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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시양비에도 책임자는 있다

유영희 작가 지난 2월 6일, 정부는 현재 3천58명인 의대 정원을 2025년부터 2000명씩 늘려서 2035년까지 1만 명을 증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의료인들이 집단 반발하며 단체 행동을 불사하고 있다. 며칠 전 빅 5 병원의 전공의 50%가 사직서를 냈다는데, 정부 역시 물러설 기미가 없으니, 이 문제의 본질과 해법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국민 1천 명당 OECD 평균 의사 수가 3.7명인데, 현재 한국은 2.6명으로 멕시코 다음으로 적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정부의 계획은 타당해보인다. 그런데 1천 명당 의사 숫자가 한국과 거의 비슷한 일본조차도 의대 정원을 줄일 예정이라고 한다. 인구가 감소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의대 정원은 똑같은데 1천 명당 의사는 2006년 1.8명에서 2012년 2.0명, 2022년 2.6명으로 계속 증가했다. 이것은 출생율 저하로 인한 인구 감소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의대 정원을 왜 1만 명씩이나 늘려야 하는지 근거가 없다. 사회적 비용만 엄청나게 드는 정부 계획에 대해 의사들이 집단행동을 불사하며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것은 옳다.또 다른 문제는, 의사 숫자를 늘리는 것이 현재 의료 서비스 불만을 해소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의사가 많아져도 수가로 수입을 보장하는 시스템으로는 필수 의료 분야 부족 문제나 지방 의료 공백이 해결되지 않는다. 1천 명당 의사 숫자가 2019년 현재 5.04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리투아니아의 경우만 해도 대도시와 지방의 의사 공급 편차가 극심하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의사 숫자를 늘리는 것보다 수가로 운영되는 방식을 개선하고 공공의료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의료인들과 정치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작년 남인순 국회의원의 보고에 따르면, 2021년 OECD 국가 중 공공의료 기관 비중은 영국 100%, 캐나다 99.0%, 프랑스 45.0%, 미국 23.9%, 일본 22.8%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5%대로 세계 꼴찌이다. 공공의료 확충 없이 의사만 증원하면 시장 경쟁만 부추길 뿐 지역 격차도 커지고 필수 의료는 사라진다. 그런데 지금 정부 정책을 반대하는 의사들은 이런 의료의 공공성 문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응급 의료를 간호사에게 맡기는 무책임한 모습도 보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서 제출은 집단이기주의라고 비난받을 여지가 많다.증원된 의사들이 필수 의료 분야나 지방 의료 공백을 어떻게 메울지 섬세한 계획도 없이 무작정 현재 의대생의 세 배를 증원하겠다는 정부도 무책임하고, 공공의료 확충에는 관심 없고 의사 숫자 늘리는 것만 반대하는 의료인들도 명분이 부족하다. 다만, 양측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국민을 안전하게 해줄 정책을 제시해야 하는 정부 책임이 더 크다. 130회 소통했다고 횟수만 생색내지 말고, 정부는 필요한 의사 인원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의대 졸업생이 공공 의료에 참여하게 하는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만이 지금의 갈등을 봉합하고 국민의 생명을 위하는 길이다.

2024-02-25

나와 너를 살리는 잠깐 멈춤

유영희 작가 “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반칠환(1964~)의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전문이다. 얼핏 보면 알 듯도 한데, 썩 개운하게 이해되지는 않았다. 이 시를 인용해서 칼럼을 쓴 작가도 씀바귀꽃과 제비만 언급하고 있으니, 시인이 왜 노점상 할머니나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나를 다시 걷게 한다고 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강의 시간에 이런 의문을 말하니, 칼럼을 소개한 글벗은 그 대상들이 나의 감각을 깨웠다는 뜻인 것 같다고 한다. 눈이 번쩍 뜨였다. 실제로 감각이 깨어나면 활력이 생긴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 대부분 알고 있다. 무기력하면 무감각해지고, 무감각해지면 무기력해진다.그런데 시인의 말대로 이렇게 감각이 깨어나기 위해서는 잠깐 멈춤이 꼭 필요하다. 다만,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도, 큰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도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을 멈춰 세울 수는 없다. 멈추게 하는 힘은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다.잠깐 멈춤은 개인에게도 필요하지만, 사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며칠 전, 지난 2021년 서울대 휴게실에서 숨진 청소 노동자의 유족에게 법원이 8천6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숨진 노동자는 100리터짜리 쓰레기봉투를 혼자 날랐고, 그런 노동자에게 학교 측에서는 필기시험까지 보게 했다. 학교 건물 이름을 한자로 쓰라거나, 자신이 속한 조직을 영어로 쓰라는 문제도 있었고, 건물이 몇 년도에 지어졌는지도 물었다고 한다. 일이 끝나고 회의를 할 때는 정장에 구두를 신고 오게 했다고 한다. 법원은 이런 서울대의 방침이 갑질이라고 판결한 것이다.서울대 측은 이것을 갑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울대 측이 청소 노동자에게 요구한 것은 지식인에게는 당연하고도 쉬운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엘리트의 독단일 뿐이다. 잠깐만 멈출 수 있었다면, 그래서 100리터짜리 쓰레기봉투를 질질 끌고 가는 청소 노동자를 바라볼 수 있었다면 그런 요구가 당연한 것도 쉬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청소부가 맡은 일이 과중하지 않아서 퇴근 후에는 문학 작품도 읽고 정장을 입고 음악회에도 갈 수 있기에 행복하다는 동화를 문학적 상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청소 노동자에게 강제로 한자와 영어를 익히게 하고 정장을 강요하는 것은 잠깐 멈춤을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3년간 송사를 하느라 서울대도 괴로웠을 것이다. 멈추어 바라볼 줄 알았다면 괴로울 일도 없었을 것이니, 멈출 줄 알면 남만 살리는 것이 아니라 나도 산다. 이번 판결이 잠깐 멈춤에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2024-02-18

대통령 부인의 명품백 수수 핵심 문제는

유영희 작가 지난달 29일 국회에서 정무위원회가 열렸다. 정무위원회는 국회의 상임위원회 중 하나로 권익위원회 등 국무총리 직속 기관에 속하는 여러 기관을 관할한다. 이날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문제가 현안으로 상정되자, 국민의힘 정무위원들은 문재인 전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의 명품 옷과 귀금속,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논두렁 시계도 마찬가지 아니냐며 바로 전원 퇴장해 버렸다.그 후 진행된 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의 국회의원들이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와 관련하여 질의했는데, 류철환 권익위원장은 시종일관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대통령기록물로 이관되었다는 답변만 했다. 이런 회의 태도를 지켜보는 국민의 마음은 참담하기 짝이 없다. 국회의원들의 회의 수준이 너무나 기대에 못 미쳤기 때문이다.나는 대학에서 강의할 때 토론을 꼭 챙겨서 수업하기도 했고, 여러 토론대회에서 심사를 맡기도 했다. 아카데미 토론을 많이 하면, 논리적 사고도 길러지고 잘 지는 법도 배우게 되어 건강한 대화 문화를 만드는 힘이 성장한다. 토론은 상대를 이기기 위한 말싸움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도출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은 토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된다. 아무리 정치라도 무조건 나만 이겨야 한다고 하면 정국은 진흙탕이 될 수밖에 없다.문제에 집중하는 것 역시 무엇이 옳으냐와 직결된다. 상대가 제기한 토론 쟁점에서 벗어나는 다른 주제를 꺼낸다든지 상대의 사람 됨됨이를 트집 잡는 인신공격을 하는 것은 옳은 것을 찾아가는 데 걸림돌일 뿐이다. 상대 주장에 간결하고 명료하게 질문하는 것 역시 상대방의 허점을 드러내는 데 큰 역할을 하므로 매우 중요하다. 이런 아카데미 토론을 현실에서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으나 그 기본 정신은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기 때문이다.그러나 오로지 국민의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정무위원들의 회의 모습은 이런 토론의 원칙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국민의힘 국회의원들이 김건희 여사 명품백 논의에서 벗어나는 주제를 꺼내든 것은 논점을 일탈한 것이고, 자진 퇴장한 것 역시 대화를 거부한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안건을 다루는 방식에도 문제는 있다. 명백한 근거가 있는 내용도 괜히 질문으로 시작하여 발언 시간을 초과하는 의원이 대다수고, 설득력 있게 논증을 이어가지 못하고 혼자 마음대로 결론 내는 모양새를 자주 보였다.대통령실의 ‘몰카 정치 공작’이라는 입장도 논점에서 비껴가 있다. 정치 공작이든 아니든 대통령 부인이 일반인에게 300만 원짜리 명품백을 받은 것이 적절한가 하는 것이 핵심문제다. 명품백을 준 사람이 과거에 무엇을 했느냐를 문제 삼는 것도 인신공격의 오류이다.학교에서 토론을 많이 해도 정치인들이 건강한 토론 문화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오는 7일 대통령은 KBS와 방송 대담 형식으로 국정 운영 구상을 밝히면서 부인의 명품백 문제도 설명할 것이라고 한다. 이번에는 핵심 문제에 대한 입장이 꼭 나오기를 바란다.

