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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쁜 놈

▲ 권춘옥수필가·수미문학회 이사 연락이 안 된다.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하다. 텔레비전이 저 혼자 지껄이고 있다. 아들을 낯선 도시에 떨궈 놓고 올라와서는 관심을 의도적으로 끊었다.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사는 내 삶이 싫어 아이만큼은 자유롭게 해 주고 싶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 하는 일이 잦아졌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그냥저냥 지냈다. 다 큰 자식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침에 메시지를 남겨뒀으니 점심시간이나 그것도 아니면 퇴근하는 저녁때쯤이면 답이 오겠거니 했다. 사흘이 지났다. 메시지도 미확인인 채로 있다. 휴대폰이 고장 난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요즘 세상에 한나절이면 수리가 다 되는데 이 무슨 변괴인가. 다른 이유가 하나둘 고개를 쳐들었다. 학생들 데리고 오지 캠프라도 들어가서 불통인가. 몸이 아파 결근했는가. 아직 적응이 덜 된 차에 윗선과 마찰이 생겨 애꿎은 휴대폰을 집어 던졌는가. 계약서에 있는 부동산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아들 거처에 가 봐달라고 할까. 이럴 때를 대비해서 비상연락처 하나 만들어 둘 것을. 때늦은 후회가 나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타지에 간 지 채 한 달도 안 된 터라 그럴 겨를도 없었다. 코 구멍만 한 원룸에 관리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골 동네처럼 이웃이 있는 것도 아니다. 생각할수록 갑갑했다어떻게든 아들에게 닿아야 했다. 메일함을 열었다. 휴대폰이 안 되면 노트북에라도 파고들어야 했다. 먼지가 부옇게 쌓인 주소록에서 아이 이름표를 뽑아 편지를 썼다. 아들아. 이 메일은 가능할지 모르겠다. 네 휴대폰이 안 되니 적막강산이구나. 집 전화도 없지. 자식 찾는다고 근무하는 학교로 전화 걸기도 민망하지. 해서 생각 끝에 메일을 보낸다. 한 번쯤 전화라도 해주지. 네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나. 내일은 할 수 없이 네가 근무하는 학교로 전화를 해볼까 생각 중이다. 너에게 닿지 못하는 오늘 밤이 꽤 길겠다. 이 메일을 보는 대로 바로 연락해다오. 도장 찍듯 전송 버튼을 콱 눌렀다. 입력하신 아이디는 존재하지 않거나 오랫동안 접속하지 않은 휴면 아이디라 전송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제길.아들이 공군에서 훈련받던 시절이었다. 늦은 밤 막 잠자리에 들려는 시간에 전화벨이 울렸다. 낯선 지역 번호이어서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끊어버렸다. 베개를 툭툭 치며 머리를 누이는데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이 침대 밖으로 퉁겨졌다. 아들이 입대한 진주의 지역 번호였던 것이다. 잠든 남편 깰세라 숨죽여 거실로 나가 밤새도록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쪽으로 연락할 방도가 없다는 사실이 눈앞을 뿌옇게 만들었다. 얼마 후 휴가 나온 아들을 구석으로 데리고 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엄마 목소리 듣고 싶어 긴 줄도 마다 않고 전화를 걸었는데 다시 줄 맨 뒤쪽으로 가서 기다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막사로 돌아와 애꿎은 베개에게 화풀이 했다 한다.학교는 마침 토요일이라 전화 받는 사람이 없다. 급기야 아들의 여자 친구가 떠오르지만 주저했다. 흘려들은 기억을 쥐어 짜 근무처 이름을 알아냈다. 번호를 누르는 손끝이 떨린다. 상냥한 아가씨가 받는다. 아들의 여자 친구 이름을 대자 저쪽에서 내가 누구인지 묻는다. 갑자기 그 많던 언어들이 서로 차례를 미루며 뒷걸음질 친다. 이쪽 사정을 죄다 말했다. 아가씨의 친절함 끝에 묘한 웃음이 대롱대롱 매달려 전화기 속으로 사라졌다. 아직 이른 아침시간이다. 근무가 없는 날이라 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을 판이니 전화벨이 어서 울리기를 기다렸다. 전화번호가 떴다. 마지막 번호 네 자리가 아들의 그것과 같다. 저희는 메신저로 서로 연락 중인데, 안 그래도 어머니께 말씀드리라고 했었는데 안 했나 보군요. 혼내세요.나쁜 놈, 저 편하면 그만이지. 저 고달파야 `엄마`하고 찾을 테지. 아니 이젠 그럴 일도 없겠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제 여자 친구와 먼저 나눌 것이다. 우리도 부모 걱정시킬까 봐 쉬쉬하며 덮지 않았던가. 참을 성 없는 내가 더 나쁘다. 아들이 아픈 것이 아니라 휴대폰이 아프다니 다행이다. 아, 엄마. 무슨 일이 있으면 학교에서 집으로 연락을 하죠. 그리고 휴대폰 고치러 갈 시간은 어디 있어요.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학교에 붙들려 있는데. 오늘 겨우 시간이 나서 고쳤어요. 그리고 학생 휴대폰 빌려서 문자 넣었었는데, 안 갔어요?

2015-01-30

민들레 피는 골목

▲ 박현기수필가·동성교역 대표 마당 한 귀퉁이 시멘트 갈라진 틈새를 비집고 민들레가 피었다. 마당뿐만 아니라 사무실 앞 담벼락 밑에도 몇 송이가 무리를 지어 얼굴을 내밀었다. 봄바람 두어 번 스쳤을 뿐인데 갑자기 어디에서 날아와 저 험한 곳에 뿌리를 내렸는지 모를 일이다. 물도 없고 거름도 없어 가녀리고 왜소하다. 뿌리나 제대로 내렸는지 몇 번을 들여다본다. 저 혼자 생글거리는 모양새가 제법 꽃답지만, 도시의 시멘트 사이에서는 왠지 그 모습이 애잔하다. 그 여리고 앙증맞은 몸매 어디에 그런 강인한 생명력이 깃들어 있었는지 볼수록 감탄이 절로 나온다. 주택가도 아니고 상가지역도 아닌 어중간한 곳에 사무실이 있다. 이십여 년째, 내 건물은 아니지만 마당과 창고를 주인처럼 사용하고 있으니 세입자들이 자주 바뀌는 다른 집과는 달리, 나는 주위에서 거의 토박이 대접을 받고 있다.어느 날 사무실 앞에 고물상이 들어섰다. 원래 널찍한 마당이었는데 땅을 파고 계근대를 설치한 날부터 온갖 잡동사니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조용하던 일상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폐지와 고철을 집어 올리는 크레인 소리, 십 원이라도 더 받아가려는 노인의 원망섞인 소리, 망치로 드럼통 쪼개는 소리, 그리고 먼지…. 환경문제로 인한 이웃 간의 다툼이 남의 일인 줄 알았더니 내가 환경과를 찾아가야 할 판이었다.고물상 주인에게 이사를 가라고 몇 번의 경고를 보냈다. 그때마다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 할뿐, 신경 거슬리는 소음과 먼지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다. 주민들의 진정서를 받아 환경청에 고발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때마다 힘없이 봐달라는 소리만 되뇌인다.며칠 후 저녁때, 고물상 주인과 할머니가 맥주 몇 병을 들고 왔다.“너무 그러는 것 아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네!” 할머니의 표정에는 간절함과 울화가 교차하고 있었다. 다짜고짜 사람을 잘못 봤다며 너무 그러지 말란다. 속속들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십여 년을 이웃해 지내면서 동네의 폐지와 고물을 주워서 아픈 할아버지를 봉양하는 사정을 어렴풋이 알기에 가능하면 도와드리려 했었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 “젊은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 내가 사장을 잘못 봐도 너무 잘못 봤다” 영문 모르고 당하자니 화가 치밀었다. “도대체 뭔지 말씀이나 해 보십시오” 그제야 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맥주잔을 불쑥 내밀었다. 고물상 주인이 아들 못잖은 조카란다. 제법 큰 사업을 하다가 IMF때 부도가 난 이후로 되는 게 없었단다. 마지막 호구지책으로 벌인 일이니 이웃 간의 정으로 좀 봐달라는 거였다. 두 사람이 찾아온 이유를 알았지만, 앞으로의 쾌적한 환경을 위해서는 모르쇠로 밀어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한마디가 나를 주춤거리게 했다.“있는 사람은 다 이렇게 제 욕심만 차리나? 내가 사람을 진짜 잘못 봤다.” “할머니 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욕심만 차리는 사람은 더욱 아닙니다.”했지만, 그 말 한마디에 젠장! 나는 졌다. 이해하고 참기로 했다.`있는 사람`이란 말과`잘못 봤다`는 절규가 묘하게 나를 자극했다. 잘 보일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슬그머니 물러섰다. 바보!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일상의 풍경이 친근하게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유모차에 폐지를 싣고 오는 노인, 아이의 손을 잡고 빈병을 가져오는 새댁, 그 모든 쓰레기를 일일이 분리하는 주인, 더러 학생과 아가씨도 재활용품을 들고 와 몇 푼의 돈을 받아가는 그 모습이 잔잔한 동심원을 점점 넓혀가는 것이었다. 나는 한번이라도 그렇게 살아본 적이 있었던가?마당 귀퉁이 시멘트 틈새에도, 굳건한 담벼락 아래에도 민들레가 피었다. 유난스레 기복이 심한 올해의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작은 꽃잎을 앙증스레 하늘거리다가, 더러는 바람에 실려 떠나기도 하고, 더러는 자동차 타이어에 무참히 깔리기도 한다. 그래도 내년에 또 필 것이다. 아침에 출근을 하니 고물상 주인이 골목을 깨끗이 쓸어놓았다. 다행히 민들레를 뽑지는 않았다. 말간 골목에 노란 민들레가 아늑하고 정감어린 풍경으로 다가온다. 폐지와 고물을 들고 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민들레를 닮았다. 소음과 먼지 속에서 또 한 번의 봄날이 간다.

