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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인간이기에 기억한다

유영희 작가 초등교사 이현길은 춤추는 선생님이다. 혼자서만 추는 것은 아니고 아이들과 같이 춘다. 그는 교사 생활 17년 차로, 그동안 계속 아이들과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런데 작년에 특별히 뜻깊은 졸업식을 만들어 주기 위해 무대를 만들어 SNS에 올리면서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이다. 그가 올린 영상마다 이런 활동이 얼마나 어려운지 공감하는 현직, 퇴직 교사들의 감동 댓글이 줄을 잇는다. 그런데 이 선생님이 이렇게 힘든 일을 하는 이유는 그저 아이들에게 오래 기억되고 싶어서라고 한다. ‘기억’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돋보인다.지난주에, 암 투병 중이신 고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을 동창과 함께 만나고 왔다. 헤어질 때 선생님이 한 말씀 하신다. 지금도 내 눈에는 너그들 고등학교 때 모습이 눈에 선하다. 너네는 내 맘 모를끼다. 그렇지 않다. 선생님의 기억과 다르기는 하겠지만, 우리 역시 그때를 눈에 선하게 기억한다.기억한다는 것은 인간의 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뇌과학자 조지프 르두는 ‘우리 인간의 깊은 역사’를 통해 인간의 뇌가 발달해온 과정을 설명해준다. 새로운 상황에서 자신의 반응을 선택하여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행동적 유연성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억을 바탕으로 영장류는 숙고할 수 있게 되었는데, 특히 언어를 가진 인간은 그냥 숙고보다 뛰어난 심사숙고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어서 그는, 인간은 심사숙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과거의 경험에서 목표의 가치를 저장할 수 있고, 이것을 이용하여 미래에 더 새롭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좋은 경험은 삶의 활력소가 되기에 그런 일을 기억하는 것은 즐겁고 자연스럽다. 반면 나쁜 경험은 고통을 수반하기도 하고 비용이 드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인지 잊고 싶은 사람, 잊으라고 하는 사람이 많다. 심한 경우, 나쁜 경험을 기억하는 사람을 조롱하기도 한다. 학폭을 오래전 장난으로 치부하거나 학폭 당한 일로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그런 걸 여태 기억하느냐고 비웃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기억하는 것이다.4월은 기억해야 할 역사적 기념일이 많다. 조금 멀리는 1960년에 일어난 4·19 혁명 기념일이 있고, 가까이는 9년 전, 4·16 세월호 참사가 있다. 그러나 이 기억이 우리에게 얼마나 가치 있게 저장되어 있는지는 의문이다.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던 신동엽의 마음을 우리는 이미 잊은 지 오래되었고, 4·16 참사의 기억 역시 기억의 저편으로 넘기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하고 심사숙고할 줄 아는 인간이다. 나쁜 경험이라도 미래의 행복을 만들기 위해서는 심사숙고해야 한다.좋은 경험으로 기억되는 데는 대화가 있다. 아이들은 이한결 선생님과 춤을 추면서 대화했고, 고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은 수업과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5분 스피치 기회를 주었다. 4월의 경험에서 알맹이만 남기고 미래의 유익한 결과를 선택하는 심사숙고 과정에서도 우리는 더 많이 기억하고 대화해야 한다.

2023-04-23

습관인가, 창의성인가

유영희 작가 불경기가 계속되면서 자기계발은 선택 아닌 필수가 되었다. 자기계발 방법의 부동의 1순위는 바로 습관 만들기다. 자기계발의 목표는 대부분 부자가 되는 것이고, 그래서 상위 0.1% 부자들의 루틴 따라 하기, 초대형 1조 부자들의 5가지 습관 등등 습관 만들기 영상이 넘쳐난다. 부자가 되려면 부자들의 습관을 따라 하라는 것이다.그러나 부자들의 공통 습관을 따라 한다고 해서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부자가 된 사람 중에는 엄청나게 두뇌가 명석한 이도 있고, 물리적으로 수치화할 수 없는 그들만의 환경과 경험이 있다. 그들의 습관은 부자가 되기 위한 한 가지 요소일 수는 있어도 전부는 아니다.여기서 중요한 의문은, 과연 그들의 행동을 습관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습관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행위를 오랫동안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익혀진 행동 방식 또는 학습된 행위가 되풀이되어 생기는 비교적 고정된 반응 양식이다. 그러나 이것을 좀 더 파고들어가 보면, 행동의 결과가 좋지 않은데도 반복적으로 하는 행동을 습관이라고 한다. 실제로 일상생활에서는 ‘습관’을 부정적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뇌과학자 앤서니 디킨슨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는 행동에는 ‘습관’과 ‘목표지향적 행동’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예를 들어, 쥐를 며칠 굶기고 표시등이 깜박이는 동안 그 쥐가 레버를 누를 때 먹이를 공급해주면, 쥐는 표시등이 켜질 때마다 레버를 누른다. 이때 배가 많이 고프거나 먹이에 대한 경험이 좋다면 레버를 더 잘 누른다. 그런데 배가 안 고프거나 그 음식을 먹고 배가 아팠는데도 레버를 누른다면 그것은 습관이다.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담배가 도움이 되었다고 해서 기침하는데도 담배를 계속 피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반면 목표지향적 행동은 그 행동을 처음 했을 때 좋은 결과가 나왔다는 기억을 가지고 계속 그런 결과를 내기 위해 하는 의식적 행동이다.일찍 일어나기, 독서, 행복한 상상, 규칙적인 운동, 명상 등 부자들이 한다는 행동이 그들에게 활력을 주고 창의성을 준다면, 그것은 습관이라기보다 목표지향적 행동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들이 목표지향적 행동을 꾸준히 할 수 있는 이유는 자기 목표에 대한 인식이 또렷하고 그 행동의 결과를 체험했기 때문일 것이다.올해 들어 심신의 안녕을 목표로 뜻맞는 친구들과 매일 5분 이상 명상을 80일째 하고 있고, 매일 A4 한 장 쓰기 모임에 참여하여 글을 쓴 지 60일이 넘었다. 명상이든 글쓰기든 목표가 또렷하기 때문에 하고 있을 뿐, 습관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안타깝게도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어쩌랴, 그런 행동이 어떤 유익한 결과를 내는지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된 것을.누군가를 따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습관이라면 더욱 어렵다. 습관이 형성되는 과정에는 자기만의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표를 또렷하게 갖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행동을 의식적으로 찾아서 꾸준히 실천하는 것, 그것이 창의적인 자기계발이다.

2023-04-16

존재 증명하기와 존재하기

유영희 작가 몇 년 전 어느 예능 프로에서 이경규가 어떤 어린이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하자 이효리가 ‘뭘 훌륭한 사람이 돼? 그냥 아무나 돼’라고 한 말에 시청자들의 공감이 이어졌다.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 결과이고, 아무나 된다는 것은 그저 자기 자신이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영화 ‘청춘스케치’에서 레이나가 ‘23살에는 뭔가를 이루고 싶었다’고 하자, 친구 트로이가 ‘23살 때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아를 찾는 것’이라고 한 말도 이효리의 반문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전 근대사회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곳에서 붙박이로 살아서 나로 존재하기만 해도 나의 존재를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인은 무엇인가가 되어야 하고 이제는 그것을 남에게 알려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얼마나 알려지느냐가 성공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심한 경쟁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고 나는 누구인가 하는 회의감과 괴리감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무엇보다 ‘존재하기’가 절실해지고 있다.그러나 존재하기만으로는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이다. 트로이가 아무리 치즈버거와 커피, 담배 몇 개비, 그리고 약간의 대화로 충분하다고 해도 그런 삶이 지속가능하기는 어렵다. 이효리 역시 어떤 순간에는‘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며 살겠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인생에는 뭔가 이루는 것도 필요하고,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존재를 증명하는 일도 필요하다.오랜 기간 서예를 연마한 동창이 시간이 갈수록 상 받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면서, 그래서 출품에는 아예 관심을 끊었다고 한다. 서예를 즐기는 순간 느낄 수 있는 온전하게 존재하기를 원할 뿐, 대회에 작품을 내는 일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으로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존재를 증명하는 일에는 아무래도 자신과 다른 사람을 대상화하거나 수단으로 삼는 일을 피할 수 없다. 작품을 출품하는 순간, 인격은 사라지고 등수라는 대상으로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며칠 전 종강한 EBS1의 ‘존재와의 대화’에서 심리학자 김정규 역시 존재를 회복하기는 해야 하지만 인간을 대상화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한다. 칸트 역시 모든 이성적 존재자는 목적 그 자체로 실존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써만 대하지 말고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고 하여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는 것도 인정한다.‘존재를 증명하기’와 ‘존재하기’, 다 중요하다. 그런데 어느 정도 비율로 하면 좋을까? 이 질문에 김정규는 삶에서 80% 정도는 인간을 대상화하고, 나머지 20% 정도는 존재하기로 하자고 말한다. 지나친 존재 증명도 문제지만, 존재하기에 너무 치우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할 것은 아니지만, 굳이 회피하거나 거부할 필요는 없다. 셀럽의 한마디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자신의 형편에 맞는 비율로 균형 잡기가 필요하다.