2024-02-04

탄핵이 능사는 아니다

유영희 작가 며칠 전, 이언주 전 국회의원이 현 대통령의 지지도가 25%라면서 이 정도면 탄핵 수준이라고 말하는 영상을 보았다. 언제부터 대통령 탄핵 이야기가 나왔는가 살펴보니, 검색으로는 2023년 6월부터였다. 그러다 11월이 되면서 탄핵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역대 대통령 지지도 추이를 찾아보았다.문재인 전 대통령은 첫해에 7, 80%에서 점차 내려가기는 했으나 임기 내내 높은 지지율을 보였고 마지막까지 41.4%로 퇴임하였다. 2012년에 당선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세월호 사건이 있었던 2014년을 포함해서 임기 내내 4, 50%대의 지지율을 유지하다가 2016년 10월에 11%대로 떨어진 후 11월에 한 자리 숫자를 기록하면서 탄핵되었다.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명박 전 대통령은 퇴임하던 해 1년 동안 내내 23% 정도를 기록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초창기에 60% 지지율을 기록한 적은 있으나 그 후 임기 전반에 걸쳐 20% 대가 많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의회에서 탄핵 소추를 받기는 했으나 지지율이 낮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임기 후반 2년간 지지율은 20% 중후반 대가 많았다. 이보다 더 지지율이 낮았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10%대였다.동영상 하나로 이렇게 뜻하지 않게 역대 대통령의 재임 기간 지지율을 살펴보게 되었는데, 이런 기록을 보면, 10%대도 있었고, 탄핵된 대통령의 지지율은 한 자릿수였다. 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높다고는 할 수 없으나 아무리 봐도 탄핵될 만큼 치명적으로 낮은 것은 아니다. 지금 지지율이 25%라고 탄핵을 꺼내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대통령 탄핵은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정도가 파면을 정당화할 정도로 심각할 경우에만 할 수 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의회나 헌재가 파면한다는 것도 부담이고, 탄핵 이후의 혼란과 비용 등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당한 정책 결정이나 정치적 무능력으로 야기된 행위로는 탄핵할 수 없고 국민에게 확실한 이익이 있을 때만 해야 한다. 정책의 부당함이나 무능이라는 기준은 다툼의 여지가 많아서 이런 일로 탄핵하면 우리 사회는 극단적인 분열과 갈등에 빠진다.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 후 여러 행보를 보면 민망한 것이 많다. 영국 여왕 조문에 참석하러 갔다가 정작 참배는 하지 않는 해프닝도 있었고, 파리에서는 기업 총수를 불러 폭탄주를 돌렸다는 등의 뉴스에 얼굴이 붉어진다. 중국과의 외교 마찰은 더 큰 실책이다. 10위권 안에 들던 경제 성장률 세계 순위가 작년에는 10위권 밖으로 밀려났고, 대출을 부추기는 부동산 완화 정책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김건희 여사 리스크도 크다.그렇지만 법을 아는 사람이 25% 지지율을 근거로 탄핵을 운운하는 것은 무책임할 뿐더러, 우리 사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의 상황이 좋지는 않지만, 탄핵이라는 방법으로 극복하려는 시도는 갈등과 분열을 조장할 뿐이다. 정치인들은 정도를 지키면서 대안을 모색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

2024-01-28

동물농장의 딜레마는 극복할 수 있다

유영희 작가 지난 2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흉기로 습격당했다. 범인 김모씨는 작년 4월부터 범행을 준비하면서 작성한 ‘남기는 말’에 의하면, 총선에서 이 대표가 공천권을 행사하면 좌경 세력에게 국회가 넘어가고, 이 대표가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좌파 세력에게 넘어가게 될까봐 이를 저지하기 위해 범행을 기획했다고 한다.자기와 정치적 입장이 다르면 무찔러야 할 적이라고 생각하거나 대표 한 사람이 죽으면 자기가 원하는 세상이 올 거라는 믿음은 범인 김모씨 한 사람만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보수만 그런 것도 아니다. 김모씨와 반대되는 정치적 신념을 가진 사람은 여당 대표가 사라지면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사람들이 이런 비합리적인 신념을 갖는 것은 평소 한쪽 편향의 뉴스만 보기 때문이다. 김모씨는 월간조선을 32년간 구독했고 평소에도 보수 유투브를 시청했다고 한다. 그 사람뿐 아니라 너나 할 것 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한쪽 편향적인 뉴스만 보고, 나와 의견이 다른 매체를 보는 일은 극히 드물다. 많은 사람이 자기 구미에 맞는 뉴스만 편식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절대시하고 상대를 향해 적개심을 불태운다.저술가 홍일립은, 국가 운영의 토대인 헌법과 법률에 동의하지 않았으면서도 국가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국민은, 국가의 비천한 기원을 망각했거나 아니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정당하지 않은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가 국민이 무지하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말에 눈이 번쩍 뜨인다. ‘동물농장’을 쓴 조지 오웰의 관점과 아주 비슷하기 때문이다.동물농장의 나폴레옹 돼지 일당은, 농장의 동물을 동원해 그들을 학대하는 인간 농장주를 몰아낸 후 자기들이 다른 동물을 착취한다. 나폴레옹 일당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다른 동물이 무지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동물주의를 표방하는 동물 일곱 계명을 만들고 모두에게 외우게 했을 때 말, 오리, 염소, 양 등은 암기하지 못했다. 돼지들이 일곱 계명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수정해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것을 아는 유일한 동물 당나귀 벤자민은 침묵했다.홍일립은 이런 문제가 해결되려면 ‘사실 복원’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는 ‘국가의 딜레마-국가는 정당한가’에서 특정 정치가나 이념을 신격화하지 말고 객관적 사실을 복원하여 이성적으로 판단하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국민이 무지하다면, 사실을 복원하여 자기 신념의 정당성을 판단하자는 홍일립의 주장은 실현되기 어렵다. 자기가 좋아하는 뉴스만 보고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사실 복원에 힘을 보탤 수 있을지 의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홍일립은 사실 복원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도덕적 작업이라고 했을 것이다.그래도 희망은 있다. 동물농장은 수십 년 전 일이고, 당나귀 벤자민은 혼자였지만 지금은 신념의 정당성을 판단하려는 사람이 많아졌다. 나 또한 신념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자기의 신념을 절대시하지 않고 사실 복원에 힘쓰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더디더라도 내일은 사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2024-01-21

