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걷고 보고 듣다 독일 여행기(上)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퇴직하자마자 곧바로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여행을 계획했으나 코로나가 발목을 잡았다. 코로나 끝날 무렵엔 2년간 유치원을 다니는 연년생 손자와 손녀의 등하원을 돕느라 또 미뤘다. 지난 3월로 막내 린이가 학교에 가게 되자 이젠 나의 ‘은퇴 후 버킷리스트’ 제일 위쪽에 있는 이 여행을 감행할 수 있게 되었다.독일에 외사촌 동생이 살고 있었다. 20년도 훨씬 전에 음악공부를 위해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음악치료를 더 공부해서 직장을 다니고 있는 동생이다. 휴가 때마다 귀국하면 반드시 만나서 웃음과 즐거움을 함께 하는 친동생 같이 살가운 사이다. ‘네가 있을 때 독일살이 하고 싶다.’며 만날 때마다 버릇처럼 말했더니, 반색을 하며 오라고 했는데, 앞서의 사정으로 미뤄진 지 4년이나 지났다. 동생은 해마다 휴가계획을 잡으면서 나의 독일행을 먼저 확인하곤 했다. 이번 여행은 작년 11월에 동생이 2024년 휴가 계획을 세우며 잡은 일정이었다. 더는 미룰 수가 없다에 합의하면서 우리는 신나게 여행계획을 잡기 시작했다. 여러 곳을 점찍듯 둘러보는 패키지여행은 싫다. 대신 며칠씩 한곳에 머물기. 이왕지사 먼 길 가는데 독일만 가기는 좀 아까우니, 주변국가의 도시도 몇 군데 둘러보기. 우리 내외 나이가 있으니 너무 많이 걷지는 말자. 이상이 나의 요구 조건. 남편은 독일의 시인과 문학과 철학에 관심을 갖고 관련 책을 사서 탐독하더니, 그들의 흔적들을 찾고 싶단다. 동생은 음악 전공자다운 이벤트를 제안했고 나도 대찬성. 두 편의 오페라와 한 번의 연주회가 추가되었다. 우리의 요구와 동생의 제안으로 세상에 둘도 없을 멋진 일정이 되었다. 2주를 훌쩍 넘는 비교적 긴 일정이었다.동생이 사는 독일 남부의 작은 도시 튀빙겐에서 며칠을 머물며 독일살이를 하는 것으로 우리의 일정이 시작되었다. 동생은 아파트를 빌려놓았고, 되도록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나와 남편의 교통카드까지 발급해 두었다.걷지 말기는 애시당초 제외였다. 또한 걸어야 보였다. 우리는 하루 평균 1만5000보 이상 걸었다. 2만6000보까지 걸었던 날도 있었다. 매일 만보기의 기록개신을 확인하면서 놀라고 대견해 했다. 밤이면 잠에 골아 떨어졌고 이튿날 또 멀쩡해졌다. 스스로 회복탄력성이 있다고 믿었던 나는 즐겁게 걸었다. 남편은 좀 힘들어했지만 잘 참아주었다. 덕분에 우린 도착한 날 밤에 딱 한 번만 택시를 탔을 뿐이었고, 모두 뿌듯해했다.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대부분의 도시는 고풍스러운 언덕 위의 성, 서양 미술양식의 성당과 교회, 그리고 아름다운 마을 풍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에 쫓기지 않으니 자세히 보고 즐기며 만끽했다.또 하나, 동생이 추천한 음악 프로그램은 충만했고, 여운은 길었다. 뮌헨오케스트라의 ‘토스카’와 비엔나오케스트라의 ‘투란토트’, 비엔나모차르트오케스트라의 연주회를 내가 직접 보고 듣게 되다니, 기대 이상 상상 이상의 귀호강이었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가 생각난다. 나의 이번 여행은 ‘걷고 보고 들어라’였다.

2024-06-19

번데기, 추억을 소환하다

정미영 수필가 햇살이 씨줄날줄 엮여 고르게 쏟아지는 화창한 날이었다. 경주시 전통명주전시관에 다녀왔다. 우리 일행은 명주 제조 과정을 직접 보기 위해 일부러 일정을 맞췄다. 시연은 매주 화, 목, 토, 일요일 오전 10시에 한다.솥에 고치를 넣고 삶아 실을 빼내었다. 누에가 성충이 되려면 고치를 뚫고 나와야 하는데, 우화시킨 뒤에 남은 고치로 실을 얻으면 중간에 계속 끊어진다고 했다. 그래서 우수한 품질의 견직물을 얻기 위해 번데기째 삶는단다.점심때가 되어 식당에 갔다. 일행 중 한 분이 학창 시절 추억담을 풀어놓으셨다. 산에 가서 뽕잎을 따다가 누에를 기르는 것은 본인의 몫이었고, 명주실을 뽑아 베틀에서 베를 짜 옷을 만드는 것은 어머님의 몫이었다며 눈시울을 붉히셨다.모두가 경험담에 몰입해 있던 순간, 밑반찬으로 번데기가 나왔다. 스스럼없이 먹는 내 모습을 보고, 번데기를 먹을 줄 아느냐며 몇몇 일행이 깜짝 놀라셨다. 평소 나의 식성을 아는 분들이라 의외였던 것이다. 번데기를 입에 넣으니 입 안 가득 짭짤한 맛이 나며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그 냄새는 오랫동안 마음속에 저장되어 있던 낯익은 것이었다. 그리움이었다. 나에게 있어 추억이 그리움이 되려면 내면의 심상이 따뜻해야 한다. 번데기를 보는 순간, 내 그리움의 심연 깊이 드리워져 있던 아버지에 대한 따뜻한 기억이 윤슬처럼 반짝였다.나는 대여섯 살 무렵부터 아버지의 손을 잡고 시내 영화관에 다녔다. 영화 광고 전단지가 덕지덕지 붙은 길모퉁이를 돌아서면 영화관이 우뚝 서 있었다. 주위 건물에 비해 컸으므로 그것이 영화관이라는 것은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시각이 아닌 후각으로 먼저 느꼈다. 골목길에 흠씬 배어 풍겨오는 번데기 삶는 냄새 때문에 영화관에 도착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내가 어렸을 적에는 영화관 앞 노점상에서 번데기를 팔았다. 찌그러진 양푼에 수북이 담긴 번데기는 모락모락 김을 내며 간식거리를 찾는 이들의 군침을 돌게 했다. 번데기는 그 어떤 그릇에 담아 먹는 것보다 돌돌 말린 소라 모양의 신문지에 먹는 맛이 최고였다. 종이 속 가득 담겨 있던 번데기는 신문지 냄새와 섞여 내 코를 자극했던 것 같다. 아니, 모처럼 함께 한 아버지와의 나들이 길에 꼬깃꼬깃 접혀진 비상금으로 사주신 군것질감이라 더 감칠맛 났던 것이리라.요즘 영화관에서 팝콘을 먹듯 그 시절에는 번데기를 먹었다. 불 꺼진 영화관에 앉아 모두가 화면을 응시할 때, 조심스럽게 번데기를 먹었던 그 맛을 아직도 나는 잊을 수 없다. 꿀꺽 소리가 옆 사람에게 들릴까 봐 눈치를 보며 천천히 삼켰던 일은 나에게 영화의 긴장감 못지않았다.성룡의 ‘취권’과 숀 코넬리, 로저 무어의 ‘007 시리즈’를 보면서도 번데기를 먹었고, 시한부 인생을 그린 ‘스잔나’를 보면서 울고 웃는 가운데에서도 내 손은 번데기를 집어 입 안에 넣고 있었다. 그것이 나에게 영화를 더 재미나게 볼 수 있는 조미료가 되어 주었던 것 같다.프루스트 효과라는 말이 있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특정한 냄새, 소리, 이미지 또는 다른 감각적 자극을 통해 과거의 기억과 감정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현상을 뜻한다. 번데기를 보고 어린 시절에 갔던 영화관과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추억이 떠올랐으니, 나에게도 프루스트 효과가 적용된 셈이다.지금, 누에의 한살이를 생각해 본다. 누에는 자기의 모든 것을 내주는 존재다. 고치 속에서 날고 싶다는 꿈을 꾸었을 텐데도 사람들에게 실을 주고 식용이 된다. 나는 왠지 누에가 아낌없이 나눠 준다는 점에서 부성애가 강한 내 주변의 아버지들과 닮은 것 같다. 자식을 위해 늘 헌신하는 아버지들. 내 아버지도, 아버지의 꿈이 있었을 텐데 나를 위해 매순간 가슴으로 삭혔을 것이다.아버지가 무던히도 그리운 날이다.

2024-06-19

악성 우륵의 악기, 가야금

음악은 다양한 사람들이 어떠한 제약도 없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옛 가야국에서 만든 가야금(伽倻琴)은 신라가 영역을 확장하던 시기에 통합되지 못하던 가야를 아우르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가야국의 금(琴), 가야금은 옛 문헌에서는 한글 표기로 ‘가얏고’라 불리던 현악기였다. 주로 긴 오동나무로 만든 공명판 위에 명주실로 꼬아 만든 12개의 줄을 걸고 줄마다 그 줄을 받치는 작은 안족을 두었다. 가야금의 둥근 윗판은 하늘을, 평평한 아랫판은 땅을, 공명통인 가운데가 빈 것은 천지와 사방을, 12줄과 12개의 안족은 12개월을 상징한다. 또한 악기의 몸체는 천지음양을, 3치 높이의 안족은 천지인을 나타내어 동양의 우주관과 자연의 운행 원리를 담아내었다.가야금은 대체로 수령이 30년 이상인 오동나무를 5~7년 통풍이 잘되고 그늘진 곳에서 자연건조하여 만든다. 대개의 악기가 그렇듯 둥근 형태로 깎아서 모양을 잡고, 앞판과 뒷판을 이어 붙여 울림통을 만든다. 습기를 제거하고 오랫동안 변질이 되지 않도록 불에 달군 인두로 울림통을 지지는 것도 중요한 과정 중 하나다. 안족 중앙에 줄의 굵기에 맞는 홈을 파고, 가야금에 실을 걸면 완성이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야금은 공명판의 오른쪽 끝을 연주자의 무릎에 얹고 오른손으로는 줄을 뜯거나 튕기며 왼손으로는 줄을 떨거나 누르면서 연주한다. 곧 청명한 음색이 들려온다.대가야 가실왕(嘉實王)은 우륵(于勒)에게 가야금을 제작하고, 지역에 따라 다른 가야의 특색을 모아 작곡하도록 하였다. ‘신라고기(新羅古記)’의 기록을 보면, “가실왕은 ‘여러 나라의 방언(方言)이 각각 다른데 그 성음(聲音)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라면서, 악사 성열현(省熱縣) 출신 우륵에게 명하여 12곡을 만들게 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우륵이 지은 12곡에는 당시 가야의 지명이 담겨 있다. ‘삼국사기’에는 12곡으로 하가라도(下加羅都)·상가라도(上加羅都)·달기(達已)·사물(思勿)·물혜(勿慧)·하기물(下奇物)·상기물(上奇物)·거열(居烈)·사팔혜(沙八兮)·이사(爾赦)·보기(寶伎)·사자기(師子伎)를 언급한다. 이 중 10곡의 곡명이 당시 낙동강 주변의 옛 가야 지방의 명칭이다. 하가라도는 신라 법흥왕 때의 아라가야(아시랑국) 지역으로 현재의 경남 함안이며, 상가라도는 신라 진흥왕 때 멸망하여 대가야군이 되었던 지역으로 현재의 경북 고령군이다. 우륵이 가야금을 만들고 익힌 성열현은 고령에 있다. 달기는 경북 예천 다인현으로 본래는 달기현 또는 다기라 불리던 곳이고, 사물은 사수현 또는 사물현으로 지금의 경남 사천이다. 물혜는 경남 함양군 이안으로 이안현 또는 마리현이었던 곳이고, 하기물은 옛 감문소국이 있던 곳으로 금물현 또는 음달이라 불렸으며, 지금의 경북 금릉 아랫개경에 해당된다. 상기물은 경북 금릉의 웃개령이고, 거열은 거열군이라 불리던 경남 거창이다. 사팔혜는 팔혜현·초팔혜현·초혜현으로 불리던 경남 합천군 초계 지방의 옛 지명이고, 이사는 지금의 경남 의령군 부림면 일대이다. 보기와 사자기는 현재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이렇게 널리 분포되어 있던 가야는 지역마다 전통과 문화가 달랐고,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성했다. 그러나 신라의 영역 확장은 가야의 존폐 위기를 초래했으며, 대가야의 가실왕은 가야가 통합되는 하나의 방법으로 음악을 선택했다. 우륵으로 하여금 가야금을 만들고, 각 지역색을 담은 곡을 작곡하게 한 것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고령현 고적조 금곡(琴谷)에서 가야국 가실왕의 악사 우륵이 중국의 진쟁(秦箏)을 본떠서 거문고를 만들어 가야금이라고 불렀다. 우륵이 공인(工人)을 거느리고 거문고를 익힌 곳”이라 전한다. 현재 고령 대가야읍 쾌빈리 일대로 보는데, 가야금 연주 소리가 산골에 정정하게 울렸다고 하여 예전에는 정정골이라 불렸다고 한다. 또한 동구뱅이라 지칭되기도 했다. ‘환상’이란 뜻의 고령 방언 동구와 ‘방’이란 뜻의 뱅이가 만나 ‘환상이 보이는 곳’이란 뜻이다. 가야금의 골짜기라 하여 금곡(琴谷)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우륵이 이곳에서 연주하면 그 소리를 듣고 감동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고기(古記)에 따르면, 우륵은 평생 185곡이나 만들었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은 이 정정골에서 12곡을 작곡했다는 기록뿐이다. 가야국이 망하자 우륵은 제자 이문과 같이 신라에 투항했고, 가야금은 신라에 전수되었다. 우륵은 신라 진흥왕에게 가야금의 예술성을 인정받고 신임받았다. 계고, 법지, 만덕이란 세 명의 제자를 두어 가야금과 노래, 춤을 전수하고자 했으나 가야의 음악을 망국지음(亡國之音)으로 치부한 이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진흥왕은 음악에는 죄가 없다며, 세 제자를 설득했고, 우륵은 비로소 전수할 수 있었다. 이후 가야금 음악은 신라의 대악으로 채택된다. 신라의 대악은 아정한 음악, 바른 음악을 지칭하는 것으로 한국음악의 근본이 된다.정정골의 동산 위에 우뚝 솟은 우륵기념탑은 우륵의 업적을 기리고 지역문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대가야축제 추모행사가 이뤄지는 장소이다. 우륵의 집은 아담하고 소박한 곳으로 2009년 건립되었다. 우륵박물관은 가야금과 우륵에 대한 세계를 5개의 테마로 나눠 설명한다. 시원한 산책로를 따라 가얏고 마을을 걷고, 가야금을 만들어 보고, 작은 연주도 할 수 있는 가얏고 마을을 둘러보며 옛 우륵의 자취와 우리 악기의 소중함을 느껴본다. 가야금의 아름다운 선율이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4-06-19

