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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디어 위너

강길수수필가영문 이메일을 받았다. 어마어마한 내용이다. 만일 사실이라면, 나는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다. 정말 행운의 소식이면 좋겠다.이메일은 영문 ‘디어 위너(Dear Winner)’로 시작되었다. ‘친애하는 당첨자’라니, 우선 기분이 좋다. 짧은 영어 실력으로 내용을 대충 살폈다. 내 이메일 주소가, 올해 자사의 이 메일 프로모션에 당첨되어 축하한단다. 당첨금이 원화로 환산하니 무려 150억 원이나 되었다. 일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전체 내용을 빨리 알기 위해, 인터넷의 영문번역기에서 전문을 우리말로 바꿔보았다. 따로 추첨에 참여하거나, 티켓을 끊을 필요는 없단다. 단지 이름, 주소, 나라,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만 답신으로 보내면 된다고 했다.기분이 이상해졌다. 번역문을 읽으며 ‘스팸’, ‘피싱’ 같은 단어들이 함께 떠올라서다. 스팸문자, 스팸메일, 보이스피싱 등 사기(詐欺)나 범죄에 이용되는 통신수단에 당했다는 보도나 사례들을 많이 보았다. 우리 집도 보이스피싱을 몇 차례 겪은 적도 있다. 그러니 은연중에 스팸이나 피싱에 대한 대응력이 생겼으리라.스팸메일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이면 좋겠다는 바람(望)도 마음 한구석에서 명지바람으로 일었다. 달콤한 유혹이다. 이율배반이다. 햄릿 증후군이기도 하겠다. 머리로는 아닌 줄 알면서도, 가슴으로는 끌리는 심리상태를 또 경험한다. 이성(理性)과 감성(感性)이 조화롭다면, 스팸메일이란 판단이 들었을 때 지웠어야 했다. 내 속물근성이 이 이메일 앞에서 또 이빨을 드러내고 말았다. 보이지 않는 속 갈등을 한다.“그래, 다른 이들도 같은 사례가 있나 찾아보자!”내부 갈등의 타협안이 제시되면서, 내 손가락은 저절로 웹사이트를 뒤지고 있었다. 작년에도, 올해도 똑같은 내용의 메일을 받았다는 사람의 글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작년 것은 금액이 올해보다 적었지만, 올해 것은 금액도 같았다. 전자는 상담을 받는 것이고, 후자는 어떤 카페에 올린 글이다. 후자의 경우, 끝에 독자들과 댓글을 주고받으면서 결국 답신 메일을 보내고 말았다는 게시자의 고백도 있었다.쓴웃음이 났다. 이성과 감성이 이런 상황에서도 싸운다.“이봐! 스팸메일이 맞잖아? 괜히 헛꿈을 꾸었어. 시간도 버리고….”“잠시 행복했잖아? 그러면 된 거지. 뭘 그리 따지고, 불평하는 거야?”처음 복권을 사던 날이 떠올랐다. 주택복권이다. 아마도 70년대 중반쯤이었을 거다. 확실한 날짜를 알려고 일기장을 한참 뒤졌으나, 못 찾았다. 아마 회식을 마치고, 얼큰한 기분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으리라. 회식 중 동료들과 복권에 대해 갑론을박하다가 ‘복권은 바로 행운 부르기’란 말에 이끌려, 난생처음 100원짜리 주택복권 두 장을 손에 쥔 날이다. 술기운에, ‘이 복권으로 내 집을 살 것이다!’라며 의기양양하게 발길을 뗐었다. 조금 걷다가 어느 순간, ‘나도 그만 사행성 탁류에 휩쓸리고 말았구나!’ 하고 깨달으며, 하룻저녁에 천국과 지옥을 오갔던 기억이다. ‘근면, 자조, 협동’의 역동적 사회 구조 안에서, 그 시절 내 눈엔 복권은 사행성의 징표일 뿐이었다.세월이 많이 흘렀다. 이젠 복권을 사행성 징표나, 노름같이 보는 시각은 사라졌다. 어떤 지인은 투자라며, 봉급을 타면 내 기준엔 제법 많은 일정 금액의 복권을 샀다. 문제는 ‘디어 위너’처럼 공적 복권을 사칭한 스팸메일 등, 사기를 치기 위한 정보가 횡행한다는 사실이다. 4차 산업 시대니, 5지(G)시대니 하며 시시각각 달라지는 사회의 정보기술 환경에 따라가기도 힘든 현대인들이다. 그들이 스팸이나 피싱 같은 사기에 시달리는 상황에 놓인 것은 대체 무얼 말해주는 걸까.“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란 말이 있다. 인간과 생명은 아니, 만물은 이 말처럼 살고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우주 안 모든 존재의 존립 양상이 어찌 보면, ‘죽기를 각오하고, 모든 힘을 다하여 살고 또, 존재하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음을 다잡아야, ‘친애하는 당첨자’처럼 달콤한 사기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진정한 ‘디어 위너’만 있는 세상이 그립다.

2020-09-09

짧은 만남 긴 우정

우리가 만난 세월이 얼만데! 상대와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한가를 증명해보이고 싶을 때 흔히 하는 말입니다. 오랜 기간 만나왔으니 그 우정의 깊이는 재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시간과 우정이 꼭 비례하는 건 아닙니다. 학창 시절 친구가 아무리 좋다 해도 서로 도움 주는 이웃만 못하고, 직장 동료와 종일토록 붙어 있다고 해도 마음 먼저 닿는 먼 친구만 못합니다. 한마디로 때와 장소 등 물리적 요인은 관계를 규정하는 절대적인 잣대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래 알아왔다고 우정이 깊은 것도, 자주 만나는 사이라고 절친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공감보다 나은 친구는 없고 마음보다 앞선 우정은 없을 테니까요. 진심이 통할 때 우정은 지속됩니다.온라인에서 알게 된 친구들이 있습니다. 다섯을 묶은 출발점은 ‘책’입니다. 어느 날부터 자연스레 의기투합하여 비정기적으로 만남을 가져왔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모이기도 힘들 텐데 다섯 친구들은 운명처럼 전국에 골고루 흩어져 삽니다. 대전, 청주, 광주, 포항, 부산. 각자 뚜렷한 개성을 지녀 한 번만 만나도 어떤 성격인지 알 정도입니다.좋은 날 불쑥 각자 기차를 타고 청주나 부산 또는 경주나 대전 그리고 광주 어디쯤에 모여 점심을 함께 하며 수다를 떱니다. 읽은 책을 화제 삼고 가진 책을 나누며, 잘 쓴 작가를 부러워하고 읽고 싶은 책 목록을 공유하기도 합니다. 물론 고상한 척 책 이야기만 하는 건 아닙니다. 자식 걱정이나 자랑도 하고, 남편 흉이나 장점도 나눕니다. 각자의 회한도 돌이켜보고 앞일을 가늠해보기도 합니다. 주어진 하루가 짧다는 걸 알아서일까요. 오래 만나온 사람들이 나누는 것 이상으로 인간사 희로애락을 그토록 짧은 시간에 술술 풀어내곤 합니다.이 매혹적인 모임은 한 친구 덕에 가능했습니다. 어떤 방해꾼도 없는 온전한 한나절의 해방구는 그녀의 기획 작품인 셈이지요. 열정과 선함이 몸에 밴 그 친구는 나머지 네 명을 적극적으로 아우르고 배려하고 챙깁니다. 우리는 그녀를 신뢰하고 따릅니다. 그녀가 마련한 멍석 마당에 자유롭게 퍼질러 앉아 수다 떨고 웃기만 하면 됩니다. 책과 사람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그녀에게 저는 ‘다정도 병’이라는 별명을 지어줬습니다. 그토록 다감하고 그토록 솔직하며 그토록 열정적인 친구를 일찍이 본 적이 없을 정도입니다.그렇게 모임을 이끌던 친구가 멀리 떠나게 되었습니다. 미국인 남편을 따라 LA로 가게 되었지요. 환송회가 있던 날 키 크고 잘생긴데다 착하기까지 한 그녀의 남편 뢉이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양손엔 다섯 점의 그림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예술을 전공한 뢉이 아내와 그 친구들을 위해 몇날 며칠 이별 선물을 준비한 것이지요. 아무도 생각지 못한 깜짝 쇼였습니다. 안타까움으로 허해진 가슴에 훈풍이 깃들었고,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됐습니다. 아쉬움과 감동이 교차하던 시간이었습니다.미국에 정착한 그녀는 새로이 간호학에 도전했습니다. 기전공인 패션과는 너무 먼 방향이라 의아했지만 그녀의 열정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지요. 공부엔 나이가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몇 년 만에 드디어 학위를 받게 됩니다. 내친 김에 대학원에도 진학해 학계에 남고 싶어 합니다. 긍정적 마인드로 앞을 향해가는 그녀의 성정을 알기에 그것 역시 어려운 고지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취미이자 특기인 공부에 매진하는 그녀가 경이롭기만 합니다.바쁜 와중에도 그녀는 친구들의 생일이나 경조사 등을 챙깁니다. 그녀를 알게 된 후, 받는 데만 익숙했지 뭔가를 제대로 줘 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녀보다 한 발 늦습니다. 이번엔 큰 맘 먹고 한 발 앞서보기로 했습니다. 간호사 면허 취득 축하겸 생일 축하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탄탄대로만 남은 그녀에게 뭔가 의미 있는 선물을 하고 싶었습니다.김살로메소설가졸업파티에서 입을 한복을 선물할까, 액세서리를 좋아하니 목걸이를 선물할까 이것저것 고민했습니다. 기왕이면 그녀가 받고 싶은 선물을 하고 싶었습니다. 몇 번의 밀당 끝에 제 진심을 안 그녀가 조심스레 말합니다. 청진기를 받고 싶답니다. 미국 간호사는 청진기가 필수랍니다. 선물 받은 청진기로 진료하는 간호사라니, 생각만 해도 멋진 일입니다. 아마존에 접속해 전문 청진기를 검색해봅니다. 그녀가 모델명까지는 끝내 말하지 않으니 화면 앞의 제 눈은 까막눈이 될 뿐입니다. 아쉽지만 차선책으로 송금이란 선물을 택했습니다. 며칠 뒤 청진기에다 제 이름을 새기고 싶다며 그녀가 연락해왔습니다. 쑥스럽지만 고집 피울 일은 아닌 것 같아 그러라고 했습니다.작년 미국에서 만나자는 약속도 놓쳤고, 올해 서울에서 재회하자는 통화도 코로나 때문에 지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기야 만남 유무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마음이 있는 한, 우정은 계속되는 것이니까요. 간호사로 멋지게 성장할 그녀를 멀리서나마 응원해봅니다.

2020-09-09

이리나를 생각하며

김규종 경북대 교수1990년 10월 3일 동서 도이칠란트가 재통일되면서 남북의 분단상황이 더욱 괴롭게 느껴지던 무렵의 이야기다. 유학의 피로와 염증이 있던 데다가, 육체적·정신적 소모가 상당해서 일상의 하중을 견디기 어려웠다. 항시적인 피로와 체중감소로 집 근처 내과를 찾았다. 50대 초반의 여의사가 반가운 얼굴로 맞이한다. 루마니아 태생이며 ‘이리나’라는 이름을 가진 의사. 체호프의 ‘세 자매’에 등장하는 막내딸 이리나가 생각났다.무슨 일로 왔는지 물으면서 차분한 눈길로 나를 바라본다. 그러면서 나의 신상 하나하나를 캐묻기 시작한다. 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는데, 상당히 어렵게 진행되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 야경꾼으로 일하고 있는데, 낮과 밤을 바꿔 살아야 하는 일이어서 감당하기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가깝게는 부모님의 건강 이력부터 멀게는 조부모에 형제들까지 소급해가면서 요모조모 캐묻는 이리나의 진지함과 성실함에 의아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1시간도 넘게 걸린 질의응답을 거쳐 그녀는 일주일 후에 자신이 지정한 병원에 가서 종합검진을 받으라고 했다. 당시 나는 유학생 신분으로 한 달에 1만5천원 정도를 의료 보험비로 지출했다. 물론 보험은 3인 가족 전원에게 적용됐다. 종합검진을 받고, 약속한 날짜에 이리나의 병원을 찾아갔다.그녀는 간단한 결론을 준비하고 있었다. 양자택일하라는 것이었다.“학위논문을 포기하거나, 야경 일을 관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조만간에 큰 사달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공부를 포기할 수는 없으니 야경 일을 내려놓는 것이 유일한 출구였다. 그러나 안양에서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시는 아버지를 생각할 때, 그것도 선택 밖의 일이었다. 골똘하게 생각하다가 이리나에게 물었다. “무슨 방도가 없을까요?” 하는 질문에 그녀가 소견서를 써주겠다고 한다.소견서의 골자는 나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야간근무를 주간근무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리나와 나의 두 번째 대면은 30분 정도로 끝났다. 소견서 덕분에 나는 야경(夜警)꾼이 아니라, ‘주경(晝警)’꾼이 될 수 있었다. 야경으로 학업을 유지하던 주변의 유학생들은 그런 나를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곤 했다. 하지만 내가 주목한 대목은 다른 곳에 있었다.환자 한 사람과 1시간 이상 의료상담을 하면서 도이칠란트 의사들은 어떻게 생계를 꾸려가는 것일까?! 그것이 정말 궁금하고 신기했다. 지금도 한국인 의사들은 환자 1인에게 5분 이상의 시간을 허여하지 않는다. 내원자가 많을수록 의료비는 올라가고 그것이 고스란히 의사 개개인의 수입으로 잡히기 때문이다. 아주 특별한 가정의나 부자들의 개인 전담의가 아닌 담에야 어떤 한국인 의사가 환자에게 1시간의 상담과 진료시간을 베풀고 있는가?!그런 도이칠란트조차 의대 입학정원을 5천명 이상 늘리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인구 천명당 의사 수가 4.6명이라는 도이칠란트의 의사들이 의대 정원확대를 반긴다고 한다. 우리는 2.3명 혹은 2.6명이라 한다. 한국의 의사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2020-09-09