2023-04-09

쓸수록 또렷해진다

유영희 작가 그동안 주먹구구로 살아온 것을 반성하며 몇 달 전부터 가계부를 착실히 쓰고 있다. 그런데 앱에 기록해서 그런지 갑자기 유튜브에서 소비 생활 관련 영상이 뜨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자기 계발을 위한 투자는 아끼지 말고 해야 한다는 영상이 뜨더니, 요즘에는 무조건 아끼기부터 해야 한다는 영상이 뜬다.그러나 어디까지가 자기 계발인지 경계를 정하기가 어려워 투자인지 과소비인지 구분하기가 어렵고, 무조건 아끼다 보면 궁상맞거나 인색하다는 소리 듣기 십상인 데다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니, 소비 잘하기가 쉽지 않다. 얼핏 보면 두 가지 주장이 달라 보이지만, 자기 계발을 위한 투자든 알뜰 소비든 모두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망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래서 조회수가 엄청난가 보다.그렇다면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할까?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까?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는 농부 빠홈이 땅 욕심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이야기가 나온다. 빠홈은 바쉬끼르라는 곳에 아주 싸고 좋은 땅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동안 모은 돈을 가지고 간다. 바쉬끼르의 이장이 하루치 걸은 땅값이 1천 루블뿐이라고 하자, 빠홈은 무리하게 걸어 돌아오자마자 쓰러져 죽는다.그러나 욕망 자체를 부정적으로 그린 이 이야기는 아무래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빠홈은 가난하기는 해도 일확천금에는 관심 없는 소박한 사람이었고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지주에게 수확을 다 빼앗기는 러시아 농노가 땅 욕심 좀 냈기로서니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니 오히려 빠홈에게 동정이 갈 지경인데다, 설사 빠홈이 많은 땅을 탐냈다고 해도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어떤 이는 적은 땅으로 만족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많은 땅을 원할 수도, 필요할 수도 있다.빠홈의 문제는 오직 하나, 자기가 하루 동안 걸을 수 있는 거리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던 것뿐이다. 다만, 그 땅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것을 갖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로 걸어야 하는지, 중간에 얼마나 쉬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가계부를 쓰다 보니, 내게 필요한 땅은 얼마만큼인지, 어떤 속도로 걸어야 하는지, 얼마나 쉬어야 하는지 보인다.어디 가계부뿐이야? 사실은 모든 쓰기가 다 그렇다. 가계부 쓰듯이 그저 있는 그대로 쓰면 보이는 것이 많다. 기록학 전문가 김익한 교수가 알려주는 글쓰기 방법 하나는, 들은 것, 본 것, 맛본 것, 느낀 것, 생각한 것을 있는 그대로 쓰라는 것이다. 사실 이 방법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것인데, 이것이 얼마나 좋은 방법인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반성하는 글쓰기는 죄책감만 늘고 자기 비하에 빠지니, 그것만 경계하면 된다.삶이 팍팍할수록 욕심만 크면 불행해진다. 나에게 맞게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내 삶의 지향과 규모를 잘 알기 위해서는 가계부든 일기든 10분 쓰기든 무엇이든 쓰는 것이 좋다. 앞에서 말한 다섯 가지로 10분만 글을 써도 문제가 보이고 답이 보인다. 쓸수록 삶이 또렷해진다.

2023-04-02

어떤 경제적 자유인가?

유영희 작가 3천890원, 이 금액은 얼마 전 N이 SNS에 올린 이번 3월 도시가스 요금이다. 이 액수는 같은 기간 우리 집 요금의 50분의 1이고, 작년 8월 요금 4천180원보다 적다. N은 십여 년 전 어느 모임에서 만나 가끔 소식을 전하는 남자 후배인데 지방 출장이 자주 있어서 1년 365일 집에서 지내는 나와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손이 너무 시릴 때만 조금 온수를 켰다고 하니 엄청난 근검 절약이다. 그가 한 만큼 따라할 수는 없지만, 이 포스팅을 보고 자극받아 나도 실내 온도를 2℃ 낮췄다가 이틀 만에 감기에 걸려 바로 원위치했다. 그의 친구들이 건강 걱정을 할 만하지만, 그래도 그가 이토록 절약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요즘 일찌감치 경제적 자유를 얻어 파이어족이 되고 싶다는 젊은이들이 많다던데, 혹시 N도 파이어족이 되고 싶은 것일까?경제적 자유란 임금노동을 하지 않고 자산소득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상태이고, 파이어족은 어느 정도 경제적 자유를 얻은 사람이 조기 은퇴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경제적 자유가 있다고 파이어족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파이어족이 되려면 경제적 자유는 있어야 한다.어쨌거나 자산소득으로만 살아갈 수 있다면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자신이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부동산과 주식, 코인 등에 투자해서 100억 자산가가 되었다는 개그맨 황현희도 경제적 자유를 얻어서 좋은 점이 시간을 자기가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한다.그러나 아무리 자산소득이 충분하다고 일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한국 최고의 부자라는 이재용도 일하고, 1년에 100억원 이상을 번다는 일타 강사들도 이미 충분한 자산소득이 있을 텐데 다른 사람이 범접하기 어려울 정도로 여전히 장시간 일한다. 황현희 역시 출퇴근 시간은 자유롭겠지만, 좋은 투자 종목을 찾기 위해 온 시간을 다 썼을 것이며 앞으로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그런데 자유란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방해받지 않는 상태이다. 소극적 자유라고 하는 이 상태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한 조건이다. 경제적 자유 역시 자신이 추구하는 무언가를 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일 뿐이다. 경제적 자유를 얻었어도 계속 일하기도 하고, 파이어족이 되어 더 이상의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자기가 원하는 무언가를 위해 활동한다. 그러므로 자기가 시간을 통제하고 싶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 시간이 필요한지 그것부터 알아야 한다.내가 하고 싶은 일이 1억 드는 일이라면 10억 가진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고, 그러면 괜한 일에 힘 빼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남들이 좇는 경제적 자유를 따라 하느라 내게 필요한 것보다 더 힘을 쓴다면, 그만큼 내 꿈도 지연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마도 N은 분명한 자신의 목표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한겨울 도시가스 요금 3천890원은 빛이 난다. 이참에 남은 시간 나의 경제생활의 목표는 무엇일까, 새삼 다시 점검해본다.