이준석과 ‘보수 정체성’

심충택 논설위원 3권분립을 뿌리째 흔드는 민주당의 각종 특검법안이 대통령 거부권 행사에도 불구하고 국회에서 재의결 될지가 22대 국회 최대 관심사다. 민주당은 지난주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폐기된 ‘김건희 특검법’과 ‘방송 3법’ 등 22개 법안을 이번 국회에서 중점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현재 사분오열된 국민의힘 상황으로 봤을 땐 ‘정쟁(政爭) 대상’인 법안 상당수는 재의결 될 소지가 다분하다.여권은 다음달 전당대회를 앞두고 주류인 친한(친한동훈)계를 비롯해 친윤(윤석열)·비윤·반윤계, 중진모임, 소장파모임(첫목회) 등으로 분열돼 있다. 일부 의원이 당론과는 달리 쟁점법안에 찬성표를 던지거나 아예 본회의에 불참하면 재의결에 필요한 정족수(재석의원 3분의 2)가 채워질 수 있다. 이미 조경태·안철수·김재섭·한지아(비례대표) 의원 등은 ‘채상병 특검법’에 찬성한다는 견해를 밝혔고, 당권도전이 유력한 김재섭 의원은 ‘김건희 특검법’에도 찬성하고 있다.최근에는 야권 6개 정당이 공동교섭단체 구성을 추진하고 있어 국민의힘으로선 상황이 더 나빠졌다. 6개 정당 의석수는 조국혁신당 12석, 개혁신당·진보당 각각 3석, 새로운미래·새진보연합·사회민주당이 각각 1석이다. 의석수가 20석을 넘으면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다. 교섭단체를 구성하면 국회 의사일정 조정·상임위원회 구성 등 국회 전반의 활동에 관여할 수 있게 돼 의사 개진이 한층 폭넓어진다. 공동교섭단체 구성과 관련해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의 선택이다. 이 의원이 만약 교섭단체라는 눈앞의 이익에 매몰돼 조국혁신당과 손을 잡을 경우 그의 정치적 기반인 보수 지지세력과는 영원히 같이할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이 의원이 앞으로 폭넓은 국민지지를 받으려면 어떤 정체성을 가지느냐가 중요하다. 1차 시험대는 지방선거다. 그가 언급한 대로 개혁신당이 정치적 소수자인 청년인재, 경력단절 여성 등을 중심으로 공천해서 광역·기초단체장을 배출할 경우, 정치적 위상이 한순간에 올라갈 수 있다. 이 의원은 지난 2021년 6·11 전당대회 당시 30대에 당대표에 당선된 성공경험도 있기 때문에 좋은 성적표를 낼 가능성이 있다. 다만, 공천과정에서 드러날 그의 정체성이 주요변수가 될 것이다. 이준석의 정치적 후견자인 김종인씨는 총선 당시 ‘이준석 대구 출마론’을 언급한 적이 있다. 이 의원이 보수텃밭인 TK(대구경북)의 정체성을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개혁신당은 지난달 25일 야권이 서울도심에서 연 ‘채상병 특검 촉구 장외집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최근에는 수석대변인 논평을 통해 ‘이재명 대표가 너무 착하다’고 했던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에게 “악질 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는 사람에 대해 눈살 찌푸리는 아첨을 그만두라”고 질타하기도 했다. 나는 이런 일련의 개혁신당 언행이 이준석의 ‘보수정체성 콘텐츠’를 채워나간다고 본다. 이 의원은 4·10총선 과정에서 이낙연의 새로운미래 정당과 ‘빅텐트’를 쳤다가 실패한 악몽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2024-06-18

경북 총각이 결혼하기 불리한 이유

우정구 논설위원 인구학에서 사람의 성비(性比)는 여성 100당 남성 수로 계산한다. 성비가 높다는 것은 남성의 수가 여성의 수보다 더 많다는 뜻이다.자연적인 출생 성비는 보통 105대 100 정도로 본다. 출생시만 보면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보다 더 많이 태어난다. 하지만 남자의 사망률이 높고 여자보다 평균 수명이 짧아 고령에 이르면 여초 현상이 생긴다.세계적으로 보아도 남성의 성비가 높다. 대륙별로는 아시아는 남성의 성비가 높으나 유럽과 중남미는 여성의 성비가 높은 편이다.남녀 성비 구성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사건으로는 전쟁을 들 수 있다. 전쟁에서 희생된 남성이 월등히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성비의 불균형도 세대가 지나면 자연스럽게 100대 100으로 맞춰진다.동물의 암수 성비가 1:1에 근접하고 있는 것을 진화생물학에서는 피셔의 원리라 부른다. 성 생식을 통해 자손을 번식하는 인간의 성비도 자연의 법칙과 다르지 않다.최근 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우리나라 남녀 성비에 관한 연구결과가 흥미롭다. 결혼 연령층에 든 미혼남자와 미혼여성의 성비 불균형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이다.전국적으로 미혼남자가 미혼여자보다 19.6%가 더 많다고 한다. 이는 남아선호 사상이 존재한 시대적 배경과 남녀 성별 구분이 가능한 의료기술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분석이 된다.더 큰 문제는 지역별 차이가 훨씬 크다는 사실이다. 서울은 미혼남녀의 성비 차이가 2.5%에 불과하다. 그러나 경북(34.95), 경남(33.2%), 충북(31.7%) 등 지방도시는 30%가 넘는다. 중앙과 지방의 격차가 하나 둘이 아님이 또 한번 드러난 셈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6-18

제복입은 불멸의 호국영웅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때이른 더위가 한여름을 방불케 한다. 수년 전부터 봄과 여름의 경계가 모호해져서, 꽃들이 일제히 피면서 봄인가 싶더니 어느새 여름날인가 싶을 정도로 무더위가 찾아들어 계절의 구분을 다시 책정해야 할듯하다. 그만큼 지구온난화나 기후변화에 따른 현상이겠지만, 갈수록 한반도도 차츰 열대성기후로 바뀌면서 기상이변과 자연재난에 노출되지는 않을까 염려스럽기만 하다. 기후와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겠지만,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달라져도 잊혀지거나 변해서는 안 될 불멸의 가치가 있다. 바로 호국보훈의 의식과 예우이다.해마다 찾아오는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지만, 호국의 일념과 보훈의 마음이 어찌 6월에만 국한되랴. 지정학적인 측면도 있었겠지만 유난히 외세침입이 많았고, 한반도를 피로 물들였던 6·25한국전쟁이 근·현대 들어 가장 뼈저린 상처와 엄청난 피해를 가져와 현재까지도 분단과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호국보훈은 전쟁의 비극을 잊지 않고, 국가와 국민의 안위와 평화를 위해 헌신한 이들을 기리고, 그들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하며 숭고한 뜻과 훈공에 보답한다는 측면에서 깊이 되새기고 이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리라고 본다.보훈 없는 호국은 없듯이, 공로와 은혜에 보답하는 보훈의 정신이 무너지면 나라를 지키는 호국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한 관점에서 2023년 7월 6·25 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 참전유공자에게 국민적 존경과 감사를 담은 새로운 제복과 넥타이를 국가보훈처에서 맞춰드린 것은 의미있는 일로 여겨진다. 이른바 ‘제복의 영웅들’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국민들이 6·25 참전용사를 대할 때 인식개선이 필요한 기존 조끼형태의 여름 약복의 디자인을 새롭게 해서 참전용사에 대한 예우를 표하고 영웅을 존경하는 사회적 인식을 증진시키고자 참전용사를 위한 제복을 제작한 것이다.그렇게 제작된 베이지색의 산뜻한 제복은 전국의 생존 참전유공자 5만8000여 분께 단계적으로 지급됐다. 포항지역에는 300여 분께 지급됐으며, 그 중 30여 분께는 최근 포스코 사진봉사단이 포항시보훈회관을 찾아 6·25전쟁 참전 유공자의 늠름한 모습의 제복영웅사진과 편안한 장수사진, 노병들의 단체사진 등을 촬영해 드려서 의의를 더했다. 그러한 광경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헌신한 호국영웅들을 예우하며 존경과 숭고한 뜻을 기리는 봉사자들의 낯빛이 진지하고 역력했었다고나 할까?기억은 기록이나 사진을 통해서 더 또렷해지고 오래 남게 된다. 영웅을 기억하며 새로운 제복을 만들어준 정부도 감사하고, 참전용사들의 영예로운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내는 봉사단의 활동도 고무적이다. 제복을 입고 거수경례를 하는 모습을 촬영하면서 호국영웅들이 6·25전쟁 때부터 겪었을 험난한 삶의 여정과 희생을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이 된 것 같아 뭉클할 정도였다.나라를 지켜낸 6·25전쟁 영웅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평범하면서도 행복한 일상을 편안히 살아갈 수 있다. 6·25전쟁 영웅 뿐 아니라 국가유공자 분들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 명예를 드높이며 호국영웅들을 예우하는 많은 노력과 지원이 있어야 진정한 보훈의 의미가 빛날 것이다.

2024-06-18

삶과 자기경영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자기경영(Self-Management)은 개인이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관리하는 능력을 말한다.자신의 꿈을 정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목표를 설정하고,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며, 시간과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분배하여 원하는 결과를 이루기 위한 체계적인 방법과 전략을 포함한다. 자기경영은 개인의 자기인식, 자기통제, 자기동기부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자기경영의 6가지 조건은 첫째, 자기인식(Self-Awareness)이다.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고 가치와 신념을 명확히 이해하는 능력이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받는지, 어떤 방식으로 일할 때 가장 효율적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둘째, 목표 설정(Goal Setting)이다.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능력이다. 예컨대, 마음의 양식을 얻기 위한 매년 12권의 책 읽기 등 목표 설정이다. 셋째, 시간 관리(Time-Management)이다. 평소 나쁜 습관이나 단점을 찾아서 과감하게 버리는 일을 먼저 하고,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을 구분하고 효율적으로 시간을 분배하여 활용하는 능력이다. 넷째, 자기통제(Self-Control)이다. 감정이나 충동을 통제하고 지속적으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능력이다. 주변 유혹을 이겨내고 필요한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다섯째, 동기부여(Motivation)이다. 스스로 격려하고 목표 달성을 위해 꿈을 벽에 걸고 되뇌이며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여섯째, 자기계발(Self-Developm ent)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고 새로운 기술이나 지식을 습득하는 노력이다. 예를 들면, 세계여행이 꿈이면 해당 언어를 매일 30분씩 공부하는 것이다.필자가 기업 혁신 컨설팅 하는 것은 개인의 성장과 조직의 발전을 위해 지속적인 변화관리를 하는 일이다. 직원 교육시 직책자, 중견 사원이나 신입 사원도 개인의 꿈을 먼저 물어보곤 한다. 개인의 성장과 변화의 단초는 미래의 꿈 설정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포스코 Top이 생산 현장의 개선활동에 대한 포상과 격려 방문 때 대화의 장에서 신입 사원의 꿈을 물어 본다. 꿈이 없거나 구체적이지 않으면 기술명장에 도전하도록 권유하기도 한다. 모든 것은 개인이 선택하고 도전하는 것이지만 행복하게 산다는 바람보다 시간이 걸린 꿈 설정이 자기경영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자기경영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은 스티브 잡스다. 애플의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비전과 목표를 명확히 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인물로 유명하다. 자신의 강점을 활용하여 미래를 설계하고 신제품을 개발하여 경쟁력을 확보하고 오늘날 애플을 만든 것이다.인생에서 보면, 100세 시대에 후회하지 않는 삶을 영위해 나가는 길은 자기인식, 자기통제, 자기 동기부여 등의 자기경영이다. 자신의 생명인 시간의 소중함을 인지하고 목표 달성을 위한 시간 드라이브를 걸어야 한다. 목표를 향한 인생 시간을 잘 운영하면 꿈은 이루어지며, 더 만족스럽고 성취감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2024-06-18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사람들은 그저 무심했다