2015-01-23

금은화가 피었습니다

▲ 권현숙수필가 달달한 향기를 풀어놓는 봄은 황홀하다. 오뉴월이면 금은화도 사방으로 향기를 풀어낸다. 담장과 좁다란 수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빌라와 산이 이웃해있다. 1층에다 동향(東向)이라 햇살결핍에 시달릴 걸 뻔히 알면서도 선뜻 이 집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산 때문이었다. 갓 내린 커피를 들고 주방 창가로 간다. 창을 활짝 열어젖힌다. 밖에서 기웃대던 꽃향기가 냉큼 안으로 들어온다. 뻐꾸기소리도 잽싸게 따라 넘는다. 상쾌하다. 꽃향기가 커피향기에 잠시 밀려난다. 꽃무더기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시간은 향기롭다. 담장 위의 금은화는 밤새 안녕할까?“헉, 저게 뭔 일이래?”황급히 커피 잔을 내려놓고 창가로 바짝 붙어 선다. 분홍셔츠에 등산화까지 단단히 챙겨 신은 웬 낯선 할머니 한 분이 꽃을 따고 있다. 노랑나비 두 마리가 정신없이 할머니 주위를 맴돈다. 날갯짓에 황망함이 묻어난다. 저러다 꽃들이 몰살 되진 않을까 내 마음도 조급해진다. 어찌해야 하나. `뭐하는 짓이에요.` 냅다 소리라도 질러볼까. 속으로는 열두 번도 더 솟구치는 소리가 당최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소심하기 짝이 없는 내가 참 바보 같다.발만 동동 구르는 동안 할머니의 손놀림은 더 빨라지고 옆에 놓아둔 비닐봉지의 배는 점점 불러간다. 나는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창가에서 전전긍긍이다. 그새 꽃은 삼분의 일이나 사라졌다. 할머니의 소행을 몰래 폰 카메라에 담는다. 문우 H선생에게 사진과 함께 속상함을 잔뜩 담은 문자를 날린다. 답장 대신 전화가 온다. 후딱 달려 나가 할머니께 부탁드려 보란다. H선생의 말에 선바람으로 달려 나간다. 남은 꽃이라도 지켜야한다.봄이 오자 비탈에도 거짓말처럼 새싹들이 돋아났다. 겹겹이 쌓인 돌들 틈새로 띄엄띄엄 용케도 뿌리를 내린 모양이다. 가장자리를 따라 돋아난 강아지풀과 밉상덩어리 환삼덩굴마저도 예뻐 보였다. 초록이 더해지자 비탈에는 생기가 돌았다. 거기서 피어난 금은화를 처음 보았을 때 눈물 나게 반가웠다. `인동초`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진 금은화는 해를 거듭할수록 튼실하게 영역을 넓혀갔다. 뻗어 나온 덩굴은 탐스러운 꽃무더기를 이루었다. 봄이면 희고 노란 꽃들을 환하게 피워내는 모습이 그렇게 대견스러울 수가 없었다.갑작스런 인기척에 할머니가 놀라실까 헛기침을 했다. 무슨 말부터 어떻게 꺼낼까 쭈뼛대는데 할머니가 의아한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여전히 손은 멈추지 않는다. 꽃을 따지 말라고 까칠하게 말하고 싶었다. 하필이면 여기에 핀 꽃까지 꼭 그렇게 따셔야겠냐고, 눈물겹게 피어났을 꽃들이 가엽지도 않느냐고 앙칼진 목소리로 마구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할머니 앞에 서니 말은 보들보들 강아지풀 꼬리가 되어 기어 나온다.“할머니, 위험하게 어째 거기까지 올라가셨대요. 그 꽃은 따서 뭐 하시게요? 따시더라도 다 따진 마세요. 이런 곳일수록 꽃이라도 환해야지요.”생각 따로 말 따로 튀어나온다. 기가 막힌다.“꽃이 하도 탐스러워서 따보는 거유. 아까워서 말이지. 안 그래도 땡볕이 뜨거워서 그만 내려갈까 했다우.”내 표정을 읽었는지 할머니는 머쓱해하신다. 꽃차로 달여 마실지 효소를 담글지 하시며 일어서는 할머니 손에는 제법 불룩해진 비닐봉지가 들려있다. 돌담 위에서 기다시피 내려오신 할머니는 뒷골목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꽃무더기의 절반이 휑하다. 반쯤 밀다가 만 떠꺼머리 같은 몰골을 보니 내 가슴도 휑해진다.금은화는 한 덩굴에 흰색과 노란색의 꽃이 섞여 핀다. 수정이 되기 전에는 흰색, 수정이 된 후에는 노란색으로 변한다. 이미 수정 된 꽃들을 곤충들이 다시 찾아드는 헛수고를 덜어주려는 꽃의 배려란다. 동시에 효율적인 수정을 돕는 일이기도 하다니 배려가 향기만큼이나 감미롭다. 종의 번성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꽃들도 잘 아는 모양이다.위험한 비탈에다 굳이 텃밭을 만드는 사람들과 꽃을 따버린 할머니의 욕심이 씁쓸하다. 욕심이란 이기심에서 생겨난다. 이기심을 조금만 덜어내면 우리네 세상도 한결 더 향기로워질 텐데. 식어버린 커피 맛이 너무 쓰다.