2023-03-26

춤을 춘다는 것

유영희 작가 어느 유투버가 4, 50대가 되면서 가장 어려운 문제 세 가지는 외로움, 돈, 건강이라고 한다. 이 말에 공감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김민식 전 MBC PD도 50 중반에 사표를 내고 나서 외로움 문제가 심각했나 보다. 그가 퇴사하고 2년 만에 올해 초 ‘외로움 수업’이라는 책을 냈으니 말이다. 자신이 쓴 칼럼 일부 내용이 사회적 비난을 받게 되자 스스로 벌주기 위해서 퇴사했다고 하니, 그렇게 혼자 있게 된 시간은 많이 외롭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책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니 외로움은 치매의 원인이 된다면서 자신이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했던 노력 몇 가지를 소개해준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가장 먼저 춤을 꼽은 것을 보고 반가웠다. 사실은 나도 한 달 전부터 춤을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김민식은 줌바를 춘다는데, 내가 배우는 것은 현대 무용이다.발목이 안 좋아서 60분 걷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춤이라니 정말 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걱정도 많았고, 일반인 대상 수업이라 더 편하게 진행할 텐데도 남들과 어울려 춤을 추는 것이 아직도 쑥스럽고 어색한 상태다. 그러나 90분 동안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배우는 것도 많다. 줌바나 에어로빅 같은 운동은 정해진 동작을 따라 하지만, 현대 무용은 자유롭게 움직인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흐느적거리는 것은 아니다. 기본 동작을 알려주면 음악에 따라 자기가 동작을 만드는데, 코어의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외유내강이라는 말처럼, 속은 강건하지만 겉은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 움직이다 보면, 내가 주로 하는 동작의 패턴을 알게 된다. 게다가 줌바는 웬만한 체력이 아니고서는 시도하기 힘든 격렬한 운동이지만, 지금 배우는 현대 무용은 자기 몸 상태를 돌보면서 한다.더 중요한 순간은 가끔 음악을 틀지 않고 움직일 때이다. 음악이 있으면 음악의 분위기에 따라가기 쉬운데, 음악이 꺼지면 그야말로 몸 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나만의 동작을 알게 된다. 그렇게 나오는 내 몸의 움직임은 또 다른 나의 언어라는 생각이 든다. 몇 주가 지나자 선생님은 내 동작이 많이 커졌다며 보기 좋다고 하신다.무엇보다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는 목적이 있고 의식적으로 하지만 몸 언어의 특별한 점은 나의 의도가 많이 개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디로 가야지 방향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이런 동작을 해야겠다고 의도한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그 동작이 나온다. 현대 무용의 이런 춤 방식은 노자가 말한 ‘일부러 하지 않는 함’인 것 같다. 그래서 90분을 쉬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지도 모른다.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50대 중반의 남자에게는 줌바가 적당할 수도 있지만 60이 넘은 여자에게는 이런 현대 무용이 알맞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몸의 언어를 들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줌바든 현대 무용이든 노년의 자신에게 춤을 허하자. 외로움도 극복하고 건강도 만들 수 있으니 그것 또한 일석이조 아닌가.

2023-03-19

박사님, 박사님

유영희 작가 최근 종영한 드라마 ‘대행사’의 주인공 고아인은 지방대 출신이라는 차별에 굽히지 않고 불굴의 도전으로 대표가 되었고, 그에 만족하지 않고 머슴으로 살기 싫다며 직원이 주주인 독립 대행사를 차렸다. 드라마의 완성도도 높았지만, 특히 자기 능력을 믿지 못하고 주저앉고 싶은 여성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었다. 물론 거기에 나도 포함된다.몇 년 전, 자원 활동으로 참여하던 H 생협에 박사 학위가 있는 남자 실무자가 들어왔는데 모두 그를 ‘박사님’이라고 불렀다. 보다 못해, 나도 박사인데 왜 내게는 ‘박사님’이라고 하지 않느냐고 따지듯이 물었지만, 약간 난처해하면서도 별다른 설명 없이 그 관행은 계속되었다.그런데 문제는 나의 속마음이었다. 그렇게 항의한 것은, 다른 실무자들과 구별되게 그에게만 굳이 ‘박사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부당해서 한 말일 뿐, 나를 박사님이라고 불러주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속으로는, 그 실무자는 그의 연구 분야와 연관 있는 업무를 하고, 나는 전공과는 별 상관없는 자원 활동을 하고 있었으니 굳이 ‘박사님’이라고 부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던 중 며칠 전, SNS에서 밸러리 영의 ‘여자는 왜 자신의 성공을 우연이라 말할까’라는 책을 보고 생각이 많아졌다. 두어 달 전, S여대 교수가 내게 능력에 비해 성취가 적다며 몇 가지 제안해준 것을 잊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이 책은 ‘가면 증후군’을 다룬 것인데, 가면 증후군이라는 이름은 1978년 미국의 심리학자 폴린 클랜스와 수잔 임스가 처음 붙였다고 한다.가면 증후군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 경험할 수 있지만, 이 책에서는 여자에 집중해서 설명하고 있다. 여자들이 남자에 비해 자신의 재능과 성취를 행운이라고 생각하거나, 실제 자기는 형편없는데 남을 속이는 사기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고 한다. 재능 있고 어느 정도 성취도 한 사람들이 증후군에 빠지는 이유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자기가 실패하면 ‘거봐, 남들이 알고 있는 나는 가짜거든. 나는 실패할 만해.’ 하면서 자기합리화를 위해 가면 증후군에 빠진다는 것이다. 미국의 유명 여배우 르네 젤위거도 밤에 일어나 ‘그 사람들은 왜 나한테 이 역할을 준 거지? 내가 자기들을 속이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것일까?’같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밸러리 영은 먼저 ‘가면 증후군’이 내 삶에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인식하라고 한다. 예를 들어, 내게 ‘박사님’이라는 호칭에 걸맞지 않다는 의심하는 것이나 낙제 한번 없이 학위를 받은 것, 유명한 대학에서 오래 강의한 것 모두 순전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가면 증후군’의 작동 방식이다.더불어 실패를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힘도 필요하다. 내게 능력이 있는지 자신을 의심할 시간에, 그동안 내가 성취한 일이 무엇인지 목록을 만들어서 균형 감각을 만들고,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실패하면 다시 도전해보자. 그러니, 가면 증후군에 시달리는 여자들이여, 자신의 재능과 성취에 대한 의심은 이제 그만 거두자.

2023-03-12

언어폭력 ‘정도’라니요?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초등학교 때 장면 하나, 하늘은 파랗고, 길 양옆에는 벼가 넘실거리는 초가을, 경운기가 다닐 만한 흙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멀리서 꼬마 서너 명이 ‘돼지야’ 하고 소리쳤다. 나를 놀리는 말이다. 그날 나는 땅속으로 꺼지고 싶었다. 장면 둘, 마루 끝에 앉아 있는 나를 가리키며 방에서 엄마가 이웃집 아줌마에게 ‘덩치는 인왕산만 한 것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날 나는 마루 밑으로 사라지고 싶었다.이 두 장면의 ‘맥락’을 보자면, 길에서 우연히 만난 그 꼬마들의 놀림은 위협과는 거리가 먼 단순한 장난이었고, 엄마의 인왕산 비유는 나의 심한 낯가림을 걱정하면서 나온 말이라 학대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돼지’와 ‘인왕산’이라는 단어에 심하게 위축되고 이후 성격 형성에 영향을 받았는데, 그것은 나의 ‘기질’ 때문이다. 그래도 이런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언어폭력이라고 죄를 묻기는 어렵다.그러나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었던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 경우는 이와는 성격이 다르다. 정순신의 아들은, 내가 길에서 우연히 몇 번 만난 꼬마가 아니라, 기숙사에서 피해자와 같은 방을 쓰는 동급생이었고, 아버지의 권력을 자랑하며 피해자에게 ‘좌파 빨갱이’, ‘제주도에서 온 돼지’라고 했다. 8개월 이상 지속된 혐오 표현은, 피해자가 호소한 고통을 고려했을 때 명백한 언어폭력이다.그런데 그 부모는 학교의 전학 조치에 불복해서 무죄를 주장하며 대법원까지 소송을 이어가서 가해 학생은 1년 이상 학교에 더 있었다. 피해자가 자살 시도까지 하고 학업을 포기했는데도 변호인 측은 ‘맥락’을 봐야 한다거나, 피해자의 ‘기질’의 문제로 몰아갔다고 한다. 그들이 내세운 논리 중에 특히 내 눈에 들어온 부분은 ‘언어폭력 정도로 고등학교 남학생이 일반적으로 피해 학생과 같은 피해를 입는다고 보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리사 펠드먼 배럿은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에서 인간은 ‘말’로 서로를 조절한다고 말한다. 이 책에 소개된 한 실험을 보면, 실험 참가자들에게 교통사고가 나기 직전의 위험 상황을 단순히 말해주기만 했는데도 심박수, 호흡, 신진대사, 면역체계, 호르몬은 물론이고, 체내 여러 가지를 제어하는 뇌 시스템의 활동이 증가했다고 한다. 이렇게 사람은 혐오스러운 말을 들으면 뇌는 위험을 예측하여 다량의 호르몬을 혈류로 보내어 생존에 필요한 신체 예산을 탕진하게 된다.이렇게 ‘말’은 인체를 조절할 수 있어서 몇 달 이상 지속적이고 강력한 언어폭력은 만성 스트레스를 일으키고 뇌를 갉아먹는다고 한다. ‘언어폭력 정도로 고등학교 남학생이 이런 피해를 입을 수 없다’가 아니라 ‘언어폭력만으로도 누구나 피해 학생과 같은 피해를 충분히 입을 수 있다.’그러나 피곤할 때 한마디 격려의 말이 마음을 진정시키듯이, 배럿은 말로 망가진 뇌는 말로 회복될 수 있다고 한다. 가까운 이의 따듯한 말도 피해자를 도울 수 있지만, 무엇보다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가 피해자의 회복에 제일 중요하다. 그날이 꼭 오기를 바란다.

