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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맹자는 틀렸을까?

유영희 작가 지난 토요일 아침 대학 동창 단톡방에 한 친구가 나와 뜻이 다른 정치 견해를 올렸기에 발끈하여 한마디 했다. 지금 사태는 네가 지지하는 당에 100% 책임이 있다고, 우리는 서로 설득될 단계는 아닌 것 같다고. 단톡방에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은 요즘 정국 대치 상황과 맞물려 있다. 여당과 야당이 서로 상대를 제2의 내란 주범이라고 주장하며 정국의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한쪽에서는 12·3 비상계엄은 위헌이고 내란이라 하고 한쪽에서는 탄핵을 이재명 방탄용이라 하며 맞받아친다. 같은 사실을 두고 이렇게 생각이 다르고 감정이 다를 수 있는지 매일 놀라는 중이다. 분명히 고대 중국의 사상가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했고, 그의 사상은 2300년이 지난 한국의 윤리 교과서에 빠지지 않는, 인간에 대한 통찰력 있는 견해로 자리매김해왔다. 인간이라면, 아기가 우물 쪽으로 기어가면 깜짝 놀라 구하러 가는 측은지심을 비롯해서 자기의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수오지심, 남에게 양보하는 사양지심, 옳고 그름은 직관적으로 판별할 수 있다는 시비지심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맹자의 이 논리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이타적이고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력이 있으며 공공의 이익에 대한 감수성이 있다. 그러나 연일 쏟아지는 뉴스를 보면, 많이 배운 정치인들의 행동에 과연 이런 사단의 마음이 있는지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일부 정치인들은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하고도 사과는커녕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공공의 이익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근시안적인 당리당략에 몰두하며 당당하게 궤변을 늘어놓는다. 이런 뉴스를 보고 있자면 아무리 맹자가 위대한 사상가라고 해도 당신은 틀렸다라는 말을 참기 어렵다. 인간은 악하다 못해 사악한 존재인 것만 같다. 이런 상황에서 로버트 그린의 ‘인간 본성의 법칙’을 보자니, 답답한 가슴이 조금은 풀리는 듯하다. 로버트 그린은 기본적으로 인간은 동물이라면서, 나와 생각이 같은 집단을 찾아 내 편의 의견만 증폭시키며 나와 다른 사람을 악마화한다고 일갈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진실을 찾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나의 긴장을 이완시켜주거나 자존심을 세워주거나 우월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들만 고집한다. ‘사고 과정의 쾌락 원칙’은 우리가 가진 모든 정신적 편향의 근원이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면 인간의 본성은 선하거나 악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중층적이고 다면적이다. 로버트 그린도 인간은 한 가지 본성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서 동시에 증오할 수 있고, 존경심과 시기심을 동시에 느낄 수도 있다고 한다. 인간이 동물에서 인간으로 업그레이드 되기 위해서는 이런 모순된 감정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한다. 자신이 한 것은 모두 옳고 상대는 악마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동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단톡방에서 내 말을 들은 그 동창은 말을 안 하면 외골수가 될까 봐 올렸다고 한다. 아, 이런, 나도 인간이 덜 되었구나 싶었다. 지금은 동물이어도 인간이 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으니, 맹자는 반은 틀렸지만 반은 맞았다.

2025-01-12

간절한 소망

유영희 작가 며칠 전 동네 인쇄소에 갔다가 사장에게 인상 깊은 말을 들었다. 매스컴에 자주 오르는 지역 국회의원을 언급하며 ‘그 의원은 영혼이 없는 사람 같아요. 이 동네 주민이 아니라는 데도 굳이 들어와서 선거 운동을 하는데, 말 한마디 진정성이 없고 시선은 어디를 보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 동네 주민들은 어떻게 그런 사람을 찍어줄까요?’ 한다. 20년 넘게 단골로 다녔어도 인쇄 업무 이외의 대화는 한 적이 없는데 얼마나 답답하면 저런 말을 할까 놀랐고, 관찰과 표현의 섬세함에 또 놀랐다. 철학자 피터 비에리는 소설을 쓸 때는 파스칼 메르시어라는 필명을 사용한다. 그의 장편소설 ‘언어의 무게’에는 주인공 레이랜드가 독일어 책을 영어로 번역하다가 독일어에서는 쉼표가 있지만 영어에서는 빼야 하지 않을까 고민한다. 친구 버크에게 물어보니, 버크는 이렇게 대답한다. “쉼표가 중요하군. 없애면 유치하게 들리네. 짧고 건조해. …. 쉼표는 모든 것을 바꾸네. 진부하고 단순한 문장을 쉼표가 위대한 문장으로 만드네.” 피터 비에리라는 본명으로 발표한 철학책, ‘자기 결정’에서 그는 ‘글을 쓰고 나면 다른 사람이 된다.’고까지 말한다. 비단 글을 쓸 때만 언어의 무게를 살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 언어에서도 언어는 한없는 무게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현대 사회에서는 모든 언어가 글로 변환되므로 언어를 세심하게 써야 할 필요성은 더 커졌다. 글로 쓰든 말로 하든 이렇게 언어는 밖으로 표현되고 나면 그 말을 사용한 사람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니,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생각과 인격을 만든다. 그래서 조지 오웰의 ‘1984’에서도 독재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언어를 관리했다. 지난달 23일,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이 트랙터를 몰고 상경 시위를 한 전국농민회총연맹을 두고 “몽둥이가 답”이라고 해서 물의를 일으켰다. 전농의 트랙터 행렬에 대해 나중에 경찰이 허용한 것을 보면 불법이 아니지만, 설령 불법이라 하더라도 국회의원이 ‘몽둥이가 답’이라는 언어를 사용한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언어는 대상을 향하는 것이지만 결국 자신에게 돌아와 그 사람의 인격을 만든다. 윤상현 의원의 행보가 나날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은 그가 사용하는 언어 때문일지도 모른다. 해리 G. 프랭크퍼트는 ‘개소리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개소리가 거짓말보다 위험하다고 한다. 거짓말은 진리를 알고 있다는 점에서 진리를 존중하는 것이지만 개소리는 진실을 전혀 상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저자는 말하는 이가 진정성을 가지고 한 말도 진리에 대한 존중이 없으면 개소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지도층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개소리도 불사한다면 우리 사회는 혼란을 벗어날 수 없다. 한편, 옳음을 지향해가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그름에 대해 거친 감정과 극단적 언어로 대응하는 것도 경계할 일이다. 그런 대응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거니와 말하는 사람의 인격도 무너뜨린다. 사회지도층은 물론이고, 우리 모두 새해에는 언어의 무거움을 의식하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해본다.