중간이 중용이 되려면

유영희 작가 진보 성향의 어느 작가가 보수 성향의 언론에 칼럼을 기고했다가 진보 언론에서 오던 칼럼 요청이 끊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종탁의 ‘칼럼의 이해’라는 책에도 비슷한 사례가 나온다. 여기에 나온 사례는 위와 반대로, 진보 성향의 언론이 보수 논객의 칼럼을 실었다가 찬반 논란이 심하여 결국 오래가지 못했다고 한다.신문에는 오피니언이라는 큰 카테고리 안에 사설과 칼럼 두 가지가 있다. 사설은 신문을 발간하는 언론사의 의견을 담고 있어서 그 언론사의 성향과 일관성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굳이 글쓴이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칼럼은 개인의 의견이나 주장 또는 감상을 담고 있는 자유로운 성격의 글이라 이름은 물론 사진까지 들어가며, 언론사의 입장과 다를 수도 있다. 실제로 미국 신문에는 진보 성향의 언론에 보수 논객의 칼럼도 종종 실린다고 한다.그러나 앞에 사례에서 보듯이 우리 사회가 그것을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걸릴 듯하다. 사설과 칼럼의 논조가 다르면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보수 언론은 보수 칼럼만 싣고, 진보 언론은 진보 칼럼만 싣는다. 독자 역시 이렇게 한쪽만 보면 자기 생각만 옳다고 하기 십상이다. 나와 다른 주장을 만나면, 주장을 이끌어내는 논리적 추론을 제대로 검증하지도 않고 ‘너는 어느 편이냐?’부터 따진다. 나 역시 그런 경향이 있었지만, 칼럼을 쓰다 보니 장관을 임명하거나 중요한 정책이 발표될 때마다 진보 언론과 보수 언론을 다 찾아보면서 합리적으로 판단하려고 노력한다.그런데 이렇게 양쪽 중 한쪽에 속하지 않으면 설 자리가 없어진다. 정현종의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라는 ‘섬’이라는 짧은 시는 양극단을 극복하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녹아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 사이가 있었다. 그 / 사이에 있고 싶었다. // 양편에서 돌이 날아왔다.’ (박덕규의 시 ‘사이’ 전문)와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이준석은 탈당 선언문에서, 적장을 쓰러뜨리기 위한 극한 대립, 칼잡이의 아집이 우리 모두의 언어가 되어야 하느냐고 비판하며 신당 창당의 의지를 다지고 있고, 이낙연 역시 무능하고 부패한 거대양당이 극한 투쟁을 계속하는 현재의 양당 독점 정치구조를 깨야 한다며 창당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의 도전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돌을 던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시중’이라는 말이 있듯이, 중간이란 ‘지금 상황’에서 ‘가장 적절함’을 의미한다. 이들이 양극단을 극복하고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면서 자기 이해에 연연하며 혐오 발언을 일삼거나 또 다른 편 가르기를 한다면, 국민들의 정치 피로감만 가중될 것이다.우리 사회에서 중간이 제대로 자리잡으려면, 일상에서부터 내 의견만 옳다고 고집하지 말고 다른 의견을 경청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이런 문화를 만드는 데 무엇보다 언론의 역할이 막중하다. 초록은 동색이라는 조롱을 듣지 않도록 언론이 극단적 보도를 지양하고 다른 의견을 허용하면 ‘사이’는 더 빨리 좁혀질 것이다.

2024-01-14

공공도서관의 독서동아리를 위하여

유영희 작가 새해가 되니 새로 시작하는 것이 많다. 동네 도서관에서도 독서동아리를 새로 신청받는다고 한다. 그동안 H 생협에서 꾸준히 독서 모임을 하다가 작년에는 동네 도서관에 ‘감정과 뇌과학’이라는 주제로 독서동아리를 신청하여 운영했다. 올해도 ‘감각과 장과 뇌’라는 주제로 동아리를 만들어 인간의 감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장이 뇌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공부할 예정이다. 작년처럼 전문가 초청까지 계획하고 있다. 동아리 초청이라 강사비가 너무 적었지만 모두 기꺼이 달려와 주셨는데, 올해 초청한 분도 흔쾌히 수락하셨다. 며칠 전 사서에게서 들으니, 올해 동아리 신청이 작년보다 두 개 더 많아질 것 같다고 한다. 이웃 어느 도서관은 동아리가 너무 많아 공간이 부족하여 기준을 정해 선별해야 할 정도라고 한다.이런 소식에 독서동아리 증가가 당연히 전국적인 현상일 것이라 생각하고 실증 자료를 찾기 위해 통계를 찾아보니, 아쉽게도 우리 지역의 특수한 상황일 뿐, 전국적인 추세는 아닌 것 같다. 인구 많은 서울시가 독서동아리 숫자는 가장 많지만, 최근 3년간 독서동아리와 참여 인원은 오히려 감소 추세이고, 전국 독서동아리 상황 역시 큰 차이가 없었다. 게다가 2013년에 나온 독서동아리 실태 조사에서 언급된 문학 편중 현상이 최근 조사에서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2020년 이은주, 정하영, 윤유라의 연구 ‘독서동아리 운영 현황과 과제’와 2023년 심효정의 ‘공공도서관 독서프로그램 운영 현황 및 정책 제안’을 보면, 독서동아리에서 읽는 도서가 문학 등 4개 분야로 한정되어 있고 다른 분야는 미미하다고 한다. 무엇보다 많은 예산을 쓰는 지방자치단체들의 ‘독서 대전’이 지속적인 독서 문화를 만드는 데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 눈여겨볼 만했다. 연구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공공도서관의 독서프로그램에 1회성 행사가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현황도 아쉬운 부분이다.이런 상황이 일어난 것이 도서관 탓은 아니다. 실제로 유명 작가나 와야 겨우 도서관에 발걸음하는 주민이 많고, 소설 같은 문학 분야가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비슷한 책을 읽는 것도 우리 사회의 베스트셀러 중심의 독서 편식의 반영이기도 하다.그럼에도 일부 지역만이라도 독서동아리가 증가하고 있고, 독서동아리 내용도 다양해지고 있는 상황은 고무적인 일이다. 어느 도서관에서는 인지력이 떨어진 고령층을 위해 책놀이 활동 동아리가 올해 출범했다고 하고, 책을 수선하는 책구조대라는 동아리도 오랫동안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작년에 EBS에서 ‘당신의 문해력’이나 ‘책맹인류’를 통해 진단했다시피, 독서 재난 시대를 헤쳐갈 방법은 행사나 이벤트가 아니라 독서동아리뿐이다. 새해 공공도서관 정책을 입안하는 관계자들은 다양한 독서동아리가 내실 있게 운영되기 위해서 도서관이 주민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고민해 주면 좋겠다. 이와 함께 독서동아리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국가도서관통계시스템도 하루빨리 정비되기를 바란다.