교육과정과 따로 노는 대입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8월이 자신의 색을 거둬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곳이 들판이다. 녹색으로 일렁이던 들판에 노란색이 더 해지기 시작했다. 색이 익어가는 들판의 변화를 필자는 9월 들어서야 봤다. 그토록 눈을 부릅뜨고 다녔지만 왜 그동안 못 보았을까! 두 눈을 뜨고도 볼 수 없다는 것을 필자는 확실히 경험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마음의 여부라는 것도 분명히 알았다.욕심을 내려놓고 2020년을 겸손하게 마무리하는 들판을 보면서 공자의 말씀을 떠올렸다.“마음에 없으면 봐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 수가 없다.”마음먹은 대로 된다는 말처럼 마음은 모든 행동의 근원이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같은 일도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다. 심지어 마음은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만든다. 기적 또한 간절한 마음의 결과다. 용기, 용서, 사랑, 희망과 같은 말 또한 마음의 소산이다.마음은 어떤 일의 성공 여부에 있어 필요충분조건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공을 위해 자기에게 최면을 건다. 개인의 일도 이런데 하물며 회사나 국가 일은 어떤가. 리더십은 곧 지도자의 마음이다. 리더의 마음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가 속한 집단의 운명이 결정된다.그럼 우리가 속한 사회는, 또 나라는 어떤가?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아서는 리더가 마음이 없거나, 아니면 그 마음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많은 왜곡이 있음이 확실하다. 아니고서야 자연이 노(怒)할 만큼 이 나라가 어쩌면 이토록 불안할까! 지금 우리 사회 모든 리더의 공통된 마음은 탓하기다. 대통령이 앞장서서 남 탓하는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이 사회 많은 분야가 그렇듯이 교육계 또한 교육 리더의 마음이 순수하지 않다. 이 나라 교육이 특정 정치이념 재생산의 도구가 된 것 역시 정권의 하수인이 된 교육 관료들의 불순한 마음 때문이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우리 교육은 정상에서 멀어진다. 굳이 비정상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지만, 이 말은 지금의 교육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다.비정상의 대표적인 사례가 교육과정과 따로 노는 대학교 입시이다. 2015 개정 교육과정이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 기술 창조력을 갖춘 창의융합형 인재”라는 새 교육과정의 목표와 “문·이과 공통 과목”이라는 말에 희망을 가졌다.“2015 개정 교육과정은 흔히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고등학교에서 문·이과 구분 없이 공통 과목을 배우는 것이 2015 개정 교육과정의 핵심이라고 (….)”그리고 위의 기사 내용이 대학교 입시에 적용되어 문과 이과 구분 없이 학생이 자신의 적성에 맞추어 대학교 입시에 응시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나라의 비정상적인 교육계는 이런 학생들의 믿음을 배신했다. 2021 대학교 입시에서 계열 통합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학교는 얼마나 될까? 버젓이 계열을 구분해 놓은 대학교 입시 요강에 학생들의 마음은 이 나라를 떠나고 있다.

2020-09-09

울릉도 주민들의 태풍 방송에 대한 분노

김두한경북부울릉도 주민들은 태풍이 내습할 때마다 방송국의 보도때문에 분통을 터트리며 울분을 삼킨다.이번 제9호 마이삭 강타 때에도 울릉군은 500억원이 넘는 피해를 보았지만, 방송에서는 마이삭이 우리나라에 큰 피해를 주지 않고 빠져나갔다고 보도했다. 그 이유로 기상전문가의 해설까지 달았다. 하지만, 울릉도는 역대급으로 큰 피해를 보았다.이 때문에 울릉주민들은 울분을 토한다. 방송에서 동해안으로 빠져나갔다고 했으나 울릉도는 태풍 피해가 시작됐고, 태풍방송 내용 역시 예보나, 피해, 진로에 대해 아예 울릉도·독도는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같은 비난으로 이번 제10호 태풍 하이선 때에는 오후 2시에 울릉도를 통과해 북상한다고 방송을 하긴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틀렸고, 울릉도는 오히려 오후 4시에 순간 최대 파도 높이가 13.3m를 기록했다.이를 두고 SNS에서 한 누리꾼은 “방송에서 동해안으로 빠져나갔다고 할 때 울릉도는 시작이다. 그럼 울릉도와 독도는 우리나라가 아닌가? 동해 상으로 북상해 울릉도와 독도에 피해를 줄 것으로 보인다고 방송해야 하는데 동해 상으로 빠져나가 우리나라는 영향권에서 벗어났다고 방송한다”고 울분을 토했다.특히 태풍 진로 및 예보 방송을 할 때 진행자가 우리나라 지도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가려 방송을 한다. 최소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해 언급이 있어야 하지만 어느 방송국에서도 울릉도, 독도는 없다. 앞서 2003년에 울릉도에 큰 피해를 줬던 태풍 매미 당시에도 방송은 동해로 빠져나갔다고만 얘기해 울릉주민들의 분노를 쌓았다.김병수 울릉군수는 “울릉도와 독도도 대한민국의 땅이다. 태풍이 동해에 진출할 가능성이 있으면 태풍예보, 진로 등 기상특보 방송에 반드시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해 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부디 앞으로는 태풍 방송에서 울릉도와 독도의 소식을 들을 수 있길 바란다./kimdh@kbmaeil.com

2020-09-08

멈춘 시간을 보내는 법

집 밖에 나가지 않는 생활이 일상이 되었다. 최근 서울·경기 지역에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자 정부는 강화된 방역 조치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2.5단계로 격상했다. 수도권의 음식점은 오후 9시까지 운영되고 프랜차이즈형 카페나 베이커리는 포장만이 가능하다. 헬스장이나 각종 실내체육시설도 운영이 중단된 상태다. 개강 시즌이 무색하게 대학가는 고요하고 밤낮으로 북적이던 번화가 역시 텅 비었다. 이렇듯 모두가 힘을 모아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자타공인 집순이인 나 역시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을 느끼고 있으니. 분리수거를 하러 나서는 잠깐의 순간도 방역 마스크를 써야 한다. 카페에서 글을 쓰는 작업을 해왔는데 이젠 어려운 상황이 됐다. 단골 술집에 옹기종기 모여 맥주잔을 맞대던 여름밤도 다 지나갔다. 내가 이렇게 바깥 공기를 좋아했던가. 이전엔 미처 몰랐던 스스로에 대해 알아가는 요즘이다.상상해본다. 내게 시간을 멈추는 능력이 생긴다면 어떨까.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게 시간을 정지한 뒤, 나 혼자만이 움직일 수 있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할까.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이를 구할 수 있다. 얄미운 상사의 이마에 꿀밤을 날려줄 수도 있겠다. 이런 과대망상이 현실이 된대도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아무도 없는 깜깜한 거리를 걸으며 지상 마지막 생존자가 된 것만 같은 기분에 잠겨본 적 있다.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은 피곤하지만, 그들이 모두 사라진 세상은 끔찍하게 느껴진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 혼자 남겨진다는 건 자유보다 고독에 가깝다.나는 인류를 위협하는 바이러스와 맞서 싸우는 천재 과학자도, 뛰어난 운동 신경으로 좀비를 무찌르는 전사도 아니다. 시간을 멈추는 초능력자는 더더욱 아니다. 요즘 내가 하는 일이라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울리는 재난문자를 확인하며 전전긍긍하는 것뿐이다. 확진자의 동선을 파악하며 혀를 쯧쯧 차다가 익숙한 지명에 화들짝 놀란다. 내가 거기를 다녀왔던가. 과거의 발자국을 헤아리며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역시 ‘집콕’이 가장 마음 편하다. 간단한 모임 약속을 잡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당장 필요한 식료품도 배달을 이용한다. 몸이 뻐근하면 유튜브를 켜고 스트레칭을 따라 한다.이런 와중에도 눈앞의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원고 마감일은 째깍째깍 다가온다. 일주일에 두 번 화상 회의 도구인 줌(zoom)으로 학생들과의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 모니터 너머의 아이들은 풀죽은 목소리로 말한다. “선생님, 코로나 대체 언제 끝나요?” 그러게 말이다. 안타까운 마음을 누르며 몇 시간이고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속이 울렁대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힘들다고 투덜대는 것도 잠시, 일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라는 가상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이런 상황일수록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며 자신을 채근하게 된다.‘K-직장인’이란 이런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긍정적인 뜻이 아니다. 국가적 위기나 자연재해, 심지어 사람을 물어뜯는 좀비가 출몰할지라도 한국의 직장인은 꾸역꾸역 회사를 나갈 것이라는 자조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실제로 홍수 때문에 물이 허리까지 찬 상황에서 물살을 가르고 출근하는 이들의 영상은 전설처럼 내려와 인터넷을 떠돈다. 양복에 서류가방을 들고 일터를 향해 용맹하게 나아가는 모습에 감탄 아닌 감탄을 내뱉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배웠다. ‘아파도 학교에서 아파라. 몸담은 직장에 뼈를 묻어라.’ 이것은 비대면 시대에도 유효한 듯하다. 뼈를 묻어야 하는 장소만 바뀌었을 뿐이다. ‘아파도 화상 강의는 참여하고 아파라. 컴퓨터 전자파를 받으며 한 줌의 재가 되어라.’완전히 지쳤다. 휴식의 필요성을 간절하게 느끼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 나는 쉬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른으로 자라버렸다. 생전 처음 접하게 된 ‘거리 두기’의 시간이 무한정으로 길어지면서 더더욱 일과 휴식을 분리하지 못하고 있다. 안락한 소파와 침대가 이젠 더 이상 쉼의 공간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지인 중 한명은 주말의 휴식 시간을 철저하게 계획한다고 했다. 국가공무원으로 일하는 그는 자신만의 ‘휴식 루틴’을 가지고 있다. 10시까지 늦잠 자기. 2시간 운동하기. 6시까지 레고 조립하기. 30분 동안 목욕하기. 일기 쓰고 잠자리에 들기. 이렇게 자신이 생각하는 휴식을 충실하게 이행해야만 제대로 쉬었다는 느낌이 난다는 것이다. 쉬는 것마저 계획적이라니. 나도 모르게 박수가 나왔다.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K-공무원’입니다.”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사람마다 휴식의 방식은 다르니까요.” 문득 궁금해졌다. 다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모바일 게임이나 온라인 동영상의 유저가 급증했다. 대표적인 OTT 서비스인 넷플릭스의 사용자는 끊임없이 증가하며 역대 최대치를 갱신하고 있다. 나 역시 넷플릭스, 왓챠, 유튜브 프리미엄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프로그램 개발자에게 굉장히 감사해하고 있다. 동영상 서비스 없이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휴식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현재의 시간을 빠르게 흘려보낸다는 느낌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정신을 집중하여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 명상 앱을 켰다. 편안한 음악이 흐르고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불안해졌다. “당신은 무한한 우주를 홀로 떠다니고 있습니다.” 명상 안내자의 목소리에 나는 곧바로 앱을 종료했다. 집에서도 혼자 있는데 우주에서도 혼자라니. 그건 너무나 가혹하지 않은가.사실상 완벽한 고립은 불가능하다. 세계와 연결되었다는 감각이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정치·사회면은 어떤 사건이 장식하고 있는지, 연예계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한민국이 제대로 굴러가고 있는지 확인해야 안심이 된다. 인터넷 기사와 댓글, 각종 소식과 정보는 침대 위에서도 끊임없이 쏟아진다.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메인 기사부터 시작해서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트판까지 정독해야 직성이 풀린다. 모니터 너머의 이야기에 파묻혀 정작 내가 직접 눈으로 보고 피부로 경험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게 된다.이와 함께 우울감을 호소하는 ‘코로나 블루’에 빠진 이들도 생겨났다. 코로나 사태의 장기화로 나타난 현상이다. 일상생활의 제약이 커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호도, 가짜 뉴스 등으로 심각한 피로감을 호소하는 것이다.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만 같아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슬픔이나 분노 또한 삶의 원동력일 수 있다. 가장 위험한 것은 아무것도 진단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아무리 노력해도 더 나아질 것이 없다는 냉소와 허무의 늪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무기력이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에게 잡아먹히게 된다.집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며 좋은 점을 꼽아보기로 했다. 순전히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함이다. 먼저 강아지와 보낼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이 확보되었다. 나의 반려견 보리는 종일 헥헥대며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친구들과의 연락이 설레어졌다. ‘어느 날 아침, 내게 초능력이 생기면 어떨까’와 같이 쓸데없는 망상을 하는 시간도 늘어났다.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보거나 미술관에서 하루를 보내던 당연하게 존재했던 일상이 얼마나 소중했던가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코로나가 끝난 이후에는 무엇을 할까 계획하는 것도 소소한 재미다.물론 이것은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지금이야말로 극단적인 자기 암시가 필요한 때가 아닐까. 우리는 어떤 메시아적 전언을 기다린다. 시련은 모두 끝났다. 이제 우린 안전하다. 하늘에서 빛이 쏟아지고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면 좋겠다.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일시 정지’된 시간을 ‘빨리 감기’하여 낙관적인 미래로 훌쩍 건너뛰고 싶다. 이 역시 상상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현실의 상황을 응시하고 현재의 시간을 버텨야 한다. 많은 이들이 예측하듯 세상은 이전과 같을 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더 나은 내일이 올 거라고. 무엇보다 우리는 함께,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고.문은강‘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2020-09-08

