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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향과 옳음, 그 사이

우연한 계기로 21년째 고양이를 기르고 있다. 질병으로 죽으면 다시 길냥이를 들여서 많을 때는 네 마리를 키운 적도 있고, 지금도 12년 째 세 마리를 키우고 있다. 그래서인지 반려동물 기사에는 눈이 간다. 지난 2일 광주지법 순천지원 여수시법원이 A씨가 자기 반려견을 공격한 개의 주인인 B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A씨 손을 들어주었다는 기사도 그 중 하나다. 피해견 견주는 개 치료비 80만원, 본인 손 다친 치료비 3만원에 위자료 200만원을 더해 283만원을 청구했는데 승소한 것이다. 사건 발생일이 2023년 9월이라고 하니 거의 2년 동안 재판한 셈이다. 이 기사가 특별했던 것은 A씨가 배우자와 자녀 등 가족을 모두 잃은 상황에서 반려견과 교감해와 A씨에게 개는 가족에 준하는 존재였다고 했기 때문이고, 이 판결을 반대하는 댓글이 많이 달렸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면 위자료가 2백만 원일 수는 없으므로 재판부가 개를 실제 가족이라고 간주한 것은 아니다. 개가 피해를 본 사건에 대해 견주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그런데도 여러 매체에서 뉴스로 다뤘다는 것은 위자료 지급이 여전히 특기할 만한 사건이라는 뜻이다. 댓글에는 판사가 사람과 개를 구분 못 한다는 비난부터 밴에 개 5마리 태우고 가면 버스전용차선으로 가도 되느냐는 조롱까지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들이다. 실제로 현행 민법(98조)에서는 동물을 공간을 차지하는 물건으로 본다. 그러나 소유물을 잃어버렸을 때와는 달리 키우던 동물이 죽었을 때 주인은 ‘펫로스 증후군’(반려동물이 죽은 뒤 겪는 상실감과 우울증상)을 겪는다. 그래서 이런 사고에 대해 법원도 정신적 피해 부분을 인정해준다. 위자료 산정을 둘러싼 논란에는 동물의 위상을 어디까지 인정해 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담겨 있다. 키우는 동물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것은 쉽게 결정하기 힘들다. 실제로 지난주 글쓰기 수업에서 한 수강생이 반려동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라는 주제로 쓴 글에도 이 문제의식이 담겨 있었다. 동물 학대와 유기도 문제지만 지나친 동물 사랑도 문제라는 내용이었다. 설날에 강아지 떡국을 마련하거나 집을 비울 때 강아지를 비싼 호텔에 맡기기도 하고 죽으면 장례식장에서 화장하고 납골함을 마련하는 사람들의 세태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물 해방’의 저자 피터 싱어는 사람과 동물을 다르게 보는 것을 ‘종 차별’이라며 비판한다. 피터 싱어의 목적은 동물 착취를 반대하는 것이지만 그 논리를 확대해서 동물 복지를 추구하고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무슨 문제냐고 하면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굳이 이런 이론을 동원할 것도 없이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태도는 옳음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취향의 영역이기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을 대할 때도 상대의 취향이나 관심을 존중해야 하듯이 정말로 반려동물을 사랑한다면 동물에게 인간 문명을 적용하려 드는 것은 조심해야 할 일이다. 동물들의 이익관심(interests)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피터 싱어의 말은 여기서도 유효하다.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07-06

시, 인생, 정치

‘인생은 시와 닮아서 멀리서 보면 불가해한 암호 같지만 이해해보리란 마음으로 들여다 보면 비로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알게 되지요. 나와 상월이를 한 단어로 담아보려 평생 애썼지만 모두 어딘지 넘치거나 모자라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부디 이 외롭고 다정한 아이를 시를 읽는 마음으로 바라봐주세요.’ 요즘 시청률 고공행진하고 있는 드라마 ‘미지의 서울’에서 김로사가 현상월을 위해 남긴 편지에 있는 글이다. 고아원 친구 김로사와 현상월, 두 사람은 너무나 불행한 삶 속에서도 서로를 자기 몸처럼 아끼는 사이였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김로사를 현상월이 구하고 김로사는 죽기 전 현상월에게 자기 자식을 맡기며 자기 이름으로 살기를 부탁했다. 김로사와 현상월의 애닲은 사연을 여기에 옮길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인생과 사람은 시와 닮아서 멀리서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해하려고 하면 의미를 알게 된다는 말이다. 시가 어렵다는 것을 경험해본 사람은 저 말을 이해할 것이다. 멀리서 보고 지레짐작으로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을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가족조차 이해하려들지 않으면 암호처럼 느껴진다. 정치인들을 대할 때는 더 심하다. 차라리 암호라고 생각하면 다행인데, 자기 관점에서 비난하며 지지자들까지 서로 반목한다. 며칠 전 글벗 세 명이 밥을 먹었다가 어쩌다가 대통령 선거 이야기로 주제가 흘렀는데 알고 보니 투표한 사람이 다 달랐다. 경직된 우리 사회 분위기를 생각하면 자칫 불꽃이 튈 수도 있었지만, 글벗답게 각자 투표한 이유를 말하다 보니 정치인 한 사람 이해하기가 정말 어렵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였다. 그러더니 A가 어려운 시라도 소리 내어 읽으면 이해할 수 있다더라며 시에 관심을 보인다. 그래서 요즘 읽고 있는 김혜순의 시를 소개했다. 오래전 그의 ‘불쌍한 사랑 기계’를 읽고 너무 어려워서 가까이 가지 못하다가 두 달 전부터 김혜순 시집 전작 읽기를 하던 참이었다. ‘그가 핀셋으로 눈물 한 방울을 끌어 올린다. 내 방이 들려 올라간다. 물론 내 얼굴도 들려 올라간다. 가만히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으면 귓구멍 속으로 물이 한참 흘러들던 방을 그가 양손으로 들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 집채보다 큰 눈이 방을 에워싸고 있다. 깜빡이는 하늘이 다가든 것만 같다.’ (김혜순 ‘눈물 한 방울’ 일부) “해 떠오르면 머리를 감는 여자 / 허벅지가 없는 그 여자가 / 머리칼 위로 모래를 한 바가지 퍼 들이붓고는 / 첨벙 모래 구덩이에 머리를 담그는구나 / 발도 없는 여자가 / 모래강 위에서 머리를 절레절레 헹구고 있구나···."(김혜순, ‘타클라마칸’ 앞부분) 그냥 보면 무슨 말이야 하고 지나치기 좋은 암호 같은 문장들이다. 이렇게 이상한 시가 이해하려고 다가가서 소리 내어 읽으니 신기하게도 시적 화자의 슬픔과 허무가 느껴진다. 시를 읽듯이 상월이를 봐달라는 김로사의 말처럼, 어쩌면 암호보다 더 이상해보이는 정치인이라도 한번쯤은 시 읽듯이 바라보자고 하면 너무 순진한 생각일까?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06-29