2023-03-05

독서율 높이는 법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올해 EBS에서는 우리나라가 문해력 등 사회적 소통 능력이 부족한 이유가 독서율이 낮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독서율을 높이기 위해 ‘역사를 바꾼 책’을 선정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독서율이란, 15세 이상 중에서 일반도서를 일 년간 한 권 이상 읽거나 들은 사람의 비율이다. 교과서, 학습 참고서, 수험서나 잡지와 만화는 제외되지만, 단행본으로 발행된 것이라면 그림책이든 동화든 소설이든 상관없다. 웹소설도 도서에 포함된다.그러고 보니, 독서와 관련된 에피소드 두 개가 생각난다. 하나는, 동네에서 20여 년째 독서 모임을 꾸준히 하고 있는데, 초창기 독서 모임에 참여하던 한 지인이 서울대 나온 자기 이웃에게 권했더니 책이라면 지긋지긋하다며 손사래를 치더라는 일화이다. 지금 생각하니 거절하는 핑계였나 싶기도 한데, 그때는 명문대 졸업생이 얼마나 책에 질렸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 놀랐다.다른 하나는 작은애 이야기다. 작은애가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읽은 책은, 절반은 그림으로 된 ‘구렁덩덩 신선비’와 ‘나무꾼과 선녀’ 딱 두 권이었다. 그런데 중학교에 가면서 폭발적으로 독서량이 늘더니 지금도 직장에서 독서 동아리에 들어 책을 읽고 있다. 학년에 맞는 책 읽어야 한다고 강요받지도 않고, 자기가 선택한 책을 책장이 떨어질 정도로 읽은 것이 즐거운 기억으로 쌓였기 때문일 것이다.‘2021년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19세부터 종이책 독서율은 40%이고, 전자책, 오디오북을 포함한 종합 독서율은 47.5%라고 한다. 성인의 절반 이상이 어떤 형태의 책이든 1년에 단 한 권도 안 읽은 셈이다. 독서율 기준이 이렇게 낮은 것을 보면, 독서율이 낮다는 것은 문해력 문제라기보다는 그냥 책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실제로 2018 책의 해 기념으로 진행된 ‘독자 개발 연구’에 따르면,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독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강압적인 독서로 인한 독서 혐오도 중요한 원인이라고 한다. 각종 기관에서 정해주는 추천 도서로 학습용 독서를 하다 보니 독서가 즐거운 활동이라는 경험이 부족하고, 그래서 성인이 되면 독서에 고개를 돌리게 되는 것이다.즐거운 독서 체험은 독서율을 높이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핀란드가 세계에서 독서율이 가장 높은 이유도 어렸을 때부터 즐거운 독서 체험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2018년 국제독서콘퍼런스 영상을 보니, 핀란드에서는 책 읽어주는 할머니 전통은 아주 오래되었고, 최근에는 독서 도우미 개를 이용하여 어린이들에게 책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 있단다. 유치원과 학교는 도서관과 연계하여 독서를 촉진하며, 도서관은 지하철 역 근처에 있어 이용 편의성도 높다. 이런 제도 속에서 즐거운 독서가 생활화되다 보니, 자기가 원하는 책을 스스로 발견해나가게 되고 나이가 들어도 책을 찾는 비율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니 19세 이상의 독서율을 높이려면 장기적인 안목으로 접근해야 한다. 즐거운 독서 경험을 많이 하게 하는 것, 그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

2023-02-26

역사를 바꾼 책이 독서율을 높일까?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4년 전쯤, 중장년을 위한 사회 교육 기관에서 강의할 때 대학원 수료 학력 수강생의 포부를 들은 적이 있다. 연세가 60쯤 되어 보이는 분이었는데 죽기 전에 서울대 추천 도서 100권을 다 읽고 싶다고 한다. 이유를 물으니, 서울대에서 추천했으니 읽으면 좋을 것 같다는 것이다.그런데 며칠 전 EBS에서는 역사를 바꾼 책 100권을 선정하여 전 국민에게 홍보할 예정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이 발표를 보니, 그때 수강생도 생각나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유명하기도 해서 서울대 목록과 비교해보았다. 과연 서울대 100권 중에는 과학책이 10권인데 비해 EBS의 과학책은 19권이었다. 두 기관의 추천 목적도 달랐다. 서울대학생을 대상으로 만든 서울대 목록에서는 “고전이란 모름지기 인류의 지혜가 집약된 보고이므로 고전에 대한 독서를 통해 판단력과 사고력을 함양하는 한편 성숙한 지성인으로서의 기본 소양을 기를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히고 있다.반면, EBS는 독서율 저하 때문에 문해력이 부족하고 개인 역량이 떨어지며 사회적 소통 능력이 낮다고 보고, 이런 능력을 키우기 위해 역사를 바꾼 책으로 독서율을 높이는 정책을 펼치겠다는 것이다. 작년에 방송된 ‘당신의 문해력+’13부작에서 나온 문해력 문제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 방송에서는 업무용 이메일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어휘력이 부족해서 쩔쩔매는 등 일상적인 의사소통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례를 보여주었다.그런데 역사를 바꾼 책 선정 기준이 학제 간 의미를 중시하고 특히 과학책의 비중이 높다면서 이전의 다른 목록과 차별성이 있다고 강조해도, 서울대 목록과 25권이 겹치고 나머지 75권도 서울대 목록과 난이도는 비슷하다. 철학 비중이 높아서 그런지 오히려 더 어려워 보인다. 칸트의 저작 중 서울대에는 ‘실천이성비판’한 권이 있는데 비해, EBS에는 ‘순수이성비판’과 ‘판단력 비판’, 두 권이 있다. 칸트의 저작이 왜 두 권이나 들어갔는지도 의아하고, ‘순수이성비판’과 ‘판단력 비판’이 ‘실천이성비판’보다 당대 사조를 바꾸는 데 더 기여했다는 것인지도 궁금해진다.‘역사를 바꾼’을 앞세운 것을 보면, 아무래도 EBS에서 기대하는 문해력 수준은 단순히 글자를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이 아니라 비판적 사고력과 판단력까지 포함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능력은 그냥 읽기만 해서는 높아지지 않는다. ‘이 말이 맞는 말인가?’, ‘논리적으로 문제는 없나?’, ‘현실에서 적용될 수 있을까?’ 숙고하며 읽어야 한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한 핵심 메시지를 전문가가 설명하는 홍보 영상까지 만든다고 하니, 그렇지 않아도 질문하기 어려워하는 독자들이 이렇게 숙고할 기회가 있을지 의문이 든다.어떤 목적을 위해 도서를 선정할 때는 무엇보다도 현재의 상태를 고려해야 한다. 고학력자의 교양 쌓기 목록 같은 고전 읽기 운동으로 독서 진흥이 잘 될지, 한 방향 홍보 영상이 문해력 향상과 사회적 소통 능력 제고라는 목적을 얼마나 달성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2023-02-19

