 스스로 삶에 대해 최선을 다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신뢰나 이익을 주지 않은 지식이나 행위는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고 사회공공의 적이다.한 사람의 잘못된 욕망이 사람 사는 세상에 폐해만 끼치고 흔들어 놓아서는 안되며 이 세상에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고 교만하고 의심하는 잘못된 견해를 버려야 한다. 당장의 삶보다 귀한 인생을 위한 배우고 내려놓는 공부를 잘 익혀야 한다. 어떤 공부가 진정한 것인지 세상살이 사는 기간은 짧고 우리 모두 너무 늦게 철이 든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2016-06-03

소금 굽는 할아버지의 평상

□성인처무위지사(聖人處無爲之事):성인은 무위의 일에 처한다그분은 연고도 없는 동네에 갑자기 들어오셨다. 처음엔 아랫마을에 사셨다. 머리를 박박 깍은 할아버지는 대나무에 소금을 넣어 불에 구워 먹었다. 할아버지가 소금 굽는 모습을 직접 보기도 했다. 죽염이라는 말을 알기도 전에 죽염을 맛보았다. 할아버지는 올 때도 그러했지만 갈 때도 홀연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몇 해가 지나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다시 돌아왔는데 이번엔 아랫말이 아니라 우리 집 옆집이었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집에 쥔을 붙였다. 할아버지는 소금을 굽지는 않았다. 동네사람들의 바쁜 일손을 돕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나무로 의자나 책상 같은 것을 만들었다.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식사를 대접하곤 했다. 소금이나 구워먹는 괴팍한 할아버지와 밥을 먹는 것이 마땅치 않았다. 할아버지는 식사를 하고 나시면 꼭 밥그릇에 물을 따라 드셨다. 밥그릇은 늘 깨끗했다. 하루는 당돌하게 “할아버지는 왜 더럽게 그런 물을 마셔요. 컵에 드시면 되지….” 할아버지는 많이 남지 않는 이를 드러내고 사람 좋게 웃었다. “내가 먹은 밥그릇인데 뭐가 더럽겠냐?” 나는 지지 않고 “그래도 고춧가루도 묻고, 국도 섞이고, 그런 걸 물에 말아 먹으면 어떡해요?”라고 쏘았다. “그 물이 더럽게 보이더냐?” 할아버지는 네가 먹은 것 역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마디 가르칠 법도 했건만, 웃기만 할 뿐이었다. 할아버지가 좋았던 건 그때부터였을까. 할아버지의 맨질맨질한 머리를 버릇없이 만져본 적도 있었지만 할아버지는 그 때도 웃을 뿐이었다. 자주 할아버지 집에 들렀다. 할아버지가 다루는 대패니 끌이니 그런 목공구보다, 목탁이나 염주를 뚝딱 만드는 솜씨가 더 신기했다. 나는 모르는 것 투성이어서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물었다. 그 집에서 한 해를 다 채우셨을까.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평상 하나를 만드셨다. 홈과 이음으로만 이루어진 평상이었다. 그 평상을 우리 집에 가져다 두고 할아버지는 동네를 또 떠났다. 나는 여름의 대부분을 그 평상에서 보냈다. 밤에 잘 때도 평상에서 잤다. 가로등도 하나 없는 궁벽한 산골은 그야말로 어둠으로 가득했다. 별을 세는 것보다 어둠을 보는 것이 좋았는데, 어둠은 등질한 어둠처럼 보이지만 사실 여러 겹의 어둠으로 이루어져 있다. 꿈속으로 접동인지 두견인지 알 수 없는 새의 호곡 소리가 스몄고, 뒤안 댓잎은 바람 없이도 흔들렸다. 이슬에 이불이 젖는다고 어머니는 성화였지만, 나는 밤마다 평상에 이불을 깔고 밤의 어둠을 들었다.뒤늦게 알았는데 할아버지는 고매한 스님이셨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주지스님이 우리 마을에 들른 것은 당신 나름의 수행 방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분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말했고, 그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행동으로 보였다. 이를테면 할아버지는 나와 밥을 먹을 땐 밥그릇에 물을 따라도 될 정도로 정갈히 밥을 드셨다. 한 번도 불경을 외거나 목탁을 두드려 스스로를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당신의 가르침은 가르침의 내용보다 가르침의 방식 속에 그 정수가 있는 듯했다. 그러한 깨달음은 수십 년이 지나서 내게 도착했다.□천의무봉(天衣無縫):선녀옷엔 솔기가 없다영주 무섬 마을에서 숙박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주말이었고 예약도 하지 않았기에 그냥 동네나 한 바퀴 둘러볼 요량이었다. 무섬마을 `자료전시관`에 들렀다가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숙박할 만한 곳이 있냐고 여쭈었다. 사람 좋게 생긴 관계자는 전화를 여기저기 돌리더니 한 곳을 소개해 주었다.그렇게 하룻밤을 보낼 수 있게 된 곳이 `주실고택`이다. 주인어른은 서글서글하고 시원시원했다. 한 번 누워나 보자며 방에 누웠더니 해거름 녘에서야 깼다. 마을을 크게 돌아 뒷산에도 올라가고 싶었건만 외나무다리를 다녀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집으로 돌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정이 되었다. 친구들은 방에서 잠들고 나는 손바닥만한 사랑방 마루에 이불을 펴고 누웠다. 할아버지의 평상을 생각했다. 그런데 그 늦은 시간에 대학생 한 무리가 바로 옆집에 도착했다. 그들은 짐을 풀기 무섭게 게임을 했다. 술을 마셔야 노는 것 같이 여기는 `쉰`세대와 저들은 확실히 다른 세대였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밤을 듣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대신 학생들의 웃음을 눈을 감고 지켜보았다. 남자와 여자가 모인 자리에는 어떤 흥분이 깃들기 마련이다. 서로의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는 듯 조심들이었지만, 그 조심성 속에도 팽팽한 긴장을 읽을 수 있었다. 눈을 감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누가 누구에게 관심이 있고, 누가 누구의 관계를 질투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학생들의 목소리는 나의 의도들에 왜곡되어 목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이리저리 꿰매어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무봉(無縫)한 평상을 떠올리고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6-06-03

