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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솝 우화를 고쳐 쓰다가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이솝의 우화를 읽다 보면, 세상 물정에 대한 번뜩이는 통찰을 얻는 때가 많다. 답답한 도덕 교과서도 아니어서 사이다 같은 통쾌함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에 읽은 우화는 답답하면서도 절망적인 느낌이 들었다.한번은 늑대들과 개들이 서로 적대했다. 개들은 그리스 개를 자신들의 장군으로 뽑았다. 그리스 개는 늑대들이 심하게 위협해 오는 데도 전투를 시작하기를 망설였다. “너희는 내가 왜 망설이는지 알겠나? 늑대들은 종족도 같고 색깔도 같지만, 우리 군사는 관습도 다르고 색깔도 달라서 조화롭지 못하니, 이렇게 모든 점에서 다른 자들을 내가 어떻게 싸움터로 인도할 수 있겠나?”이것은 천병희 교수가 번역한 ‘정본 이솝 우화’의 ‘늑대와 개들의 싸움’ 이야기를 약간 줄인 것이다. 현재 전해지는 ‘이솝 우화’는 본문과 교훈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교훈은 이솝의 작품이 아니고, 이솝이 살았던 시대보다 최소 200년이 지난 헬레니즘 시대에 덧붙여졌다고 한다. 우화의 의미를 이해할 때 교훈을 참고할 수는 있지만, 교훈이 다 옳다고 믿을 필요는 없다. 그런 점에서 ‘군대에게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의지와 생각의 통일이라는 것이다’라는 이 우화의 교훈 역시 지금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지 망설여진다.개들이 그리스 개를 장군으로 뽑았다는 것은 그만큼 의견이 통일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개들의 출신과 크기와 털 색깔이 늑대와의 싸움에 불리하다는 증거도 없고, 설사 불리하다 해도 그것을 이유로 싸움터에 나가기를 망설인다는 것은 장군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이렇게 장군이 자기 할 일을 안 하고 머뭇거리면 개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문장 하나 덧붙여서 이 우화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개들은 늑대한테 다 잡아먹혔다’고.이제 이 우화의 교훈은 확실하게 ‘장군 한번 잘못 뽑으면 개들이 다 죽는다.’가 되어 버린다. 장군 하나 잘못 뽑은 대가가 너무 큰가? 그러나 지도자가 잘못해서 국민이 도탄에 빠진 일은 역사에서 비일비재하다.그렇다면 좀 더 낙관적으로 고쳐 써 보면 어떨까? ‘개들은 그리스 개를 무리에서 영원히 추방하고 새 장군을 뽑았다. 새 장군은 개들의 출신, 크기, 털 색깔을 적절히 활용하여 각개전투 방식으로 늑대를 혼란에 빠트려 완벽하게 물리쳤다’고. 이솝이 아폴론 신전 사제의 탐욕을 고발해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렇게 마무리하는 것도 이솝의 의도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을 것 같지는 않다.이렇게 ‘늑대와 개들의 싸움’을 읽으며 고쳐 쓰기를 하노라니, 슬그머니 요즘의 현실이 겹쳐 보인다. 사실을 보도한, 또는 사실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보도하지 않은 한 방송국을 악의적이라고 비난하며 대통령 전용기 탑승도 배제하고 도어스테핑까지 중단한 대통령실의 태도는 마치 개들 크기와 털 색깔이 다르다고 자기가 할 일을 안 하겠다는 그리스 개와 오묘하게 닮은 듯하다. 현실 고치기는 우화 고쳐 쓰듯 할 수 없으니, 맥없이 우화만 고쳐 쓰면서 상상의 날개를 펴본다.

2022-11-27

신중년의 커튼콜

유영희 작가 며칠 전, ‘조명이 켜지고 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라는 무대에 배우가 되어 섰다. 나를 포함해서 모두 여섯 명이 출연하여 한 사람당 10여 분간 독백하는 모노드라마 형식이었다. 9주 동안 현역 극작가와 배우의 지도로 5060 여성들이 참여했는데, 다양한 표현 활동을 거친 후 마지막에는 자기가 직접 대본을 쓰고 배우가 되어 무대에 올랐다. 관객은 모두 가족이나 지인 중심의 조촐한 무대지만,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참가자가 모두 비슷한 연령대의 여성이라 그런지 서로 지지해주면서 인생 2막을 위한 커튼콜을 제대로 받은 기분이 들었다.이 프로그램 신청 자격은 5060 신중년 여성이었다. 50세에서 64세까지를 신중년이라고 하는데, 이 용어는 ‘신중년’이라는 2017년 일자리위원회에서 ‘신중년 인생3모작 기반구축 계획’을 마련한 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저출산과 고령화, 베이비부머 효과 등으로 최근 몇 년 사이에 전체 인구에서 5060 세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급증했기 때문이다.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한 신중년에게 가장 근본적인 당면 문제는 소득 감소이기는 하지만, 주변과 풍요로운 관계를 맺으며 질 높은 여가생활을 만들어 가는 것 역시 긴급한 문제다. 은퇴한 5060에게 주변과 풍요로운 관계를 맺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된 일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면 경제적인 문제도 어려워지고 공허감이 밀려오기 쉽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후회까지 겹치면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신중년 여성도 이런 문제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여성이기 때문에 받은 차별까지 더해지면 5060 여성의 어려움은 더 커진다. 그런 점에서 이번과 같은 문화예술 프로그램의 의미는 크다. 특히 이번처럼 자신의 이야기로 대본을 쓰고 직접 연기까지 하는 활동의 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같은 관심을 가진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오랜 기간 묵혀온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며, 때로는 새롭게 생긴 인생 과제에 대처하는 힘을 기르기도 한다.어떤 이는 돌아가신 엄마와 화해하고, 어떤 이는 가족에 갇혀 살던 지난 60년에서 독립할 것을 다짐했다. 어떤 이는 남과 다르게 살았던 자신이 잘못 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고, 난치병이 재발한 어떤 이는 삶과 죽음이 하나임을 깨달으며 더 의연해졌다. 어떤 이는, 그 어느 인생도 순탄하지 않았던 엄마와 자신과 딸, 누구로 다시 태어나더라도 그 삶을 기꺼이 수용하겠다는 마음을 발견했다. 나 역시 지금까지 남아있던 어린 시절의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세상에 나설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서로 동지애를 느끼게 된 점도 뜻깊다.현재 기준으로 여성의 기대수명은 86.5세라고 하니, 5060 신중년 여성에게 남은 평균 시간은 최소 20년에서 36년이다. 신중년에게 이 시간은 연극이 끝나기 전에 다시 한번 배우를 불러내는 커튼콜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중년의 시간이 의미 있고 풍요로워질 수 있는 문화예술 활동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2022-11-20