바람 따라 바퀴 따라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바람을 가르며 강변을 달려가는 자전거 타는 모습을 볼 때면 생동과 활력, 낭만과 여유가 느껴져 누구라도 그렇게 타보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있다.자전거는 엔진 역할을 하는 두 다리의 힘으로 바퀴를 굴리며 두 손으로 잡은 핸들의 방향에 따라 사람이 갈 수 있는 웬만한 곳이면 타거나 끌고 갈 수 있는 유익한 이동수단이다.자전거는 타는 목적이나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가벼운 차림으로 안장에 앉아 느긋하게 동네 한 바퀴를 돌 수 있고, 가까운 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가서 볼일을 보거나 누구를 만날 수도 있다.그리고 자출(자전거 출퇴근)하면서 생활 속의 운동으로 삼을 수도 있으며, 휴일의 MTB(산악용자전거) 라이딩으로 질주와 스릴 속에 심신을 단련할 수도 있다. 또한 인천~부산까지의 국토종주나 4대강 종주 등의 원정 라이딩으로 자신의 의지를 불살라 완주의 성취감을 만끽할 수도 있다.이렇듯 자전거는 인간의 힘을 이용해 움직이는 탈것 중에선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발명품으로 사람의 두 발을 대신해 어디든지 손쉽게 누빌 수 있다. 인류가 끊임없이 진화할 수 있도록 해준 시발점이 되는 바퀴는 인류의 10대 발명품이기도 하다.필자는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께서 사주신 중고 자전거로 20여리 신작로를 등·하교 하면서 그리도 신나게 즐겨 타던 추억이 있었기 때문일까? 4~5년 전부터는 거의 매일 자전거로 출·퇴근하는가 하면, 아들과의 국토종주, 동료들과의 퇴근 라이딩, 섬 일주 라이딩 등을 즐기며 쏠쏠한 재미에 빠져들고 있다.80년대 초·중반 신입사원 시절에는 교통사정이 여의치 않아 비바람이나 눈보라를 거침없이 헤치면서까지 자전거 출퇴근을 했어야 했지만, 요즘은 건강과 여기(餘技) 삼아 여유롭게 운동하듯이 타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최근엔 주말에 두 바퀴를 굴려 친구나 지인의 집을 무작정 ‘찾아가는 라이딩’으로 자전거 타기의 또 다른 재미(?)를 누리곤 한다. 한동안 뜸했던 사람을 만나는 반가움 속에 차나 음식을 곁들여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살가운 정이 솟아나게 되고, 어떤 친구는 손수 가꾼 푸성귀를 듬뿍 뜯어 주기도 한다. 이따금씩 기계나 죽장, 청하, 경주 등지에 거처하는 분들을 만나러 가는 들길이나 농로 주위에는 민들레와 금계국, 쑥부쟁이가 환호하듯이 반겨 피고 바람의 결마저 설레어 바퀴가 저절로 굴러가는 듯하다.숨막힐듯 왕왕거리며 들려오는 봄날의 개구리 울음소리와 초록의 논에서 한가로이 날갯짓하는 왜가리, 너른 들판에서 묻어나는 싱그러운 냄새를 맡으며 바람 따라 바퀴 따라 유유히 자전거를 저어가다 보면 어느새 새로운 풍경 속의 주인공이 되는 듯하다. 근교 라이딩으로 사람을 찾아가는 것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길가의 정경을 완상하며 사람의 향기에 젖어 드는, 일종의 도락(道樂)과 교분을 나누는 일이다. 바람 따라 바퀴가 굴러갈수록 마음 따라 교유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2020-09-08

남북관계는 언제쯤 개선될 것인가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남북관계를 풀 수 있는 해법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트럼프는 11월 대선 승리만을 위해 북미 협상에는 관심이 없다. 북한 역시 개성 연락사무소 폭파 이후 미국의 눈치만 보고 있다.중국, 러시아, 일본 등도 남북문제에 관심이 없다. 우리 정부만이 남북관계의 새로운 돌파를 마련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중이다. 새로 취임한 이인영 통일부장관은 경색된 북한 관계를 풀기 위해 남북 교역을 시도했지만 유엔의 제재로 좌절됐고 금강산 개별관광과 이산가족 상봉도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 남북관계의 기본 변수가 개선되지 않기 때문이다.남북관계 개선의 기본 변수인 미국의 대북 정책은 고정 불변이다. 미국의 ‘완전한 비핵화 후 체제 보장’이라는 대북 정책 틀을 바꾸지 않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11월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다급하게 협상전술을 바꿀 가능성은 희박하다.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이 성공 가능성이 없어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트럼프는 하노이 협상 결렬 이후 미국의 보수 강경파와 군수 업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한미 워킹 그룹을 통해 미국이 남한의 대북 정책을 엄격히 통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트럼프가 11월 대선에서 승리를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미국은 대북 협상에 관심이 없다.당사자인 북한 역시 대미 협상에는 관심을 돌릴 겨를이 없다. 북한은 유엔 제재 상황 하에서 코로나19와 태풍으로 북한의 대외 노선이 더욱 경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여전히 종래의 통미봉남(通美封南)정책 틀을 견지하면서 미국 선거 결과를 예의 주시할 것이다. 대북제재로 타격을 입은 북한 경제는 수재까지 겹쳐 회생될 전망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럴 때일수록 내부 주민 통제와 결속을 다지는 것이 그들의 통상 수법이다. 그들은 핵과 미사일을 증강하면서 대미 협상의 조건만 강화할 것이다.이러한 환경에서 정부도 독자적인 대북 돌파구를 마련하기 어렵다. 지난번 청와대는 통일 안보 라인을 대폭 교체했지만 새로운 해법은 찾기 어렵다. 대북 관계의 3대 축인 국가 정보원, 통일부, 청와대 안보의 수장을 적극 협상론자로 교체되었지만 북한의 대응은 기대하기 어렵다. 앞서본 미국과 북한의 외부 변수가 우리의 정책의지 변수를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코로나 방역 위기와 만연된 반북 여론이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의지를 억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의 대북 관계 복원의 물꼬는 더욱 틀 수 없을 것이다.이처럼 내외의 환경 변수는 남북 관계의 재개를 어렵게 한다. 그러나 분단 이후 남북관계에서 보듯이 예상치 못한 ‘돌발변수’가 상황을 급변시킬 수도 있다. 트럼프가 자신의 선거 승리를 위해 조건 없이 북미 대사급 외교관계의 수립을 선언할 경우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역으로 북한이 경제 제재를 풀기 위해 조건 없이 핵시설 파기를 선언하는 경우이다. 비밀 협상에 의한 4차 남북 정상회담도 하나의 시나리오는 될 수 있다. 이러한 돌발적 변수는 현재로선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세상의 일은 상식을 뛰어 넘는 경우도 있어 기다려 볼 필요가 있다.

2020-09-08

국민의힘 당의 과제

김영태대구취재본부 부장(부국장 대우)미래통힙당이 국민의힘으로 당명을 변경하고 새 출발했다. 새 당명을 두고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와의 연대를 염두에 둔 작명이라는 말부터 당명과 관련한 여러 가지 추측이 회자됐고 당내 불만도 제기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동안의 경험상 정당명과 관련해 여당은 특별한 의미를 포함하기도 했고 야당은 선명성과 투쟁성 등을 포함하는 내용을 담는 데 주력했다.여야가 모두 당명변경 시 심혈을 기울인 데는 대통령 선거나 이슈가 되는 선거 등을 목전에 두고 이미지 쇄신에 주안점을 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야당은 주로 대여 투쟁강도를 높이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강했다. 특히 과거 민주당은 항상 ‘민주’라는 부분에 애착을 보이며 즐겨 사용했다. 이는 야당의 대여 압박카드로도 사용되는 등 야당의 역할을 다하겠다는 뜻도 포함돼 있다.현재 야당인 국민의힘 역시 국민을 우선시하고 국민의 뜻에 따르겠으니 국민의 힘을 보여달라는 주문성 명칭으로 판단된다.당명처럼 되려면 국민의힘 당 앞에는 산적한 과제가 놓여 있다. 우선 수적 우세를 통해 밀어붙이기를 강행하는 여당에 대한 견제와 실질적인 대안, 수구화되는 여당에 일침 등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나머지 야당들 역시 이 같은 부분에 매진해 창당의 목적인 정권창출을 노려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야당에는 이른바 여당의 잘못을 지적하고 실행하지 않을 때 압박하는 대여투쟁의 한 방법인 ‘저격수’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팩트를 바탕으로 여당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물증과 증거를 토대로 여당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국민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코로나19 정국인 현 정치상황에서 별다른 이슈거리가 없어 여러 저격수의 등장은 꽉막힌 정국의 돌파구가 되고 국민의 관심을 이끄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정상적인 정치 기사가 실종되다시피한 현정국에서 뜨거운 감자 역할은 물론이고 여당의 독주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현 여당이 과거 야당시절에는 이름난 여당 저격수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 당 현실은 곽상도 의원을 비롯한 몇몇 의원들만 저격수로 나서는 상황이다. 적은 의석이지만, 과거 민주당이 집요하게 한 문제를 물고 늘어지며 여당의 항복선언이나 그 직전까지 치받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정치 상황은 야당이 이런 방법을 사용할 시기임에도 적극적으로 여당을 공격하는 저격수는 많지 않다.지난 총선 당시에도 여당발 각종 악재가 발생함에도 야당은 이를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 것과 별다르지 않다. 당 비상대책위원장이나 원내대표가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언발에 오줌누기에 불과하다. 이런 방식의 반복은 곧 국민에게 식상함만 제공할뿐이고 야당발 악재가 터지면 곧바로 잊혀진다는 사실은 그간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불문가지다.현재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여당발 의혹들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동시다발적인 저격수의 등장해야 하는 무대는 이미 보기 좋게 마련돼 있다.