⑫ 묵위식지

몇 년 전 나는 나의 서재 문 앞에 이렇게 써서 붙여놓고 드나들면서 깨우쳤다. “침묵을 통해서 이해하고 침묵을 통해서 효과를 얻고 침묵을 통해서 이익을 얻자”라고. 침묵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음의 단순행위가 아닌 쓸데없이 하는 말을 의미한다. 손해를 당하고 비난하지 않음도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기쁜일에 흥분치 않기와 자랑하지 않는 일이 어렵다.침묵하려면 적어도 입안이 검어져야 한다고 입구에 검을 흑(黑)을 쓰기도 한다. 두꺼운 침묵만이 명철한 지견력을 가져올 수 있다. 공자께서는 평소 배우는 것에 싫증을 내지 않고 아래 사람에게 묻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제자들 앞에 모른다는 것을 당당히 하셨다. 모른다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 아는 것이라는 말씀이 생생하다. 또한 남을 가르치는 일도 평생 게을리 하지 않는 덕높은 교육자였다. 나 자신도 10여 년전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고 시골에 들어앉았다. 가르치는 일이 싫어서라기 보다는 부족하면서 가르친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성숙하기 위한 나의 선택이었다. 세상이 선택하고 버리는 일이 전부이지만 참 잘한 선택 중 하나이다. 가르치고 배우면서 서로 성장한다, 이것이 교학상장이다. 장유(1587~1638)는 “침묵은 온갖 미묘함이 나오는 문, 침묵만한 것이 없고, 교활하고 영악한 사람은 말이 많고, 어수룩한 사람은 침묵하네. 급하게 서두르는 자는 말이 많고, 마음이 안정된 자는 침묵하고, 말하는 사람은 수고롭고, 침묵하는 자는 편안하네”라고 말했다.말이 많으면 선하지 않다는 말도 무서운 말이며 말이 많으면 궁하기 마련이다라는 말도 겁나는 말이다. 말이 많으면 반드시 말로 망한다. 세상에 내밷는 쉬운 한 마디에 귀한 자리는 물론 생사까지 버려진 이가 한 두 명인가. 나는 가끔 아는 것이 없어서 그늘처럼 침묵 할때도 있다. 모른다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지고 미안할 때도 있지만 집에 돌아와 돌이켜보면 그래도 다 기억되지 않는 그들의 말도 중요하지만 나의 무거운 침묵으로 인해 맑아지고 밝아질 때도 있다.비겁하게 몰라서 침묵하기보다 남의 말을 귀 기울이고 젊은이들에게 힘을 주는 어른들의 경청과 침묵이 아쉬운 세상이다. 나 자신도 벌써 어디 앉으면 자꾸 말이 많아진다. 못 배운 어른 노릇 하려는 짓인가 싶어 겁이 난다.나이가 들면서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며 특별히 조심한다. 오늘도 자연의 말없는 말을 들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침묵에게 매달리고 싶다. 보잘 것 없는 잡문이 길어지는 것 또한 말이 많아지는 것일 것이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05-27

