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도덕경’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도를 말할 수 있으면 진짜 도가 아니니, 이름 붙인 이름은 진짜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의 한계를 역설한 유명한 문장이다.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는 대상을 백 퍼센트 온전하게 인식하기 어렵고, 인식한 부분조차도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러니 언어로 표현된 이름에 사로잡히면 대상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없다.
노자라는 사람이 언제 적 사람인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고, 심지어 실존 인물인지조차 의문시되고 있는 데다, ‘도덕경’이라는 텍스트도 판본이 여러 가지라 어느 판본이 원본에 가장 가까운지도 알 수 없다. 그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거의 2500여 년 전 어느 인물이 쓴 문장을 사람들이 지금도 읽는다는 것은 그 텍스트가 가진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다. 말이 홍수를 이루는 현대 사회에서 언어의 한계와 폐단을 강조하는 노자의 일갈은 여전히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
그럼에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 언어의 힘을 빌려야 소통하고 연대할 수 있다. 그러려면 언어의 한계를 강조하며 언어가 무의미하다는 식으로 논리를 비약할 것이 아니라 대상의 진짜 모습에 더 가깝게 이름을 붙이려는 노력이 더 필요할 것이다. 특히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을 한 사람이 있다. 존 케닉의 ‘슬픔에 이름 붙이기’는 슬픔이 포함하고 있는 엄청난 스펙트럼의 감정을 발견하여 이름붙인 신조어 사전이다. 존 케닉은 기존에 슬픔을 나타내는 단어가 슬픔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표현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기존의 단어의 의미도 더 깊고 풍부하게 파고들거나 새로운 단어를 만든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동안 슬픔(sadness)을 ‘희망의 부재’로 생각해왔지만, sadness의 원래 뜻은 ‘충분한’, ‘만족스러운’이라는 뜻이라면서 어떤 강렬한 경험으로 마음이 넘치도록 차오르는 상태라는 뜻이란다. 이렇게 재정의하면 슬픔이 마냥 슬픔으로만 머물지 않게 된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슬픔이라는 감정의 다양한 모습을 관찰하고 스스로 이름 붙인다. 그중 ‘디스토리아’(dystoria)라는 단어는 라틴어 dys-(나쁜)+historia(역사)의 합성어다. 디스토리아에 대해 저자는 ‘자신이 역사의 거대한 힘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한다는 기분:자신의 삶이 그 어떤 위대한 사명과도 무관하고, 세대의 고난도 알지 못하며, 상대할 적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는 느낌. 손쉽게 높은 파도의 일부가 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작은 물방울 같은 기분’이라고 설명한다.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을 협공하고 이란 역시 팽팽하게 맞서며 이제는 다른 나라도 강제 개입할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분노로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심연을 파고들고 보면, 개인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파도에 힘없이 떠다니는 작은 뗏목 같은 무력감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이렇게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나니, 전쟁의 비극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유영희 인문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