2015-01-16

눈꽃 열차

▲ 이복희수필가 Y문학회에서 강원도 태백으로 눈꽃 열차 테마여행을 갔다. 태백도 겨울 기차여행도 처음이어서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 동대구역에는 남극의 펭귄 떼 같은 인파가 대합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시간이 되자 더욱 들뜨고 상기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 플랫폼에 대기한 기차 속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어갔다. 기차는 수많은 인파를 삼키고도 무거운 내색 하나 없이 기운차게 출발했다. 차창 밖 풍경을 보며 아련한 추억을 잠깐씩 되새기는 재미도 쏠쏠하다. 잔설 위로 다시 눈이 퍼붓기 시작한다. 눈꽃 테마에 때맞추어 눈이 내려주니 행운이다. 18년을 멈추지 않고 레일 위를 달리는 영화 `설국열차`의 설경도 떠오른다. 열차는 간이역마다 서고, 사람들은 그때마다 오르내리고 기차는 또 달린다. 거의 다섯 시간이나 가다 서다를 반복했지만 지루한 줄 몰랐다. 철암역에 도착하자 터진 콩자루에서 콩알 쏟아지듯 인파는 눈발 속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태백의 눈꽃 축제장은 다양한 볼거리로 넘친다. 백설기를 덮어 놓은 세상에 만리장성, 숭례문, 만화 캐릭터 등 환상적인 작품들을 전시해 놓았다. 조각가의 살아 숨 쉬는 혼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그 위에 또 다시 눈발이 하얀 떡고물처럼 흩어져 내렸다. 가정이라는 둘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졌고 새로운 곳에서 문학을 하는 사람들과의 시간은 휘날리는 눈과 더불어 하늘로 날아오르게 한다. 눈밭에 뒹굴다보니 머릿속이 포맷한 것처럼 백지가 된다. 그 위에 나만의 추억을 하나하나 스케치한다. 세월이 흘러 태백을 떠올리면 스케치한 그림이 파노라마로 떠오를 것이다. 추억의 창고가 차곡차곡 채워져 알부자가 된 것 같다.오후 5시경 철암역을 뒤로한 채 기차는 온 길을 되돌아 달리기 시작한다. 여행사 직원이 음악을 틀겠다고 안내멘트를 하자마자 트로트 메들리가 쏟아진다. 잔잔한 경음악이나 겨울가요려니 한 기대가 깡그리 무너진다. 아줌마 부대가 여기저기에서 일어선다. 볼그댕댕한 얼굴을 보니 기분 좋게 술도 한잔씩 한 모양이다. 처음에는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더니 금방 기분이 고조되는지 막춤 판이 벌어진다.꽃놀이를 다녀 온 관광버스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던 꽃무늬 블라우스의 어머니가 어슴푸레 떠올랐다. 알듯 모를 듯 동네 어른들과 좁은 버스통로에 어우러져 흐느적거리는 어머니의 모습은 내가 여태 보아온 단아함과 거리가 멀었다. 꽃무늬 옷보다 더 발그레한 얼굴과 마주치자 내가 더 부끄러워 외면해 버렸다. 내 나이 불혹을 지나고 보니 그때 어머니를 이해 할 것 같았다. 일 년에 한두 번 가는 야외놀이가 일상의 무거운 짐을 잠시라도 내려놓는 어머니의 숨구멍이었던 것이다. 나의 외면은 어머니를 내 틀에 가두고 이런 어머니가 되어 달라는 욕심이었다.몇 년 전 친구들과 아이들을 데리고 제주도 여행을 간적 있다. 패키지 여행이라 자유시간이 없었다. 죽이 잘 맞는 친구들과의 시간이라 관광가이드의 말을 뒷전으로 할 때도 많았다. 그럴 때 마다 아이들이 어른들을 이끌었다. 추억의 거리에 들어서 관광을 하는데 디스코 음악이 흘렀다. 흥에 겨워 주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친구들과 고고에 막춤까지 추었다. 아이들이 기겁을 하고 도망쳐버렸다. 그때 아이들의 마음이 내가 예전 엄마가 꽃무늬 블라우스를 입고 춤을 추던 모습을 볼 때 같았으리라.눈꽃열차의 6호 객실은 알고 보니 나이트클럽과 같은 곳이다. 우리 일행 중에 몇몇이 그들과 함께 어우러져 흥을 돋운다. 나도 모르는 손에 이끌려 시늉만 내다 앉아버렸지만 딱히 싫지는 않다. 처음엔 낯설어 어색했지만 함께 박수를 쳐다보니 나도 흥이 나기는 한다.어둠이 내리자 차창에 비치는 그들의 모습이 왠지 애처롭다. 지치지 않는 저 몸짓은 아마도 꾹꾹 눌러 둘 수밖에 없었던 한 생의 말 못한 이야기일 것이다. 생전 어머니가 그랬듯이 일상에서 벗어나자 몸의 언어로 한꺼번에 터져버린 불덩이 아닐까. 자유에 대한 갈망이 평상시 같으면 엄두도 못 낼 춤으로 이어졌으리라. 내 몸에 자연스레 배여든 억눌린 여성성에 공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관객으로 있는 내 모습이 어설프기만 하다.

2015-01-09

존 필더의 달력

▲ 손숙희대구 수필문학회 회장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우편국 소인이 찍힌 소포를 받았다. 안전포장에 흠 하나 없이 배달된 이 선물은 로키산맥의 일부 콜로라도의 풍경이 담긴 사진달력이다. 지난 27년 동안 우리는 이것을 집안의 중심이 되는 자리에 걸어두고, 그 광활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살아왔다. 가족사 속에 자리할 우아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막연히 먼 곳을 그리며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눈앞에서 신기루처럼 보였다가 사라지거나, 세월 농익은 어느 날 손에 잡히기도 한 실상이기도 하였다. 꿈을 꾼다는 것은 화창한 봄날 가로수를 따라 걸을 때 마른 가지를 헤치고 돋아나오는 잎들의 속삭임을 듣는 마음이다. 신록의 희망이다.중학교 음악 시간에 한 노래를 배우면서 달빛 출렁거리는 콜로라도의 풍경을 꿈꾼 적이 있었다. 세월인가, 그 곳이 어느 날 내게로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눈 덮인 산맥의 꼭대기, 청람 빛 하늘과 산봉우리가 맞닿은 그 곳에 보름달이 시린 얼굴로 떠 있다. 소복인 듯, 눈옷을 입은 나무숲은 태고의 설경을 그린다. 로키의 산자락 콜로라도의 계곡에 겨울이 빙하로 내렸다. 달이 가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천연의 풍경을 사진에 담아내던 사진작가 존 필더(John Fielder)의 콜로라도 풍경사진이다. 날마다 조금씩 변하는 자연의 신비가 작가의 눈에 포착되어 사진 속에 담겼다. 새롭게 창조되는 자연의 순간들이다.그는 평생을 콜로라도의 산, 들, 바위, 숲, 호수의 빼어난 풍경을 사진기에 담고, 연말이 되면 12장의 사진을 골라 작품달력을 만들어 선보인다. 그 지역의 가이드북을 제작한 것은 더 오래전이었다. 그는 사진작가이자 교사이며 출판업, 환경보호, 청소년 환경체험 등 지역의 자연을 지키는 환경운동가라고 소개한다. 생애의 사명으로 자연 사랑을 완성해가는 길을 걷고 있는 분 같다. 그의 간절한 바람이 렌즈를 통과해 혼을 지닌 예술작품으로 태어났을 것이다.작년에는 이 달력 제작 30주년 기념으로 그 동안 선보인 수작들 55편을 골라 주간 약속달력(Engagement Calendar)을 펴냈었는데, 올해도 두 종류를 함께 받았다. 약속메모나 간단한 일기를 쓸 수 있게 페이지를 편집해 놓았는데 나는 단 한 칸에도 글씨를 쓸 수 없었다. 한 해의 여행으로 잠시 지나가며 느끼는 즐거움보다 오래도록 그곳의 비경을 소유하는 행복을 누리겠다는 생각에서였다.스물일곱 해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변함없이 성탄과 새해 벽두에는 이 기쁨을 누린다. 산타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좋아하다가도 문득 살아가면서 이웃에게 이런 기쁨을 준적이 있었던가를 돌아보게 한다. 채우지 못하고 헐렁하게 보낸 시간의 조각들을 주워 담듯이 못다한 일들을 열 두 장의 갈피에다 차곡차곡 챙겨 둔다.발신인은 어린 시절 단짝이었던 친구의 언니.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5년 연상의 중학생이었는데, 공부도 뛰어났지만 늘 문학서적을 애독하였고 입담 좋게 우리에게 전하기를 즐겨하였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유럽을 거쳐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정착한 후에도 관심 분야의 공부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50대의 나이에 톨스토이 작품을 원서로 읽겠다고 러시아에 어학연수를 다녀올 만큼 열정과 용기와 결단력이 대단한 분이다. 대학 입학선물로 영문판 `북경서 온 편지`를 보내주었고, 김춘수 시인의 시에 대하여 진지하게 이야기해준 적도 있었다.젊은 시절, 유럽여행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내왔을 때에도 고색창연한 문화와 세계명작의 배경이 되었던 곳들을 꿈꾸게 했다. 여행의 바람이랄까, 출발의 동기를 강하게 심어준 그분은 일흔이 넘은 지금도 로키의 하이킹과 낯선 곳의 여행을 즐긴다고 한다. 인생을 스스로 제단하고 자신의 것으로 다스리며 살아가는 삶으로 마지막까지 나에게 도전을 주문하는 선배이다.로키산맥을 넘어 서부로 향하던 개척자들에게 안식과 희망을 주던 대자연의 품, 콜로라도 강물 위에 비치는 달과 철따라 피어나는 꽃들이며 푸른 숲을 만날 꿈은 오랜 세월을 이어 온 노래였다. 내일이면 늦을까.넉넉한 대지를 바라보며 살아온 세월을 선물한 이에게 간절하도록 고마운 마음을 띄워 보낸다.

