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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생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

등록일 2025-01-06 19:20 게재일 2025-01-07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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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생(南先生)과 하루오가 함께 거닐었던 우에노 공원의 시노바즈 연못.

2024년 12월 18일에는 도쿄대 18호관에서 2시간에 걸쳐 저의 조촐한 강연이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학교 측으로부터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요. 그래서 제가 생각한 주제가 ‘21세기 한국의 다문화 소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도쿄에 오기 전에, 21세기에 발표된 한국 다문화 소설과 관련하여, ‘다문화시대의 한국소설 읽기’(2015), ‘이질적인 선율들이 넘치는 세계’(2021)라는 두 권의 졸저를 출판한 바 있습니다. 제가 강연주제로 ‘한국의 다문화 소설’을 정한 이유는, 21세기에 들어와 한국 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결혼이주여성이나 이주노동자들을 형상화한 소설들을 통해, 우회적으로 일본 사회 내 재일한인문제나 과거사 등에 대한 인식을 환기시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강연은 크게 ‘다문화 소설을 연구하게 된 계기’와 ‘21세기 다문화소설의 실상’이라는 두 부분으로 준비했는데요. 오늘 이 지면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문화 소설을 연구하게 된 계기’와 관련된 것입니다. 본래 저의 전공은 식민지 시대(1910-1945) 한국문학으로서, 특히 저는 식민지 시대 한반도의 핵심적인 시대적 과제에 충실했던 작가들에게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랬던 제가 한국의 다문화 소설을 연구하게 된 계기는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는, 우연한 발견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당시 베스트셀러로 큰 인기를 끌고 있던 김려령의 ‘완득이’(창비, 2008)를 읽게 되었는데요. 이 작품은 장애인 아버지와 베트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반항아 도완득이 질풍노도의 고교 시절을 보내며 겪는 이야기를 그려낸 성장소설입니다. 그런데 ‘완득이’라는 작품은 식민지 시기 일본에서 활동했던 김사량의 ‘빛 속으로’(문예수도, 1939.10)와 너무나 비슷했던 것입니다. 일본의 최고문학상인 아쿠다가와상 최종심에까지 오른 ‘빛 속으로’는 일제 말기 도쿄를 배경으로 하여, 일본 출신의 아버지와 조선 출신의 어머니를 둔 국제아 야마다 하루오가 자신 안에 있던 ‘조선적인 것’을 부정하다, 南先生(남선생, 미나미 센세)을 만나 자신의 ‘조선적인 것’을 인정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동경제대 세틀먼트를 기념하는 표지판.
동경제대 세틀먼트를 기념하는 표지판.

‘완득이’에서 베트남 출신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도완득은 ‘빛 속으로’의 국제아인 야마다 하루오에 대응되며, 어둠 속에 방치된 완득이를 사회로 이끌어주는 동주 선생은 南先生에 대응됩니다. 두 소설의 어머니들은 모두 인종적·계급적·젠더적 모순이 중첩되어 고통 받는 서발턴(하위주체, subaltern)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이러한 유사성은 1939년과 2008년의 시간적 거리와 도쿄와 서울이라는 공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른 민족이나 인종이 어울려 살아가면서 벌어지는 갈등과 고통이 현재진행형이기에 발생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빛 속으로’는 일제 말기에 쓰여진 ‘완득이’이며, ‘완득이’는 21세기에 쓰여진 ‘빛 속으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사량(1914-1950)은 평양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동경제대에서 수학했는데요. ‘빛 속으로’의 南先生(남선생, 미나미센세)도 제국대학 학생으로 세틀먼트(settlement)에서 빈민가의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야마다 하루오를 만나게 됩니다. “원래 S협회는 제대帝大 학생 중심의 인보사업(隣保事業) 단체로 탁아부나 아동부를 시작으로 시민교육부, 구매조합, 무료의료부 등도 있어서, 이 빈민지대에서는 친밀도가 높았다.”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동경제대 학생들이 중심이 된 사회봉사단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2017년에 몇 명의 한일 연구자들과 동경제대 세틀먼트(정식명칭은 동경제대 야나기시마 세틀먼트)가 있던 곳을 찾아간 적이 었었는데요. 그 터에는 다른 민가가 자리 잡고 대신 한 블록 떨어진 야나기시마 놀이터에 세틀먼트를 기념하는 표지판만이 남아서 그때의 일을 증언해 주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강연을 준비하며 다시 야나기시마 놀이터를 찾으니, 2024년 2월에 새로 만들어져 사진 등이 보강된 표지판이 맞아 주었습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이경재 숭실대 교수

‘빛 속으로’에서 하루오의 엄마인 정순은 일제 말기 재일조선인이 겪은 고통과 수난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정순은 남편 한베에게 끔찍한 학대와 폭행을 당합니다. 정순은 자신이 조선인이어서 학대를 당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학대받는 처지를 당연시하는데요. 더욱 끔찍한 것은 정순이 아들인 하루오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배척하는 일도 감내한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강의실에서 ‘빛 속으로’를 학생들과 함께 읽으면, 저를 비롯한 학생들은 조선 출신이라는 이유로 정순이 겪는 고통과 그런 어머니를 부정하는 어린 하루오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고는 합니다. 그런데 70년 후에 한국에서 창작된 소설에서도, 국적과 위치만 바뀐 채 이러한 고통이 반복되고 있었던 겁니다. 이전에 이 연재에서도 다룬 바 있는 재일한인들의 소설에는 정순이나 하루오가 겪은 일이 70년이 지난 일본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는데요. 제가 도쿄대생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단순한 꿈, 인종이나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는 일이 없는 사회를 향한 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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