행복한 청소부의 노동 시간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율곡로, 퇴계로, 세종로 등 서울에는 위인 이름을 딴 거리가 많다. 독일도 그런가 보다. 독일 작가 모니카 페트의 ‘행복한 청소부’에 나오는 청소부는 예술가 이름을 딴 거리에서 표지판을 닦는 사람이다. 그래서 표지판이 바흐 거리, 베토벤 거리, 토마스 만 광장 등 예술가들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어느 날 청소부는 꼬마가 하는 말을 듣고 표지판의 예술가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그 후 5시에 퇴근하면 음악회와 오페라 공연에 다니면서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쌓는다. 나중에는 대학에서 강의해달라는 요청을 받지만, 청소부는 청소부로서의 삶이 너무나 행복해서 그 요청을 거절하고 변함없이 표지판을 닦았다고 한다.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이 책을 권하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어른에게 시사하는 바는 많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청소부가 이렇게 행복한 것은 청소부가 5시에 퇴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해지려면 적정한 노동과 퇴근 시간이 보장되어야 한다. 참고로, 2021년 현재 독일의 연간 근로 시간은 1천349시간으로 한국보다 566시간이 적다.시간적 여유가 행복에 미치는 영향을 알 수 있는 또 한 가지 사례는 네덜란드다. 얼마 전, 티비 프로그램 ‘물 건너온 아빠들’에서 네덜란드 사람 톨벤이 25개월 된 딸을 키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딸의 손놀림이 느려도 아빠가 전혀 재촉하지 않고 아이의 속도에 맞추어 주자, 패널들이 모두 톨벤의 여유에 감탄한다. 이런 육아법 때문인지 네덜란드는 아이 행복지수가 세계 1위라고 한다. 반면, 한국 아이의 행복지수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OECD 국가 중 꼴찌를 맴돈다. 톨벤은, 이렇게 네덜란드 부모들이 아이를 기다려 줄 수 있는 이유는 근로 시간이 적고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실제로 네덜란드·덴마크·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의 평균 노동 시간은 주 28~33시간이라고 한다. 놀라운 것은 네덜란드는 이런 제도를 1980년대부터 실시했다는 것이다.그런데 우리 정부의 시계는 거꾸로 가고 있다. 주 12시간까지만 연장 근로를 허용하는 주 52시간 근로제를 제대로 실시한 지 2년이 안 되었는데, 올해부터 정부는 연장 근로 방식을 월 단위나 분기, 반년, 1년 등으로 다양하게 적용하여 최대 69시간으로 늘릴 예정이라고 한다. 문제는, 2021년 기준 한국의 연간 근로 시간은 1천915시간으로, 지난 26년간 멕시코의 2천128시간에 이어 2위를 고수해왔다는 것이다. 최근 5위로 밀려났지만, 근로 시간이 개선된 것은 아니고 한국보다 근로 시간이 많은 페루, 아르헨티나, 코스타리카가 OECD에 가입했기 때문이다.작년 10월, SPC 계열사 공장의 여성 노동자 사망은 연장 근로로 인한 과로 때문이었다. 2016년 IT업계 노동자의 연이은 자살도 과로 때문이었다. 어른의 연장 근로는 아이의 행복은 물론, 한 가정의 행복을 결정한다. 부모가 아이에게 ‘행복한 청소부’는 책에나 있다고 말하게 해서는 안 된다. 행복한 청소부는 현실에 있어야 한다.

2023-02-12

과소비인가 투자인가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며칠 전 친구에게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멕시코 여행 중이던 어느 가족이 겪은 일이라고 한다. 그 가족이 머물던 옆집에서 냉장고가 내려오기에 이사 가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여행비를 마련하려고 냉장고를 파는 중이었다고 한다. 돌아와서 냉장고 없이 어찌 사느냐고 물으니, 그건 그때 생각하면 된다고 답했단다. 정말 극단적인 사례인 데다 멕시코라는 문화에서나 가능한 일인가 보다 생각하다가도 요즘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는 플렉스 문화를 생각하니 그냥 웃어넘기기에는 여운이 남는 이야기였다.플렉스 문화의 한가운데 있는 세대는 단연코 MZ 세대이다. MZ 세대의 사전적 의미는 1980년부터 2004년까지 출생한 사람이지만, 대체로 20·30대를 지칭하는 말이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등 SNS에 인증샷이 유행하면서 플렉스 문화도 계속 확장되는 듯하다.청년들의 성형수술은 이제 당연한 통과의례가 되었고, 이들의 명품 소비도 급증하고 있다. 모건스탠리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2022년 명품 구입액은 1인당 약 40만원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았는데, 젊은 층인 한국의 밀레니얼 세대가 고가품 소비에 나선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해 한국의 전문가들은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탈출심리가 작용했다거나, 집 구매가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자기 보상 심리라는 등의 분석을 내놓았다. 다른 쪽에서는 청년 빈곤, 청년 부채가 심상치 않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는 상황이라, 이런 청년의 소비 행태를 과소비라고 보고 비판하고 있다.그런데 지난달 어느 신문에 MZ들의 과소비는 투자라고 볼 수 있다는 칼럼이 실렸는데 이에 동의하는 청년 당사자의 댓글도 달리고 여기저기 공유되기도 했다. 이 칼럼의 요지는, 네트워크 자본주의 시대에는 가방끈이나 스펙만으로는 부족하고 어떤 사람들과 어떤 비공식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인적 자본의 가치를 결정하기 때문에 청년들의 과소비는 인적 자본을 형성하기 위한 투자와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논란은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2년 전 중국에서도 청년의 과소비를 비판하는 기사에 더 나은 경험과 품위 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반박하는 의견이 이어졌다.한국의 경우, 청년 부채의 가장 큰 원인은 주택 구입 때문이라고 하니 부채와 과소비는 큰 관계가 없어 보인다. 한편, 19~34세의 83%가 연봉 4천만원 이하라는 작년의 연구보고서를 참고하면, 어떤 MZ들이 씀씀이가 큰 것은 경제 성장 시기에 성공한 그들 부모 덕일지도 모른다.겉만 보고 과소비와 투자를 구분하기는 어렵다. 같은 크루즈 여행이라도 누구에게는 소비고, 누구에게는 과소비고, 또 누군가에게는 투자이다. 자세한 내용도 모르고 MZ 세대의 소비 방식을 과소비라고 폄하할 것도 아니고, 인적 자본 형성을 위한 투자라며 안쓰러워할 일도 아니다. 이제 MZ에 대한 어설픈 뇌피셜 평가는 그만하고, 실증적인 조사와 연구로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 MZ가 만들어갈 미래를 위해 기성세대가 할 일이다.