2015-01-02

장갑

▲ 김미숙수필가·농부 장갑을 잃어버렸다. 겨울이면 애지중지 손에 붙이고 다니던 장갑이다. 손가락 마디마디, 불어 닥친 칼바람도 막아 주고 흰 눈이 펑펑 오던 날 눈을 맞아도 따뜻하게 감싸주던 것이다. 갈색 앙고라 손가락장갑은 색깔도 튀지 않고 무난했다. 장갑은 내가 가는 곳 어디든지 나의 손과 함께 동행 했다. 겨울이 깊어갈 때 추위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쪽으로 휴가를 다녀왔다. 농사를 짓는 나는 여름에는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 일을 해야 하지만 농한기인 한겨울은 내 손도 휴식의 시간이다. 여름 내내 거칠었던 손은 겨울이면 하얗게 꽃이 피는 시기이기도 하다.집에서 공항까지 장갑을 끼고 출발을 했었다. 일주일간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여행 하고 며칠 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공항에서 장갑을 찾았다. 가방 속 여기저기 있을 곳을 다 뒤져봐도 장갑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추위에 몸부림치는 내 손은 허허 벌판에 서 있었다. 무말랭이처럼 오그라지고 쭈글쭈글한 모양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녔지만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다. 친구에게 선물로 받은 사연이 있는 장갑을 잃어버려서 올겨울 내내 나는 아쉽기만 했다.지난 해 연말이었다. 오랜만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날씨가 추운데 어떻게 지내냐는 안부 전화였다. “올 겨울은 어떻게 보낼래?” 친구는 겨울만 되면 나의 손 걱정을 했다. 나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손바닥에 껍질이 벗겨지고 피가 통하지 않아서 장침을 맞을 때가 있었다. 침을 맞은 자리는 시퍼렇게 멍이 들고 얼룩이 졌다. 친구가 그 손을 본 후부터는 은근히 걱정이 늘어졌다.사실 그 친구는 남의 걱정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녀의 남편은 몇 년 전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퇴직금과 그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사업을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아이들 학비와 생활비마저 궁색해졌다. 한 달 벌어서 한 달 먹고 사는 처지가 현실이고 보니 그녀도 돈벌이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그동안의 호시절은 다가고 식당에서 맨손으로 설거지를 해야 하고 음식도 만들어야 했다. 공장에서 먼지를 덮어 쓰고 양말을 뒤집는 작업을 정리해서 거래처에 납품을 하고 마트에서도 무거운 물건을 들어 날라야 했다. 그렇게 험한 일을 하면서도 그녀의 손은 언제나 부드럽고 따뜻했다. 나는 그녀를 만나면 손부터 잡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은 감촉이 아주 좋았다.그런 그녀가 잠깐 만나자고 했다. 근무 시간인지 가운을 입고 있는 그녀는 백화점 정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내가 뭐냐고 묻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입을 달싹거렸다. 함박눈이 펑펑 오던 날 나의 거친 손이 생각나서 장갑 한켤레를 샀는데 이제야 연락을 한다고 했다.커피를 사이에 두고 그녀와 마주 앉았다. 그녀는 봉투 속에 든 갈색의 장갑을 꺼내더니 내 손에 끼워줬다. 남은 한쪽마저 끼고 나니 따스한 온기가 장갑 속에 가득 찼다.그녀에게 힘을 내라고 내가 격려를 해 줘도 시원찮을 텐데 추위를 많이 타는 나를 위해서 그녀가 오히려 내 손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로부터 받은 선물을 흔적도 없이 잃어버렸으니 어찌 마음이 상하지 않겠는가.그녀의 남편이 회사를 그만 두었을 때 마주한 술 잔 앞에서 그녀의 얘기를 몇 시간 째 들어줬다. 평이했던 삶 속에는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이도, 속내를 너나들이 할 수 있는 친구도 없었다고 했다. 소주 한 병을 사이에 두고 그녀와 주거나 받거니 하다 보니 어느새 반병을 더 마신 듯 했다. 그러면서 가까운 친구로 남았고 오랫동안 소식이 없다가 만나도 우정을 나누는 한결 같은 사이가 되었다.눈이 펑펑 내린다. 겨울의 한 복판에 서 있는 듯하다. 평생을 살면서 마음이 서로 통 할 수 있는 친구가 셋만 있으면 성공한 삶이라고 한다. 나에게는 몇 명의 친구가 있는지 주변을 둘러본다. 그들에게 얼마만큼 따스한 손이 되었는지 갸우뚱해 본다. 마음을 열어 놓고 이렇게 대화가 통하고 아껴주는 친구가 있다고 생각하니 칼바람의 찬 겨울이 춥게 느껴지지 않는 요즘이다.