맨발로도 청춘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아니, 여기서 신발을 벗어요? 산을 그냥 다 맨발로 올라가요? 네, 다 맨발로 올라가는 거예요. 처음 맨발 등산을 제안한 한 사람만 이 상황을 알고 있었나 보다. 따라나선 네 명은 어리둥절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 한 명 두 명 신발도 벗고 양말도 벗었다. 뒤이어 제안자가 신발 들고 다니기 불편하면 여기 벤치 아래 그냥 놔두고 가면 된다고 했지만, 네 명은 기어코 신발을 배낭에 넣었다.맨발 걷기라니, 살짝 긴장감이 느껴진다. 모두 걱정 반 기대 반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디뎠다. 머뭇머뭇하던 중 누군가 정상을 목표로 하지 말고 한 시간만 걷자고 하자, 모두 기다렸다는 듯이 동의한다.이렇게 맨발로 줄지어 산에 오르니 남들이 보면 꽤 오래된 친구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서로 이름도 잘 모르는 사이다. 이들은 오늘 60대를 위한 가치 있는 여행 방법을 교육하는 모임에서 한 사람의 제안이 옆 사람으로 꼬리를 물어 갑자기 함께하게 된 것이다. 60대라고 해도 모임 주제가 여행인 데다, SNS를 통해 자발적으로 신청한 사람들이라 그런지 기본적으로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도 적은 것 같다.그래도 처음 올라갈 때는 맨발 산행의 효과 같은 건강 이야기를 주로 나눴다. 맨발로 걸을 때는 터널 위는 안 되고 땅밑까지 다 흙으로 된 산을 걸어야 한단다. 과학적 근거가 충분한지는 모르겠지만, 맨발로 땅을 디디면 사람 몸의 양전하가 땅의 음전하와 만나 중화되는 접지 효과로 건강이 좋아지는 것이란다.그러나 10m도 못 가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너도나도 인증샷을 찍자고 한다. 맨발을 한 발씩 내밀어 사진을 찍었다. 산에 다 올라가서는 나란히 서서 셀카도 찍었다. 이제 내려올 때 우리의 대화는 금세 정치, 결혼, 예능 등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었다.우리 다섯 명이 찾은 D 산은 도시 가까이에 있는 작은 산이라 그런지 발바닥이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박동창의 저서 ‘맨발로 걸어라’가 매스컴을 탄 후 이 산에서 맨발로 걷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 산에서 매주 맨발 걷기 강좌도 진행되고 있었다. 맨발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니 두고 간 신발이 제자리에 잘 있다. 옆에 다른 신발도 하나 놓여있다. 배낭이 없는 누군가가 두고 갔으리라. 한 시간 만에 신발을 신으니 신발이 이렇게 푹신했던가 부드러운 감촉에 감탄하면서도 맨발로 걸었던 80분이라는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다.맨발이라는 단어 때문인지 뜬금없이 최희준의 노래 ‘맨발의 청춘’이 생각났다. 노래에서 맨발은 길거리 청춘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의미하지만, 우리의 맨발에 그런 열정이 담겨 있을 리 없다. 행여 다칠까 조심조심 올라가느라 길을 잘 못 봐서 내려올 때는 길을 잘못 들기도 했다.우리가 맨발로 산행 한번 했다고 청춘 같은 건강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래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 공동의 관심으로 의기투합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활기를 회복했다는 기분이 든다. 시니어를 위한 문화 프로그램이 제대로 가치를 발휘한 순간이었다.

2022-11-13

‘크라우드 매니지먼트’라고요?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10월 29일 서울 용산에서 일어나서도 안 되고 일어날 수 없는 대참사가 일어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정부는 발빠르게 여러 가지 수습책을 제시했다. 수습책에는 단어 사용을 제한하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교통사고로 서너 명이 한꺼번에 죽어도 참사라고 하는데, 156명이 한 곳에서 갑자기 죽은 일에 참사를 쓰지 말고 사고를 사용하라고 지시했다는 뉴스를 보면서 이런 정부가 정말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까 하는 의심이 강하게 들었다.이태원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씌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명분은 변명처럼 보인다. 이태원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씌워지는 것을 정말 염려했다면, 맨해튼 테러가 아니라 9·11 테러라고 한 선례처럼, 이태원이라는 지명을 빼고 10·29라는 날짜를 써야 한다는 국어학자 신지영 교수의 지적은 백번 옳다. 많은 희생자를 내고 붕괴한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는 새로 지으면 위험이 사라지지만, 이태원이라는 지역은 새로 만들 수 없으니 사건 이름에 지역을 넣은 것은 그 지역에 영원히 낙인을 찍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을 수도 있지,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자, 참사라고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그러나 한덕수 총리가 외신 기자 회견에서 이번 참사 원인이 크라우드 매니지먼트의 부족때문이라고 강조하고, 윤석열 대통령 역시 국무회의에서 드론 등 디지털 역량을 개발하고 크라우드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구축하라고 한 대목에서는 검고 끈적한 덩어리가 목을 누르는 것 같은 좌절감이 들었다.먼저 이번 10·29 참사가 디지털 역량 부족 때문이라는 분석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사건 발생 네 시간 전부터 신고 전화가 빗발쳤고, 박희영 용산구청장도 당시 그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서울시 실시간 도시 데이터’ 시스템이 이미 지난 9월 1일 개발이 완료되어 있었다. 이 시스템은 서울시 여러 지역의 실시간 혼잡도를 5분마다 집계해서 바로 보여준다. 관심만 있다면 충분히 위험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혼잡과 위험이 예상되는 그날 아무도 모니터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책임자의 안전불감증이 문제지, 디지털 역량이 부족해서, 드론이 없어서 참사가 일어난 것이 아니다.그러나 원인 분석과 대안의 부당함과 비현실성 때문에 좌절감이 든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크라우드 매니지먼트’를 힘주어 말하는 그들의 태도에서 기막힌 것을 발견했다는 듯한 당당함과 무감정이 보였기 때문이다. ‘죽다’나 ‘다치다’보다 ‘사망’이나 ‘부상’이라는 한자어만 써도 그것은 활자화된 표현이 되고 나의 삶에서 멀어지는 느낌이 든다. 한자어조차 이렇게 생생함을 떨어뜨리는데, 영어는 더 말할 나위 없다. ‘크라우드 매니지먼트 시스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순간, 이 참사의 책임은 기술에 전가되고 보호해야 할 시민은 관리 대상으로 전락해 버렸다. 희생자를 진정으로 애도하는 방법은 10·29 참사의 원인과 책임 소재를 밝히는 일이다. 그날이 빨리 오기를 바란다.

2022-11-06

청춘의 축제를 탓할 수는 없다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지난 토요일,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잠이 들어서 그런지 새벽 세 시에 잠이 깨어 비몽사몽 중에 휴대폰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안전 안내 문자가 8통이나 와 있었기 때문이다. 뉴스를 찾아보니 서울 이태원에서 인파에 밀린 압사 사고 소식이 포털 첫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잠이 확 달아나서 뉴스만 보았다. 뉴스를 새로 클릭할 때마다 사상자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30일 오후 5시 현재 사망자는 153명이라고 하지만 사망자는 더 늘어날 수 있다고 한다.뉴스에서는 사망자 소식과 함께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분석이 요란하다. 한국식 할로윈 축제가 얄팍한 상술과 결합하여 변종이 되었다며 이참에 무분별한 외래문화 수용을 점검하자는 비판론도 보인다. 실제로 젊은이들의 할로윈 축제가 무분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젊은이들의 빈약한 놀이 공간과 놀이 문화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기사도 있다.나 역시 한때는 영어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이들이 영어 이름을 지어 부르는 것도 걱정스럽게 여긴 적도 있다. 그러나 할로윈 축제가 외래 문화라고 해서, 또는 내가 관심 없다고 해서 그것을 즐기는 청춘을 나무랄 수는 없다. 할로윈 축제가 상술과 결합했다고 비난하거나, 젊은이들의 문화가 빈약하다고 성토하는 것도 공허하다. 축제를 즐기는 데 국적을 운운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기도 하다.여기서 정말 중요한 문제는, 그 전날 금요일 같은 지역의 세계음식문화거리에서 수천 명이 모였을 때 사람들이 인파에 떠밀려 쓰러진 사고가 발생했는데도 마약과 성범죄만 대비했을 뿐 인파에 떠밀리는 압사 사고 대비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그러나 4m 골목에 10여만 명 인파가 순식간에 몰렸을 리는 없다. 미리 대책 회의를 하지 못했다고 해도 인파가 늘어나는 추이를 살펴보고 용산경찰서는 대책을 마련했어야 한다. 유명 연예인의 콘서트에서도 할 수 있는 사고 예방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 참사가 인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그렇다고 지금 책임만 묻자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사후 수습과 재발 방지가 더 중요하다. 방금 페이스북에 올라온 생명안전시민넷의 성명서를 보니, 모두 당연한 말이지만 간과하기 쉬운 내용이다. 그중에도 피해자들에 대해 함부로 말하거나 불확실한 정보가 확산되지 않도록 힘을 모아달라는 말에는 고개가 더욱 끄덕여진다. 사고의 원인을 파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며,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단시간에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언론의 책임도 중요하다. 이런 재난 상황에도 조회 수를 늘리려고 무리하게 취재를 하거나, 자극적인 장면을 노출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이미 한 지인은 트위터에서 사고 사진을 보고 충격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세월호 사건으로 304명이 죽은 지 8년 만에 서울 한복판에서 또 이런 참사가 일어났다. 무지와 방심이 빚은 참사라는 어른도 있지만, 청춘의 축제를 탓할 수는 없다. 젊은이들이 무지하고 방심해도 이런 대형 참사가 일어나지 않게 예방하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다.

