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하고 혼란한 정국이 연말을 지나 새해까지 이어지고 있다. 분노와 탐욕에서 시작된 권력자의 독단이 온 나라를 통분(痛忿)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는다.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울려 퍼지는 탄식과 한숨의 물결이 끊이지 않는다. 엄동설한에 거리로 나서야 하는 이 나라 민초(民草)들의 꽉 막힌 가슴을 어떻게 풀어줄 수 있을지 숙고해봐도 뾰족한 수가 없다.
요즘 새삼스레 한나 아렌트(H. Arendt)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유대인으로 미국에서 활동한 여성 철학자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에서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주창한다. 숱한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아돌프 아이히만은 악마가 아니라, 자상한 가장이자 성실한 공무원이었다는 것이다. 사악한 인간이 평범한 얼굴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쓸쓸한 괴담(怪談).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렌트가 주장한 핵심은 생각하지 못하는 인간이 불러일으키는 파괴적이고 궤멸적인 결과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일상적으로 행하는 서명 하나가 얼마나 많은 생명을 죽음으로 인도하는지 전혀 사유하지 않았다. 그는 국가가 시키는 대로,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공무원으로서 자신의 직분을 다했을 따름이라고 겸손하게 강변했다.
생각은 말을 낳고, 말은 행동으로 나타난다고 아렌트는 설파한다. 온전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은 올바르게 행동하지 못한다고 아렌트는 주장한다. 깊은 사유와 숙고 없이 내던져지는 언어는 저급한 수준의 행동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말과 행동은 그 인간의 사유와 인식 수준의 명징한 지표이기 때문이다.
언어와 행동의 일치를 보이는 사람들은 고도의 인식과 사유의 소유자라는 공통분모를 가진다.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터져 나오는 말은 그 사람의 일상적인 생각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아무 근거 없이 발화되는 언어는 없으며,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순간에 드러나는 인간의 행동은 그가 가진 사유와 인식의 모든 것을 가감 없이 재연(再演)한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평소 의식하지 않고 뇌까리는 말은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우리의 정신세계를 담고 있다. 언론을 통해 날마다 까발려지는 권력자와 그 부역자들의 언어를 들으며 떠올리는 것은 그들의 빈곤하고 구차한 사유와 인식의 수준이다. 이순(耳順)을 넘긴 자들의 언어가 저토록 천박하고 어처구니없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호모사피엔스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인간은 육체적으로 보면 맹금류는 물론 어류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면이 많지만, 지적이고 정신적인 면에서는 최상위에 자리한다. 그래서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세계를 심화-확장하는 방편 가운데 하나가 독서와 사색이다. 이런 작업에 기초하여 인간은 사회의 지도적인 지위에 오르게 된다. 시중에 떠도는 말과 말에서 들어보거나 생각해볼 만한 문장 하나 만나기 어려운 현실에 아연실색한다. 아, 저런 자들이 나와 내 어린 것들의 ‘지금과 여기’는 물론 앞날까지 감당했구나, 하는 깊은 절망과 쓰라린 자책이 나의 가슴을 통렬하게 후벼파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