2025-01-05

무속이란 무엇인가

유영희 작가 OO보살이니 OO법사니 하는 무속인의 이름이 뉴스에 오르내린 지 오래되었다. 언젠가부터 무속인이라고 부르지만 원래 명칭은 무당이다. 그러나 보살은 열반에 들었다가 중생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어 세상에 다시 온 사람을 이르는 말이고, 법사는 출가는 하지 않았지만 승려 못지않게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는 지도자다. 반면 무속은 미신과 동의어처럼 쓰인다. 인기 드라마 ‘더 글로리’에도 무당을 맹신하다가 딸까지 나락으로 보내는 인물이 나온다. 무당을 무속인이라고 바꿔 부르게 된 것도, 이들이 불교 용어를 차용해서 쓰는 것도 모두 무당에 대한 인식이 안 좋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무당을 가까이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다. 초등학교 때 이웃집 마당에서 내림굿하는 무당이 작두 타는 것을 본 적이 있고, 엄마의 병환이 2∼3년간 병원 치료에도 차도가 없을 때 이모의 권유로 동네 무당에게 굿을 부탁한 적도 있다. 엄마는 무속을 믿는 분이 아니었는데도 너무 답답하다 보니 이모의 권유를 수용하셨다. 방에서 하는 작은 기도 수준이었고 큰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차도가 없어도 실망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파킨슨병인데, 그동안 오진으로 치료를 잘못했던 것이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무당은 대학 강의실에서 만난 만신 김금화였다. 내가 대학원 재학 당시 김용옥 교수가 학부 강의 시간에 초청했던 것인데, 문과대학에서 가장 큰 강의실이었는데도 서 있을 자리도 없이 꽉 찼던 기억이 난다. 그때 김금화 선생은 무당이란 개인의 길흉화복을 점치고 예방해주는 기능에 더해서 공동체를 위해 기도한다고 했던 것이 기억에 또렷하다. 2017년에 나온 김금화 선생 인터뷰 기사를 보니, 당시 87세에도 나라가 편안하고 평화통일을 이루고 전쟁 없는 나라가 되게 해달라 기도드리고 있다고 한다. 학술적으로 무속과 관련하여 큰 업적은 남긴 유동식 교수는 ‘한국 무교의 역사와 구조’에서 단군을 비롯한 주몽이나 혁거세와 같은 건국 인물이 모두 무당이라면서 하느님의 강림과 인간의 성화를 이룬 사람이라고 분석했다. 무당이 원래는 사회 공동체의 안녕을 도모했다는 뜻이다. 많은 무당이 신당에 모시는 인물은 바리공주다. 바리공주는 오구대왕에게 버림받았지만 불치병에 걸린 부모를 위해 서천에 가서 약수를 가져와서 부모를 살린 것으로 유명한데, 그 이후가 더 중요하다. 바리공주가 서천에 다녀오는 과정에서 지옥에서 고통받는 수많은 영혼을 보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저승으로 가기 때문이다. 지옥에 간 사람들은 이승에 있을 때 벼슬아치의 착취를 못 이겨 도둑질 같은 죄를 지은 사람들이었다. 바리공주는 이승의 안락을 마다하고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저승으로 간 것이다. 공동체와 사회적 약자를 위하던 무속이 지금은 국민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권력자들이 무속에 기대어 국사를 결정한다는 소문이 무성한데, 비상계엄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노상원 집앞에 막걸리와 초들이 쌓인 사진까지 보니 참담하다. 홍익인간을 외치던 단군은 아니지만 김금화 같은 무당을 바라는 것도 무리일까?

2024-12-29

내 안의 ‘아이히만’을 경계하자

유영희 작가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요즘 상영하고 있는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동명 소설에 나오는 한 문장이다. 주인공 빌 펄롱은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머니마저 일찍 돌아가셔서 윌슨 부인의 집에서 자랐다. 영화에서는 펄롱이 딱한 아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친절한 사람으로만 표현되어 있는데, 소설에서는 일상의 반복을 넘어서는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고민하는 흔적이 보인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고 독백한다. 결국 펄롱은 부모에게 버림받고 수녀원에서 학대받는 미혼모를 구한다. 누구나 펄롱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타고나면서 선하다는 것은 동서양의 공통된 전통이지만, 현실의 인간은 이기적이고 심지어 사악하기까지 하다. 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런 인간의 본성을 거슬러야 한다. 그러니 선을 실현하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한편, 아돌프 아이히만은 세계 제2차대전 때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게토와 학살수용소로 추방했던 나치 전범이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악함에 대해 그가 본래 악인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세계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함께 생각하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체포된 후 아이히만은 총통 체제에서 상급자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고 자신을 합리화했지만, 한나 아렌트는 그가 나치에 협력한 것은 무사유의 결과라고 진단하면서 세계와 세계 안에 사는 사람에 대한 앎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영화로 돌아가면, 펄롱이 딱한 아이들에게 작은 친절이라도 베푼 것, 미시즈 윌슨이 하지 않은 사소한 것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 모두 펄롱이 사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이 아무리 정당해도 현실에서 사유하는 인간이 되기는 어렵다. 처음부터 사유하기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겠고, 사유하다가 자기에게 닥칠 위험을 감지하고 포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미혼모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오는 펄롱의 얼굴에 번지는 미소는 앞으로 그에게 닥칠 고난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준다. 고위 장성들이 12·3 비상계엄에 가담한 것이 밝혀지고 있다. 김대우 방첩사 수사단장은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에게서 구금 시설과 체포 지시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그 역시 명령을 거부하는 소령을 구타하여 버스에 강제로 타게 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그의 증언을 형량을 낮추려는 꼼수라고 폄하할 수만은 없다. 어쩌면 뒤늦은 사유의 결과일 수도 있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 현실의 안락을 위해 무사유를 선택한 결과가 사유의 고통보다 더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를 통해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아이히만을 경계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2024-12-22

천명을 유지하는 법

유영희 작가 지난주에 동양의 고전 ‘대학’ 15주 강의가 끝났다. ‘대학’이 편찬된 시기는 적어도 한나라 무제 때라고 하니 2천 년 동안 살아남은 책이라 쉽게 깎아내릴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대학’은 주자가 3강령, 8조목으로 체계화한 이래로 더 유명해졌고 유교가 지배하던 조선 사회에서 우리 문화에 깊이 뿌리박힌 데다 최근까지 중등 교육기관에서도 가르친 적이 있기 때문에 지금도 3강령 8조목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럼에도 현대 사회에서는 그 가치가 퇴색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참여한 수강생들은 ‘대학’을 처음 읽는다면서도 마지막에 가서는 이구동성으로 ‘대학’의 정치철학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을 발견하며 대학의 메시지에 감동했다. 그중에서 가장 수강생들의 마음을 끈 것은 ‘자신을 속이지 말라’와 ‘천명은 영원하지 않다’라는 두 문장이었다. ‘자신를 속이지 말라’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진실해지라는 말인데, 말은 쉬워도 자신의 진실함을 발견하고 인정하기가 생각보다 어렵다.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은 아마도 자신에게 진실할 줄을 알고 정성을 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수신서로도 유용하지만 자기계발서로도 손색이 없다. ‘천명은 영원하지 않다’는 문장은 요즘 상황과 맞물려 깊은 울림을 준 것 같다. 중국 고대 흥성했던 은나라의 예를 들며, 처음 탕왕이 은나라를 세울 때는 백성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인데, 주왕의 폭정으로 백성의 마음을 잃게 되자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무왕이 백성의 마음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천명은 어느 왕조에게 영원히 주어지지 않고 오직 백성에게 부모노릇을 제대로 했을 때만 주어진다고 강조한다. 통치자를 부모에 비유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무시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통치자의 의무를 강조하는 논리로 생각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지금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사리사욕과 당리당략에만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통령의 계엄령 발동이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당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당이 무너질까봐 반대한다고 대놓고 말하고 있다. 물론, 지금의 야당도 이런 오류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을 때 자신의 권력이 10년은 간다고 호언장담했던 인물도 있었다. 그런 오만으로 결국 정권이 바뀌었으니, 민심은 무섭도록 옳다.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을 때는 국민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지만, 국민의 마음을 저버리면 천명은 언제든지 거두어진다. 이번 시민의 대통령 탄핵 시위는 천명이 거두어지는 과정이었다. 게다가 이번 시위는 놀랍도록 평화적이고 경쾌하게 진행되었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상’ 같은 k-팝이 흘러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예전에 화염병을 던지는 식의 비장하고 공격적인 시위 문화는 다 극복한 것만 같다. 잠시 혼란은 두 걸음을 내딛기 위한 한 걸음 후퇴일 뿐이다. 민심이 바로 천명이다. 이런 시민이 있는 한, 우리 사회는 건강하게 발전해갈 것이다.

