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동네 인쇄소에 갔다가 사장에게 인상 깊은 말을 들었다.
매스컴에 자주 오르는 지역 국회의원을 언급하며 ‘그 의원은 영혼이 없는 사람 같아요. 이 동네 주민이 아니라는 데도 굳이 들어와서 선거 운동을 하는데, 말 한마디 진정성이 없고 시선은 어디를 보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 동네 주민들은 어떻게 그런 사람을 찍어줄까요?’ 한다. 20년 넘게 단골로 다녔어도 인쇄 업무 이외의 대화는 한 적이 없는데 얼마나 답답하면 저런 말을 할까 놀랐고, 관찰과 표현의 섬세함에 또 놀랐다.
철학자 피터 비에리는 소설을 쓸 때는 파스칼 메르시어라는 필명을 사용한다. 그의 장편소설 ‘언어의 무게’에는 주인공 레이랜드가 독일어 책을 영어로 번역하다가 독일어에서는 쉼표가 있지만 영어에서는 빼야 하지 않을까 고민한다. 친구 버크에게 물어보니, 버크는 이렇게 대답한다. “쉼표가 중요하군. 없애면 유치하게 들리네. 짧고 건조해. …. 쉼표는 모든 것을 바꾸네. 진부하고 단순한 문장을 쉼표가 위대한 문장으로 만드네.” 피터 비에리라는 본명으로 발표한 철학책, ‘자기 결정’에서 그는 ‘글을 쓰고 나면 다른 사람이 된다.’고까지 말한다.
비단 글을 쓸 때만 언어의 무게를 살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 언어에서도 언어는 한없는 무게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현대 사회에서는 모든 언어가 글로 변환되므로 언어를 세심하게 써야 할 필요성은 더 커졌다. 글로 쓰든 말로 하든 이렇게 언어는 밖으로 표현되고 나면 그 말을 사용한 사람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니,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생각과 인격을 만든다. 그래서 조지 오웰의 ‘1984’에서도 독재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언어를 관리했다.
지난달 23일,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이 트랙터를 몰고 상경 시위를 한 전국농민회총연맹을 두고 “몽둥이가 답”이라고 해서 물의를 일으켰다.
전농의 트랙터 행렬에 대해 나중에 경찰이 허용한 것을 보면 불법이 아니지만, 설령 불법이라 하더라도 국회의원이 ‘몽둥이가 답’이라는 언어를 사용한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언어는 대상을 향하는 것이지만 결국 자신에게 돌아와 그 사람의 인격을 만든다. 윤상현 의원의 행보가 나날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은 그가 사용하는 언어 때문일지도 모른다.
해리 G. 프랭크퍼트는 ‘개소리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개소리가 거짓말보다 위험하다고 한다. 거짓말은 진리를 알고 있다는 점에서 진리를 존중하는 것이지만 개소리는 진실을 전혀 상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저자는 말하는 이가 진정성을 가지고 한 말도 진리에 대한 존중이 없으면 개소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지도층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개소리도 불사한다면 우리 사회는 혼란을 벗어날 수 없다.
한편, 옳음을 지향해가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그름에 대해 거친 감정과 극단적 언어로 대응하는 것도 경계할 일이다. 그런 대응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거니와 말하는 사람의 인격도 무너뜨린다. 사회지도층은 물론이고, 우리 모두 새해에는 언어의 무거움을 의식하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