2024-01-07

모험의 끝이 영광은 아닐지라도

유영희 작가 지난 연말에 ‘호빗’을 읽었는데, 다 읽고 보니 새해를 맞이하는 멋진 이벤트가 되었다. ‘호빗’으로 새해 모험을 떠나는 내게 큰 통찰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호빗’은 마법사 간달프가 난쟁이 13명과 보물을 되찾으러 떠나기 전 호빗 족의 빌보를 합류시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눈치챘겠지만, 맨 나중에 합류한 빌보가 주인공이다. 빌보는 골목쟁이네라는 별명이 따라다닐 정도로 땅속 굴 생활에 만족하며 다른 세상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인물이다. 그저 이웃의 좋은 평판에 기대어 안락하게 살아간다.간달프의 재촉으로 모험 여행에 합류하기는 했지만, 빌보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고향에 가고 싶어 하고, 난쟁이들의 무시에 마음 상하기도 하는 등 소심한 면이 많다. 그러다 절대 반지도 얻고 간달프가 없는 상황에서 일행을 이끄는 역할을 한다. 결국 빌보는 악한 용 스마우그를 죽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평화롭게 산다.‘호빗’에서 특이한 점은 빌보가 영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난쟁이들에게서 엄청난 존경을 받는 것도 아니고,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의 이웃은 빌보를 불편해하며 상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의 백미는 빌보가 모험을 성공으로 이끈 부분보다는 마지막에 이웃의 냉대에도 개의치 않고 시를 쓰며 만족스럽게 살아간다는 결말 부분인 것 같다. 이런 여정을 보노라면, 모험에 성공했다고 반드시 칭송과 영광이 뒤따르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빌보도 모험의 대가를 바라기는 했으나, 나중에 자기 몫의 보물을 기꺼이 포기한 것을 보면, 빌보에게 잠재되어 있던 모험 정신이 발동한 면이 더 컸다.‘호빗’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는 이유는 새해에 시작하는 나의 모험 때문이다. 빌보가 제한된 곳에서 다른 세상은 모른 채 살았던 것처럼 나 역시 지금까지 연구자와 강사로만 살며 다른 세상을 모르고 살았는데, 우연히 뜻 맞는 퇴직자 5명이 모여 창업하게 되었다.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면서 인지력이 떨어지는 인구 역시 늘어가고 있고, 우리 역시 언젠가는 인지력 저하를 걱정하게 될 것이라, 인지력 저하를 예방하는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창업하는 과정에서 창업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어려운 순간이 수시로 찾아올 수도 있고, 동료와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 어쩌면 보물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호빗’을 읽노라니,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빌보처럼 용기낼 수 있을까, 빌보처럼 조력자를 만날 수 있을까, 빌보처럼 만족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생각해본다.지난 6개월을 돌아보니, 필요할 때마다 조력자를 만났고, 갈등도 잘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도 생겼다. 보물을 얻고자 시작하지만, 그 보물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쓰이는 것임을 기억한다면, 보물이 적거나 이웃의 칭송이 없더라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생긴다. 안 쓰던 뇌의 부위가 활성화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독자 여러분도 새해에는 잠재된 유전자를 발동시켜 모험을 떠나보라고 권하고 싶다. 머무는 것보다 확실히 성장하게 될 것이다.

2024-01-01

연말 결산에 추가해야 할 항목

유영희 작가 뉴스를 보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집단 이기주의에 빠진 정치인들의 행태에 분노가 치밀 때도 많고, 폭력, 사기, 산업 재해 등 사회면 기사에도 울분이 치밀어 오를 때도 많다. 뉴스에 딸린 댓글도 유쾌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가끔 사이다 같은 댓글을 만나기는 하지만, 그 댓글의 내용도 분노나 조롱인 경우가 많으니, 내 마음 역시 그들처럼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상태일 것이다.그러나 잠시 이성을 찾고 생각해보면, 이런 분노나 울분이 문제 해결에 도움되기는커녕 갈등만 증폭시킨다. 무엇보다 분노가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해를 입는 것이 내 신체이다. 분노에 휩싸이면 맥박이 빨라지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런 신체의 반응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감정에 휩싸여 공격적인 감정에 사로잡히는 사람이 많다. 증오심에 가득차서 악플 달기를 계속하거나 대놓고 물리력을 가하면서도 자신의 신체 감각이 불편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을 쾌감으로 느끼는 경우도 있다.요즘에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신체에 해를 가하면서도 그것을 쾌락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 알콜 중독을 비롯한 각종 중독은 자신의 신체가 망가지는 일인데도 감행하는 사람이 늘어간다. 게임을 하며 몸을 한껏 긴장 상태에 몰아넣고 즐겁다고 착각한다. 도파민 중독은 더 미묘해서 신체에 얼마나 해가 되는지 알아차리는 사람이 드물다.‘소통하는 신체’를 쓴 우치다 타츠루는, 우리가 자신의 신체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뇌의 지시를 따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뇌는 감각을 차단하거나 자기 생각대로 몸에게 명령하며 신체를 침묵시킨다. 이렇게 신체적으로 둔한 사람은 사회적으로도 둔감해져서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뎌지게 되고, 가해하기도 한다. 우치다는 무뎌진 신체 감각을 민감하게 하려면, 지금 나의 신체가 어떤 자세를 취하고 싶어 하는지, 무엇을 얼마만큼 먹고 싶어 하는지, 얼마만큼 자고 싶은지, 어떤 목소리를 듣고 싶은지 몸에게 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뇌과학자인 안토니오 다마지오 역시 느낌은 몸과 뇌와 마음을 연결하는 항상성의 기초라고 하면서 느낌 아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내 신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내 신체가 보내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 주의 깊게 듣는 것은 나의 신체에 경의를 표하는 일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몸에게 묻지 않는다. 경쟁 사회의 불안과 공포에 휘둘리다 보면 몸에게 물을 겨를이 없고, 내 편만 옳다고 고집하며 상대편 공격에 몰두해도 내 몸이 아우성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12월은 연말 결산하는 때다. 결산이라고 하면 일의 성과를 중심으로 평가하지만, 나의 신체에 얼마나 경의를 표했는지 점검하는 것도 연말 결산 항목에 추가하면 좋겠다. 요즘 침대 옆에 화이트보드를 세워놓고 아침에 깨자마자 내 몸이 더 누워있고 싶은지 물어보거나, 느낌을 점검하여 아주 짧게 기록하고 있는데, 항상성 유지에 도움 되고 있다. 민감한 신체 감각을 갖는 것은 소모적인 대립을 완화하는 데도 유익하다. 자기 신체에 좀 더 자주 경의를 표하자.

2023-12-17

가까운 사람이 기뻐해야 멀리서 찾아온다

유영희 작가 올 12월에도 작년에 이어 지방 의회를 방청하고 있다. 의원들의 질의를 듣다 보면, 일부러 검색하지 못한 세세한 지역 소식을 알게 된다. 올해는 내가 사는 지역의 출산율이 0.5명대라며 육아 환경 질의가 오고 갔다. 나 역시 몇 년 전에 결혼한 두 딸에게 아이 낳는 것을 부추겨야 할지 망설이는 상황이라 관심이 갔다. 맞벌이하면서 육아를 해나갈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잘 되어 있는지 걱정되기 때문이다.출산율 하락이 세계적인 추세이기는 하지만, 한국 출산율의 하락 추세는 더 가파르다. 전국 출산율은 0.78명을 기록했고, 서울은 3년 전에 0.5명대로 떨어졌다. 이 수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2021년 평균 합계출산율 1.58명의 절반 수준인데, 앞으로 전망은 더욱 어둡다. 현재 인구 소멸을 걱정해야 할 지역은 인구소멸 고위험지역과 위험지역, 주의지역으로 지정된 기초자치단체를 합하면 전체 지자체 226곳 중 90%가 넘는 206곳이나 된다. 광주광역시조차 인구소멸을 걱정한다니,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다.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취임 때부터 이민청(출입국·이민관리청) 신설을 주장하고 있다. 다만 이번에 추진하는 이민청은 완전한 신설이라기보다는 기존 기구의 승격이라고 보는 것이 맞겠다. 이미 있었던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의 업무에 외교부, 여성가족부, 행정안전부, 고용노동부 등에 흩어진 이민정책을 모아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기구이기 때문이다. 외국인 관리 업무는 1961년부터 법무부 산하에 있던 출입국관리소가 맡아 왔고, 이것이 2007년에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로 전환되어 외국인 등록이나 영주권 업무를 지금까지 담당해 왔다.이런 움직임에 대해 이주민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이자스민은 이민청이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민청 설립만으로는 저출산 문제를 다 해결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주민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출산율이 높아진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77년생인 이자스민 자신만 해도 현재 1남 1녀를 두고 있는데 필리핀에 살았더라면 더 낳았을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참고로, 2022년 필리핀의 출산율은 1.9명이지만, 2020년만 해도 2.78명이었고 그 전에는 훨씬 더 높았다.‘논어’ 자로 편에는, 섭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가까운 사람이 기뻐하면 멀리서도 찾아옵니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민청 설립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한국이 아이 낳기 좋은 정치를 하는 것이다. 한국 젊은이들도 아이를 낳기 어려운데, 이주민이 아이를 낳고 영주하기는 더 어렵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저임금으로 사용하려고만 한다면 출산율 제고는 더 불가능하다.먼저 한국에서 살고 있는 미등록 외국인들부터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고급 인력이 오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한국에 온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떠나지 않게 할지 이주민 정책을 잘 세워야 한다. 이것이 이민청이 저출산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2023-12-10