⑪ 道不同不相爲謀 (도부동불상위모)

얼마전 일이었다. 논어의 구절 중에 동업을 하지말라는 뜻의 문장이 무엇입니까라는 느닷없는 물음이었다. 먼거리에 있지만 종종 만나는 관계이고 편히 지내는 사이다. 굳이 예를 들면 위령공제 15절에 “도가 같지 않으면 함께 일을 꾀하지 않는다”는 글귀가 있다라고 했다. 논어에서 도는 사람의 실천 덕목인 인(仁)이기에 동업과의 직접적인 관련은 아니겠지만 인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과 서로 상호관계 속에 손을 잡고 협동해야 한다. 부족한 이에게는 길이 되고 가끔 그들의 배경이 되고 비비고 기댈 언덕이 되어주기도 해야한다.사람의 사귐에 대해 사마천의 사기에 “한번 귀해지고 한번 천해지며 사귀는 정이 나타난다” 즉 한번 죽고 한번 살아나니 사귐의 정을 알게 되고 한번 가난해지고 한번 넉넉해지니 사귐의 태도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의 인심은 조석지변이다. 노인의 건강과 가을 날씨는 알 수 없다고 한 것과 같다. 이랬다 저랬다 변하는 것이 마음이기에 늘 경계의 대상이고 온전해지기가 쉽지 않다.천하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주변 사람을 얻어야 한다. 가을의 완전한 추수를 위해서는 넉넉한 거름과 정성과 가끔의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도를 구하기 어렵듯이 사람의 마음을 구하는 일은 참 어렵다. 사람은 살아있는 이익과 정의라는 경계점에 움직이는 활물(活物)이기 때문이다. 옛말씀에 평생의 가장 위대한 일은 사람을 기르는 일 만한 것이 없다. 돈으로 명예가 아닌 덕으로 사람을 구해야 한다. 예술도 역사도 분당을 하고 파당을 한다.권리와 명예 이익을 위해 모든 것에 따라 웃었다 울었다가 모였다 흩어진다. “파리를 쫒으면 늘 변소 주변만 머뭇거릴것이고 꿀벌을 쫒으면 꽃밭 가까이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썩은 고기는 파리떼는 모을 수 있어도 진정한 사람은 모을 수 없다.내 자신에게 묻고 있다. 너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기웃거리고 있는가. 권력이나 명예, 돈 이 모든 것이 사람이 지향하는 그 무엇 중에 하나이겠지만 가장 좋고 유일한 점은 가지지 못한자 보다 선을 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유리나 도자기 그리고 평판은 쉽게 깨어지며 절대권력은 휘두르는 것만큼 썩기 마련이다. 살다보면 만나야 할 인연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서로같이 생각하고 호흡하는 이를 찾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먼길을 같이 갈 사람을 만난다는 것 행운이며 무량대복이다. 환한 대낮에도 호롱불 들고라도 사람을 찾아야 한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05-20