양성평등이냐 성평등이냐

정부 부처의 명칭은 조직 개편이나 정책 변화에 따라 바뀐다. 박근혜 정부 때 출범한 미래창조과학부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 변경되었다. 더 극적으로 명칭이 변경된 부처는 행정안전부다. 김대중 정부 때 내무부와 총무처를 통합해서 행정자치부라고 한 것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행정안전부로 바꾸고 박근혜 정부 때는 안전행정부로 다시 문재인 정부 때는 다시 행정안전부로 이름을 바꿨다. 이번 국민주권정부에서는 여성가족부가 성평등가족부로 변경된다고 한다. 여성가족부 명칭 변경은 이미 2022년 대선 때부터 공약으로 내세웠던 것이니 당연한 변화다. 역사를 조금 더 올라가보면 여성가족부 명칭을 변경하려는 시도는 10년 전에도 있었다. 박근혜 정부 때였던 2015년 김희정 여가부 장관이 양성평등가족부나 양성평등청소년가족부로 바꿔야 한다고 제안한 적이 있다. 2023년 김도읍 의원을 비롯해 국민의힘 소속 의원 9명이 발의한 ‘양성평등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에는 성평등 대신 양성평등으로 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의원들은 제안이유에서 ‘헌법 제36조제1항’에서 ‘양성의 평등’이라고 되어 있고, 양성평등기본법이 이미 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일부 법률에서 ‘성평등’이라는 표현을 쓰면 혼란이 생긴다면서 양성평등으로 통일하자고 한 것이다. 그러다가 작년 7월, 황유정 국민의힘 시의원이 발의한 ‘서울시 성평등 기본조례 전부개정 조례’가 통과되었다. 그 내용은 김도읍 의원의 발의한 법률안과 일맥상통한다. ‘성평등 기본조례’의 명칭을 ‘양성평등 기본조례’로 변경하고, 조례 각 조항의 ‘성평등’이라는 용어도 ‘양성평등’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황유정 시의원은 “본 조례가 헌법에 명시된 ‘양성평등’ 이념을 실현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례이기 때문에 혼선을 방지하기 위해 같은 용어로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도읍 의원이나 황유정 시의원의 발의 취지를 보면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성평등을 양성평등으로 변경할 때 성소수자들의 반발이 심했던 것을 보면 정말 개정법안이 단순히 표현의 일관성만 주장한 것인지는 의문이 남는다. 양성평등이냐 성평등이냐 글자 하나 차이지만 의미는 크게 다르다. 그런 점에서 2021년 양성평등기본법이 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주권정부가 굳이 성평등이라는 용어를 쓴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성평등이라는 용어는 차별금지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평등이라는 단어에는 남녀뿐 아니라 동성애까지 포함한 다양한 성이 포함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2007년 처음 발의된 차별금지법의 주요 내용 중 하나가 동성애 차별 금지다. 이 법안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논의를 거듭했지만 통과되지 못했다. 이번 여성가족부 명칭 변경 움직임에 대해서도 기독교에서는 성평등가족부라는 명칭은 차별금지법을 관철하려는 것이라면서 양성평등가족부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헌법에 정해진 평등 이념에 따르면 모든 차별은 금지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굳이 양성이라고 제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06-22

그렇게 설명하면 됩니다

인터넷의 알고리즘은 기가 막히다. 최근 경험한 사연은 이렇다. 갑자기 코쿤과 박나래가 대화하는 영상이 떴다. 업로드된 날짜를 보니 3개월 전에 방송된 프로그램이다. 코쿤은 ‘소식좌’로 유명한 사람이라 그의 영상이 뜨면 내 두둑한 살집을 생각하며 즐겨 본다. 박나래가 코쿤에게 평소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화를 참는 건지 화가 안 나는 건지 묻는다. 그러자 코쿤은 제대 이후 한 번도 화낸 적이 없다면서 화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서 화를 안 낸다고 한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코쿤 같은 사람이 현실에 많은 것은 아니다. 며칠 전 민주당에서 새 원내대표 선출이 있었다. 후보로 나온 김병기 의원이 아들 취직 과정에 부당한 압력을 가한 적이 있다는 뉴스가 나왔다. 언젠가 김병기 의원 지역구 주민에게서 그를 둘러싼 논란을 들은 적이 있어 지인의 sns에 사실 확인이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댓글을 달았다가 모르는 사람에게 봉변을 당했다. 의혹이 있다면 설명하면 될 일이지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난 후 바로 코쿤 영상이 뜬 것이다. 이런 일이 있고 나니 지난달 대선 후보 2차 토론 때 인상적인 장면이 떠오른다. 이재명 후보가 이준석 후보에게 12∙3 계엄 때 국회에 들어와 의결하지 않고 왜 밖에 있었느냐면서 정말 의결에 참여할 의지가 있었는지 물었다. 이에 대해 이준석 후보는 이미 의결 시간이 5분 남짓밖에 안 남았고 의결 정족수가 채워졌다는 소식을 받았기에 군인들이 의원을 막았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들어가지 않았다고 상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이재명 후보가 ‘그렇게 설명하면 됩니다’하고 받아들이는 장면이다. 이 말에는 함축적인 의미가 있었다. 이준석 후보가 토론에 임하는 태도가 사뭇 화난 듯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대선 후보 3차 토론회에서 했던 이준석 후보의 발언 하나가 삐-처리되었고 이준석 의원을 제명하라는 청원이 13일 오후 기준 56만 명이 넘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청원 143만 명에 이어 역대 2위라고 한다. 마감일이 내달 4일이라 청원인 숫자는 더 늘겠지만 현재 56만 명으로도 국민적 분노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본인도 그럴 리가 없다고 놀랐다고 한다. 나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제명 청원에 찬성한 것은 그 발언 하나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3회에 걸친 토론 내내 눈을 부릅뜨고 화난 얼굴로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이 그 발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설명하기보다 분노하기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나와 입장이 다른 상대를 만났을 때 자칫 잘못하면 그 분노가 종이에 기름 부은 듯 쉽게 불타오른다. 그러나 분노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옳음에 대한 신념보다는 다른 이유가 도사리고 있는 경우도 많다. 언젠가 정치적 입장이 다른 친구를 격한 말로 비난했다가 내 마음속 질투를 발견하고 낯이 뜨거웠던 적이 있다. 설명하기를 선택하려면 코쿤처럼 생각하기와 함께 내 마음 돌보기도 필수다.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06-15

모순의 역설

선거가 끝나자마자 SNS에서 21대 대통령의 최우선 과제가 무엇인지 투표하라는 광고가 떴다. 나는 망설임 없이 경제 살리기를 선택했는데 투표 결과를 보니 2위였다. 대통령의 생각은 무엇일까 호기심을 가지고 취임식을 기다렸다. 대통령 선서의 시간, 취임사의 맨 앞에 ‘벼랑 끝에 몰린 민생을 되살리고, 성장을 회복해 모두가 행복한 내일을 만들자’는 말이 나온다. 뒤이어 ‘정쟁 수단으로 전락한 안보와 평화, 무관심과 무능 무책임으로 무너진 민생과 경제, 장갑차와 자동소총에 파괴된 우리의 민주주의를 다시 일으켜 세울’ 시간이라면서 공존과 화해와 연대를 호소하며 모든 국민을 아우르고 섬기는 ‘모두의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중도 보수와 실용주의를 강조하는 이재명에게 지나치게 우클릭 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과 불안의 눈초리를 보낸 사람들에게는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선언이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 타당성은 검증되지 않았지만, SNS에서 국정운영 최우선 과제 투표 결과 1위가 내란 극복인 것을 보면, 민생을 최우선으로 강조하는 것이 불만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국민의 이해관계가 모두 다른데 모두의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의회를 마비시키려 했던 20대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분명한 국헌 문란이므로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과제이다. 당나라 때 시인 한유는 문장이란 모름지기 ‘진리’를 실어야 한다면서 ‘가장 좋은 문장은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문장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 좋아하는 문장’이라고 일갈하였고,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공자 역시 마을 사람 모두에게 칭찬받고 싶어하는 사람을 ‘향원’이라고 하면서 그런 사람이야말로 ‘공동체를 살리는 진정한 사랑’을 해치는 도둑이라고 성토하였다. 공자는 심지어 공동체를 해치는 사람과는 같은 나라에서 살 수 없다며 멀리 유배 보내야 한다고 단호하게 내쳤다. 그러고 보면,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할 대통령이 모든 사람의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실제로 통합과 화해를 강조하는 취임사 영상 댓글에는 조롱과 혐오의 표현이 달리고, 국민의힘과 개혁신당은 통합과 화해가 빛깔 좋은 수사일 뿐이라며 날을 세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나 전 여당의 김문수 후보가 40% 이상의 득표율을 얻은 현실에서 국헌 문란에 대한 책임 규명을 제일 서두르는 것처럼 보인다면 야당 탄압이니 독재니 하면서 갈등이 증폭될 것이다. 그러나 경제 각료 인선을 가장 먼저 서두르는 이재명 대통령의 모습에 국민의 기대도 커지고 있다.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말이 있듯이, 가능하면 더 많은 국민에게 지지받아야 내란 종식도 원만하게 이루어진다. 민생이 안정되면 국민은 지지한다. 내란 책임을 묻는 궁극적 목적도 국민 화합과 행복이다. 성별, 나이별, 지역별로 갈기갈기 찢어져 서로 괴물 취급하는 일은 누구에게도 도움 되지 않는다. 국민주권 정부는 경청과 설득을 엔진으로 삼아 민생 살리기에 힘쓰면서 내란 종식에 힘써주기를 바란다.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06-08