대통령과 평어를 쓴다면

유영희 작가 아이들이 분가하기 전 나를 부르는 호칭이 ‘용희야’였다. 이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 놀라지만, 그래도 그 호칭 덕분에 지금까지 아이들과 친하게 잘 지내는 것 같다. 갑자기 이 기억이 소환된 이유는 경희대학교 김진해 교수 때문이다. 김 교수는 강의 시간에 교수와 학생이 서로에게 평어를 쓰면서 수업을 한다고 한다. 2022년 2학기부터 평어 수업을 했다고 하니 만 1년이 지난 셈이다. 2015년부터 평어 수업을 해온 고등학교의 이윤승 수학 선생님도 있다.이런 시도는 교수에게도 낯선 경험일 것이다. 대학에서는 교수도 학생에게 반말하지 않는데다가, 다수를 대상으로 강의할 때는 더더욱 존댓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김진해 교수는 ‘반말’ 대신 평어라는 표현을 써서 수평적 관계 형성을 추구한다는 사회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반말은 ‘야’, ‘너’ 같은 하대의 태도를 띠는 데 비해, 평어는 상대방과 수평을 강조한다. 그래서인지 김 교수는 자기를 소개할 때 경희대학교에서 가르친다고 하지 않고 공부한다고 말한다. 교수가 기대한 대로, 학생들의 반응도 좋다. 질문도 편하게 하게 되었고, 문자나 메일도 존댓말로 할 때보다 마음 가볍게 쓰게 되었다고 한다.그런데 뜻밖에 김 교수는 이 평어 수업의 중요한 의의는 교수와 학생간의 평어보다 학생들 사이의 평어 사용이라고 강조한다. 학생들이 선후배 사이에 존댓말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고, 요즘에는 같은 학년 같은 나이라도 존댓말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이 존댓말은 정말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라기보다는 상대와 거리를 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많아서 친근감 형성에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지나치게 경직된 분위기를 만들어 원활한 의사소통을 가로막는다.진작부터 평어를 쓰는 기업도 있다. 유명 출판사의 한 팀에서도 2년 전부터 평어를 쓰고 있다고 하고, 일부 스타트업에서도 하는 모양이다. 어느 회사에서는 평어는 쓰지 않지만, 직급 대신 영어 이름을 지어 부르기도 한다. 이런 시도는 모두 존댓말의 위계를 무너뜨려서 소통을 넓히려는 몸짓이다.한국어의 존댓말이 극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대한항공 비행기 추락사고이다. 1997년 대항항공 801편 항공기가 괌의 섬에서 추락해서 253명의 탑승객 중 228명이 사망했는데, 이 비행기 사고의 결정적인 원인이 부기장이 위계에 눌려 기장에게 제대로 할 말을 못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이 난 것이다. 그 후 영입된 그린버그 부사장은 조종실에서 영어만 사용하게 했고, 그 결과 대한항공이 안전한 항공사로 거듭났다고 하니, 말투와 소통의 상관관계가 얼마나 밀접한지 알 수 있다.그렇다면 학교에서만 평어를 쓸 것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시도해보면 어떨까? 며칠 전, 국회를 통과한 노란봉투법과 방송3법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여 여야 간 대치 국면이 계속되고 있다. 대통령과 평어로 대화한다면 혹시 소통의 물꼬를 틀 수 있을까? 이런 기대가 어처구니없기는 하지만, 한치 앞이 안 보이니 이런 터무니없는 상상이나 해본다.

2023-12-03

암컷과 젖소는 죄가 없지만

유영희 작가 2007년 이명박 대통령 후보가 BBK를 설립했다는 동영상이 나오자, 나경원 대변인이 주어가 없었다고 해서 온 국민이 국어 공부를 한 적이 있다. 요즘 그와 비슷한 언어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암컷과 젖소 이야기다. 암컷은 지난 19일 더불어민주당 최강욱 의원이 민형배 의원 북콘서트에 참석해서 한 말이다. 최강욱 의원은 동물농장에도 암컷들이 나와서 설치는 건 없다면서, 암컷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설치는 암컷을 암컷이라고 부른다고 말한 것이다. 이 말에 비난이 일자, 여성비하 발언이 아닌 동물에 비유한 표현일 뿐이라고 해명하였다.젖소는 23일 국민의힘 김성원 의원(동두천, 연천) 보좌관이 SNS에 올린 글에 나온 말이다. 손수조 리더스클럽 대표가 그 지역구 출마를 준비하고 있는데, 보좌관이 자신의 SNS에 개나 소나(앗, 젖소네) 지역을 잘 안다는 사람이 넘쳐난다고 쓴 것이다. 손수조 대표가 항의하자, 개 이모티콘 다음에 소 이모티콘을 치는데 젖소길래 그냥 ‘앗 젖소네’라고 덧붙인 것뿐이라고 해명했다. 김성원 의원 측에서도 그 글 어디에도 손수조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며 손 대표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모두 옹색한 변명이다.화용론이라는 언어학 분야는 상황과 맥락에 따른 의미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화용론 연구 주제 중 하나인 함축은 발화된 것에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을 말한다. 발화에 직접 나타나진 않지만, 합리적 추론이 가능한 사람이라면 여러 증거를 통해 발화의 의미를 생각해낼 수 있다.암컷 발언의 경우, 최강욱 의원의 발언 직전에 박구용 교수가 현 정치 상황을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 빗대어 말했고, 최강욱 의원 역시 이를 받아서 동물농장조차 암컷이 설치는 경우가 없었다고 했으니, 이는 현재 상황이 동물농장보다 못하다는 말이다. 그가 변명으로 내놓은 동물에 빗댔다는 말은 동물이 아닌 사람을 겨냥했다는 뜻이다. 젖소 발언 역시 이미 손수조 대표에게 출마 포기를 종용한 후에 나왔고, 해당 지역구 출마 도전자가 손수조 한 명뿐이므로 다른 의미를 가질 여지가 없다. 그러니 암컷과 젖소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개만도 못하다고 하면, 듣는 개가 기분 나쁘다는 말이 있다. 암컷과 젖소는 죄가 없지만, 그가 누구든 간에 여성을 가리켜 이런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발화자의 인격을 떨어뜨리는 막말일 뿐이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항의와 반박에 대응하는 태도다. 그들의 변명은 비겁한 궤변에 지나지 않고, 국민의 합리적 추론 능력을 무시하는 오만한 태도이다. 따지고 보면, 진정한 사과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기는 하다.그렇다고 정의당 류호정 의원처럼 라디오 방송에 나와서 최강욱 의원은 인간이 되긴 틀렸다고 하거나 북콘서트 한다면서 이런 이야기나 하는 것은 한심해 죽겠다고 비난하는 방식 역시 정당 정치인의 품격에 맞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인물을 보고 제대로 투표하는 품격 있는 국민이 되어야겠다고 굳게 다진다.