2024-12-15

합법성과 정당성

유영희 작가 지난 화요일 밤 10시 30분, 두 눈과 귀를 의심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이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이 딥 페이크라고 의심하기도 했고, 실제로 당시 생방송을 하던 유튜버들도 믿지 못하겠다는 영상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비상계엄 선포 2시간 30분만에 국회의 해제 결의로 일단락되었고, 6시간이 지나 대통령은 공식 해제를 선언한 것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2차 비상계엄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으니 많은 국민이 불안에 떨고 있다. 그런데 계엄법 제2조 2항에 “비상계엄은 대통령이 전시ㆍ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 시 적과 교전(交戰)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攪亂)되어 행정 및 사법(司法) 기능의 수행이 현저히 곤란한 경우에 군사상 필요에 따르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선포한다.”고 되어있다. 3항에 나오는 경비계엄도 “대통령이 전시ㆍ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 시 사회질서가 교란되어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는 경우에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선포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전시 또는 전시에 준하는 극도의 교란 상태가 아니다. 국방위원회에서 국방부차관과 육군참모총장 역시, 김민석 국회의원이 현재 우리 상황이 시 또는 준전시 상황이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답변했다. 비상계엄 포고령 1호는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고 되어 있다. 이 역시 삼권 분립의 원칙에 어긋난다. 이미 대통령의 의회해산권은 헌법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런데도 비상계엄을 했다면,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 이상민 행안부장관은 ‘대통령의 계엄 선포는 고도의 통치 행위’라고 한다. 그러나 야당에서는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대통령 탄핵소추권을 발의한 상태다. 독일의 유명한 법학자 칼 슈미트는 그의 저서 ‘합법성과 정당성’에서 이 두 가지가 일치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합법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정당성이 있는 것은 아니며, 정당성은 구성원의 결단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칼 슈미트의 이런 논리가 나치에 정당성을 부여했기에 부당한 통치행위를 옹호하는 극우 논리라고 치부되기도 하지만, 그렇게만 보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칼 슈미트는 합법성을 넘어서 정당성을 획득 여부는 국민의 기본권을 얼마나 보장하느냐로 결정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합법성을 정당성으로 보는 법치주의에 한계는 많지만 합법보다 더 중요한 정당성을 주장하려면 합법에서 놓치는 기본권을 확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초법 연구자 양천수 영남대 교수에 의하면, 칼 슈미트는 정당성을 한법규범이나 단체가 정할 수 없고 도덕적 올바름이나 모든 구성원의 동의나 승인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합법성을 넘어선 정당성을 주장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조건이다. 이번 비상계엄이 모든 구성원의 동의나 승인을 담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2024-12-08

포괄적 협약과 강력한 협약을 넘어서

유영희 작가 플라스틱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걸레 대신 손쉽게 뽑아 쓰는 물휴지도 플라스틱이고,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일회용 컵과 빨대도 모두 플라스틱이다. 포장재 원료도 모두 플라스틱이다. 플라스틱은 우리 생활을 편리하게 하지만 후유증도 크게 남긴다. 플라스틱 빨대가 바다로 흘러 들어가 입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는 거북이 사진을 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1회용 플라스틱 용기만 따져봤을 때 충남대 장용철 교수팀이 그린피스와 공동연구한 결과를 보면, 2020년 1회용 플라스틱 용기 생산량은 87만 톤이었는데 이런 추세로 가면 2030년에는 647만 톤이 될 것이라고 한다. 2022년 발표한 환경부와 한국환경공단의 자료에 의하면, 2021년 한국의 플라스틱 총생산량은 대략 1천2백만 톤이다. 노현석 부산환경운동연합 활동가의 기자회견을 보니, 세계적으로 매년 4억 톤 이상의 플라스틱 제품을 생산하는데, 이중 약 9%만 재활용될 뿐이고, 1200만 톤 이상이 바다로 흘러간다고 한다. 플라스틱의 문제가 이렇게 심각하다 보니, 플라스틱 생산을 줄이자는 국제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2022년 유엔 소속 국가들이 모여 ‘국제 플라스틱 협약’을 결성했다. 작년까지 모두 4회에 걸쳐 플라스틱 생산량 줄이기 협약을 논의했고, 그 마지막 다섯 번째 회의가 11월 25일부터 12월 1일까지 부산 벡스코에서 열리고 있다. 이 회의에는 유엔 소속 170여 개국의 정부 대표단과 시민사회 단체들, 그리고 산업계가 참석하는데, 우리나라는 환경부, 외교부, 산업부, 해양수산부 등 다양한 부처에서 대표단을 구성했다. 문제는 지금까지 회의 성과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플라스틱 문제 해결을 둘러싸고는 크게 대립하는 쟁점은 플라스틱의 원료가 되는 ‘폴리머’의 생산을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플라스틱 국제 협약 우호국 연합’(HAC)에 속한 유럽과 한국은 폴리머 감축에 찬성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등 산유국이 중심인 ‘플라스틱 지속가능성을 위한 국제연합’(GCPS)은 생산규제보다는 재활용과 폐기물 관리를 주장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한국의 입장에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플라스틱 감축을 주장하는 우호국에 속하면서도 사실은 산유국의 입장과 비슷하다. 김완섭 환경부 장관은 지난달 25일 부산 벡스코에서 기자간담회를 통해 “획일적인 플라스틱 감축보다는 단계별 접근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면서 포괄적 방식으로 협의하자고 한 것이다. 그러나 환경단체는 강력한 협약을 주장한다. 플라스틱 감축을 구체적인 수치로 설정하고, 플라스틱 재사용을 체계화하며, 관련 산업 종사자와 지역사회가 피해 보지 않게 공정한 변화를 보장하라는 것이다. 플라스틱 생산을 줄이면서 관련 산업 종사자가 피해를 보지 않으려면 지혜가 필요하다. 아무래도 포괄적 협약에서 주장하듯이 단계적, 다각적 접근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강력한 협약에서 주장하듯 구체적인 단계도 수치로 설정하고 재사용도 강제해야 한다. 애매한 표현으로는 플라스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2024-12-01

기록하라, 연결될 것이다

유영희 작가 지난 9월, 올해 박경리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프랑스의 실비 제르맹은 10월 말 대산문화재단과 교보문고가 주최한 ‘세계 작가와의 대화 초청 강연’에서 ‘써라, 그래야 존재할 것이다.’라는 강렬한 말을 남겼다. 이 이야기를 지난주 목요일. 사회적 독서 컨퍼런스에서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사회적 독서 컨퍼런스는 6년째 매년 열리고 있는데, 올해 주제는 ‘돌봄과 함께 읽기’였다. 컨퍼런스에서는 읽기보다는 쓰기가 더 다루어졌지만, 읽기와 쓰기는 한 몸이니 문제는 없다. 돌봄은 평소 관심 있는 주제이기도 했고 ‘차가운 똥과 돌봄 위기’이라는 칼럼을 쓴 조기현 씨가 발표자로 나와서 더 관심 있게 보았다. 얼마 전 글쓰기 시간에 이 칼럼을 소개했는데, 정갈한 글솜씨와 시의성 있는 문제의식으로 수강생 모두 크게 감동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조기현 씨가 스무 살 때 아버지가 당뇨합병증으로 쓰러지고 나중에는 인지저하증까지 왔는데, 2인 가족이었던 터라 12년째 아버지를 돌보고 있는 청년이었다. 이날 컨퍼런스는 돌봄 관련 책을 출판하는 돌고래출판사 김희진 대표가 사회를 맡고, 김다은 예술기획자, 장하원 부산대 연구원이 같이 참여했는데, 이들 모두 이구동성으로 동의한 것은 읽기 쓰기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조기현 대표 역시 고립에서 오는 상실감을 수용하고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애도라고 정의하고 자신 역시 언어화를 통해 고통을 극복해오고 있다고 증언했다. 이날 발표에서 조기현 씨는 아버지를 전적으로 돌보면서 가장 힘든 것이 사회적 고립이었다고 한다. 그는 고립을 벗어나기 위해 글쓰기를 선택했고, 그렇게 아버지를 돌본 9년의 기록을 써서 ‘아빠의 아빠가 됐다’를 출간했다. 책을 몇 권 출간하면서 같은 처지에 있는 돌봄 청년들을 만나게 되고, 이른바 영 케어러들의 자조 모임 돌봄청년커뮤니티 ‘n인분’도 만들어 활동하면서 고립감이 해소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돌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으나 내게는 돌봄이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엄마가 파킨슨 병으로 13년간 집에서 투병하셨는데 엄마가 다른 사람의 손길은 완강히 거부하셔서 아버지가 엄마를 주로 돌보셨다. 그때 아버지가 힘들어했던 것이 육체적 고단함보다도 사회적 단절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 엄마의 부재에서 오는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 아버지도 글을 썼다. 엄마가 돌아가신 해 여름 자서전을 쓰면서 존재감도 느끼고 사회와 연결되고 있다는 느낌도 강렬하게 받았던 것 같다. 자서전을 집필하던 몇 달 동안은 아버지의 온몸에서 생기가 넘쳤다. 난치병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의 투병기를 글로 써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혈액암에 걸렸던 지인은 혈액암 투병기를 올린 많은 블로거들에게서 희망을 발견했다고 한다. 실비 제르맹은 ‘읽어라, 그러면 발견할 것이다’라고 덧붙였는데, 읽기와 쓰기는 이렇게 한 몸이 된다. 전체 가구의 30%에 육박하는 1인 가구 시대에 자기돌봄은 점점 더 중요해진다. 기록하라, 그러면 연결될 것이다. 그것은 이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말이다.