더하기 빼기를 잘하자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선택의 순간을 자주 맞닥뜨린다. 작게는 오늘 무엇을 먹을까, 메뉴를 결정하는 일부터 크게는 대학 진학이나 결혼 등 개인적으로 의미가 큰 선택도 있다. 그런가 하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선출 같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선택도 있다. 그러나 선택의 순간에 우리가 얼마나 합리적 사고로 결정하는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 경우만 해도 잘못된 선택으로 시간 버리고 돈 버린 경우가 셀 수가 없이 많다. 대학원에 진학할 때도 졸업 후 진로도 생각하지 않고 결정하고, 결혼할 때도 노래 잘하기에 지나치게 점수를 많이 주었다. 모두 감정에 치우쳐 하나만 생각하고 선택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선택을 할 것이다.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떤 항목에 지나치게 점수를 후하게 배분하고 다른 항목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런 조짐이 많이 보인다. 지나치게 감정을 이입해서 지지하는 후보는 맹목적으로 숭배하거나 반대하는 후보에게는 적개심을 품기까지 한다. 어떤 유권자는 자기가 반대하는 후보자 유세장에 트럭을 몰고 가서 덮치고 싶다는 글을 SNS에 올리기도 했다. 게다가 주제별로 세 차례 토론이 유권자들의 알 권리를 보장해주지 못하고 일부 후보의 자극적인 질문은 대선 토론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문제 제기가 나올 정도로 후폭풍이 큰 상황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유권자들은 차분하게 대응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하는 일은 헌법 제4장 1절 66조에 있다. ①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며,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한다. ② 대통령은 국가의 독립ㆍ영토의 보전ㆍ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 ③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 중국 고전 ‘대학’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의 단점을 알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의 장점을 알아서 합리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대통령이 수행해야 할 일을 염두에 두고 후보들의 장단점을 비교해 보자. ‘더하기 빼기’ 기법은 장단점 비교에 도움이 된다. 이 방법을 개발한 사람은 에드워드 드 보노라는 의사인데, ‘수평적 사고’라는 용어를 만드는 등 사고력 향상 방법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더하기 빼기 기법’은, 정확하게 말하면 PMI(더하기 빼기 흥미)라서 항목이 하나 더 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 같은 명확한 선택지가 있는 경우에는 흥미 항목을 빼도 좋다. 먼저 자기가 적극 지지하는 후보와 경쟁하는 후보 두 사람을 선택한다. 그다음 후보들의 주요 정책을 뽑은 후 각 정책에 대해 긍정하는 근거와 부정하는 근거를 찾아 10점 척도로 점수를 매긴다. 마지막으로 긍정적인 면은 더하기 점수, 부정적인 면은 빼기 점수를 부여한 다음 합계를 낸다. 옷 하나, 휴지 하나를 사도 매장마다 브랜드마다 가격과 품질을 꼼꼼히 비교한다. 5200만 명의 삶이 달린 대통령을 뽑는 일이니만큼, 더하기 빼기를 잘해서 능력 있는 대통령을 뽑자.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06-01

사람과 정책, 무엇이 중한가

대통령 선거일이 다가온다. 유권자가 대통령 후보의 정책을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은 오늘부터 딱 7일 남았다. 유권자들의 알 권리를 위해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가 대통령 후보들의 토론회를 주관하고 있고, 이를 지상파 3사에서 분야별로 각 두 시간씩 방송하고 있다. 지난 18일에는 저성장 극복과 민생경제 활성화, 대외 통상 등 경제 분야를 주제로 1차 토론회가 열렸고, 23일에는 사회 갈등 통합 방안, 초고령 사회의 연금 및 의료개혁, 기후위기 대응 등 사회 분야 토론이 진행되었다. 마지막 3차는 27일에 정치개혁, 개헌, 외교안보 등 정치 분야를 토론할 예정이다. 토론회가 끝나면 지지율에 변동이 생기니 각당 후보들은 두 시간 동안 모든 정책을 펼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대선 토론회가 과연 얼마나 유권자의 기대에 부합했는지는 의문이 많이 남는다. 특히 2차 토론회에서는 인신공격과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가 난무했다. 이 두 가지는 대학에서 토론 수업을 할 때 강조하는 것이다. 인신공격이란 정책과 큰 관련 없는 개인 신상을 공격하는 것인데 토론의 본질을 흐린다. 아무래도 정책 평가는 어렵지만 사람 평가는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다. 허수아비 공격이란 상대방 주장을 왜곡하거나 과장해놓고 비판하는 것인데 이것은 토론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현대의 문제를 분석하면서 고전을 인용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고전의 문장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고, 옳다 하더라도 아전인수격으로 적용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중용’에서 가장 중요하게 주장하는 가치가 지극한 정성인데, 말 자체는 흠잡기 어렵지만 지금 여기에서 순수한 진정성인지 무엇인지 판단하기는 자기이해가 반영될 여지가 많다. 그럼에도 고전은 짧은 경구는 갈등을 해소하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된다. 공자는 ‘문왕이나 무왕 같은 위대한 정치가들의 정책이 책에 다 있지만, 그것을 실천할 사람이 있어야 제대로 시행된다’고 했는데, 이 말은 정책 자체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사람이란 추상적이거나 사적인 인격이 아니고 그 정책을 실천할 공적이고 구체적인 역량을 말한다. 정책 실천 역량과 높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인 신상을 비판하는 것은 정책토론만으로도 부족한 두 시간을 낭비하고 유권자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도자가 아무리 자신을 선하다고 주장해도 백성에게 실질적인 효과로 나타난 것이 없으면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는 대목에서는 무릎을 치게 된다. 대선 후보들이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주장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국민에게 신뢰를 얻을 수 없다. 그동안 그들이 한 행동이 국민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는가가 대통령 자격을 판단하는 가늠자가 되어야 한다. 대선 후보를 선택하는 것은 이념으로 해서도 아니고 인상 비평으로 해서도 안 된다. 이제 남은 일주일 동안 우리 모두 부수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을 구분하고 어떤 정책이 국가와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지, 그 정책을 실천할 능력이 얼마나 있는지 냉철하게 분석해보자.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05-25

고맙습니다 대신

지난 15일 제44회 스승의 날, 교사들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은 ‘고맙습니다’라는 기사가 여러 매체에 실렸다. 이런 결과가 나온 설문 문항을 찾기 위해 검색해보니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가 여러 번 반복적으로 조사했고, 해를 바꾸어 같은 결과의 기사가 여러 개 뜬다. 교총이 어떤 의도와 맥락으로 이런 조사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올해도 교총은 교사 5천 591명을 대상으로 교원 인식 설문 조사를 했다. 그러나 교사들이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듣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교총 조사 결과에 의하면, 학생이 교육활동 중 휴대전화로 몰래 녹음하고 촬영할까 봐 걱정하는 교원이 약 86%에 달했다. 다른 교원단체인 교사노조가 올해 8천 25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 중 교사가 사회에서 존중받느냐는 질문에도 약 65%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스승의 날 유래를 보니, 1958년 강경여자중고등학교 청소년 적십자 단원들이 병환에 있는 선생님을 위문하고 퇴직한 스승을 위로하는 활동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후 은사의 날로 기념하다가 1965년 세종대왕 탄신일인 5월 15일을 스승의 날을 정했고, 1982년에는 법정 기념일로 정했다. 그러나 스승의 날을 법정 기념일로 제정하고 기념해도 교권 추락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실제로 학생에게 휴대폰 사용을 지도하다가 폭언을 들은 교사가 34%가 넘는다는 교총의 조사에서 보듯이, 스승의 날 제정 44년이 지난 지금 교권 추락을 호소하는 교사는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교사가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받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한편, ‘고맙다’의 사전적 의미는 ‘남이 베풀어 준 호의나 도움 따위에 대하여 마음이 흐뭇하고 즐겁다’이다. 교육 활동은 교사가 당연히 해야 할 본분일 뿐, 호의나 도움은 아니다. 그런데도 교사들이 고맙다는 인사를 받고 싶은 데는 이유가 있다. 지금 교육 환경은 교사들이 교육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 교사노조와 전교조 설문에서 모두 비슷하게 과도한 민원이나 행정업무 등으로 사직을 고민하는 교원이 60%에 육박할 한다고 나왔다. 그러니 잘 가르치기 위해 준비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잘 가르치려고 애쓰다 보면 누구라도 고맙다고 인사해주면 고마울 것이다. 교원이 교육활동을 하는 것은 맡은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교사 자신이나 학생 모두 교원을 ‘스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괜히 교원을 스승이라고 추켜세우는 것은 호칭 인플레로 교사에게 과도한 부담만 지울 뿐이다. 실제로 2024년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에서 학생들에게 바라는 교사의 모습은 교과를 잘 가르치는 것을 우선순위로 꼽았다. 학생들 마음을 잘 이해해주는 선생님도 원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잘 가르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다. ‘스승의 날’ 같은 형식적인 기념행사는 교사와 학생 모두를 민망하게 한다.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 될 수 있도록 교육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면 학생들은 저절로 선생님을 좋아하고 존경할 것이다.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05-18