2022-10-30

쳐다본다는 것

유영희 작가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에게 죽음이 가깝다는 것을 말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논쟁은 말해야 한다는 쪽으로 정리된 것 같다.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주는 것이 좋다는 이유에서다. 오늘 있었던 모임의 한 참가자는, 의사가 자신의 암 재발 소식을 알리면서 최대 5년 살 수 있을 거라고 무덤덤하게 말하더라며 웃었다. 그녀가 웃을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준비를 했다는 의미일 것이다.그러나 준비도 못 했는데 갑자기 죽음이 닥치기도 한다. 그럴 때는 죽은 이에게도 많은 회한이 남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죽은 사람이 등장하는 문학 작품을 종종 볼 수 있다. 극작가 손톤 와일더의 ‘우리 읍내’에도 그런 사람들이 나온다. 이 작품은 1938년 퓰리처 상 희곡 분야 수상작으로, 무대 감독이 해설자 역할을 하면서 극을 이끌어가는 독특한 형식을 가지고 있는데,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잔잔하게 보여준다.극의 여자 주인공 에밀리는 출산하다 갑자기 죽게 된다. 공동묘지에는 죽은 이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이제 묘지에 막 들어선 에밀리는, 먼저 죽은 이들의 만류를 무시하고 해설자에게 전생으로 가고 싶다고 졸라 자신의 열두 번째 생일로 돌아가서 가족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내 금세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는다. 엄마는 에밀리 생일이라고 구하기 어려운 선물도 준비해주었고, 아빠도 강연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서 에밀리의 생일을 축하했지만, 에밀리는 그들이 서로 쳐다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에밀리가 이 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데 왜 서로 쳐다보지 않느냐고 외치지만 소용이 없다.가족뿐 아니라 자신이 누리는 물건들이나 커피 한잔 하는 자신의 일상조차 제대로 느끼며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결국 너무나 아름다워 진가를 몰랐던 모든 사물에게 작별하며 에밀리는 이승을 완전히 떠난다.쳐다보기를 제대로 못 하는 가족이 에밀리 네만은 아닐 것이다. 서로 생일도 챙기고 여행도 하는 화목해 보이는 가족이라도 속을 들여다보면 그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일 뿐 정작 중요한 서로 쳐다보기는 못하는 가정이 많다. 작은 충격이라도 들어오면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아슬아슬한 가정도 많다.행복해지고 싶다는 이유로 맹목의 열정에 사로잡혀 언제나 분주하게 친구를 만나거나 재물을 모으거나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쳐다보기를 못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다면 그런 성취 역시 허울만 좋은 가족처럼 덧없다.무대 감독은, 산다는 것은 무지의 구름 속을 헤매면서 괜히 주위 사람들 감정이나 짓밟고, 마치 백만 년이나 살 듯 시간을 낭비하고, 늘 이기적인 정열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면서, 인간과 항상 함께 하는 데도 인류가 까맣게 잊고 있는 영원한 무엇이 있다고 한다.“살면서 자기 삶을 제대로 깨닫는 사람이 있을까요? 매 순간마다요?” 에밀리의 이 물음은 우리가 죽음을 대비하는 가장 좋은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는 것이 무대 감독이 말한 영원한 그 무엇과 함께 하는 것이다.

2022-10-23

사랑의 범위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나는 점차로 프랑수아즈의 상냥함이나 뉘우침 또 여러 미덕들이 부엌 뒤채의 비극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친척을 제외하고는,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의 불행에 대해서만 연민의 정을 느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당한 불행을 신문에서 읽을 때면 눈물을 펑펑 흘리다가도, 그 불행의 대상이 다소나마 뚜렷한 모습으로 나타날 때면 눈물이 금방 말라 버리는 것이었다. 부엌 하녀가 출산한 후 어느 날 밤, 심한 복통으로 고생하는 하녀의 신음 소리를 듣다 못한 엄마가 침대에서 일어나 프랑수아즈를 깨웠지만, 프랑수아즈는 냉담하게 그 비명이 연극에 불과하며 주인 흉내를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프랑수아즈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장편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화자 ‘나’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이다. 프랑수아즈는 손자가 약한 감기라도 걸리면 한밤중에 길을 떠나 사십 리 길을 가서 필요한 것을 물어보고 돌아올 정도로 가족에게 헌신적이고, 신문에 나오는 불행한 사람에게도 동정심이 넘쳐흐르지만, 그 중간에 있는 자기 주변의 딱한 사람에게는 한치의 아량도 없다. 프랑수아즈는 부엌 하녀가 아스파라거스 냄새를 맡으면 천식 발작을 일으키는 것을 알고, 매일 아스파라거스 요리를 만들게 해서 집을 떠나게 한다.이런 프랑수아즈의 행동을 마음 놓고 조롱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면 많은 사람이 마음 한구석에 이런 마음을 감춰두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가족에 대한 애정은 문제가 없지만, 아프리카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는 기꺼이 후원금을 보내면서도 내 근처에 있는 불행한 사람들의 고통은 외면하기 쉽다.불현듯 프랑수아즈가 떠오른 것은 며칠 전 SNS에서 본 지인의 고민을 읽고 나서다. 지인은 지역의 의정감시단 활동을 비롯하여 독거 노인 도배 사업과 같은 봉사 활동도 많이 하고, 청년 주택 사업을 하며 지역 공동체 운동을 하며 살아왔는데 어쩌다가 몇 년 전부터 지방에서 숙박업을 하고 있다.그런데 보증금 100만원을 3개월 후에 내겠다는 입주 희망자를 받아야 하는지 고민이 된다며 SNS에 올린 그의 글을 본 것이 석 달 전이다. 자기를 찾아온 현금 100만원이 없는 40대 남자의 처지를 내치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든 것이다. 많은 페친이 반대했지만 지인은 결국 방을 내주었는데, 이제 또 보증금을 3개월 후로 미루니, 그동안 월세는 잘 내서 수락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당황스럽다는 글을 며칠 전 올린 것이다.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딱한 처지에 생각이 많아지는 것은 책임의 지속성과 광범위성 때문일 것이다. 멀리 있는 사람에게는 눈물을 흘리거나 월 몇 만원의 후원금을 내는 것만으로도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면 감당하기 어렵거나 철회하기 어려워질까봐 두려운 것이다. 나 역시 이런 비슷한 고민이 있는 터라 자신도 보호하고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불행에도 관심 갖는 현명한 공감법을 배우고 싶다.