2023-02-05

장미는 누가 키우나?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최근 지인의 친구가 시로 문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시를 써서는 밥벌이가 안 되어 부동산 공부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며칠 지나지 않아 SNS에서 황인숙 시인이 해방촌 옥탑방에서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방촌은 코로나19가 돌기 전, 어느 서점이 주최한 행사에 참여하느라 간 적이 있는데, 길도 좁고 꼬불꼬불한데다 가파르기까지 해서 힘들게 올랐던 기억이 난다.황인숙은 1984년 등단한 이래 큰 문학상도 여러 번 받고 작년에 내놓은 ‘내 삶의 예쁜 종아리’까지 8권의 시집과 9권의 산문집을 낸 중견 작가이다. 2010년 모 잡지사에서 인터뷰한 기사에도 해방촌 옥탑방에서 산다고 했던데, 부동산과 돈을 좇아 사는 세상에서 시인답다 싶은 숙연한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몇 년 전,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유명한 최영미 시인이 자신의 생활고를 SNS에 알려서 뉴스에 오르내린 적이 있는데, 두 시인의 삶이 겹쳐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두 시인의 삶이 시인 모두의 삶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이들에게도 나름의 사정은 있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유명한 작가들도 생활이 어려운데, 갓 등단한 문인이 글을 써서 생계를 꾸리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 지인의 친구가 부동산 공부로 방향을 바꿨다는 결정이 현명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빵뿐만 아니라, 장미도 필요하다. ‘빵과 장미’라는 표현은 1908년 미국 뉴욕에서 일어난 여성 노동자의 파업 투쟁에서 시작되었다. 뒤이어 여성 참정권 운동가 헬렌 토드가 ‘집과 안식처와 안전이라는 인생의 빵과 음악과 교육과 자연과 책이라는 인생의 장미’를 모든 사람이 누리기를 소망하는 글을 잡지에 쓰고, 시인 제임스 오펜하임도 ‘빵과 장미’라는 시를 발표하면서 ‘빵과 장미’는 인간답게 살기 위한 필수 요소를 상징하는 표현이 되었다.이렇게 인생에는 빵과 장미 모두 필요하다. 그러나 빵을 위해 사는 사람은 대부분 보상을 잘 받지만, 장미를 키우는 일에는 큰 위험이 따른다. ‘시’라는 장미를 키우는 사람은 더 취약하다. 시는 그냥 감상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뼈를 깎는 고뇌 끝에 나온 시의 전문이 금세 인터넷에 넘쳐흐르니, 시집은 팔리지 않고 시인의 삶은 더 궁핍해진다. 예전에 어느 사이트에서 시인 이름이 가나다 순으로 배열되어 수백 편의 시 전문이 공개되어 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해도 되나 걱정한 적이 있다.그나마 요즘에는 문인을 포함해서 문화예술인을 대상으로 정부 지원이 조금은 이루어지고 있어서 다행이다. 그러나 정부 지원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시인이 정당한 보상을 받도록 저작권을 보호해서 저자 허락 없이는 전문이 인터넷에 떠돌아다니지 않게 해야 한다. 더불어, ‘시’라는 장미를 즐기는 사람이 많이 늘어나 시집도 많이 팔리고 시 읽는 모임도 많아지면 좋겠다. 해방촌의 그 서점처럼 시인들과 대화하는 자리도 많아지면 좋겠다. 그러면 시인들이 작은 집이나마 월세 걱정 안 하고 장미를 키울 수 있지 않을까?

2023-01-29

가난해져도 우아하게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평생 정규직이었던 적은 없어서 월급을 받아본 적도 없고, 재테크에 눈이 밝은 것도 아니어서 근로 소득으로만 살아왔으나, 그래도 몇 년 전까지는 그럭저럭 소득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조금씩 강의가 줄기 시작하더니 3년 전부터는 코로나까지 겹쳐 강의가 더 줄었다. 그렇다고 수입이 괜찮았을 때만큼 일할 자신도 기회도 없으니 이제는 이 상황에 적응하는 법을 터득해야 할 것 같다.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을 쓴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역시 나와 비슷한 선택을 한 모양이다. 작가는 기자로 일하다가 해고된 후 전업 작가로 살아가면서 적은 돈으로 우아하게 사는 법을 찾아 나섰다. 마침내 그는 절약을 몸소 실천한 부모님의 모습에서 실용성뿐 아니라 우아함을 발견하고 현대 소비문화를 비판하기에 이른다. 당연한 말이지만, 적은 돈으로 우아하게 살기 위해서는 내공이 필요하다.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렇게 세상에서 정한 기준에 연연하다 보면, 항상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다. 오히려 내 삶의 우선순위를 알면 사회적 인정 여부에 크게 연연하지 않으면 큰돈 없이도 자신의 멋을 누릴 수 있다. 폰 쇤부르크 역시 진정한 가난이란 물질적 결핍이라기보다는, 건강이나 아름다움, 부유함을 좇으면서 그것이 완벽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그러니 내 삶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둘 것인가가 중요하다. 그렇다고 작가가 생각하듯이 값비싼 헬스클럽에서 화면을 바라보며 달리는 것을 경멸할 생각은 없다. 부자의 삶은 부자의 삶이고 나의 삶은 나의 삶일 뿐이다.작가의 관점에 가장 많이 동의하는 부분은 집에 대한 생각이다. 집이란 손님을 맞아들이는 자연스러움을 통해서 아름다워진다고, 그는 생각한다. 런던이나 파리, 빈 같은 도시에서는 집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스파게티뿐일지라도 친구들 몇 명을 집에 초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단다. 음식은 대화를 나누기 위한 매개일 뿐, 음식이 조촐하든지 화려하든지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는 고성능 음향기기나 대형 텔레비전, 디자이너 가구가 있다고 사람들이 즐겨 찾는 것은 아니라면서 친구들이 모여드는 집을 가진 사람, 가슴 답답한 비 오는 날에 찾아갈 수 있는 친구를 가진 사람이 부유하다고 한다.나 역시 수입이 줄다 보니, 소비에도 우선순위를 두게 되었다. 세워두기만 하던 승용차도 팔았고, 더 작은 집으로 이사할 상황을 대비해서 책도 계속 없애나가고 있다. 책으로 공간을 채우기보다는 지금처럼 친구들과 공부하면서 김밥과 소금빵을 먹는 공간이 내게는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굳이 숲을 고집하지도 않으니 어디로 이사 가더라도 동네 골목을 더 많이 걸을 것이다. 특히 은퇴하면 대부분 현업에 있을 때보다 줄어든 돈으로 살아야 한다. 이럴 때일수록 ‘상실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의 생활 양식을 자신의 척도로 삼지 않고’, ‘불필요한 일을 피하고 정말로 중요한 일을 존중’하다 보면, 참된 만족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노년에 우아해지는 지름길일 터이다.

2023-01-15

파레시아를 위하여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어느 날부터인가 임금님 귀가 점점 커져서 당나귀 귀만큼 길어졌다. 이 사실은 모자 만드는 장인만 알고 있었다. 임금이 비밀을 지키라고 요구했지만, 장인은 죽기 전 도림사 대나무 숲 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큰 소리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고, 그 후로 바람이 불 때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생겼다’는 소리가 들렸다. 임금이 대나무를 자르고 산수유를 심었지만, 산수유가 자라면 그 소리가 여전히 들렸다.‘삼국유사’ 경문왕 조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가 원조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모자 장인이 아니라 이발사가 소문을 퍼트린다. 미다스 왕에게 불만을 품은 아폴론이 미다스 왕의 귀를 잡아당겨 귀가 길어졌는데, 이발사에게만은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유럽과 페르시아 지역에 퍼지고 신라에까지 전해졌다고 하니,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새해가 되면서 ‘파레시아’라는 글쓰기 모임을 만들었다. ‘파레시아’는 ‘모든 것을 말하다’,‘진실을 말하다’라는 그리스어이다. 모자 장인이나 이발사처럼 진실을 말하지 못하면 탈이 난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자 장인이 대나무 숲에 가서 땅을 파고 외친 것은 처벌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학문의 세계에서조차도 기득권을 가진 집단과 다른 견해를 말하는 것은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특히 사회적 소수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정체성을 밝히는 일은 엄청난 부담을 각오해야 한다. 이혼율이 높아졌다지만 아직도 공공연하게 말하기 힘든 분위기다. 혹시나 부당한 상황에 맞닥뜨릴까 자기 검열에 시달리는 예술가들도 많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질환이나 타고난 것까지 감추어야 하는 현실은 당사자에게 큰 고통을 준다. 치매 환자를 둔 가족이 방송에 나왔다가 동네에서 죄인 취급 당했다는 방송을 보았다. 이웃 중에는 자녀가 발달 장애가 있다는 것을 누가 알세라 쉬쉬하며 자녀를 가정에 꽁꽁 감추고 사는 이도 있다. 성 소수자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어렵다.그럼에도 용기 있게 자기를 드러내는 일이 ‘파레시아’이다. 푸코는 파레시아를 자기 배려, 자기 돌봄이라고 한다. 어제 스피치 동호인 모임에 온 어느 참가자의 경험은 푸코의 말에 딱 맞는 사례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47세라면서 아직 결혼을 못 했고 붕어빵을 팔며 원룸에 살고 있다면서 오랫동안 그런 상황을 감추느라 에너지를 다 썼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것도 내 삶인데’ 하는 생각이 들어 밝히고 나니 그제서야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고 유머도 늘었다고 한다.이렇게 ‘다 말하는 것’은 자신을 자기답게 존재하게 해주고 남과의 관계도 회복시켜 준다. ‘다 말하기’ 위해서는 47세 참가자처럼 안전하게 들어주는 모임에서부터 말하기 연습을 하는 것이 좋다. 쓰기든 말하기든 올해는 자신과 동료를 믿고 세상에 진실을 표현하는 모임이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2023-01-08