2020-09-08

공평무사(公平無私)

춘추시대 진나라 평공(平公)이 기황양이라는 대신에게 물었다. “남양현을 다스릴 사람으로 누가 적당한지를 추천하라”고 했다. 그러자 기황양은 그 자리에서 바로 “해호가 가장 적임자 입니다”고 말했다.두 사람 사이를 잘 아는 평공은 깜짝 놀라 “내가 알기로 두 사람 사이가 원수지간인데 어찌 그 사람을 추천하는가”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전하께서 남양현을 잘 다스릴 사람을 물으셨지 나하고 관계를 물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공평하여 사사로움이 없다는 뜻의 대공무사(大公無私)란 말의 유래에서 나온 이야기다.삼국지의 제갈량은 군기를 바로세우고 공정한 법 집행을 위해 그의 친구 동생인 마속의 목을 벤다. 눈물을 흘리며 마속의 목을 베었다는 읍참마속(泣斬馬謖)은 신상필벌을 엄정하게 집행할 때 쓰는 표현이다.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리고 있다. 또 한손에는 저울을, 다른 한손에는 칼을 쥐고 있다. 저울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겠다는 것이며 칼은 사회질서를 파괴 하는 자에 대한 제재를 의미한다. 눈을 가린 것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공평무사함을 견지하겠다는 의지의 뜻이다.공정한 사회란 자유경쟁이 허용되고, 출발과 과정에서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부패하지 않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도 마땅히 있어야 하는 사회를 말한다.추미애 법무부장관 아들의 군휴가 특혜 의혹을 둘러싼 여야간 공방이 점입가경이다. 이젠 사실에 입각한 진실 규명만이 문제를 풀 해법으로 보인다.야당의 특임검사 요청으로 실체 규명을 위한 검찰 수사가 어떻게 진행될지도 지금부터가 주목거리다. 그러나 이 사건의 핵심 포인트는 처음부터 끝까지 공평무사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0-09-08

태풍피해 ‘눈덩이’ 경북 동해안…신속 복구부터

경북 동해안을 중심으로 한 경북지방의 태풍피해가 눈덩이처럼 쌓이는 등 심각하다. 제9호 태풍 마이삭으로 재산상 큰 피해를 입은 동해안 지역에 또다시 제10호 태풍인 하이선이 덮치면서 많은 주민들이 현재 큰 고통을 감내 중이라 한다. 신속한 원상복구가 이뤄져야 일상생활이 가능할 텐데 복구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으로 보여 걱정이다.아직 정확한 피해규모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두 차례 태풍이 불어 닥치면서 동해안 일대는 제방 유실과 선박 및 어선침몰, 주택 침수, 도로유실 등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특히 경북 동해안 일대 양식장에서는 어류가 폐사하고 농가에서는 수확을 앞둔 사과 등 농작물이 침수되거나 낙과한 사례가 잇따랐다. 그 밖에도 월성원전 2·3호기가 터보발전기 고장으로 가동이 중단됐나 하면 경북도내 수만 가구에 정전이 발생해 생활에 큰 불편을 겪기도 했다.울릉도에서는 지난 3일 지나간 태풍 마이삭으로 어선이 침몰하거나 방파제가 유실되고, 선박과 일주도로, 상하수도시설 등이 부서져 약 500억원 상당의 파해가 발생했다고 한다. 경북도는 제9호 태풍 마이삭에 따른 피해가 해양·수산 분야에 집중 발생해 복구비용의 국비지원을 정부에 요청해 놓고 있다. 기상청이 10월 말까지 태풍이 추가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고 전망하니 보다 철저한 태풍 대비책 마련이 시급하다.그 이전에 두 차례 태풍으로 빚어진 태풍 피해에 대한 상세한 조사와 신속한 복구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 경북 동해안 지방은 지난해에도 태풍의 피해를 입어 영덕과 울진이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된 바 있다. 무엇보다 똑같은 재난이 같은 곳에서 매년 발생하고 있으나 제대로 대비책이 없어 재난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재난 예방은 선제적 대응이 매우 중요하다. 침수나 붕괴 우려 지역에 대한 사전 점검으로 인명이나 재산상 손실을 막아야 하는 것이다. 이번 10호 태풍은 그나마 중심부가 비껴가는 바람에 인명 피해가 크게 발생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 하겠다.지구온난화 등 기상이변으로 인한 재난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정부는 물론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도 재난극복을 위한 과학적이고 치밀한 대책이 있어야 한다. 뻔히 알면서 당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철저한 재난대책을 촉구한다.

2020-09-08

통일장관의 잇따른 돌출 발언, 노림수가 뭔가

통일정책을 주도하는 이인영 통일부 장관의 잇따른 돌출 발언이 논란이다. 그는 한미동맹을 ‘냉전동맹’이라고 규정하며 ‘평화동맹’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즉각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 장관은 또 우리에게 익숙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라는 용어에서 ‘비핵화’를 빼고 ‘평화’를 슬쩍 끼워 넣어 말했다. 그의 발언 배경을 놓고 한동안 설왕설래가 이어지는 등 또 한판 소모전이 펼쳐질 개연성이 높다. 이 장관은 며칠 전 진보 성향 기독교단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이홍정 총무와 만나 “한미 관계가 어느 시점에선 군사동맹과 냉전동맹을 탈피해서 평화동맹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미 국무부가 이 발언에 이례적으로 반박성 논평을 내놓았다. 국무부 대변인실 관계자는 미국의소리(VOA)를 통해 이 장관의 한미동맹 발언을 언급하며 “우리의 동맹과 우정은 안보 협력을 넘어선다”며 “경제, 에너지, 과학, 보건, 사이버안보, 여권 신장을 비롯해 지역과 국제적 사안 전반에 걸친 협력을 포함한다”고 말했다. 국무부 관계자는 “한미동맹은 인도·태평양 전략 지역의 안보와 안정, 번영의 핵심축”이라고 덧붙였다.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은 2020 한반도국제평화포럼(KGFP)에서 “미국 국무부가 이인영 통일부 장관을 색안경 끼고 보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두둔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인영 장관은 이날 개회사에서 “남북한이 주도하고 국제사회와 협력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평화(CVIP)의 시대를 열자”고 말해 또다시 논란을 부르고 있다.이 장관의 언급은 시진핑 중국 주석의 “한미동맹은 냉전의 유물”이라고 한 발언을 떠오르게 한다. 국민의힘 서울 송파병 당협위원장인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이 장관의 발언에 대해 “한미동맹을 해체하고 북핵을 인정하고 김정은과 평화공존하는 것이냐”고 쏘아붙였다. 통일부 장관의 동맹국 심기를 건드리는 일련의 발언 노림수는 대체 무엇인지, 걱정이다. 터무니없는 ‘평화 타령’으로 오히려 한반도 평화를 흔드는 이상한 돌출 발언은 자제돼야 한다.

2020-09-08

경북형 뉴딜, 성공적인 신공항 건설이 관건

경북도가 정부의 한국판 뉴딜정책에 대응해 경북형 뉴딜3+1 종합계획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경북형 뉴딜에는 2025년까지 총 164개 과제에 12조 3천900억원을 투자한다. 신공항 사업비를 포함하면 모두 35조3천억원이 투자되는 셈이다. 또 이로 인한 신규 일자리는 7만5천개가 새롭게 만들어지고 지역경제는 큰 활력을 얻게 될 것이라고 했다.경북형 뉴딜은 코로나19 이후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경제·사회구조에 맞춰 디지털.그린산업 분야에 집중 투자하고 현재 경북도가 보유하고 있는 과학·산업분야의 성장기반을 적극 활용한다는 계획이다.경북도가 발표한 경북형 뉴딜은 정부가 추진하는 한국판 뉴딜정책에 선도적으로 대응하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으나 추진 동력은 역시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건설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하겠다.통합 신공항은 자체 투입비용만 약 25조원 규모다. 신공항과 연계된 철도와 도로 등 SOC 구축사업과 공항 클러스트, 신도시 조성 등이 모두 포함된 사업비다.이미 지역에서는 신공항 건설을 계기로 지역단위별로 신공항을 활용한 새로운 구상안들이 선보이기 시작했다. 얼마 전 경북도는 경북 유일의 항만인 영일만항과 신공항을 연계해 경북 동해안 5개시군의 물류 및 관광산업을 진작시키겠다고 발표했다.구미시도 신공항 건설을 계기로 발 빠른 도시발전 전략을 구상하고 있다. 신공항 배후도시로서 기반을 준비하고 항공과 전자산업, 4차 산업 중심의 신사업을 발굴해 새로운 도약을 하겠다는 것이 구미시의 생각이다.통합 신공항 건설을 계기로 이른바 신공항 후방 효과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는 모양새다. 잘 알다시피 신공항 건설사업은 대구경북의 100년 대계를 위한 대형 프로젝트다. 하늘길 확보와 도시의 국제경쟁력은 비례한다. 세계 유명도시는 세계와 소통하는 하늘길을 확보하고 있을 뿐아니라 이를 잘 관리해 도시의 성장기반으로 삼았다. 세계화 된 도시치고 국제공항을 끼지 않은 곳은 없다.경북형 뉴딜의 성공을 위해서는 신공항을 어떻게 설계하고 국가 관문공항으로 업그레이드 시키느냐에 달려있다. 유럽과 미주노선은 물론 경쟁력 갖춘 경제물류공항의 기반을 충분히 갖출 수 있도록 만들어가야 한다. 행정 및 지역정치권의 지도자들이 사명감으로 풀어가야 할 과제다.

2020-09-07

초심(初心)을 잃어버린 대통령

변창구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초심이란 어떤 것인가? 초심은 순수하며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편견 없는 마음이다. 초심은 있는 그대로 보는 자세로서 비판단(non-judging)의 태도이며, 내편 네편을 구별하지 않는 열린 마음이다. 이처럼 겸손한 마음과 경청의 자세가 사실(fact)을 보는 정확한 눈을 가지게 해 준다.문 대통령의 초심은 취임사에 잘 나타나 있다.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대통령답게 ‘촛불초심’을 역설하였다.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며…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열고…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며…약속을 지키는 솔직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에 대한 기대가 컸다. 게다가 윤석열 검찰총장에게는 “살아있는 권력도 수사하라”고 했으니 대통령의 좌우명이라는 ‘정자정야(政者正也)’를 믿었다.아뿔싸! 착각이었다. 대통령의 정치적 수사(修辭)에 현혹되어 ‘권력의 속성’을 잊었던 것이다. ‘권력의 맛’을 보자 마음이 바뀌었다. 통합과 공존의 초심을 잃었으니 나라는 두 동강 났고, 아전인수(我田引水)로 해석하는 평등·공정·정의는 개념부터 다시 규정해야 할 판이다. 대통령의 당부대로 살아 있는 권력을 수사하고 있는 검찰총장을 제거하기 위해 측근감찰·조직개편·인사이동 등 온갖 압박을 가하는데도 대통령은 말이 없다. 이 정권의 특허품이 바로 ‘내로남불’과 ‘표리부동(表裏不同)’이다. 정치의 생명은 신뢰인데, “약속을 지키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초심은 허언(虛言)이 된지 오래다. 대통령은 ‘정의의 편’이 아니라 ‘권력의 편’이었다.그럼에도 올해 초 연두기자회견에서 또 다시 “임기후반에도 초심을 잃지 않겠다.”고 했다. 기막힌 위선이다. 이미 초심을 잃어버렸는데 무슨 말장난인가? 예스맨(yes man)과 ‘문빠’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민심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초심의 상실 여부는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 판단하는 것이다.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겠다는 초심이 지켜졌다면 왜 국민이 “나라가 니꺼냐”라고 항의하겠는가. 대통령이 초심을 잃었으니 주권자의 민심이 떠나는 것은 당연하다.권력자가 초심을 지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권력이 마약’임을 깨닫고 권력에 취하지 않아야하기 때문이다. 초심을 잃으면 민심을 받드는 ‘수단이 되어야 할 권력 자체가 목적’이 된다. 대통령이 정권재창출이나 퇴임 후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정략적으로 권력의 논리에 집착하면 할수록 불행의 길을 자초하게 된다. 우리의 헌정사를 보면 재임 중 권력으로 퇴임 후를 대비했던 어떤 대통령도 자신을 지켜내지는 못했다. 대통령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초심을 유지하는 것이다.‘선심초심(禪心初心)’을 쓴 스즈키 순류(鈴木俊降)는 “항상 시작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는 것이 초심을 유지하는 비법”이라고 했다. 문대통령도 2017년 5월 10일 국민에게 엄숙히 약속했던 통합과 협치, 공정과 정의, 겸손과 소통의 초심으로 돌아가서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두기 바란다.