2022-10-16

유익함과 해로움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작년 3월부터 ‘맛지마 니까야’라는 불교 경전을 읽고 있다. ‘니까야’는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 등에서 사용하는 상좌부 불교 경전을 부르는 이름인데, 석가모니 사후 제자들이 모여 7개월간 결집했다고 한다. ‘니까야’는 빠알리 어로 되어 있어 빠알리 경전이라고도 한다.우리가 많이 들었던 ‘소승불교’라는 용어는 상좌부 불교를 깎아내려서 부르는 표현이라서 한국에서는 공식적으로 테라와다 불교라고 한다. 현대 정신의학 치료와 심리치료에서 사용하는 알아차림 명상, MBSR 방법은 테라와다 불교의 대표 수행법인 위빠싸나를 현대적으로 응용한 것이기도 하다.‘니까야’에는 모두 5부가 있다. ‘맛지마 니까야’는 그중 두 번째로 편집된 경전이다. 같은 내용의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한역한 이름은 ‘중아함경’이다. 5부를 읽는 순서는 개인의 필요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내 경우는 종교적인 색깔은 별로 없어서 신앙으로 읽는 것은 아니지만, 교양 도서에는 없는 내용에 매력을 느껴 같이 읽고 있다. 처음에는 온라인 모임으로 진행하다가 지금은 주 1회 20쪽 정도의 범위를 정해서 각자 읽고 후기만 모아서 카페에 올리고 있다.여자는 깨달은 자가 될 수 없다거나 깨달은 자의 초능력을 열거하는 대목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지만,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지혜를 배우게 되기도 한다. 지난주에 읽은 대목이 바로 그런 내용이다.바른 사람과 바르지 못한 사람을 구별하는 방법은 그의 행위가 유익함을 늘리는가 해로움을 늘리는가로 나뉜다고 한다. 유익함과 해로움은 너무나 자명해서 이런 설명은 얼핏 보면 싱겁고 당연해 보이지만, 일상에서 이것을 놓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자신의 행위가 해로움만 늘리는데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을 중독자라고 한다. 그런 특별한 사례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해로움을 늘리는 행위를 자주 한다.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을 탐하거나 쇼핑 목록을 만드느라 시간을 죽이기도 한다.이렇게 누가 봐도 해로움이라고 인식하는 큰 문제라도 막상 현실에서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때 유익함을 늘리는지 어떤지 숙고해서 선택하지 않고 유행이나 감각의 즐거움만을 좇거나 경제적인 이익만을 좇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게다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사람이 유익함을 늘리고 있는가 아닌가를 알기는 더 어렵다. 이런 문제에 대해 ‘맛지마 니까야’에서는 몸에 좋은 행위는 나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단순한 답을 제시하는데, 무릎이 저절로 쳐진다. 아무리 비싼 옷이어도 입기 불편하거나 피부에 문제를 일으킨다면 해롭고, 아무리 큰 집이라도 사람이 우울해진다면 유익하지 않다. 정의를 외쳐도 그것으로 자기 몸이 상한다면, 그런 정의가 세상에서 좋은 결과를 내기는 어렵다.지난 한 달간, 내 나름대로는 옳은 일을 한다고 동분서주했으나 성과는 없고 머리카락만 한 움큼 빠지고 보니, 이런 구절에서 내 행동이 정말 유익함을 늘리는지 숙고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2022-09-25

족집게 코칭이 필요해

유영희 작가 장윤정은 자타가 인정하는 트롯 신이다. 본인이 노래를 잘할 뿐만 아니라 남의 노래를 잘 들어주고 조언도 잘해준다. ‘장윤정의 도장깨기’라는 프로그램에서 장윤정은 노래를 잘하고 싶은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레슨해준다. 프로그램 이름을 가만히 보니, 처음에는 ‘원포인트 레슨’이었다가 ‘족집게 코칭’으로 바뀐 것 같은데, 변경된 이름이 훨씬 좋다.출연자들이 어느 정도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장윤정이 레슨 신청자의 노래 부르는 습관 한두 가지를 귀신같이 포착해서 교정해주면 노래가 완전히 달라진다. 전 국민 가수 만들기라는 부제가 왜 달려 있을까 생각해보니, 그런 고급 레슨을 받을 수 없는 일반인들도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노래를 잘하게 될 수 있게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나 역시 한때 노래를 잘하고 싶어서 보컬 레슨을 받으러 다니기도 했고, 혼자 노래방에 가서 몇 시간씩 노래를 불렀던 경험이 있는 터라 흥미 있게 영상을 보면서 장윤정 레슨의 요점을 이해하게 되었다.레슨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노래와 상관없는 나의 습관이나 성격을 드러내지 말고 노래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몸짓과 목소리와 표정을 노래 가사에 일치시키고, 지나치게 멋을 부리지 말라는 등 신청자에게 필요한 조언을 해준다. 그런 조언을 듣는 신청자의 표정은 깨달음에서 오는 환희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영상 몇 개를 보니 그런 습관이 생기는 배경에는 노래 부르는 이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런 예 중에 가장 인상적인 출연자는 탈북 가수 노수현이다. 장윤정은 노수현에게 떠나는 임을 원망하는 가사를 자기 탓하는 방식으로 부른다면서 원망할 때는 확실하게 원망해야 한다고 하자 노수현이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구체적인 말은 안 했지만 아마도 누군가 자신을 떠났어도 자기 탓만 했던 경험이 있었던 듯하다.이렇게 가수는 다른 사람의 노래를 들으며 그의 습관과 마음을 보지만, 글쓰기 강의를 하는 사람은 글을 보면서 그 사람의 마음을 본다. K대 강의에서 어느 학생이 글마다 편차가 심하고 분노가 많이 느껴져 불러서 물어보니, 자신은 키보드 워리어라고 하면서 인터넷에서 공격적인 글로 문제를 많이 일으킨다고 한다.성인 글쓰기 반에서는 어느 수강생이 친구와 통화하는 장면을 쓴 것을 읽고 그때 마음이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으니, 자기 자랑만 하는 친구가 달갑지 않아서 빨래를 널며 통화했던 것 같다고 한다. 이렇게 글을 보면 글을 쓴 사람의 마음이 보이고 글을 지도할 방향을 알게 된다.그런데 노래나 글은 짧아서 이렇게 코치도 할 수 있고 귀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인생은 그럴 수 없다. 특이한 습관과 결핍으로 가득 찬 우리 인생도 누군가 한눈에 알아보고 코칭해주면 좋으련만, 인생은 길기도 길어서 코칭해 주기도 쉽지 않고 자기 삶을 볼 수 없으니 고치기도 어렵다. 그러나 노래든 글이든 자신을 자꾸 표현하고 코칭을 받다 보면 몰랐던 나의 모습을 알게 되고 그러면 삶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다. 용기 내어 나를 표현해보자.

2022-09-18

이해하기를 멈추지 마

유영희 작가 올해 들어 건강관리를 잘 해오고 있는데 며칠 전 대수롭지 않은 운동 한 가지를 하다가 허리 근육에 이상이 와서 3일 동안 허리를 펼 수 없었다. 한의원에 가서 사연을 말하니 원장이 침을 놓아주며 이런 말을 한다. 원장의 친척 중에 무용하다가 운동 치료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령을 하나 들어도 근육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다 느낀다고 하더라. 이렇게 느끼다 보면 어떤 동작이 내 근육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게 되고 무리하지 않게 된다. 아무리 좋은 운동이라도 내 몸에 안 맞으면 독이 된다면서 남이 좋다는 운동 따라하지 말고 자기에게 맞는 운동을 정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또, 운동량은 많은데 근육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반동을 이용해서 하거나 동작 하나하나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그 말을 듣다가 소설의 한 장면이 단박에 떠올랐다. 테드 창의 ‘이해’라는 단편인데, 주인공 리언이 호르몬 K 요법을 받은 후 지능이 너무 높아져서 기억력도 좋아지고 어떤 것을 보아도 ‘패턴’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내용이다. 소설에서는 패턴을 보는 능력 때문에 리언이 파국을 맞기는 하지만, 작가가 패턴을 보는 힘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에서 내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주인공이 자기 몸에 대한 집중력이 높아지면서 근육의 전기장으로 근육 내부의 긴장까지 감지하기에 이르고 자기 몸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게 되는 대목이다. 이런 소설의 가정이 아주 허무맹랑해 보이지는 않더라는 이야기를 원장에게 하면서, 운동 중 허리에 통증이 왔는데도 멈추지 않은 나의 무지에 실소가 나왔다. 더불어 이런 무지는 관찰력 부족에서 온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관찰 대상 중에서도 특히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관찰은 성공한 삶, 행복한 삶을 위한 나침반이다. ‘그냥 하지 말라’의 저자, 기업인 송길영의 강연 영상을 보니, 자신을 잘 팔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유니크함, 오리지널리티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그냥 하지 말고 숙고하면서 하라고 강조한다. 서두르지 말고 단계별 퀄리티를 충분히 수행하면 내 몸에 근육이 쌓이고, 이렇게 숙고를 통해 구축된 유니크함에는 반드시 공명하는 사람들이 다가온다고 청중을 설득한다.이제 거의 국민가수로 등극한 임영웅의 노래는 감성 장인으로 불릴 만큼 부드러우면서도 울림이 있다. 어느 블로그를 보니, 임영웅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수만 개의 조합 중에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소리를 찾은 후에 그것이 몸에 익을 때까지 수없이 연습한다고 한다. 임영웅의 독창성 역시 자신에 대한 충분한 관찰과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니, 그냥 목소리와 창법을 따라한다고 해서 비슷한 울림을 줄 수는 없다.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는 대단한 성취를 위해서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일상의 모든 순간에 우리가 이해하기를 멈출 때 몸도 다치고 일도 망치고 마음도 불행해진다. 충분한 관찰을 통해 나에게 맞는 동작을 알고, 나의 유니크함을 발견하며, 나의 목소리를 찾는 것은 건강과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2022-09-04

