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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큰 다리 놓는 법

장규열 한동대 교수영일만대교는 들어설 수 있을까? 십 년도 넘게 논의하고 검토하며 지역에 필요한 일로 확인하였다. 중앙정부의 30대 프로젝트의 하나로 선정되기도 하였던 일이 이제는 예산의 문제로 주춤거린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교통정체를 해소할 방안이면서 관광효과도 기대된다는 게 아닌가. 산업도시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영일만항 물류의 흐름을 확충하고, 글로벌도시로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터이다. 동해안고속도로가 연결되면 국토의 동쪽 허리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핵심통로의 역할도 기대된다. 지역 내 교통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나라의 도로환경에도 기여할 대목이다. 관광자원의 확보는 물론 국제적으로 자랑할만한 글로벌 미래자산 가치마저 느껴지지 않는가.내년도 국가예산으로 영일만대교 설계를 위한 20억원을 확보하였다고 한다. 예상되는 소요경비에 비하여 턱없이 적은 금액으로 보이지만, 국가가 일의 필요성을 다소라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한다. 지역에서 이와 관련하여 책임있는 인사들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언론을 통하여 듣는 것처럼, 주로 같은 정당 소속 인사들과 접촉하며 호소하는 일은 효과 면에서 제한적이지 않을까. 정치권과 재계 일반에 접촉의 폭을 획기적으로 넓혀야 하는 게 아닐까. 실질적인 영향력이 확인되는 정치권 인사들과 재정과 국토관리을 다루는 정부 기관을 두루 아우르는 소구력도 발휘해야 할 터이다. 필요한 민자(民資)를 유치하기 위한 노력은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가.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는 재계와 기업들을 설득하여 참여를 유도하는 노력도 함께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큰 계획의 틀을 다시 잡아야 한다. 영일만대교가 지역과 나라에 왜 필요한지 그 타당성을 보다 분명하게 확인해야 한다. 다리를 놓은 다음 누리게 될 기대효과와 미래가치도 다시 살펴 확정하여야 한다. 지역이 우선 확신을 가져야 누구를 상대해도 설득이 가능할 것이 아닌가. 영일만대교는 시위와 데모로 인정받을 규모가 아니다. 조사와 분석, 기획과 설득의 모든 과정에 보다 신중하고 치밀한 접근과 대응이 있어야 할 터이다. 프로젝트의 규모와 지역에 미칠 영향과 효과를 생각하면, 다른 그 어떤 과제에 비하여 매우 의미있는 족적을 남길 수 있는 ‘큰 다리’가 아닐까. ‘글로벌포항’의 지향성을 고려하면, 국제적인 맥락에서 참여와 투자를 유치해 보면 어떨까.도시의 위상과 지역의 문화가 새발전의 기틀을 찾아야 한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기대하기보다 우리 안에서 긍지와 희망을 찾아야 한다. 내연산에서 솟아올라 구룡포로 흐르는 지역의 기운을 시민들의 삶에 잘 연결해야 한다. 영일만대교는 외형으로 훌륭한 자원이 될 뿐 아니라 지역의 자긍심을 한층 솟구치게 하는 모멘텀이 되어야 한다. 바다와 길을 잇는 ‘큰 다리를 짓는 일’에 지역의 관심과 기대가 더욱 모아야 한다.윈스턴 처칠이 이렇게 말했다는 게 아닌가. ‘비관적인 사람은 모든 기회에서 문제에 매달리지만, 낙관적인 사람은 모든 문제에서 기회를 발견한다.’ 영일만대교는 우리의 기회가 아닌가.

2020-12-09

巨與 ‘입법 폭주’ 극치…野 정치 달라져야

여당의 위험한 입법 폭주가 점입가경이다. 민주당은 8일 기업규제 3법(상법·공정거래법·금융그룹통합감독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공수처법)등 핵심 쟁점법안을 상임위에서 강행 처리했다. 국민의힘이 온몸으로 막아섰지만, 거여(巨與)의 횡포와 편법에 밀려 초라한 제1야당의 위상만 확인시켰다. 21대 총선 대패의 후폭풍이 참으로 사납다. 야당의 정치가 국민만 바라보고 민심과 함께 가는 정치로 완전히 달라져야 할 시점이다. 온갖 편법과 꼼수를 다 동원한 민주당의 입법독주로 공수처는 정치적 중립성을 위한 핵심 장치인 ‘야당의 비토권’이 거세된 채로 출범하게 됐다. 지난해 공수처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여론전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야당의 비토권’을 독립성·중립성 보장장치라며 수도 없이 다짐했던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의 약속은 완전히 허언(虛言)이 됐다.바뀌는 공수처법에 의하면 정권이 선택한 사람이 공수처장이 돼서 검찰이 수사 중인 현 정권 관련 사건을 다 가져갈 수 있게 돼 있다. 수사 경험도 전혀 없는 민변 출신의 5년짜리 변호사들도 수두룩 공수처 수사관이 될 것이고, 소속 검사의 임기도 3년(3회 연임 가능)에서 7년(연임 제한 없음)으로 늘어나 정권이 바뀌어도 신분을 지키게 된다.어제오늘 사이에 국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대 여당의 폭거는 이 나라 민주주의에 또 하나의 흑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오죽하면 진보 정의당마저도 “174석 거대 여당을 만들어준 민심은 그만큼의 더 큰 책임감과 정치력으로 국정을 안정시키고 이끌어가라는 것이지, 의석으로 독주하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비판하고 나섰을까.어쨌거나 우리는 이제 판·검사에 대해 수사와 기소를 할 수 있는, 어느 독재국가에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대통령 친위대 치하에 살게 됐다.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이 얼마나 무도한 지를 국민에게 최대한 알리기 위해 무슨 절차든 포기하지 않고, 따지고, 알리는 것에 소홀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의 말이 비장하게 들린다. 협치도 양보도 타협도 모두 사라진 정치권에서 야당은 국민과 함께 하는 새로운 전략을 마련해야 할 때다.

2020-12-09

연말특수 실종, 소상공인 도울 지원책 나와야

연말연시 대목 경기가 실종됐다. 코로나19의 재확산으로 연말에 계획된 송년회와 공연 등 각종 행사가 줄줄이 중단되면서 관련 업계가 된서리를 맞고 있다고 한다.대구와 경북도내 식당과 상가 등에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2단계 사회적 거리두기가 발표되면서 송년회 등 각종 행사 예약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다. 1년 내내 코로나 때문에 전전긍긍해 왔던 상인들은 모처럼 연말특수에 기대를 걸었으나 이마저도 수포로 돌아갈 것 같아 지금은 거의 패닉상태라 한다.매년 연말연시에는 송년회, 신년회를 비롯 각종 행사, 또 크리스마스와 가족 모임 등으로 식당가와 상가 등은 특수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최근 수도권을 중심으로 갑자기 늘어난 코로나19 확진자로 모든 경제활동에 제동이 걸리고 있는 것이다.1년 가까이 지속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사태로 소상공인과 자영업자 등은 이미 경제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은 상태다. 연말에 다시 시작한 코로나 확산 위기로 지금은 엎친 데 덮친 형국을 맞고 있다.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서비스업 생산은 코로나19가 처음 유행했던 지난 3월 전월 대비 4.7%가 감소했다가 이후 회복세를 보였으나 2차 유행한 8월 또다시 1.1%가 감소했다. 이번 연말 대목 경기가 실종되면 서비스업의 산업활동이 또다시 떨어질 것이 뻔하며 그 여파가 심상찮을 전망이다.특히 식당 등의 서비스업은 지역경제에 미치는 파장이 크다. 서민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데다 아르바이트 등 영세민의 고용과도 연관이 많아 연말경기 실종이 줄 충격은 상당하다.1, 2차 코로나 사태로 영세소상공인을 돕는 지원책이 없지는 않았으나 언 발에 오줌 누는 격으로 미봉에 그쳤다. 연말에 닥친 영세상인들의 위기 극복을 위해 또한번 실효적 지원책 마련이 있어야 한다.코로나 치료제가 없는 상황에서 백신접종이 최선의 방법이나 국민 모두가 백신을 접종하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앞으로 코로나 위기가 얼마나 더 크게 닥칠지 알 수 없는 만큼 소상공이나 자영업자들의 자구 노력과 더불어 이들에 대한 지원책 마련도 서둘러야 한다.

2020-12-09

보유세 vs 거래세

세법상 공식 명칭은 아니지만 ‘보유세’는 납세의무자가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에 부과하는 조세로서 재산세와 종합부동산세(종부세)를, ‘거래세’는 재화 또는 용역의 거래에 대해 부과되는 양도소득세(양도세)와 취득세 등을 일컫는다.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신년 기자회견에서 “보유세는 강화하고, 거래세는 낮추는 게 맞는 방향”이라고 말했다. 그랬던 정부가 7·10 대책을 통해 다주택자의 종부세 최고세율을 6.0%로 올렸고, 양도세와 취득세까지 인상 계획을 밝혔다. 보유세와 거래세를 모두 올려 논란을 자초하고 있는 셈이다.정부 관계자는 부동산 시장 상황과 투기 수요 억제를 위해서는 당분간 양도세 등 거래세 인하를 추진할 수 없다고 한다. 추후 부동산 가격 급등 우려가 없고 활발한 거래가 필요한 시점이 되면 재고해볼 수 있겠지만 당장은 정책 기조를 바꾸기 어려워 보인다. 더구나 지방세수에서 양도세 등 거래세 비중이 크기 때문에 거래세 인하는 지방자치단체의 반발을 부른다.변창흠 신임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 역시 양도세를 불로소득 환수 수단으로 규정해온 학자출신이라 취임하면 양도세 인상기조를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정부의 이런 기조 탓에 주택 공급 물량이 늘지 않아 주택시장 불안이 심해지고 있다는 게 문제다. 당초 정부는 부동산 보유세 부담을 높이면 다주택자가 시장에 물건을 내놓으면서 주택 공급이 확대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양도세 부담 탓에 다주택자 상당수가 증여로 돌아서거나 ‘버티기’에 나섰다.거래세 강화가 보유세 강화의 정책 효과를 반감시킨 셈이니 진퇴양난의 형국이다. 물론 서민들에게는“세금 고민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는 푸념만 쏟아지는, 먼나라 얘기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12-09

배운다는 것

한강 다리를 건너며 오늘은 강물이 험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가로등조차 하나도 안 켜놓은 것 같다고 느꼈다. 멀리 보이는 말없는 나무들도 어지러운 세상을 근심하고 있다.내 몸이 내 몸 같지 않다고, 내 정신이 내 정신 같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래도 내일은 대전에 부모님 뵈러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장난 삼아 산 플래시로 어두운 산숲을 비추어 본다.마음 속으로 그 ‘민주주의’라는 것이 나를 아주 망쳐 놓았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았다고, 쓸데 없는 가치의식에, 목표에, 측정에, 비판에, 분노에, 이율배반과 환멸에, 나는 그렇지 않아도 망가진 몸과 마음 상처를 덧나게 하고 있다.어두운 방에 작은 불을 켜고 가끔은 들춰 보리라 생각한 명호 형의 두꺼운 책을 심심파적 삼아, 잠도 오지 않으니까 편다. 명호 형은 참 큰 사람이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논어’를 새로 읽을 뜻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일까?하, 배운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고 명호 형이 풀이해 놓은 것을 곰곰히 다시 생각해서 정리해 본다.배운다는 것은 그러니까 첫째, 그냥 지식, 정보의 존재를 아는 것이 아니요, 그것을 익히는 것, 습관으로, 실천으로 만드는 것이다. 알고 행동은 다르게 하는 겉배움은 배움이 아니요, 알았으니 행동으로 옮기는 속배움이라야 한다. 둘째, 배우는 것은 즐거운 것이다. 나처럼 함께 길 가는 친구를 알아 그가 찾아와 즐거운 것이요, 이 배움 때문에 설혹 가난해도 원망할 것 없이 즐겁게 받아들일 줄 아는 것, 내 스스로를 닦으니 내실 있어 기쁜 것이다. 셋째, 또 뭐냐, 그러니까 배움이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는 것, 그러니까 세상에는 나보다 나은 사람, 훌륭한 사람 천지요, 나만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도 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아는 것이다. 넷째, 배운다는 것은 늘 배움의 태도를 잃지 않기에, 이것은 내 생각이지만 쓸데없이 무겁지도, 위압스럽지도 않은 것이고, 뭣보다 고루해지지 않고 나날이 스스로 새로워지는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 절차탁마한다고도 할 수 있다.명호 형은 공자를 가리켜 기철학자라 했다. 주리론, 주기론 하는 기철학이 아니요, ‘나’를 다스리는 뜻과 방법을 알고자 하는, ‘나’ 철학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실제로 온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 중차대한 문제니,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성낼 여가도, 여력도 없다. 다만 ‘나’를 위해 거울이 될 남을 알지 못할 것이 두려운 것이다.하, 배운다는 것이 이리도 무서운 것이라니, 나는 멀어도 한참이나 먼 것이다. 먼저 세상의 근심을 밀어내고 내 스스로를 돌아보기로 한다.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살아갈 수 있다면, 지난 잘못들은 악몽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12-09

아, 울산대학교!