2014-12-26

겨울바람

▲ 허창옥대구수필가협회회장약사 첫눈이 먼저 내리고 바람이 나중에 불었다. 눈은 포근하였으나 바람은 차가웠다. 아침에 일어나니 이미 함박눈의 군무가 펼쳐지고 있었다. 눈이 한나절 내렸다. 한나절을 나는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눈의 밀도가 낮아지고 그 춤사위의 짜임새가 엉성해지더니 시나브로 그치고 말았다.그때 세찬 바람이 일어났다. 바람이 가로수 플라타너스를 사정없이 후려치니 남은 잎들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서 포도 위를 날아다니고 굴러다닌다. 눈의 정취에 취한 건 잠깐인가 싶은데 이제 시작한 바람은 오래전부터 휘몰아친 것 같다. 춥다. 따뜻한 실내에 있으면서도 나는 추위에 떨고 있다. 추위를 몹시 타는 건 내 몸이 태생적으로 습득한 무슨 조건반사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음력 섣달 스무이레 깊은 밤에 어머니는 나를 낳았다. 만삭의 어머니는 밤이 깊도록 한 말이나 되는 가래떡을 썰고 있었다. 대가족이 쇨 설날 준비에 몸이 무겁다는 생각은 언감생심이었단다.게다가 여섯째로 태어날 아기가 그리 큰 긴장감으로 다가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오, 핏덩어리 나는 섣달의 추위 속에 느닷없이 던져졌다. 뼈 속까지 스며든 그 추위를 내 몸은 여태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겨울마다 내가 옴짝달싹하지 못할 만큼 주눅이 든다는 게 그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랴.몸이 그렇듯 겨울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음에도 내 정서는 그러나 완연히 다르다. 나는 겨울을 좋아한다. 겨울 특유의 무채색 정경이 좋고 산야가 함께 묵언수행에 들어간 것 같은 일종의 적막이 좋다. 산 너머 혹은 강 건너에 필경은 있을 봄, 옹색하게 움츠러든 모든 상황이 끝나고 말리라는 희망을 표상하는 그 봄을 기다리는 묵연한 인내가 좋다.몸과 마음이 느끼는 겨울이 서로 다른 까닭은 무엇일까. 미루어 생각하건대 회귀본능이 아닐까한다. 몸이 객지를 떠돌아다닐수록 마음은 고향에 깃드는 법이다. 내게 겨울은 고향이 아니겠는가.누구나 그렇듯이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나도 세모정서에 젖어서, 놓쳐버린 것들을 낱낱이 들추어보며 아쉬워하고, 새해에 이루고 싶은 일들을 생각해내었다. 그리하여 초등학생의 방학계획표처럼 필시 그대로 해내지 못할 계획들을 세우곤 했었다. 그게 나빴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라도 했기에 약진은 아닐지라도 미미한 발전이나마 있었을 게 아닌가.웬만큼 나이가 들고부터는 그러지 않는다. 그야말로 무채색으로, 적막으로, 묵연히 인내하면서 가만히 섣달을 보낸다.희망을 품지 않는다고 절망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소망조차 없을 수는 없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절감하는 게 또 한 살 나이를 먹는다는 비켜설 수 없는 진실이다. 그래 나이를 먹자. 나이를 잘 먹자. 나이가 가져다주는 모든 것에 순응하자.`아름답게` `기품 있게` 를 화두로 삼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격이 닿지 않는 난제였다. 젊게 살자, 그 또한 분에 넘치는 그야말로 분수 모르는 일임에랴. 그러니 그저 나이를 잘 먹자고 물러설 수밖에. 가능하면 창밖에 나서서 바람을 안아보자. 피하지 말자. 그 또한 순응이리니. 순순해지자. 편안해지자.글을 쓰는 동안도 바람은 여전히 플라타너스 가지들을 흔들고, 지나가는 이들의 머리카락을 헤집고 있다. 마치 쇼팽의 `겨울바람`이 연주되는 듯 환청이 일어난다. 세찬 바람이 건반을 훑고 지나가는 것 같은, 오선지가 휙 날아가고 그 오선지를 물고 있던 음표들이 하나하나 떨어져나가서 작은 잎사귀들처럼 바람에 흩날리는 것 같은 환시가 일어난다. 그 곡을 처음 들었을 때 어쩌면 보이지 않는 바람을 이리도 잘 표현했을까. 내 문장에서도 바람소리가 났으면 좋겠다는 정녕 꿈같은 생각을 했었다.눈이 내렸고 눈바람이 불고 있다. 겨울바람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내다보며 내일의 나를 생각한다. 더 순순해지자. 더 많이 편안해지자.

2014-12-19

어떤 내조

▲ 윤애자 수필가22년째다. 한 달에 한 번은 어김없이 화투판이 벌어진다. 질리지도 않는가. 볼거리 먹을거리가 널린 세상에 우리의 문화생활은 좀처럼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네 집이 돌아가면서 음식을 준비하고 집으로 초대를 한다. 엉뚱한 생각인지 몰라도 일 년이면 한 집에서 세 번, 22년을 곱하면 66번이다. 무시로 모이는 횟수까지 합하면 머잖아 한 가정 100회 특집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남편이 처음 대구에 와서 알고 지내던 친구들과 부부 모임을 한다. 남편을 제외한 세 친구는 그때 교제하던 아가씨와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다. 그래선지 지금도 그 시절 이야기만 나오면 금새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나만 모르는`그때를 아시나요`가 재방송 된다. 낡은 125CC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을 누비고 다녔던 이야기, 누군가는 양다리 걸쳤다가 지금의 아내에게 들통 난 이야기, 쌍쌍이 데이트하러 가는 곳마다 남편이 눈치 없이 따라 다녔던 이야기로 배꼽을 잡는다. 노총각이었던 남편이 결혼한다고 했을 때도 그들은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기뻐하고 축하해 준 죽마고우 같은 친구들이다.비산동의 어느 한옥 집 문간방에 신혼살림을 차리고 그들을 초대했다. 단칸방에 소꿉놀이 같은 살림살이였지만 창문을 열면 주인집 꽃밭은 온전히 우리 차지였다. 팔달시장에서 채소 도매를 하는 주인 부부와 아이들이 나가고 나면 팔십 노모는 종일 꽃밭에서 살았다. 라일락이 한창인 마당에 야외용 가스렌지를 놓고 삼계탕을 끓였다. 비좁은 단칸방은 교대로 밥을 먹어야 했다. 남편들이 식사를 마치고 마당에 나가있는 동안 나는 부인들과 뜨거운 삼계탕을 먹으며 낯을 익혔다. 혼수로 해온, 비닐도 벗기지 않은 새 담요를 깔고 고스톱 신고식을 치렀다.아이들까지 북적이던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수월한 편이다. 그렇더라도 내 집에 오는 손님이고 모임이다. 청소하고 시장 봐서 음식 장만하다보면 어느새 현관 앞이 떠들썩하다. 저녁상을 물리기 바쁘게 화투판이 등장한다. 원활한 현금 유통을 위해 잔돈을 준비하는 것도 유사가 할 일이다. 일전을 앞둔 남편들의 표정이 호기롭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는 심사인가. 변화를 외치던 아내들까지 팔을 걷어 부친다. 부부라고 봐 줄 거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지난달에 거금을 잃었다는 최 사장이 오늘은 기필코 만회를 하겠다며 큰소리친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결혼할 당시에 남편은 조그마한 공장을 하고 있었다. 말이 공장이지 손바닥만 한 자리에 중고 선반 몇 대에 직원은 한두 명이었다. 신경 쓰고 노력한 것에 비하면 한 달 성적표는 초라했다. 그런 남편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공장에 간식을 챙겨가는 것이 전부였다. 틈틈이 부침개도 구워가고 감자도 삶아 갔다. 겨울이면 붕어빵이 식을세라 종종걸음을 치기도 했다. 기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기름때에 절은 공장은 여름이면 그야말로 찜통이었다. 생각 끝에 냉동실에 물수건을 얼렸다가 직원들에게 돌렸다.다른 모임에서는 문화생활도 하고 레저 활동도 하는 그들이 유독 우리 모임 때는 고스톱을 고집하는 이유가 뭘까. 모르긴 해도 그들만의 정체성과 끈끈한 우정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돈도 시간적 여유도 없던 시절, 만나면 소주잔에 고스톱이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이 아니었을까. 낡은 유물처럼 시대에 뒤떨어진 놀이라고 치부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지나온 세월과 우정이 담긴 의식적 행위가 아니겠는가. 나이와 체면을 던져 버리고 잠시나마 순수하고 자유롭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열망 같은 것 말이다. 청춘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지만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있는 한 화투판의 열기는 식지 않을 것 같다. 한 끼 먹자고 시장을 보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음식을 장만하는 것이 어찌 보면 낭비고 번거로운 일일 수도 있다. 맛집이 지천이다. 전화 한 통이면 예약도 가능하다.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모임이라도 밖에서 하자던 아내들이 언제부턴가 고스톱 판에 끼기 시작했다. 무용담처럼 반복되는 젊은 날의 순수와 열정을 상기시키는 그 자리가 그들이 세상을 헤쳐 나가는 또 하나의 힘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변화와 반란을 포기하고 함께 동화되는 것, 그 또한 아내의 역할이고 내조가 아닐까.