소통 말고 대화합시다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며칠 전, 생협 활동가에게서 소통 말고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을 들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사전을 찾아보니, 소통의 사전적 의미는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또는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이었다. 문자 그대로 보면, 오해 없이 의견이 잘 전달되었다는 뜻이니, 일방적으로 전달만 해도 오해만 없으면 소통했다고 할 수 있게 된다. 최악의 경우,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자기의 뜻을 아랫사람에게 전달해도 소통은 소통인 셈이다. 그에 비해 대화의 사전적 의미는 ‘마주 보고 이야기를 주고받음’이니, 당연히 평등하고 양방향이다. 그 활동가가 소통 말고 대화를 하고 싶다는 것은 일방적으로 전달만 받고 싶지 않고 서로 동등하게 논의하고 싶다는 소망이었을 것이다.이렇게 소통과 대화의 차이를 생각하다 보니,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니던 때 일이 생각난다. 어느 날, 아이들에게 가족회의를 하자고 하니 질색을 했다. 엄마 하고 싶은 말만 할 건데 무슨 회의를 하느냐는 것이다. 어른과 아이가 회의를 한다면 십중팔구 어른만 이야기하게 된다는 것을 아이들은 일찌감치 간파한 것이다.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는 나이 많고 지위 높은 사람은 일방적으로 말하고,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은 열심히 듣는 문화가 팽배해있다. 그래서 질문을 하거나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말하면 말이 많다거나 건방지다는 평판을 듣기 일쑤다. 이런 분위기는 비단 정치권이나 법조계뿐 아니라 사회 전반 곳곳에 뿌리박혀 있다.이렇게 된 데에는 권위주의와 엘리트주의가 크게 작용한다. 그래도 요즘 스타트업에서는 수평적 문화가 많다고 하니, ‘너희는 나보다 아래니까 내가 하는 말 들어’라는 식의 권위주의는 조금씩 극복해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내 판단이 너희보다 옳아’, ‘너희는 모르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라는 엘리트주의는 개선하기가 요원하다. 엘리트주의의 기저에는 효율성이라는 사고가 깔려 있고, 대화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요즘 협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책을 보는 중이다. 내가 28년간 몸담고 있는 생협에서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협이야말로 상부상조의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결사체여서 영리 조직보다 민주적 대화 문화가 발달했을 것 같지만 예상외로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생협에서 임원을 몇 번 했는데도 그동안 잘못 알고 관행적으로 해온 것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이번 공부를 통해 깨닫고 낯이 뜨거웠다.생협에서 대화 문화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제도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조합원에게 임원 입후보 기회를 공개적으로 주어야 하고, 임원들은 조합원에게 민주적 통제를 받아야 한다. 이사회에는 지역 대표와 부문별 대표뿐 아니라 연령, 경제 수준, 1인 가구, 나아가 환경 문제까지 고민하는 조합원이 골고루 참여해야 한다. 그래야 대화의 폭이 넓어지고 자주 자립 자치라는 생협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 이렇게 생협부터 대화로 협동을 실천해간다면 우리 사회는 조금 더 살 만한 세상이 될 것이다.

2022-08-28

사랑할까 이해할까

유영희 작가 무생물이라도 오랫동안 같이 지내다 보면 정이 든다. 특히 자동차는 내 몸과 함께 움직여서 그런지 더 애정을 느끼기 쉽다. 8월 9일 서울에 내린 폭우로 사망자와 실종자가 십수 명에 이르렀던 날, 지인은 차로 외출했다가 귀가 길에 비가 터널에 가득 차서 바퀴가 둥둥 떠 있었다고 한다. 그 순간 본인도 두려웠지만, 무엇보다 차를 너무 고생시키는 것 같아서 너무 미안했다면서 차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한다. 이렇게 인간과 전혀 닮지 않은 자동차도 오랜 시간 같이 보내면 생물처럼 느껴지고 아끼게 된다.그런데 만약 그 존재가 사람과 똑같이 생기고 말도 한다면 어떨까? 지난 6월, ‘파친코’의 감독 코고나다가 만든 영화 ‘애프터 양’은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주지만, 특히 인간의 모습을 한 로봇 안드로이드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시대 배경은, 사람과 똑같이 생겨서 테크노 사피엔스라고 하는 인공지능 로봇이 상용화된 미래 사회이다.제이크와 키라 부부는 중국인 딸을 입양하고 중국 문화를 교육해 줄 테크노 사피엔스인 양을 구매한다. 제이크는 찻집을 운영하고 부인은 직장에 다니느라 바쁘기도 하고 무엇보다 중국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양과 함께 4인 가족 댄스경연대회에도 출전하며 양을 가족처럼 사랑하는 듯이 보인다. 이렇게 보면 제이크 가족이 양을 대하는 태도는 바람직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양이 고장 난 후 양의 기억을 재생해보니 양은 제이크의 가족이 될 생각이 없었다. 양은 제이크 부부가 딸 미카와 가족사진을 찍을 때 오라고 하자 거부하다가 마지못해 응한다.더군다나 양은 제이크가 혐오하는 복제 인간 여자를 몰래 만나고 있었다. 양이 인간이 되고 싶어 했느냐는 제이크의 질문에 복제인간 에이다는 너무 인간중심적이라고 비웃는다. 그동안 우리가 보아온 영화나 소설에서는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로봇을 당연하게 생각했기에 양과 에이다의 이런 태도는 당황스럽다. 양의 기억에 에이다가 나올 때마다 ‘나는 그냥 멜로디가 되고 싶어, 그냥 하늘이 되고 싶어, 그냥 바람이 되고 싶어, 그냥 바다가 되고 싶어.’라는 노래가 흐르는 것은 의미가 깊다.우리는 사랑한다면서 사실은 그 대상이 나의 필요와 이익에 충실해주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양이 고장 난 것도 4인 가족 댄스대회 때이다. 제이크 부부는 양을 가족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양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 양의 마음도 그들과 같으려니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들이 양을 가족이라 생각하는 것은 인간중심적인 착각이었을 뿐이다.스트어트 러셀의 책, ‘어떻게 인간과 공존하는 인공지능을 만들 것인가’에는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지배당할 가능성을 염려하면서 인간에게 이롭기만 한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자고 한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앞설 가능성을 염려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게다가 인간이 기계를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지금으로서는 안드로이드를 인간중심적으로 대하지 않고 세계의 일부로 인식하는 것이 더 필요한 때인지도 모른다.