K가 A의 의도를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한 결과를 예측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판단해야 했다. 참고인으로 소환했으나 수사기관에서는 K를 어떤 방식으로 대할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한쪽에서는 굳이 수사 대상을 확대하여 일을 번거롭게 만들 필요가 없지 않느냐, K는 단순히 사익을 취한 판매자일 뿐 A의 행위와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는 입장이었고 다른 쪽에서는 K가 A의 행위에 관련된 제반 상황에 대해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고 자신이 A에게 제공한 도구가 어떤 방식으로 사용될 지와 그 결과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책임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가 문제이지 책임의 유무는 이미 판단 대상이 아니라는 태도를 견지했다.참고인으로 소환된 K가 A4용지 10매에 달하는 진술서를 제출했으나 그 내용은 대부분 사건과는 관련이 적은 K 과거에 대한 회상이었다. 진술서 중간 중간에 A와 피해자들 사이에 전개되었던 저간의 사정들을 써놓기는 했지만 그것은 이미 수사기관이 확보한 내용과 다르지 않은 ‘사실’을 서술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K의 과거에 대한 회상 부분은 이번 사건에서 K의 위치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 단지 진술서의 페이지를 늘리려는 얄팍한 수로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K가 이번 사건과 관련한 법적 책임을 져야하는 위치에 있지 않다면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K 스스로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과거를 돌아본 기록은 다른 사람은 공감할 수 없고 진위 여부를 따질 수 없는 그저 개인의 회상이었으니.일부에서는 진술서에 서술된 내용만으로도 K가 이번 사건의 전개와 결과에 대해 예측할 수 있었다는 주장을 했지만 그 주장은 반대측을 설득하지 못했다. 다만 진술서 끝부분, K가 그날 취한 이득으로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취했던 행동들에 대해서는 비난 받아 마땅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수사기관 대부분의 구성원이 동의했다. 하지만 도덕적인 비난이 법적 책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도덕적인 비난마저도 할 수 없다는 의견을 견지하는 일부의 구성원도 있었다.사실 K에 관한 것은 그저 지나갈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범죄자가 범행에 사용한 도구를 어디서 구했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기술 몇 문장이면 충분한 것이었다. 문제를 확대시킨 것은 수사관 김이었다. 그는 범죄의 발생을 사전에 막았을 수 있는 몇 가지 단계에 대해서 깊이 고민했다. 그가 평소 일상의 모든 측면을 문장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문장들 사이의 관계와 앞 문장이 뒤 문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반복적으로 사고 실험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이라면 당연히 수사관 김은 그렇게 할 사람이라고 고개를 끄덕였겠지만 대부분의 동료들은 그가 하루를 마무리하며 노트에 정리하는 문장들을 보며 단순히 일기 같은 것이라 생각했고, 일기 같은 귀찮은 작업을 해내는 수사관 김을 좋게 보면 독특하고 나쁘게 보면 정상적이지 않은 별종이라 취급했기 때문에 수사관 김의 문제 제기에 대해 짜증을 냈다. 쉽게 말해 빨리 정리하고 다른 사건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을 이상한 놈이 이상한 방식으로 건드려 모호하고 덩치가 큰 사건, 상황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수사기관 상부에서도 그렇게 생각했다면 수사관 김의 문제 제기는 없던 일,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수사기관 상부는 이 문제 제기에 흥미를 보였다. 수사관 김의 문제 제기에 대한 결론이 자신들의 평판과 행보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수사관 김이 문제 제기를 한 다음날 바로 어느 정도 입증되었는데 김과 친한 기자 한 명이 김의 문제 제기에 대한 기사를 썼고 무척 지루해 보이는 내용이었음에도 대중의 호응이 제법 있었다. 김이 제기한 문제는 댓글의 수와 공유의 횟수가 평소 범죄 기사의 서너 배를 넘었고, SNS상에서 주요한 토론 주제가 되었다. 토론의 제목은 이랬다.‘범죄행위에 사용된 도구의 제조 및 판매자의 법적, 도덕적 책임에 관하여.’인기 있는 토론 주제 순위를 매기는 한 사이트에서는 ‘K방산, 경제를 살리는 또 하나의 효자 종목, 어디까지 가능한가?’를 누르고 9위에 랭크되었다. 실수와 무능으로 관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 문제 제기와 그 해결의 방향으로 관심을 받는다는 사실이 수사기관 상부의 의식과 의지를 고양시켰다. 수사기관 상부는 특별히 이 문제에 대한 팀을 구성했고 수사관 김을 전권을 가진 책임자로 지명했다. 김은 사전에 자신이 작성했던 노트를 팀원들과 공유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수사를 진행했다.범죄의 발생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던 몇 가지 단계에 대한 수사관 김의 기술은 아래와 같았다.1. 주차장에서 발생한 사건·세발자전거를 타던 아이를 시야에서 놓쳐버린 피해자의 실수와 그에 대한 A의 반응.2. 이후 발생한 A와 피해자 가족들 사이의 사소한(아파트 동 현관 입구에 자전거 따위의 물건을 놓아두는 것에서부터 잘못 배달된 택배의 소재를 따지는 것, 현관 청소를 한 물이 서로에게 흘러들어오는 등등) 다툼과 이를 둘러싼 이웃들의 자세.3. A가 아파트 동 현관 앞 잔디밭에 조성한 텃밭과 이에 대한 피해자 가족의 이의 제기, 관리사무소의 해결 방안과 그에 대한 A의 대응.4. A가 K의 가게로 와 얇고 뾰족한, 비교적 긴 칼을 요구했을 때 K의 판단과 행동.김은 각 번호의 문장 뒤에 볼펜으로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놓았다.1. 주차장에서 발생한 사건·세발자전거를 타던 아이를 시야에서 놓쳐버린 피해자의 실수와 그에 대한 A의 반응.-작은 그러나 위험했던 해프닝에 대한 당사자들 각각의 대응에 아쉬움이 많다. 그러나 이들은 이후 발생한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각각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감당한 것으로 판단한다.2. A와 피해자 가족들 사이의 사소한(아파트 동 현관 입구에 자전거 따위의 물건을 놓아두는 것에서부터 잘못 배달된 택배의 소재를 따지는 것, 현관 청소를 한 물이 서로에게 흘러들어오는 등등) 다툼과 이를 둘러싼 이웃들의 자세.-사소해 보이지만 당사자들의 감정의 악화를 불러일으킨 사안들이다. 여타의 정황과 이웃들의 진술을 종합할 때 이웃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합리적인 중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도 핵심은 당사자들인데 당사자 간 묵은 감정을 점진적 혹은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계기가 없었다는 것이 아쉽다. 그러나 당사자들이 아닌 이웃들에게 법적,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하다.3. A가 아파트 동 현관 앞 잔디밭에 조성한 텃밭과 이에 대한 피해자 가족의 이의 제기, 관리사무소의 해결 방안과 그에 대한 A의 대응.-당사자들, 특히 A의 분노발작을 유도한, 가해자로서 A를 있게 한 사건이다. 통념으로 보았을 때 이것은 전적으로 A의 잘못이다. 그러나 이의 제기를 당사자 중 한 쪽인 피해자가 했다는 점이 아쉽다. 피해자가 아닌 제3자 혹은 관리사무소에서 선제적인 제지, 혹은 해결 방안을 강구했다면 A의 분노가 피해자를 향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역시 이것을 가해자가 아닌 누군가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4. A가 K의 가게로 와 얇고 뾰족한, 비교적 긴 칼을 요구했을 때 K의 판단과 행동.-수사관이 보았을 때 이번 사건의 가장 결정적인 지점이다. K는 A와 피해자 사이에 있었던 저간의 상황을 모두 알고 있었다. 또한 K의 진술서를 참고하자면 K는 어렴풋이 혹은 명확하게 A의 의도에 대해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안이한 판단, 사적인 이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범죄에 사용된 결정적인 도구를 A에게 제공했다. 판매를 거부했다거나 혹은 판매 후 피해자와 경찰에 연락을 취했더라면 끔찍한 결과를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K는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 판매 대금을 사용하여 자신의 가족과 여유로운 일상을 즐겼다. 도덕적인 책임은 당연히 면할 수 없으며 법적인 책임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검토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수사관 김의 확고한 의지에 의해 K는 주요한 조력자 혹은 방관자로 지목되었고 그에 따라 법적인 검토의 대상이 되어갔다. 다시 한 번 수사기관으로 불려가 이전에는 받지 않았던 심문 과정을 거쳤고 두 번째 진술서를 작성했다. 과거의 이야기는 쓰지 말 것과 이번 사건에 대해서만 기술할 것을 요구 받았고 K는 충실히 따랐다. 그는 자신의 무고함을 설명하게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김과 그의 논리에 따라 심문하는 수사관들의 추궁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물론 구속 수사까지는 이르지 않았다.김의 팀이 결론을 내고 K에 대한 기소 의견을 정리할 즈음 여론의 변화가 있었다. 조력자 혹은 방관자로서 K를 향했던 비난 여론은 주요 일간지 중 한 신문에 실린 사설-그렇다면 K방산은 칼이고 대한민국은 A인가, 미래 먹을거리 이렇게 날려버리나-이 나온 이후 방향을 바꿨다. 김강 소설가·내과의 ‘수사기관의 논리에 따른다면 지구 각지의 현실적, 잠재적 분쟁지역을 중심으로 판매 대상을 넓혀가고 있는, 가격과 성능 면에서 다른 나라를 압도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수출 효자 K방산은 전쟁으로 인한 살인과 피해의 조력자, 방관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도덕적인 잣대로 모든 문제를 바라본다면 죄인이 아닌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중략-별개의 문제라 말하지 말라. 이것은 우리 사회의 가치에 대한 문제다. 자영업자의 합법적 행위, 생계와 부의 축적을 위해 물건을 파는 행위는 우리 사회의 근본이 아닌가? 그 결과까지 책임지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자유대한을 부정하는 행위와 같다. 무리하고 부당한 수사를 멈추라’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수사기관 상부는 대통령실과 국회로부터 전화가 오기 전 이미 방침을 바꿨다. 그저 일개 범죄 수사로 생각했던 사안이 국가의 가치관에 대한 문제로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런 관심은 자신들의 행보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결국 김의 수사팀은 해체되었다. 김이 끝까지 항변해 보았지만 조직 내의 결정을 바꾸지는 못했다. K는 혐의 없음이라는 통보를 받았고 수사기관 상부는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그날 K방산은 모 국가와 1조5천억 원 상당의 판매 계약을 했고 언론들은 일제히 대서특필을 했다. 정치권은 앞다투어 환영의 논평을 내어놓았고 사람들은 그저 무심했다.    끝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06-18

전윤호의 기억 속의 고향 정선 방언시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전윤호 시인은 강원도 정선에서 출생했다. 1991년 현대문학에 시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2002년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을 수상한 후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현대시인협회에서 간행한 방언시집 ‘요엄창큰비바리야냉바리야’(서정시학, 2007)에는 강원도 정선 방언으로 쓴 시‘마바리’를 발표하였다. “머이 우태 내게 사랑이란 건/ 마카 뺑때에 걸린 골낭구처럼/ 춥고 적적해서/ 단최 가까이하기 어렵드라/ 니는 당장에야 나가 좋다고/ 착착 달라붙지만/ 까마구 얼어 죽는 겨울이 지나면 / 갱물도 풀려 흘러가는 법/”(전윤호‘마바리’)와 같이 입에 착착 달라붙는 정선방언이 쏟아진다. ‘마바리(멍청이)’, ‘마이 우태(결국)’, ‘뺑때(절벽)’와 같은 방언 낱말의 맛깔은 강원도 사람이면 다들 머리 끄덕이며 발화하고 싶은 강원도 토박이말이다. 뿐만 아니라 “등신처럼 울어 쳐대는 나를 떠나”와 같은 구절에는 정선아리랑의 가락이 실려 있다. 그의 9번째 시집‘정선’에는 오직 시인의 고향인 정선만을 을 주제로 한 60여 편의 시가 고향을 노래하고 있다. 시인의 고향 정선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과 사랑이 오롯하게 녹아 있다.시에서 방언이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고향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또한 시인을 비롯, 모든 이들이 꿈꾸는 이상향이요, 모두가 그리워하는 기억 속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지나간 시간과 공간의 교점에 남아있는 존재들은 이미 사라졌거나 아니면 희미한 기억 속에 묻혀버린다. 객체의 소멸과 함께 주체 역시 그리움을 남겨두고 사라지고 있다. 지난 시간과 공간의 기억을 호명하는 열쇠는 그 시공간에 유통하던 언어 곧 방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삶은 시간과 공간 속에 이루어지는 만남으로 구성되나 그 삶은 유한하다. 유한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과거로 향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만난 사람들의 관계를 희미한 기억 속에서 꺼내고 반추하면서 영원히 간직하려 한다.전윤호 시인은 ‘고향’이라는 시로 시작해 ‘정선을 떠나며’라는 시로 마무리한다. 그 공간과 시간 속에 나누었던 기억들의 별빛이 바로 향토색 짙은 언어들이다. ‘아우라지, 곤드레, 아라리, 여량, 동강할미꽃, 정암사, 구절리, 운탄고도, 민둥산, 화암약수, 만항재, 정선시장, 용마소, 수리취떡, 용소’ 등 고향 주변의 장소와 사물과 음식들은 시인의 기억 속에 간직되었다가 시라는 배경으로, 그림으로, 냄새로 그대로 그려져 나온다. 전 시인의 문학의 산실은 바로 고향인 정선일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시인의 동료이자 선배인 최준 시인은 시집의 발문을 통해 “이 시집은 이별과 서러움과 같은 전통적인 정한(情恨)의 정서가 전편을 누비지만, 들풀처럼 무성한 그의 고향 사랑이 행간마다 절절하게 녹아들어 있다”고 평가했다.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더 넓은 장소로 그리고 다 빠른 시간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럴수록 지난 시간 속에 잠겨 있는 고향의 전경은 더욱 그리워진다. 문명의 빛이 더디게 쪼이는 미명의 두메산골이지만 그 삶의 공간이 아름답게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남이야 뭐라고 하든 ‘마바리’같이 일에만 죽자고 매달린 삶인 ‘일바보’이자 ‘밥장군’인 초부의 삶에 매달린 이유는 자유다. 세상의 끄나풀에 엮이지 않고 어느 누구가 관심을 두지 않아도 그냥 내버려둬도 오순도순 잘 살 이상향이다. “정선은 사람 수보다 산봉우리 수가 많은 곳”이라고 했지만 그곳은 귀한 사람이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는 공간이다. “영하 십칠 도의 아침/ 29억 톤짜리 악모에서 깨어/ 서리꽃 핀 산을 바라본다/ 123미터도 부족한가/ 평생을 가둬놓기엔 자갈과 모래로 다진 530미터 벽 아래/ 여전히 얼지 않는 저 거대한 슬픔/ 강으로 흘리는 눈물 천 리를 가는데/ 후회로 묶여 흔들리는 배 한 척/ 이제는 알겠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평생을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슬픔도 깊으면 힘이 세진다.”(전윤호 ‘소양댐’) 고립된 정선의 경관 속에서는 외로우니까 더욱 슬퍼지고 슬퍼지니 더욱 힘이 세어진다는 역설의 시편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전윤호 시인은 ‘슬픔도 깊으면 힘이 세진다’라는 시집을 출간하고 또 그 시집으로 제30회 조병화 문학상도 수상하였다.고향 정선을 떠나 대처인 춘천으로 떠난 시절에 쓴 시이다. 거주 장소의 이동은 추억어린 감성을 그 근원적인 장소로 쏠리게 한다.