2014-12-12

비밀의 정원

▲ 윤영수필가계간 `문장` 편집위원 쏟아지는 폭우 속에 한 시간을 달려온 곳은 첩첩산중이었다. 어디쯤일까. 아름드리 소나무를 겁 없이 휘감아 올라가는 칡넝쿨 이파리는 쉴 새 없이 빗소리를 낸다. 간간이 산자락에 일궈 낸 밭뙈기가 보이나 주인은 없고 양팔을 내린 허수아비만 비딱하게 서 있을 뿐. 그는 도대체 내게 뭘 보여주겠다고 우중을 달려왔을까. 좁은 오솔길로 그를 따라 나는 말없이 뒤따른다. 족히 삼십여 분은 걸었을 게다. 길섶에 묻은 빗물에 치맛단이 흥건하게 젖었다.`이쯤에 너와집 한 채 만들어 놓을 테니 당신 가끔 놀러 와요.`라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건만 난 대답하지 않는다. 습한 것을 싫어하거니와 한껏 멋을 내고 온 나의 모양새가 가늘게 내리는 비에 좀 전에 보았던 허수아비 꼴이니 기분 좋을 리 없다.금맥이 쏟아질 지형도 아니고 열정이 들끓는 청춘도 훨씬 지난 나이고 보면 프러포즈를 할 일도 만무하잖은가. 금강산 비경을 넘어서 강산풍월을 가질 만큼의 절경도 아닌듯하니 궁금증은 더없이 간절하다. 앞서 가던 그가 엷은 미소를 보이며 뒤돌아서 서 한마디 던졌다.“사실은 나도 몇 달 전 이곳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다 발견한 곳이야.”말이 끝남과 동시에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나는 아찔했다. 아무리 미지수라는 확장언어를 끌고 왔다지만 답변치고는 대가가 엄청나다. 경계를 가르는 무엇하나 없지만 정원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꽂아야만 밟을 수 있을 만치 신비감마저 들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쳐진 깊은 골짜기가 무릉도원이다. 건너편은 자작나무숲을 배경으로 허브꽃이 목차처럼 정렬되어 있고 보리수며 살구가 농염하게 익었다.수양버들나무 아래 녹슨 철제의자에 앉았다. 오스트리아나 함부르크 어디쯤에서 가져 온 듯 한 둥근 원목 시계는 아홉 시를 살짝 넘긴 채 멈춰 있다. 나는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그에게 사진 한 장을 부탁했다. 찍었다는 느낌보다 박았다는 느낌이 들자 마음조차 추슬러지는 묘한 기분은 뭘까. 목 놓아 울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 이곳은 울음을 뱉어내기에 안성맞춤이다.딱히 응어리질 것도 없지만 슬프거나 서러울 일도 없지만 고맙고 감사함에도 눈물을 부를 수가 있구나 싶었다. 그가 여느 날처럼 길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모른 채 무덤 속으로 갔을 수도 있었겠지.잔디밭 끝 자락쯤 갔을 때 비로소 인기척이 들렸다. 산중에 보금자리 튼 새 둥지처럼 초록지붕을 한 일자형의 자그마한 집이 보인다.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그대로 살린 도랑가에 수국이 환하다. 예순에 가까워 보이는 중년 부부가 흔들리는 수국 꽃숭어리 앞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뭐 볼 꺼 있습디꺼?”나는 내가 좋아하는 어느 작가의 한 표현을 빌려“먼 후일, 또 기억하게 되겠지요.”라는 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자귀나무에 매달린 풍경소리가 잔디밭으로 퍼진다. 하필이면 왜 이곳에 정착했느냐고 묻는다면 이것 또한 실례가 되려나. 어쩌자고 산중에 수천 평의 정원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기껏해야 낮이면 산비둘기나 산줄기를 지나가는 바람이 보고 밤이면 부엉이나 지천으로 둘러쳐진 달맞이꽃이 관객의 전부인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남편이 아내를 위해 마련해준 선물이 아니라면 아내가 남편을 위해 마련해 준 선물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나는 흠씬 물기 머금어 거뭇거뭇한 곡선의 나무계단을 다시 오른다. 비밀의 정원에서 우리들만의 비밀 하나를 만들어 놓고 청동아치형 꽃밭을 지나고 오솔길을 지난다. 뭐니뭐니 해도 이 순간 최고봉은 이곳으로 데려다 준 그의 말에 답해주는 게 아닐까.“너와집 지으면 놀러올게요.”그가 비밀스럽게 웃었다. 내려올 때 무겁던 치맛단이 새털보다 가볍다. 그곳에서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천국을 느끼고 왔다면 당신은 믿어줄까.여전히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다만 사진 몇 장이 휴대폰 속 앨범에 남아 있는 걸로 보아 필시 꿈속을 헤맨 건 아니었을 게다.

2014-12-05

우체통 앞에서

▲ 견일영수필가수필문학독서회 강사 나는 갓 입학한 초등학교 1학년 학생처럼 우체통 앞에 정중히 섰다. 조심스레 통속으로 편지를 넣으려다 다시 봉투에 적힌 이름과 주소를 확인해 본다.순간, 그가 이 편지를 받고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하고 몇 번이고 망설인다. 갑자기 어둡고 두려운 생각이 든다. 그렇게 서로 좋아했는데, 설마 언짢아하지는 않겠지. 억지로 마음이 편안한 쪽으로 자문자답해 본다.다시 편지 봉투를 살펴본다. 흔한 이름이지만 내 가슴에 새겨진 소중한 그 이름 석자! 그 세 마디 이름 때문에 얼마나 기다리고, 슬퍼하고, 원망도 많이 했던가. 지금 생각하면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 너무 미워했던 것 같다. 무슨 악연이었던가. 불가에서는 전생에 가장 악연이었던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 다시 만난다고 했다. 그것이 정말이라면 나도 전생의 죄 갚음으로 이 괴로움을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나는 어제 받은 전화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올해의 첫눈으로는 참 많은 눈이 쏟아지고 있는데 휴대 전화벨이 울렸다.“여보세요.”내가 응답을 하자마자 느닷없이“거기도 눈이 많이 오지요?”나는 밑도 끝도 없는 물음에“예에…. 어디십니까….”하고 황급하게 물어보는데 전화가 찰깍 끊겼다. 나는 육감으로,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귀에 익은 그의 목소리를 금세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신호음은 다시 울리지 않았다. 창밖에는 함박눈이 쉴 새 없이 내리고, 혹시나 하는 기다림만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그 옛날, 새마을 노래가 한창 열풍을 일으키던 때, 나는 그 소녀와 헤어지고 먼 곳으로 떠났다. 그래도 미련은 있었던지 철없는 소리로 “우리 첫눈 올 때 만나요”하고 훌쩍 떠나가 버렸다.그리움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짙어지고, 어느 하늘 아래 살아 있는지 궁금증만 더해갔다. 풍문에는 저 남쪽 어느 도시에서 아주 부자가 되어 잘 살고 있다고 했다. 가끔 소녀는 꿈에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는 한마디의 말도 보내 주지 않았다. 필시 큰 원한을 품고 있으려니 하고 나 자신을 나무라며 죄책감으로 몸살을 앓았다.그 동안 첫눈이 오늘처럼 분명하게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초겨울에 내리는 남부지방의 눈이란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어정쩡한 눈비로서 첫눈이라고 단정하기가 어려웠다. 그것도 몇 년이 지나자 꿈같은 언약은 아지랑이처럼 사라지고 서로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조차 모르게 되었다. 모든 것을 잊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와 헤어진 후 이렇게 많은 눈이 첫눈으로 펑펑 쏟아지기는 처음인 것 같다.그날 밤 나는 긴긴 편지를 썼다. 오랜 세월, 묻어두었던 설움들을 다 들어내어 썼다. 어린아이의 반성문처럼 내 잘못만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그의 매정한 전화처럼 내용을 다시 읽어보지도 않은 채 봉투에 확 집어넣고 봉했다.나는 우체통 앞에서 나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바보 같은 빨간 통을 유심히 본다. 옛날에는 둥근 우체통이었는데 왜 네모로 만들었을까. 이 통속에는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담겨 있을까. 남이 보지 못하게 꼭꼭 풀칠을 한 편지들, 그것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고 하겠는가. 내가 쓴 사연보다 더 미련하고 쑥스런 사연들도 있겠지. 아무거나 수용하는 천치 같은 우체통.나는 갑자기 용기가 생겼다. 나보다 더 못난 사람의 글이 이 통속에 있으리라는 상대적 위안으로 용기가 솟아 오른 것이다.편지를 밀어 넣었다.“철썩”통속에 편지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돌부처처럼 서 있는 우체통이 오늘처럼 위엄 있게 보인 적이 없었다. 나는 갓 입학한 초등학생처럼 얌전히 그곳을 떠났다.

