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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정을 다 말해야 하는 이유

등록일 2023-06-18 18:28 게재일 2023-06-19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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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희 작가
유영희 작가

지난 6월 14일, 4년 만에 서울국제도서전에 방문했다. 2020년과 2021년에는 코로나19로 못 갔고, 작년에는 내 사정으로 못 갔다. 이 행사는 해마다 주제가 있는데 올해 도서전의 주제는 ‘비인간, 인간을 넘어 인간으로’라고 하여, 인간과 비인간의 공존을 강조했다고 한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취지문을 읽어 보니, 비인간은 인간이 아닌 자연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예년에는 남녀 섞어서 세 명이던 홍보대사 인원을 일곱 명으로 늘리면서 모두 여성 문인만 내세운 것을 보니 아무래도 비인간이란 남자가 아닌 존재, 여성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주제 때문인지 발걸음이 멈추는 곳마다 여성이 있었다. 에밀리 디킨슨 시를 전문으로 내는 파시클 출판사의 박혜란 대표의 북토크에도 참가하여 디킨슨 이야기도 들었고, 여성들의 자기 이야기가 담긴 책도 몇 권 샀다.

출판사 핌의 ‘어쩌면 너의 이야기’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 만난 주부들의 동화 에세이 모음집인데, 동화 형식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우회적으로 말하는 독특한 형식이었다. 직접 글과 그림을 다 작업한 참여자도 있고, 딸이나 남편이 삽화를 그린 글도 있었다. 자상한 시간에서 펴낸 ‘감정愛쓰다’는 그보다는 직접적으로 자기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 글을 올린 참여자들 역시 모임을 통해 자기 이야기를 나누며 글을 썼다. 담다 출판사의 ‘3923일의 생존 기록’은, 저자 김지수가 불안, 공황, 우울장애와 더불어 생존해온 기록이다. 최근 암 생존자 여성의 투병기 ‘엉망인 채로 완전한 축제’도 읽었는데, 사회 통념상 암보다 더 말하기 어려운 것이 마음의 병이라서 김지수의 고백은 더 인상 깊었다.

‘파레시아’라는 희랍어는 ‘세상을 향해 다 말하다’라는 뜻이다. 본래 파레시아는 정치적 의미가 강하여, 키케로는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까지 이끈 파레시아를 ‘대담한 저항’이라고 요약했는데, 플라톤은 여기에 행복의 의미를 덧붙였다고 한다. 당시 독재자였던 디오니소스 1세가 플라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냐고 질문했을 때 소크라테스라고 대답하여 독재자에게 추방당했다고 전해진다. 플라톤의 대답에서 우리는 ‘다 말하는 것’이 행복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다. 파레시아를 원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억압받는 사람이거나 사회적 약자일 것이니, 이들의 말하기는 민주주의와도 통한다.

황현산은 ‘밤이 선생이다’에서 내 사정은 나만 알고 있는 것이라서 사소해보이지만, 글을 쓰다 보면 그 사정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고 결국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 나 역시 여성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면서 글을 통해 서로 공감하고 연대하는 연결을 체험하고 있다.

여성 문인만 홍보대사가 된 것에 대해 어느 남자 시인은 책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런 목소리를 잠재우는 방법은 여성들이 용감하게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러니 움츠리지 말고, 나의 사정을 사정없이 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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