정치인들이여, 책을 읽어라

지난 금요일 내가 맡은 한 수업에서 어느 수강생이 ‘수업이 너무 좋아요. 머리가 명징해지는 기분이 들어요.’ 한다. 그 수강생은 지난 10년간 종교 활동만 했더니, 인간관계나 생각하는 것이 너무 좁아져서 내 강의를 신청했는데 도움이 많이 된다고 한다. 실제로 새로운 것을 접하면 뇌파가 달라져서 학습, 기억, 창의력 등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나 역시 이런 효과를 얻고 싶어 틈나는 대로 다른 분야를 공부한다. 올 5월에는 시 수업 두 개를 신청했다. 한강 작가의 초기 시를 읽는 수업과 김혜순 시집 12권을 읽는 수업이다. 두 작가의 시는 내게 난공불락의 요새라서 용기가 필요했으나 과감히 신청했다. 김혜순 시집 전작 읽기를 이끄는 S 시인은 시를 읽을 때는 표현에 주목하라면서 낯선 표현을 경험하는 것이 시를 읽는 효과라고 한다. 그동안 어려운 시들을 보면 도대체 왜 이런 시를 쓰고 읽는지 궁금했는데, 김혜순의 시를 같이 읽으며 낯선 표현에서 생각이 확장되는 경험을 하고 있다. 6∙3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다. 여당이었던 거대 정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 과정을 보니 이해 안 되는 일이 많다. 정치 경력이 많은 사람도 있고, 서울대 졸업에 법조인 출신까지 이른바 ‘넘사벽’ 스펙의 소유자들이 후보로 나섰는데, 경선 토론회 수준이 기대 이하다. ‘왜 키높이 구두를 신으십니까?’ ‘내 지지율이 당신보다 7% 앞서니 사퇴하시죠.’, ‘당신은 전과 7범인데 다른 당 후보를 비난할 자격이 있습니까?’ ‘나는 일론 머스크와 같은 대학을 나왔습니다.’ 같은 말들이 나온다. 그 정당의 비대위는 후보 선출 후 비상계엄에 책임이 있는 외부 인사를 데려와 정식 절차를 밟은 후보와 바꾸려고까지 했다. 결국 실패했지만 그런 비상식적인 일을 했다는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평소 정치에 관심 많은 지인은 정치판에 들어가면 다 저렇게 되는 것 같다고 한다. 상당히 그럴듯하다. 매일 만나는 사람과 생각하는 일이 한정되어 있으니 자기 집단의 이익에만 매몰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자니, 바츨라프 하벨(1936~2011) 같은 정치인이 그리워진다. 하벨은 체코의 정치가인데, 극작가이자 수필가이도 하다. ‘녹색 평론’에서 하벨의 글을 읽고 무한 감동에 빠졌던 일이 생각난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가 두 나라로 분리되기 전 마지막 대통령을 역임했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뉜 후 대통령 출마를 고사했지만, 연방 의회 의원들의 만장일치 의결로 추대되어 체코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이런 일이 있게 된 것은 그가 시인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정치를 하든 종교를 믿든 어느 한 가지 일만 오래 하다 보면 편협해지고 어리석어진다. 새로운 공부를 통해 주의를 자주 환기해주어야 한다. 주의를 환기하는 데 책만큼 좋은 것이 없다. 책을 읽어야 인식이 확장되고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중에 시는 시간으로 보나 효과로 보나 가장 가성비 좋은 방법이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정치인들에게 시 읽기를 권한다.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05-11

고전으로 현실을 비판할 수 있나요?

비상 계엄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고 파면된 윤석열 전 대통령이 한남동을 떠나던 날, 많은 언론에서는 전 대통령이 국민에게 사과 한마디 없었다고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법을 어겼으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주면 그만이지 왜 사과를 기대하거나 요구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회 고위층의 잘못은 매우 계획적인 데다 자기가 옳다는 신념에 가득 찬 경우가 많아서 사과할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SNS에 올리니, 그들이 인간임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일 거라는 답글이 달렸다. 그 일이 있고 며칠 후 SNS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인간이 아니라는 논지의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종교학을 전공하고 스테디셀러를 많이 낸 문화 셀럽이다. 그 교수는 앞뒤 아무 맥락 없이 맹자의 사단의 마음을 소개하며 부끄러움을 알아야 사람이라고 강조하더니 뒤이어 역시 맹자의 ‘방벌 사상’도 소개했다. 방벌 사상이란 임금답지 않은 임금은 임금이 아니니 그를 죽이는 것은 임금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잘못을 하고도 사과하지 않는 정치인들을 비판한다는 것은 독자들이 다 알 수 있었다. 두 게시글에는 ‘좋아요’가 수백 개 달렸다. 고전을 연구하는 많은 인문 지식인들은 현실 비판의 근거로 고전을 곧잘 인용한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고전에 조예가 있는 교양인들도 개인적인 공부를 넘어 고전이 현실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한다. 때로는 어느 수강생의 말처럼, 고전을 현실에 접목하려는 시도가 무력하고 공허한 점도 있다. SNS의 글쓴이가 주장하는 ‘부끄러움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 ‘임금답지 못한 사람은 임금이 아니다.’, 이런 말은 지식인의 탁상공론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기득권을 옹호하는 논리로 사용될 때는 고전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고전을 읽는다. 고전은 상당히 우회적이어서 삶의 지침을 직접 제시해주거나 현실의 문제를 바로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새로운 생각의 원천인 것은 틀림없다. 중국의 인문학자 양자오도 ‘시경을 읽다’에서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는 현대와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오히려 더 새로운 인식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새로운 인식이 얼마나 실천으로 이어질지는 각자 사정에 따라 다를 뿐이다. ‘대학’과 ‘중용’에는 ‘나의 마음을 미루어서 남의 마음을 헤아리라’는 ‘충서’가 표현을 바꾸어 거듭 나온다. 군주가 실천해야 할 최우선의 임무가 ‘충서’라는 뜻이다. 국민에게 총을 겨누면 안 되고 자연 재해나 사회적 재난을 당한 국민에게 진심 어린 보호를 제공해야 하는 것은 군주 자신을 향한 마음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충서’의 마음이 없는 지도자를 지지하는 것은 전도된 인식이다. ‘중용’의 다른 구절에서는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문왕과 무왕의 통치 철학이 서책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을 실천할 사람이 없으면 소용없다’며 인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현대 사회의 시민은 모두 정치인이다. 지도자에게 충서의 마음이 없을 때라도 바른 인식을 가진 시민 정치인이 많아지면 바른 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