⑩ 공손, 경건, 진실

사는 일이 늘 넘쳐서 문제이다. 이 넘치고 행동이 넘치고 사람들의 만남이 진실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얼마나 정의롭지 못하기에 세간에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숱하게 정의 되어지지만 실천의 한계는 누구라도 완전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의 구조상의 모순속에 살고 있다. 공자께 제자 번지가 “무엇이 인(仁)입니까 ”하고 여쭈었다 . 공자는 “평소 집에서 거처할 때는 공손한 자세를 지니며 일을 맡아 처리할 때도 공경히 해야 하며 남을 대할때는 충심의 심정을 대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비록 미개한 지역에 가더라도 이 세가지는 버려서는 안된다”라고 말하고 있다.버려서는 안되는 것이 어찌 이 세가지 뿐이겠는가마는 공자는 제자들의 학습 수행 덕목에 공손을 강조했다. 공(恭)은 공손이며 낮춤은 미덕이며 남을 받들어 모시는 지극한 마음이다. 선인들은 공(恭)자와 손(遜)자를 사용한 호가 많이 사용되어 자신을 살피고 이끌어 왔다. 요즘 세태가 사람 귀한 줄 모른다는 것도 큰 병폐이다. 언제 무릎 조아리며 다가서 본 그런 사람이 멀리 또는 가까이에 있다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복된 맑은 부자인 것이다.논어에 자공은 스승인 공자보다 높게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런 평가에 자공은 “나의 담장은 겨우 어깨 높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선생님의 담장은 높이가 너무 높아 도저히 그 문 안에 들지 않으면 볼 수 없다. 그 대문에 들어가 볼 수 있는 이는 매우 드물다”라고 하였다. 제자 자공의 유능함의 칭찬에 이렇게 겸손함은 그의 해와 달 같은 스승의 흠모와 모심에서 나온다. 공자의 사당 묘당 대문인 앙성문(仰聖門)에는 청나라 건륭황제의 글씨로 만인궁장(萬刃宮牆)이라고 쓰여져 있다. 공자의 인격과 학문의 정신적 높이를 말하고 있다. 8척이 1인(?)이라니 만인이라며 얼마나 높을까. 나의 담장은 있긴 있는지 몇 치 라도 되면 좋겠다. 살아가면서 두손모아 공손하고 경건하게 진실되게 살 수만 있다면 좋겠다. 살아가는 처세술의 방편 중에 세속에 집착치 말고 온화하고 부드럽게 맑고 잔잔하고 담담하고 사리사욕 앞에는 과단성과 결단성이 있으며 뭔가를 이뤘다 해도 기쁨 앞에는 참을 수 있고 들뜨지 말고 뜻을 이루지 못해도 좌절치 말고 태연할 수 있다면 100년을 살고 200년을 살았다고 할 것이다. 몇 년 전 전시회때 부탁으로 쓴 작품 한 점이 바로 이 글제였다. 그 작품이 잘 있는지 사뭇 궁금하다. 신이 있다면 언제나 한결같이 공손하고 경건하고 진실된 삶을 살게 하소서라고 매달리고 싶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05-13

⑨ 過則勿憚改(과즉물탄개)