2024-06-17

‘검은 새의 들녘’ 세르비아 민족 성지 코소보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세기의 화약고라 불리던 발칸반도다. 그만큼 민족과 종교와 역사가 뒤엉킨 땅이란 뜻이다. 그 중심에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있다. 특히 세르비아의 성지 코소보에 이민족이 나라를 세운다니? 세르비아로서는 절대로 묵과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중세의 걸출한 영웅이자, 세르비아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룬 스테판 듀산, 그는 지금의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알바니아는 물론 코소보까지 넓은 영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1331년에는 발칸을 넘어 유럽 전역의 강자로 거듭났다. 후세 역사가들은 스테판 듀산 앞에 ‘강자(强者)’라는 별칭을 붙여 이미지를 상승시켰다.듀산의 공포에 동로마 비잔티움제국은 호시탐탐 발칸반도를 노리고 있던 오스만제국에 SOS를 타전하고 말았다. 이 잘못된 판단이 세르비아 네만야 왕조의 멸망과 함께 천년을 이어오던 비잔티움제국의 종말을 앞당기게 된다. 오스만으로선 기다렸던 바였다.1386년에 불가리아를 함락한 이슬람은 1389년 6월 28일, 오늘날 세르비아 민족 성지인 ‘검은 새의 들녘’으로 불리는 코소보 대평원에서 세르비아 군대와 마주했다. 세르비아 수호신이자 성자 성 비투스의 날,(1914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그날도 성 비투스의 날이었다) 운명을 건 결전이 시작된다.세르비아 군을 중심으로 자칭 십자연합군 10만, 오스만 6만이 진을 쳤다. 세르비아 농민들까지 동원된, 그야말로 세르비아인의 신화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날이 시작된 것이다.세르비아에서는 라자르가 선두에서 지휘를 맡았다. 오스만은 중앙군에 무라트 1세가 지휘봉을 휘둘렀고, 오른쪽에는 큰아들이자 ‘번개왕’으로 등극하는 바예지드가, 왼쪽 날개는 작은아들 야쿠브가 지휘했다.라자르 신호와 함께 세르비아군 선공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전투는 밀고 밀리기를 반복하며 꼬박 하루를 넘기며 이어졌다. 세르비아 역사상 이토록 치열하게 전개된 전투는 일찍이 없었다. 점차 세르비아 왼쪽 진영이 무너지면서 전세가 이슬람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세르비아군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세르비아군 최후의 한 명까지 영웅적인 죽음을 맞았고 오스만튀르크제국이 승리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오스만 무라트 1세도 목숨을 잃어야 했다. 후세에 와서 이 전투가 세르비아 민족주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세르비아인 가슴에 화석처럼 각인된다. 누구의 도움 없이 발칸반도에서 이슬람 제국에 마지막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항전했던 역사적 사실은 전무후무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세르비아의 영원한 영웅 밀로슈 오빌리치의 신화가 탄생되면서 세르비아인 가슴을 덥혔다. 세르비아 선봉대장 오빌리치는 짐짓 거짓 항복을 해 무라트 1세의 환심을 산다. 그리고 품속에 무기를 숨기고 들어가 무라트 1세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는데 성공하고, 그 역시 오스만 군사들에 의해 장렬하게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진실은 무라트 1세가 전장을 돌아보다 전사자 속에 누워있던 오빌리치가 일어나 심장에 칼을 꽂았다는 것이 팩트다.아들 바예지드는 군사를 물리기는커녕 슬픔을 뒤로 한 채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하고 전술을 가다듬었다. 결국 농민군까지 끌어모아 항전했던 라자르는 바예지드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되고 만다. 바예지드는 라자르의 목을 자르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그리고 1453년 메메트 2세에 의해 비잔티움제국마저 멸망하면서 발칸반도는 무려 400년 동안 오스만트루크제국 압제 아래 들어가야 했다. ‘검은 새의 들녘-코소보 전투’는 ‘코소보의 처녀’라는 또 하나의 사연을 탄생시켰다.“오 불쌍한 이여, 악마가 그대의 운명이구려! 불쌍한 당신이 푸른 소나무를 잡는다면 그 마저 시들어 버릴 것이니!”세르비아 사람들은 오스만제국의 압제 아래서 이 노래를 부르며 살았다. 가슴에는 의기가 충만하고, 민족혼이 가슴을 쿵쿵 쳤다. 그렇게 코소보는 세르비아인 민족의 성지로 굳어지고 있었다.훗날 세르비아 희대의 살인마 밀로셰비치가 길들인 민간 무장단체 ‘아르칸의 호랑이’에 의해 코소보는 20세기 가장 추악한 전쟁터로 변했다. 자신들이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민족의 성지 ‘검은새의 들녘’에 알바니아 무슬림들이 몰려와 살면서 나라를 세우겠다니? 어쩌면 세르비아로서는 도무지 묵과할 수 없는 사연인지도 모른다.그러나 6세기 이전 로마제국의 발칸반도 진출에 끝까지 애를 먹였던 민족, 마지막까지 로마제국과 발칸반도에서 전쟁을 이어갔던 민족이 알바니아 조상 격인 일리리안이었다.돌고 도는 것이 역사다. 어느 한 부분을 뚝 잘라 내 것이라 주장한다면, 폭력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호령했던 땅이 대한민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면 중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스토리텔링 작가

2024-06-17

새로운 시작 앞에서

오랜 기간 골치 아팠던 문제에서 드디어 벗어났다. 이럴 때 생각나는 두터운 책 한 권이 있다. 2년 만에 펼쳐들어 3번째 완독을 마친 소설.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다.스토너는 독서에도 시차가 있음을 알려준 책이다. 마지막으로 읽은 것이 약 2년 전, 그 전에는 약 4년 전에 읽었다. 처음 읽은 스토너는 그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심심한 인간의 생애가 있는 건지? 특별한 사건 없이 밋밋하게 흘러가는 스토너의 생애 이야기를 몇 장 읽고 덮어두었다가 다시금 꺼내어 꾸역꾸역 읽어 내려갔었다. 어쩐지 심심한 그 감각이 계속 맴돌다가 2년이 지난 후, 두 번째로 꺼내 읽은 스토너는 어쩐지 새로웠다. 너무나 지루했던 그의 인생에서도 사건이라는 흐름이 보였기 때문이었다.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중략)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중략)가끔 어떤 학생이 이 이름을 우연히 발견하고 윌리엄 스토너가 누구인지 무심히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애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스토너의 처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누군가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단순한 인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잊히는, 지극히 존재감 없는 사람.스토너는 1891년 미주리주 중부의 작은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는 고작 스물다섯 살, 어머니는 스무 살이었다. 스토너에게 부모는 늘 늙은 사람이었고, 고된 노동으로 삶을 버티고 인내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떠한 열망도 없이 살아가던 스토너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별 생각 없이 대학에 입학하지만 그 이후에도 어떠한 즐거움이나 괴로움도 없이, 삶은 반드시 참아내야 하는 긴 한순간이라 여기며 지낸다.얼마 지나지 않아 스토너는 이디스와의 결혼을 하지만, 곧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디스는 계속해서 아픈 몸, 무기력함, 목적 없는 생의 지루함 때문에 자신의 딸아이인 그레이스를 방치한다. 대부분의 육아와 집안일을 스토너가 맡게 되면서 예상치 못한 부성애를 가지게 된다.스토너와 그레이스간의 사이가 친밀해질수록, 이디스는 질투에 사로잡히면서 히스테릭함이 더욱 극에 달한다. 그러나 스토너는 관조와 무조건적인 이해로만 그녀를 대하고 그녀의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는 폭풍 같은 현실 속에서 세 인물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슬픔의 굴레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슬픔을 부정하거나 떠미지 않고, 괴로움을 안고 버티며 모든 것을 인내 한다. 처음에는 이 세 인물이 서로 원치 않는 방향으로 향하는 결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느릿느릿 문장을 읽다보면 세 인물은 어떻게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당시 어떠한 시대적 혼란이 있었는지 알 수 있게 된다.모든 것을 인내하는 스토너로 보이지만, 그는 강단에 서서 문학을 가르칠 때만큼은 열정적이었고 자신의 수업을 듣던 ‘캐서린’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부적절한 관계를 대학 내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면서 결국, 그들은 사랑을 포기하게 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스토너는 캐서린과의 이별 이후 빠른 속도로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그는 죽음 끝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본다. 원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 결혼 생활, 캐서린과의 이별을 겪고 죽음을 앞둔 스토너. 얼핏 보면 그의 삶은 실패로 보일 수 있으나 실은 그의 생은 너무나 평범하다는 걸 알 수 있다.스토너의 죽음은 인간의 삶은 ‘성공’ 또는 ‘실패’라는 결과보다는 그가 얼마나 생을 살아보려 애썼는지, 어떤 시도를 했는지가 더 중요한지를 알려준다. 그는 죽음 앞에 서서 평온하다. 삶을 인내했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다.하루를 마무리 하며 나의 일상을 돌아볼 때에 나의 생은 왜 이렇게 지루하고 건조해 보이는 건지 고민될 때가 있다. 하지만 이 단조로움 또한 생의 불행과 운을 온 힘으로 버텨내는 안간힘임이 내재되어 있음을 안다. 성공 또는 실패라는 결과보다는 ‘삶을 살아보려는 시도’, 스토너라는 한 사람의 진득한 생애는 내게 새로운 시도의 힘을 갖게 한다.

2024-06-17

취해라 그리고 걸어라

“취해라,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게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당신의 어깨를 무너지게 하여 당신을 땅 쪽으로 꼬부라지게 하는 가증스러운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 당신은 쉴 새 없이 취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무엇에 취하려는가? 포도주든, 시든, 덕이든, 그 무엇이든 당신 마음대로다. 그러니 어쨌든 취해라. (…) 이제 취할 시간이다. 시간에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쉬지 말고 취해라. 술이든, 시든, 덕이든, 그 무엇이든 당신 마음대로.”(샤를 보들레르, ‘취해라’)19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한 보들레르는 현대시의 시초로 불린다. 1830년대에 프랑스 정부는 포도주에 대한 새로운 과세법을 제정했는데, 이 과세는 도시민으로 하여금 값싼 포도주를 찾아 시외에 자리 잡은 상점으로 가게 만들었다. 그곳에서 파는 세금 없는 포도주는 노동자와 하층민,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허용된 유일한 쾌락이었다. 보들레르에게도 술은 정신을 위안할 수 있는 기쁨이었는데, 대표 시집 ‘악의 꽃’에서 그는 ‘술의 넋’, ‘넝마주이들의 술’, ‘살인자의 술’, ‘외로운 자의 술’, ‘연인들의 술’ 등 술 연작을 통해 술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보들레르는 포도주 뿐 아니라 흑맥주를 애호했다고 한다. 보들레르는 현대인들에게 “취해라”라고 말한다. 이는 무분별한 알콜릭이나 쾌락 추구, 방종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19세기 파리는 전근대의 농경사회에서 근대 도시문명으로 전환한 시기다. 불문학자이자 평론가인 고 황현산 선생은 “농경사회에서 시간에 대해 얘기할 때 물처럼 흐른다고 표현하는데요. 보들레르한테 시간은 물 흐르듯, 바람 불어오듯 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1분, 1초 분할된 시간, 시간 그 자체가 물체화 되어 계속해서 쫓아오고 있는, 이런 시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압박이 사라지면 마음이 편안하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시간의 압박이 사라지면 권태 속에 들어가게 되죠. 바로 이게 산업사회의 시간, 자본주의 사회의 시간입니다.”라고 설명했다.보들레르가 취할 것을 권면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현대적 시간의 중력에서 벗어나라는 것! 인간을 불안하게 만들고 초조함과 신경쇠약, 권태와 우울감으로 몰고 가는 도시적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그것이 술이든 아니면 음악이든 무엇이든 간에 몰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보들레르 문학과 근대성의 상관관계를 평생 연구한 발터 벤야민은 이렇게 말한다. “위고가 현대 서사시의 영웅으로 대중을 예찬하는 순간, 보들레르는 영웅의 피난처를 대도시의 대중 속에서 찾고 있었다. 시민으로서 위고는 군중 속에 섞여 든다. 보들레르는 영웅으로서 거기에서 떨어져 나온다”라고.벤야민은 빅토르 위고의 작품들을 대중과 함께 호흡한 ‘민중문학’으로 읽은 반면 보들레르의 문학은 대중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홀로 솟아오르려는 영웅적 행위로 보았다. 보들레르가 대도시의 군중에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기 위해 채택한 방법은 바로 걷기다. 보들레르는 술만큼이나 걷는 걸 좋아한 ‘거리산보객(flanuer)’이었다. 산보객이란 대도시의 거리 곳곳을 정처 없이 거니는 사람을 뜻한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목적을 가지고 분주히 움직이는 군중과 완전히 대비된다. 일상은 지루하고, 현실원칙의 중력은 무겁기만 하다. 1분, 1초 단위로 등 뒤에서 달려드는 현대적 시간에 쫓기면서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만 간다. 현실에만 충실히 복종하면 강박주의자가 된다. 누군가와 교류하는 것이 피곤해지고, 타인에게 엄격해지기만 한다. 그렇게 점점 혐오와 갈등, 분리의 감각에 익숙해진다. 일상의 무게를 벗어나려면 꿈을 꿔야 한다. 꿈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현실의 속박이 없는 시간과 공간에서 마음껏 취하고 걸어야 한다.취하는 사람은, 취해서 걷는 사람은 꿈의 파랑 속에서, 환상의 리듬 속에서 생을 긍정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보며, 타인들과 넉넉히 어울리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다. 평범한 도시인으로 살 때, 시간에 쫓기며 압박당하는 군중의 한 사람으로 살 때 도시는 각박하고 권태로운 곳이지만, 무언가에 취해서 산보객으로 살 때 도시는 감동과 도취, 새로움으로 가득한 역동적 세계가 된다. 2024년을 사는 우리에게 1800년대 보들레르가 말한다. “취해라 그리고 걸어라!”