2025-04-27

가족 요양을 다시 생각한다

주변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는 분들이 많다. 보수는 많지 않지만 상대적으로 취업이 쉬워서 그런지 5,60대가 많이 지원한다. 지원자의 나이가 5,60대라도 기대수명이 길어져서 부모님이 8,90세로 살아계신 경우가 많아 부모님 병간호를 위해 자격증을 따는 분도 많다. 부모님이 집에서 투병할 때 자식에게 간병비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차피 부모님을 돌봐야 할 상황이라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추세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아픈 가족을 돌보는 일을 가족요양보호사라는 이름으로 공식적 제도에서 허용하고 있다. 그런데 며칠 전 ‘70대가 노화의 갈림길’이라는 와다 히데키의 책에서 가족 요양을 반대하는 주장을 보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와다 히데키는 일본의 노인 전문 정신의학과 의사로, 수십 년간 많은 환자를 진료하면서 발견한 내용을 책으로 펴낸 작가이기도 하다. 검색해보니 한국에 번역된 것만도 30권이 넘는다. 몇 권 읽어보니 중복되는 내용도 많지만 책마다 새로운 정보와 주장도 있어서 배운 것이 많다. 치매 같은 병에 걸렸을 때 대처하는 법은 물론이고 어떻게 나이 들어갈 것인가에 대해 다른 노인 의학 전문가들과는 다른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노년들에게 운전을 권장하는 것도 새로웠다. 다른 하나는 가족 요양에 대한 신중한 태도다. 돌봄을 받는 사람이나 돌보는 사람이나 모두 피폐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올해 1월 발간된 MSD 매뉴얼을 보니, 부모와 자녀가 아프면 본인이 간병하고 싶어하면서도 본인이 아플 때는 가족에게 부담 줄까 전문 간병인을 쓰고 싶다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고 한다. 그러나 간병하는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은 모든 사람이 비슷할 테니 아픈 부모나 자녀도 가족 요양을 원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는 가족 요양을 긍정적으로 보는 모양새다. 아무래도 남에게 맡기는 것보다 가족이 더 좋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현재 너무 열악한 가족요양보호사의 처우를 개선하여 제도를 보완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가족 요양일 때는 1일 60분과 90분만 인정되는 데다 급여는 대체로 최저시급에 가까워서 월 20일 기준 60분일 때 20만 원을 조금 웃도는 정도다. 일반 요양사에게 지급되는 중증 환자 추가 수당도 없다. 하지만 가족 요양에 조심스러운 와다 히데키의 주장도 귀담아들을 만하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싼값으로 간병을 떠맡기는 모양새가 되면 가족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특히 나이 든 사람이 감당하는 가족 간병은 더 위험하다. 한국간병인협회에서도 가족 간병을 선택할 때는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맞벌이 부부의 육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서울시를 비롯한 일부 지방자치단체가 ‘조부모 돌봄 수당’ 제도를 도입했다. 이 역시 돌봄의 책임을 조부모에게 과도하게 지운다는 비판이 있다. 가족이 가장 좋은 돌봄의 주체이기는 하다. 그러나 가족에게 심한 부담을 지우면 가족을 파괴할 수도 있다. 사회적 돌봄을 더 고민할 때다.

2025-04-20

권한대행의 본질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한덕수 씨가 며칠 전 헌법재판관 세 명을 전격적으로 임명했다. 국회 추천 몫 마은혁 재판관 임명은 이미 헌재에서 임명 안 하는 것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은 사안이라 문제가 없다. 그러나 4월 18일 임기가 만료되는 문형배, 이미선 두 재판관 후임으로 이완규 법제처장과 함상훈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임명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이 크다. 비판 측에서는 두 사람의 과거 이력도 문제 삼고 있지만, 핵심은 권한대행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3월 24일 한덕수 탄핵소추 기각 판결문에도 이 문제가 담겨있다. 최형식, 조한창 두 재판관은 각하 의견을 냈는데, 그들은 헌법재판관 임명권이 대통령의 권한이므로 이 문제로 탄핵소추하려면 소추안 발의와 의결에 대통령에 준하는 정족수를 채워야 한다면서 절차에 문제가 있다고 의견을 낸 것이다. 이 판결문을 보고 언뜻 조선시대 예송이 떠올랐다. 예송이란 효종이 사망하자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가 효종을 위해 어떤 상복을 입을 것이냐로 서인과 남인 두 정파가 대립한 사건이다. 이 논쟁의 핵심은 효종의 본질을 왕으로 볼 것인가 둘째아들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역할을 중시하여 효종의 본질을 왕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한덕수 탄핵소추 판결에서도 각하 의견이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권한대행이 대통령 지명권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권한대행의 역할은 효종의 지위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일단 효종은 공식적인 왕이었고 업무가 분명했으며 종신직이었지만, 대통령 권한대행은 공식적 직함도 아니고 권한대행의 권한과 한계에 대한 명확한 규정도 없으며 임시직이다. 권한대행의 애매한 포지션을 해결하기 위해 제20대 국회에서 민병두 의원 등 41명이 ‘대통령의 권한대행에 대한 법률안’을 발의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방법도 최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권한대행 체제는 비상시에 발생하는데, 권한 범위를 명문화했다가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명문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관행을 보면 권한대행의 본질이 무엇인지 추론할 수 있다. 먼저, 권한대행 경호 인력은 대통령에 비해 현격히 적고 국무총리를 경호하는 세종시 경찰청에서 맡는다. 집무도 본래 업무 보는 곳을 근거지로 두고 대통령 업무를 볼 때만 대통령 집무실에 방문한다. 기재부장관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때 발생한 제주항공 사고와 산청 산불 처리 업무는 기재부에서 담당했다. 외교에서도 권한대행은 한 나라의 수장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다. 권한대행이 명목상으로는 대통령의 권한을 가졌지만 국무총리가 본질인 셈이다. 결론적으로 한덕수 국무총리가 대통령 몫의 재판관 두 명을 임명한 것은 월권이다. 탄핵소추 같은 중요한 상황이 있는 것도 아닌 데다, 이미 2024년 10월 17일 국회 몫 3명의 재판권이 임기 만료된 후부터 정계선, 조한창 재판관이 임명된 12월 31일까지 6인 체제로 운영되었으니 대통령 지명 몫 헌법재판관 임명이 급한 것도 아니다. 신임 헌법재판관 지명은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에게 맡겨야 한다.

2025-04-13

헌법재판소의 판결 범위는 어디까지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4월 4일 온 국민이 가슴 졸이며 기다리던 대통령 탄핵소추에 대한 판결이 나왔다. 헌재가 있는 안국 역을 비롯해서 근처 광화문역까지 지하철 운행을 통제하고 365일 영업하는 교보문고까지 휴업하는 등 만일에 있을 사태를 대비해서 그런지 다행히 큰 사고는 없었다. 법 조항으로 볼 때 이번 대통령 탄핵소추안 판결은 단순한 사안이다. 12·3 비상 계엄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로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되어 행정 및 사법 기능의 수행이 현저히 곤란한 상황이 현실적으로 발생하여야 한다’는 조건에 전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번 판결에서 8명 재판관 모두 탄핵소추 5개 사유에 대해 만장일치로 인용했다. 그러나 2월 25일 최종 변론 후 30일이 훌쩍 넘어도 판결이 나오지 않자 재판관의 정치적 성향과 인맥을 문제 삼으며 헌재의 존재 이유를 의심하는 주장이 나왔다. 국민이 선출한 국회에서 3분의 2 동의를 얻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임명직 재판관 몇 명이 결정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이제 대통령 파면 판결로 이런 논란은 잠잠해졌지만, 나는 이것을 계기로 헌법재판소의 역할을 숙고하게 되었다. 유시민을 비롯해서 탄핵 찬성 쪽 국민들이 판결문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꼽은 ‘국민의 신임을 배반했다’는 대목에 대해 나는 이것이 헌재가 판결 기준으로 삼을 항목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 것이다. ‘국민의 신임 여부’라는 근거가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가까이는 한덕수 총리 탄핵 판결에서부터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노무현, 박근혜 두 대통령의 탄핵 판결에도 나온다. 2004년 헌재는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심판 ‘기각’ 결정문에서 대통령의 행위가 헌법 수호의 관점에서 벗어나거나 국민의 신임을 배신해 자격을 상실한 경우라고 했고, 이것은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인용’ 결정문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러나 국민의 신임 여부가 헌재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긍정적 효과보다 부정적 기능이 더 많다. 이런 식으로 되면 국민의 신임 배반을 판단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오남용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한덕수 탄핵소추만 보아도 재판관을 임명하지 않은 것이 위헌이라는 의견이 5명이었는데도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 4명인 것은 위헌을 해도 된다는 면죄부를 주었다는 비판을 벗어나기 힘들다. 작년 12월 18일 어느 매체에서 언급했듯이, 헌법재판의 본질이 ‘정치적 사법 작용’이라면, 심각한 문제다. 국민의 신임 여부를 판단하는 지표는 ‘여론’이니, 찬반 여론전에 국민의 반목만 심해진다. 대한민국 헌법 제65조에서 탄핵은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라고 규정하고 있을 뿐 ‘국민의 신임 배반’이라는 조항은 없다. 그러니 파면 여부를 결정할 중요한 키는 국민의 신임이 아니라 위헌이어야 한다. 앞으로 헌재는 피소추인의 헌법 조항 위반 여부만 신중하고 신속하게 판단해서 국론 분열과 국력 낭비를 줄여주기 바란다.