웃어 넘기기에는 너무 무서운 일이다. 몇 년 전 주변에 있었던 실제 상황이다. 부모님의 강요에 한문학과에 진학한 아이가 있었다. 한문학도가 되길 바라는 그의 부모님은 적어도 대학 서문 정도는 외우기를 바랬다. 방학때 내려온 아이에게 그간 배운 한문 공부 글귀 속에 가장 의미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침없이 꾸중 하듯 내놓은 단어가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였다. 듣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고 한다. “허물이 있으면 즉시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는 말이다. 공자는 위령공편에서도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허물이라”고 했다. `과즉물탄개`는 도리를 어기고 나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는 매서운 회초리이다. 과(過)는 월(越)과 통하여 먼곳을 지나가다는 뜻과 도를 지나가다의 의미이며 탄(憚)은 心과 單을 꺼리어 싫어하는 마음이며 개(改)는 딱딱해진 것을 두드리고 고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다산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사람은 모름지기 사나운 새나 짐승처럼 전투적인 기상이 있고나서 그것을 부드럽게 안으로 다스려 법도에 알맞게 행동하면 유용한 인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허물을 고치면 대인(大人)이 될 수도 있다. 인생은 늙고 나날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무엇이든가에 쉽게 길들여진다는 것이 무섭다. 잘못에 젖어들어 시·공간에 길들어져 버리면 벗어날 수 없는 타성에 젖어든다. 잘못을 고치고자 하는데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돌아 오기가 쉽지 않다. 손가락만큼의 구멍이 저수지의 물을 모두다 말린다. 60일간 감옥살이를 하고도 공자의 사위가 된 제자 공야장은 비록 전과자이지만 공자는 허물의 이유를 알았기에 그의 제자를 사위로 맞이한 것이다.사회는 사람들의 잘못을 너무 쉽게 용서하고 안아주는 경향이 있다. 용서하고 안아주는 일이 나쁜 것이 아니지만 용서는 허물어진 내 양심을 손질하는 일이며 아름다운 선행이다. 문제는 받아들이는 깊은 반성없는 그들의 마음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스스로 배웠다고 하는 큰 도둑들의 잘못된 도리는 어찌할 것인가 한심하기 그지없다.사는 일이 이런 저런 이유로 녹록지 않다. 그렇지만 누구나 사는 일에 살얼음을 밟듯 조심하고 깊은 못가에 이르듯 조심하는 마음으로 행하면 허물을 조금씩 줄여갈 수 있을 것이다. 남의 허물을 입에 올리기전에 나의 허물이나 고쳐야 겠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04-29

⑧ 德不孤 必有隣(덕불고 필유린)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 높고 귀한 덕은 세상에 향기가 되고 지침이 되면 공명자가 생기고 향기는 멀리 세상을 환하게 맑게 만들어 놓는다. 덕은 수신의 첫번째 덕목이며 도를 바르게 닦고 수행했을 때 스스로 얻어지는 것이며 덕이란 한자의 어원은 설문해자에서 밖으로 다른 사람에게 바람직하고 안으로 나에게 언제나 획득한 것, 즉 몸과 마음이 체득한 것이며 다른 사람이 혜택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독특한 존재 다움을 발현하는 능력을 가진 영원한 대 스승 공자는 헌문편에서 “천리마는 그 힘을 일컬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덕성으로 일컬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덕은 조련되어 얻어진 탁월한 능력이며 옛말에 늙은 말이 길을 안다”라는 `노마식도(馬識途)`는 양마(良馬)의 덕성을 일컫는 말이다. 사람의 덕성은 어떻게 하여야 성숙해지는 것일까. 선에 대한 향상적 지향을 가지는 일이고 선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하다. 살다보면 가끔 참 그분 덕이 있어 보이더라, 참 덕있는 분이더라는 말을 들으면 그저 찾아뵙고 무릎 조이고 뵙고 싶다. 자신에게 덕성이 없으면 남의 덕을 받들어 볼 수도 모실 수도 없다. 다산 선생은 덕을`곧은 마음을 실천하는 것`이라 했다. 나라나 가정과 작은 집단을 이끌어가는 일도 다르지않다. 우리사회에 소통, 융섭, 융화, 이러한 말들이 생겨난 이유도 부족분을 채우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덕으로써 이끌고 예로써 다스리면 사람들은 부끄러워하게도 되고 올바름에 이르게 된다.” `도지이덕 제지이례 유치차격(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이라고 위정편에서도 말하고 있다. 바로 덕치주의다. 덕은 귀하고 값어치 있는 단어이다. 노자의 도덕경에서도 도경과 덕경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덕은 성인이 하늘과 인간을 감동시켜 태평시대를 이룩할 수 있는 근거이며 사욕이 없는 상태의 마음이며 사람에게 주어지는 때묻지 않는 마음 순화되고 깨끗한 본성의 상태이다.서예 전시회에 가면 꼭 만나게 되는 작품 한 점이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이다. 너무 흔하기에 귀히 여기지 않지만 오래 머물러 깊이 새겨 볼 일이다. 한 번쯤은 덕이라는 존엄한 단어와 나는 누구에게 따뜻한 공명(共鳴)의 이웃인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나에게는 큰 재산인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이웃이 있어 외롭지 않다. 닭울음 소리도 잘 들으면 가르침이고 이웃이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04-22