김규종 경북대 교수바다를 처음 보았던 것은 고2 수학여행 때였다. 동대구역에서 해병대 군용트럭이 우리를 포항에 자리한 해병대 숙소로 데려갔다. 해병대 1일 입소를 통해 호연지기를 키워주겠다는 교장의 의지였다. 그때 처음 갯내음을 맡고 나서 내가 한 일은 바닷물을 맛보는 것이었다. 바닷물은 짰다, 아주 심하게. 내게 바다는 그렇게 다가와서 지금까지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하고 있다.얼마나 세월이 흘렀을까, 울산에서 3수로 괴로워하던 친구가 보자는 전갈을 보내왔다. 5월의 대학축제를 팽개치고 도착한 울산은 현대의, 현대에 의한, 현대를 위한 도시였다. 현대 직원용 아파트에서 이틀 묵으면서 방어진과 주전 바다를 보고, 경주를 경유(經由)해서 서울로 돌아온 일이 엊그제처럼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런 울산을 지난주에 다시 다녀왔다. 이번에는 목표지점이 울산대학교로 바뀌었다.어느 도시에도 그곳을 대표하는 대학이 있기 마련이다. 울산과학기술대학교(유니스트)가 있지만, 명실공히 울산의 간판 대학은 울산대학교다. 울산광역시에 거점 국립대학교가 없어서 서운하지만, 그래도 울산대학교는 분명 자타가 인정하는 울산의 명문대학이다. 차가운 초겨울 날씨를 뚫고 울산대학교 인문관에 도착한 즉시 ‘뭔가 이상한데’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스산하고 을씨년스러운 것일까?!복도와 화장실에서 감촉되는 싸늘한 냉기는 과객의 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대학을 방치(放置)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1970년 울산공대를 모태로 시작된 울산대학교 50년 역사가 아련했다. 설립자인 정주영 회장의 배움을 향한 갈망이 근간이 되어 만들어진 울산대학교. 고려대학교 공사판에서 부러운 눈으로 학생들을 보면서 향학의 꿈을 키웠던 청년 노동자 정주영.나는 한국의 유일한 기업가로 정주영을 꼽는다. “임자, 해봤나?” 대형 유조선에 물을 가득 채워 서산 간척지의 악명 높은 물살을 이겨낸 신화의 정주영. 그런 희대의 인물이 설립한 울산대학교가 위축되고 찌그러지고 있는 것이었다. 삼성의 성균관대만큼은 아니더라도 울산을 대표하는 대학을 이렇게 홀대하는 것은 정말로 뜻밖이었다. 대학의 위축과 몰락은 도시의 위축과 몰락을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킨다.위대한 현대의 신화를 학문과 교육에서 뒷받침해야 마땅할 울산대학교가 오후의 햇살 속에서 자꾸만 작아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하루였다. 오늘날 사립대학의 발전과 융성은 재단의 풍부한 물적 지원과 대학 자체의 자율성과 교수들의 책임감으로 이루어진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막스 플랑크’ 연구소 체제를 우리나라 전역에 산재한 사립대학 재단들은 하루빨리 배워야 한다. 대학은 돈 버는 곳이 아니라, 인재를 길러내는 곳이다.너무나도 자명한 이치를 망각한 허다한 재단과 이사장과 총장들을 생각하면, 우리의 미래와 어린것들이 구슬프다. 그들에게 다가올 희망의 광명이 환하게 퍼질 날을 고대하면서 다시 한번 말한다. “현대여, 울산대학교에 투자를 아끼지 마시라!”

2020-12-08

따로 또 같이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스산함이 더해가는 때, 코로나19의 재확산 일로로 어수선함마저 더해가는 연말이지만 한 줄기 차분한 위무 같은 이색적인 문화행사가 열렸다. 포항예총에서 주관한 ‘2020 포항예술인 한마당’ 송년 예술축제의 일환으로 기획 전시된 ‘화사(畵寫)한 문화(文話)’전이 그것이다. 이번 전시는 종전의 여타 전시회와는 다르게 예총 산하의 문인협회, 미술협회, 사진협회 작가들이 협업과 융합을 통해 독창적인 시서화(詩書畵) 작품을 한자리에 새롭게 선보였다는 것이 주목된다.연초부터 휘몰아친 난마 같은 희대의 전염병에 시달려 가뜩이나 초조하고 침울해진 시민들의 가슴을 조금이나마 어루만진 뉴노멀 시대의 새로운 시도가 아니었나 싶다. 활자로 구성된 시나 수필 등의 문학작품을 주로 책을 통해 접하던 것을 시인들의 육필원고와 화가, 서예가, 사진가들의 독특한 심미안으로 투영된 콜라보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으니 이채롭지 않으랴. 코로나로 인해 다소 낯설어진 일상에 같으면서도 서로 다른 창작품을 선보인다는 것은, 익숙해진 것들과의 ‘낯설게 하기’라는 예술 본연의 신선한 자극과 지향이 아닐 수 없다고 본다.시 속에 그림이 있고(詩中有畵) 그림 속에 시가 있다(畵中有詩)고 한다. 시와 그림의 유기적인 맥락과 상관성을 나타나는 말로 여겨진다. 한 점의 그림이 연상되는 시와 한 편의 시가 드러나는 그림은 시와 그림의 불가분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시적인 정취를 나타내는 시정(詩情)과 그림 속에 나타난 뜻을 일컫는 화의(畵意)는 서로 통하기 때문에 두 정신은 일치한다고 본다. 시인은 시어(詩語)로 그림을 쓰고 화가는 시각언어인 그림으로 시를 그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동양예술은 시서화가 일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시·서·화 등은 각각의 카테고리에서 충분한 예술성을 드러낼 수도 있겠지만, 상호 조화롭게 결합되어 예술의 통일체를 이룰 때 보다 풍부한 미학적 운치가 부여된다고 본다. 그것은 곧 다양한 예술장르가 각기 지닌 특색이 조화롭게 섞여서 또 다른 하나의 장르를 새로이 창출해내는 ‘따로 또 같이’의 예술정신과 진배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예술의 섬세하고 다채로운 표현양식으로 시의 향기를 귀로 들으면서 어루만진다든가 음악의 선율을 눈으로 보면서 맛을 느낀다든가 하는 식으로 수렴과 확장의 시너지효과를 얼마든지 극대화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어쩌면 예술은 따로 하면서도 같이 하고 같이 하면서도 또 따로 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따로 하는 작품에서는 개성을 한껏 살릴 수 있고, 같이 하는 예술에서는 공명의 완성도가 한결 커질 수 있다. 따로따로 살아가지만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듯이, 너무나 당연시했던 일상들이 정말 그리운 현실의 삶에서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리고 등한시하며 살아왔는지에 대한 것들을 성찰하게 된다.온 세계가 낯선 환경에 직면하여 저마다의 일상에서 코로나에 대처하고 극복하기 위해 변화하는 와중이지만, 비대면 사회문화 속에서 메말라가는 정서에 따로 또는 같이 느끼며 감성을 움직이고 위안을 받는 예술작품을 통해 믿음과 희망을 가졌으면 한다.