2022-08-21

용기와 평온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미국 텍사스주의 7월 10일 낮 최고 기온은 45℃로, 1950년 이후 두 번째로 높은 기록이었다 하고, 스페인에서는 45℃를 넘나드는 폭염으로 일주일 만에 360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인도 역시 한낮 기온이 섭씨 50℃까지 올라가 하늘을 날던 새가 떨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유엔 사무총장은 ‘기후 위기로 인류가 집단 자살에 직면해 있다’는 경고를 내놓았다고 한다.이상 고온으로 세계 곳곳이 위험에 빠져있다는 며칠 전 뉴스다. 그러나 채널만 돌리면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넘쳐나니, 기자의 이런 보도는 흔적도 없이 흘러간다. 과학자와 시민 단체들이 기후 위기를 경고해도, 정치인들은 기후 변화 완화 정책에 관심이 없고, 일부에서는 추울 만큼 에어컨을 틀며 나 몰라라 하고 있다. 영화 ‘돈 룩 업’은 이런 상황을 풍자한다.천문학과 대학원생 케이트는 에베레스트 산 만한 혜성이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담당 교수 랜들과 함께 대통령에게 지구 멸망을 예고하지만, 대통령은 지지율이 떨어졌을 때 연임을 위해 이들을 잠시 이용할 뿐이다. 케이트와 랜들은 방송에도 출연하여 호소하는데, 언론은 이들을 빌미로 시청률 올리기에 급급하고, 시민들은 케이트의 분노에 찬 표정을 우스운 밈으로 소비할 뿐이다. 그래도 이들은 혜성 충돌을 알리느라 동분서주한다.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케이트와 랜들 일행이 혜성이 지구에 떨어져 집이 흔들리는 순간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어떤 불안이나 동요도 없이 침착하게 웃고 이야기하는 순간이다. 이들이 이렇게 평온할 수 있었던 것은 위기를 정확하게 인식했고 이를 피하기 위해 노력할 만큼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공포에 떨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기후 문제의 심각성은 혜성 충돌보다 시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더 어렵다. 혜성 충돌은 6개월이라는 짧은 시한이었고 혜성의 움직임은 시시각각 추적되지만, 기후 위기는 몇십 년에 걸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 온난화 현상은 지구 기온 변화의 주기라는 주장에도 맞서야 한다. 이렇게 문제를 인식한 사람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의 간격은 넘어서기 어렵다.며칠 전, SNS 친구의 담벼락에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키는 용기와 그 둘 사이의 차이를 아는 지혜를 주소서’라는 글귀를 보았다. 그 분은 정신질환이나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인권을 주장하는 소아과 전문의이다. 최근 드라마의 열풍으로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어 그 간격은 많이 좁혀진 것 같지만, 이런 변화가 오기까지 식견 있는 여러 사람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기후 위기뿐 아니라 사회적 인식이 부족한 모든 분야에는 변화를 위한 용기가 필요하다. 해봐야 변화시킬 수 있는지 알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도 행동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평온만 추구해서는 불안만 커지고 지혜도 생기지 않는다. 용기 있는 행동만이 평온과 지혜를 가져온다.

2022-08-07

문해력이 문제라고요?

유영희 작가 얼마 전 성인들로 구성된 소설을 소리 내어 읽는 모임에 참여했다가 실망한 적이 있다. 참가자들이 책을 읽으면서 문자 그대로 읽지 않고 조사를 바꾸는 것은 다반사이고 읽고 나서도 내용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런 오독은 독서 모임에 참여할 때마다 가끔 보는 일인데, 문제는 그렇게 잘못 이해한 것을 다양한 해석이라는 명분을 내걸며 우길 때 참 난감하다.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라도 이런 오독은 종종 일어난다. 다행히 모임에서는 서로 자기가 읽은 것을 나누면서 고칠 수 있지만, 취업을 준비하거나 직장 생활을 할 때는 한순간 잘못 이해하면 큰 낭패를 보기 때문에 문해력이 부족한 사람은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문해력은 원래 문자를 읽고 쓸 줄 아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글의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는 ‘의미적 읽기’까지 수행하는 정도를 실질적 문해력으로 정의하고 있다. 유네스코에서도 문해란 다양한 내용에 대한 글과 출판물을 사용하여 정의, 이해, 해석, 창작, 의사소통, 계산 등을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하고 있다.기초 문해력을 습득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사회가 급속히 변하면서 알아야 할 어휘가 급속히 늘어나는 데다, 관련 지식이나 정보가 없으면 정보 문서를 이해하기 어려워서 실질 문맹률은 점점 늘어난다. 우리나라는 3년마다 성인 문해력 수준을 조사하는데, 2020년 약 1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중학교 학력 이하의 문해력을 가진 사람은 모두 1천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이런 고민에 응답하듯, 7월 7일부터 10월 6일까지 EBS에서 ‘당신의 문해력+’를 방영하고 있다. 작년에 방송된 ‘당신의 문해력’이 6부작이었는데 올해는 그 두 배가 넘는 13부작이라고 하니 문해력 문제가 얼마나 사회적으로 큰 관심사인지 짐작할 수 있다. 방송을 보니, 면접을 볼 때 면접관의 질문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엉뚱한 답을 하거나 거래처에서 온 업무 메일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고민하는 직장인들이 출연해 경각심을 높여주었다.문해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고 새로운 단어를 발견할 때마다 사전을 찾고 문맥에 맞게 써보는 것이 좋다. 문장 간 연결 능력을 키우는 데는 추론적 질문하기가 효과적이다. 추론적 질문은 내가 강의할 때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평소 문해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올해 EBS 문해력 테스트에서 주식 매매 수수료나 휴대폰 약정 할인 문제를 보니, 눈앞이 캄캄했다. 2020년 EBS 문해력 조사에서 실질 문맹률이 75%라고 나왔다는데, 이번 테스트에도 당황한 사람이 많을 것 같다.문해 능력 평가는, 문자 중심의 산문 문해, 서식과 도표를 포함한 문서 문해, 계산이 필요한 숫자 문해로 구성되어 있다. 인문학 중심으로 책을 읽다 보면, 사회 변화에 둔하고 숫자 문해에도 취약해지기 쉽다. 새로운 문물에 관심을 가지고 알아가려는 태도도 문해력을 키우는 데 꼭 필요하다는 것을 추가하고 싶다.

2022-07-31

더 많이 등장하기를

유영희 작가 요즘 핫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감탄과 열광이 주를 이룬다. 나 역시 3회부터 본방사수 하고 있다. 그런데 작년 12월 이 드라마를 홍보할 때 제작사가 우영우를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자폐증’을 앓는 변호사라고 홍보했다고 한다.이에 대해 자폐 당사자 모임 ‘에스타스’는 이런 표현은 자폐 차별적 표현이라고 반발하면서 자폐는 질병이 아니라 신경생물학적 원인으로 인한 영구 손상이기 때문에 장애라고 표현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현재 방영되는 드라마에서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라고 표현하고 있다. 나 역시 자폐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그러나 자폐 당사자 모임의 염려가 아직 다 해소된 것은 아니다. 가장 큰 우려는 우영우 같은 고기능 자폐인이 자폐 스펙트럼을 대표하는 것으로 일반인에게 잘못 인식되어 저기능 자폐인이 소외될까 하는 것이다. 이 역시 드라마에서 저기능 자폐인을 등장시켜서 어느 정도 해결은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자폐 당사자나 그 가족은 이 드라마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 우영우의 아이큐가 164로 설정되어 있으니 일반인 입장에서도 너무 비현실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 그 염려에 공감이 간다.이 드라마를 처음 보고 자폐인이 정말 변호사가 되기도 할까 조사해보니 미국에 자폐인 변호사가 두 명 있었다. 에릭 웨버는 2015년에 변호사가 되었는데, 어려서부터 육상 선수로도 활동했다. 2018년 24살의 헤일리 모스도 변호사가 되어 로펌에 근무하다가 현재 장애인 인권운동을 하고 있다. 오늘 기사를 보니 모스도 우영우 드라마를 응원하고 있다고 한다. 변호사는 아니지만, 동물학 교수 템플 그랜딘 역시 자폐인인데, 동물의 세계를 잘 이해하여 동물복지를 배려한 소 도축장 시설을 설계했다,이들 모두 보통 사람보다 더 능력이 좋다고 해서 그 능력이 저절로 이만큼 발휘된 것은 아니다. 그들을 이해해주는 부모나 선생님이 없었다면 그들은 정신병원에 가거나 시설에 방치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의 존재를 위화감을 조성한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할 필요는 없다.현재 우리나라에는 2021년 현재 자폐 등록자는 3만3천 명, 미등록자는 2만 명으로 5만여 명의 자폐인이 있다고 한다. 이들을 다양성의 관점으로 존중하는 문화가 좀 더 자리 잡는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자폐인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힘을 얻을 것이다. 실제로 다문화주의 국가에서는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하는 자폐인들이 꽤 있다고 한다. 우영우 같은 비현실적인 허구 인물이라도 정확한 정보와 함께 대중매체에 등장한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 오히려 이런 인물이 더 많이 나오면 일반인들에게 다양성의 외연을 넓혀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지금은 배우가 고기능 자폐인 역을 하더라도 더 자주 노출된다면 그들에 대한 시선도 바뀔 것이다. 얼마 전 다운 증후군 정은혜 씨가 직접 드라마에 출연했는데 자폐 당사자가 드라마에 직접 출연할 날도 곧 오리라 믿는다.