⑦ 三省吾身(삼성오신)

사는 일이 허물의 연속이다. 자기 중심의 삶을 살기 때문에 허물은 자기로부터 오며 자기를 모르기에 반성하는 일이 쉽지 않다. 자나 깨나 반성하고 고치라고 숱하게 듣고 살고 있다. 공자 제자 중에 가장 먼저 학이편에 증자가 나온다. 字가 자여(子與)인 증삼은 학이편에서는 “충(忠), 신(信), 전습(傳習)을 살피고 반성한다”라고 했다. 여기에서 삼성(三省)의 성은 目과 生으로 生은 淸과 통하여 맑다의 의미이며 자세히 보면 덜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찰(省察)로 주위를 살펴 알아본다의 뜻이며 세 번은 세 번이 아닌 자주 많이라는 뜻이다.충(忠)은 자신의 모든 것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일이며, 신(信)은 실질적인 것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수받은 것을 복습하였는가의 전(傳)은 스승에게 받은 가르침이고 습은 스스로 익숙케 하는 것이라고 주희는 설명했다. 이렇게 자신을 성찰하고 기르면 무엇이든지 완성에 이를 수 있다. 돌이켜서 안으로 살피며 반성하는 일은 참으로 귀하고 복된 일이다. 이 일은 모두가 힘써야 할 근본이다. 군자는 “근본에 힘쓰니 근본이 확립되면 인의 도가 발생한다”라고 하지만 돌이켜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쉽지 않다. 붓글씨 공부 과정에 획은 반드시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붓을 일으켜야 한다. 이 또한 자신을 돌아보는 중요한 수행의 시간이 된다.공자는 “너무하도다. 나는 아직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인식하고 마음속 깊이 자책하는 이를 보지 못했다”라고 `공야장편`에서 지적하고 있다. 반성은 참회하고 다시는 그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거룩한 행위이다.누구든지 자신을 통제하고 거느릴 수 없다면 자신에게 군림 당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 반성해야 할 일이 어디 한 두 가지이겠냐만은 50살이 되었을때 춘추시대 위나라 천하의 대부 거백옥은 “49년을 헛살았다”라고 지극히 겸손하게 반성하고 있다. 인간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는다면 이건 진정한 잘못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허물이 있으면 즉시 고치라고 공자는 말하고 있다. 내 자신의 우매함이 어디서 오는지 탐심과 진심과 치심이 선한 나의 근본 자리를 찾아 들어갈 일이다. 반성을 통하지 않는 인생은 전혀 존재의 가치가 없다. 오늘은 내 발 밑이나 찬찬히 살펴야겠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04-15

⑥ 사랑(愛)