2020-12-08

6펜스가 필요한 세상에서 달을 보는 일

서머싯 몸의 소설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는 안정적인 중산층의 전형으로 전혀 특별할 것 없는, 그야말로 틀에 박힌 삶을 살아가는 재미없는 남자다. 그는 어느 날 돌연 직장과 가정을 떠나 파리의 뒷골목을 떠돈다. 그뿐 아니다. 제 발로 태평양의 외딴 섬을 찾아가 깊은 숲에 자리 잡고 문둥병에 걸려 장님이 된 채로 생을 마감한다.그는 왜 이런 무모한 행동을 했던가. 가슴 한구석에서 시작된 예술에 대한 열망이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의 아내의 말대로 그림은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지속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안락과 명예를 버리고 예술을 향한 본능을 따라간 것이다.스트릭랜드가 후기 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고갱의 삶을 있는 그대로 옮겨놓은 것은 아니다. 작가는 이야기를 더 극적으로 끌고 가기 위하여 인물의 삶을 단순화시켰고 그로 인해서 스트릭랜드는 기이하면서도 신비하고 보다 더 천재에 가까운 예술가로 포장되었다. 아마 작가는 고갱의 그림을 보았을 때 느꼈던 강렬함을 토대로 하여 가공의 인물로 만들었을 것이다.우리는 흔히 예술가를 바라볼 때 보통의 사람과는 다른 구석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스트릭랜드처럼 예술을 위해 자신을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일말의 거리낌 없이 고통을 향해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이 연상된다.나는 이따금 현실감각이 없다는 말을 듣곤 한다. 창창한 나이에 소설을 쓰겠다고 나선 것부터 그렇다. 다달이 통장에 찍히는 월급은 포기한 지 오래다. 당연히 안정된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도 않다. “사대 보험은? 저금은? 노후준비는? 경제적 혹독함이 얼마나 무서운 줄 모르는군.” 하는 말을 들으면 어쩐지 발끈해 나 자신을 변론하고 싶다. 하지만 별다른 대책이 없는 것은 정말 사실이라 어떤 대꾸도 못 한 채로 입을 다물고 만다.반대로 직접 만나보니 생각보다 예술가 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동글동글한 분위기에 허파에 바람 든 것처럼 잘 웃어서 오히려 상대를 당황하게 하고 만다. 냉철하고 신랄한 느낌을 기대했지만, 예상보다 고분고분한 모습에 조금 실망했다는 경우도 있다.나 자신을 스스로 예술가라고 선언하는 것이 낯부끄러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전의 나 역시 예술가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현실에서 빗겨나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은 물론이고 세상에 관해 어떤 초월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으리라고 상상했다.바로 이런 것들이 예술가를 낭만화시키려는 경향이다. 이 때문에 원고료를 제대로 정산받지 못해 항의하면 세속적이라는 답을 듣던가, 예술가라면 응당 고독과 불행을 당연시 여겨야 한다는 편견이 만연했다.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작가들은 이러한 이중적 시선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또한 예술에 대한 전근대적인 인식을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그중에도 글쓰기는 분명한 노동이며 그에 따른 대가가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눈에 띈다.청탁 시스템 속에서 글을 쓰는 작가들은 글이 발표되지 못하면 돈을 받지 못한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작업한 원고가 잉여 자원으로 취급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자신을 ‘활자 노동자’로 칭하고 글을 파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그들의 글을 받아보고 싶은 사람들에 한하여 정기적으로 시나 소설, 에세이를 보내주는 메일링 서비스가 그러하다. 다매체 시대에 걸맞게 출판사를 통하지 않고 작가가 직접 독자를 만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미등단 작가나 지면의 기회가 적었던 신인 작가들은 다양한 플랫폼으로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선보인다. 이러한 흐름은 점점 커져 시장의 하나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메일링 서비스는 간단하지 않다. 단순히 텍스트를 쓰는 것을 넘어서 콘텐츠를 기획하고 홍보하면서 구독자를 모집하고 발송하는 등 모든 영역을 혼자 진행하고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태는 노동에 가깝다. 이들은 창작물을 작업할 뿐 아니라 품이 드는 일까지 자처하고 있다. ‘6펜스’(구제도하에서의 은화) 없이는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보기는커녕 허리 통증 치료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예술가들이 겪는 경제적인 어려움은 분명하게 존재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전업 작가를 꿈꾸지만 정작 글쓰기만으로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작가는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생계 걱정을 하지 않으면서 작품 활동에 매진한다면 당연히 훨씬 질 높은 창작물이 탄생할 것이다. 그러나 공고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예술가는 영원한 비정규직 노동자일 수밖에 없다.나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을 쓰는 것만으로는 생활할 수 없다. 돈을 벌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 가혹한 세상 속에서 고고하게 자기 삶을 유지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나는 소설을 발표하는 것 이외에도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여러 영역에서 글을 써서 고료를 받는다. 그 돈으로 관리비를 내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소설을 쓴다. 책상 앞에 앉아 작업하는 시간을 최저시급으로 계산한다면 먹고사는데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면서.하지만 정말로 이것이 자본으로 치환된다면 대체 얼마여야 하는 것일까. 물론 소설만으로 돈을 벌면 좋겠지만 나는 돈을 벌기 위해서 소설을 쓰려고 마음먹은 것이 아니다. 이 작업은 절대로 값을 매길 수 없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가치를 지닌다.그러니 이러한 물음도 가능할 수 있다. 예술을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하거나 완전한 자본의 논리 안에서 포함하여 보는 일이 과연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이다. 예술은 견고하게 존재하는 세계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균열을 내는 일을 한다. 노동을 자본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라는 개념에서 봤을 때, 예술을 단순한 노동으로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달과 6펜스’에서 스트릭랜드는 그저 천재적인 예술가로만 묘사되진 않는다. 세상의 윤리로 보면 그는 이기적이면서도 괴상한 사람이다. 비정상적인 충동에 시달려 가족을 버렸고 주변의 사람들을 고통받게 한다. 만일 당신이 훨씬 더 가난해진다면, 몸이 아프게 된다면 지금의 행동을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는 이들에게 오히려 그는 의문을 던진다. 세속의 가치에 절절매는 것, 빈곤과 고통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의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스스로 가난하기를 택했다. 문둥병에 걸리게 되지만 절망에 빠지기는커녕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이 모든 일은 불행이 아니었다. 삶을 살아가는데 찾아온 하나의 사실에 불과했다.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이것이 스트릭랜드가 예술을 바라보는 태도다. 예술은 상품이 아니며 “더 높은 것, 아름다움과 진실을 통찰하는 것”이라며 예술의 숭고함을 중시했던 칸트도 “최고의 예술은 비즈니스”라며 예술의 상업성을 내세운 앤디 워홀도 시대를 관통하는 철학자이자 예술가였다. 이들은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관하여 골몰했고 거기에 가 닿기 위해 노력했다. 사회적 통념이나 타인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았다.예술은 시대적 상황에 순응하지 않고 불화하려는 시도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성이다. 창조를 향한 충동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달과 6펜스’가 시대를 넘어 많은 이들에게 널리 읽히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세상에는 세상을 균열 내려는 이들이 더욱더 많아져야 한다. 그럴수록 사회 전체의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힘은 커진다. 컴컴한 하늘에서도 기어코 별을 찾아내는 이들 덕분에 밤이 오는 것이 무섭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동그랗고 반짝이는 것 중 꼭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을 때, 동전 대신 달을 택하고자 하는 많은 이들을 응원한다.

2020-12-08

검찰 개혁의 당위성은 차고 넘친다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촛불혁명 이후에도 무소불위의 검찰의 권력은 강화되었다. 민주화 과정의 어려운 고개를 넘었음에도 검찰의 권력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추미애 장관과 윤석열 총장의 한 치의 양보 없는 갈등 구도는 제로섬 게임으로 치닫고 있다. 나라를 위해 매우 불행한 일이다. 추 장관은 윤 총장 징계요구는 검찰개혁의 불가피한 조치라는 입장이고, 윤 총장은 살아있는 권력수사에 대한 보복이라는 입장이 강하다. 검찰개혁이라는 문제 본질은 묻혀버리고 정쟁으로만 치닫는 상황이 불편하다. 검찰 개혁의 당위성은 모두 인정하면서도 합의된 해법은 찾을 수 없을까.10여년도 훨씬 넘은 오래된 일이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어느 경찰서장 한 분을 어느 식당에서 우연히 만났다. 나도 그 식당에 어느 부장검사와 업무협의로 식사가 예약되어 있는 터였다. 그 서장은 내가 이 식당에 온 이유를 알고는 얼른 자리를 피해 나가 버렸다. 당시만 해도 검사는 언제나 갑이고 경찰은 을의 신세였다. 검찰의 수사 기소 독점구조는 경찰에 대한 상하 수직적 구조를 강화시켰다. 학교 대선배였던 그 서장의 불편한 심기를 뒤 늦게 알게 되었다. 수사권과 기소권의 검경간의 조정이 이제 겨우 방향만 잡힌 상태이다.검찰 권력의 비대화 배경에는 지방 토호 세력의 자기 보호 본능도 한 몫 하였다. 과거 유력 기업인, 재력가는 사전 보험 식으로 검찰에 줄을 대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과거 검사인 어느 선배 부친의 시골 상가를 방문한 적이 있다. 집 찾기를 우려 했는데 마을 앞 십리 길은 조화가 늘어서고 경찰이 친절히 안내까지 해주었다. 당시 초임 검사도 ‘영감’으로 호칭되고 어느 자리나 상석에 배정되었다. 몇 해 전 유림 향사에서 젊은 검사가 초헌관이 되는 모습을 보았다. 이런 왜곡된 문화가 검찰 독점 권력의 온상이 되었다.과거 재직 시 잠시 학생관련 보직을 맡아 공안 검사들과 수차례 만난 적이 있다. 검찰의 조직 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부장 검사 옆의 젊은 검사는 항시 긴장하는 모습을 보았다. 회식에서도 부장 옆 자리의 젊은 검사들의 순종하는 모습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상관이 건배사로 ‘좌익 척결’하면 아랫사람이 ‘우익보강’하던 시절 이야기다. 검사 동일체 원리는 검찰 조직의 상명하복 문화의 온상이 되었다. 윤 총장의 징계 회부에 전 검찰 조직이 들썩이는 이유도 결코 이러한 조직문화와 무관치 않다.이러한 검찰 조직문화는 우리 사회의 권위주의 문화와 융합하여 검찰 개혁을 어렵게 한다.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당연한 귀결이고 여론의 지지까지 받고 있다. 그러나 검찰의 관행이나 문화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가까스로 입법화된 공수처는 하루 빨리 가동되어 살아 있는 권력인 검찰도 수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검경간의 수사권과 기소권 분리원칙은 엄격히 실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검찰내부의 조직적 반발은 계속되고 있다. 여야 정치권의 정쟁은 검찰 개혁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개혁이 혁명보다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2020-12-08

14개 시도의장 가덕도 지지는 들러리 정치다

대구와 경북 그리고 인천을 제외한 전국 14개 시도의회 의장들이 부산에 모여 가덕도 신공항 건설을 지지하는 선포식을 가졌다고 한다. 그들은 “국가균형발전의 마중물인 가덕도 신공항을 건설하라”며 “국회는 관련 특별법을 조속 통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참석한 14명은 민주당 소속 13명의 시도의회 의장과 민주당에서 제명된 무소속의 경남도의회 의장이 포함됐다. 인천시의회 의장은 인천공항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빠졌다고 한다. 전국 시도의회 의장협의회는 지방자치 발전과 지방의회 운영을 위한 상호교류 및 협력증진을 목적으로 운영되는 협의체다. 특히 중앙정부의 불합리한 제도 개선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모임으로 지방자치단체 간의 이해관계가 있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협의회 전체가 공동의견을 내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각 지역의 이해를 존중하고 이해관계가 상충할 때는 당사 간 원만한 합의나 대안 제시로 문제를 푸는 것이 협의체 운영의 올바른 정신이다. 대구와 경북이 극렬히 반대하는 줄 뻔히 알면서 부산을 찾아가 가덕도 공항을 지지한 것은 다분히 정치적으로 의도된 행동이다. 모두 민주당 소속의 의장이라는 사실만으로 의도된 행동임을 짐작게 하고도 남는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여론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4년 전 영남권 5개 광역단체장은 영남권 관문공항을 김해신공항으로 합의한 바 있다. 당시 가덕도 신공항은 국제적 전문기관인 파리공항공단 엔지니어링의 타당성 검토에서 밀양보다 뒤진 꼴찌 평가를 받았다. 가덕도 신공항이 다시 절차적 협의나 공론화 과정도 거치지 않고 마치 신공항 후보로 확정된 듯 밀어붙이는 것은 부산시장 보궐선거와 연결짓지 않고는 받아들이기 어렵다.총리실 검증위원회의 검증만으로 국가의 중대한 국책사업이 손바닥 뒤집듯 바뀐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14개 시도의회 의장들이 이런 내용을 모르고 지지했다면 웃음거리가 될 일이다. 지방의 자치단체장으로서 가덕도 신공항 지지는 본분을 망각한 일일뿐더러 협의체 내 분열을 자초한 일로 앞으로 그 책임도 물어야 한다. 당의 의사를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것보다 지방자치 발전을 위한 명분 있는 일에 나서는 것이 멀리보아 지방정치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2020-12-08

‘크리스마스 악몽’

1993년 제작된 ‘크리스마스 악몽’은 월터 디즈니 계열사 터치스톤 픽처스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뮤지컬 영화의 제목이다. 미국의 유명한 동화인 ‘크리스마스 전날’에서 제목을 따온 영화로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방영된다.아이들이 보기에는 너무 어두운 내용이 많다고 하여 우리나라에서는 2년 늦게 개봉됐다. 크리스마스와 핼러윈데이를 결합한 독특한 소재의 영화다.미국의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최근 크리스마스 대이동을 앞두고 미국이 또한번의 크리스마스 악몽을 맞게 될 것을 공개 경고했다고 외신이 전했다. 현재 미국의 코로나19 확진자 수는 1천400만명에 달한다. 세계 확진자 수의 21% 수준이다.추수감사절처럼 이동 자제 권유가 먹혀들지 않는다면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한 주 동안만 2만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할 것으로 질병센터는 예측했다. 또 크리스마스에 이어 연말까지 대이동이 이어진다면 미국 내 전체 누적 사망자 수는 33만명에 달해 역대 가장 우울한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보내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우리나라에도 연말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고 있다. 예년이면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과 캐럴송이 퍼져 나올 무렵임에도 연말 분위기가 전혀 살아나지 않고 있다.수도권을 중심으로 2.5단계 거리두기 조치가 내려지면서 수도권은 이미 셧다운 상태다. 초저녁 무렵부터 거리에는 어두움의 그림자가 내리고 차들도 서둘러 집에 가는 모습이 마치 전시상태를 방불케 한다.세계 각국이 최악의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사실상 올 크리스마스 악몽은 미국만의 악몽이 아니다. 올 연말 찾아온 크리스마스 악몽을 어떻게 극복할지가 지구촌 모두의 고민거리다. /우정구(논설위원)