다른 사람 의자에 앉아 보세요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며칠 전, 대학원 은사님과 선배와 강릉 율곡연구원에서 열리는 학회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가 취소되었다. 율곡연구원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다리에 많이 무리가 될 것 같다고 하신다. 은사님이 몇 달 전 다리를 삐었는데 치료를 잘못해서 나들이 이틀 전까지 불편감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왼쪽 발목에 문제가 있어 걷기 힘들 때가 여러 번 있었기에 다리가 아프면 얼마나 불편한지 잘 알고 있다.새해가 밝았다. 들뜬 마음으로 의욕적인 한 해를 기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힘겨운 나날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을 비롯한 인권보장을 외치며 2021년 12월부터 서울 지하철 시위를 이어온 전국장애인철폐연대(전장연)에게도 새해는 희망보다는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 지난 1년여간의 시위로 많은 서울 시민이 불편을 호소하고 있는 데다 ‘지하철 탑승 시위 지속하면 더이상 관용이 어렵다’는 오세훈 서울시장의 단호한 태도 때문이다.장애인 예산 부족이 시민 잘못도 아닌데 시민이 불편을 왜 겪어야 하느냐는 항변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장애인 인권보장을 호소했어도 아무도 몰랐다가 지하철 시위를 해서야 정치인과 시민에게 들리기 시작했다는 전장연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 생각해보니, 지하철 계단에 종종 보이던 장애인용 리프트가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았어도 전장연의 시위가 있기 전까지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현재의 질서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사람 중에 질서의 결함을 다른 사람보다 강하게 느끼거나 그 결함에 희생되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오에 겐자부로의 스승으로 알려진 와타나베 가즈오 교수의 말이다. 누구에게는 당연하고 필요한 질서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고통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하면서, 불관용을 벌하기 위해 불관용으로 맞서는 것을 ‘관용의 자살’이라고 한다. 전장연이 출근하는 직장인에게 불관용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을 다시 불관용으로 맞서는 것은 민주주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뜻이다. 민주주의는 사소한 장소들에서 모든 사람이 무사히 함께 살아가게 하는 대화의 연속이라는 와타나베의 말이 마음을 울린다.장대익은 ‘공감의 반경’에서 느낌을 중심으로 하는 엠퍼시는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기 쉽다면서 사고를 통한 엠퍼시를 강조했지만, 사고를 통해 엠퍼시를 경험하기는 말처럼 쉽지는 않다. 감정 경험이 너무 강렬하고 직접적이다 보니 자기 사고의 합리성이나 타당성을 따져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내가 서 있는 자리를 유지하면서 남의 고통을 이해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진정한 ‘엠퍼시(empathy)’를 갖기 위해서는 자기가 겪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남의 의자에 앉아 보는 것이다. 다른 사람 의자에 앉으면 내 자리에서 보던 것과 다른 것이 많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내게는 안 보이기도 한다. 새해에는 국회의원과 서울시장이 휠체어를 타고 하루라도 다녀보고 전장연과 대화하기를 바란다.

2023-01-01

옐로도 화이트도 블루도 아닌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며칠 전, 애니어그램을 공부하는 지인이 그동안 자신의 성격 유형이 7번인 줄 알았다가 전문가 상담 결과 2번이라는 말을 들었다면서 지난 몇 년간 자신을 잘못 알았다는 자괴감이 크게 밀려왔다고 전해왔다. 애니어그램은 사람의 성격 유형을 아홉 가지로 분류하여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데 많이 활용되는 성격 검사 방법이다.애니어그램 강사들이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성격 유형 번호로 사람을 규정짓지 말라는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나는 몇 번, 너는 몇 번 하면서 정체성을 규정하거나 판단하는 도구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 가끔 어떤 유형이 열등하거나 우월한 유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이론에서 가장 성숙한 인격은 이 아홉 가지를 다 가지고 있다고 한다.많은 명상 지도자들이 ‘자아’를 찾으라고 한다. 그러나 자아가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굳이 불교의 ‘무아’를 들먹이지 않아도, 질문 몇 개만으로도 자아라는 나의 본질은 없다는 것을 금세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런 설명으로 우리가 ‘자아’의 틀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차라리 사람의 정체성은 하나로 규정하기에는 너무나 다면적이고, 그 다면성 하나하나도 계속 변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논픽션 작가 브래디 미카코의 두 권짜리 책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는 일본인인 저자가 영국 사람과 결혼하여 영국에서 살면서 아들을 낳아 키우는 이야기이다. 제목은 혼혈인 중학생 아들이 백인이 주류 사회인 영국에서 자기 정체성을 하나로 규정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인종 차별 사건을 통해 겪는 감정을 나타내고 있다.무엇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아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동양인으로 규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백인이 되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동양인이기도 하고 백인이기도 한 자신의 상태를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약간 블루’라고 했다가도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린’으로 바꾸는 모습 또한 정체성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가가 아들의 변신을 응원하는 것은 정체성에 대한 아들의 유연한 사고가 작가의 지향과 일치하기 때문이다.나희덕의 시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처음에는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가, 조금 후에는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 나는 그 나무를 보고 알았습니다. /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라고 한다. 처음에 시인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복숭아꽃들이 부담스러워 가까이 가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눈부실 만큼 다양한 복숭아나무 꽃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이다.많은 사람이 ‘자아’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하나의 색으로 규정하려는 경향이 있고, 다양한 인종, 취향, 삶의 방식 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러나 다시 보면, 내 안에도 무수한 색이 있고, 세상 역시 그렇다. 그 다양성은 삶을 눈부시게 만든다.

2022-12-25

뇌 말고 몸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한 달 전, 벼르고 벼르던 스탠딩 책상을 샀다. 최근 들어 30분만 앉아있어도 집중력이 떨어져서 까만 것은 글자고 하얀 것은 종이구나 하는 상태가 되고,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하면 다리도 저리고 허리도 아팠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큰마음 먹고 구매했는데, 서너 시간 지나도 멀쩡하다. 앉아있을 때는 허리가 불편하여 주의가 분산되는데, 서 있을 때는 덜 불편하니 작업 집중력이 더 높아지는 것 같다. 물론 깔창 있는 운동화를 신는다.애니 머피 폴의 책 ‘익스텐드 마인드’를 보니, 비슷한 사례가 나온다. 미국의 초등학교 교사도 학생들 책상을 스탠딩 책상으로 교체하고 수업 듣는 자세도 편하게 하고 움직일 수 있게 했더니 학생들이 더 집중하고 자신감 있고 생산적으로 변했다고 한다.앉아있는 것보다 서 있는 것만 작업에 효과적인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일하는 것도 집중력이 증가한다고 한다. 방사선 전문의 제프 피들러 박사는 매일 1만5천 개 사진을 앉은 자세로 검토하다가 사진을 대형 스크린에 띄워 놓고 그 앞에 트레드밀을 설치해서 걸으면서 사진을 보았더니 이상 징후를 더 잘 찾아내게 되었다고 한다. 서 있거나 걸을 때 작업 능률이 오르는 이유는 신체 활동을 할 때 우리의 시각이 더 예민해지기 때문이란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하루에 한두 시간을 꼭 달린다고 하니, 운동을 한 후에도 창의성이 높아지는 것 같다.제스처는 소통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우리가 어떤 개념을 설명하거나 어떤 이야기를 할 때 제스처를 사용하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 말을 더 잘 이해하고, 제스처가 있을 때 한 말을 더 기억하기도 한다. 밀턴 에릭슨이라는 심리 상담사는 내담자의 동작을 은연중 따라 하는 것만으로도 내담자와 자연스럽게 공감대가 형성되어 상담이 잘되었다고 한다.자연의 다양한 색과 형태 역시 창의성에 자극을 준다. 저자는 예술가 잭슨 폴록이 롱아일랜드에 갔다가 위안과 자극을 동시에 받고 바로 그 지역으로 이사 가서 걸작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사례를 소개해준다. 자연은 우리의 인지 부담을 줄여주어 창의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인위적인 공간 역시 창의성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연극 수업을 받으러 갈 때 매시간 책상과 의자 배치가 달라서 수업에 관심이 더 생기고 다음 수업도 기대하게 되었던 것은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셈이다. 국립도서관에서 한두 시간만 있어도 두통을 느꼈는데, 도서관 리모델링 후에는 서너 시간 있어도 컨디션이 좋았던 것 역시 이런 맥락일 것이다.생각은 뇌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라면서, 움직여야 창의성이 발휘된다고 하는 저자의 말을 듣다 보니,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고 온종일 교실에 앉아서 공부만 하는 우리나라 수험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교육 방식도 말로만 하거나 기껏해야 영상 자료를 활용할 뿐이다. 교실 모양도 천편일률적이다. 손과 몸을 움직이는 활동을 많이 하고, 공간에도 다양하게 변화를 주는 일은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한창 성장하는 학생들에게 특히 중요하다. 학생을 움직이게 하라.