2024-11-24

에이펙과 화백회의

유영희 작가 11월 16일 대한상공회의소는 내년 ‘에이펙 시이오 서밋’(APEC CEO Summit) 회의가 한국 경주에서 열린다고 발표했다. 경주, 인천, 제주가 경합하다가 경주로 결정된 것은 4개월 전이지만 오늘 공식화된 것이다. 2005년 부산에서 열린 지 20년 만의 일이다. 경주가 에이펙 유치를 위해 노력한 지 3년만의 성과이기도 하다. 에이펙은 유럽연합(EU),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등 유럽과 북미의 지역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환태평양 연안 국가들이 만든 경제협력체인데, 1989년 호주 총리가 제안하여 1993년 11월 시애틀에서 12개국이 모여 제1차 정상회의를 개최한 이후 올해로 31회를 맞았다. 현재 참여 국가는 21개국이다. 각국의 정상이 참석하지만 참가 자격은 국가가 아니라 경제체여서 국가라는 표현도 안 쓰고 국기 게양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회의의 의장도 경제인이다. 올해 열린 페루 리마 회의 의장은 페르난도 자발라 페루 최고경영자였고, 내년에 열리는 경주 회의 의장은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이다. 경주는 이미 2022년 보문관광단지 안에 178만㎡에 달하는 지역을 국제회의 복합지구로 지정한 데 이어 올해는 보문단지 리모델링을 계획하고 있다. 1979년 개장한 대한민국 제1호 관광단지 보문관광단지는 코로나19 이후 관광객 급감한 후 시설 노후로 회복이 더뎠는데, 이번 회의를 계기로 다시 날갯짓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 회의 개최로 경북과 경주는 전국 단위로는 1조8000억 원, 경북에서는 1조4000억 원 등 많은 경제적 특수를 기대하고 있다. 손님이 가장 많이 오는 시기는 각국 정상이 개최국에 모이는 10월의 2~3일뿐이지만 각급 회의가 연초부터 1년 동안 300여 회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회의가 장기간 여러 차례 진행되는 이유는 에이펙에서는 참여국가 모두 만장일치로 합의해야 한다는 독특한 의사결정 방식 때문이다. 만장일치라는 의사결정 방식은 우리에게는 매우 친숙하다. 한국 사람이라면 신라시대 화백회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화백회의에 대한 기록은 우리에게는 없고 중국의 ‘신당서(新唐書)’‘신라전’에서나 기록을 찾아볼 수 있지만, 그 실체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화백회의의 원형은 신라시대 6부족이 박혁거세를 추대한 회의였다고 하니, 이때 만장일치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화백의 만장일치 정신이 에이펙이라는 거대 조직에서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놀랍다. 페루 회의에 참석한 최태원 회장은 내년 에이펙 주제를 “‘브릿지’, ‘비즈니스’, ‘비욘드’(b·b·b)”라고 발표했다. 기업이 정부와 연결하고 현실과 이상을 연결하면서 혁신 성장의 주체가 되어 에이펙 공동체의 더 나은 미래를 만들자는 뜻이다. 현실과 이상을 연결하기도 어렵지만,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이 공동체의 발전을 동시에 만족하는 만장일치를 이룬다는 것 역시 너무나 어려운 주제다. 혹시라도 ‘답정너’(답은 어차피 정해져 있어, 너는 대답만 하면 돼.)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3500억 원의 예산이 1년 깜짝 흑자 효과로 끝나지 않고 지속가능한 경북 발전으로 이어져서 지방 발전의 초석이 되기를 바란다.

2024-11-17

공자가 정명을 말한 뜻은

유영희 작가 우리 삶에 큰 영향을 주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고 있다. 그 여러 사건의 한 축에 있는 인물이 명태균이다. 그는 자신이 여론을 조작하여 윤석열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다든지 김건희 여사의 공천 개입을 의심할 만한 내용들을 폭로하며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그는 부부와 대화한 내용을 폭로하며 이슈몰이를 하다가 지난 8일 8시간에 검찰 조사를 받고 나왔다. 검찰에서 나오면서 그는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전제 군주 시대에는 권력이 군주에게서 나오고, 군주의 눈과 귀를 가리는 사람이 십상시였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민에게서 권력이 나온다.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는 거짓 뉴스, 허위 보도, 그리고 허위보도를 퍼나르는 패널들이 우리 사회의 십상시다. 언론은 국민에게 좋은 안경을 끼워줘야 한다. 뉴스토마토와 강혜경은 거짓의 산이다. 조사하면 그 거짓의 산은 무너질 것이다.’라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명태균이 기자들에게 한 말을 듣자니, 공자가 정명이 생각난다. ‘정명’은 ‘논어’ ‘안연’ 편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다. 공자의 제자 자로가 “만일 위나라의 왕이 선생님을 맞이하여 정치를 맡긴다면, 무엇부터 하시렵니까?”라는 물음에 공자는 바로 “반드시 먼저 이름을 실제와 맞게 하겠다.”고 하였다. 공자가 이름을 실제와 맞게 하겠다고 말한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말이 통하지 않아 백성이 어쩔 줄 모르는 상황이 오기 때문이다. “이름이 실제와 맞지 않으면 말이 통하지 않고, 말이 통하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예악이 흥하지 못하고 예악이 흥하지 못하면 형벌이 적당하지 못하고 형벌이 적당하지 못하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다.” 여기서 예악은 기본 상식이다. 말이 통하지 않아 일이 진행이 안 되면 상식이 무너지고, 형벌이 공정하게 집행되지 않게 되며, 그러면 국민은 어떤 일로 벌을 받을지 전전긍긍하여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명태균의 말대로 우리 사회 체제는 민주주의이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그래서 국민이 대통령을 뽑은 것이고, 임기 동안 국민의 권력을 대통령에게 위임한 것이다. 그러니 현실에서 권력은 대통령에게서 나온다. 위임한 권력이 제기능을 못할 때 비판하는 것은 주권을 가진 국민의 권리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이름에 걸맞는 실제이다. 명태균은 언론을 십상시라고 하지만, 언론과 국민의 관계가 권력자와 권력자 측근의 관계라고 할 수 있는지도 매우 의문이다. 십상시는 중국 후한 말 제12대 황제 영제 때 황제 가까이에서 국정을 농락한 10여 명의 환관들을 말한다. 영제는 십상시의 대장인 장양을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여서, 그들은 황제의 후광을 업고 많은 땅을 차지하였으며 그들의 부모형제까지 권력이 대단했다. 이들은 주로 벼슬을 팔고 사는 매관매직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뉴스토마토의 영향력은 십상시가 누렸던 권세와는 전혀 다르다. 이름을 실제에 맞게 붙이는 것은 언어를 소통하게 하는 힘이니, 민주주의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2024-11-10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기보다는