그저 생각만 해도 환해지는 말. 말하기 전에 웃음이 나오는 한 단어 사랑, 참 귀하고 소중하다. 천대 만대의 시간의 흐름속에 사랑이라는 이 단어만큼 가슴 저미고 탈많은 단어도 많지 않을 것이다. 뭐라고 정의 할수도 없지만 인간에게 어쩌면 가장 소중한 언어이기도 하다. 공자께서는 學而편에서 “제자는 집에 들어 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가서는 윗사람을 공경하며 행동을 삼가고 미덥게하며 널리 사람을 사랑하되 어진 사람을 가까이 해야한다. 이런 일을 실행하고 남은 시간이 있으면 바른 글을 배워야 한다”라고 했다. 효도, 공경, 미더운 행동, 넓은 사랑 어느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널리 세상 구하는 사랑 박시제중(博施濟衆)이다. 공자의 사랑은 많은 사람을 널리 구하고 사랑하는 통큰 대 군자의 사랑이며 제자를 사랑한 덕있는 스승으로서의 사랑은 눈물겹다. 특히 안회의 죽음에서“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하며 원통해 하는 그의 절규는 가이없는 제자의 사랑이다.사랑 愛의 어원으로 愛는 머리를 돌려 남을 생각하는 마음 즉 머리를 돌린 형상인 목멜기와 마음심자가 합해졌다는 의미와 누군가에게 다가서는 참으로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부모님의 지극하신 사랑은 천고불역이겠지만 요즘 세태는 서로 죽이고 죽이는 험악하고 치떨리는 세상으로 참 많이 변했다. 요즘 세상 흔히 믿을 사람 없다고들 한다. 이것은 믿음 있는 사랑 없다라고 하는 말이다.또한 사랑의 의미를 넓게 자식을 배불리게 먹이고 싶은 형상의 자(慈)와 남의 아픔마저 끌어 안아주는 비(悲),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모(慕)와 생각(思)그리운 정(情)도 있다. 사랑은 존경과 공경으로 완성되며 자신을 사랑하는데서부터 크게 넓게 나아간다 사랑은 지독하게 선한 마음으로 연습해야 하고 숱하게 가슴으로 키워야 한다.언제나 부족하기 그지없는 나의 작품은 스스로를 끌어안는 신뢰와 사랑과 정성의 결과물이다. 공자의 넓고 가이없는 사랑만큼은 아니어도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지금의 시간 앞에 찾아 온 사심없고 허물없는 사랑의 숙제는 미루지 말아야 할 일이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04-08

⑤ 부운(浮雲)

태어났다 죽는 일은 한구름 일어났다 사라지는 일이다.긴 시간인 것 같지만 왔다가는 일이 짧기 그지없다. 사는 동안 누구나 본능적으로 부하고 귀하기를 탐한다. 공자도 부귀와 영화는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지만 올바르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누리지 말아야하며 가난과 비천은 모든 사람이 싫어한다라고 말했다.세상에 부귀치고 바르게 얻어지는 것이 많지 않게 보여지고 있기에 재산 축적이 부정만이 방법인 것처럼 인식되는 것도 옳지는 않다. 사실 권력과 명예를 탐하는 사람 중에 이익 앞에 자유로운 사람 만나기 쉽지 않다. 채근담에서도 “명예를 좋아하는 것이 이익을 좋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好名不殊好利)”라고 하였다.세상살이 십중팔구가 권력과 명예 즉 부의 쟁탈전이다. 부(富)는 신에게 올리는 술통의 중배처럼 봉긋하게 넉넉하고 풍부해지기를 바라는 형상의 글자이다. 부할 수는 있지만 귀하기는 쉽지 않다. 정당치 않는 방법으로 인해 고통의 분란이 되어 자신은 물론 가족과 사회가 다 썩고 죽고 망한다. 자족하는 자가 가장 큰 부자라고 하지만 인간은 그칠줄 모르는 전진 지향적 동물이다.사회적 구조가 살아가기 위해 재물의 축적이 필요충분조건의 하나이겠지만 술이편에서 “좋지않은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을 구부려 베개삼아 자더라도 즐거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의에 어긋난 부귀와 영화는 나에게 뜬구름(浮雲)과 같다”라고 하였다. 공자도 부를 찾고 명예 찾아 숱하게 길을 나섰다. 우리 모두 탐심을 버리지 못하고 헤맨다. 누구에게나 `정의롭지 않은 부의 축적은 바르지 않다`라고 숱하게 가르친다. 귀 아프게 들어왔고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행하는 자 많지 않다.흐르는 거친 물에 양치질하고 거친밥을 먹으면서 이 시대에 자유자적 할 수 있는 사람 만나기 쉽지 않다. 모두가 내려놓으면 죽는 줄 안다. 내려놓아 보면 안다.나에게 뜬구름은 무엇일까! 사는 일이 늘 허공에 핀 꽃만 찾아나서지 않는지 멍청하고 어리석어 흰구름 일어났다 사라지는 구름의 무정설법을 알 수가 없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04-01