2020-12-08

국민의힘, 공감대 없는 ‘사과 쇼’ 의미 없다

국민의힘이 구속된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대국민 사과 문제를 놓고 내홍으로 치닫고 있다. 취임 직후부터 대국민 사과에 나서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해온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사과를 실행할 뜻을 내비치자 당내에서 반발이 쏟아지는 상황이다. 공감대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김 위원장 혼자서 사과를 하는 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할 것이다. 최근 지지도가 오르는 등 조금 형편이 나아지자 고질병이 도지는 것 아니냐는 조롱이 터져 나온다.김 위원장은 지난 6일 청년국민의힘 창당 행사를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대국민 사과는)국민의힘에 처음 올 때부터 예고했던 사항인데 그동안 여러 가지를 참작하느라고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며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라고 운을 뗐다. 김 위원장의 사과가 이르면 9일에 행해질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다.주호영 원내대표부터 “선거를 앞두고 굳이 우리 스스로를 낙인찍을 수 있는 얘기를 하는 게 문제가 있다고도 하더라”라고 말해, 에둘러 반대 의견을 표했다. 장제원 의원도 SNS에서 “절차적 정당성도, 사과 주체의 정통성도 확보하지 못한 명백한 월권”이라고 반발했다. 당 대변인인 배현진 의원은 SNS를 통해 김 위원장을 정면 겨냥 “누가 문재인 대통령을 탄생시켰나. 김종인 비대위원장마저 전 정부 타령하시려는가”라고 비판했다. 국민의힘 최다선인 5선 서병수 의원도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며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김 위원장이 이 같은 기류에 대해 “이것도 못 하면 내가 (당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본다”고까지 말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또 한 차례 분열 소용돌이마저 감지된다. 정당의 이름으로 공개사과를 하려면 당내 공감대부터 형성하는 게 순서다. 밤샘 토론을 통해서라도 구성원들이 의견을 모으고 진정성 있는 사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순리다. 국민의 지지가 조금이나마 돌아오는 시점에 불거진 제1야당의 불협화음이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탄핵의 강’을 건너야 한다는 김종인 위원장의 생각은 그르지 않다. 중지를 모아서 한목소리를 만들어가는 정치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2020-12-08

66년생 오진선

최미경동화작가‘2020년 9월 10일자 부동산매매계약서 제 5조에 따라 매도인 오진선은 매수인 최민식에게 부동산매매계약의 해제를 통보합니다. 계약에 따라 계약금의 배액을 상환하고자 하오니 매수인 명의의 계좌번호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오진선씨는 다시 한 번 자신이 보낸 문자를 들여다보았다.B부동산에서 보내준 문자를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넣기를 한 것이니 법적으로 문제시 될 것은 없었다.오진선씨는 자신의 머릿속에 맴도는 ‘법적으로’라는 단어를 혀끝에서 여러 번 굴려보았다. 요 며칠 그 단어가 꽤 근사하고 합리적이다 라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그러다 네이버 검색창에 들어가 ‘법’이라 쳤다.“사람들이 지켜야 할 규칙, 모든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 오진선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난 9월 아파트 계약서를 쓸 때를 떠올렸다.부동산정책이 바뀌면서 골치 아픈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에 가지고 있던 물건 몇 개를 정리해서 갈아타려 했다. 그 중 하나가 S4차 아파트였다. 그런데 계약서를 쓰고 한 달이 채 되기 전에 슬금슬금 전세가가 오르기 시작하더니 11월이 되자 두세 달 전 매매가 보다 웃돌았다. 잔금 날짜까지 10일 정도 남았는데 아침저녁으로 S4차아파트의 매매가는 최고가를 쳤다. 매매계약서에 적힌 잔금날짜와 현재 그곳에 살고 있는 세입자의 이사날짜와 계약 파기 시 물어내야 할 금액까지, 숫자들이 우글우글 머릿속에서 기어 나와 밤새 오진선씨의 온 몸을 기어 다녔다.날이 세자마자 오진선씨는 B부동산에 전화를 했고 중도금이 없는 상황이니 계약을 파기해도 현시점의 아파트 매매가면 물어준 배액의 몇 배 이상까지 거뜬히 당길 수 있다는 확답을 받았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혹시나 매수인이 중도금을 넣기 전에 세입자부터 내보내야 했다. 잔금일자를 당기자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먼저 떠올렸던 게 B부동산인지 오진선씨인지 중요하지 않았다.오진선씨가 그 날 오후 네일샵에서 빌더젤과 엠버를 섞어 손톱라인을 그리는 동안 잔금일자가 당겨졌다는 통보를 받은 세입자와 매수인의 마음은 바빠졌다.3일 후면 노모가 살던 집을 비워야 하는 50대 아들과 3일 후면 생애 처음 ‘우리 집’을 가지게 된 세 아이와 그 아이들의 엄마 그리고 40대 중반의 가장이 쉽게 잠들지 못한 금요일 밤이었다.그리고 이튿날 아침 계약을 파기한다는 내용을 매수인에게 전했다는 B부동산중개사의 전화를 받았다.오진선씨는 소파에 반쯤 누워 TV채널을 돌리다 살짝 배가 고파졌다. 그때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한 통 왔다. ‘사모님, 저희 다음 주면 이사간다고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이들 데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오진선씨는 문자를 읽다말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오진선씨는 TV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잔금일자를 하루 남겨둔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이었다.*위 글은 현재 아파트가격이 급등하자 매도자들이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사례가 잇따른데 따른 가상의 글임을 밝혀둡니다.

2020-12-07

율곡(栗谷)의 제 3의 길

강희룡 서예가우리의 생각은 대개 흑 아니면 백, 보수 아니면 진보라는 이분법으로 결정짓는데 익숙하다. 나 아니면 남, 좋은 사람 아니면 나쁜 사람. 그래서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사람을 회색분자라고 하며 낙인을 찍는다. 하지만 세상의 일이란 대부분 흑과 백을 넘어선 데에 더 나은 길이 있는 법이다. 율곡 선생의 ‘율곡전서(栗谷全書), 증유응서몽학치군설’에 ‘학문이 부족하면서 바삐 벼슬하려고 해서도 안 되고, 학문이 충분하면서 벼슬하지 않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라는 글이 실려 있다.500여 년 전 시대 역시 선비들은 대부분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었다. 선조 8년 인사권을 쥐고 있던 이조전랑 자리에 누가 앉느냐에 대해 동인인 김효원과 서인인 심의겸의 대립이 결국 조선의 붕당정치를 가져왔다.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면서 이후 망국적 행태의 당쟁으로 이어져 결국 민생은 피폐되고 국제정세에 무지했던 관료사회는 임진왜란이라는 화를 불러들인다.혼란한 시국에는 권력자에게 아첨하지 않고 정도(正道)를 지키려는 사람은 학문이 충분한데도 세상을 등지고 살았고, 벼슬하기에 급급한 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하려고 하였다. 사람들은 보통 벼슬하기에 급급한 사람을 소인이라고 비판하고, 지조를 굽히지 않고 세상을 등진 채 사는 사람을 군자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율곡은 이런 식의 이분법적인 생각에서 빠져나와 세상이 혼탁하다 하여 모두 다 세상을 등지고 숨어버리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어떻게 하느냐는 논리를 편 것이다. 그래서 원칙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현실의 어려움을 개선할 수 있는 이른바 제 3의 길을 찾으려고 노력한 것이 율곡에게는 다름 아닌 학문이었던 것이다. 논어에서 ‘관직생활에서도 틈이 나면 학문을 익혀야 하고, 학문이 넉넉하게 되었으면 관직에 나아가야 한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학문을 충분히 쌓은 사람은 관직에 나와 자신의 학문을 현장에서 실행하고, 관직 생활을 하는 현장에서도 틈만 나면 계속 학문을 쌓아서 현장 문제에 대한 바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노력을 계속하다 보면 당장 눈앞의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은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어느 정도라도 덜 수 있다. 여기서 학문이란 얄팍한 지식 몇 조각으로 잔머리 굴리며 자신의 욕심이나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국민 앞에 궤변이나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바탕으로 한 지식을 지혜롭게 국가를 위해 펼치는 것을 말한다. 옛사람에게 있어 뜻이란 배움이요, 배움이란 성인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선(善)을 따르기는 산을 오르는 것처럼 힘들고 욕심을 따르기는 물이 낮은 데로 흐르는 것처럼 쉬운 법’이라는 옛말처럼 뜻이 굳세지 않으면 영욕에 마음이 흔들려 뜻을 빼앗기지 않는 경우가 드문 법이다.더구나 물질적 가치와 권력욕의 추구가 최고의 선인 것처럼 목표로 쉽게 설정되는 요즘 세태에서 옛 학문이 추구하는 목표가 새삼 소중함을 느끼게 하는 현실이다. 국민 고혈로 호의호식하는 공복(公僕)들의 정신자세는 선공후사(先公後私)가 아니라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의무만이 어깨에 매달려있다는 것을 새겨야 할 것이다.

2020-12-07

비탈에 서도 외롭지 않은 그대… 경주 주사암(朱砂庵)