2022-07-24

프랑켄슈타인과 인문학

유영희작가 지난 7월 12일, 제임스 웹이 찍어 보낸 우주 사진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제임스 웹은 작년 12월에 미국의 나사에서 쏘아 올린 우주 망원경 이름인데, 허블 망원경보다 100배 더 성능이 좋다고 한다. 이제 우주의 신비를 밝히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든다.우주의 신비만큼 인간의 뇌 역시 아직은 신비의 영역이다. 2년 전 뇌 MRI를 찍었는데 소혈관에 고신호가 발견되었다. 나이 들며 나타나는 정상적인 변화라고는 하지만, 7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파킨슨 병을 오래 앓으셨고, 어머니의 오빠 두 분과 언니 동생 등 7남매 모두 뇌 질환으로 돌아가셨기에 뇌 질환에 대한 공포가 유별난 편이라 뇌에 관심이 많다.이런 사연이 없더라도 뇌 질환에 대한 두려움은 120세를 바라보는 현대인에게 모두 있을 것이다. 이런 두려움을 해소해줄 뇌 연구 속도는 기대를 넘어선다. 신경과학이라는 용어가 1969년 처음 만들어졌으니 본격적인 뇌 연구 역사는 50년 조금 넘었는데 2019년 미국에서 뇌 오가노이드 제작에 성공했으니 말이다. 네덜란드에서 성체줄기세포로 장관 오가노이드를 만든 후 10년 만의 성과이다. 작년 8월 한국에서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여 기존보다 2배 이상 크게 배양했고, 그 한 달 후 독일 연구팀이 뇌 오가노이드에서 눈을 유도하여 발생시켰다는 연구도 발표되었다.오가노이드는 장기유사체라고 하는데, 세포 분열 이전의 유도만능줄기세포를 특정 기관의 세포로 유인해서 그 기관의 기능과 작용을 재현하는 것이다. 장기유사체 개발로 많은 불치병이 치료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뇌 장기유사체는 배양지지체에서 배양되기 때문에 아직은 성장에 한계가 있지만, 이렇게 배양된 뇌를 쥐의 뇌에 이식하면 쥐의 뇌와 결합하여 뇌의 성장이 빨라진다고 한다.그러나 혀, 신장, 폐 등의 장기유사체와는 달리 뇌 장기유사체 개발에는 마냥 환호하기 어렵다. 뇌 질환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을 생각하면 뇌의 신비가 밝혀지기를 바라면서도 현대 신경과학자들이 프랑켄슈타인이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문학이 뇌 연구의 한계를 정하기도 어렵다.생명윤리를 연구하는 법학자 최경석은 쾌락과 고통을 느끼거나 학습 능력이 있다면 주체성이 있는 인간이라고 봐야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면서 그런 능력을 가지기 전까지만 연구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런 수준의 연구라면 뇌를 연구할 의미가 없어진다는 딜레마가 생긴다. 뇌 과학 연구가 세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분자생물학자 선웅의 주장을 반박하기도 어렵다.며칠 전 인공지능 시대에 인문학의 역할에 대한 강의를 듣게 되었는데, 이제 인문학은 과학의 발전을 따라가야 한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프랑켄슈타인의 잘못은 괴물을 만들었다는 행위가 아니라 그 괴물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은 것이라던 어느 인문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인문학이 뇌 과학자가 만든 뇌 장기유사체에 이름을 붙여주는 임무 이외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인문학의 새로운 숙제가 무겁게 다가온다.

2022-07-17

추앙한다고요?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술 말고 할 일 줘요? 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 없어. 겨울이 되면 살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공장에 일도 없고. 낮부터 마시면서 쓰레기 같은 기분 견디는 거, 지옥 같을 거예요. 당신은 어떤 일이든 해야 해요. 나는 한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나를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지난 5월 말에 종영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2화에서 염미정이 구씨에게 한 말이다. 염미정은 대출까지해서 전 남친한테 돈을 빌려줬다가 떼인 후 대출금 상환 독촉을 받고 있고, 어느 날 마을에 나타나 염미정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낯선 남자 구씨는, 일하지 않는 시간에는 술만 마신다. 이어서 염미정은 구씨가 겨우내 자신을 추앙하면 봄에는 자신도 그도 달라져 있을 거라고 한다.이 방송이 끝난 후 SNS에는 ‘추앙하라’가 흘러넘쳤다. 한편으로는 구씨의 상태 때문에 염미정이 그런 말을 더 쉽게 한 것 아닌가 하는 삐딱한 생각이 들지만, 그럼에도 염미정은 추앙 말고는 다른 말을 찾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예전의 남자친구들에게 심하게 이용만 당했기 때문이다. ‘추앙하라’가 인기 있었던 이유는, 일상에서는 잘 안 쓰는 단어라서 신선한 느낌도 들었을 테고, 그만큼 사랑에 지친 사람도 많았기 때문이리라.그러나 염미정을 향한 구씨의 추앙이 아무리 멋지게 표현되어도, 채워지고 싶다는 염미정의 갈망이 아무리 간절해도, 추앙이라는 말은 위험해 보인다. ‘높이 받들어 우러러보다’라는 ‘추앙하다’의 사전적 의미 그대로 추앙하는 쪽과 추앙받는 쪽의 균형이 심하게 기울어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노파심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들의 추앙이 본의와는 다르게 오용되거나 남용될까봐 걱정이 앞선다. 사실 염미정이 말하는 추앙이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겠다. 추앙이라고 하면 나는 팬클럽 문화가 떠오른다. 어느 가수의 팬클럽에 가입했다가 추앙하지 못해서 팬클럽 회장에게 권고 탈퇴를 당했던 경험이 있어서 더 그럴 것이다.로이스 로리의 ‘기억 전달자’는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 미래 소설이다. 소설의 배경은 ‘늘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이 ‘늘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데는 언어생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느 날 주인공 조너스가 지각한 이유를 말하면서, ‘연어 구경에 정신이 돌아버린 것 같습니다’라고 하자, 선생님은 연어 구경에 ‘정신이 돌았다’는 단어는 너무 강하다면서 ‘정신이 팔린’으로 교정해준다. 이 마을이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 논란거리이기는 하나, 조너스 어머니의 이런 입장은, 이 책을 처음 읽었던 1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필요해 보인다.어느날 조너스가 부모에게 ‘절 사랑하세요?’ 묻자, 부모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 일반화된 단어라 무의미하다면서 ‘어머니 아버지는 저와 즐거우세요?’, ‘어머니 아버지는 제 성과에 자부심을 느끼세요?’와 같이 정확한 표현을 써야 마을이 원활하게 돌아간다고 알려준다. 염미정의 소망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2022-07-10

‘어쩌다 보니’의 힘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사람은 하루에 크고 작은 의사결정을 500번 한다고 한다. 아무리 세어봐도 500번까지 될 것 같지 않지만,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 조던 피터슨의 연구 결과라고 하니 영 허튼소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선택의 순간에 어느 결정이 좋은 선택인지 알기는 참 어렵다. 선택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하는 경우도 많다. 선택하고 나서야 알게 되기도 한다.어쩌다가 김성수의 ‘글쓰기명상’에 나오는 ‘내가 선택했던 좋은 결정 백 가지’를 써보았다. 그동안 좋은 결정을 얼마나 했을지 자신이 없어서 일부러 십 분 제한을 두고 써보니 그래도 스물한 가지를 쓸 수 있었다. 그중에는 오늘 아침 청소한 것과 같은 작은 결정부터, 어미 잃은 생후 한 달도 안 된 고양이를 키우기로 한 20년 전의 약간 큰 결정, 출산처럼 인생의 큰 방향을 좌우하는 큰 결정까지 삶의 여러 순간에 했던 결정들이 노트에 쓰여 있었다.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이런 스물한 가지 결정들이 나의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의지로 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오늘 아침 청소는 손님이 오기 때문에 한 것이고, 고양이를 거둔 것은 그 고양이가 내 손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전에 집안까지 들어온 길고양이가 싫어서 동물보호소에 갖다 준 일로 항상 마음 한구석이 켕겨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혼 역시 대단한 의지로 선택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야말로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엄청난 성취를 이룬 사람도 시작은 어쩌다가 하게 되기도 한다. 며칠 전 18세의 나이로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1등을 한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7살 때 친구들이 피아노, 태권도, 수영을 하나씩 해서 나도 하나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엄마 손에 이끌려 동네 상가 피아노 학원에 갔다고 한다. 그러고도 처음 1, 2년은 피아노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예술의 전당 영재 프로그램에 지원하게 되었고, 그렇게 오늘이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 역시 처음부터 자신의 대단한 결정으로 시작한 것은 아닌 셈이다.좋은 일만 그럴까? ‘어쩌다 정신과 의사’의 저자 김지용은, 마음에 병이 있어서 찾아온 분들을 보면 그분들 탓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어쩌다 결정되고 어쩌다 흘러왔을 뿐이고, 또 시간이 지나다 보면 어쩌다 해결되는 경우도 많다고 하면서, 그것이 인생인 것 같다고 말한다. 소아청소년과 의사이면서 자폐증 관련 의학서적을 출간한 출판인 강병철 역시 자폐증에 걸린 사람도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일 뿐 부모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마음이 힘들어 집 밖에 나가지 못하고 있는 20, 30대 젊은이들 역시 자기가 선택했다기보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어떤 결과가 나오는 데는 무수한 원인이 작용하고, 우리는 그 원인을 다 알 수 없다. 결과가 좋다고 자기가 잘 결정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은 자신을 겸손하게 하고, 아프고 힘들게 된 것이 그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그렇게 된 것만은 아니라는 발견은 자책감에서 벗어나 스스로 돌보는 힘을 준다. ‘어쩌다 보니’는 우리를 구원한다.