2024-06-17

‘자전거친화도시 1010’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다가오는 6월 21일 오후 4시 대구정책연구원에서 자전거시민포럼, 대구지속가능발전협의회와 대구광역시 탄소중립지원센터가 공동 주최하여 ‘탄소중립 자전거친화도시 1010 전국 릴레이 세미나’를 개최할 예정이다. 지난 2월 20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재)숲과나눔 자전거시민포럼과 이용빈 국회의원실이 공동주최한 2024 국회세미나에서 ‘자전거친화도시 1010’을 처음 제안하여 크게 주목을 받은 이후 전국을 순회하면서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자전거친화도시 1010’은 10분 내외의 일상 생활권에서는 자전거를 주요 교통수단으로 이용해 자전거 이용률을 10%까지 끌어 올려 탄소중립, 건강증진, 교통체증완화, 대기개선 등 다양한 효과를 만들어 보자는 의지를 담은 일종의 슬로건이다. ‘자전거친화도시 1010’을 ‘자전거친화도시 텐텐’이라고도 불리는데, 자전거의 두 바퀴를 연상시켜 더욱 친숙하고 시민들의 인식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열 번 이동할 때 한번, 혹은 열 명 가운데 한 명은 자전거를 이용하자는 취지여서 설득력이 높아질 것 같다.(재)숲과나눔 자전거시민포럼 정현미 정책위원장은 지난 2월 국회세미나에서 도시에서의 자전거는 자동차의 단거리 통행을 대신할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교통수단이므로, 시민들의 탄소중립도시, 자전거친화도시 만들기 노력과 열망을 활동과 에너지로 수렴할 정책목표와 정책 메커니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차량중심’의 도시환경을 ‘사람중심’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핵심이며, 선행과제로 자전거 정책 추진체계 및 법·제도 개선, 생활권 단위의 자전거 교통을 반영한 조사·연구, 자전거 수단분담률 제고를 위한 사회적 공감대 확보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그렇다면 지난 2023년 8월 17일부터 9월 20일까지 9000가구 약 1만6000명을 대상으로 한 ‘2023 대구의 사회지표’ 조사 보고서에서 나타난 대구시민의 교통부문 인식조사는 어떤지 살펴보자.‘주된 교통수단’에 대한 조사에서 1순위는 승용차(승합차 포함)가 47%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였고, 2015년(36.2%)부터 2023년까지 계속 증가 추세다. 그리고 2순위는 시내버스(25.4%), 3순위는 도시철도(10.5%)로 조사되었는데, 2015년부터 이들의 이용률은 계속 감소하고 있다.계속해서 4순위는 걸어서(9.4%)이며, 5순위가 자전거(2.4)인데, 2015년 조사부터 큰 변화가 없다. 이러한 결과는 함께 조사된 주요 통행목적에서 출·퇴근이 49.4%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통근·통학 평균 소요시간이 무려 27.9분인 것과 상관성이 높다. 아울러 2023년 시민의 보행 만족도가 45.1%로 낮고, 1인용 이동수단 이용경험이 5%이하에 불과하며, 타 이동수단 대비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이 87.9%나 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대구시는 ‘시민중심! 탄소중립 선도도시’를 비전으로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온실가스 45% 감축을 목표로 녹색교통을 대폭 확대할 계획인데, 이에 ‘자전거친화도시 1010’ 운동을 추가로 전개한다면 높은 시너지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2024-06-17

모방범죄 예방에 언론이 앞장서야

김규인 수필가 초등학생이 자신이 다니는 학교 교감을 폭행하고 욕을 하는 장면이 충격적이었다. 전학을 온 사유와 학부모의 행동까지 논란거리가 되었다. 이후 학교 등교정지 기간에 자전거까지 훔쳤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이후에 학생들 사이에 욕을 하며 남의 뺨을 때리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서울 신림역 인근에서 흉기 난동을 부린 C 씨의 재판 결과가 방송되면서 다시 지난날의 범행 장면이 고스란히 방송된다. 모르는 행인들에게 칼을 휘둘러 1명을 숨지게 하고 3명에게 심각한 상해를 입힌 혐의로 구속되어 이번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당시 방송이 될 때 모방범죄가 잇따라 많은 사람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지난 1월의 자살 사망자 수는 전년 동기보다 34% 증가했다. 정부는 유명인 자살이 자살자의 급격한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며 언론과 유튜브 등 언론 매체에 자살 보도 권고기준을 준수해 달라고 요청했다. 자살에 관한 구체적인 보도가 모방 자살을 부추긴다고 정부는 보았다. 특히 극단적 선택 등과 같은 표현을 자제해달라고 요구했다.범죄자들은 자신들의 경험이나 학습을 통해 범행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간접경험을 통하여 범행을 계획한다. 간접경험은 호기심을 자극하고 실패한 요인의 분석으로 범죄 수법을 더 구체적으로 구성한다. 모방범죄를 통해 치밀한 계획하에 범행의 성공 가능성은 더욱 증가한다.이제까지 언론은 국민의 알 권리를 내세워 무분별한 보도를 일삼았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표현으로 독자들을 붙잡기에 혈안이 되어 모방범죄를 부추긴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TV나 유튜브 등 영상의 영향이 컸다. 특히 조회수가 바로 수익으로 직결되는 유튜브 방송의 경우는 더 그러하다. 조회수 늘리기에 혈안이 되어 방송이 미치는 영향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모방범죄로 인해 사람들의 일상이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 의해 가정이 깨어지고 많은 사람이 다친다. 사람들의 인권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회복 불능의 상태로 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계속 늘어난다. 이익에 눈이 멀어 돈벌이만을 생각하는 행동을 이제는 그만 멈추어야 한다. 언론이 순기능을 회복하여 살고 싶은 사회로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한다.언론 보도 관행의 개선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사회와 국가에 도움을 주는 순기능을 살려 모방범죄가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정부는 유해 언론 매체에 대한 단속을 강화해야 한다. 아울러 죄를 저지른 사람들에 대한 교화를 강화하고 개인별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하여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 여기에는 가정교육도 힘을 보태야 한다.사회가 발달할수록 사회적 문제도 복잡해진다. 사회 흐름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 다양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과 제도적인 보완도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언론의 선순환적인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언론을 신뢰할 수 있을 때 독자의 선택은 저절로 따라간다. 언어적인 유희로 인한 독자의 선택은 일시적이다. 모방범죄가 발붙이지 못하게 체계를 바꿀 때 독자의 믿음도 함께할 것이다.

2024-06-17

배현진과 고민정의 ‘경거망동’ 설전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역사학자 호암 문일평(188 8~1939)은 “그 사람이 궁금하거든 그가 먹는 음식을 보라”고 했다. 이 말은 사람의 음식 취향이 성격이나 인품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열쇳말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일 터.비단 음식뿐일까? 인간의 됨됨이와 품격을 은연중에 알아차릴 수 있게 해주는 것 중 또 다른 하나가 바로 그가 사용하는 ‘언어(말)’가 아닐지.세칭 ‘쌍시옷’을 입에 달고 사는 성직자를 상상하기 어렵고, 장자(莊子)를 인용하는 조직폭력배를 만나 보기 어려운 것처럼.전직 대통령 아내의 ‘인도 방문’을 두고 갖가지 구설이 떠돌고 있다. 그것과 연관된 논란 또한 이어지는 상황. 이 문제를 놓고 설전을 벌인 여당과 야당의 여성 국회의원 이름이 신문과 방송에 자주 오르내렸다. 국민의힘 배현진과 더불어민주당 고민정이다.문재인 전 대통령 아내의 인도 방문에 얽힌 의혹 제기 선봉에 선 배현진 의원을 향해 고민정 의원이 “제시한 자료 검증의 부실함을 인정하고, 더 이상의 경거망동은 하지 않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고 의원은 인도 방문 동행자 중 한 명이다.배 의원이 발끈했다. “동료의원으로서 예우해줄 때 입을 곱게, 경거망동을 자제하길 바란다. (관련된)문서 이해가 잘 안 되면 밑줄이라도 치며 읽어라”고 치받은 것.두 사람이 공히 사용한 경거망동(輕擧妄動)이란 사자성어는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걸 의미한다. 아이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을 향해 ‘생각이 없다’니…. 보기에 따라선 대단히 모욕적인 언사다.의견이 다를 땐 논쟁할 수 있다. 그러나, 가시 돋친 맹목적 힐난과 배려가 담긴 점잖은 충고는 분명 다른 효과를 나타내지 않을까?/홍성식 (기획특집부장)

2024-06-17

‘확증편향의 덫’에서 벗어나려면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온 나라가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의 덫’에 걸려 신음하고 있다. 과도한 확신과 확신, 편향과 편향의 충돌이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확증편향의 덫에 갇힌 것을 모르거나 편향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오죽하면 ‘한국사회·성격심리학회’에서 ‘2024년 한국사회가 가장 주목해야 할 사회심리현상은 확증편향’이라고 우려했겠는가.심리학자 웨이슨(P. C. Wason)은 확증편향이란 “자신의 가치관·신념·판단에 부합하는 정보만 믿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성”이라고 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인지편향’이다. 확증편향에 갇힌 사람이 증거라고 제시하는 사실(fact)은 ‘선택적 인식’에 의한 ‘선택적 사실’일 뿐이다.인간은 이성보다 감정에 좌우되기 쉬우며, 편향이 강한 사람일수록 더욱 감정적 행태를 보인다. 개인적 삶의 경험으로부터 축적된 인지편향은 매우 완고해서 수정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우리가 거의 매일 접속하는 ‘유튜브 알고리즘(YouTube Algorithm)’의 영향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지편향이 심화됨으로써 정신적 노예로 전락할 위험성은 커진다.철학자 니체(F. Nietzsche)는 “확신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라고 경고했다. 성찰하지 않는 확신은 객관적 사실까지도 자신의 믿음에 맞게 왜곡해서 거짓을 확산시키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지도자의 확증편향은 과도한 자신감과 교만함을 낳고, 정책결정과정에서 다양한 대안의 검토를 방해함으로써 심각한 오류를 초래하게 된다.확증편향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그 덫에서 벗어나려면 ‘의식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적 오만’의 경계이다. 오만은 ‘무지’와 ‘확신’의 결합에서 나오기 때문에 인지편향에서 벗어나려면 ‘지적 겸손’과 ‘비판적 자기성찰’이 필수조건이다. 균형식이 건강에 좋듯이, 균형 잡힌 사고가 합리적 판단을 이끌어준다. 유유상종(類類相從)에서 비롯되는 집단사고(group think)의 오류를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악마의 변호인(devil′s advocate)’의 고언(苦言)을 경청해야 한다.균형적 사고를 회복하려면 ‘열린 마음(open mind)’을 가져야 한다. 확증편향은 ‘자신이 만든 덫에 자신을 가두는 것’이다. 확신의 덫에 갇히면 사고의 유연성을 잃는다. 지금은 일관성보다는 유연성이 더욱 요구되는 시대다. 역지사지(易地思之)는 열린 마음이 전제될 때 비로소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다. 특정 성향의 방송·신문·유튜브 등은 편식하지 않아야하고, 이념·정당·연령·종교가 다른 사람들과도 대화할 수 있어야 확증편향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다.우리사회의 비극은 타인의 편향은 비판하면서도 자신의 편향은 돌아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편향과 편견은 분열의 길’이며, ‘균형과 헤아림은 통합의 길’이다. 남북대치와 북한의 핵위협 속에서도 ‘망국적인 심리적 내전’을 벌이고 있는 대한민국이 어느 길로 가야하는지는 너무나 자명하지 않는가.

2024-06-17

‘법 왜곡죄’가 아니라 ‘왜곡 입법죄’가 필요하다

김진국 고문 낯선 변호사들이 줄줄이 공천받을 때부터 알아봤다.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박용진 전 의원을 밀어내고, 낯선 30대 변호사가 공천받았다. 박 전 의원은 21대 총선에서 서울에서 두 번째로 높은 득표율(64.45%)을 얻었다. 이 대표도 “(자신과 대표 경선한) 박 의원 같은 사람이 공천 걱정하지 않는 당을 만들겠다”라고 약속했다. 그런 박 전 의원을 밀어내고 공천받은 사람이 김동아 의원 이다.그는 이 대표의 최측근, 정진상 전 비서실장의 변호인이다. 소위 ‘대장동 변호사’의 한 사람이다. 이렇게 당선된 ‘대장동 변호사’만 5명이다. 이들은 이제 검사와 대등하게 법리를 다투는 위치가 아니다.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검사는 물론 판사까지 불러 호통치게 됐다. 정상적인 재판이 되겠나.쌍방울 대북 송금과 관련해 이화영 전 경기도 부지사가 중형을 선고받자, 민주당은 검찰과 법원을 일제히 때렸다. 특검으로 ‘왜곡 수사’를 밝히겠다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특검법을 거부하면 수사 검사들을 탄핵하는 방안도 검토한다.또 대통령이 특검법을 거부해도 소용없도록 이미 시행 중인 상설 특검법을 개정하려 한다. 국회(사실상 민주당)가 추천한 후보를 대통령이 3일 내 임명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임명되도록 고치겠다고 한다.판사도 손아귀에 쥐려고 한다. 법관 탄핵을 거론하고, 형법에 ‘법 왜곡죄’를 신설하려 한다. ‘판·검사가 증거나 사실관계를 조작하고, 공소권을 남용’하면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말이 왜곡이지, 누가 봐도 이재명 대표를 털끝도 건드리지 말라는 엄포다. 이 대표는 연일 자신에 대한 수사가 ‘소설’(조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김동아 의원은 “사법부에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다”라는 말도 했다. 다수당인 민주당이 법원 판결까지 통제하겠다는 말이다. 삼권 분립을 전제로 한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틀을 허물겠다는 위험한 발상이다. 구체적으로 ‘판사 선출론’이 나온다. 기존의 판사들이 하는 판결을 믿지 못하겠으니, 판사를 직접 뽑자는 것이다.대장동 변호사 출신인 이건태 의원은 ‘표적 수사로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으면 영장 청구를 기각하도록 한 ‘표적 수사 금지법안’을 제출했다.이 대표를 변호한 양부남 의원은 수사기관이 피의사실을 공표할 수 있는 범위를 대폭 줄인 ‘피의 사실 공표 금지법안’을 냈다.김용민 당 검찰개혁TF팀장은 ‘법 왜곡죄’ 형법 개정안과 별도로 ‘수사기관이 증거를 조작하거나 위증을 강요하는 경우 처벌’하는 ‘수사기관 무고죄’ 신설법안도 내놨다.얼마나 화려한가. ‘비명횡사’, ‘친명횡재’라는 비난에도 꿋꿋이 밀어붙인 공천이 빛을 내고 있다. 기상천외하고, 듣지도 보지도 못한 법안들이다. ‘법비(法匪)’라는 말은 이런 때 쓰는 표현이다. 조국 사태로 검찰 수사권을 박탈한 ‘검수완박’은 애교다. 이재명 대표의 대장동 수사에서는 피의자의 변호사들이 판사의 판결까지 좌우하려 한다.물론 검찰이 모두 잘하는 건 아니다. 검찰의 잘못된 수사로 고통을 받은 사람이 없지 않다. 법원도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대법원장부터 정치적으로 몰아내고, 권력자의 입맛대로 임명해 법관 인사를 휘저으면서 엉망이다.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는 판사들이 늘어나면서 판사가 누구냐에 따라 재판 결과가 달라진다고 믿게 됐다.그러나 그 문제는 그것대로 해결해야 한다. 그런다고 사법부의 독립을 묵살하고, 법원을 정치적으로 통제하면 혼란을 부채질하고, 신뢰를 더 허물게 된다. 왜 오얏나무 아래서는 갓끈을 매지 말라고 했겠나. 대놓고 ‘입법질’이다. 의원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이 대표 재판에 항의한다. 그런 판에 낸 이런 법안은 아무리 변명해도 ‘방탄용’이다.22대 국회를 민주당 단독 개원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다. 여당에 개원 압박을 할 때는 “(국민의힘이) 산적한 민생 법안을 인질로 잡는다”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국회를 열고는 민생이 안중에 없다. 이 대표 한 사람을 위한 국회다. ‘법 왜곡죄’가 아니라 ‘왜곡 입법죄’를 만들어야 할 판이다.제발 자중자애(自重自愛)하기를 바란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4-06-16