2020-09-07

캘리포니아 홍역

캘리포니아 홍역은 백신접종 등 전염병예방을 위한 지침준수를 개인의 판단에 맡겼다가 집단감염을 통제할 수 없게 된 대표적인 사례로, 2014년 캘리포니아주 디즈니랜드를 방문했던 9명의 아이들이 홍역에 감염된 것을 시작으로, 미 전역 7개주에서 140명이 넘는 홍역 환자가 발생한 것을 가리킨다. 홍역은 95%가 예방접종을 하면 집단면역이 형성돼 퇴치할 수 있다. 집단면역은 집단의 대부분이 감염병에 대한 면역성을 가졌을 때, 감염병의 확산이 느려지거나 멈추게 됨으로써 면역성이 없는 개체가 간접적인 보호를 받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문제는 그 당시 캘리포니아주는 개인의 종교적인 신념 등을 이유로 예방접종을 거부할 수 있었다. 특히 예방접종이 자폐증을 유발한다는 의학논문이 부모들 사이에 반향을 일으키면서 접종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과학자들이 예방접종은 안전하다고 설득했지만 한번 자리잡은 대중의 믿음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고학력자들이 백신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그 결과 캘리포니아주는 예방접종 비율이 떨어져 집단면역이 붕괴되는 바람에 말 그대로 홍역을 앓았다. 그 직후 캘리포니아주는 백신의무화법을 제정, 시행중이다.역사적으로 고대 지중해의 초기 기독교는 이교도들이 병자들을 팽개치고 도망가는 와중에도 서로 도움을 줘서 교세를 확장하는 성공을 누렸다. 이후 1천여년이 넘은 현대에 이르러 전광훈 목사가 이끄는 사랑제일교회는 정부가 자제를 촉구했음에도 8월15일 반정부집회를 갖고, 국가의 방역정책과 질병관리본부의 지침에 정면도전함으로써 이 나라의 방역체계를 위협,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법원이 7일 전광훈 목사에 대한 보석취소 결정으로 140일만에 재수감토록 한 것은 자업자득, 인과응보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09-07

국민의힘, 무소속 4인 복당 전 ‘개혁’ 공감대부터

지난 4·15총선에서 공천탈락에 반발해 무소속으로 당선된 소위 ‘홍태상동(홍준표·김태호·윤상현·권성동)’으로 불리는 4인방의 국민의힘 복당 문제가 들먹거려지고 있다. 장제원 국민의힘 의원은 4명의 무소속 의원을 조속히 복당시켜 당이 이들을 유력 대권주자로 띄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내에서는 부정적인 여론도 표출되고 있다. 복당이냐 아니냐를 논하기 전에 국민의힘이 펼쳐나가고 있는 ’개혁‘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먼저다. 김종인 체제에 사뭇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장제원 국민의힘 의원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홍태상동’ 의원들의 복당 문제를 거론했다. 장 의원은 “우리 편도 포용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의 편을 설득할 수 있겠나”라며 “크게 통합하고 넓게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러나 같은 당 박수영 의원은 7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다른 의견을 피력했다. 박 의원은 “네 분이 들어오셔봐야 107석밖에 안 된다. 실질적으로 복당을 하신다고 해서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고 밝혔다.장 의원의 주장대로 무소속으로 당선된 네 명은 모두 화려한 이력을 가진 인재들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없는 상태에서 악전고투 끝에 국민이 다시 제1야당을 주목하게 된 배경과 과정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더욱이 ‘홍태상동’ 무소속 4인은 현존 당내 일부 인사들과 함께 실패한 과거 정권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장제원 의원의 주장은 접근이 잘못됐다. 장 의원 자신부터 김종인 비대위 체제에 대해서 끈질기게 딴죽을 거는 모양을 취하면서 무소속 4인을 대권 후보감들 운운하며 무조건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 순수하게 비치겠는가. 현재 국민의힘이 추구하고 있는, 그래서 수구꼴통의 이미지를 조금씩 벗겨가고 있는 ‘개혁’ 방향에 그들이 흔쾌히 공감하고 합심할 준비가 돼 있는지에 대한 확인이 먼저다. 무소속 4인방이 들어온 뒤 ‘자기 정치’한다고 이말 저말 별말 다 하면서 봉숭아학당이나 만들면 국민의힘은 끝장날 수도 있다. 민심의 거울을 정직하게 바라보면서 슬기롭게 판단하길 권한다.

2020-09-07

코로나 블루를 살아가는 방법

용기내서 고백할게요. 저는 사람 이름과 얼굴을 잘 기억해내지 못하는 편입니다. 물론 요즘처럼 마스크로 무장하고 다녀서 그런 건 아니에요. 코로나 전염병이 돌기 전 부터 그랬으니까요. 특히 첫 만남이거나 한 번에 여러 사람과 악수로 인사 한 다음에는 어김없습니다. 어디에선가 불쑥 나타나 반갑게 눈길을 건네는 분들을 제가 몰라보는 것입니다. 게다가 저는 곧장 되묻습니다. 우리 언제 만난 적이 있던가요. 저를 아시나요. 어떤 분들은 까르르 웃습니다.게다가 취약하게도 저는 얼마 전까지만해도 사람뿐 아니라 곤충도 잘 알아채지 못하는 어른이었습니다. 시각적 센스가 둔해서 일까요. 부끄럽지만(특별히 초등학생 조카에게) 서울 도심에서 자란 저에게 여치, 메뚜기, 사마귀는 모두 엇비슷한 녹색 곤충으로 보였습니다. 그 특별한 사마귀가 우리 집 밥상 위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 유명한 사마귀도 몰라보나요? 사마귀는 누가봐도 사마귀인데 어린이가 항의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때는 제가 그랬습니다.아침 메뉴로 어울리지 않지만 아무튼 그때, 저는 상추를 꼼꼼히 세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풀빛 무언가가 제 오른팔을 폴짝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사마귀 말입니다. 저는 그 곤충을 비닐봉지 안으로 생포하는데 성공한 겁니다. 숨구멍을 만들어 주고 푸른 잎사귀도 넣어주었습니다. 저는 사마귀를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긴장감. 혹시 네가 나에게 유해하지는 않을까 하는 공포에 오싹했습니다. 사마귀는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요. 퇴근하고 돌아오니 사마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신기한 노릇이지요. 한낱 곤충이 탈출하다니 말입니다. 숨구멍을 큼직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자책해 보아도 소용없었습니다. 저는 사마귀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저처럼 사마귀를 몰라볼 정도로 주변에, 이웃에게 무관심한 어른이 또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코로나 공포 시대에 제가 만난 그 특별한 사마귀에 대해서 소곤소곤 말해줄게요. 그 사마귀는요, 짝짓기를 마친 그 암컷 사마귀는요, 제 짝꿍을 대놓고 잡아먹는 못된 육식 곤충이었데요. 그리고 지금은 그 악명높은 사마귀가 짝짓기 하는 계절이래요. 어떠신가요. 과연, 사마귀 이야기가 호랑이 아저씨보다 더 무시무시하고 코로나 전염병보다 더 무섭죠? /김정희(포항 남구 효성로88)

2020-09-07

‘No man is an island’

17세기 영국 시인 존던의 얼굴 사진과 그의 시 구절 “No man is an island.”생활 속 거리두기로 전환한지 얼마 되지 않아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전 세계로 다시 재 확산되고 있다. 1948년 세계보건기구(WHO) 설립 이후 세 번째 팬데믹(Pandemic) 공포가 전 인류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나는 친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소에 참석하는 것조차 불편해지고, 고인에게 지상에서의 마지막 인사도 못하고 보내는 쓰라린 슬픔을 겪었다. 고인의 장례식에 참석을 하지 못하고 집콕하며 가슴 아파하던 중에 어떤 글귀가 나에게 왔다.“No man is an island.”(존던, John Donne)해석을 하면 “인간은 섬이 아니다. 아무도 혼자인 사람은 없다.”이다. 17세기 셰익스피어와 함께 영국 르네상스 문학을 대표하는 동시대 시인이자 성직자인 존 던이 쓴 기도문 형식의 산문에 나오는 일부이다. 존 던이 살았던 영국의 그 당시에도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존 던이 살던 마을에도 많은 사람이 전염병으로 죽었고, 그 때마다 교회에서 종을 울리게 했다. ‘종이 울렸구나, 누군가 죽었나보다.’ 그러던 어느 날 존 던마저 전염병에 걸려 병석에 누워있던 중에 그 종소리를 다시 듣게 되었고, 그 때 존 던이 느꼈던 그 종의 울림이 바로 자신일 수 있음을 깨닫고 쓰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 시의 뒷부분에 “그 어떤 이의 죽음도 나를 작아지게 한다. 왜냐면 난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있다.매스컴에서 코로나 감염으로 사망자 수치가 발표될 때마다 통계수치로만 읽었고, 그저 나와 내 가족만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가까운 지인의 죽음을 맞고 장례식장조차 가지 못해 집에서 슬픔을 온전히 껴안게 된 경험을 하고서야 타인의 죽음이 마음으로 다가왔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나는 마치 하나의 섬 같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도 섬으로 존재할 수 없고, 우리의 죽음도 예외일 수 없듯이, 그 어떤 누군가의 죽음도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지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나에게 상주는 온라인으로 장례식의 영상을 보내주었고, 생전의 모습을 영상으로 만들어 고인의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사랑하는 고인을 보냈다. 바야흐로 언택트(Untact)에서 온택드(Ontact)시대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섬처럼 있는 나를 ‘연결(on)’하여 분리된 섬이 아니라, 서로를 연결하는 군도(群島)임을 느끼게 되었다. /김예원(경북 경주시 양북면)

2020-09-07

나의 춘장일기

시작은 이랬다. 코로나19 사태로 집안에서 먹는 식사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메뉴도 바닥나 도서관에서 요리책을 빌려왔다. 근래에 만들어 먹은 적이 없는 유니 짜장이 맛있어 보이길래 춘장과 필요한 재료들을 사 왔다. 마침 돌아오는 주말에 남해 지인댁에 감자를 캐러 갈 일이 있어 거기도 들고 갈 겸 짜장을 넉넉히 만들 생각이었다. 먼저 프라이팬에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춘장을 볶기 시작했다. 다 볶아진 춘장을 기름과 분리하고 간장으로 간을 해 두었다. 이것을 냉장고에서 하룻밤 숙성시키고, 다음날 야채를 다지고 다짐육을 넣어 볶은 후 춘장과 녹말물을 섞어 짜장을 완성했는데, 춘장의 염도도 모르고 너무 많이 넣은 탓에 짜장이 너무 짜졌다. 어차피 남해에 들고 가려면 부족한 듯해서 다른 팬을 꺼내 같은 과정을 반복하되 이번에는 춘장을 적게 넣고 멸치육수 양을 적당히 조절해서 간을 싱겁게 한 후, 아까 만든 짜장과 섞어서 살짝 끓였다. 예전에 자연주의 식단으로 요리하시는 분의 요리 방법 중 짜장에 설탕대신 바나나로 단맛을 내는 것을 본 적이 있어 바나나도 숭덩숭덩 썰어 넣어주었다.이렇게 짜장을 만들고 나니 20분 거리에 사시는 시어른께도 만들어서 갖다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처음부터 양배추와 호박, 양파를 잘게 썰고 섞어서 끓이니 짜장 세 판, 아니 세 통을 만들게 되었다. 나는 밀폐용기에 세 번째 짜장을 담아 부리나케 들고 어머님께 갔다. “웬 짜장을 다 했냐?”라시며 반가이 받으시던 어머님은 맛도 안보시고, 얼마 전 가깝게 지내시는 분이 옆 동으로 이사 왔는데 좀 나눠먹어야겠다고 하시며 그 분과 그 분의 아드님까지 드시게 됐다.식단이 궁해서 사온 춘장 세 팩이 감자가 주렁주렁 달려 나오듯 뜻하지 않게 많은 사람들과 나눠 먹게 되는 기적의 밥상이 되었다. 아주 어릴 적에 놀았던 ‘쎄쎄쎄’의 노래 가사가 생각났다. “너 먹고, 나 먹고, 이 집 주고, 저 집 주고….” 행복한 유니 짜장이었다. /권현주(포항시 북구 장성동)

2020-09-07

작은 세계 속의 큰 세계

이른 아침, 안뜰은 이슬 축제로 수런거린다. 거미는 정교한 설계로 기하학적인 문양을 잣는다. 아이비 푸른 넝쿨 위로 보석들이 쏟아진다. 크리스털 목걸이 여러 겹을 둘렀다. 렌즈를 통해 들어온 보석이 영롱하다. ‘작은 세계 속의 큰 세계’, 새롭게 펼쳐진 우주가 경이롭다. 미시적 세계를 카메라에 담아 보면 우리가 인지하는 못하는 세계를 볼 수 있다. 햇빛 반짝하면 스러지고 말 ‘찰나의 꽃’이라 애틋하다.매슬로우는 일상에서 행복, 환희, 황홀, 기쁨을 느끼는 순간을 ‘절정체험’이라 했다. 강렬한 애정, 예술과의 만남, 보석 같은 글과의 만남, 여행지에서의 즐거운 체험, 대자연의 경이로움에의 매료 등을 들 수 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수시로 절정체험을 할 수 있다. 하지만 훈련이 필요하다. 많이 감탄하고, 많이 기뻐하고, 많이 축복할 일이다.삶은 목걸이를 하나 만들어놓고 여기에 진주를 하나씩 꿰는 과정이라고 한다. 사람의 눈을 넘어선 미시적 체험은 내 삶의 목걸이에 진주 한 알을 꿴다.행복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마주치는 것, 소유가 아닌 경험이라고 한다. 자연이 빚은 크리스털 목걸이 앞에서 ‘카르페 디엠’,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한다. 내게 주어진 삶을 사랑해야겠다./서정애 사진작가