2023-11-26

편파의 기준을 생각한다

유영희 작가 며칠 전부터 KBS에서 편파 논란이 한창이다. 지난 12일, 제26대 KBS 사장으로 취임한 박민은 임명된 지 하루만에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를 대폭 교체하고 프로그램도 개편하였다. 하차 당한 사람 중 뉴스에서 대표적으로 거론된 인물은 KBS 뉴스 9의 이소정과 주진우 라이브의 주진우이다. 2TV 시사토크 프로그램인 더 라이브는 아예 폐지되었는데, 너무 갑작스러운 조치라 당분간 예능 등 다른 프로그램을 송출할 예정이라고 한다.그 다음 날 박민 사장은 과거 KBS에서 편파 방송을 했다며 사과하였다. 그가 편파보도라고 예시한 사례들은 한동훈 관련 ‘검언유착’ 오보, 고 장자연 씨 사건 관련 후원금을 모금하고 도피한 윤지오 씨 출연, ‘오세훈 시장 생태탕 의혹’ 관련 보도 등이다. 그가 직접 언급한 이 세 가지 사례는 모두 여당 또는 보수 언론에 불리한 사건들이다.그러나 편파의 기준은 상대적이라 박민 사장의 행보 역시 편파 혐의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실제로 박민에 대한 기사에는 ‘이제 편파 방송 하겠다는 거지?’ 하는 댓글도 많이 보이고 시청료 거부 운동까지 일어나고 있다.누가 편파적이고 누가 공정한가를 객관적으로 결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중국 고대 춘추 전국 시대에도 백가가 다투는 혼란한 시기에 장자는 다툼을 해소하기 위해 제물론을 주장했다. 장자는 애당초 객관적 공정성은 불가능하다면서 모든 주장이 동등하다고 한다.“내가 자네와 논쟁을 했다고 가정해보세. 자네가 나를 이긴다면, 자네가 옳고 내가 옳지 못한 것일까? 내가 자네를 이긴다면, 내가 옳고 자네가 옳지 못한 것일까? 어느 한 쪽이 옳고, 다른 한 쪽은 그른 것일까? 우리가 둘 다 옳거나, 둘 다 그른 것일까? 만약 자네와 의견이 같은 사람더러 판단해 보라고 하면, 그는 이미 자네와 의견이 같은데, 올바로 판단할 수 있겠나?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판단해 달라고 한들, 올바로 판단할 수 있겠나? 그렇다고 나나 자네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판단해 달라고 한들, 어찌 올바로 판단할 수 있겠나?”나아가 장자는 모든 주장이 다 주관적이므로 나의 주장을 고집하지 말라고 한다. 이런 장자의 말은 귀 기울일 만하기는 하나, 모든 주장에 동등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의심한다’의 저자 보 로토는, 인간의 지각 능력은 근원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신경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나의 오류를 줄이기 위해서는 ‘내가 본 것이 객관적 실재인지 의심하라. 멈추고 그냥 보라.’고 한다. ‘그냥 보기’ 위해서는 낯선 곳에 가보고, 평소 하던 것과 다르게 해봐야 한다. 내게 익숙하지 않은 것, 내가 싫어하는 것과 기꺼이 만나는 일이다.절차와 협약을 무시하고 자신의 주장만 관철시키면 또 다른 편파 시비를 불러온다. 정말 편파를 시정하고 싶다면, 먼저 자신의 생각을 의심해야 한다. 하던 일을 멈추고 그냥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편파를 줄이는 지름길이다.

2023-11-19

부끄러움은 누구의 몫인가

유영희 작가 연일 터져나오는 여당 발 현대사 쟁점에 등 떠밀려 역사를 공부하는 국민이 많을 것 같다. 육사 안에 있던 홍범도 흉상을 다른 곳으로 이전한다는 소식에 자유시 참변을 공부하게 하더니, 백선엽의 친일 기록을 삭제해 간도특설대를 다시 들춰보게 된다. 백선엽은 1943년 간도특설대에 참여해 독립군을 토벌한 행적으로 친일행위자로 이름이 올랐다.백선엽의 친일 행적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되어 있지만, 이번 논란의 계기는 노무현 대통령 직속으로 설립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조사와 관련이 있다. 이 위원회는 5년 간의 활동을 마치며 친일반민족행위자 1천6명을 발표했는데 현충원 안장자 중 백선엽을 비롯한 12명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백선엽은 99세 나이로 2020년에 사망하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는데, 당시 국가보훈부는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자 12명의 안장 정보에 모두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2009년)’라는 문구를 기록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백선엽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시작되어 백선엽 추모식을 챙기더니, 지난 6월에는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을 설립했고, 7월에는 백선엽 안장자 기록에서 이를 삭제했다. 이에 대해 지난 10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종합정책질의에서 유기홍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를 비판하자,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국립묘지에 전과기록을 기재한 사람이 없다”면서, “최초 기재 행위 자체가 법적 근거 없이 이루어졌다”고 대답한 것이다. 알고 보니, 다른 11명의 기록은 삭제하지 않았다.이런 기록이 부당하다면 12명 친일 기록을 다 삭제해야 할 텐데 왜 백선엽 기록만 삭제했는지도 의문이고, 아무리 전 정권의 결정이라고 해도 이미 오래 전 사회적 공감대가 이루어진 조사 결과에 대해 법적 근거가 없다면서 한순간에 뒤집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이런 결정은 국가의 정체성을 좌우하는 문제인데, 이렇게 합의 과정 없이 졸속으로 그것도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처리한 것이다.친일행위자로 판정되었으면서 현충원에 안장된 인물을 둘러싸고 여권에서는 기존 친일 평가 자체를 재고해야 한다고 나섰고, 민주당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국립묘지 안장을 금지하고 현재 친일 묘지는 이전하라는 ‘국립묘지법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라 접점 찾기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역사의식을 가지면, 지금 현실에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선택들을 고뇌하고 번민하게 된다”는 어느 언론인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정치인들은 자신이 지금 하는 선택이 어떤 역사를 만들어 갈지 고뇌해야 한다. 윤동주처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보는’ 자아 성찰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국민의 행복을 책임지겠다고 나선 사람들이라면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더 번민해야 한다. 국가경쟁력은 해마다 떨어지고, 하루하루의 삶이 팍팍하기만 한 민초는 정쟁에 갇힌 정치인의 행태가 부끄럽기만 하다.

2023-11-12

지방 균형 발전 외치더니 서울을 확대한다고요?

유영희 작가 지난 10월 말,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가 김포를 서울시에 편입하는 것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구리, 하남 등 서울과 인접한 다른 도시도 서울시 편입을 요구하자, 주민 합의를 전제로 서울에 편입하는 것도 적극 검토하겠다고 하면서 메가시티가 세계적 트렌드라며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경기도를 경기남도 경기북도로 나누는 과정에서 불거진 이 논의에 김포시장은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다고 하지만, 주민 설문 조사 보고서 한 장 없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어 그 배경에 의혹이 쏠리고 있다.갑작스러운 이 소식에 국민들 모두 총선용이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고, 도시공학자 등 전문가들은 그 나름대로 도쿄나 뉴욕의 메가시티화는 행정구역을 편입시키는 방식이 아니라면서 김포시의 서울 편입에 대해 부정적인 상태다.양천구, 강서구의 서울 편입 선례 역시 군색한 변명이다. 김포시는 인구 50만 명이 대도시인 데다 서울과 동심원을 그리는 상태도 아니고 마치 열쇠 모양처럼 길죽한 형태라서 도시 이용 효율성마저 엄청나게 떨어진다. 어떻게 보아도 서울시 인구나 면적이 세계의 다른 나라보다 작지 않은 상황에 서울을 더 늘려야 한다는 주장의 정당성은 찾기가 어렵다.김포시의 서울 편입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서울시 편중 심화를 가속화한다는 점이다. 메가시티와 서울의 확장은 개념이 다르다. 메가시티 구상이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하려면, 전국적으로 메가시티를 어디에 어떻게 몇 개를 건설할 것인지 큰 단위에서 행정구역 개편 논의와 맞물려서 이루어져야 한다. 게다가 인접 도시까지 주민만 합의하면 서울 편입을 적극 고려하겠다니, 이것이 책임 있는 여당에서 일하는 방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서툴고 위험하다.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은 김포시의 서울 편입 발표가 있은 지 며칠이 안 되어 나온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11월 1일부터 3일간 대전컨벤션센터에서 ‘지방시대 엑스포’ 행사가 있었다. 이 행사는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이 행사에서 있었던 ‘제1회 지방자치 및 균형발전의 날’ 기념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중앙정부는 쥐고 있는 권한을 지역으로 이전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원래 10월 29일 지방자치의 날은 2012년에 정했던 것인데, ‘지방자치 및 균형발전의 날’로 올해 이름을 바꾸었기 때문에 제1회가 된 것이다. 이것만 보면 정부가 지방 균형 발전의 의지가 꽤 있는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이번 서울을 메가시티로 추진하겠다는 발표를 보면서 과연 이런 명칭 변경과 엑스포 행사가 진정성도 없고 그저 형식적으로 행사만 치른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국방보다 경제보다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는 공자의 말도 있듯이, 신뢰는 정치의 근본이다. 당리당략으로 졸속 정책을 발표하는 방식은 구시대적 발상일 뿐 아니라 성공하기도 어렵다.장기적인 국토 균형 발전 계획을 세워서 지방의 인구 소멸도 막고 국민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주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2023-11-05