완벽하지 않는 우상

김경아 작가 바위는 그냥 두면 돌덩이일 뿐이다. 네모지게 깎으면 다듬잇돌이 된다. 돌을 깎아 농사를 지으면 온 식구가 배를 불리고, 가락바퀴에 실을 꿰어 옷을 지어 입으면 매서운 겨울을 이겨낸다. 돌을 쌓아 성을 쌓으면 적군을 막아주는 요새가 되고, 쇠줄을 갈아가며 돌을 잘라 만든 편경은 국보급 악기가 되었다. 인간들은 돌에 의미를 부여했다. 고기 잡으러 나간 아버지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돌탑을 쌓아 자식의 앞날을 밀어주는 조상신으로, 아이들이 아프거나 아이를 낳고 싶을 때 두 손을 비비면 자식을 점지해주는 삼신할미로, 가족의 앞날을 맡겼다. 내일이 불투명할 때, 누군가는 바위에 부처를 새겼고 누군가는 경배를 올리며 불심으로 이겨내길 기원했다.못난이 부처 사진을 보고 고령으로 차를 몰았다. 개포리 시리골은 동네를 둘러싼 골짜기 모양이 마치 떡시루처럼 생겨 붙은 이름이다. 도로에서 골짜기로 들어가면 기와를 얹은 집들이 보이고 유형문화재 표지판이 도로에 우뚝 서 있다. 석조관음 보살좌상은 배 모양의 평평한 돌에 새긴 고려시대 불상이다. 전체적인 윤곽은 돋을새김이고, 옷의 주름이나 연꽃무늬 등은 선으로 긋는 기법이다. 머리에 쓴 관은 여타 불상과 달리 丁(정)자 모양이다. 얼굴은 둥글넓적하고 좁은 코, 작은 입 등에서 토속적인 느낌이 풍겨졌다. 어디로 보나 대웅전에 정좌한 부처의 모습이 아니다. 금박을 입혀 고급스럽게 빛나지도 않는다. 르네상스 시대의 빼어난 조각상에 비하면 비례도 엉성하다. 양어깨에 걸친 옷의 주름은 물결선처럼 대강 처리하여 남루하고 대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조각이 간결하지 못하고 생동감도 없다. 솜씨 좋고 불심 깊은 석공의 작품이 아니라 망치와 정을 들고 오며 가며 새긴 작품 같다.뒷면에 ‘옹희(雍7155) 2년(985) 을유 6월 27일’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조각에 잔잔히 흐르는 고려인들의 삶의 자취를 반추해 보게 한다. 거란족의 거듭된 침입으로 민생은 피폐해졌다. 빈민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쳐도 빈민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마음 둘 곳 없는 백성은 정치권력 이외의 의지처를 찾았다.불완전한 인간은 수많은 우상을 만들었다. 우상은 무결점이어야 했다. 아주 균형 있게, 반듯하게, 형상도 미끈하게 빚었다. 자신만의 상(像)을 만들어 떠받들고 환상의 세계를 덧입혀 정신의 언어를 쏟아내기 위해 완벽을 추구했다. 석조관음 보살좌상은 외모에서 우상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 균형도, 선도 고르지 않다. 마치 우리들의 일그러진 우상처럼 어설프다. 정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불상은 범접이 어렵다. 인간 크기를 능가하는 불상은 선뜻 다가서기 꺼려진다. 하지만 석조관음 보살좌상을 마주 보면 눈높이가 같아진다. 온화한 표정과 투박한 몸짓, 헐렁하고 정감 가는 미소에 왠지 동질감이 느껴진다. 언제든 다가서면 중생의 괴로움을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 줄 것만 같다.짧은 목 아래로 얕게 가슴골이 드러난다. 오른팔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형식이고, 왼손에서 뻗어 나온 연꽃 양 끝에는 각각 꽃이 피어 있다. 옷 주름은 구불구불한 몇 가닥의 선으로 간략하다. 결가부좌를 튼 하체는 상체에 비해 더욱 왜소하다. 숙련된 장인이 깎아낸 게 아니라 비포장 인생길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소원을 바위 위에 성스럽게 새겨 놓은 듯하다. 허술한 모습에 나도 더 가까이 다가선다. 말라버린 들꽃이 시간을 머금고 있듯 불상 앞에 서니 남편의 건강과 자식들의 앞날을 위해 손을 모았던 엄마들의 기도 소리가 들린다. 차마 목 놓아 부르짖지 못하고 조용히 머리만 조아렸을 중생들의 향기를 찾는다. 허술한 옷을 입고도 미소를 잃지 않는 불상의 모습이 친근하다.인간들은 정말 완벽한 우상을 원했을까. 인간들이 구하는 것은 형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십자가의 형상이 하나님의 사랑을, 불상의 형상이 부처의 자비를, 디오니소스의 형상이 다산과 풍요의 대체품이 될 수는 없다. 불완전한 인간은 완전함에 대한 결핍을 자신이 좋아하는 형상으로 채우고 싶었을 것이다.삼촌 같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나와 괴리가 없는 친근한 우상을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든 마음에 큰 물결이 일면 찾아가 독백의 언어를 뱉을 수 있는 인상 좋은 우상이 필요했다. 우상 앞에 선 사람들의 해진 마음을 다독여주는 듯하다.부처도 나와 다르지 않음을 경험하고 내려오는 길, 완벽하지 않은 우상을 바라본다. 이웃집 삼촌이 편안한 옷을 입고 손짓하는 것 같다. 편안하게 고민을 털어놓고 싶으면 다시 오라고.

2024-06-16

가장 한국적인 역사문화도시 경주 APEC 정상회의 최적지

주낙영 경주시장 2025 APEC 정상회의가 내년 11월 한국에서 열린다. 그 감동을 경주에서 느껴보자.미·일·러·중 세계 4강을 비롯해 아·태지역 21개국 정상·각료·언론 등 2만여 명 이상이 참가하는 국가적인 이벤트인 2025 APEC 정상회의.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만큼 외교·경제·문화적 역량을 발휘해 국격을 높이고 한국이 새롭게 도약하는 중요한 모멘텀으로 활용돼야 한다.APEC은 단순한 회의가 아닌 한국의 발전상과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경주에서 개최돼야 한다.경주는 신라 천년고도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도시이자 한반도 문화유산의 보고로 대한민국 5000년 역사를 세계 속에 알릴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신라는 한반도 전체를 하나로 통일한 최초 국가이고 그 통일문화가 탄생하고 발전한 곳이다.즉 한국 문화의 본질이자 정체성이 서려있는 곳이 신라이며 그 시작점이 경주다.현재 유치 3파전을 벌이고 있는 경주, 인천, 제주 중 유일한 지방중소도시는 경주다. 일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연상시킨다. 어떻게 지방에서 국제행사를 치를 수 있을까 하는 우려는 금물이다.경주는 APEC 교육장관회의, 세계물포럼, G20 재무장관회의, 세계유산도시기구 세계총회 등 다양한 국제행사의 성공 개최 노하우가 풍부하다.특히 국제컨벤션협회(ICCA) 발표 아·태지역 55위, 전 세계 270위 기록 등 전국 기초단체 중 국제회의를 가장 많이 개최한 도시 1위에 이름을 올렸다.APEC의 포용적 성장과 지방화 시대 지방균형발전 가치 실현의 최적모델 역시 경주다. 그간 멕시코 로스카보스(2002),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2012), 인도네시아 발리(2013), 베트남 다낭(2017) 등 역사·문화 중소도시 성공 개최한 사례를 보면 경주의 당위성은 차고 넘친다.특히 경주는 정상의 경호와 안전, 보안을 위한 입지적 조건도 최고다.경주 보문관광단지는 회의장과 숙박, 전시장 등이 3분 거리로 이동이 매우 짧으며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타 후보도시와 달리 바다와 접해있지 않으며 보문관광단지 전체 1200만㎡를 민간인출입통제구역으로 설정, NGO 등 외부경호에 요새이다.2005년 APEC이 부산에서 개최될 때 한미정상회담은 보문관광단지에서 열렸다.문관광단지 일원 178만㎡가 2022년 비즈니스 국제회의 복합지구로 지정되어 적은 비용으로 도시 마케팅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다.특히 경주화백컨벤션센터 주 회의장 주변 3㎞ 이내에 103개소, 4463실의 정부대표단 수요대비 157% 객실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중 정상용 5성급 호텔 및 스위트룸 등이 10개소, 223실로 숙박도 최고수준이다. 50분대의 김해국제공항 등 4개 공항(군사 3, 민간 1)과 KTX·SRT 등 완벽한 교통망도 빼놓을 수 없다.경주는 영남권 산업벨트의 중심허브 도시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일구어 낸 성장축의 중심에 있어 대한민국 경제발전상을 공유할 수 있는 최적지다.경주의 한수원, 원전, 소형모듈원자로(SMR)와 포항(포스텍, 이차전지), 울산(완성차, 조선), 구미(반도체), 안동(바이오) 등으로 이어지는 산업 대동맥이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APEC이 개최될 11월은 형형색색의 단풍 최절정기로 세계 정상과 영부인들이 한복을 입고 불국사, 동궁과 월지, 대릉원 등에서 찍은 사진이 전 세계에 소개된다면 그야말로 감동 드라마로 세계의 이목이 경주와 한국에 집중될 것이다.특히 지난해 9월 ‘APEC 정상회의 경주유치 100만 서명운동’을 전개한 결과 불과 85일 만에 25만 경주인구보다 약 6배 많은 146만3874명이라는 많은 국민들의 지지와 성원 보여 주었다. 이는 경주가 APEC 정상회의 최적지로 손색이 없다는 것을 대변하고 있다.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달말 도시 결정을 앞두고 타 도시와의 차별화된 전략과 준비로 정상회의 최적 도시임을 충분히 설명하고 강점과 파급력을 최대한 피력해 반드시 성공유치로 경주는 물론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 알리고 APEC 역사에 길이 남을 성공 롤모델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다. 경주는 APEC 유치 도시 선정의 숙명이자 필연이다.

2024-06-16

문학의 저항과 위로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34∼5℃를 오르내리는 더위가 맹위를 떨치기 시작하면 무조건 항복할 수밖에 없다. “저항할 수 없다면, 차라리 즐겨라!”는 아주 신랄하고 노골적인 말도 있다. 더위를 포함한 자연의 섭리에 거부권을 행사함은 어리석고도 삿된 짓이다. 그런 까닭에 나약한 육신의 관심 영역을 외부세계로 이전함이 현명할 수 있다. 이것이 유튜브를 향한 나의 관심 시작점이다.며칠 전 텃밭과 잔디에 넉넉하게 물 주고, 여유롭게 아침 식사와 설거지를 마치고 안두(案頭)에 앉는다. 그 무렵 켜둔 유튜브에서 호소력 짙은 낭송자의 단편소설이 들려온다. 쌍둥이 남매의 애틋한 이야기가 끊일 듯 말 듯 이어진다. ‘반야심경’과 ‘도덕경’ 1장부터 15장까지 외워서 왼손 쓰기를 하던 나였지만, 마음과 귀가 자꾸 소설로 옮아가 어려움을 겪는다.고교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던 쌍둥이 오빠를 떠올리며 그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부터 그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여러 사건이 중첩되어 생겨난 깊은 상처와 안타까움이 내게도 전해진다. 소설은 어떤 때에는 지극히 이성적으로, 더러는 감상적으로, 혹은 서정적으로 나의 영혼과 육신을 후려갈긴다. 4·16 세월호 대참사와 관련된 소설이었으므로!….여성적인 서정과 다정다감함, 섬세함과 애틋함이 넘치는 오빠와 외려 남성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쌍둥이 누이의 유소년기와 어른이 되고 난 이후의 이야기가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그래선지 ‘도덕경’과 ‘반야심경’보다 소설의 진척 양상과 여주인공의 황량(荒6DBC)한 내면 풍경의 변화가 훨씬 더 마음 깊숙하게 다가오는 것이다.‘참 잘 썼네! 저런 작가가 우리 옆에 있다니, 정말 운이 좋은 거지.’ 하는 혼잣말이 스르륵 하고 나온다. 우리 시대 문학은 많은 경우에 죽었거나 가사상태(假死狀態)에 있다. 시인과 소설가, 극작가를 찾지 않는 한국 독자들에게 문학의 위로 혹은 문학의 향수나 저항 따위의 어휘는 멸망을 자초한 조선왕조의 비루(鄙陋)한 골동품처럼 헛헛하고 무의미한 것이다.문학이 힘을 가지는 것은 1980년대 참혹한 군부독재 시절에도 저항의 붓을 놓지 않은 박노해와 김남주 같은 시인들 덕이었다. 60년대 김수영과 70년대 김지하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자유와 민주와 문학의 최전선에서 목숨 걸고 저항하며 투쟁했다. 그들의 헌신적인 싸움의 결과물을 우리는 물과 공기를 누리듯 공짜로 향수(享受)할 따름 아닌가?!시대의 어둠과 폭력과 야만이 절정으로 치달아갈 때 그들은 가장 위태로운 꼭짓점에 서 있었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수영’이 구차하고 남루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때, ‘애린’에서 이제는 담담하게 평안을 얻어낸 ‘지하’처럼 그들은 고요와 평정을 구하지 않고 좌충우돌(左衝右突)하며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공장에서 야학당에서 깃발을 들었다.오늘 들은 단편소설은 지난날 이야기를 그저 무심히 던지면서 절규하지도, 주장하지도, 평가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왜 그리 가슴이 미어지는지 모르겠다. 문학의 저항과 위로가 어디서 오는지 자꾸만 생각하도록 한다. 우리 시대를 위한 문학의 힘은 아직도 남아 있는 모양이다.