2020-09-07

부끄러움이 없는 정치

강희룡 서예가조선 후기 학자이면서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이의숙 선생은 그의 저서 ‘이재집, 잡설(頤齋集, 雜說)에서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을 이루기 위하여 일생을 허비하고, 뜬구름을 잡으려고 헛된 꿈을 꾸다가 삶을 송두리째 망치는 경우를 예를 들어 기록하고 있다. 그 첫째가 한 동자가 돌을 쌓아 시냇물을 막으려했으나 무너져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마을로 달려가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하여 아이들과 풀과 넝쿨을 베어 쌓고 그 위에 흙과 모래로 둑을 쌓아 반나절 정도 되어서 겨우 시냇물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가득 차면서 또 둑이 터졌다. 둑이 터질수록 동자는 오히려 냇물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막았으나 둑은 터졌다. 이런 경우는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다음으로 하늘을 날던 연이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달려가 주우려고 하였으나 가까이 있던 아이가 먼저 주워 가지고 갔다. 이미 다른 아이가 주워간 것을 모르고 쉬지 않고 달려가다가 간신히 연이 떨어진 곳에 이르러 연을 찾았으나, 연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히려 하늘을 쳐다보면서 다시금 떨어진 연을 찾아 돌아다녔다. 이것은 한갓 헛수고만 한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아이들이 시장 놀이를 하며 놀았는데 기와 조각과 여러 가지 기물을 벌여 놓고 나뭇잎을 따서 돈과 음식을 대신하였다. 서로 오가며 팔기도 하고 사기도 하면서 웃고 떠들며 시장놀이를 하였는데 한낮이 되도록 배고픈 줄도 모른 채 집으로 돌아가지 않자 아이의 아버지가 와서 나뭇잎과 기와 조각을 내던진 다음 집으로 데려와서 밥을 먹였다. 그러자 아이는 울면서 밥을 먹지 않은 채 그 놀이를 망친 것을 몹시 원망하였다. 이런 경우는 미혹된 것이라고 정리했다.위 예시 글에는 세 바보 아이의 행동이 나온다. 쉴 새 없이 흐르는 시냇물을 막으려고 한 행동, 다른 아이가 이미 주워간 연을 찾기 위해 온종일 헤매는 행동, 소꿉놀이에만 정신이 팔려 밥 먹는 것도 잊은 행동이다. 흐르는 물을 무슨 수로 막으며, 이미 주워간 연을 무슨 수로 찾으며, 소꿉놀이에서 먹은 가짜 밥이 어찌 배를 부르게 할 수 있겠는가! 이 글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도 많은 생각을 해 보게 하며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지금 우리 사회 전반에 펴져 있는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천민자본주의와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무한이기주의를 읽어낼 수 있다. 이러한 비민주적 사회적 바탕 속에서 한국 정치의 질은 국가의 운영이나 이 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과는 거리가 멀고 권력 및 지위나 이권 획득을 위해 선동과 분탕질이 난무하는 것이다. 정부의 해괴한 정책이나 개혁이란 이름으로 패거리의 비리를 감추려는 행태나 고위직을 이용한 사회 전반에 걸친 갑질의 행태를 기저(基底)로 편견과 오만의 정치가 지금 이 나라에서 국민 앞에 부끄럼도 없이 궤변으로 포장되어 난무하고 있다.

2020-09-07

태풍을 맞으며

윤영대수필가여름의 끝, 태풍의 계절이다. 7월까지 조용하던 태풍이 1년에 3개가 한반도를 넘어가는 2년 연속 3홈런의 태풍관측 사상 드문 대기록도 세우고 있다.이들 삼형제-바비, 마이삭, 하이선은 적도 부근 태평양에서 열대성 저기압으로 태어나 ‘아기 태풍’이 되었다가 점차 열기를 끌어들여 힘을 키우고 급기야는 서북쪽으로 밀고 올라오는 강력한 폭군 회오리바람이 된 것이다.셋째 하이선은 고수온 지역에서 오래 머무른 탓에 초속 50미터가 넘는 초강력 태풍이 되었고, 북쪽에서 내려오는 찬 기운과 남쪽의 고온다습한 공기가 충돌하여 집중호우로 엄청난 강수량을 보일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다.태풍 경로예측이 나라마다 약간 다르긴 하지만 하이선은 우리나라를 관통할 거라던 당초 예상과 달리 대륙 쪽에서 발달하는 차가운 공기가 매일 조금씩 동쪽으로 밀어붙여 대한해협을 빠져 동해를 북상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포항 앞바다를 가까이 지나 지난번 마이삭으로 피해를 입은 해안지역의 피해가 컸다고 한다.둘째 태풍 마이삭이 오던 날 엄청나다는 바람의 세기를 느껴볼 생각으로 새벽까지 눈을 뜨고 아파트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한밤중 유리창을 마구 두드리고 정원의 나무들을 흔들어 대더니 갑자기 정전까지 시켜버렸다.아침에 눈을 떠보니 하늘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푸르른데 앞 정원의 나무는 뽑혀있고 베란다에는 물이 흥건하다. 문틀 아래로 솟구쳐 들어온 빗물에 나무마루가 젖고 있었다. 여태 겪어보지 못했던 일이라 서둘러 물을 퍼내고 닦으며 손 한번 안 대었던 난간과 밖 유리창도 이참에 깨끗이 씻었다. 태풍 덕분(?)에 앞뒤 베란다 청소도 깨끗이 했다.중국 대륙과 일본 섬 사이의 한반도는 태풍의 경로가 되기 쉽다. 태평양의 뜨거운 공기가 밀어 올리면 서해로 빠지면서 전라 충청의 논과 강을 넘치게 하고 대륙의 찬바람이 강해지면 동해로 밀려 경상 강원의 산과 바다를 뒤집으며 북쪽으로 올라간다. 세력이 비슷하면 한반도 중앙부를 관통하겠지. 우리 한반도는 어쩔 수 없이 이들 거대한 기류의 소용돌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우리나라는 지금 또 다른 태풍이 불어오고 있음을 느낀다. 코로나19의 먹구름 아래 정치권에서의 기압골이 마주치고 그사이에 민의(民意)의 강풍이 일어나고 있다. 서북쪽 기운의 사회주의 바람과 남동쪽 기운의 민주주의 바람이 큰 기압골을 형성하여 잔뜩 구름이 끼어있는 상태다. 희한하게도 태풍과 닮았다. 이 기압골이 세어지면 언젠가는 태풍으로 변할지도 모르겠지만 조용하게 안정되어 맑은 비나 뿌려 대지를 풍요롭게 적시고 밝은 하늘을 열어주었으면 한다.태풍은 나쁜 짓만 하는 것은 아니다. 대양의 물기를 뭉쳐와서 마른 땅의 가뭄을 해소시키고, 대기순환으로 먼지와 스모그를 씻어주기도 한다. 또 붉은 태양의 열기로 강과 바다의 색깔이 변하는 녹조와 적조 현상을 없애 수질 개선도 해주고 범지구적 에너지 순환을 돕기도 하는 등 우리 지구의 생태계를 안정되게 변화시켜주는 혜택을 주기도 한다.우리 사회에도 심각한 피해를 주는 사나운 태풍이 아니라 한 번쯤 시원하게 불어와서 깨끗하고 안정된 나라로 변화시켜주는 태풍은 없을까?

2020-09-07

불교는 실천의 종교… 영천 충효사(忠孝寺)

꿈자리가 어수선하여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태풍이 북상중이라는 소식으로 하늘빛조차 우울한데 영천댐 백리길 벚나무들은 꽃이 없어도 그 눈빛은 시리지가 않다. 나는 차이콥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의 볼륨을 좀 더 높인다. 서정적이고 차분한 음악과 터널을 이루는 나무들 사이로 비쳐드는 잔잔한 물빛까지, 완벽한 축복의 아침이다.보현산을 향해 달리던 차는 영천댐을 벗어나자 이내 충효사 앞에 이른다. 겉보기는 여느 사찰과 다름없이 평범하지만 어마어마한 크기의 오백나한상들 앞에서 무언가 색다른 분위기를 감지한다. 세계 최대 백옥 오백나한상은 석고로 빚은 듯 희디희다. 무심코 어느 나한상과 눈이 마주쳤는데 온몸이 오싹하다.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에서 생명력을 느꼈기 때문이다.석가모니 부처님의 가장 뛰어난 오백 명의 제자들, 나한의 법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신통력이 자유자재하다고 한다. 오백나한상을 참배하고 기도하면 오백 분의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과 같으며 무량공덕을 짓는다고 하는데, 도망치듯 서둘러 빠져나오고 말았다. 나를 두렵게 한 그 눈빛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커다란 12지신상을 시작으로 불교 전시장을 들어선 듯 크고 작은 조각상들이 즐비하다. 청이끼가 낀 약사여래불과 넓은 중앙에는 지장보살과 통일지장보살, 육지장보살이 우뚝하고 그 뒤를 메우고 있는 1인 1지장보살들까지, 경내는 쉴 틈을 주지 않고 볼거리를 제공한다. 한 사람이 한 분의 지장보살을 모시게 되면 그 자체만으로도 업장소멸의 공덕을 쌓으며, 스스로 지장보살처럼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우러나 보살행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조상의 영구 위패가 모셔진 안양요까지 둘러보고 나니 영험한 지장보살 도량임이 드러난다. 오늘따라 사후의 세계가 왜 이토록 낯설고 멀게만 느껴질까. 이분법적인 사고에 갇혀 죽음과 삶을 분리시킨 채 떨고 있는 스스로를 지켜본다. 영가들은 편안히 잠들어 있는데 나만 잔뜩 긴장한 채 이방인처럼 헤매고 있다.볼거리가 많을수록 온갖 상상과 억측들이 고개를 내밀고 마음은 점점 더 심산해진다. 중심전각으로 보이는 삼세보전의 법당문을 열자 과거불인 연등불, 현세불인 석가모니불, 미래불인 미륵불이 봉안되어 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 부처님을 모두 모신 전각이라 삼세보전이라 이름 붙여진 듯하다. 신중단에는 경북 유형문화재인 사룡산금정암제석탱을, 다른 면은 일천지장보살 목탱으로 이루어진 위모설법전도 여느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법당 안은 아늑하고 편안한데, 허리 통증이 오늘도 나를 시험에 들게 한다. 조심스럽게 좌복 위에 무릎을 꿇으며 절을 시작한다. 선풍기를 틀어놓아도 등줄기에서는 쉴 새 없이 땀이 흐른다. 반이라도 하겠다는 처음의 마음은 결국 백팔배로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때마침 단아한 비구니 스님이 사시 예불을 드리러 들어오신다.예불이 시작되는데 나가기도 난처하다. 혼자 예불 보실 스님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얼떨결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스님은 한 시간이 넘도록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예불을 드리는데, 예불 절차나 격식, 진언조차 모르는 내게는 인고의 시간이 따로 없다. 하지만 끝내고 나니 백팔배에서는 맛볼 수 없는 충만한 기운들이 전신을 휘감는다.인연이 닿아 회주 스님까지 뵐 수 있었다. 1993년 대웅전 하나로 시작한 충효사를 지금의 모습으로 사세를 확장시킨, 외모와 풍모가 수려하신 원로 스님이다. 덕을 갖춘 인자함과 사람을 편하게 하는 세련된 매너, 간간이 농담까지 곁들인 스님의 화술은 시간조차 잊게 만든다. ‘일체유심조’를 가슴에 새기고 21살 청춘의 나이로 생활하신다는 스님의 따뜻하고 경쾌한 미소가 곧 법문이다. 사찰 일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활동과 봉사로써 대중과 함께하는 스님은 깨달음과 해탈을 위해 수행하는 스님들과는 삶의 질감이 다르다.스님은 오백나한 중 455번째 조사에 오른 신라 성덕왕의 셋째 아들인 무상공존자의 후신이라는 현몽을 꾼 후, 곧바로 그 분의 수행처를 찾아다니며 큰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미륵보살이 나타날 때까지 석가모니불을 대행하는 지장보살을 많은 불자들이 영가천도 정도로만 떠올리는 것이 안타까워 세계적인 지장도량을 만들겠다는 큰 포부다. 떠도는 영가를 위해 기도하고 49제 지장제를 백 번이나 올렸다는 스님의 정성과 열정이 존경스럽다.조낭희 수필가사세가 기울어가는 천년고찰을 바라볼 때 밀려들던 안타까움과 달리 일촌의 역사를 가졌지만 충효사는 든든하고 희망적이다. 안이한 태도로 횟수만 거듭하는 나의 산사기행과 턱없이 부족한 불교 지식을 돌아보는 일조차 부끄러운데, 불교는 실천의 종교라는 말씀 앞에서 나는 또 한없이 작아진다. 모처럼 듣는 스님의 말씀이 단비가 되어 나를 적신다.충효사를 나와 영천댐이 보이는 곳에 잠시 차를 세운다. 구름이 가득 끼어 있으면 해가 보이지 않는다는 스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스님의 법문집을 펼쳐든다. 말씀처럼 글도 편안하다. 행간마다 꽃이 피듯 새로운 다짐과 공감대가 자리 잡는다.삶이 위태롭다고 느껴질 때 산사는 그 자체만으로 위안이 되고, 스님의 말씀은 따뜻한 섬김이 되어 나를 일으킨다.