2025-04-06

네 편 내 편을 넘어서는 법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지난주 수요일 이재명의 선거법 위반 재판 결과가 나왔다. 결과가 나오기 하루 전까지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재명에게 재판 결과에 승복하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냈다. 그러나 이재명에게 무죄 판결이 나오자 국민의힘 측은 태도가 돌변하여 재판부에 승복하라던 외침을 하루만에 뒤엎고 ‘판사가 우리법연구회 출신이라면서 판사의 정치 성향에 따라 판결하면 안 된다’고 소리를 높이며 재판부를 향해 연일 비난의 날을 세우고 있다. 애당초 국민의힘은 재판부가 국민의힘에 유리하게 판결할 것이라고 확신한 듯하다. 그런 기대를 할 만도 한 것이 이재명 재판을 맡은 재판부가 이미 손준성과 최강욱을 국민의힘에 유리하게 판결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손준성은 윤석열 검찰 고발 사주 의혹 당사자로서 더불어민주당에게 탄핵소추되었는데, 재판부는 2024년 손준성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고, 조국 아들 허위 인턴 증명서로 고발된 최강욱에게는 유죄 판결을 내려 의원직을 상실하게 했으니 말이다. 재판부 판결 요지를 보면 ‘다의적 해석이 가능한 발언을 다른 합리적 해석을 배제한 채 공소사실로만 해석하는 것은 법리에 어긋나며,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윤석열 대통령 구속을 취소할 때와 같은 논리라고 해도 소용이 없다. 같은 논리를 자기편에게 적용하면 훌륭한 판결이고 상대편에게 적용하면 정치 성향에 따른 판결이라는 비난이 멈추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개인 간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내 말에 동의하면 좋은 사람이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편들면 나쁜 사람이라고 낙인찍는다. 이렇게 내 편에 유리하면 옳고 상대편에 유리하면 틀렸다는 내로남불 논리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지금부터 2400여 년 전에 살았던 중국 사상가 장자가 쓴 책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장자는 A, B 두 사람이 논쟁을 벌일 때 A가 이겼다고 해서 정말 A가 옳고 B가 옳은 것인가 문제를 제기하면서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제3의 심판관을 요청한다고 해서 그가 정당한 판결한다는 보장이 없다고 한다. ‘그 사람이 우리 둘 중 한 사람과 생각이 같으면 공정할 수 없고, 우리 둘의 생각과 다르다면 그 역시 공정할 수 없다’며 심판관의 공정한 판결에 회의적이다. 그렇다고 장자가 진리가 없다거나 내 편 네 편 합의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는 겸손으로 자기중심적 이해와 시비를 넘어서서 ‘도추’라는 최선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다만, 이런 방법은 너무 추상적이고 시간이 걸린다는 문제가 있다. 오히려 미국의 정치학자 존 롤스가 말하는 ‘무지의 베일’이 더 현실적이다. ‘무지의 베일’이란, 사람들이 자신의 현재 상황을 전혀 모른다고 가정하는 것인데, 이런 가정을 하면 사람들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정책을 선택하고 그래서 합의점 도출이 쉽다고 한다. 지금으로서는 그나마 무지의 베일에 가까운 쪽은 시민이다.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중심축으로 잘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 깨어있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

2025-03-30

얼마나 더 속아야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금요일에는 헌법재판소가 있는 동네에 강의하러 간다. 이번 학기에는 ‘세속 윤리와 하늘 도리의 조화, 중용’을 읽고 있다. ‘중용’이 고전 반열에 오른 지 어림잡아 2천 년쯤 되니 매시간 뜻깊은 문장을 만나지만 지난주 수업에서는 시국과 맞물려 특별히 더 뜻깊은 내용이 나왔다. 바로 6장에 이런 말이 나온다. ‘공자가 말하셨다. 순임금은 아마도 크게 지혜로운 사람일 것이다. 순임금은 묻기를 좋아하여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말 살피기를 좋아했고, 나쁜 말은 덮어서 힘을 못 쓰게 하고 선한 말은 드러내어 그 양쪽 끝을 잡아 그 가운데 말을 백성에게 사용했으니, 그것이 곧 순임금이 된 이유이다.’ 이 문장이 인상 깊은 이유는 순임금의 행동 때문이다. 그는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반드시 주위 사람에게 묻고 그 대답을 잘 살펴서 좋은 말만 채택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순의 한자어 舜은 ‘충실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뒤이어 나오는 ‘양쪽 끝을 잡아 그 가운데 말을 정책으로 삼는다’는 대목이 더 중요하다. 많은 해설서에서는 양쪽 끝을 선과 악, 또는 적절과 부적절로 풀고 그 가운데를 중간이라고 한다. 그러나 ‘가운데’라는 것은 가장 적절한 최선의 기준을 말하는 것인데 선과 악의 중간이라고 하면 말이 안 된다. 그저 적당히 타협하라는 것이니 양쪽에서 돌멩이가 날아올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과와 불급의 중간으로 풀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70세는 넘어 보이는 학습자가 질문한다. ‘앞에서 이미 선한 말을 드러낸다고 했으니, 여기서 양 끝은 선 중의 양 끝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선에 양 끝이 있을 수 있나요?’ ‘선한 방향은 같지만 실천 방법에서는 급진적이거나 온건하거나 하는 식으로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아, 그럴 수 있겠습니다.’ 같은 방향을 추구하면서도 세부 노선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갈등하고 반목하며 지리멸렬하게 갈라지는 일들이 많은데, 그때 이런 경구를 참고했더라면 좋았겠다는 깨달음이 퍼뜩 떠올랐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이지만 정치인들이 얼마나 국민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지는 미지수다. 우리 동네 국회의원만 해도 같은 당에서도 심하다고 할 만큼 심각한 거짓 주장을 연일 내고 있다. 이렇게 소수의 권력자가 자신들의 이익을 영구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불법도 서슴지 않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더 큰 문제는 비상계엄이 해제된 지 100일이 넘도록 헌재에서 탄핵소추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아 많은 국민이 불안에 떨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는 주말마다 집회가 열리니 그 고단함이 이루 말할 것이 없고, 심지어 지인의 친구는 정신과 치료까지 받는다고 한다. 판결 이후 양분된 국민의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한 심사숙고일지는 모르겠으나, 장고 끝에 악수 둘까 두렵다. 나쁜 말은 빨리 덮어서 힘을 못 쓰게 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제주도 말에 ‘속았다’는 ‘수고했다’는 뜻이라고 한다. 나라의 평화를 위해 국민이 얼마나 더 속아야 하는가? 강의실 안 토론이 일상에서 실현될 날을 고대한다.