유영희 작가 10월 7일 시작한 국정 감사가 11월 1일 끝났다. 정기국회의 꽃이라 불리는 국정 감사는 보통 9월부터 12월 사이에 열리는 정기국회 중간에 이루어진다. 국회의 17개 상임위원회는 해당 담당 기관의 예산이나 정책 등을 감시하고 평가한 후 시정 조치를 요구한다. 국정 감사는 1948년에 시작되었는데 유신독재가 시작된 1972년에 중단되었다가 1987년 9차 개헌 후 다시 시작되어 오늘에 이른다. 입법기관인 국회가 행정기관을 점검하는 일은 민주주의 실현에 꼭 필요한 일이다. 감사 대상이 되는 사건을 선택하는 것 못지않게 선택한 사건을 어떻게 감사할 것인가 하는 방법의 문제도 중요하다. 감사를 잘하기 위해서는 질문을 잘해야 한다. 주관적인 견해를 묻는 것처럼 질문하거나 열린 질문 방식은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하기 어렵다. 정동영 의원이 조혜진 KBS노조수석본부장을 증인으로 불러서 폐지된 여러 프로그램을 거론하며 ‘KBS의 제작 자율성 파괴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라고 질문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아쉬움이 있다. 하나는 KBS 제작 자율성이 파괴되고 있다고 자기가 미리 결론을 냈다는 점이다. 박민 사장이 제작 자율성이 파괴되지 않았다고 답변해버리면 더 이상 사실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박민 사장은 자율성 침해 아니라고 답했다. ‘어떻게 보십니까?’라고 질문하면 답변도 주관적인 견해처럼 보일 수 있다. 실제로 박민 사장이 프로그램 폐지를 지시한 적이 없다고 답변하자 조혜진 피디는 지시하지 않았어도 책임은 있다고 답한다. 이러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 대신 구체적으로 하나를 선택하여 질문하는 것이 좋다. 시청자가 가장 좋아한 프로그램으로 꼽혔던 ‘더 라이브’가 폐지된 이유를 단계적으로 질문하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박민 사장은 정동영 의원이 거론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에 대해 자기가 답변하기 좋은 것만 골라서 답하고 더 라이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최민희 과방위 위원장은 시작부터 단답형으로 하겠다고 선언하고 ‘그런 사실이 있습니까?’, ‘왜 안 했습니까?’라는 단답을 유도하는 질문만으로 증인의 위증 사실을 밝혔다. 류희림 방통위 위원장이 구글 부사장 마컴 에릭슨을 만나 유튜브의 불법 유해 콘텐츠를 신속하게 삭제하고 차단하겠다는 협조를 약속받았다고 발표했다가 MBC에서 그런 사실 없다고 보도한 것에 대해 최민희 위원장은 그 보도가 거짓이라면 ‘항의를 했느냐?’, ‘왜 한 번만 했느냐?’를 묻고 담당자가 답변을 못하자 그 이유를 증명하는 증거를 보여주는 식이다. 그 증거란, 마컴 에릭슨이 그런 확약을 한 적이 없다고 보내온 메일이다. 이렇게 하면 방송을 보는 국민은 방통위의 위증도 알게 되고 확약 자체도 거짓이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국정 감사 영상 몇 개만 봐도 거짓말하는 증인이 너무 많았다. 이런 위증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미리 결론을 내고 질문하기보다는 팩트 체크로 국민의 눈앞에 진실을 보여주어야 한다. 좋은 질문으로 국정 감사가 제 기능을 해주기 바란다.

2024-11-03

과거를 잊은 자는 악을 저지른다

유영희 작가 지난 일주일 간 뉴스를 장식한 굵직굵직한 사건 중에 내가 꼽은 가장 큰 사건은 한기호 국회의원과 신원식 안보실장의 문자 대화다. 지난 24일 한기호 국민의힘 의원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파병된 북한군을 공격해 피해를 발생시켜서 대북 심리전에 활용하자고 신원식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에게 문자를 보냈고, 신원식 실장은 긴급대책회의를 했다며 이에 응수하는 내용이다. 국가정보원이 이미 지난 18일 북한군이 러시아에 현재까지 약 3000명 파병됐고 오는 12월까지 1만여 명 파병할 것이라고 밝혔고 22일에는 대통령실은 북한과 러시아의 군사협력 진전 상황에 따라 우크라이나에 ‘공격용 무기’를 지원하는 것도 고려 중이라고 발표했으니 이들 대화는 단순한 사적 대화로 치부될 수 없다. 거기에 26일 뉴스에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5일에 ‘러시아와 북한은 무언가를 결정해야 할 때가 오면 결정할 것’이라고 발표하고 이것은 러시아도 유사시 한반도에 파병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을 남한과 북한의 대치 상황으로 유도하는 정치인들의 머리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는지 들여다보고 싶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는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벨라루스 작가다. 우크라이나 태생으로 43년간 구 소련인으로 살면서 전쟁의 고통을 잘 아는 작가이기도 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와 한강 작가의 공통점은 여성 작가라는 점과 전쟁과 폭력의 참상을 강렬한 언어로 표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알렉시에비치는 넌픽션 다큐멘터리를 소설처럼 써서 ‘목소리 소설’이라는 장르를 만들었다. 그는 전쟁에 참전했던 여자들,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어린이들 같은 약자의 목소리를 인터뷰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소련 여성 200명을 인터뷰한 기록이고, ‘마지막 목격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현재 벨라루스 지역에 살던 0∼14세 어린이들 101명의 전쟁 목격담이다. 벨라루스는 1941∼1945년 사이 인구의 4분의 1이 죽을 정도로 전쟁의 피해가 극심했던 곳이다.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어린이의 눈이라면,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 나오는 꼬마 죠슈아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목격자들’에는 죠슈아만큼, 아니 죠슈아보다 더 무기력했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어있다. 인터뷰는 40여 년이 지나 그 아이들이 42∼58세일 때 한 것이라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것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독일군이 엄마 얼굴에 총을 쏜 순간, 독일군이 주민을 생매장하면서 울음소리도 내지 말라고 윽박지르던 모습,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고아들이 죽을 때까지 피를 뽑던 장면을 목격한 아이들의 기억은 생생하다. 북한이 보내는 소음을 견디지 못한 강화도민이 국감장에 와서 무릎 꿇고 울부짖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난다. 북한이 러시아에 파병한다고 우리도 우크라이나에 군인을 보내 북한군을 무찌르자는 발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마지막 목격자들’ 옮긴이의 말처럼, 과거를 잊은 자는 악을 저지른다.

2024-10-27

저작권료는 저작자의 목숨줄

유영희 작가 강의에 사용할 작품을 찾기 위해 여러 책을 찾아본다. 그중에는 중고등학교 교과서도 있다. 학창 시절에 배운 작품도 다시 발견하고, 새로운 작품도 많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교과서나 참고서에서 만나면 오직 시험공부의 대상이라는 생각에 감흥을 느끼지 못하지만, 나이 들어 다시 보면 새롭게 다가온다. 성인을 위한 글쓰기 강의에서 교과서 작품을 인용하는 이유다. 중고생 참고도서도 본다. 그런데 몇 년 전 청소년 참고서에 실린 글의 저자 P 씨를 만난 적이 있다. 반가운 마음에 아는 체를 하니 그는 자기 작품이 사용된 줄 전혀 몰랐다며 깜짝 놀란다. 그 참고서를 낸 출판사는 내로라하는 국어교육계 교사들이 편집진으로 참여하는 곳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느냐며 함께 통탄하고 안타까워했다. P 씨가 그 출판사에 저작권료 요청을 하지 않겠다고 바로 마음을 정리하는 것을 보면서 미리 알려만 줬으면 저작권료를 안 받는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갑자기 이 기억이 소환된 것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작품이 교과서에 11곳 사용되었음에도 저작권료를 한 푼도 못 받았다는 기사가 대서특필되었기 때문이다. 비단 한강뿐 아니라 다른 작가들도 저작권료를 지급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특이한 저작권료 지급 방식 때문이다. 저작권법 제25조 1, 2에 따르면, 공개된 저작물은 초중고등학교를 위한 교과용 도서에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출판사는 저작권료를 작가에게 직접 지불하지 않고 저작권법 제25조 6에 따라 한국문학예술저작권협회(문저협)에 지급하면 문저협에서 작가에게 지급한다. 왜 이런 방식을 채택했는지 궁금해서 한국문학예술저작권협회를 검색해보니, 저작자 권리보호 및 저작물의 공정한 이용을 도모하는 문화체육관광부 소관 사단법인으로서 2000년에 설립되어 문학예술 저작물의 저작(재산)권리를 신탁받아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초등학교 교과서는 국정 한 가지이지만, 중고등학교 교과서는 검정, 인정으로 구분되어 발행하고 고등학교 교과서만 해도 11종이나 된다. 이렇게 많은 교과서에서 자기 작품이 교과서에 실렸을 것을 생각하고 조사할 작가는 없을 것이다. 작가들은 자기 작품이 교과서에 실렸는지 모르고 있으니, 알아서 청구하기도 어렵다. 그런데도 문저협이 작가에게 적극적으로 통보하지 않으니, 저작자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문저협이 저작권료를 중간에서 착복하는 모양새가 된 셈이다. 이번에 한강의 작품에 저작권료가 문제되자 문저협은 “한강 작가의 연락처를 몰라서 저작권료를 지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급하지 않은 저작권료가 104억 원이나 된다니, 지급받지 못한 작가가 한두 명이 아니다. 문저협은 저작자의 생계와 직결되는 저작권료를 제대로 지급하기 위한 방안을 내놓는 것이 더 책임 있는 태도이다. 작품을 사용하는 출판사가 작가에게 미리 알려주는 것을 의무화하는 방법도 있겠고, 문저협이 저작자 명단을 확보하는 방법도 있겠다. 저작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우리 문화 발전에도 꼭 필요한 일이다.

