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SNS에서 흥미 있는 글을 보았다. 요즘 초등학교에서는 운동회 때 학부모 동반을 아예 금지하거나 부르더라도 딱 한 명만 오라고 제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편부모 가정, 특히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 항의가 빗발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글쓴이는 학교를 무균실로 만들어 아이들의 현실 감각을 마비시킨다고 성토하면서 심지어는 아동 학대이자 교육 기관의 직무 유기라고 비판하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상처받지 않아야 할 권리 따위는 없으니 상처를 딛고 일어설 의무를 가르치는 것이 진짜 교육이라고 주장한다.
이 글을 보자니, 큰애가 초등학교 입학하던 때 일이 생각났다. 강의하러 가야 해서 이웃 엄마에게 교과서를 챙겨와 달라고 부탁했는데, 큰애는 두고두고 그 일을 되새기며 원망을 쏟았다. 다른 애들은 엄마가 와서 교과서를 받아 갔는데 자기만 엄마가 안 왔다는 것이다. 큰애는 다른 엄마들은 다 왔다고 하지만 못 온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 보니, 아이들 운동회가 내 강의 시간과 겹쳐서 내가 참석을 못 한다면 큰애의 설움은 극에 달했을 것 같고, 그래서 나 역시 운동회에 학부모 참석을 제한하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미치니 SNS에서 글쓴이의 주장에 온전히 동의하기 어려웠다. 운동회가 가정과 학교가 함께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의식이라는 주장에는 더욱 동의하기 어렵다. 하루 같이 뛴다고 해서 공동체 의식이 다져질 수도 없고, 실제 현실에서는 운동회 참여를 둘러싸고 많은 학부모 임원들이 수고하면서 벌어지는 긴장과 알력은 행사가 끝나도 이어지는 일이 태반이다.
물론 학교가 교육 공동체로서 더 적극적으로 기능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한다. 다만, 소수의 결핍과 상처를 덜 느끼게 할 대안을 마련하지 않고 ‘결핍을 딛고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겠다’고 학부모를 설득하자는 것은 무책임해 보인다. 결핍에 상처받는 사람의 아픔을 극복하는 일을 개인의 의지에만 전가하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초등학교 1학년 그 작은 아이들이 하교할 때 교과서 여러 권을 한꺼번에 들려 보내지 말고, 입학 직전이든 입학 직후든 별도로 교과서를 받아 가는 시간을 마련해줬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배려해도 결핍을 다 해소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결핍을 덜 느끼게 할 방법이 있다면 그런 배려를 하면 안 된다고 할 수는 없다.
운동회가 진정한 공동체 활동이 되게 하려면 부모가 학부모 참여를 아예 금지하자고 항의하는 사람을 악성 민원이라고 치부하거나 결핍을 느낄 아이들에게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기 이전에 부모가 못 오는 아이들도 즐겁게 어울릴 수 있는 상황을 만들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새해에는 능력이 되는 사람들끼리만 화합하는 사회가 아니라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결핍을 덜 느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들도 능력이 되는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광장을 만드는 것, 이런 일에 좀 더 진전이 있기를 바란다.
/유영희 인문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