인요한 혁신위원장에게 바란다

유영희 작가 지난 23일, 국민의힘이 혁신위원회를 꾸렸다. 서울 강서구 선거 패배 이후 내년 총선의 승기를 잡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일이다.12월 24일까지 60일간 활동하는 혁신위원회 위원장으로 뜻밖에도 인요한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장이 지명되었다. 외국인이기는 하지만, 할아버지가 1912년 한국에 선교 활동하러 와서 아버지도 군산에서 태어났고, 인요한 역시 전주에서 태어나 순천에서 자라 스스로 순천 촌놈이라고 소개한다고 하니 토종 한국인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할아버지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점, 아버지가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다는 점들로 인요한 가족의 한국사랑은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지만, 존 린튼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국적은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형 구급차를 개발한 공으로 2012년 정부로부터 순천 인 씨라는 성을 받고 특수 귀화를 통해 한국 국적도 갖게 되었다.인요한 혁신위원장은 광주 시민군을 위해 통역도 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존경했다니, 일반 국민의힘 기조와는 많이 다르다. 이번에도 인요한은 첫 대외 행선지를 광주로 정하고, 개인자격이지만 이태원 참사 1주기 추모식에도 가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 정도라면 진정한 통합을 위해 그가 적격이라는 생각이 든다.이제 그가 혁신위원장이 된 지 3일 만에 내놓은 12명의 혁신위원 명단을 보니, 여성이 7명으로 남성보다 1명 많고, 청년층의 참여도 두드러진다. 70년대생 3명을 제외하고라도, 80년대 4명, 90년대, 2000년대가 각 1명이다. 사업가로 이름을 올린 여성은 나이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아무래도 중장년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정치인 6명 외에 교수 2명, 의사 2명, 앵커, 학생회장, 사업가 등이라 전문 정치인에게 휘둘리지 않을까 의문이 든다. 인요한 위원장도 그 점을 의식했는지 혼자서라도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하겠다고 약속한다.그러나 인요한 혁신위원장의 지난 행적이나 현재의 정치 이상이 아무리 통합 지향적이라고 해도 현실 정치에서 그 뜻이 관철되게 하려면 다른 능력이 필요하다. 이태원 참사 추모식에 가는 이유에 대해 우리 모두 죄인이니 추모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뭉뚱그리며 책임소재를 흐리고, 홍준표 이준석에 대한 대사면 제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어떡하겠느냐는 질문에 바뀌지 않으면 죽는다는 원론적인 대답만 하면 곤란하다. 혁신위원회의 권한 범위를 모르겠다면서 와이프와 아이만 남기고 바꾸겠다는 말을 어떻게 실천할지도 의문이다. 인요한은 박근혜 정부 때도 참여했지만 자기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자 후회했다고 한다. 이번에도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 채 물러난다면 개인에게나 우리 사회에 손실이다.누가 정권을 잡든 국민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정부의 존재 이유이다. 인요한 혁신위원장이 여러 의구심과 불안 요소를 잘 극복하고 평소 가진 통합의 지향을 잘 관철해서 국민의힘이 이념 논쟁 그만두고 민생 정치를 펼치는 데 기여해주기를 바란다.

2023-10-29

이제 디지털 다이어트를 할 시간

유영희 작가 페이스북에 가입한 지 10년이 넘었다. 열심 사용자도 아니고 친구도 많지 않지만, 읽을거리도 많고 접속 속도도 빨라서 버스나 지하철에서, 심지어 신호등을 기다리면서도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가 보게 된다. 카카오톡은 페이스북보다 더 실시간으로 상대와 연결된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큰애에게 고양이 사진을 보내고, 친구와 수다 떨거나 업무를 보는 데 카톡은 필수다. 요즘엔 인스타그램까지 들어가고 있다.이제 현대인은 디지털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정도에 이르렀다. 코로나19로 은둔 생활을 해야 했던 지난 3년 간 인터넷 사용자는 더욱 급격하게 늘었다. 글로벌 인포메이션 자료에 의하면, 2022년 현재 전 세계 스마트폰 사용자는 55억 명이 넘어서 보급률이 70%에 이른다고 한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물리적 제한을 극복한 인터넷 세상은 인류에게 새로운 대안을 주었다.그러나 이런 디지털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데이터센터와 해저케이블 등 많은 물리적 실체가 필요하다. 페이스북이 북극 가까이에 있는 스위스 룰레오 호수 근처에 거대한 데이터센터를 세운 덕에 수십 억 명의 페이스북 가입자는 수백 장의 사진을 올릴 수 있고, ‘좋아요’를 주고받는다. 인터넷 사용자들은 구글 클라우드에 온갖 데이터를 올린다. 문제는 이런 데이터를 전송하고 보관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큰 데이터센터를 만들어야 하고, 해저케이블을 가설해야 한다는 것이다.프랑스 언론인 기욤 피트롱은 이런 디지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2년 간 조사하고 나서, ‘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라는 책(원제 ‘디지털 지옥’)을 썼다. 이 책에서 저자는 ‘좋아요’ 하나에도 전기 에너지가 필요하고, 셀카 한 장에도 석탄이 필요하다면서, 데이터센터를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땅이 개발되는지 밝혔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디지털 장비는 340억 개, 그 무게는 2억2천400만t이라면서, 이 장비들이 세계 전기 소비량의 10%를 차지하고 지구 온실 가스 배출량의 약 4%를 발생시킨다고 한다.그러나 디지털 산업이 엄청난 물과 에너지를 소비하고 광물 자원을 고갈시킨다고 아무리 외쳐도 디지털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특히 우리나라는 2022년 기준 초고속인터넷망 보급률이 99.96%로 디지털화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건강을 위해 작년에는 몸무게 다이어트에 성공해서 체력이 좋아졌고, 올봄에는 살림 다이어트로 집안을 비웠다. 이제는 디지털 다이어트에 도전해보자. 정신을 빼놓는 앱 몇 개는 바로 삭제했다. 일요일 정도는 스마트폰을 끄거나 간헐적 단식처럼 일정 시간 꺼놓는 식으로 디지털 기기 사용 시간을 줄여도 좋겠다. SNS에 글을 쓰거나 사진을 올릴 때는 그것을 위해 소비될 에너지를 상쇄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한 번 더 생각해보자. 휴대폰의 사진도 수시로 정리하고 클라우드 청소도 해보자. 이참에 사회의 디지털 다이어트 방법도 고민해보자. 환경도 보호하고 멀리 나간 정신도 돌아올 것이다.

2023-10-22

나도 정의감 중독자일까?