2024-06-16

기후 위기가 현실로

우정구 논설위원 기후 인플레이션이란 용어를 자주 접하는 시대다. 기후와 인플레이션을 합친 이 용어는 기상 이변과 지속되는 지구온난화가 빚어낸 인플레이션을 의미한다. 즉 기상이변으로 농산물 가격 등이 폭등하면서 경제 전반에 미치는 악영향의 인플레이션이다.먹거리 물가를 위협하는 기후 인플레이션은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국민 과일로 불리는 사과와 수박 등의 수확량이 줄면서 신선식품의 물가지수가 소비자물가 인상을 크게 자극하고 있다.독일 포츠담 기후영향연구소는 지구온난화를 유발하는 탄소배출로 2050년쯤에 가서는 전세계 소득율이 19% 감소할 것이란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소득감소 규모가 무려 38조달러에 이른다고 한다.지금 지구촌은 기상이변이 빚은 폭염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올여름은 엄청난 무더위가 전 세계를 덮을 것이란 전망 속에 일부지역에서는 벌써부터 이른 폭염으로 일상이 혼란에 빠지고 있다.중국 북서부 신장지역은 지표면 온도가 70도로 치솟아 맨발로 걸으면 화상을 입을 정도라 한다. 그리스, 튀르키예 등지에는 40도가 넘는 폭염이 연일 이어지고 스페인에서는 폭염으로 주요 관광지가 폐쇄되는 일도 벌어졌다.우리나라도 6월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난봄 기온이 역대 두 번째로 높았고 바다는 10년 새 가장 뜨거웠다고 한다. 지난 10일 대구에서는 첫 불볕더위주의보가 내려졌는데 예년보다 일주일이 빨리 찾아온 것이다.화석연료 기반의 산업혁명은 전례 없는 산업발전을 이룩했지만, 결과를 놓고 보면 인류에게 기후위기라는 무서운 재앙을 가져다준 꼴이다. 올여름 닥칠 역대급 폭염 소식이 기후 위기를 절실히 느끼게 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4-06-16

최강의 노년을 위해

유영희 작가 초고령 사회를 앞두고 건강하게 나이들기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나 역시 조만간 고령자가 될 처지라 인지 건강과 신체 건강을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 준비하고 있다. 그런와중에 운 좋게도 며칠 전 내가 사는 지역의 아파트 단지 주민을 위해 ‘치매 예방을 위한 행복 글쓰기’ 강의를 할 기회가 생겼다. 참석자 중에 7, 80대도 있다고 하니, 그동안 강의와는 완전히 다르게 준비해야 했다. 행복한 경험을 회상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진을 찾아 붙이고 사진 옆에 글쓰기를 할 수 있는 종이 앨범을 준비했다.처음에는 동요 ‘과수원길’을 부르고 가사 중 마음에 와닿는 단어를 골라 앨범에 써보라고 했다. 단어를 쓴 소감을 물으니, 아는 가사인데도 글로 쓰니 새롭고 설렌다고 한다. 아카시아꽃이나 과수원에 얽힌 이야기를 나눌 때는 어느 참석자가 부모님이 과수원 농장을 크게 했는데 큰오빠가 과수원을 날려서 자기가 어쩔 수 없이 어린 나이에 시집 가야 했다며 깔깔 웃는다. 아픈 시간도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으니, 그것도 행복한 글이 되었다.다음으로 자유 연상 글쓰기를 했다. 기차 사진을 보고 바로 떠오르는 단어 5개를 쓴 후 그 단어를 활용하여 문장을 만들었다. 그러자 어느 참석자가 엄마와 기차 타고 여행 갔던 생각이 난다면서 어머니 보고 싶다고 눈물을 흘리며 얼굴을 감싼다. 그렇게 묻어두었던 감정을 드러내니 이웃들이 따듯한 시선을 보낸다. 강의실 공기가 달라지는 듯했다.임영웅의 노래 ‘바램’은 노년이 되어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은 바람을 노래한 것이다. 이 노래를 선택하면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지금의 ‘바람’은 무엇인지 써보자고 하니, 어느 참석자가 죽는 날까지 두 다리로 걷다가 편안히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다가 끝내 울먹인다.자신의 정서와 깊이 만나는 경험을 하기가 쉽지는 않다. 아무래도 삶의 굴곡을 겪은 연배이기도 하고 공감하는 이웃이 있어서 글쓰기 수업에 정서적으로 더 깊이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모두 동대표에게 한마디 하기를 청하니, 동대표는 오랫동안 참석자들과 이웃으로 살아왔지만 이렇게 진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면서 눈물을 흘리며 자기 이야기를 나누어준 분들에게 감동했다고 깊이 감사 인사를 했다.건강하게 살다가 죽고 싶은 바람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재일 한국인 정치학자 강상중은 2009년 발간한 ‘고민하는 힘’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해 다양하게 고민하고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면서 ‘늙어서 최강이 되라’고 한다.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노년의 힘은 ‘교란하기’에 있으니, 해보지 못한 일에 도전해보자고 한다. 나는 여기에 글쓰기를 추천한다.글쓰기가 스트레스를 완화해주고 마음의 힘을 키워준다는 연구 결과는 많다. 나 역시 이번 행복 글쓰기 강의를 통해 최강의 노년을 위한 글쓰기가 더 확산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이웃과 함께 하는 글쓰기라면 금상첨화다.

2024-06-16

설비보전 5요소

엄주선 포스코 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산업혁명 이전에는 재료의 준비부터 제품완성까지 전 과정을 대부분 사람의 손으로 하다 보니 생산량이 적어 소비에 비해 생산이 늘 부족하였다. 이 시기는 모든 것을 사람의 손에 의존하므로 숙련공과 기능이 매우 중요하였다. 18세기 증기기관과 전동기가 발명된 이후 기계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대형 기계들이 만들어지고 대량 생산을 통해 생산이 소비를 넘어서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때부터 사람은 설비를 운영하고 설비가 제품을 생산하기 때문에 기능 보다는 설비의 원리와 구성을 알고 운영하는 능력이 요구되기 시작하였다.자동차나 전자와 같이 사람이 조립하고 기계가 보조하는 산업의 경우는 여전히 사람의 기능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이는 자동화를 통해 꾸준히 숙련된 기능을 대체해 왔으며 지금은 인공지능(AI)과 로봇이 결합되면서 더 빠른 속도로 대체되고 있다. 그러나 제철업과 같이 사람은 주로 설비를 운전하고 설비가 생산을 담당하는 대형 장치산업의 경우는 가동 정지와 같이 반복적으로 동일한 순서로 운전되는 작업은 센서나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부분적 대체가 가능하나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부품으로 구성된 설비는 언제든지 돌발 고장이 발생 할 수 있어 아직은 AI나 로봇이 대체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2차 대전 당시 독일에서 V2로켓의 명중률에 대하여 확률 이론을 규명한 루샤의 승적법칙에 의하면 직렬계로 구성된 시스템의 전체신뢰도(R)는 부품신뢰도(r)의 부품수(n) 승에 비례한다고 하였다. 즉 직렬로 구성된 100개의 부품이 모두 1%의 결함이 있다고 가정하면 제품의 토탈신뢰도는 36.60%로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다. 100개의 부품이 이러할 진데 그 수를 일일이 셀 수 없이 무수한 부품으로 구성된 대형 설비의 경우 고장을 예측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그러기에 설비를 운영하는 회사 직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설비를 정상적으로 잘 운영하기 위해 원리와 작동법, 이상시 조치 요령에 대한 학습을 하고 설비를 구성하는 장치나 조립품들이 현장의 열악한 환경에 의해 결함을 일으키지 않도록 예방하는 일이다. 이 결함을 줄이는 활동은 첫째 외부 오염이 기계의 작동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깨끗하게 닦는 것이며 둘째 부품과 몸체 기계 간 서로 연결된 체결 부위를 잘 조이는 것, 셋째 기계가 작동하는 마찰 부가 원활하게 움직이도록 기름치는 것 넷째 마모되어 작동이나 생산품에 영향이 있을 경우 교체하는 것이며 다섯째가 항상 정상 기능을 발휘하도록 측정하여 조정하는 것이다.즉 닦고 조이고 기름치고 조정 교환하는 5요소를 제대로 하면 사용자의 관리적 요인으로 인한 설비 고장은 100% 예방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매우 단순한 것 같지만 실천이라는 노력이 수반되는 것으로 꾸준히 지속하기는 정말 어렵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제대로 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에 고장을 사람이 고의로 장애를 일으킨다고 하는 것이다.사람이 고의로 장애를 일으키지 않도록 우리 현장은 설비보전 5요소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한 번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2024-06-16

북한 오물 풍선의 우려

윤영대전 포항대 교수 지난 5월 28일 밤, 260여 개의 커다란 오물 풍선이 휴전선을 넘어왔었다. 우리가 대북 전단을 날려 보낸 것에 대한 북한의 보복성 도발 행위이다. 총성 없는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군 당국의 발표를 보면 오물 풍선은 6월 1일에도 약 600개 풍선에 담배꽁초, 폐지, 비닐, 폐건전지 등에 냄새나는 오물까지 넣어서 북서풍이 부는 날 하늘에 띄웠다는 것이다. 이에 우리 군은 6년 만에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했고 이에 겁먹은 듯 북한은 6월 9일을 끝으로 대남 오물 풍선 살포를 잠정 중단하겠다는 뜻을 밝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우리는 예의 주시하며 앞으로의 상황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고 마음의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북한이 풍선을 날려 보내기 시작한 것은 8년 전, 대남 전단 40여 종 30여 만장을 날려 보냈었는데, 이번 오물 풍선은 합동참모본부 발표에 의하면 6월 9일까지 4회에 걸쳐 약 1300개를 날려 보냈다고 한다. 1개당 5~10kg 정도라 하더라도 10t 이상의 오물이 남하하여 전국 곳곳에 뿌려졌을 텐데 그 오염 상황이 심히 우려된다. 모두 밤 9시가 넘은 밤하늘 3km 높이에서 초속 5m 정도로 소리 없이 날아오는 3~4m 크기의 풍선을 다 발견하기란 어려울 것이고 비록 발견하더라도 전방 격추 등 대응체계가 미흡했다는 질타는 면할 수가 없겠지만 내용물이 터졌을 경우 낙탄이나 오염물 분산이라는 위험을 고려하여 공중 요격보다는 낙하 후 처리를 결정했다는 것이다.이 오물 풍선은 서울, 경기, 강원뿐만 아니라 충청, 경상까지 날아왔고 경북은 안동, 의성을 지나 영천의 포도밭에서도 발견됐으며 370km 떨어진 포항 송라 화진해수욕장까지 날아왔다고 하니 걱정이 커질 수밖에 없다. 주택가 차량 유리창이 파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보니 고속도로와 공항 등에 떨어졌으면 그 피해가 엄청날 것이고 도심의 경우 인명 피해도 크게 우려된다. 사실 오물 풍선 낙하로 인하여 춘천에서는 산불도 발생했고 인천공항에서는 3차례나 운행 차질을 빚었다고 한다. 만약 그 속에 생화학 물질이 있었다면 그 피해는 엄청났을 것이다. 사실 북한은 세계적인 생화학 무기 보유국이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풍선 오염 물질에 구제역, 조류인플루엔자 등 6가지 가축전염병 병원체 검사를 한 농림수산부는 아직 이상을 발견하지는 못했다고 하지만 가축분뇨나 인분(人糞)의 경우 장티푸스, 콜레라 등 전염 우려가 있으니만큼 오물 풍선을 발견하면 만지지 말고 신속히 군부대나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 대북 전단 30만 장, K-팝 USB 2000개를 넣은 대형 풍선 20개를 북으로 보낸 효과는 어느 정도일까? 대북 확성기 방송으로 대북 메시지 전달의 방법과 효능도 검토해 봐야한다. 풍선은 열상감시장비와 레이더로 추적이 가능하고 추락 후 화생방 신속대응팀과 폭발물처리반이 출동하여 수거하고있다. 북한은 또 29일부터 서해 NLL 남쪽으로 GPS 교란작전도 벌이고 초대형 방사포를 동해안에 발포하는 등 도발을 하고 있으니 그 속셈을 잘 간파하여 북한 공산주의의 정신적 오물이 남한에 뿌려지지 않기를 빌어야겠다.

2024-06-13

화려한 외유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이른바 ‘김정숙 버킷리스트’가 세간의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야당이 이재명 대표 방탄용으로 들고 나온 ‘김건희 특검’에 대한 반작용으로 불거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 부부의 해외순방을 두고 ‘김정숙 버킷리스트’라고 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일단 외국 나들이가 총 48회로 2위인 김윤옥 여사의 28회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고, 세계 각지의 유명 관광지를 두루 섭렵한 까닭이다.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인도의 타지마할,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로마의 성베드로대성당, 콜로세움, 이집트 피라미드, 후마윤묘지, 체코의 프라하성, 베트남 호이안, 노르웨이 베르겐, 뭉크미술관, 소냐왕비의 미술마구간, 그리그의 집, 피오르드, 중국의 대족석각, 러시아 성바실리성당, 함부르크항구 선상투어, 함부르크시청, 베트남 땀타잉 벽화마을,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수크, 파푸아뉴기니 동식물원, 비아오캄포, 브루나이왕궁, 스웨덴 스벤스크폼 디자인진흥원, 독일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러시아 톨스토이의 집 박물관, 베트남 민족학박물관, 루브르 아부다비, 싱가포르 국립박물관, 한메이린 예술관, 인도 국립현대미술관, 파푸아뉴기니 국립미술관, 벨기에 왕립미술관, 아르헨티나 라틴아메리카미술관, 뉴질랜드 오클랜드미술관, 우즈베키스탄 아트갤러리, 핀란드 디자인박물관, 노르웨이 K-팝콘서트 등등이다.그 중 대표적인 논란거리로는 인도의 타지마할,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노르웨이의 피오르드와 그리그 생가, 체코의 프라하의 성비투스대성당, 이집트의 피라미드 등이다. 인도 타지마할 관광은 논란거리가 한둘이 아니다. 김수로왕 허왕후의 기념공원 시공식에 문체부장관이 참석하기로 이미 결정이 된 것을 불과 8일 전에 김정숙 여사가 초청을 받았다고 부랴부랴 일정을 바꾸고 경비를 책정해서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날아간 것이다. 친구지간 점심약속도 아니고 국빈 초청을 일주일 전에 하다니, 소위 ‘셀프초청’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무엇을 먹었기에 기내식비가 6000만 원이 넘는가.G20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아르헨티나로 가는 길에 관광을 위해서 일부러 체코에 들렀다는 논란이 있고, 이집트 방문 기간 중에 김 여사 단독으로 피라미드를 몰래 방문한 것이 뒤늦게 밝혀진 것도 논란거리였다. 노르웨이 방문 때에도 김 여사는 단독으로 뭉크미술관과 소냐왕비의 미술마구간을 비공개로 방문한 사실이 폭로되었다. 해당 노르웨이 출장은 체류 기간이 고작 48시간 남짓인데도 일정과 동선에 세계적 절경인 피오르 통과와 유명 기념관 ‘그리그의 집’ 방문 등 관광 일정이 너무 많다고 지적한 일간지 논설위원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가 패소하기도 했다. 국내에 있는 공군 2호기까지 불러서 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방문도 ‘타지마할’ 못지않게 심각한 세금 낭비 사례였다.백 수십 벌의 고급 의상과 고가의 장신구를 착용하고 수십만 원 기내식을 먹으며 세계 명소를 두루 섭렵했으니, 참으로 화려한 외유였고 기네스북에 오르고 남을 버킷리스트의 달성이 아닌가.