2024-10-20

쓰기의 기술, 삶의 기술

유영희 작가 시를 전공한 선생님에게서 글쓰기를 배운 지 한 달이 되어간다. 시 쓰기를 배우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시를 많이 접하게 되는데, 그동안 몰랐던 시적 표현의 압축미와 비유에 새 세상이 열리는 것 같다. 아무래도 철학이 전공이다 보니, 논리를 강조하는 글을 써왔고 글쓰기 강의에서도 주로 대상에 대한 객관적 관찰과 묘사로 정확한 의미 전달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시적 표현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를 들면, “엄마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머리에 수건을 쓰고 세탁대에서 빨래를 했다. 허리에 앞치마를 두르고 오랫동안 손을 물에 담가 비누 거품을 많이 낸 다음 옷의 물기를 짜 줄에 널었다. 그러고는 집게로 고정했다. 무슨 옷이나 그렇게 차례대로 빨았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파울랴베르 박사댁의 빨래를 맡아 했던 것이다.” 같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글쓰기를 강조했다. 반면, “글이 어려운 만큼 글을 사랑하게 된다. 춤이 힘든 만큼 춤을 사랑하게 된다. 피아노가 두려운 만큼 피아노를 사랑하게 된다. 나는 피아노를 사랑하기 때문에 피아노가 두려운 것이다.”와 같은 글을 모범으로 삼기는 어려웠다. 이렇게 감성을 표현하는 글쓰기를 부정적으로 본 이유는 이런 방식이 개인을 닫힌 존재로 남게 하고 의사소통에도 방해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어교육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이 의사소통을 위한 글쓰기와 표현주의적 글쓰기를 두고 논란이 있다. 그러나 시적인 표현의 글쓰기가 의사소통에 효과적인 경우도 많다. 이수명 시인이 쓴 산문집 머리에 이런 말이 있다. “글이 움직이다가 형체를 이루거나 시처럼 이미지가 형성되려고 하면, 돌아나와 느슨한 호흡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지나면서 이 글쓰기가 좀 다른 느낌을 주었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맞는데, 몇 마디의 언어, 몇 줄의 글에 내가, 하루가 의탁한다는 것이다.” 이런 글을 보면, 작가와 깊게 맞닿는 느낌이 든다. 지난 10일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국의 작가 한강이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한국을 흔들었다. 스웨덴 한림원은 한강을 “시적이고 실험적인 스타일로 현대 산문의 혁신가가 되었다”고 평했다. 그러자 바로 한강 작품에 실린 시적 표현들이 기사로 올라왔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소년이 온다’)나 “길었던 하루가 끝나면 침묵할 시간이 필요하다. 난롯불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듯, 침묵의 미미한 온기를 향해 굳은 손을 뻗어 펼칠 시간이.”(‘흰’) 같은 문장이 보인다. 이런 표현은 곱씹어야 하기 때문에 읽기가 불편하고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시간은 걸리지만, 이런 글은 삶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더 감동적으로 전달해준다. 이런 시적 표현은 평소 작가의 깊은 문제의식과 절실함에서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거친 말, 거친 글은 물론이고, 평평하고 밋밋한 글쓰기도 결국은 삶에 대한 얄팍한 태도에서 나온다. 그런 글쓰기로는 깊은 소통을 할 수 없다. 쓰기와 살기는 하나다.

2024-10-13

해임할 결심 후

유영희 작가 이번 가을에는 뜻깊은 강의를 하고 있다. 사서삼경 중 가장 처음 공부하는 경서인 ‘대학’을 원문으로 읽는 수업인데, 20대부터 60대가 함께하고 있다. 한문 고전을 처음 접하는 수강생도 있고, 격몽요결을 읽고 온 수강생도 있지만, 문장 하나하나 뜯어보고 곱씹으며 의미를 발견하는 중이다. ‘대학’은 ‘예기’라는 중국 고대 문헌에 들어있는 짧은 정치 에세이이다. ‘예기’에는 ‘대학’과 ‘중용’을 포함하여 모두 49편의 글이 들어 있는데, 저자를 확실히 아는 작품은 별로 없다. 공자 제자인 증자가 ‘대학’을 썼다는 전통적인 주장도 확실한 근거가 없어서 지금은 작자 미상의 상태나 다름없다. 그러나 작자와 저술 연대가 불확실하다고 해도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잃은 것은 아니다. 여전히 깊은 생각거리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대학’의 저자는 ‘시경’이나 ‘서경’ 등 고대 문헌의 구절을 인용하고 나서 부연 설명하는 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 예를 들어, 시경에 나오는 “아아, 돌아가신 왕을 잊을 수 없도다.”라는 구절을 인용하고는 왜 사람들이 돌아가신 왕을 잊지 못하는지 이유를 설명하는 식이다. 여기서 ‘돌아가신 왕’은 주나라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문왕과 실제로 상나라를 정벌하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이다. 군자(통치 계층에 있는 사람들)는 돌아가신 왕이 등용한 사람이 모두 현명하고, 가족과도 화목했기 때문에 돌아가신 왕을 잊지 못하고, 소인(자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들)은 돌아가신 왕의 복지 정책과 경제 정책이 좋아서 돌아가신 왕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역사를 보면, 군자와 소인이 문왕과 무왕을 잊지 못하는 최종 이유는 상나라 주왕의 폭정에서 백성을 구했기 때문이다. 주왕의 이름은 제신인데, 폭군으로 악명이 높아 죽은 다음에 주(도리를 잃고 선을 해치는 사람)라는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주왕의 폭정이라면, 간신만 옆에 두고 예쁜 여자 달기에 빠져 정치를 소홀히 했다거나, 주지육림을 즐겼다는 주왕 개인의 도덕적 타락이 주왕에 대한 전통적 평가였지만, 그보다는 상나라의 무리한 영토 확장 정책에 주변 제후들이 반기를 들었다는 견해도 많다. 개인의 도덕적 타락이든 상나라의 무리한 정책이든 무왕에게는 상나라 정벌의 좋은 명분이 되었고, 후대에 훌륭한 왕으로 칭송받은 것이다. 한편, 아무리 주왕이 타락했다고 해도 무왕의 상나라 정벌은 당시에도 백이숙제에게 비판받았고, 후대에도 두고두고 무왕의 정복 전쟁이 최선이었느냐는 논란이 이어졌는데, 이런 질문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3년 전 60평생 처음 장만한 낡디낡은 작은 집 한 채로 주택조합에 가입했는데, 최근 조합 운영에 명백한 문제를 발견했다. 그동안 여러 일이 있었던 터라 이번에는 해임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가 보류하고 다른 방법을 찾는 중이다. 누구를 응징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내가 평생 살 수 있는 집을 잘 짓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탄핵 정국으로 우리나라 정치가 요동치고 있다. 여야 정치인 모두 국민을 위한 최선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기 바란다.