오봉산은 신라 선덕여왕 때 백제의 군사들이 여근곡(女根谷)에 숨어 있다 격퇴된 곳이며, 부산성(富山城)이 있어 경주의 서쪽을 방어하는 중요한 군사요충지였다. 뿐만 아니라 화랑 득오곡이 죽지랑을 그리워하며 ‘모죽지랑가’를 지은 곳이기도 하다. 그 오봉산 정상 아래 숨어 있는 주사암을 찾아 산길을 오른다.‘53 선지식의 돌탑’, ‘번뇌가 사라지는 길’이라는 팻말과 작은 돌탑들이 썰렁한 겨울 산길을 밝힌다. 섬세한 손길은 이내 담력시험이라도 치르듯 53굽이의 아찔한 경사길로 이어진다. 조금만 방심하면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산길을 비틀거리며 차가 오른다. 마주 오는 차와 교행할 수 있도록 중간중간 길어깨를 만들어 놓았지만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겨울 응달에 기대선 나목들의 침묵, 그 사이로 얼어붙 듯 숨죽인 허공이 우리를 지켜본다. 선재동자가 53명의 선지식을 친견하기 위해 거쳐 간 험난한 과정을 떠올리며 내 나약한 숨결에도 기도가 실린다. 산 위 주차장에 이르렀을 때, 스피커에서 마중 나온 염불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불국사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때 의상 대사가 창건한 주사암은 투구모양을 한 오봉산 정상(685m) 바로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주사암은 풍수지리학적으로 투구의 안쪽에 들어가 있는 형국이라 에너지가 빠져나가지 못한다고 한다. 절 입구 양쪽에는 커다란 석문이 불이문 역할을 하며 서 있다.조심스럽게 경내로 들어선다. 작은 법당 뒤로 투구 모양의 바위가 주사암을 보듬고 앞으로는 부산성이 든든하게 막아주고 있다. 활짝 열린 법당문 안으로 겨울 햇살 홀로 부처님 진신 사리를 친견하고 나는 염불 소리에 젖어 산사의 풍경에 몸을 맡긴다.산악용 자건거를 탄 남자가 안장에서 내리지 않고 법당 앞까지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평화롭던 공기는 달아나고 말았다. 잠시 인드라망의 그물이 출렁이며 파동을 일으킨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전거를 어깨에 메고 마당 바위 쪽으로 사라지는 그의 당당한 발걸음과 근육질 몸매가 안쓰럽다. 상호 배려와 겸손의 깨달음은 그토록 멀고 힘든 것인가.경내를 둘러보다 나도 마당바위로 향한다. 까마득한 절벽 위, 툭 트인 산과 허공을 배경삼아 자전거로 한껏 멋을 내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 근처에 ‘드라마 선덕여왕 촬영지’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날렵한 동작으로 무술을 연마하는 화랑들의 기상이 들릴 듯 하고, 주사암 설화 속에 등장하는 좌선 중인 도인의 모습도 아른거린다.저 너른 허공의 품에 안겨 나도 참선하듯 앉아 있고 싶다. 조용한 날 다시 오리라 마음먹고 돌아오는데 어느 보살님이 국수공양을 하고 가라며 인사를 건넨다. 매주 일요일은 무료로 국수공양을 한다는 안내문이 생각났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소박한 건물을 바라보다 용기를 내어 들어섰다.공양간을 가득 메운 사람들, 그 사이로 국수를 삶아 건져내느라 분주한 봉사자들이 보인다. 그저 받기가 조심스럽다. 국수에 육수를 붓고 갖가지 고명을 얹어 구석진 자리에 앉는다. ‘몸과 생각이 자유로워지는 곳. 이 공양 받으시고 하루빨리 도업 이루소서’ 걸어놓은 현수막에서 주사암의 마음을 읽는다. 귀한 음식을 앞에 놓고 고작 ‘오관게’를 읊고 있는 나, 편안함에 길들여진 마음조차 남루하다.담백한 육수와 갖가지 고명이 어울린 국수에서 정갈한 산사 맛이 난다. 주지 스님이 어떤 분인지 뵙고 싶다. 삶의 근간인 밥의 힘을 알고 사람을 제대로 섬길 줄 아는 분이리라. 산문 걸어 잠그고 참선하는 수행에도 높은 뜻이 숨어 있지만 대중들과 호흡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수행은 세상을 좀 더 낮고 가깝게 만들 것이다.뒤늦게 대웅전 법당에서 백팔 배를 올린다. 어느 때보다 진지하다. 보살행을 실천하는 불자들의 짧은 인사가 문턱을 넘나들고 겨울 햇살이 내 등을 어루만진다. 진정한 보살은 의지하는 것이 없어 즐거움이나 기쁨을 구하지 않으며, 선정의 결과로 색계천에 태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긴 겨울 앞에 선 암자가 쓸쓸해 보이지 않는다.조낭희 수필가주지 스님을 친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서구적인 외모와 소탈한 인품의 효웅 주지스님은 어디에도 걸림이 없다. 산문 근처에 목사님의 시를 걸어놓을 정도로 열린 마음을 가진 분, 53굽이의 산길을 손수 청소하고 불자들을 맞으며 무료공양 해 오신지가 벌써 5년째라고 한다.스님은 무료공양의 덕을 옆에 앉은 송경규 회장과 봉사자들, 소식을 듣고 다시마와 국수를 보내주시는 분들의 공으로 돌린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 송 회장의 맑은 눈빛과 동안의 비결을 알 것 같다. 주사암과 스님에 대한 애정이 보살행으로 이어진 것인지, 그의 보살행으로 주사암과 스님을 사랑하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선지식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묵묵히 선업을 닦는 사람들을 통해 부처님은 오시리라. 이곳에서는 높고 낮음, 삶과 죽음, 차안과 피안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보름달이 뜨면 마당 바위에 도인처럼 앉아 계실 효웅 스님을 떠올려 본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적막이 있을까?

2020-12-07

만약(If)과 아마도(Quizas)의 사랑이야기

영화의 제목이 주는 울림이 감상의 다양한 변주를 낳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영연화’ 또한 그렇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순간’을 의미하는 영화제목은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 그 순간을 쌓아가는 과정과 그 이후의 무너짐을 기대하게 된다. 찬란함이 계속해서 유지됐다면 그것을 ‘순간’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영화 ‘화양연화’의 주제는 ‘사랑’이다. 사랑의 정의나 사랑의 기준을 잡는 영화가 아니라 사랑의 시작과 끝, 과정의 세심한 감정들을 분위기로 이끌어 가는 영화다. 치열하거나 복잡하거나 고난과 시련이 없다. 아니 있었어도 생략되거나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영화 속 사랑의 진행은 더디다. 완급의 조절에 있어서 모든 결정적 순간들은 한 순간 주춤한다. 영화 속 자주 등장하는 슬로우모션 장면처럼 아예 늘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진행의 단계들은 상세한 설명이나 대사없이 이루기가 어려운 영화는 아니다. 다만 섬세한 디테일들이 빼곡히 그 간극을 메우며 진행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따지고 볼 것이 아니라 분위기에 젖어 감상하는 영화다.‘사랑’의 시작에 있어서 핵심은 ‘확인’이다. 상대에 대한 나의 감정과 나에 대한 상대의 감정을 확인함으로써 본격적인 단계에 진입한다. 영화 ‘화양연화’에서는 ‘사랑한다’는 확인의 장면이 없다. 직접적인 고백이 없기에 시작이 불분명하고 사랑의 진행률이 선명하지 않다. 이 또한 모호한 대사와 미세한 동작과 유려한 영화적 장치들로 짐작하고 느낄 뿐이다.‘화양연화’의 사랑은 ‘불륜’이다. 상대의 불륜에 나도 불륜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개연성을 지니더라도 ‘도덕’의 기준을 들이댄다면 불편한 영화가 된다. 이 지점에서 영화 ‘화양연화’를 좀 더 다른 관점에서 해석해 볼 여지가 있다.과연 불륜을 먼저 저지른 것은 남자의 아내와 여자의 남편이었는가 아니었는가. 먼저 불륜을 저지른 것은 각자의 아내와 남편이었지만 그 반대로 읽어도 해석이 가능하다. 영화는 끊임없이 특정한 선택의 기로에서 ‘가정(假定)’을 한다. 이 가정을 두고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상황을 ‘연습’한다. 가정에 대한 연습이 어느 쪽이 사실이었는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불륜에 대한 알리바이를 ‘가정’했을지도 모른다.‘화양연화’는 ‘if’에 대한 영화다. 선택과 확인의 기로에서 이들은 다양한 선택을 두고서 연습을 한다. 주인공인 두 남녀가 헤어지는 ‘연습’이 대표적인데, 사실과 연습이 뒤섞이면서 어느 것이 실제로 진행된 것인지 모호해진다. 고백을 했는지, 실제로 만나서 사랑을 했는지, 사랑하고 헤어진 것이 맞는지, 영화의 모든 결정들을 ‘만약(if)’으로 두어도 좋다.‘화양연화’중에서 인상에 남는 음악이 넷 킹 콜이 부른 노래 ‘Quizas, quizas, quizas’다. 직역하면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다. 사랑의 확인과 선택의 물음에 ‘아마도’라고 답한다. ‘아마도’는 확답이 아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여지를 남긴다. 그래서 ‘아마도’는 ‘만약(if)’을 선행시킨다.사랑의 결과는 영화의 시작에서 바로 밝혀진다. ‘그와의 만남에 그녀는 수줍게 고개를 숙였고, 그의 소심함에 그녀는 떠나버렸다’라는 자막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사랑의 시작과 헤어짐의 과정 중에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 가와 이유가 중요하다.영화 마지막 남자는 앙코르와트에서 이 모든 사실을 영원히 봉인해 버린다. 추억에 대한 봉인이 아닌 선택과 이유에 대한 봉인이다. 선택과 이유를 알지 못해도 이 영화를 감상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오히려 그것이 없어서, 항상 주춤하며 진행되고, 미세한 떨림이 간극을 메우기에 더 애틋한 영화가 된다.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는 아름다운 영화다. 영상과 음악, 의상과 미술, 미장센까지 과감한 선택과 집중으로 감정의 흐름을 흐트리지 않는 영화다. 더불어 등장인물들의 뒷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영화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화양연화’라고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는 영화다./문화기획사 엔진42 대표

2020-12-07

할머니는 일학년

저녁 먹고 나니 잠이 쏟아진다. 소파에 누워 스르륵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얼마나 잤을까? 깨어보니 밤 12시가 다 되어 간다. 다들 잠자리에 들었기에 나도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잠을 재촉해도 눈이 말똥해졌다. 30분 뒤척이다 다시 거실로 나와 텔레비전을 켰다.다들 잠든 밤이니 스펙터클한 영화도 싫고, 살인이 난무하는 서스펜스는 어깨가 아파 더 싫고, 호러 영화는 무서워서 혼자서 보는 것은 무리다.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소박한 영화를 골라야지 하며 쭈욱 둘러보다가 고른 영화가 ‘할머니는 일학년’이다. 다큐멘터리인가 하는데, 시작하자마자 가슴이 저리기 시작한다. ‘집으로’영화가 떠오른다. 하지만 ‘집으로’ 영화보다 조금 무게감이 있다고 할까. 장면마다 나는 자꾸 눈물이 났다. 대사가 많거나 아주 슬퍼서라기보다는 그저 눈물이 났다.아들을 홀로 키웠던 까막눈의 할머니, 엄마를 잃고 새로 얻은 아빠까지 사고로 잃은 일곱 살 여자 아이 동이, 베트남에서 시집와서 노름꾼 남편과 팥쥐 엄마 닮은 시어머니를 둔 며느리, 이렇게 셋이 한글을 배우는 이야기이다.할머니는 아들이 사고로 죽으며 남긴 수첩을 유품으로 받았다. 거기에 적힌 아들의 이야기가 궁금하지만 읽지 못하니 안타까워 초등학교에 무작정 찾아간다. 배경을 자세히 보니 시월에 수업을 다녀온 영양의 초등학교였다. 동네로 달려가는 버스가 지나친 길은 주실마을 앞 숲길이었다. 영양에서 찍었구나 싶어 자막이 올라갈 때 도와주신 분들의 이름까지 자세히 읽었다.세 사람이 글을 배우는 과정에서 서로를 의지한다. 할머니는 글을 배우자 세상에 대해 문을 열고, 베트남 새댁은 남편을 집으로 들어오게 하는 쪽지를 쓰고, 동이는 가족을 얻는다. 글은 이래서 배워야 한다. 글자는 더 큰 세상으로 가는 문이 되어 주니까. 새벽까지 나는 실컷 울었다. 눈은 퉁퉁 부었지만 밤낮없이 돌아다녀 몸살이 날 것 같던 내 몸이 가뿐해졌다. /이향기(포항시 북구 장성동)

2020-12-07

뚝방길

자다가 떡이라더니! 집 옆으로 흐르는 동천강 상류를 정비하면서 누구나가 부러워할 만한 뚝방길 산책로가 생겼다. 동천강은 외동읍 북쪽 어디에선가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 울산 태화강과 합쳐지면서 동해로 흘러 들어간다.뚝방길 서쪽은 강이고 동편에는 작지 않은 들판이라서 양편의 풍광이 사철 바뀌게 된다.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지도 않는데도 세월은 흘러간다. 찬바람과 함께 들국화가 피고 갈대 순이 펄럭일 때 들판은 노란색이 짙어지며 황금색으로 변한다. 가끔씩은 인기척에 놀란 꿩이나 고라니가 튀어나와 사람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뚝방길 끝부분에는 우람한 정자나무가 네 그루가 있었다. 매년 태풍에 시달리며 모두 북쪽으로 비스듬하게 서 있었는데 올여름 모진 태풍을 맞아 거대한 나무 두 그루가 세로로 절반으로 갈라지며 넘어져 버렸다. 아쉬운 일이지만 자연의 조화를 누가 말릴 수 있는가. 여기부터 백 미터 구간은 조금 비탈길이다. 사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부부 사이이지만 이 구간은 팔짱을 끼고 내가 끌며 올라간다. 그때, 나는 심청이고 남편은 심 봉사라며 한번 웃는다.출발하는 시간이 해뜨기 삼사십 분 전이므로 산책길에서 매일같이 새로운 아침 해를 맞는다. 해 뜨는 방향으로 서서 눈을 감고 두 팔다리를 벌려 나무처럼 서서 아침 해를 맞는다. 햇살이 얼굴을 더듬을 때 눈꺼풀 속 눈알이 따스해지며 해 뜨기 전의 냉랭함은 햇살과 함께 온기로 바뀐다. 빛과 열과 에너지가 혼합된 따스함이 온몸으로 전달된다. 이 감촉이 좋고, 이 시간이 좋다. 사람도 해가 없이는 살 수 없지만 식물에게 햇빛은 생명의 원천이다.추수가 끝난 들판은 삭막하다. 논마다 하얗게 포장된 소먹이 짚 둥치만이 널려있다. 산책길 좌우로 하얀 갈대가 서리를 머리에 이고 흔들릴 때, 모든 초목은 생명을 숨기고 새봄을 기다린다. 또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이말필(경주시 외동읍)