2020-09-07

새로운 세상을 향한 구두끈을 묶으며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동쪽에서는 소련군이 폴란드를 지나 독일로 진격하고 있었으며, 남쪽과 서쪽으로 연합군의 독일 입성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패망 직전의 독일. 패망 직전의 독일을 살아가고 있는 10살 짜리 소년의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보여졌을까.1945년 독일에서 살고 있는 소년의 세상은 다양한 선택지 속에서 자신의 길을 택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그가 말을 배우고 조금씩 더듬으며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오직 하나의 길만이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그 길을 벗어난 모든 것들은 악이었으며, 그 길 위에서 꿈을 키우고 희망을 찾는 ‘영광의 길’이었다. 그리고 그 영광의 길 위에 그의 절친이자 우상인 히틀러(상상속의)가 함께 한다.그 길 위에서 갈등과 고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시각각 전달되는 전시상황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패전 직전의 모습들은 밝고 유쾌하게 그려진다. 소년의 세상은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그 시대 모습 속에서 한가로이 날고 있는 파란 나비의 모습처럼 보인다.어둡고 암울한 상황이 밝고 유쾌하게 그려지고 공포와 불안이 유머로 치환된다. 이미 알고 있는 모든 상황들을 오직 10살짜리 소년만이 동화 속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파시즘 속에서 태어나 전 생애를 파시즘 속에서 성장한 10살 짜리 소년에게 파시즘은 어떻게 자리잡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작동되며 그 소년이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영화는 파고든다.엄마 로지와 단둘이 살아가고 있는 소년의 구두끈을 묶어주는 장면이 반복된다. 10살 짜리 소년이 당연히 가져야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기초적인 지식들을 전수할 수 없는 시대를 그리고 있는 영화 속에서 이 장면은 사소하게 다가와 묵직하게 남는다.구두끈을 묶는다는 것은 소년이 성장하며 당연히 익혀야 할 가장 기초적인 지식의 상징에서 출발해 삶과 죽음의 상황을 가르는 기준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또 다른 상황의 출발점에서 다시 등장한다.갈등 없는 세상 속에서 오직 전달된 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 ‘용기’의 함량만이 존재하는 소년의 동화같은 세상에 균열이 일어난다. 우연히 집에 몰래 숨어 있던 유대인 소녀 엘사를 발견하게 되면서 소년을 지탱해오던 세계관이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가를 보여준다.머리에 뿔이 난 유대인 괴물의 대면에서 시시각각 패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 독일의 상황 속에서 상상 속 히틀러와 나누던 대화들이 미묘하게 변화하는 과정들이 이어지면서 균열된 세계관에 비로소 객관적인 시선이 자리를 잡는다. 이제 소년 앞에는 오직 한 길만이 존재하던 상황에서 또 다른 길을 갈 것인가로 고민하게 만든다.영화 ‘조조 래빗’은 시대에 의해 만들어졌던 선입견을 깨는 과정의 영화다. 파시즘 속에서 태어나 성장한 소년의 선입견이 깨어지는 과정을 엉뚱하고 재기발랄하게 보여준다. 그동안 숱하게 영화화 되었던 홀로코스트에 관한 틀에서 벗어나 또 다른 방향의 시선을 제시하고 있다.연합군과 유대인의 시선에서 독일 아이의 시선을 택한 것이 그것이다. 전쟁과 학살의 주제를 무겁고 우울하게, 그리고 사실적으로 그리고자 했던 이전의 영화와 다르게 밝고 앙증맞으며, 웃음으로 비극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소년의 세상에서 ‘용기’의 함량만이 문제가 되었던 인생에서 의문과 갈등이 자리잡는다. 괴물이며 악마였던 유대인 소녀와의 만남에서 절대적 인물이며 절대적 선의 경지에 있던 나치가 서서히 위치를 바꿔가기 시작한다.변화의 과정은 예측 가능하고, 소년의 각성과 성장은 기대치를 벗어나지 않는다. 비록 성긴 구성을 따라 예상했던 결과에 도달하고 있지만 감독의 시선이 과하지 않은 미덕을 지니고 있다.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웃음을 유발하거나 비극의 극적인 상황을 더 크게 만들 수도 있었지만 적절한 시점에서 멈춘다.감독의 의도는 10살 소년이 세상에 대해서 가졌을 심각함의 정도만큼 머문다. 모두가 알고 있는 그때의 상황에 단순하고 엉뚱한 시선으로 우리를 이끈다.조조는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 드디어 세상으로 나온 유대인 소녀의 구두끈을 묶어준다.꺠어진 세계관에 또 다른 선택지가 놓인 길로 들어갔음을 상징한다./문화기획사 엔진42 대표

2020-09-07

울진, 위기와 절망을 이겨내고 나아가다

전찬걸울진군수울진군은 새로운 변화를 위한 힘찬 첫걸음을 내딛었다.2020년은 원전의존형 경제구조의 극복의 해, 2021년은 울진방문의 해로 정하고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다시 일어서기 위한 의지를 다졌다.특히 올해는 국도 36호선 완공과 함께 왕피천케이블카, 국립해양과학관, 죽변해안스카이레일 등이 잇따라 개통하며 관광인프라도 더욱 알차게 채워지는 시기였다.원전의존형 경제구조 극복의 해, 울진의 방문의 해 선포식을 개최하고 주민들과 함께 발전방향을 논의하는 토론의 시간도 가졌다. 또한 민선7기 출범과 함께 시작된 범군민 친절운동을 더욱 확대 강화하며 손님맞이 준비에도 박차를 가했다.하지만, 희망을 안고 내디딘 첫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19의 유행으로 대한민국 전체가 혼란의 시간을 겪었고, 모든 평범한 일상이 무너져버렸다. 그 순간에 가장 중요한 건 군민들의 안전과 건강을 지키는 것이었다. 코로나19 예방과 대비를 위해 모든 행정력을 총 동원했고 그 덕분에 울진군은 코로나 환자가 발생하지 않은 청정지역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해외유학생으로 인한 확진자가 1명 발생하기는 했지만, 그 이후에는 더 이상 무너지지 않고 코로나 청정지역을 꿋꿋하게 지켜냈고 현재까지(9월 4일) 확진자는 발생하지 않았다.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와의 길고 긴 전쟁에서 현재의 울진을 지킬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군민들의 단합된 마음이었다.마스크 대란이 일어났을 때도, 해외 유학생으로 인한 울진군 첫 번째 확진자가 발생했을 때도 군민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고 안정을 찾았다. 마스크 수급이 어려운 이웃을 위해 군에서 진행한 마스크 나눔 운동에 많은 자원봉사자들의 재능나눔이 이어졌다. 또한 울진군의 확진자는 자가 격리 모범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런 군민들의 모습에 행정은 더욱 힘을 얻어 방역 활동을 비롯해 코로나19 예방에 힘을 다했다.코로나19 상황이 길어지면서 일상의 많은 것들이 멈추었고 대한민국 전체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울진도 예외는 아니었다.군민들은 착한 임대인 운동으로 힘든 세입자들과 고통을 나누었고 군에서도 지역상품권의 일환인 울진사랑카드 발급을 시작, 지역 내 소비를 활성화 시키고자 노력했지만 지역 내 소비가 늘어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그런데 7월 1일 왕피천케이블카 개장과 7월 31일 국립해양과학관이 개관하면서 휴가 시즌이 다가왔고 코로나19로부터 안전한 지역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관광객들이 조금씩 방문하기 시작했다.비대면 여행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주위 상권에는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관광 울진으로서의 가능성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는 했다.특히 올해에는 전국적으로 해수욕장 관광객이 현저하게 줄어드는 상황이었는데 죽변의 봉평과 후정해수욕장은 오히려 지난해보다 관광객이 늘어 났다. 왕피천케이블카는 하루 평균 900명 이상이 탑승했고, 해양과학관은 개관과 함께 관람 예약이 쇄도했다.코로나19 상황이 아니었다면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었겠지만 아쉬움 보다는 안전하게 마무리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더 커 방역은 물론이고 출입인원 관리도 철저히 했고, 다행히 큰 사고 없이 해수욕장을 폐장했다.겨울과 함께 시작된 코로나19와의 전쟁은 이제 두 계절을 지나 가을까지 이어지고 있다. 재난과의 오랜 싸움은 긴 어둠의 터널을 걷고 있는 느낌을 준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상황에서도 울진은 터널 끝에서 기다리고 있을 밝은 태양을 믿으며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멈추지 않고 조금씩 천천히, 늦더라도 안전하고 꼼꼼하게, 목표를 향해 한걸음 전진 중이다.2020년 울진이 꿈꾸었던 변화는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자립경제를 향한 시작, 누구나 오고 싶고 다시 찾고 싶은 울진 만들기였고 코로나19로 잠시 멈추었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울진은 오늘도 더 나은 내일을 향해 도전하며 나아간다.

2020-09-06

추희가 여무는 집

친구네 집은 보물섬이다. 방문을 열 때마다 내가 처음 보는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자개농은 언뜻 보면 무늬가 단순해 만들기 쉬워 보이나 나무에 그냥 자개를 붙여 볼록하게 완성하는 것과 다르게 나무에 미리 여러 모양으로 파내고 자개를 박아서 만든 수공이 많이 든 명품이다. 부엌 찬장에 12인조 양식기도 볼만했다. 그릇 모양도 특이하지만 12명의 재떨이까지 갖추어져 구성 자체가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하나씩 꺼내서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30년 지기 친구 친정에 오랜만에 놀러 갔다. 외벽에 조그만 타일을 붙인 그 시절엔 잘 지었다고 소문이 났을 법한 이 층 양옥집이다. 거실에는 윗 층으로 이어진 계단이 있어서, 홈드레스를 입은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우아하게 걸어 내려올 것만 같은 전형적인 부잣집이었다.방에는 내가 제일 궁금해한 물건이 놓였다. 창고 깊숙이 있던 것을 딸 친구가 보고 싶다는 말에 꺼내서 말끔하게 닦아 놓으셨다. 혜경이 아버지 딸 사랑은 예전부터 유별났다. 30년 전에도 같이 근무하던 유치원 앞까지 매일 태워다 주고 퇴근 시간에 맞춰 또 데리러 오셨다. 아버지와 데면데면한 나로서는 그런 모습이 무척 부러웠다. 딸의 말이라면 어디선가 달려오는 우주 소년 짱가처럼 든든한 아버지였다. 아니 아빠였다. 혜경인 그때도 지금도 아빠라 부른다.2층방 층고(層高)가 이렇게 낮았던가. 오래된 형광등이 한쪽 눈을 껌뻑거리자 ‘아빠~’ 하는 외마디에 금방 손봐주셨다.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시침을 떼는 형광등. 그 불빛 아래 장 하나가 놓였다. 빠알간 색깔의 자태가 곱다 못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다. 반닫이 같기도 한데 두 짝의 문을 열면 변신로봇처럼 다른 모습이 된다. 재봉틀이었다. 발판을 밟아 재봉질을 하니 손으로 돌리는 앉은뱅이 보다 편한 물건이었다고 자랑을 하셨다.오른쪽 문짝을 여니 서랍이 네 개가 있다. 조그만 서랍 안에 까마득한 이 집의 옛날이야기가 가득했다. 첫 번째 서랍엔 재봉틀에 쓰이는 북과 실, 누군가의 옷을 만들다 남은 천 조각과 크기가 다른 단추들이 가득했다. 두 번째 서랍을 여니 재봉틀의 출생 증명서가 나왔다. ‘드레스 스윙 머신’ 이라고 영어로 써진 이름과 한자로 동양 미싱 주식회사에서 만들었다고 직인이 찍혔다. 뒷면에는 품질보증서 같기도 한 말들이 영어로 적혔다. 그 밑에 또 하나의 설명서가 있었다. KS 인증마크가 붙은 ‘하이콜드냉장고’에 관한 것이었다.김순희수필가다음 서랍엔 올림푸스 카메라 뚜껑이, 뽀빠이가 그려진 동그란 딱지 하나가 나왔다. 별이 일곱 개 있고 923765 숫자까지, 그때는 그 하나하나가 친구 딱지를 이기기 위해 다 쓸모가 있던 것들이었다. 아마 혜경이 동생의 소중한 기억이 담겨있을 추억의 기록이다.빨간 몸체에 하얀 자개를 박아 넣은 재봉틀이다. 누구네 집에서도 못 본 때깔이라 탐나는 물건이었다. 하도 이뻐서 눈을 못 떼는 나와 다르게 혜경인 관심도 없어 보였다. 집안 가득 오래된 물건이 가득해서 늘 보던 거라 그런 듯하다. 저 재봉틀로 포대기를 만들어 친구를 업었다며 그 시절 이야기를 한없이 들려주시는 어머니와 딸 친구가 궁금해하는 구석구석 열어 보여주시는 아버님의 그 손길이 따뜻해서 참 좋았다.한참을 집구경을 끝내고 나오자 늦자두 한 봉지를 건네신다. 추희였다. 몇 해 전 혜경이가 자두 하나를 맛나게 먹는 모습을 보고 앞뜰에 심은 자두나무가 올해 첫 열매를 거두었다고 담아 주셨다. 따님 주시지했더니, 옆에선 혜경이는 그날 내가 배가 고팠었는지 우연히 맛있게 먹었을 뿐 신맛이 나서 싫다고 손사래를 친다. 딸의 스쳐 지나는 모습도 놓치지 않고 나무를 키워 열매를 먹이려는 부모님의 사랑이 붉게 익어서 나에게까지 당도했다.오래된 물건들도 새것처럼 닦으며 사는 친구네 부모님이 저 이층집에 오래 머물길 기도했다. 주신 자두를 한 입 깨무니 달콤한 향이 입속 가득 퍼진다.