2024-10-06

정치인의 토론에서 무엇을 배울까

유영희 작가 지난 24일 1069회차 ‘100분 토론’ 주제는 “‘영부인 리스크’… 그 끝은?”이었다. 이번 방송에는 강승규, 홍석준 국민의힘 의원 두 명과 박균택 더불어민주당 의원, 신장식 조국혁신당 의원이 패널로 나왔다. 토론은 김건희 여사의 공천 개입의 진실, 명태균 수사 필요성, 김건희 여사 주가 조작 기소, 특검법 통과, 마지막이 영부인 리스크 대처 방안이다. 사실 토론 방송을 보려면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패널들의 비신사적인 토론 태도를 보면 분노 게이지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번 토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각자의 입장을 밝히는 시간이라 그런지 차분하게 발언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난투 상황이 벌어졌다. 김건희 여사와 명태균 씨의 텔레그램 소통이 공천 개입의 증거냐 아니냐 하는 대목에서 갑론을박이라고 할 수 없는 어지러운 입씨름이 벌어진 것이다. 김건희 여사의 주가 조작 기소 문제에서는 토론의 질이 더욱 떨어졌다. 특히 강승규 의원은 사실관계 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은 발언은 물론, 상식에 맞지 않는 논리도 폈다. 예를 들면, 김건희 여사의 주가 조작 사건 관련은 결혼 전이었다고 한다든지, 주가 조작 사건에서 이익을 보았다고 해서 주가 조작을 직접 했다는 증거는 안 된다고 하는 식이다. 게다가 지난 추석에 직무 관련이 없으면 김건희 여사에게 300만 원까지 선물해도 된다고 국민권익위원회가 답변한 것을 두고 신장식 의원이 비판할 때 강승규 의원이 갑자기 중간에 끼어들어 엉뚱하게 공작이라고 소리 지르며 흐름을 깬 것은 정말 큰 실수였다. 결국 사회자한테 발언권을 박탈하겠다는 경고를 받고서야 말을 줄였다. 이제 토론 막바지에 이르러 ‘영부인 리스크, 어떻게 대처할까?’에서 강승규, 홍석준 두 의원은 영부인 리스크 자체가 없다만 반복하고, 박태균 의원은 사죄하고 민생에 집중하라, 신장식 의원은 사람 가려서 등용하라고 한다. 국민의힘 두 의원의 불통도 답답하지만, 두 야당 의원은 왜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대안을 제시하는지 당황스러웠다. 대학생 토론을 지도하기도 했고, 청소년부터 대학생까지 토론대회 심사도 여러 번 했기 때문에 토론의 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아는 편이다. 그런 경력이 없더라도 토론할 때는 상대방의 말을 잘 경청해야 하고, 중간에 말을 끊거나 개입하면 안 된다는 것은 보통의 상식을 가진 시민이라면 누구라도 아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토론 주제가 잘못 정해졌기 때문이다. 토론은 본래 찬반으로 나눠질 수 있는 형식으로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그 끝은?’이라는 말은 의미도 분명하지 않고 부정적 뉘앙스를 풍긴다. 무엇보다 찬반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처음부터 ‘영부인 리스크, 어떻게 대처할까?’로 했다면, 국민의힘 두 의원이 끝까지 리스크는 없다를 외치지 못했을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 ‘영부인의 행보는 리스크인가’로 하는 것도 좋다. 이렇게 해도 충분히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성숙한 정치 토론을 보고 싶다.

2024-09-29

나 혼자 살 수도

유영희 작가 한민족의 대명절 추석이 지났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확실히 명절 풍속이 달라졌다는 것을 체감한다. 이제 민족 대이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명절이라고 해서 며느리가 꼭 시댁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늘고 있다. 각자의 삶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진 것이다. 며칠 전, ‘가족×멜로’라는 특이한 제목의 드라마가 종영했다. 여기서 가족은 아빠 변무진, 엄마 금애연, 딸 미래, 아들 현재, 이렇게 네 명인데, 변무진이 잦은 사업 실패로 아내와 이혼한 후 죽은 줄 알았다가 엄청난 부자가 되어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마침 종영한 날이 추석 연휴가 시작되던 일요일이라 가족의 의미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금애연은 11년만에 나타난 변무진을 생각보다 빨리 수용하지만, 딸 미래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세발자전거를 탈 무렵 아버지의 대화를 우연히 듣고 자기 때문에 아빠가 야구 선수를 포기했다고 오해한 상처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와 딸이 우여곡절 끝에 변무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도 흥미 있었지만, 변무진과 금애연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재결합하지 않는 결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마트 시식 코너에서 일하던 엄마 금애연은 홈쇼핑 모델이 되어 수입이 늘자 가족에게 상의하지 않고 자동차를 장만한다. 50 넘은 여자가 누구의 도움 없이 자동차를 산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인 설정이다. 보통 자동차는 남성성을 의미하는데, 금애연처럼 소극적으로 살던 여자가 자동차를 자신의 힘으로 장만했다는 것은 그만큼 남성 같은 힘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앤소니 브라운의 그림책 ‘돼지책’에도 남편과 두 아들 뒷바라지하다 지친 엄마가 가출했다 돌아와서 한 일이 자동차를 손보는 것이었다. 딸 미래는 자신이 가정 경제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에서 자유로워지면서 독립 가구가 된다. 비혼주의를 고수하지만 오래도록 연애하기로 한 남자친구는 있다. 네 명의 가족 아닌 가족은 따로 또 같이 살아가면서 한 달에 한 번 식사하는 것으로 가족의 멜로를 완성한다. 두 주인공이 다시 결혼으로 묶이지 않는 것은 각자 경제력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금애연은 그동안 자신의 삶이 너무 의존적이었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혼자 사는 삶을 선택했고, 변무진은 그런 금애연의 선택을 충분히 존중했기 때문이다. ‘가족×멜로’ 드라마의 변무진과 금애연의 선택은 새로운 가족 형태를 예고한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 마주 앉아 밥 먹는 부부 이상으로 사랑하고 신뢰도 회복했으니 재결합하는 것이 당연해 보이는데 부부가 되지 않고 따로 사니 말이다. 앞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상황과 성격, 지향에 따라 어떤 가족 형태를 선택할 것이고, 그래서 가족의 형태는 지금보다 훨씬 더 다양해질 것이다. 영화감독 팀 버튼도 배우 헬레나 본햄 카터와 결혼 당시 가까운 거리에서 따로 살았고, 배우 오나라도 한 사람과 24년째 연애 중이라고 한다. 사회 제도에 구속되지 않고 자기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세상이 오고 있다. 드라마를 통해 사회 변화를 체감한다.

2024-09-22

일제강점기 국적 논란을 끝내는 법

유영희 작가 내 책상 한쪽에는 ‘손바닥 헌법책’이 놓여있다. 딱 손바닥 크기인데, 손바닥보다는 얇다. 몇 년 전, 20권을 사서 주변 지인들에게 나눠주었던 책이다. 너무 작아 책꽂이에 꽂으면 파묻혀서 책상 위에 놓아두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자주 들춰본 것은 아니다. 그러다가 최근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국적 논란을 보면서 다시 펼치게 되었다. 맨 앞에는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나오고, 뒤를 이어 1948년에 공포한 대한민국 제헌 헌법 전문과 1987년 개정한 대한민국 헌법이 차례로 나온다. 모두 대한민국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말로 시작한다. 한 달이 넘게 뉴스를 달구고 있는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국적 논란은 지난 8월 6일 새로 임명된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독립기념관장 면접에서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국적은 일본이라고 답했는데, 10명의 후보자 가운데 최고점을 받았다. 그 때문에 각계 각층에서 김형석의 사퇴를 요구하면서 당시 면접관도 비판하는 상태이다. 김형석의 뒤를 이어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도 지난 4일 KBS 라디오 ‘전격 시사’에 출연하여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국적은 일본이라는 평소 입장을 고수하는 발언을 하면서 지금은 건국절 논쟁으로까지 치닫는 상황이다. 건국절은 나라를 세운 날이라는 의미인데, 이때 나라는 1948년 대한민국정부수립을 의미한다. 이런 논란을 끝내기 위해서는 국적의 의미를 합의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국적이란 개인이 국가와 맺는 법적인 관계를 말한다. 개인이 특정 국가의 국적을 갖게 되면 그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권리를 보장받고 의무를 지게 된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일본 국적법을 조선에 적용하지 않았다. 만약 일본 헌법을 조선에도 적용하게 되면, 조선인에게 투표권도 주어야 하고 일본 국민으로서 보호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에게 주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일본 헌법을 적용받아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 국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일본제국에 의해 강제로 주권을 침탈된 상태를 일본 국적이라고 할 수 없다.‘21세기 정치학대사전’에 의하면, 1871년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프랑크푸르트 조약에서부터 국적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국적자유의 원칙’이라고 한다. 이에 의하면, 국적은 강제로 부여할 수 없다. 주권이 없다는 것과 일본 국적이라는 말은 동의어가 아니다. 일본은 일본 국적법이 아니라 조선 총독부가 만든 제령으로 조선을 지배했다. ‘제령’은 일본 천황의 재가를 받는 명령이기는 하지만, 헌법은 아니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에 의하면, 제령 중 대표적인 것은 1912년에 제정한 ‘조선민사령’과 ‘조선형사령’이다. 일상에서 한민족을 지배하기 위한 법령들이다.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용어를 분명하게 쓰는 것이다. 지도층일수록 사회적으로 합의된 언어를 써야 한다. 그것은 건국절도 예외가 아니다. 1948년 이전에도 우리에게는 나라가 있었다.