2024-06-13

특검과 거부권

홍석봉 언론인 특검과 대통령의 거부권이 정면충돌하고 있다. 거대 야당은 특검을 조자룡 헌 칼 쓰듯 한다. 대통령은 거부권이 전가의 보도다. 야당과 대통령이 마주 달리는 열차처럼 치킨게임을 벌인다. 야당의 입법 폭주와 대통령의 거부권행사로 22대 국회 시작부터 정치권이 혼미 상태다.1심 법원이 쌍방울 불법 대북송금과 관련,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에 대해 중형을 선고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화영 특검으로 맞불을 놓았다. ‘이재명 사법리스크’가 재점화되자 방탄 특검으로 대응하겠다는 의도다.민주당은 22대 국회가 문 열자마자 무더기로 ‘특검법’을 내놓았다.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은 22대 국회 개원 첫날 ‘1호 당론 법안’으로 각각 ‘채 상병 특검법’과 ‘한동훈 특검법’을 발의했다. 다음날엔 ‘김건희 특검법’을 꺼냈다. 22대 국회 시작 열흘 만에 5건을 발의했다. 특검법 발의는 20대 국회 때 16건, 21대 18건이었다. 18건 중 15건이 야권이 내놨다. 야당은 나아가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상설 특검법까지 추진하고 있다.정치권이 다시 무한 정쟁에 빠져들고 있다. 정치 공세용 특검과 거부권 남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거대 야당의 특검법 공세에 대통령은 거부권으로 맞서고 있다. 대통령의 거부권은 국회를 장악한 야당의 폭주에 대항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야당은 특검법으로 윤석열 정부를 몰아치면서도 삼권분립을 내세워 대통령의 거부권을 포기하라고 주장한다.윤석열 대통령은 21대 국회 마지막 날 민주유공자 특별법 등 4건의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등 임기 2년 동안 14건의 거부권을 썼다. 노태우 전 대통령 7건, 노무현 전 대통령 6건, 박근혜 전 대통령 2건, 이명박 전 대통령 1건과 비교된다. 야권은 ‘불통 정치’라는 비난을 쏟아냈다.대통령이 국회를 통과한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입법권은 국회 고유의 권한이다. 거부권은 신중히 행사돼야 하며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 윤 대통령이 취임 2년 동안 14차례나 거부권을 행사한 것은 비판 여지가 적지 않다. 쪽수로 밀어붙이는 거대 야당의 실력행사에 기인한 바가 크다. 정치의 생명인 여야 간 대화와 타협은 실종됐다. 상대에 대한 배려와 양보도 없다. 오직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목적만 돋보인다. 과거 여대야소 시절엔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은 모두 야당 단독 처리한 것이다. 대통령을 불통 프레임에 가두고 선거에 유리한 구도로 끌고 가기 위한 전략이다. 정부여당이 받아들일 수 없는 법안이 대부분이다. 야당 단독 처리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여당은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다. 총선 압승에 취한 민주당의 오만이 빚은 산물이다.민주당은 특검에 이어 윤 대통령 탄핵까지 거론하고 있다. 단독 원 구성에 이어 상임위원장 자리도 독식할 태세다. 입법 독재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삼겹살 1인분이 2만원인 시대다. 야당이 정치를 농단하는 사이 애먼 서민들만 죽어간다. 민생부터 챙겨라.

2024-06-13

최저임금 1만원 시대

우정구 논설위원 우리나라에 최저임금제가 도입된 것은 1988년으로 올해로써 36년째를 맞는다.최저임금은 저소득 근로자의 최소한의 임금을 보장하고 유지시켜 주기 위한 제도다. 정부가 노사간 임금 결정에 개입해 최저임금을 정하고 사용자가 그 이상 임금을 지급하도록 강제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임금의 기준점이 된다.그러나 임금을 더 받으려 하는 근로자와 임금 부담을 줄이려는 사용자간의 합의가 쉽지 않아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늘 진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36년동안 합의로 결정된 경우는 단 7차례뿐이다.내년도 최저임금을 결정하기 위한 최저임금위원회가 지난달부터 본격 가동을 시작했다. 내년도 최저임금제 논의의 핵심 포인트 중 하나는 시급 1만원 돌파 여부다.그러나 시급 1만원 돌파는 현재 시급이 9860원으로 1만원 턱밑까지 와 있어 1.4%만 인상돼도 시급 1만원을 넘게 된다. 지금까지의 시급 인상폭을 감안하면 1만원 돌파는 무난할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최저임금 시급 1만원은 그동안 사업주에겐 심리적 저항선으로 인식돼 왔다. 특히 영세 자영업자들에게는 1만원이 돌파된다면 심리적 충격이 클 것으로 짐작이 된다. 최근 지속되고 있는 불경기를 고려한다면 최저임금 결정 정도에 따라 사회적 파장도 적지 않을 전망이다.최근 소상공인연합회는 소상공인의 98.5%가 내년도 최저임금을 내리거나 동결을 바라고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 생산성에 비해 최저임금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설명도 덧붙였다.올 8월 법정기한까지 노사가 상생의 적정선을 찾을지 지켜볼 일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6-13

대한민국의 숨결, 독도

장규열 고문 일본은 왜 그러는 것일까. 한국 선박이 독도 주변을 조사했다고 일본 정부가 거세게 항의했다는 게 아닌가. 너무나 당연한 대한민국의 독도 영유권을 놓고 일본은 어째서 집요하게 시비를 거는지. 먼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을 마감하면서 연합국들과 일본이 체결한 조약이었다. 미국, 영국, 소련 등 48개국이 서명하고 1952년 초에 공표되었다. 한국전쟁 중이었던 우리와 북한은 어느 쪽이 한반도를 대표하는지 불분명하다고 하여 초대받지 못하였다.‘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와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도서에 대한 모든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제2조 이 한 줄에 ‘독도’가 적혀 있지 않다면서 일본은 지금껏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중이다. 독도가 일본 땅임을 인정한 증거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석은 물론 이 조약이 대한민국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우리의 구체적 입장을 분명하게 정리해야 한다.신한일어업협정도 있다. IMF 경제위기 한 가운데인 1998년에 체결되어 공표된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협정이다. 협정이 설정한 ‘중간수역’에서는 양국의 국민과 어선이 상대국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엄연히 대한민국만의 영토여야 할 독도가 중간수역에 빠진 꼴이 되었다. 독도를 두 나라가 함께 관리하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영토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배타적경제수역(EEZ)을 독도 주변에 설정하지 않고 중간수역에 넣어버린 것이다. 일본이 대한민국 영토 독도의 영유권적 지위를 흔들 수 있는 까닭을 남긴 셈이다. 중간수역에 떨어진 독도의 지위와 운명은 누가 헤아리는가. 우리가 독도를 생각하며 다분히 감정적이며 정서적인 ‘독도는 우리땅’을 부르고 있다면 일본은 조직적인 논리로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들을 모은다. 독도를 국제적 분쟁거리로 만들고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한국전쟁과 IMF사태를 기억하는 일도 끔찍하지만, 그런 와중에 ‘우리 땅 독도’의 운명이 위태로울 빌미와 움직임이 있었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유구한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우리의 섬 독도’의 운명을 흔들 수 없음을 분명하고 조리있게 세계만방에 고해야 하지 않을까. 신한일어업협정은 어업에 관한 나라 간의 약속이므로 대한민국 독도의 영토적 지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도 분명히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반도의 목소리가 적절하게 개진되지 않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이나 지극히 지엽적인 어업을 대상으로 하는 신한일어업협정이 대한민국 영토 독도의 영유권적 지위를 침탈할 수 없음을 세계에 알려야 한다.일본과는 국익의 관점에서 협력과 상생의 정신을 이어 가되, 우리의 땅 독도의 지위를 들먹이는 행태와 망언은 단호하게 짚어야 한다. 대한민국 정부와 경상북도, 그리고 울릉군에서 펼치는 다양한 독도 관련 정책과 행사들도 추후 있을 수 있는 국제적 갈등에 미리 대비한다는 점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다. ‘독도는 우리땅!’ 정서를 다짐으로 간직하면서 더욱 실증적인 논거와 실효적인 논리를 확보해야 한다. 독도는 대한민국의 영토다.

2024-06-12

윌리엄 예이츠의 무서운 예언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반골과 다혈질로 유럽에서 유명한 아일랜드 사람들. 그런 성정과는 무관하게 그 나라엔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예술가가 많다.‘더블린 사람들’로 데뷔한 제임스 조이스, ‘부조리극의 황제’로 불리는 사무엘 베케트, ‘빅토리아 시대 최고 예술가’라는 왕관을 쓴 오스카 와일드, 비단 문학 분야만이 아니다. 대중가수인 U2의 보노와 시네이드 오코너는 수천만 장의 앨범을 판매한 스타 중 스타.언급된 유명인들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아일랜드 시인이 또 한 명 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1865~1939). 159년 전 오늘은 예이츠가 태어난 날이다.19세기 영국·아일랜드 문학사(文學史)의 기린아로 기록된 그는 유년기부터 신화와 기괴한 전설 등 초현실적 주제에 집착했다. 이런 성향은 예이츠의 문학 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탐미주의에서 사실주의로 변모한 그의 시는 1923년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예술성을 인정받았고.“뛰어난 감각과 통찰력을 지닌 시인은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까지 가졌다”는 이야기가 오래 전부터 세간을 떠돌았다. 1920년. 예이츠는 마치 예언 같은 시를 쓴다.‘모든 것이 파괴되고 중심은 무너졌다/혼돈만이 지상에 만연하다/세상엔 핏빛 물결이 번지고…’예이츠는 이미 104년 전에 오늘의 지구를 바라본 듯하다.끝날 기미가 없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하루에도 수십 명의 아이들이 죽어가는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 이상 기후로 인한 폭염과 폭우 피해, 오직 돈만을 좇으며 청맹과니처럼 돌진하는 무뢰한들….‘모든 것이 파괴되고 중심이 무너진 2024년 지구’를 경계했던 예이츠의 예언이 틀렸기를 바랄 뿐이다./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06-12

다시, 뜨개질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예전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 때, 잠시의 여유 시간이 나면 뜨개질을 하곤 했다. 어느 여름방학 땐 굵은 실로 소파덮개를 짜기도 했다. 그 즈음 지역신문에 정기칼럼을 연재 중이어서 ‘뜨개질’을 제목으로 한 글을 게재하였고, 몇 년 전 펴낸 수필집 ‘고비에 말을 걸다’에 싣기도 했다.또 어느 겨울엔 긴 목도리를 짜서 식구들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한 적도 있다. 솜씨는 없으니 패턴도 없는 민무늬, 그저 짜기 쉬운 걸로 길게만 짜면 되는 것이었다. 남편, 큰아들, 작은아들 차례로 목도리를 짜서 목에 휘감아주었다. 아들들은 고맙게도 결혼 후인 지금도 그 목도리를 간직하고 있었다. 엄마가 짜 준 것이라고 며느리에게 말했던지 버리지 않고 소중히 여기는 것 같아 내심 흐뭇했다.나도 노랗고 포근한 느낌의 실로 목도리를 만들어 감고 다녔다. 학교의 친한 교수가 탐을 내어 선뜻 드리고, 다시 하나 더 짠 기억도 있다. 손주들이 넷이나 되고 막내 린이 걸음마를 떨 때쯤엔 민소매 원피스나 셔츠를 짰다. 첫 손녀 윤에게는 분홍원피스, 은에게는 연두색, 린에게는 노란 원피스를 짜 주었다. 손자인 건에게는 하늘색 민소매 셔츠를 입혔다. 그 역시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며느리들에게 미리 사이즈를 물어 적당히 맞추면 될 정도로 쉬운 뜨개질이었다. 다 짠 옷을 보내자마자 곧바로 입혀 사진 찍어 보내주니 그걸로 만족했다. 뜨개실이 부드럽지 않고 다소 거친 감이 있어선지 아이들이 입기를 꺼려했다는 후일담을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옷들은 어디로 갔는지도 궁금치도 않다. 그저 내 손으로 손주들의 옷을 짜면서 애들에게 입혀 보는 설렘을 즐기는 것으로 족했다.그리고 한동안 뜨개질을 잊었다. 바빴던가 보았다. 2년 동안의 유치원 다니던 손주들이 학교에 가자 쉬는 틈이 많아졌다. 문득 뜨개질이 떠올랐다. 집중해서 할 일이 없을 땐, 손이 심심하다. 무료하게 TV라도 보는 시간이 되면 특히 더 생각이 났다.마침 오랜 시간 비행기를 타고 여행할 계획도 있어 결국 뜨개방을 찾았다. 여행은 설레고 좋지만 비행기를 타는 게 항상 두렵고 지겹고 고역이다. 책도 읽고, 작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퍼즐을 가지고 간 적도 있지만 시간은 더디 흐르고 몸은 고되고 힘들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뜨개질이었다. 14시간이나 걸리는 비행시간을 마냥 견뎌야 할 것인데, 뜨개질이 시간 죽이기에는 최고의 소일거리가 될 것이다. 실을 사고, 적당한 소품으로 손가방을 골랐다.미리 연습 삼아 하나를 짰더니 한 3일만에 가방 하나를 완성했다. 코바늘로 짜는 거라 사이즈와 패턴도 넣고 내 맘 대로 할 수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또 풀어도 될 것이니 심심풀이로는 제격이다. 선물로도 괜찮을 것 같아 짜투리 실로 휴대폰 케이스도 두어 개 짜봤다.문득 중학교 때 생각이 난다. 아마 가정 시간에 코바늘 뜨개질을 배웠을 것이다. 스승의 날, 선생님께 드리려 만년필 케이스를 짰다. 담임선생님께는 분홍과 연두의 색으로 둥글게 말려 올라가는 줄무늬로, 작년도 담임선생님께는 흰색과 파란색으로 무늬를 짜 넣은 자그마한 만년필 케이스를 짜 드렸다. 예뻤던 여선생님들이셨는데, 어디서 무얼하고 계실까.

2024-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