유영희 작가 지난 주 목요일에 동네 문화 행사에 다녀왔다. 지역 문화 자원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정책 토론회였는데, 공공도서관의 역할에 대한 논의가 있어 관심이 갔다. 그런데 자료집을 보니, 오프닝 공연 연주자가 두 명이었는데, 한 명의 약력은 누락되어 있고, 연주곡의 작곡자도 잘못 표기되어 있었다.행사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런 문제를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음날 행사를 주관한 기관에 전화하니, 담당자는 그쪽에서 보내준 대로 편집했다며 같은 말만 반복한다. 결국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알아보고 다음부터는 오류가 없도록 꼼꼼하게 살피겠습니다. 이렇게 답변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하니, 담당자는 내 말을 앵무새처럼 똑같이 따라한다. 그러자 조금씩 올라오던 감정이 고삐가 풀리면서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아차, 나도 정의감 중독자인가?’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갔다.한때 ‘왜 분노해야 하는가’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을 정도로 분노는 정의감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감정이다. 그러나 안도 슈스케는 ‘정의감 중독 사회’에서 ‘분노’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공공의 이익과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필요하지만, 정의감에 휩싸여 분노가 폭주하면 정의 실현은 간 데 없고 자신에게도 사회에도 해롭기만 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감정을 일그러진 정의감이라고 하면서, 저자는 ‘긴 안목으로 보았을 때 나와 다른 사람에게 건전한가?’를 숙고하고, 나아가 관여할 필요가 있는 일인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가늠해보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여하고 싶다’와 ‘관여할 필요가 있다’를 구분하는 일이다.이런 이야기는 자칫 소시민적 행복을 추구하라는 말처럼 들릴 수 있다.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일은 개인이 관여하기도 어렵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관여할 필요가 있는 일은 해야 하며, 다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렇게 하면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분노는 지혜로운 이성으로 대체되고 정의가 실현될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이것을 참고해서 내 행동과 감정을 점검해보니, 관여할 필요성보다는 평소 오타 하나에도 지나치게 예민한 나의 특성이 작동해서 관여하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소소한 에피소드지만, 이렇게 올바름을 추구하는 행동의 기저에는 해결을 기다리는 마음이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충분했다.여기저기 SNS에 분노를 폭발하는 방식으로 갈등을 증폭시키는 것은 정의감에 중독된 현상이다. 우리 사회에는 정의감에 중독된 사람들이 많다. 이런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노력도 해야 하지만, 사회 교육 기관에서도 개설하면 좋겠다. 분노하는 내 마음의 기저를 인식하는 연습은 혼자만 하기보다는 사회적으로 확산될 때 더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관여할 필요가 있고, 할 수 있는 일을 차분하게 실천할 때 정의는 더 잘 실현된다.

2023-10-15

연구개발비 삭감하면서 의사과학자 양성한다고?

유영희 작가 어떤 사안이 발생했을 때 고전 한 구절 인용하는 방식은 진부하면서도 울림을 주는 묘한 매력이 있다. 며칠 전 ‘논어’ 한 구절을 읽다 보니, 역시 단순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맛이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천 개의 수레를 보유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는 신중한 태도로 백성의 형편을 잘 헤아려 정책을 실시하고, 말과 행동을 일치시켜서 백성에게 믿음을 주며, 세금을 허투루 쓰지 않고 백성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2024년 예산안은 여러 분야에서 삭감되었는데, 삭감된 내용을 보면 더 놀란다, 현 정부 출범 당시 중점 육성하겠다고 한 반도체, 인공지능, 양자, 우주, 데이터 분양까지 삭감되었기 때문이다. 여성과학기술인 육성 예산 15억원을 비롯하여 과학기술 인력 양성 사업 전반에 걸쳐 940여 억원이 삭감되었다. 이것은 윤석열 대통령의 RD 이권 카르텔 한 마디에 빚어진 사태다. 9월 5일, ‘국가 과학기술 바로 세우기 과학기술계 연대회의’가 출범해 과학기술기본법에 있는 절차도 무시했다고 항의하며 예산 지키기에 나섰지만 얼마나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낙관하기 힘들다.그런데 한편에서는 대통령의 한 마디로 의전원이 설립이 가시화되고 있다. 지난 2월 윤석열 대통령이 카이스트에서 의사과학자 육성 대학원 설립에 대한 긍정적 메시지를 보낸 후 카이스트의 의전원 설립이 속도가 붙었다. 포스텍도 2028년을 목표로 의전원 설립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의사과학자의 필요성은 두 말이 필요가 없다. 화이자에서 mRNA 백신을 개발하여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를 종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독일의 우구르 사힌, 외즐렘 튀레지 박사 부부가 바로 의사과학자이다. 오랜 기간 과학계의 mRNA 연구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여성 과학자 카탈린 커리코는 드류 와이즈만과 함께 mRNA가 면역 체계와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발견하여 백신 개발에 기여한 공으로 올해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이처럼 중차대한 의사과학자가 우리 사회에서 양성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과학자에 대한 홀대 때문이다. 카이스트가 미래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의사과학자를 배출한다고 해도 진료하는 의사의 평균 연봉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대우로 과연 계속 이들이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가 하는 현실이 의사과학 연구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지금도 과학고등학교 졸업생의 의대 쏠림 현상이 노골적인데, 의전원 졸업생을 의사과학자로 붙들어두기는 더 어렵다. 현재 배출된 의사과학자에 대한 지원이 더 절실하다는 반대 의견이 타당하게 들리는 이유다. 게다가 기초의학을 가르칠 교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에서 카이스트나 포스텍에서 설립할 의전원에서 얼마나 내실 있게 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가 하는 비판도 많다.무엇보다 연구개발비는 삭감하면서 의사과학자를 양성한다니, 믿음이 가지 않는다. 어떤 정책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신중한 절차를 거쳐 백년을 내다보는 정책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다가온다.

2023-10-09

민생과 민심

유영희 작가 언제 끝날지 암담하기만 했던 코로나19가 지난 8월 31일 인플루엔자와 같은 4급 감염병으로 전환됐고, 그 이후에도 안정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아무래도 이번 추석에는 대규모 이동이 일어날 것 같다. 지난 몇 년간 일가친척이 서로 만나기 어려웠으니 오랜만에 마음 놓고 회포를 풀 것이다.친한 사람과는 정치와 종교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명절에 가족이 모이면 정치 이야기가 빠지기 어렵다. 정치에 입문하자마자 대통령에 당선된 극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이 지난 1년 반 동안 얼마나 정치를 잘하고 있는지 찬반이 분분할 것이며, 최근 단식을 감행한 이재명 제1야당 대표에 대한 의견도 극과 극을 오갈 것이다.정치는 어떤 사안이라도 정당 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경향이 많고, 일반인에게 전달되는 정보도 왜곡되거나 제한적이라 소통하기가 참 어렵다. 자기가 즐겨 듣는 미디어에만 의존하다 보면, 자기와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는 전혀 듣지 않게 되고, 그만큼 양쪽 입장의 골은 깊어지고 대화는 끊어진다.민심이 천심이라는 말도 있지만, 가짜 뉴스가 판을 치는 현대 사회에서 민심은 미디어에 의해서 세뇌될 가능성도 많다. 그러니 민감한 정치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들리는 대로만 듣지 말고 조심스레 탐색하는 태도가 필요하다.최근의 가장 큰 이슈는, 지난 21일 제1야당 대표 이재명 의원에 대해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일일 것이다. 지난 2월 16일 대장동 등의 문제로 기소된 체포동의안이 한 표 차이로 부결된 후 백현동으로 다시 기소할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이 많았고, 이렇게 쪼개서 기소하는 검찰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재명 대표에 대한 일부 국민의 피로감은 이재명 때문이라기보다는 검찰의 전략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대장동 관련해서는 곽상도와 박영수의 혐의만 일부 증명되었을 뿐이어서 더 그렇다. 게다가 이번 체포동의안 가결이 비명 계열의 위기감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는 것을 보면, 이런 결과가 백현동 문제나 대북 송금 등의 혐의 때문인지 친명·비명 통합에 실패한 리더십 부재 때문인지 혼란스럽다.다른 한편, 이재명 대표의 대응이 선뜻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헌법상에 보장된 불체포 특권을 먼저 포기한다고 해놓고 이번에 체포동의안 부결을 호소한 것은 모순으로 보이는 데다 지난달 31일부터 단식에 돌입한 행보도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의사의 강한 권고로 성과도 없이 24일간의 단식을 중단하고 보니, 방탄용이었느냐는 의심을 해소하기도 어렵다. 다만, 단식이 좋은 전략이 아니었다고 해서 그것이 범죄 혐의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지금 정말 중요한 것은 경제다. 지난 6월 OECD는 세계 경제 성장률을 전망하면서, 3월의 2.6%에서 2.7%로 올린 반면, 한국은 1.6%에서 1.5%로 내려잡으면서, 취약계층 직접 지원과 재정건전성을 높일 것 등 여러 가지 권고했다. 이것은 대부분 정치력이 필요한 사안들이다. 민생이 해결되면, 민심은 돌아온다.

2023-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