2020-09-06

의사를 다치게 하면 재물손괴죄?

박화진지킴랩 기업탐정본부장전 경북지방경찰청장“정부미였습니다.”, “??? 아! 예”퇴직 후 이전에 어떤 일을 했냐는 물음에 대한 나의 답과 상대의 반응이다. 큰 장애 없이 공무원으로 일했다는 의사소통이 이뤄진다.70년대 단군 이래 숙업이었던 식량자급의 기치를 내걸고 정부가 야심차게 개발한 다수확 품종 쌀, 통일벼라는 이름을 가진 작물이 있었다. 일반벼보다 수확량이 40% 더 많아서 정부에서 강권하다시피 재배하게 했다. 쌀을 주식으로 삼는 국민들의 식량난 해결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정부에서 재배를 권장했기에 정부미라 불렸다. 절대 양은 늘었는데 질적인 문제까지 해결되지 않은 모양이다. 찰기가 적어 맛이 떨어지고 볏짚도 사료용과 연료용 이외에는 큰 쓸모가 없었다고 한다. 배고픔 벗어나기엔 성공했지만 농민들의 재배 선호도는 낮았다. ‘정부미’는 기초수급자 및 재난 구호목적과 국공립시설 등에 제공되는 비축재다. 통일벼가 정부미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다. 곡물 과잉 공급의 원흉이 되어 통일벼는 생을 마감했다.정부미는 공무원들을 부르는 또 다른 유품으로 살아남았다. 일반인보다 못하다는 의미도 내포돼 있는 공무원들의 자기 비하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공직자도 사람인데 정부의 비축 재물로 부르는 것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공무원 스스로 정부미라고 부른 경우가 왕왕 있었으니 그런 직업의 별칭에 대해 반감을 겉으로는 나타내지 않는다.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군림하려는 공무원에 대한 불만을 대리 해소시켜주는 말로써 다소 속 풀리는 느낌을 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어떤 명분으로도 사람을 재물로 부르는 것은 천부인권의 지고지순한 원리에 반하는 것이다.‘사람이 먼저다’는 수사(修辭)가 넘쳐나는 시대다. 사람이 최우선이라는 말이다 어떤 것으로도 사람을 대체할 수 없다는 함의도 갖고 있다. 최근 정부 고위 공직자가 ‘의사는 공공재’라는 말을 했다가 곤혹을 치르고 있다. 울고 싶은 데 뺨 때린 격으로 의사들의 파업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앞으로 사직당국에서는 의사에게 상해를 입히면 재물손괴죄로 단죄해야 할 것 같다. 고위 공직자의 사람에 대한 인식의 일단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어서 더욱 문제의 심각성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의료의 공공적 성격을 잘못 표현한 것이라고 특급 소방수가 투입됐지만 이미 반 이상 건물이 탄 뒤 출동한 모양새다.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어휘선택은 파장효과를 감안하면 언제나 신중함을 잃지 말아야한다. 파리와 공통점을 가진 사람이 그들일 수 있다는 우스갯말이 있다. 두 집단 모두 잘못하다가 신문지에 맞아 죽는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둘둘 말린 신문지에 맞아죽는 파리처럼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경솔한 말로 여론의 질타를 받게 되면 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운명을 맞이한다는 것이다.‘정부미는 역시 영양가 없는 거야!’라는 말에 ‘맞아! 우리는 정부 비축재지’라며 기분 좋게 맞장구치겠는가? 감정이 이성을 앞서게 되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 이치다.“신중하자 정부미여!” 일찍 품절된 선배 정부미가 꼰대질 한번 해본다.

2020-09-06

코로나 그리고 자녀 양육

이수원계명대 교수·유아교육과코로나가 확산되면서 교육기관이 문을 닫아 아이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고 아이들이 감염병에 대한 공포,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고립감, 가족들과 부대끼면서 겪는 스트레스, 불규칙한 생활 등으로 여러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WHO(세계보건기구)와 UNICEF는 코로나 상황에서 부모역할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는데,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 몇 가지를 뽑아 본 지면에서 소개하고자 한다.먼저, 불안, 공포, 두려움, 걱정은 우리 생존을 위해 필요한 감정이며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감정이다. 혹시 아이들이 감염병을 두려워 하거나 걱정한다면 공감해주자. 스트레스로 인해 아이들이 퇴행 행동을 보이더라도 부정적인 행동보다는 사소하더라도 잘한 행동에 초점을 두어 격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긍정적인 행동에 관심을 두고 칭찬한다면 놀랍게도 더 잘하려는 아이들의 노력을 보게 될 것이다.아이들이 코로나에 대해 질문을 할 때, 섣불리 불확실한 정보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 어른도 모르는 정보가 있음을 인정하고 함께 정보를 찾아보아야 한다. 온라인상에는 부정확한 정보가 많으며 오직 감염병 전문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함을 아이들에게 알려줘야 한다.집에만 머무는 시간이 많아짐에 따라 아이들이 SNS나 화상통화, 게임 등으로 친지와 친구들과 교류하는 것도 스트레스를 경감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규칙적인 하루 일과가 필요하다. 일과를 계획할 때 아이들이 자신이 할 일을 선택하도록 하자. 손 씻기도 놀이처럼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루 동안 손으로 얼굴을 자주 만지는 사람을 찾기나 노래 부르면서 손 씻기 등 방역을 놀이처럼 접근해 아이들 일상의 일부가 되도록 지원할 것을 권한다.코로나는 피부 색, 인종, 성별,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걸릴 수 있는 것이며 코로나 감염환자를 따돌리거나 증오하기 보다는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설명해 주자. 혹시 몸이 아파서 집에 머물거나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면 집에 머물거나 입원하는 것이 자신과 친구를 지킬 수 있는 안전한 방법임을 설명하고 안심시켜야 한다.무엇보다도, 부모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부모가 스트레스에 잘 대처하고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모습을 아이들이 보고 배울 수 있어야 한다. 부모도 한계를 가진 인간인지라 피곤하거나 예민해진 상황에서는 아이들을 즐겁게 대할 수 없다. 한적한 길에서 산책하거나 친구와 전화로 수다를 나누는 등 부모도 나름의 스트레스 대처법을 찾아야 한다. 아이들에게 소리치거나 화낸다면 아이들은 이야기 내용에 집중하기 보다는 큰 소리와 공포 분위기에 압도된다. 만일 여러분이 예민해진 상태라면 심호흡을 하고 5의 숫자를 세어보자. 마지막으로, 집이 좀 지저분해도, 아이들이 생각보다 게임을 많이 하여도, 하루 일과가 잘 지켜지지 않아도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고 자신에게 말해 주자.

2020-09-06

‘이간질’과 ‘선동’ 사이

안재휘논설위원조선 초 황희(黃喜) 정승이 길을 가다가 검은 소와 흰 소를 몰고 밭을 매고 있는 농부의 모습을 보았다. 문득 궁금증이 일어서 “검은 소와 흰 소 중 누가 더 일을 잘 합니까?”하고 물었다. 농부는 못 들은 체하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황희가 또다시 묻자, 농부는 소를 쉬게 해놓고 귓속말로 “검은 소가 일을 더 잘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굳이 귓속말로 하는 까닭을 물으니 농부는 “사람도 짐승도 자기 욕을 하면 기분이 나쁜 법입니다”라고 말했다.의사들이 정부의 일방적인 의료정책 추진에 반발해 벌어진 의정(醫政)갈등이 정치권의 중재로 수습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갈등의 한복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SNS에 올린 간호사 격려 글에 대한 논란이 꼬리를 길게 이어가고 있다. 대통령의 속 좁은 ‘편 가르기’ 언어라는 비난이 빗발치자, 민주당 의원들이 번갈아 나서서 옹색한 반박을 펼쳤다. 다만 그 언급들의 논리가 하도 허술해서 막 내지르는 ‘충성 발언’ 정도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문 대통령 글은 아무리 다시 읽어도 ‘순수한 격려’로 읽힐 여지가 없다. ‘의사들이 떠난 현장을 묵묵히 지키는’부터, ‘파업하는 의사들의 짐까지 떠맡아야 하는 상황’, ‘(폭염 당시 쓰러진 의료진) 대부분이 간호사들이었다’는 대목에 이르기까지 이게 정말 한 나라의 대통령이 쓴 글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야릇하다. 많은 국민이 ‘참모’들의 편협한 정보가 또 대통령의 판단을 흐리고 있구나 하고 안타까이 생각했다.그런데 수많은 비판 댓글이 달리는 등 파장이 깊어지자,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사달이 난 글을 작성한 사람이 대통령이 아니라는 변명이 등장한 것이다. 어떻게든 대통령을 보호하려고 둘러댄 말인데, 그 말들이 이번엔 대통령을 그야말로 바보로 만들어 해명도 변명도 못 하도록 궁지에 몰아넣고 만 것이다. 그동안 번번이 이슈의 중심이 됐던 SNS 글들의 저자가 따로 있다는 얘기가 돼버리는 셈이기 때문이다.직분의 엄중함과 과중한 업무를 생각한다면, 대통령의 SNS가 직접 작성됐느냐, 않았느냐는 중요한 대목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민주당 고민정 의원이 한 변명 또한 대통령을 도와주는 말이 못된다. 고 의원은 한 방송에 나와서 대통령 메시지를 놓고 “누구의 것이냐고 묻는다면 바로 답하기가 참 어려운 부분”이라며 “발신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고민정이 말한 대로 보아도 문 대통령의 SNS 글은 ‘갈라치기’ 메시지가 역력하다. 만약에 대통령의 메시지가 확증편향에 빠진 팬덤정치를 의식한, ‘선동’을 목표로 하는 ‘이간질’의 발로였다면 이는 여간 큰 문제가 아니다.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턱이 없는 들판의 소들에게조차 듣기 싫은 비교와 비난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고사(古事)의 교훈을 다시 떠올린다. 국민이 대통령에게서 듣고자 하는 말은, 모든 국민을 아우르는 진정 ‘대통령다운 말’이 아닐까 싶다.

2020-09-06

대법, 잇단 ‘코드’ 판결 논란…법치 혼란 걱정된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법외노조 처분에 대한 상고심에서 전교조 측 손을 들어준 것은 이제 우리 법조계에 ‘코드판결’이 일상화됐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보수 정권을 호위하던 사법계를 진보 성향 법조인들이 장악하면서 그동안 절대적으로 믿어왔던 ‘법치’의 기준이 크게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사법부까지 이렇게, ‘옳고 그름’을 엄정히 가리는 기관이 아니라 ‘내 편, 네편’ 나눠 다투는 궤변 전쟁터가 되는 건 결코 안 될 일이다. 대법원은 “사실상 노조 해산이나 다름없는 법외노조 통보를 법률이 아닌 시행령으로 정한 것은 노동3권을 본질적으로 제한하는 위헌”이라고 판시했다. 노동조합법 시행령 제9조2항을 위헌적 조항이라고 판단하고 원고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법외노조 통보’는 ‘법률유보사항’임에도 법률적 근거 없이 시행령에 근거해 통보한 조치가 위법하다는 논리를 동원한 것이다.이번 판결은 헌법재판소가 2015년 해직교사를 노조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교원노조법 2조를 합헌으로 판단한 것과 대척점에 있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은 근로자가 아닌 자의 가입을 허용하는 경우 ‘노동조합으로 보지 아니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헌재는 당시 이 조항에 대해 ‘8대1’의 압도적인 표결로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지난번 이재명 경기지사에 대한 대법원 결정에서도 다수 대법관의 ‘무죄’ 판결문 논리보다도 ‘유죄’ 취지의 소수 의견이 훨씬 더 법률적 합리성을 갖췄다는 평가가 나왔었다. 대법원의 판결문이 미리 정해진 결과에다가 법리를 꿰맞춘 인상을 주는 것은 큰 문제다. 이렇게 최고 법원인 대법원의 판결문마저 재판관의 성향분포에 따라 법률을 이현령비현령 방식의 독해에 종속시키는 것은 도무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1989년 참교육을 표방하고 출범한 전교조는 이제 순수한 교원노조와 거리가 멀다. 집단이기주의와 이념교육, 정치투쟁을 일삼는 집단으로 전락했다는 비판마저 받고 있다. 대법원 판결로 전교조 합법화의 길이 열리면서 교육현장의 이념·정치 투쟁이 더 거세지지는 않을지 걱정이 깊다.

2020-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