2022-07-03

어떤 고기를 먹어야 할까

유영희 작가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3대 영양소이다. 그중 단백질과 지방은 콩이나 옥수수, 올리브, 브로콜리 같은 식물성 식품에도 있지만, 특히 고기에 많다. 육식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왔기 때문에 전 인류가 고기의 맛을 버리기도 쉽지 않고, 비타민 B1은 고기에만 있는 영양소라서 채식으로 보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내가 채식을 2년간 하다가 중도 포기한 것도 영양 불균형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축산 고기에 거부감이 있어도, 고기를 안 먹기는 참 힘들다. 그러다 보니 축산 고기 말고 다른 방식으로 단백질을 섭취할 수는 없을까 궁리하게 된다.그러다 2020년 12월 어느 신문기사에 눈이 번쩍 뜨였다. 싱가포르에서 세포증식 닭고기를 시중에 판매해도 된다는 승인이 났다는 것이다. 세포증식 고기는 실험실에서 세포를 배양해서 만든 고기를 말한다. 그래서 세포증식 고기는 실험실 고기라고도 하고 배양육이라고도 한다. 이후 기사를 보니, 21년 4월에는 배달 앱으로 주문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세포증식 고기를 처음 개발한 사람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 교수 빌렘 반 엘런이다. 그는 1999년에 배양육에 관한 이론적 연구로 국제 특허를 획득하고 2002년에는 금붕어에서 유래한 근육 조직을 실험실의 페트리 접시에서 배양시키는 데 성공했다. 2017년에 빌 게이츠가 미국의 인공고기 스타트업인 ‘멤피스 미트’에 거액을 투자했다는 소식도 들린다.빌렘 반 엘런이 세포증식 고기를 개발한 이유는 동물 학대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고기 소비량이 1980년 1인당 1년에 11.3kg이던 것이 2017년에는 55.89kg으로 늘었고, 2020년 유럽 사람들은 81kg, 북미 사람들은 123kg을 먹었다. 이렇게 우리가 고기를 많이 먹게 된 것은 공장식 대량 축산 시스템 덕분이다. 돼지들이 우리에 빽빽하게 갇혀 옴짝달싹 못 하는 사진을 보면 고개를 돌리게 된다. 도축 과정도 모른 척하고 싶다.그런 데다 2006년 유엔 식량농업기구는 ‘가축의 긴 그림자’라는 보고서에서 축산업이 배출하는 온실가스 배출량이 전체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18%를 차지한다고 발표했다. 이 수치가 과장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고기 소비율이 빠르게 높아지면 축산업이 환경을 오염시킬 것은 확실하다. 이런 상황에서 세포증식 고기는 동물 윤리도 지킬 수 있고 온실가스 배출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항생제 오남용이나 바이러스 감염 우려도 없다.그러나 세포증식 고기를 선택하는 데 망설이는 사람도 많다. 세포를 증식하려면 동물의 혈청이 필요해서 동물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고, 값도 비싸며, 맛도 축산 고기보다 훨씬 떨어진다는 것이다.축산 고기는 맛도 좋고 값은 싼데, 동물 윤리 문제가 심각하고, 세포증식 고기는 동물 윤리는 해결되는데, 맛도 없고 비싸니, 윤리적 소비를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어떤 고기를 먹을까’ 대신 ‘얼마나 먹으면 될까’로 질문을 바꿔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2022-06-26

어떤 위로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20부작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가 시청자들에게 감동과 생각거리를 주고 끝났다. 정주행은 하지 못했지만, 짧은 영상을 보다가 아주 인상적인 장면을 만났다. 18화에서 동네 형들이 동석에게 너를 이해한다면서 그래도 암에 걸린 엄마의 마지막 소원은 들어주어야 한다고 압박하자 동석이 소리지르는 모습이다. 동석 엄마는 남편도 죽고 딸도 바다에서 죽자 해녀를 할 수 없어 동석 친구의 아버지에게 첩으로 들어갔기에 동석은 엄마에게 원망이 깊은 상태다.“형들은 형님 어멍이 형님 보는 앞에서 형님 친구 아방 방에 들어가서 불 딱 끄고 부스럭부스럭 이불 소리 내면서 자는 거 본 거 있어? 날 이해해? 뭘 이해해?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이해한다는 말이야.” 나중에 동석은 선아에게 전화를 걸어 어멍이 종철 아방 첩으로 들어가면서 자기를 작은 어멍이라 부르라 했을 때 못한다고 하자 싸대기를 개 패듯이 팼다고 말한다.이런 동석의 말을 듣자니, 일본의 유명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끼의 단편 소설 ‘타일랜드’가 생각난다. ‘타일랜드’의 주인공 사쓰키는 갑상선 전문의인데, 30년 전에 강제로 낙태한 일로 마음속에 돌이 박혀 있다. 사쓰키는 방콕에 갔다가 운전을 맡은 니밋의 소개로 점쟁이 노파를 만나게 된다. 점쟁이의 조언에 마음이 열린 사쓰키가 니밋에게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려고 하자 니밋은 말을 한다고 마음이 서로 통하는 일은 없다며 듣기를 거부한다.같이 보고 겪은 일도 사람마다 이해하는 것이 달라 소통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동네 형들이 동석이 겪은 일들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아니 직접 보았다고 하더라도 어린 동석의 마음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니밋의 말이 극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이해의 한계를 처절하게 체득한 사람일 뿐이다.부모라도 자식의 마음을 알기는 쉽지 않다. ‘오은영의 금쪽같은 내 새끼’에는 자식을 이해할 수 없어서 상담을 청한 부모들이 나온다. 부모라도 자식의 사정을 시시콜콜 다 알 수 없고, 안다고 해도 자식의 감정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니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이해한다는 말이 폭력일 때도 많다.며칠 전, 친구가 희소암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눈물이 났지만, 그저 내 맘대로 내 사정으로 흐르는 눈물일 뿐, 그가 느낄 황당함, 분노, 좌절감, 무력감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그러나 소통의 한계를 인정하면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고 지레 좌절할 것도 아니고, 이해할 수 없다고 포기할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때 뜻밖에 소통이 일어난다. 선아는 동석이 묵혀두었던 말을 다 하라고 응원하며 들어주었고, 니밋은 몇 번의 대화로 사쓰키의 고통을 눈치채고 점쟁이 노파에게 데려가 주었다. 그러고 보니, 병원에 입원한 친구를 위해서는 그가 얼마나 두려운지 얼마나 아픈지 말할 수 있게 나 자신이 의연해지는 방법도 있겠다. 그것은 분명 위로는 아니지만 위로일지도 모른다.

2022-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