2022-12-18

릴리푸트읍이 그렇게 나쁩니까?

유영희 작가 지금도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죽었다는 뉴스가 들리고 있다. 조사하면 언제나 노동자가 무리한 작업 상황에서 일하고 있었음이 밝혀진다. 그렇게 죽음이 이어져도 달라지는 건 없다. 연작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가 2007년에 한 인터뷰를 보면, 1978년에 나온 이 책이 30년이 지나도록 읽힐 줄 몰랐다고 한다. 그러고도 15년이 더 지났지만, 아직도 이 책은 유효한 것 같다.대강의 내용은, 아버지, 엄마, 영수, 영호, 영희 가족이 재개발로 살던 곳에서 쫓겨나 은강이라는 도시에 정착하여 저임금 노동자로 고단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다. 결국 난장이 아버지는 삶을 스스로 마친다. 이 소설집에는 모두 열두 작품이 실려 있는데, 그 중 ‘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에서 영희는 ‘릴리푸트읍’을 말하며 아버지가 생각나 눈물짓는다. ‘릴리푸트읍’은 가상의 국제 난장이 마을이다.“난장이들에게 릴리푸트읍처럼 안전한 곳은 없다. 집과 가구는 물론이고, 일상 생활용품의 크기가 난장이들에게 맞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곳에는 난장이의 생활을 위협하는 어떤 종류의 억압·공포·불공평·폭력도 없다. …. 릴리푸트읍에는 전제자가 없다. 큰 기업도 없고, 공장도 없고, 경영자도 없다. 여러 나라에서 모인 난장이들은 세계를 자기들에게 맞도록 축소시켰다. …. 독자적인 마을을 열망한 작은 힘들이 난장이 마을을 세웠다.”이 문단은 10여 년 전 어느 대학의 논술 모의고사에 나온 부분이기도 하다. 출제자는 릴리푸트읍을 비판하라고 했고, 예시 답안은 마을이 난장이들에게만 맞추어져 있는 획일적인 곳이어서 난장이가 아닌 사람들은 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양성을 지향한다는 명분으로 사회적 약자가 자기를 보호하려는 노력을 이렇게 뒤틀다니, 아무리 사고력을 시험하는 논술 문제라고 하지만,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최근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최병천의 ‘좋은 불평등’이라는 책을 보니 조세희의 이 작품이 다시 떠오른다. 1장 ‘좋은 불평등과 나쁜 평등’은, 평등은 좋고 불평등은 나쁘다는 기존 관념을 깨는 도발적인 제목이다. 저자는, 불평등이 심화된 것은 1994년부터인데, 이때부터 국내 총생산이 높아지고 대기업도 생겨서 덩달아 노동자의 임금도 올랐다고 하면서, 이것을 ‘좋은 불평등’이라고 한다. 아마도 저자는 불평등해도 모든 국민이 가지게 될 파이가 커지면 좋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릴리푸트읍에는 경제성장을 추동할 수 있는 강력한 전제자도 없고, 성장의 동력이 되는 대기업도 없다. 모의 논술 출제자에 의하면 릴리푸트읍은 획일적이어서 문제였는데, 최병천에 의하면 가난해서도 문제가 된다. 이렇게 릴리푸트읍을 나쁘다고 해도 괜찮은 것일까?중고등학교 사회 교과서에는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등 사회적 소수자 모두 천부인권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천부인권을 어떻게 보장해야 하는지는 내용이 없다. 장애인과 임금 노동자에게도 천부인권이 보장되는 사회, 그런 사회를 꿈꾸기가 점점 더 힘겨워지는 것 같다.

2022-12-11

대표라는 무게

유영희작가 2022년은 참 힘 빠지는 한 해였다. 국정 지지도를 회복하지 못하는 집권 여당은 물론,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 거대 야당의 행태에 국민의 한숨은 날로 커지고 있다.집값은 좀 내려간 듯하지만 거래 절벽으로 큰 효과는 없는 상태다. 고물가 때문에 실질 소득은 2.8% 줄고, 하위 20% 가구는 명목 소득마저 줄어들어 빈부 격차는 더 커졌다.이렇게 우울한 한 해를 보내던 우리 국민에게 12월 3일 새벽 울려 퍼진 대표팀의 월드컵 16강 진출 소식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우리 팀이 16강에 진출할 확률은 9%였고, 32강 진출도 어마어마한 성과였다고 하니,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한국이 포르투갈에게 먼저 1점을 내주었을 때 선수들이 얼마나 절망했을까? 우리가 1점을 얻어 추가 경기를 하게 되었을 때의 선수들의 긴장감 역시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상대 선수 7명에게 둘러싸인 손흥민이 가랑이 사이로 환상적인 패스를 하고, 열심히 공을 따라온 황희찬이 귀신같이 이 공을 잡아채어 골을 넣었으니, 소설을 쓴대도 이런 역전극은 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우루과이와 가나의 경기 결과가 나오기까지 5분은 선수들에게 숨 막히는 시간이었을 것이다.무엇보다 이 역전 드라마가 더 감동적인 이유는 손흥민과 황희찬의 부상 투혼 때문이다. 손흥민은 바로 한 달 전 챔피언스리그 경기 중 부상으로 안와골절 수술을 받아 마스크를 끼고 뛰고 있었고, 역전 골을 넣은 황희찬 역시 허벅지 부상으로 1, 2차 전에는 출전도 하지 못하고 3차 전에서도 후반전에서야 뛸 정도로 컨디션이 안 좋은 상태였다.이런 부상에도 이들을 열심히 뛰게 한 원동력은 1억6천만 원의 포상금이 아니다. 손흥민은 인터뷰에서, 9%라는, 그 작은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너무나 많이 노력했고, 부담 속에서 성장해왔다고 하면서, 골 넣은 것도 기쁘지만 무엇보다 16강 진출이 기쁘다고 한다. 16강 진출이 온 국민의 열망이라는 것을 선수들은 너무나 잘 아는 것이다. 개인의 명예나 부는 그 책임을 다했을 때 뒤따라오는 포상일 뿐이다.그런데 정작 안전과 생활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정치인이 얼마나 있는지 의심스럽다. 국민을 위해 봉사할 것을 약속하여 선출되었건만, 당선된 후에는 공복으로서의 책임은 뒷전이고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챙기는 데 급급하다. 10·29 참사만 봐도 일선에서 책임져야 하는 용산구청장은 거짓말까지 하며 발뺌하기 바쁘고, 수해로 일가족이 참사한 지역에 간 정치인은 비가 와야 사진이 잘 나온다는 망언까지 서슴없이 한다.요즘 내가 사는 지역의 기초 의회 정례회를 참관하는 중이다. 의원들이 자료를 꼼꼼히 살펴보지 않고 오거나, 공무원의 답을 듣지도 않고 윽박지르거나, 심지어 결석하는 등 기대에 못 미치는 의원들이 여럿 보였다. 중앙정치인들처럼 이들에게도 대표라는 무게는 가볍기 그지없었다. 혹시 우리가 스포츠에 거는 기대만큼 정치에 관심 갖지 않아서 이들에게 대표라는 무게가 이토록 가벼운 것일까?

2022-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