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우연찮게 두 모임에서 정치 이야기가 나왔다. 한 모임에서 A가 말한다. “이번에 젊은 여자들이 너무 나서서 탄핵을 주장해서 민주당 지지를 끊었어요.” B가 묻는다. “20대 여자들이 광장에 나오는 것과 민주당 지지가 어떤 관계가 있어요?” “민주당이 지나치게 페미니즘을 내세워서 20대 남자들이 국힘으로 갔으니까요.” “탄핵을 반대하시나요?” “그건 아닌데 20대 여자들이 꼴 보기 싫어요.”
다른 모임에서 C가 말한다. “양쪽이 너무 극단적이에요. 상대에게도 일말의 타당성이 있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면 좋겠어요.” 그러자 D가 반박한다. “그런 양비론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정확한 좌표를 찍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그 상황에서 가장 약자의 입장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이번 사태에서 가장 약자는 경호처 직원이라고 어느 문화 셀럽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경호처 직원 입장에서 보면 어느 쪽이 옳은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두 모임에서 이 대화는 한두 번 더 왔다 갔다 하고 곧바로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원래 모임의 주제가 아니기도 했고, 두 모임의 구성원들이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공감대가 있는 편이라 아마도 더 이야기하다가 불편해질까 봐 서로 조심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기본 공감대를 가지고 있는 관계일수록 논쟁을 통해서 공감대를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떠나지 않는다.
그러던 중 한 책이 눈에 띄어 냉큼 손에 넣었다. 아리안 샤비시의 ‘우리에겐 논쟁이 필요하다’라는 책인데, 원제를 보니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논쟁하기’이다. 4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에서 저자는 몇 가지 이슈를 제시하고 그런 이슈가 일어나게 된 역사적 배경과 논쟁 당사자의 입장을 세세하게 설명하면서도 그 이슈에 대한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러고 보니, A는 페미니즘을 내세우며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며느리 때문에 서운함을 넘어 분노의 감정을 삭이느라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고 D는 야당 쪽 정치 활동한 경력이 있다. 한두 마디로 툭 나오는 어떤 정치적 견해라도 그 기저에는 오랜 세월 쌓인 배경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주제로 모인 경우, 갑자기 나온 몇 마디 말로 생각이 바뀔 수는 없다.
대립되는 두 입장이 논쟁을 통해서 반드시 의견의 일치를 얻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논쟁을 하다 보면, 나의 주장이 어떤 배경에서 나온 것인지 스스로 깨달을 수도 있고,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서도 그 주장의 배경과 의미를 이해하게 될 수 있다. 그 정도만 되어도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간의 룰을 가지고 긴 시간 논쟁해야 한다. 며칠 전 어떤 정치인이 다음 대통령 선거 때는 시간제한 없는 토론을 해보자고 제안하는 것을 보았는데, 같은 맥락이다. 아리안 샤비시의 말처럼, 침묵은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 정치적 입장이 인격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면서 기본 신뢰가 있는 관계에서부터 진지하고 성숙하게 논쟁하는 기회를 피하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