2020-12-07

복돼지

눈을 번쩍 떴다. 알람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잠에서 깨었다. 옆자리 남편도 눈을 떴다. 동시에 일어난 셈이다.평소보다 한 삼십분 일러서 뭉그적거렸다. 옆으로 얼굴을 돌려보니 기분이 좋은 듯 남편이 혼자서 실실 웃고 있었다.꿈을 꾸었단다. 그것도 얼굴이 하얗고 토실토실한 복돼지 꿈이란다. 화들짝 놀랐다. 시집간 딸은 이미 만삭이고 여러 사람이 태몽을 들고 나왔기 때문에 태몽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재물이 들어 올 꿈이 아니던가.바싹 다가들며 자세히 말해 보라고 했다. 복권을 사야겠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데 복돼지 꿈은 확실한데 옆에 누가 있었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복스럽게 생긴 개였다고 했다. 나는 “에이, 개판쳤네.”라며 아쉬워했다. 해몽은 성급히 했으나 미련을 지울 수가 없었다.아침 출근시간이라 잠시 꿈 이야기를 접어두고 각자 할 일을 했다. 출근을 하면서 꿈속의 개는 생각나지 않고 통통한 복돼지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그 덕분인지 콧노래를 부르며 하루가 즐겁게 지나갔다.퇴근 후 저녁밥을 지었다. 인근에 살고 있는 딸이 왔다. 쓱 지나가는 말로, 요 앞에서 직장 동료를 만났다고 했다. 이 동네로 이사를 했다는 동료는 얼마 전에 구입한 세탁기가 너무 커서 이사한 집에 맞지 않다고 했다. 구입한 가전회사에 수거 부탁을 하니 구입 가격의 10%만 보상이 가능하다고 한다며 너무 아까워했단다.나는 귀가 번쩍거렸다. “그 세탁기 내가 사꾸마.” 손가락을 브이로 보이며 두 배를 주겠다고 했다. 당장 연락해보라고 다그쳤다. 그러면서 아침에 있었던 복돼지 꿈 이야기를 꺼냈다. 그 동료가 큰집으로 이사를 가기 때문에 세탁기에도 복이 묻어 있을 거라며 웃었다. 어릴 적에 부잣집 농을 사면 재물복도 같이 따라 들어온다는 어른들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순식간이었다. 딸의 도움으로 세탁기가 아주 쉽게 성사되었다. 현재 사용 중인 세탁기는 딸이 초등생일 때 구입된 거라 오래 되었지만 요즘 나오는 세탁기가 워낙 비싸서 망설이고 있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신제품 세탁기를 들인다고 생각하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남편의 복돼지 꿈 덕분이다. 개판을 쳐도 이 정도인데 꿈속에 개가 없었더라면 우리 집에 무엇이 들어왔을까? 생각하다가, 가만히 있는 개를 내 멋대로 홀대해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복돼지랑 개, 딸이랑 동료에게 무지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최경하(경주시 현곡면)

2020-12-07

자치경찰제 도입, 무늬만 ‘자치’여선 안 된다

자치경찰제가 내년 1월부터 시범 운영돼 7월부터는 전국적으로 본격 시행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지난 3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자치경찰제 도입과 국가수사본부 신설을 골자로 한 경찰청법 전부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통과된 개정안은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쳐 내일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될 예정이다. 여야가 합의한 사안인 만큼 차질없이 진행될 것으로 보여 우리나라의 자치경찰제 도입이 드디어 초읽기에 들어간 셈이다.자치경찰제는 자치단체의 책임 아래 지역경찰이 치안을 맡는 제도다. 지방분권과 지역치안 강화라는 측면에서 획기적 조치다. 그동안 많은 논란을 벌였지만 이번 법안 통과로 지역의 주민도 양질의 치안 서비스가 제공될지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자치경찰제가 도입되면 기존 경찰업무 중 외사, 보안, 정보는 국가경찰사무로 분류되고, 형사, 수사사건은 신설되는 국가수사본부에서 맡게 된다. 생활안전과 교통, 여성, 아동사건 등은 자치경찰이 맡게 되는데 신설되는 시도지사 소속의 시도 자치경찰위원회의 지휘 감독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사실상 경찰권이 세 군데로 분리되는 모양새여서 경찰력이 얼마나 유기적 관계를 유지할지가 관심이다. 경찰은 검경수사권 조정으로 수사권의 상당 부분을 검찰로부터 넘겨받는다. 그러나 관련 법의 통과에도 국가수사본부의 독립을 보장할 방안이 제대로 제시되지 않고 있다. 자칫하면 권력 예속기관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또 경찰권이 비대화되면서 권력의 남용이나 행정기관과의 업무혼선 등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자치경찰도 지방권력의 영향권에 놓이게 돼 독립성 훼손이 우려된다.이런 문제점은 내년 1월부터 실시되는 시범기간 등을 통해 보완 내지 개선돼야 할 과제다.제주도가 2006년부터 자치경찰제를 도입 운영했으나 실질적인 자치력이 행사되지 못했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됐다. 자치경찰제는 경찰의 귀속감을 높여 책임의식을 키우고 지역의 특성에 적합한 경찰 활동을 통해 양질의 치안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목적이 있다. 주민생활과 밀접한 질서와 안전을 지키는 업무를 지역 특색에 맞춰 제공할 때 주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 무늬만 자치경찰이어선 주민의 치안요구를 충족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2020-12-07

‘野 비토권’ 무력화되면 공수처는 독재의 흉기

철옹성 같던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수행과 여당의 지지율에 빨간 불이 켜졌다. 여론조사기관과 정치전문가들은 ‘부동산 정책 실패’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지난 총선 압승 이후 일방적인 독주를 거듭하고 있는 국회운영에 대한 비판도 반영됐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주당은 직진 중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를 친위대로 만들겠다는 의지도 끈질기다. ‘야당의 비토권’이 거세된 공수처는 곧바로 독재의 흉기가 될 우려가 크다. 정책실패 등으로 민심 이반이 뚜렷한데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공수처 연내 출범을 위해 공수처법 개정안을 오는 9일 본회의에서 단독처리한다는 계획이다. 김태년 원내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무슨 일이 있어도 공수처는 출범한다”고 밝혔다. 민주당 3040 초선의원들도 “더 이상 법 개정을 미룰 수 없다”며 공수처법 개정안 처리를 촉구했다.이 같은 강공 드라이브의 배경에는 지지율 하락을 해석하는 여당 나름대로의 독특한 해법이 존재한다. 전문가들의 분석이 무색하게도, 민주당은 지지율 하락을 지지부진한 공수처법안 처리와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미온적 대처에 대한 지지층의 실망감 표출이라고 읽는다. 중도층을 잃더라도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얘기다.민주당은 공수처법을 기어이 개악하겠다는 움직임이다. 우선 공수처장 추천위원회에서 위원 7명 중 6명의 동의를 얻게 돼 있는 추천후보 결정규정을 완화해 ‘야당의 비토권’을 무력화하는 내용이다. 다음으로는 공수처 수사관 자격조건에서 변호사 경력 기간을 낮추겠다는 것이다. ‘야당의 비토권’을 거세하고, 진보 법조인의 수사관 진입 문을 활짝 열겠다는 의도로 읽힌다.공수처법에 있는 유일한 중립성 보장장치인 ‘야당의 비토권’을 빼면 공수처는 곧바로 대통령의 독점 친위조직이 된다. ‘야당의 비토권’ 보장은 지난해 공수처법을 강행처리하면서 여당이 누누이 밝힌 대국민 약속이다. 그 약속을 지금 와서 뒤집는 것은 국민을 상대로 한 명백한 정치적 ‘입법 사기’에 해당한다. 여당이 민심을 오독(誤讀)하여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기어이 건너지 않기를 충고한다.

2020-12-07

언택트 송년회

한해의 마지막인 12월이면 송년회(送年會) 모임으로 바쁜 시즌이다. 송년회는 한해를 보내며 반성하는 자세를 가진다는 뜻이다. 특히 송년회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망년회(忘年會)는 지난해의 온갖 수고로웠던 일들을 잊어버리자는 뜻이다. 이는 일본식 한자어 표현이므로‘송년회’로 쓰는 것이 좋겠다.올해는 코로나19의 3차 대유행으로 전국에 비상이 걸린 상황인지라 송년회 풍속도가 언택트 송년회로 크게 바뀌고 있다. 평소 같으면 송년회로 왁자지껄하게 붐볐을 식당은 텅 비어 한산한 대신 새로운 풍속도가 생기고 있다. 바로 온라인으로 만나는 랜선 송년회가 여기저기서 열리고 있는 것. 한 취업포털이 성인남녀 1천2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71%가 올해 송년회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대신 화상회의 플랫폼을 활용한 비대면 행사는 더 활발해질 전망이다.실제로 랜선 송년회를 준비하는 기업 행사 진행직원들이 노트북 앞에 소품을 비추며 온라인 송년회 리허설을 하느라 분주하다. 집과 사무실에 흩어진 직원들은 화면을 보며 한해를 보내는 소감을 말해본다.또 다른 기업 송년회 현장에서는 노트북 앞에 있는 진행자의 지시에 따라 화면 안에서 직원 30여 명이 저마다 하고 싶은 말을 적는다.노트북 앞에 앉은 진행자가 종이를 들어 보이며“화이트 보드를 이렇게 들어주세요. 화이트 보드.”라고 주문한다. 화이트 보드에는 저마다 한해를 보내며 기업과 가정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말들이 빼곡히 적혔다. 행사대행업체 관계자에 따르면 11월부터 대면 행사는 아예 제로가 돼버렸고, 비대면 행사가 거의 100%를 채우고 있다. 코로나19로 피할 수 없었던 언택트 송년회는 올해가 마지막이 되길 기원해본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12-07