④ 三人行

스승이란 뭇 사람들 중에 사리를 분별하여 바르게 인도해주는 사람이다. 곳곳에서 우리는 스승을 만나고 묻고 가르침을 받을수 있지만 눈이 어둡고 오만 방자하여 알수도 없고 뫼실수도 없다. 참스승은 참되게 길찾아 나서는 자에게만 온전히 만나 뵐 수 있는 영광을 준다. 어찌 사람뿐이겠는가! 한 줄의 글과 한 점의 작품도 아니 미물도 자연도 눈뜨면 스승이다. 붓글씨를 가르치면서 전업작가의 생을 살아가는 직업 덕분에 귀하고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나고 살 수 있다는 것. 이것 정말 큰 복이다. 내 스스로 부족하기 그지 없지만 찾아와 주는 사람 모두가 이런저런 점들이 나의 참 스승임을 느낄 때가 많다. 좋은 성품은 배움을 주어서 고맙고, 악하고 못된 점들도 내가 받아야 할 시절 인연이고 버려야 할 깨우침이니, 그것 또한 고맙다. 붓글씨는 고개를 쳐들고는 쓸 수 없고 모난 구석을 매만져 두루 원만하고 조화롭게 다듬어주는 그런 기능도 있으며 그를 통해 사람과의 조화를 익힐 수도 있다. 이 또한 나의 스승이며 수행의 한 물건이다.스승의 날이 되면 내 자신이 먼저 반성하지만 진정으로 눈뜨지 못한 자에게 지혜와 지견력을 안겨주신 보은의 은덕 앞에 꽃 한송이 진정으로 바칠 수 있는 마음으로 뫼시는 분이 계신다면 그의 삶은 천하지도 비루하지도 않고 귀한 일일 것이다. 서실에서 자주 만지는 도구 중에 글씨를 쓸 때 화선지를 눌러주는 나무 서진에 “나의 반대편이 나의 진정한 스승이요 가르침”이라고 적어 두었다. 한때 격한 감정과 사람이 미워지는 마음이 쳐오를 때 깊이 새기면서 다독거린다.좋은 스승 찾아 길을 나서야 한다. 세상 모두가 길이고 길위에서 길을 찾아 떠나는 것이 인생이다. 유비는 삼고초려(三顧草廬) 했다지만 30초려 해서라도 배움의 길을 나서야 한다. 진정 배움만이 용기이고 희망이고 미래 대안이다.3류 스승을 모시면 영원히 3류밖에 될 수 없다. 좋은 스승 만나는 즉시 절반은 성공이고 그것은 진정 가장 무량 대복이다. 스승찾아 가르침을 받고자 천하에 선지식 찾아 목숨 걸고 구도행 나선 선재동자의 정신 맑고 치열한 구법행이 그립다. 자신의 일에 통달한 사람이며 신분이 지위에 관계없이 참스승이다. 스승은 진정으로 묻고 진실되게 구할 때 답한다. 늘 같이 길가는 도반, 그가 바로 스승이다. 가까이 계시는 참스승 잘 뫼셔야 한다.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2016-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