2014-11-28

`부터`와 `까지`

▲ 조낭희 수필가·인문학 강사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누구나 크고 작은 기다림을 통해 자기를 반추하고 좀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며 내면을 성숙시켜 나간다.부처님 앞에서 지극 정성으로 자식의 앞날을 비는 부모의 간절한 기다림이나 시간을 공유하지 못하여 애를 태우는 연인들의 애틋한 기다림, 흐르는 세월 속에 상처가 아물기만을 바라는 체념 섞인 기다림도 있다.뿐만 아니라 오지 않을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며 평생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큰 기다림 앞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의연하게 대처한다.하지만 대부분의 현대인은 시간의 족쇄에 묶여 노예처럼 살아가기 십상이다. 약속 시간이 지나면서 누군가를 기다릴 때는 초조해 하기 일쑤다. 느긋하게 시간을 깔고 앉아 여유를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연신 시계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도 있다. 후자의 기다림은 결과적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기다리는 모습만 보아도 그 사람의 성격이나 직업까지 어느 정도 감지될 정도이다.평소 나는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은 자는 인생의 깊이를 제대로 모르는 경박한 사람일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정작 나는 스스로에게 몹시 실망했던 적이 있다. 지난 스승의 날 대학 동기들과 교수님을 뵙기로 하였다. 교수님을 뵐 기회가 종종 있었지만 조촐하게나마 예를 갖춰 식사 대접을 한다고 하니 기분이 남달랐다.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들의 변화된 모습을 그려보며 아침부터 묘한 설렘을 안고 허둥거렸다. 바쁜 일과를 서둘러 마치거나 뒤로 미루어 놓은 채 일찌감치 약속 장소로 향했다. 텅 빈 예약석에 교수님 혼자 계실 것을 우려하여 십여 분 일찍 도착한 것이다.아무도 없는 방에 다소곳이 자리를 잡고 앉아 친구들을 기다린다. 가끔씩 지나치는 종업원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나는 모처럼의 고독을 즐긴다. 이 정도에서는 누구나 우아하게 여유를 부릴 수 있으리라. 그러나 7시를 넘기면서 옆 테이블에 손님들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술렁거리는 주변 분위기 속에 혼자만 고독한 섬마냥 머쓱해진다. 갑자기 모든 것이 어색하다.약속 시간을 넘기면서부터 자꾸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거슬린다. 멀뚱거리며 시간만 축내는 하릴없어 보이는 주부로 비쳐지는 것까지는 괜찮다. 이 옷 저 옷 걸쳐 보고 수도 없이 화장을 고쳐대며, 모처럼의 외출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삼류드라마 속의 주인공처럼 비쳐지진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하니 기다리는 시간이 점점 고통스러워져 온다.나보다 시간적인 여유가 많은 친구들의 늑장에 은근히 부아가 치밀기도 하다가 서둘러 온 나 자신이 한심스럽기도 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불안감까지 파고든다. 약속 시간만큼은 철저하게 지키는 교수님도 오늘따라 웬일이실까? 혹시 건망증이 심한 내가 착각을 한 건 아닌지 테이블 밑으로 조심스레 수첩을 펴본다. 장소와 시간 모두가 정확하다. 그 때 낯익은 낱말이 커다랗게 확대되어 나를 조롱하듯 쳐다보고 있다. 7시까지!바쁜 도시 생활에서 나도 모르게 익숙해져 버린 `까지`라는 흔한 조사 때문에 이십여 분이 이토록 불안했던 걸까. 언제까지 말미를 주겠노라고 흔히 소설 속에서 악덕 고리대금업자가 거드름을 피우며 내뱉는 말속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말이 아닌가. 나는 수첩을 뒤져`7시부터`라고 고쳐 적었다. 조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읽을거리가 없는 것도 다행이라 위안했다.여기까지 와서 볼썽사납게 독서삼매경에 빠지는 것조차 우습지 않은가. 간간이 술잔이 부딪치는 소리와 왁자한 웃음소리가 정겹다. 기계처럼 정시에 만나 필요한 말만 나누다 뿔뿔이 흩어지는 만남을 상상해 본다. 습관적으로 출입구를 향해 눈길을 돌릴지라도 기다리는 시간은 참으로 인간적이다.마음이 편안해져 갈 때 교수님이 환한 웃음으로 들어오신다. 뒤이어 친구들도 약속이나 한 듯 차례차례 나타난다. 혼자만 촌각을 다투며 살아온 것처럼 호기를 부리던 모습을 잊고 나도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부터`와 `까지`의 차이로 맛본 즐거운 기다림이었다. 하지만 혼자서 행복했던 그 순간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2014-11-21

유선 여관

▲ 구활수필가 그 여관에서 딱 하룻밤만 자고 싶다. 그곳은 방안에 샤워를 할 수 있는 화장실이 딸린 것도 아니다. 멋진 침대가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조명등 불빛이 은은하여 춘정을 부추기지도 않는다. 반질반질한 장판 맨바닥이다. 장작 군불을 지펴 아랫목이 따끈하다. 창호지를 바른 문 밖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밥 짓는 소리가 들리는 그런 곳이다.그런 여관에서 하룻밤 자고 싶다. 이른 저녁상을 물리고 장거리 산행의 피로를 풀기 위해 팔베개를 베고 누웠으면 남향으로 터져 있는 문에서 들려오는 개울물소리가 너무 요란하여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마침 때는 음력 보름. 휘영청 푸른 달이 대문 밖 벚나무의 그림자를 마당으로 들여보내 짚 멍석을 화문석 무늬 흉내 내도록 하는 호젓한 여관의 초저녁. 그런 여관에서 딱 하룻밤만 자고 싶다.장엄한 오케스트라를 방불케 하는 계곡 물소리를 배경음악으로 달빛 소나타를 솔로로 듣고서도 술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이미 풍류객이 아니다. 아니다, 인간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막걸리 생각이 간절하여 “주인 아주머니!”하고 부른다. 개다리소반에 열무김치에 풋고추 그리고 오이를 썬 그야말로 박주산채를 기대하면서 “멍석 위에 술상 좀 봐 줘요.”하고 소리친다. 그러나 나오는 상 위에는 저녁상에 나왔던 안면 있는 정갈한 반찬들이 “안주 없이 그냥 간단하게 한 잔 잡숫고 주무세요.”라고 말한다. 둥근달이 나뭇가지에 걸려 그대로 등불이다.그런 여관에서 하룻밤 자고 싶지만 아직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 여관은 해남 대둔사 입구 너부내 가에 있는 유선 여관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에서 해남까지는 길도 멀지만 산행 일정이 이런 아름다운 여관에서 하룻밤 잠잘 수 있도록 허락해 주지 않는다. 앞서 얘기한 것들은 주차장에서 내려 절 쪽으로 단풍나무 떡갈나무 벚나무 등의 십리 숲길을 따라 걷다가 무심코 만난 여관 건물과 안뜰을 몇 번 기웃거려 본 기억을 통해 짐작의 그림을 그린 것에 불과하다.내가 굳이 이 여관에서의 일박을 희원하는 것은 온돌방의 분위기나 한정식 상에 나오는 푸짐한 안주 때문은 아니다. 물소리와 물안개 때문이다. 개울가 암반 위에 닦은 집터에서는 자기(磁氣)가 터져 나와 자고나면 우선 몸이 개운하다. 또 개울에서 흘러가는 물소리를 깨어서도 듣고, 자면서도 들으면 일체의 망상이 사라진다. 삼백예순날을 하염없이 백수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무슨 큰 번뇌가 있을까마는 하릴없는 나날이 곧 망념(妄念)의 진원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상상은 계속된다. 밤새도록 비몽사몽간에 물소리를 듣다가 잠이 깨면 이른 새벽인데도 더 이상 잠은 오지 않는다. 개울물소리는 볼륨을 높여 더 큰 소리로 흘러가고 그 소리를 따라 목에 수건 하나를 두르고 개울 바닥으로 내려선다.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이 이 보다 더 아름다우며, 드보르작의 신세계가 이 개울물 소리를 감히 능가할 수 있을까.오솔길은 아니지만 대둔사 쪽으로 나 있는 도로를 따라 쉬엄쉬엄 올라가면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밤을 버텨온 냉기가 아침 온기에 밀리기 시작하면 개울물도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물안개다. 음력 칠월 보름인 백중 무렵에는 지리산을 비롯한 남도의 모든 산들이 연하(煙霞)를 피워 올리기에 골몰한다니 유선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내려면 이때가 최적기가 아닌가 한다.정말이지 그런 여관에서 딱 하룻밤만 자고 싶다. 이렇게 도시에서만 서성대지 말고 배낭 하나 둘러매고 한시 바삐 남도여행길에 올라야겠다. 중국 육조시대에 종병(375~443)이란 이는 젊은 시절에 산수간을 돌아다니며 즐기다가 늙어 노쇠해서는 산천을 찾아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옛날에 가 보았던 산천을 그린 산수화를 방안에 펼쳐놓고 상상으로 그림 속을 거닌 것을`누워서 노닌다`는 뜻으로 와유(臥遊)라 했다. 적어도 나는 그 신세는 면해야겠다. 유선 여관의 제법 큰 방에는 `줄탁동시`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뜻은 알에서 깨어나려는 병아리가 껍질을 깰 때 어미가 밖에서 쪼아 주어야 제대로 부화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곧 `그런 여관에서 하룻밤 자고 싶다`는 생각이 안에서 소리치면 밖에 달려 있는 두 다리가 얼른 알아채고 성큼성큼 걸어가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될 것 같다. 와유(臥遊) 와식(臥食) 와음(臥飮), 그건 절대로 안 될 말씀들이다.