구팽(狗烹)의 시간

안재휘 논설위원중국 춘추전국시대에 구천(句踐)으로 하여금 월나라의 패권을 장악하도록 도운 범려(范8821)는 뒤늦게 구천이 의심스러워 탈출하여 제나라에 은거했다. 그는 함께 일했던 문종(文種)에게 ‘새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도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를 다 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狡5154死走狗烹’라는 글을 보내어 피신토록 충고했다. 그러나 문종은 주저하다가 반역자로 몰린 끝에 자결하고 만다. 사기(史記)의 월왕구천세가에 나오는 이야기다.‘검찰개혁’이라는 용어가 아전인수를 넘어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선동 구호로 악용되고 있다. 윤석열 검찰총장을 단칼에 잘라내려던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전격작전은 일단 실패로 돌아간 양상이다. 4일 열겠다던 징계위원회는 10일로 연기됐다. 법무차관이 징계위 개최에 반대해 돌연 사표를 내자, 청와대는 즉각 후임을 임명해 스스로 온갖 사달의 배후임을 증명했다.윤 총장의 직무배제 시점과 월성원전 경제성 평가조작 혐의 공무원들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과정이 얽히면서, 추미애 장관의 무리한 행태 이유가 유추되고 있다. 정권의 ‘검찰개혁’ 구호가 ‘검찰 장악’이나 ‘검찰 무력화’의 다른 말이었음도 속속 입증되는 중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에 숨겨둔 흑심도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이 시점에 진정한 ‘검찰개혁’의 의미를 새로 곱씹어보게 된다. 검찰의 엄정한 정치적 중립과 독립성을 보장하면서, 무리한 수사로 애먼 국민을 잡는 일을 더는 못 하도록 과도한 권한을 분산하는 게 검찰개혁의 핵심가치다. 아무도 그런 개혁에 불만이 없다. 공수처도 정치적 중립성을 전혀 의심받지 않는 기구 운영이 핵심요건이다.윤 총장 찍어내기도 잘 안 되고, 월성원전 경제성 조작사건 수사도 막지 못하자 민주당에서는 “그러니까 공수처가 필요하다”는 어불성설의 쩨쩨한 궤변들을 쏟아낸다. 직역하면 “검찰은 우리 편이 아니라는 게 드러났으니, 검찰 때려잡는 무소불위의 우리 편 핵무기 공수처가 시급하다”는, 속이 훤히 보이는 얍삽한 말 아닌가.윤석열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문재인 정권이 무참히 휘두른 ‘적폐청산’의 칼잡이였다. 이 정권은 정치보복의 칼맛 피 맛에 취하여 진정한‘제도개혁’을 실기(失期)하고 말았다. 그들은 명검(名劍) 윤석열을 검찰총장에 앉히면서 이 땅에 반대할 수 있는 자유의 씨를 말리고자 했을 것 같다는 끔찍한 짐작마저 든다. 돌이켜보니 “살아 있는 권력도 엄정하게 수사하라”던 문 대통령의 말은 그냥 멋있게 보이려고 해본 췌사(贅辭)에 불과했음이 자명하다.그들은, 사냥이 모두 끝났으므로 이제 ‘사냥개를 삶을’ 시간이라고 아우성이다. 그런데 그 사냥개가 한사코 몸부림을 치고 있다. 오죽 답답하면, 많은 국민이 그 사냥개에게서라도 희망을 찾자고 목을 빼어 기다리고 있을까. 참으로 딱한 세상이고 야릇한 나라다. 그런데 정말, 그들이 기어이 사냥개를 삶고 ‘공수처’를 만들어 휘두르면 상황이 끝이 날까.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고작 그 수준일까.

2020-12-06

여론 호도용 개각 넘어 ‘정책’을 바꿔야

문재인 대통령이 4일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을 교체하는 등 4개 부처 개각을 단행했다. 후임 장관들의 이력과 정책성향을 놓고 벌써부터 따따부따 말이 많다. 민심이 흔들리면 개각으로 면피해오던 유치한 관성에 기댄 정략적 개각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최악의 경제난과 코로나19 공포에 찌든 국민이 진정 바라는 것은 극적인 ‘정책변화’다. 똑같은 얼굴에 분칠만 새로 하는 수준으로 민심을 호도하는 개각이어서는 성공하기 어렵다. 국토교통부 장관에 변창흠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장, 행정안전부 장관에 전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 보건복지부 장관에 권덕철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원장, 여성가족부 장관에 정영애 한국여성재단 이사가 각각 내정 발표됐다. 부동산 대란에 책임이 있는 김현미 국토부 장관, ‘보궐선거는 성인지 학습 기회’ 발언으로 질타를 받은 이정옥 여성부 장관, 전문성 논란을 거듭 일으킨 박능후 복지부 장관 등의 교체 명분은 일단 납득이 간다.그러나 상식과 법치를 거스르며 윤석열 검찰총장 찍어내기로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온갖 경제 실정의 책임자인 홍남기 경제부총리, ‘아마추어 외교’라는 혹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 등의 유임에 대해서는 갸우뚱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특히 발등의 불인 부동산 문제를 해결해야 할 국토부 장관에 내정된 변창흠 LH 사장에 대해서는 그의 정책관을 문제 삼는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변창흠 후보자는 퇴임한 김 장관과 똑같은 정책견해를 그동안 밝혀왔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평가다. 그는 지난 10월 국회에서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 “어떤 정부보다 많이 빨리 세심하게 했다”고 평가한 인물이다.문제의 핵심은 이 정권의 특징인 만기친람(萬機親覽) 형태로 행사돼온 청와대의 통치행태다. 장관이 누가 되건 변할 게 뭐가 있겠느냐는 정치권과 대중의 시큰둥한 반응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정권 안보적 관점이 아니라 진정 국민을 위해 실패한 기존 정책들을 과감히 수술하고 바꾸는 일에 주저해서는 안 된다. 본질적 변화 없이 얄팍한 화장술만 갖고는 어림없을 것이다.

2020-12-06

수험생 대이동, 코로나 방역 초비상

전국에서 49만명이 참여한 수능시험이 끝났으나 이달 초부터 곧바로 면접과 논술시험 등이 대학별로 진행될 예정이어서 코로나19 방역에 또다시 비상이 걸렸다. 수능 이후가 수능 때보다 더 긴장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수험생의 전국 단위 이동이 본격 시작되면서 코로나19 확산의 새로운 고리가 형성될까 방역당국은 벌써부터 초긴장 상태다.특히 코로나19가 극성을 부리는 서울과 수도권으로 전국의 수험생이 집중 몰릴 것이 예상돼 이를 통한 감염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정부는 지난달 19일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사회적 거리두기를 격상했으나 확진자 감소 등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신규 확진자 수가 500∼600명대를 지속 유지해 방역당국은 현재의 거리유지 단계를 더 높일 것까지 검토하고 있다.서울의 확진자 수가 지난 주말을 고비로 1만명을 넘었다. 서울과 경기도의 확진자 수는 이미 대구 수준을 추월했다. 수도권에서 하루 200명 내외 신규 확진자가 매일 발생하는 상황이어서 면접과 논술을 보는 수험생의 감염 우려가 이만저만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무증상의 젊은층 감염자 수가 크게 늘어나 비상한 대책이 있어야 할 판이다. 논술고사 시행에 맞춰 대학가가 코로나 예방을 위한 준비에 나서고 있다지만 완벽한 방역은 기대키 어렵다. 대학 관계자는 이달 중순까지 수시면접과 논술고사 등이 이어져 수도권에 몰려들 수험생 규모가 무려 60만명에 달할 거라고 했다.대구와 경북도 신규 확진자 수가 수도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고 할 뿐이지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면접 등 수험생의 대이동이 예상되는 이번 주부터는 긴장감을 조금도 늦춰선 안 된다. 지역간 이동은 물론 수도권 응시자들의 왕래가 확대되는 시기란 점을 감안, 각자가 철저한 자기방역 관리에 나서야 한다. 지난 주말 이틀 동안 전국에서는 1천명이 넘는 신규 확진자가 발생했다. 보건당국은 지금의 추세라면 하루 1천명의 신규 확진자 발생도 가능하다고 경고했다. 수험생, 학부모 학교당국, 국민 모두가 최고의 긴장감으로 지금의 위기를 넘겨야 한다. 잘못하면 미국·유럽의 상황이 우리에게 재현될 수도 있다.

2020-12-06

수능 스트레스

코로나19라는 위태한 분위기 속에 치러진 올해 우리나라 수능은 세계가 주목했다. 프랑스는 200년의 역사를 가진 대입자격 시험인 바칼로레아를 코로나로 인해 올해는 취소했다. 제2차 세계대전 속에서도 바칼로레아 시험을 치렀던 프랑스는 한국에서의 수능 강행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다고 한다.지난 4월 총선에서 보여준 한국의 방역 능력에 이어 이번 수능 강행에 대해서도 세계 각국은 매우 놀랍고 진지한 모습으로 지켜볼 것 같다.‘프랑스인이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에 의해 자격시험을 포기했던 것과는 달리 한국의 수능 강행은 수능이 우리 사회에 차지하는 비중과 의미가 그만큼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포항에서 지진이 발생하고 난 다음해 포스텍의 한 연구소가 수험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포항시내 수험생은 지진 트라우마보다 수능에 대한 부담이 더 컸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예상을 넘어선 이런 반응에 대해 연구소 측은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쟁적 구도의 위력이라 분석했다.우리나라에서 실시되는 수능은 일종의 성인이 되는 관문적 역할을 한다. 12년간의 초중고 학업 성과를 최종 평가받는 시험인데다 이 성적을 바탕으로 대학 진학의 길이 갈라진다. 또 대학과 전공의 선택에 따라 취업의 길도 달라지는 것이다.그래서 학창시절에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목표다. 학생은 물론 수험생의 부모도 이런 목표에 올인한다.수능을 앞둔 수험생의 스트레스야 더이상 설명할 것도 없다. 특히 올해는 수험생이 코로나와 함께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수능을 마친 수험생의 스트레스를 덜어줄 가정과 학교에서의 관심과 애정이 절실한 시기다. /우정구(논설위원)