2024-09-08

미래세대 환경권을 위한 첫걸음

유영희 작가 22년 쓴 작은 에어컨이 올해 이상이 왔다. 작년까지는 한여름 며칠 잠깐씩 틀었지만, 올여름은 너무 덥고 습해서 2주 이상 매일 켰더니 과부하가 왔나 보다. 에어컨 실외기 열기가 기온을 더 올릴 것이라는 걱정도 지구 역사상 최고라는 올해 무더위에는 너무도 무기력했다. 기후변화 앞에서 개인의 힘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고 자책하던 중 한 신문 기사를 읽고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지난 8월 29일 헌법재판소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 제8조 제1항이 ‘미래에 과중한 부담을 이전’하여 ‘청구인들의 환경권을 침해한다’고 판결했는데, 그런 판결을 이끄는데 청소년과 어린이들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탄소중립이란 2050년까지 온실가스 순 배출량을 0으로 만들자는 국제 선언으로 탄소제로라고도 한다. 우리나라도 탄소중립을 실천하기 위한 법을 제정했으나, 우리의 탄소중립기본법 제8조 제1항에는 2030년까지 정부는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배출량 대비 35% 이상의 범위에서 감축해야 한다고만 되어 있고, 2031년부터 2049년까지의 감축목표에 관해서는 제시하지 않았다. 이에 청소년 19명이 이 조항에 대해 2020년에 헌법소원을 냈고, 2021년에는 시민기후소송, 2022년에는 ‘아기기후소송’, 그리고 2023년 ‘탄소중립기본계획 헌법소원’ 등 4년에 걸쳐 다양한 연령의 시민과 어린이가 헌법소원을 냈는데 이것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 판결 기사에 처음 눈길이 간 것은 ‘동생 사진 손에 쥐고 눈물 쏟은 초등생’이라는 제목 때문이었다. 읽어 보니, 2년 전 아기기후소송을 냈던 서울 흑석초 6학년 한제아 어린이를 인터뷰한 내용이다. 기자가 한제아 어린이에게 2년 전과 지금 무엇이 달라졌느냐고 질문하자, 어릴 때는 키가 작아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 때문에 더 더웠는데, 그때보다 키가 많이 큰 지금도 여전히 덥다고 대답한다. 두 살짜리 사촌 동생은 키가 엄청 작아서 자기보다 더 더울 것이라며 마음 아팠다는 대답도 있다. 이날의 판결에 정말 적절한 대답이었다. 이 대답은 어린이다운 감수성을 보여주어서 인상 깊기도 했는데, 실제로 8월 14일 한 일간 신문에 실린 서울 보라매공원 특별 관측 결과를 보면, 아이 발밑은 ‘성인 키’ 기온보다 덥다고 한다. 특히 햇볕에 노출된 아스팔트 도로의 지면 온도는 지상 1.5m보다 11.2도나 높다니, 키가 작으면 확실히 더위를 더 느낄 것이다. 게다가 지면 가까이에 설치된 에어컨 실외기도 많으니, 도시에 사는 어린이의 고통은 더 심할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에도 물어보니, 몸이 작으면 체적에 비해 체표면적이 더 크고 근육도 적어서 기온에 민감하다고 한다. 미래세대에 이런 걱정을 끼치니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어린이의 야무진 활동에 안심이 되기도 한다. 다만, 어른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환경 운동이고, 그레타 툰베리가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알게 되면서 우울증에 걸렸었다니, 한제아 어린이에게 밝고 즐겁게 활동하기를 바란다는 당부를 전하고 싶다.

2024-09-01

선물이란 무엇인가

유영희 작가 몇 년 전 오래 알고 지낸 동료와 선물 문제로 멀어졌다. 동년배 세 여자가 가끔 만났는데, 나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그 일을 핑계로 밥을 여러 번 샀다. 그렇게 내가 밥을 산 날이면 디저트는 그 둘이 샀다. 그런데 내가 책을 출간했을 때 A가 책을 선물로 달라고 한다. 밥을 사면서 등가교환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나는 서운한 마음에 끝내 책을 주지 않았다.그렇게 그 일은 넘어갔지만 얼마 안 있어 A가 취직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연락하니 A는 취직 사실을 감추었다. 지나치게 주고받기를 의식하는 사람도 부담스럽지만, 그가 나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자 그 이후 연락하지 않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둘이 사는 줄 알았던 내 몫의 디저트는 언제나 B가 냈다고 한다.이 일을 겪으면서 아무리 자발적으로 준 것이라 해도 결국 모든 선물은 기브앤테이크를 전제로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친구 간에 대가 없는 선물이라도 그 안에는 돈독한 사회관계 형성이라는 기대가 들어 있고, 등가는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주고받기가 이루어지리는 기대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심지어 부모자식 사이에도 그렇다. 유산을 줄 때는 암묵적인 봉양의 의무가 전제되어 있고, 대놓고 요구하기도 한다. 봉양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회수하기도 한다.마르셀 모스는 ‘증여론’에서 고대 사회의 선물에는 세 가지 의무가 있다고 한다. ‘주는 의무’, ‘받는 의무’, ‘갚는 의무’가 그것인데, 이렇게 선물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부의 재분배도 일어난다고 한다. 현대 사회의 선물이나 증여는, 고대 사회처럼 강한 의무가 동반되지는 않지만,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선물을 주기만 하는 관계는 없다. 누구라도 어떤 선물을 받으면 경조사 부조금처럼 어떤 형태로든 갚아야 할 빚으로 느낀다.그런데 최근 국민권익위원회에서 ‘추석 명절 청탁금지법 바로 알기’ 캠페인을 하고 있는데, 내용이 이상하다. 누구든지 친구, 친지 등 공직자가 아닌 사람에게 주는 명절 선물은 금액 제한 없이 얼마든지 줄 수 있고, 직무와 관련 없는 공직자에게는 100만 원까지 선물해도 된다는 말이 처음에 나온다. 홍보물 순서를 보면 마치 선물을 장려하는 캠페인처럼 보인다. 뒤를 이어 직무와 관련된 사람에게는 5만 원까지, 농수산물이라면 15만 원까지 허용되는데, 명절 전후 30일 동안은 30만 원까지 허용한다는 내용이 나온다.아무래도 공직자가 하는 선물은 아니고, 민간인이 공직자에게 선물하는 경우에 해당할 텐데, 왜 친구나 친지에게 주는 선물 이야기를 맨 처음에 하는지 의아하다. 직무 관련 여부를 세 가지로 나누었는데, 그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직무 관련 없는 공직자에게 주는 100만 원어치 선물에는 대가성이 없다는 장담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서민은 커피 한 잔, 국밥 한 그릇을 얻어먹어도 갚을 궁리를 하는데, 공직자들은 그런 선물을 받고 정말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을까? 그들이 사는 세상이 궁금해진다.

2024-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