2025-03-23

다정함보다 예의를

유영희 덕성여대 교수·평생교육원 다정함을 강조하는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올해만 해도 벌써 세 권이나 된다. 며칠 전 김민섭의 ‘다정함이란 거래가 아닌 삶의 태도’라는 칼럼을 읽고 검색해서 알게 된 것이다. 이 칼럼에서 김민섭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다정하게 대하면서 상처받지 않게 되면 계속 다정할 수 있다고 한다. 개인의 선한 의지를 강조하는 이런 태도가 얼마나 설득력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가 제시한 근거를 보면 그 의문은 더 커진다. 8살 딸이 친구에게 선물을 주고 자기는 받지 못했다고 슬퍼할 때 친구가 즐거워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를 바라고, 어느 기업의 신입사원이 낯선 할아버지의 부탁으로 밥도 사주고 홍삼도 사줬다가 그것이 그 할아버지의 상술이라는 것을 깨닫고 배신감을 느꼈다고 했을 때도 정확하고 성실해야 한다는 단서를 붙이면서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계속 다정하게 살기를 바란다. 이렇게 다정함을 강조하게 된 이유는 우리 사회가 너무 살벌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은 조금만 잘못해도 혐오 발언이 쏟아지고 사회적 재난에 희생당한 사람에게도 조롱의 댓글이 달린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다정함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회복시켜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출간 시기를 기준으로 처음 나오는 몇 권이 모두 번역서라서 원서 제목들을 확인해보았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 다정함은 ‘friendliest’다. 동물을 포함하여 친화력이 좋은 생명체가 생존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무엇이 우리를 다정하게 만드는가’의 원제는 ‘이타적 충동’이다. 사람들이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에서 남을 돕는 행동을 분석한 책이다. 김민섭이 말하는, 상대에게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행하는 다정함과는 거리가 있다. 그나마 ‘kindness’를 부제로 쓴 ‘다정함의 과학’이 우리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조금이나마 관계가 있다. 원서 제목이 ‘토끼 효과’인 이유는 실험실에서 진심으로 돌본 토끼들은 다른 토끼와 똑같은 고지방 사료를 먹어도 콜레스테롤 수치가 낮다는 연구 결과에 착안했기 때문인데, 건강을 위해서는 영양과 의료로는 부족하고 일대일의 인간관계부터 사회적 돌봄까지 여러 수준의 진정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누구에게나 다정함을 발휘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는 다정함을 아주 가까운 사이에서 나누는 감정으로 자주 쓰기 때문이다. 두루 쓸 수 있는 표현으로는 다정함보다 예의가 더 적절하다. 예의는 형식적인 태도가 아니라 가까운 사람에게는 다정하게, 먼 사람에게는 상냥하게 대하는 ‘정확하고 성실한 태도’이다. 끝내 딸이 아빠의 조언을 수용하지 못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친구란 상대가 즐거운 것으로 만족하는 관계가 아니다. 답례하지 않는 친구는 손절하라는 조언이 딸과 친구를 위해 건강하다. 낯선 할아버지의 청이 지나쳤는데도 해준 것은 시혜의 기쁨을 위한 것이었을 뿐 다정함도 아니다. 예의에 맞을 때 상처도 덜 받고 오래 할 수 있다. 혐오와 반목이 가득한 우리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마음의 태도는 다정함보다는 예의라는 절도 있는 태도다.

2025-03-16

성실과 농담

유영희 작가 몇 년 전 작고한 고려대 황현산 교수가 ‘푸른 양’의 해를 맞아 쓴 에세이 ‘변화 없다면 푸른 양이 무슨 소용인가’를 읽었다. 이 에세이에서 황현산은, 양이 푸를 수는 없으니 ‘푸른’이라는 수식어는 농담이라고 하면서도 새로운 농담은 변화를 위한 상상력이므로 푸른 양의 해에 변화를 꼭 이루자고 다짐하고 있다. 새로운 농담은 어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쉽게 기적을 일으킨다는 대목에서는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지레 포기하지 말라는 행간의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 이 에세이에 눈길이 간 것은 올해가 마침 푸른 뱀의 해이기 때문이다. 10간은 다섯 가지 색으로 분류되고 각각의 색은 2년씩 계속되어 작년에는 푸른 용이었던 데다 새해가 시작한 지 두어 달이 지난 터라 새삼스럽다고 할지 모르겠다. 게다가 푸른 양은 존재하지 않아도 푸른 뱀은 세상에 실재하니, ‘푸른 뱀’을 들먹이는 것은 의미 없다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푸른 뱀과 육십갑자의 푸른 뱀은 같은 것이 아니고, ‘푸른’이 가지고 있는 변화의 의미는 퇴색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화의 상징이라는 의미에서는 푸른 양보다 허물을 벗는 푸른 뱀이 ‘푸른’의 이미지에 더 적절하다. 최근 2, 3년 간 우리 사회 중요 지표는 연속 하락하고 있다. 민생과 직결된 경제 지표를 보면 특수한 상황 세 번을 제외하고 1961년 이래 우리 경제 성장률은 세계 경제성장률보다 항상 높았다. 그러나 2023년에는 우리가 1.4% 성장하고 세계는 2.8% 성장하는 역전이 일어난다. 2024년에는 조금 올라 2% 성장했지만 세계 경제는 3% 이상 성장했으리라고 하니 나아진 것은 아니다. 2024년 폐업한 자영업자가 100만 명에 육박한다는 소식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내가 사는 곳은 지난 30년간 상가 공실이 전혀 없었는데 작년부터 새 주인을 찾지 못해 셔터문이 내려진 상가가 여럿 보인다. 정치는 더 심각하다. 3월 3일 한국기자협회 신문에 의하면, 지난 2월 27일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부설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발표한 ‘민주주의 지수 2024’(Democracy index 2024)에서 한국의 민주주의 총점 순위가 작년보다 10단계 하락하고 ‘결함 있는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되었다고 한다. 현재 우리 사회 지표가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지금은 황현산이 저 에세이를 썼던 2015년보다 더 절실하게 새로운 농담이 필요한 때다. 마침 코미디언 이경규가 최근 발간한 책 제목이 ‘삶이라는 완벽한 농담’이다. 그가 45년 동안 활동하는 비결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발맞추어 시청자를 위해 새로운 농담을 꾸준히 계발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첫 번째 덕목으로 성실을 꼽는 인터뷰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가짜뉴스를 양산하고 폭력배와 손잡는 정치인들, 부자만을 위한 경제정책 입안자들에게 더 이상 새로운 농담을 기대하기 어렵다. 푸른 뱀처럼 우리 사회가 성장과 변화를 이루려렴 지도층의 성실이 필수다. 그런 정치인을 보고 싶다.

2025-03-09

희망은 있다

유영희 작가 학원 폭력은 그저 청소년기의 통과의례가 아니다. 드라마 ‘소년 시대’ 마지막 주인공의 대사에도 나오듯이, 맞는 사람이 느끼는 공포는 시간이 지난다고 잊혀지는 일도 아니거니와 피해자의 인격 전체를 부정당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나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 같은 작품에서 학교 폭력을 소재로 사용된 데서 알 수 있듯이, 학원은 사회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두 작품은 학교 폭력을 군사 독재에 비유했다. 그래서 소설이나 영화 같은 작품에서 학원 폭력이 해결되는 과정은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은유가 되기도 한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보다 17년 전에 나온 ‘아우를 위하여’는 화자 김수남은 군대 가는 동생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그 안에는 자기가 어렸을 때 겪은 학교 폭력 이야기가 들어 있다. 수남은 피난지에서 교생 실습 온 병아리 여선생님에게서 나쁜 짓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고 반에서 군림하던 이영래를 굴복시킨다. 이영래가 아이들의 항의 몇 마디로 너무 쉽게 몰락하여 감흥은 크지 않지만, 폭력에 맞서는 아이들의 용기가 돋보인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학교 폭력 주동자 엄석대의 2인자 노릇을 하던 한병태가 어른이 되어 엄석대를 그리워하는 모습으로 끝나서 뒷맛이 씁쓸한 작품이다. ‘소년 시대’ 역시 주인공이 학교 폭력 주동자 정경태에게 처참하게 맞다가 결국 물리치는 이야기다. 처음에는 폭력 장면이 보기 싫었지만 어떻게 결말이 나나 궁금해져서 보게되었다. 예상대로 해피엔딩이지만, 결말에 이르는 과정은 이전의 학원물과 확실히 차별되는 부분이 있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엄석대를 몰락시키는 사람은 6학년 담임선생님이었고, ‘아우를 위하여’에서는 김수남의 뒤에 병아리 선생님의 가르침이 있었다. 그러나 ‘소년 시대’의 폭력 주범 정경태는 이영래나 엄석대와는 급이 다르고, 피해자 장병태에게는 담임선생님이나 병아리 선생님도 없었다. 장병태에게는 여자 친구의 응원만 있을 뿐 그는 오로지 자신의 꾀와 힘으로 정경태를 물리친다. 이것은 확실히 앞의 두 소설보다 진보한 방법이다. 찰진 사투리나 복고풍의 ost 등도 시청자의 시선을 끄는 데 한몫 했다고 하지만 정병태의 이런 주체적인 활약이 드라마의 인기를 견인했다. 허구적 작품에 나오는 낙관적 결말이 현실의 희망이 되기는 어렵다. 이제 현실의 악은 교묘해져서 정경태처럼 직접 물리력을 가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도 않는다. 심지어는 물리력을 행사하고도 발뺌하기 일쑤다. 힘 있는 고위 공직자가 세금을 펑펑 써도, 가족이 뇌물을 받거나 불법을 저질러도, 전세 사기범이 거리를 활보해도, 주가 조작으로 피해가 극심해도, 이런 악을 한두 사람의 힘으로 응징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헌법재판소에서 교묘한 논리와 궤변으로 아무리 핍박해도 당당하게 오롯이 맞서는 증인들을 보면 희망이 있음을 믿게 된다. 한 명의 장병태도 충분히 의미 있지만, 한 명이 두 명 되고 두 명이 열 명 되고 열 명이 백 명 되는 희망이 매일 실현되고 있다.