2020-12-06

역사의 현장 포항공항의 잠재력

1994년 국제민간항공기구(ICAO)는 매년 12월 7일을 ‘국제 민간 항공의 날’로 제정하였다. 지구촌에 있는 여러 나라의 교역량이 늘어나면서 일부 여객선이나 대륙횡단 열차를 제외하면 거의 유일한 여객 이동이 항공기로 이루어져 민간 항공의 중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국제여객이 급증하면서 1988년 2월 아시아나항공이 출범하였지만 최근 경영악화로 매각 위기에 놓였다. 대형항공사의 경영위기가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다. 국내 국제를 불문하고 최소한의 항공서비스만 제공함으로써 요금을 낮춘 저가 항공사(LLC)들이 급성장하는 가운데 코로나19와 같은 예기치 않았던 충격으로 경영악화가 가속되었기 때문일 것이다.이처럼 항공사들의 치열한 경쟁과 맞물려 공항도 함께 영향을 받고 있고 그와 더불어 각 지역 공항 주변 산업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포항공항도 예외는 아니다. 사실 포항공항에서 여객이 감소하고 사정이 나빠지기 시작한 최초의 충격은 신경주역에서 KTX가 개통된 때부터였다. 그때부터 포항과 경주 일원의 주민들은 수도권으로 이동할 때 비행기보다는 KTX를 선호하게 되었다. 물론 당시 항공사가 제공하는 비행편 시간대도 새벽 출발 저녁 도착과 같이 당일로 서울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올 정도로 편리한 시간대가 아니었던 점도 한몫했을 것이다. 신경주역 개통 이후 공항 이용객과 화물 감소율은 그 직전보다 월평균 30%에서 40% 정도씩 감소 추세를 보였다. 당연히 공항 주변의 마트 등 지역 상권의 매출도 비슷한 비율로 감소하여 주변 상권에 충격을 주었다. 그 이후 KTX포항 노선이 개통되었어도 포항공항의 승객감소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단지 KTX신경주역을 이용하던 포항 시민들이 KTX포항역으로 옮겨갔을 뿐이다.이처럼 포항공항이 어려워진 데는 다양한 원인이 있다. 하지만 국내 여러 공항 가운데 포항공항만큼 대한민국에 큰 업적을 남긴 역사적 이야기를 지닌 공항은 없다. 포항공항을 굳이 ‘공항’이라는 본연의 목적으로만 보지 않고 공간지리 자체가 지닌 역사를 좀 더 알려 탑승객이 아닌 일반 관광객들이 역사관광의 현장으로 찾아오도록 하는 방안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 포항공항이 지닌 역사적 스토리텔링은 포항만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무형자산이기 때문이다.포항에 공항(비행장)이 들어선 지도 77년이 된다. 비행장 건설 논의는 1935년 10월 9일 열렸던 포항읍 발전좌담회에서도 있었지만 정작 영일군 오천면 일월동에 비행장이 건설된 것은 1943년 9월이다. 당시 포항에는 수산물 수출 무역선이 드나들던 무역항이 있었고 포항역에서는 서울, 만주까지 물류가 이동할 수 있었다. 자동차로도 만주까지 연결되던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일본군이 포항에 비행장을 건설한 것이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포항비행장 다시 말해 포항공항은 건설한 지 불과 2년 동안만 일본군의 관리하에 있었고 바로 미군으로 통제권이 넘어간다. 1945년 8월 15일 일본군이 항복한 이후 미군이 포항공항을 실제 접수한 날은 9월 8일이다. 이날 미군에 의해 일본군의 무장도 해제되었다. 미군이 비행장을 접수하였을 때 미군의 포항공항 식별부호는 케이쓰리(K-3)였고 위치도 포항동(POHANG-DONG, KOREA)으로 표기되었다. 전쟁 무렵에는 이미 포항시로 승격한 상태였지만, 미군이 일본에서 받은 군사지도가 1927년에 측도한 것이었고 게다가 일본군들이 영문이나 일본어를 로마자로 표기하여 미군에 넘겨줄 때 포항을 ‘포항동(pohang-dong)’이라 적었기 때문이다.6·25전쟁이 일어난 직후 김포와 수원비행장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하면서 미 제5공군이 안전하게 쓸 수 있었던 공항은 대구, 수영, 포항 세 군데뿐이었고 그마저도 제트전투기가 이용할 수 있으려면 별도 공사가 필요하였다. 마침 7월 10일 도일 제독이 기획한 한반도 최초 미군 상륙작전인 ‘포항상륙작전(Blueheart Operation)’을 맥아더 원수가 승인하게 된다. 그날 밤 즉시 미 제802 항공공병대대 A중대가 일본 오키나와에서 수륙양용함(LST)을 타고 영일만에 도착하여 장비 하역과 동시에 공사에 착수하였다. 7월 13일 4천500피트의 기존 활주로에 전투기 이착륙이 가능한 임시 활주로용 철판(PSP; Pierced Steel Plank) 포장 공사를 완료하고 7월 15일까지는 노반 정비까지 모두 완료하였다. 이에 따라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7월 18일 새벽 포항상륙작전도 성공함으로써 중부 전선 방어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때는 미군 전투기가 뜨고 내릴 수 있는 곳은 포항공항뿐이었다.포항공항은 6·25 전쟁을 계기로 전 세계에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이 전쟁에서 유엔공군이 활약한 곳이 포항공항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 8월 12일자 뉴욕타임즈(NYT)는 1면 기사 표제를 “미국 지원군 포항공항에 도착(U.S. AID REACHES POHANG AIR BASE)”이라 붙였다. 미 제5공군은 7월 30일 시점 제트 전투기 F-80을 626기, F-51을 264기 보유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일본 후쿠오카나 포항공항에서 출격하였다. 근접지원 출격 비행 대수는 7월 한 달간 4천436기, 8월 7천28기, 9월 6천219기였다. 미 극동공군은 7월부터 한 달 동안 포항공항의 전투기 F-80을 최신형인 F-51로 교체하였다. 북한군 제5사단을 막기 위해 포항공항의 미 제40 전투 요격대대 소속 F-51 전투기들은 매일 30~40회 출격하며 국군 제3사단을 항공지원하였다. 물론 포항공항에는 미군 비행기만 작전을 수행하지는 않았다. 1950년 10월 12일부터 11월 18일까지는 호주왕실공군(RAAF; Royal Australian Airforce) 소속 제77 비행대대가 포항공항에서 유엔군과 국군의 북진 작전 지원을 위한 항공지원을 맡기도 했다. 포항공항은 어느 지방공항이라도 명함을 내밀 수 없는 대한민국 영토수호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공항이었고, 6·25전쟁 당시 한반도 하늘을 지배한 유엔 공군의 보금자리였다. 사람이었다면 무공훈장을 수차례 받았을 영예로운 공항인 것이다.지금 포항공항 이용객이 줄어 항공사들이 취항을 꺼린다는 이야기에 간혹 포항에 공항이 굳이 필요하냐는 지적까지 나오곤 한다. 단지 민간 항공의 경제성만 따진다면 그리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포항공항은 수많은 지방공항의 하나가 아니다. 설령 항공기의 이착륙이 전혀 없는 텅 빈 공항이 되더라도 포항공항 자체는 나라가 존재하는 한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한반도 전역의 하늘을 책임졌던 역사의 장소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약 비행기의 발착이 줄어들어 공항운영이 힘들어진다면 아예 공항 어딘가에 포항공항 역사관을 만들어 탑승객이 아닌 일반 관광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공항 활성화 방안도 검토해볼 가치는 충분하다. 일례로 6·25 전쟁 당시 참전하였던 호주 왕실 공군을 초청하여 그들이 포항에서 체류하면서 나라를 수호해준 것을 감사하고 그들이 자신들의 선배 조종사들이 출격하였던 70년 전의 모습을 재현하는 기념 에어쇼를 매년 개최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획도 포항공항만 가능한 일이다. 일반인들까지 참여하여 당시를 회상하는 역사관광을 포항-호주 간 정기교류 관광프로그램으로 만들어도 좋을 것이다./김진홍 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

2020-12-06

납작한 성(性), 입체적인 성(性)

김현욱시인‘10대 성관계’ 관련 통계를 보면 조사에 참여한 10대 청소년 중 약 5퍼센트가 다양한 성적 경험을 했고, 또 그 5퍼센트의 청소년이 성적 경험을 시작한 평균 연령은 13.1세라는 결과가 나왔다.어른들의 생각보다 우리 청소년들의 성적 경험은 빨라지고 다양해지고 있다. 예전에 비해 학교 성교육 시수와 내용은 개선되었지만, 청소년들에게 실제적인 성교육이 되기에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요즘의 성교육은 피임 강조 교육이 되었다며 비판적인 견해도 있지만, 현실에서는 피임을 제대로 하지 않아 원치 않는 임신으로 고통을 겪는 여성도 많다고 한다. 임신을 계획한 게 아니라면 피임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야 한다.심에스더, 최은경의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는 ‘용감하게 성교육, 완벽하지 않아도 아는 것부터 솔직하게, 납작해진 성을 입체적으로, 어른도 아이도 함께 즐거운 Sex Education!’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이런 것도 모르고 여태 어떻게 살아왔나?’란 자괴감이 들었다. ‘배란’부터가 그렇다. 대부분의 여성은 몸속에 덜 자란 난자 약 30만 개에서 100만 개를 가지고 태어난다. 이 덜 자란 난자들은 2차 성징이 일어나는 사춘기 이전까지 얇은 주머니 안에 보관되었다가 사춘기가 되면 하나씩 차례대로 성숙해진다. 성숙한 난자가 때가 되면 난소의 벽을 뚫고 나오는 게 바로 배란이라고 한다. 배란은 양쪽 난소에서 번갈아 가며 이뤄진다. 배란 시기는 평균 28일이지만, 여성마다 다르다. 매달 하지 않을 수도 있고, 한 번에 난자 2개를 배란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난자가 난소 옆 나팔관으로 ‘산책’을 하다가 정자를 만나 수정이 되면 ‘임신’, 포궁벽이 허물어질 때 질을 통해 몸 밖으로 나오면 ‘생리’라고 한다.저자는 배빗 콜의 그림책 ‘엄마가 알을 낳았대’라는 그림책을 통해 “엄마 배에 들어간 씨앗들은 달리기 시합을 해요. 일등 한 씨앗이 알을 차지해요. 그러고 나서 아주 조그만 아기가 되는 거예요.”와 같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성교육을 권장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저자가 10대 청소년과 “섹스(성행위, 성관계)는 뭘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섹스일까?”라는 대화를 나눈 경험이다. 청소년들은 성기 결합 중심, 남성 중심의 대답이 많았다. 그러면서 저자는, “아이들과 섹스에 관해 이야기할 때 ‘성기 결합’뿐만 아니라 사람에 따라 섹스를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을 꼭 알려주세요. 육체적인 행위뿐 아니라 섹스를 대하는 우리의 생각과 자세도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고학년 담임을 주로 맡다 보니 여학생들의 생리, 생리통과 관련된 경험이 많다. 예전에는 여학생들이 생리대를 가방 깊숙이 숨겨 다녔지만, 요즘은 예쁜 꽃무늬 손가방에 넣어 다니며 남의 시선에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본다. 심에스더, 최은경의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는 납작하게 눌린 ‘성’을, 입체적인 ‘성’으로 일으켜 세워 다각적으로 바라볼 것을 권한다. 너무 솔직하고 용감해서 어떤 부분에서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기도 한다. 그만큼 내 성의식도 납작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2020-12-06

잊혀져가는 국민교육헌장

윤영대수필가12월 5일, 다이어리를 넘기다가 ‘아, 오늘이 국민교육헌장 기념일이지.’하고 자세히 들여봤으나 그곳에는 무역의 날, 자원봉사자의 날이라는 표시뿐이다. 알아보니 달력에서 사라진 지 벌써 17년이나 되었다고 한다.국민교육헌장은 1968년 6월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교육의 장기적이고 건전한 방향의 정립과 시민 생활의 건전한 윤리 및 가치관의 확립’을 통한 국가발전 방안의 추진을 지시하여 사회 각계각층의 전문가로 위원회를 만들고 수차례의 회의를 거쳐 12월 5일 선포한 교육지표이다. 당시 자유중국의 장제스 총통은 “기선을 빼앗겼다.”며 부러워했다고 한다.‘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400여 자의 이 교육장전(敎育章典)은 가정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의 근본 지표이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깨닫고 우리 민족의 전통과 유산을 계승 발전시키고 민족문화를 창조하여 세계 공영의 길로 나아가자는 각오는 7,80년대 학창시절에 외우기도 한 익숙한 문구이다. 학문과 기술을 익혀 자신을 계발하자는 것도 당시 물량적 발전에 몰두하고 있는 국민의 정신을 질서와 신의 등을 기본으로 한 협동 정신으로 뭉쳐 국민의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리라. 또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반공과 민주주의를 실현하여 통일된 조국을 내다보며 새 역사를 창조하자는 취지이다.이제 돌아보니 국민교육헌장이 발표된 지 50년, 반세기가 지났다. 그동안 우리는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국가를 발전시켜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 세계 10위권의 경제선진국 대열에 들었고 수출도 연간 6천억 불을 달성했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국민교육헌장의 의미를 깨닫고 스스로 노력한 덕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1973년 이후 20여 년간 정부주관 기념일로서 학생들에게는 암기대회도 열고 스승에 대한 공경의 행사도 하며 국민의 가슴에 공감을 일으켰으나 박정희 유신정권의 반공독재 교육의 산물이요 일제시대 교육의 잔재가 남았다는 비판도 받은 듯하다. 그리하여 민주화 이후 암기 강요와 이념교육강화라는 트집을 잡아 폐지론이 대두되어 헌장은 초중고 교과서에서 삭제되어 버렸고 노무현 정부 때인 2003년 11월 기념일도 폐지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관련 자료를 뒤져보니 국민교육헌장에 대한 색다른 해석들도 많다. 태어날 때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나지 않았는데 국가 건설에 무조건적인 충성과 노동을 강요하며 참여시킨다는 의견도 있고 강압적 주입식 교육의 지침이라고 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헌장을 외우면서 고통을 받았다는 회고담도 있으니 이 모두가 그야말로 어이없는 생각들이다.성실한 마음과 몸으로 배우고 익혀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국가 건설에 참여함으로써 세계에 내놓아 남부럽지 않은 융성한 나라를 만드는 일에 봉사한다는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이 없이 어찌 애국애족의 길을 간다고 할 수 있는가. 자꾸만 움추려드는 교육환경 속에서 잊혀져 가는 국민교육헌장을 읽으며 다시 한번 외쳐 본다.‘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2020-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