2025-02-23

대화의 기술이냐 팃포텟이냐

유영희 작가 며칠 전 여성 지인이 직장 상사가 갑질한다며 하소연을 해왔다. 사무실 하나에 상사 1명과 직원 1명이 근무하는 아주 작은 직장이라 꼬투리 잡으며 사표를 내게 종용하는 상사 때문에 억울하다고 한다. 두 사람의 감정의 골이 깊어진 데에는 평소 직설적 성격의 지인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지 않을까 의심했으나 그 직장 상사가 자기 아내는 고분고분한데 당신은 왜 의견이 많으냐는 말을 들으니 해결책이 필요해보였다. 그러던 중 며칠 전 탄핵 심판정에서 대통령이 국회 기조 연설할 때 야당 의원들이 박수 안 쳐주고 악수도 거절했다고 불만을 말했다. 남의 말을 경청하라는 대화의 기술 측면에서 야당 의원들의 행동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야당 의원들에게 대통령에게 감성적으로 접근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부적절해 보였다. 어떤 책에서는 거절도 예쁘게 해서 감정 상하지 않게 하라는데, 대통령의 요구가 부당할 때 야당이 예쁘게 거절하라는 것도 무리다. 사회에서는 힘 있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문제 삼는 상대의 태도만 문제 삼는 경향이 강하다. 이것은 아마도 전통적 사고방식 때문일 것이다. 유교 전통 중에는 ‘집안의 윤리를 그대로 사회에 적용하면 사회 윤리가 된다’는 사고가 있다. 자식이 부모에게 하는 효도로 백성이 군주에게 하는 충성하면 되고, 동생이 형을 공경하는 원리로 연장자를 공경하면 된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군주가 백성을 사랑하면 된다고도 했으나 이것은 큰 주목을 못 받고, 상명하복의 사고만 부각되었다. 그러다 보니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순종하기만 바라며 아랫사람의 도리만을 강조하게 되었다. 의무를 강조하는 칸트의 도덕철학 역시 상대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마땅히 내가 해야 할 도리를 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도덕을 위한 철학 통조림’의 저자 김용규는 이런 태도를 반대한다. 현실에서는 분명히 상대를 해치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도덕적인 행동만 고집한다면 세상은 나쁜 사람으로 가득 찰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용규는 부당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팃포탯’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팃포탯은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한 셈이다. 팃포탯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존 내쉬의 균형이론에 기원을 둔 게임이론 전략인데, 처음에는 협력하더라도 상대가 배신하면 나도 배신해서 승리하라는 이론이다. 실제로 로버트 액설로드 교수는 이 전략으로 게임 대회에서 두 번이나 우승했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기다려주고 내가 할 말은 참으라거나 문제 상황이 발생하면 자신의 무의식을 돌아보라는 식의 대화의 기술은 가족이나 친구 관계에서나 활용할 수 있을 뿐, 사회관계에서는 상대가 부당하다면 적절하게 응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부당한 행동을 할 때 옳은 쪽이 승리하기 위한 팃포탯이 무엇인지는 아직 답을 못 찾았지만, 지인에게는 휴가를 내서 쉬면서 거취를 생각해보고, 퇴사하더라도 상사의 부당함을 공론화할 것을 조언했다.

2025-02-16

반쪼가리 자작과 아령 사회

유영희 작가 SNS에서 ‘아령 사회’라는 말을 접했다. 우리 사회가 극단만 두툼해지고 중간은 얇은 사회로 되어간다는 뜻이다. 관련 기사를 찾아보니, 2024년 조선일보에 홍성국 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을 인터뷰한 내용에도 아령 사회라는 말이 나온다. 그는 ‘지금 우리 사회가 점점 아령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을 적으로 규정하고 상대방이 사라져야만 내가 더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듣자니, 이탈로 칼비노의 환상 소설 ‘반쪼가리 자작’의 교훈이 떠오른다. 환상 소설이라는 컨셉에 맞게 등장인물을 기상천외하게 설정했지만, 양극화된 현실을 풍자한 깊이가 남달라서 두고두고 생각나는 작품이다. 주인공 메다르도 자작은 전쟁에 나갔다가 몸이 세로로 반쪼가리가 된다. 하지만 환상 소설답게 그는 죽지 않고 반쪼가리 상태로 각각 따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먼저 돌아온 반쪼가리는 농노들의 가축을 반쪽 내는 등 악의 화신처럼 잔인하게 군다. 농노들이 그를 싫어하고 피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나중에 돌아온 선한 반쪼가리는 분명히 착한 의도이기는 한데, 농노들에게 요구하는 도덕 기준이 너무 높고 비현실적이다. 예를 들어, 한센병 환자에게 영혼도 치료해야 한다면서 도덕적인 행동을 강요하며 그들의 유일한 낙이었던 음악 연주와 놀이를 금지했다. 결국 농노들은 악한 반쪼가리 이상으로 선한 반쪼가리도 증오한다. 다행히 두 반쪼가리가 모두 한 여자를 좋아하자, 그 여자는 두 반쪼가리와 한날한시에 결혼을 약속하여 그들을 결혼식장에서 만나게 한다. 그때 마을 사람들이 두 반쪼가리의 몸을 붙여 꽁꽁 묶어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자 반쪼가리들의 극단적 행동은 멈춘다. 그러나 그렇게 끝나면 뻔한 교훈이 되었겠지만, 반전의 여운이 깊다. 현대 사회가 너무나 복잡해졌기 때문에 아무리 온전한 몸을 가진 자작이라도 혼자 정치를 잘할 수 없었고, 그래서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세상이 비로소 잘 돌아가게 되었다고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이런 결말은 홍상국 전 의원의 제안과 상통한다. 그가 아령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해법은, ‘우리 삶의 70~80%는 경제와 관련되어 있으니 대안을 만들기 위해서는 경제에 식견 있는 사람이 국회에 많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 윤석열 대통령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한 판사의 결정에 불복하여 서부지방법원에 난입한 사람들이 거의 체포되었다. 그중 이형석 사랑제일교회 특임전도사의 집에 한 방송사가 가 보니 지하 작은 방이었다고 한다. 아령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선동가들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런 사람을 이용한다는 분석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지난주 대왕고래 프로젝트가 경제성 없어서 폐기되었다는 뉴스가 대서특필되었다. 대왕고래프로젝트는 전문가가 경제성을 증명할 수 있는 사업이다. 국민을 생각하는 정치인이라면 정치 논리로 사업을 추진하지 말고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진짜 전문가들을 기용해서 아령 사회를 끝낼 수 있어야 한다. 다음 대선에서 기대해본다.

2025-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