2014-11-14

혈(穴)

▲ 박기옥수필가·모리코트 대표 돌구멍에 갇혔다. 함께한 일행은 거뜬히 빠져나왔건만 나만 홀로 낭패를 당했다. 이곳을 통과해야만 극락에 들어갈 수 있다는 소위`극락굴`이다. 중암암, 일명 돌구멍절이다. 돌구멍 속에 세웠기에 그렇게 명명했으리라. 갓바위에서 발원한 능선이 동으로 힘차게 내달아 정기가 멈춘 곳, 바위틈 벼랑에 중암암이 고즈넉이 엎드렸다. 법당을 중심으로 둘러친 바위들은 제비집 형상이다. 풍수설에는 터의 기운이 좋다 하여 연소혈(燕巢穴)이라 하였던가. 법당 입구부터 돌구멍이다. 거대한 바위가 작은 틈을 열고 손님을 맞이한다. 암자는 세월의 풍상을 겪으면서 겉모습은 초라해도, 법당에서 미소 짓는 부처님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암자 뒤에는 건들바위가 위태롭게 얹혀있고, 전생(前生)·현생(現生)·내생(來生)의 화복을 관장한다는 삼인암(三印巖)이 위용을 자랑한다. 삼인암에서 기도하면 영험이 있다 하여 불자들의 발길이 끊일 날이 없다.무리 지은 바위 속에 큰 구멍이 뚫려있다. 극락굴이다. 극락에 들겠다는 인간에게 부대끼어 몸살을 앓고 있다. 어두컴컴한 저편에 한 줄기 햇살이 파고든다. 중생을 건지려는 부처님의 빛이리라. 극락구멍 앞에 선 일행의 모습은 자못 진지하다. `석가의 가르침을 바로 알기만 하면 누구든 통과할 수 있다.`라는 구멍이다. 마음이 올곧은 친구가 이 말을 증명이나 하듯 가볍게 통과했다. 다음은 가슴과 엉덩이가 엄청나게 큰 여자 친구가 시도한다.“극락행, 어려울 꺼로.” 일행은 회의적이다. 지은 죄가 없다면서 용감하게 대든다. 바위틈에 끼여 난감해 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천신만고 끝에 용하게 빠져나온다.내 차례다. 지은 죄업들이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말처럼 몸에 힘이 들어간다. 다리를 먼저 넣고 윗몸을 구겨 넣었다. 하체와 상체가 닿는 곳은 오목렌즈처럼 공간에 여유가 있었지만, 신체의 중심부가 문제였다.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었다. 막다른 곳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극락 가는 길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주범은 불거져 나온 아랫배였다. 해우소에 들어가는 초입도 돌구멍이다. 돌 틈은 집채만 한 너럭바위를 머리에 이고 있다. 삐걱거리는 해우소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지금은 환경오염 문제로 측간의 역할은 끝났지만, 해우소는 영겁의 세월이 흘러도 그 자리를 지키면서 무언의 교훈을 던지리라.중암암은 아담한 모습에 걸맞게 비움을 가르치는 검소한 암자이다. 나그네들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조용한 기도처다. 이를 비아냥거리듯 상당수의 사찰은 앞다퉈 불사(佛事)를 일으킨다. 신도를 늘리고 교세를 키우기에 분분하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마다 가난 대신 풍요를 걱정하는 모순을 발견한다. 어려움을 겪은 세대이기에 민감한 반응일까. 어디 불교뿐이랴. 오늘날 종교계는 너무 많은 것을 추구한다. 비우라고 말하면서 채우기에 급급하고,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외치면서 행동은 뒷전이다. 불편한 진실들이 비 온 뒤 대순처럼 고개를 내민다. 정신과 물질의 아름다운 조화, 이사무애(理事無碍)가 진정 부처님의 가르침일 진데.중암암, 명당이 더러는 있었겠지만, 척박한 바위틈에 자리를 잡은 것은 선각자의 계시리라. 혈(穴)은 비어 있다. 비움은 공(空)이다. 혈과 공, 의미도 비슷할 성 싶다. 불교는 비움의 종교가 아니던가. 속이 텅 빈 돌구멍은 끝없이 채우려는 중생의 물욕을 경계하고, `비움`을 터득게 함일 터다. 성서에는 `부자가 천당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라고 했다. 이 말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르치는 청빈 정신과 법정 스님이 일깨운 무소유와 속뜻이 같으리라. 이러한 경구(警句)들은 돌구멍에 갇힌 나 같은 사람을 두고 이름이다.극락구멍에서 낭패를 당한 자신이 부끄럽다. 때맞춰 예불 드리는 소리가 유장한 계곡에 너울 되어 흐른다. 평소에는 청아하게 들렸던 독경과 목탁 소리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 소리는 날이 선 칼이 되어 탐욕으로 얼룩진 나의 영혼을 해부한다. 두려움이 밀려온다. 뭔가를 잡고 싶다. 입술은 어느새 `남무관세음보살`을 물고 있었다.

2014-11-07

달을 품은 여자

▲ 황미연수필가 그녀는 한 남자를 사랑했다. 그 남자, 가난처럼 쓸쓸한 눈매를 하고서는 사과 몇 알씩을 들고 그녀를 찾아왔다. 눈을 지그시 감고 사과를 코끝으로 가져가 향기를 흡입했다. 온돌을 데워 가난을 눕히고 싶었다. 짙은 향기가 방안을 장식했다. 해가 저물고 고요한 어둠이 찾아오면 푸른 달빛을 놓치지 않으려 서로를 끌어안았다. 남자의 발을 묶은 어둠은 방문 앞까지 와서는 더 이상 들어오지 못했다. 남자를 닮아 선량한 눈매며 도톰한 입술을 가진 아이 하나 낳고 싶었다. 그녀에게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데도 임신이 되지 않았다.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으련만,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원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도 많은데 간절히 바라는 그녀만 외면당하는 이유를 묻고 싶었다.소원은 눈물을 머금고 크는 것이라. 새벽마다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 놓고 빌었다. 새벽이슬을 옴팡 뒤집어쓰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인적 드문 산사를 찾아가 돌부처의 코를 몰래 갈아와 마셨다. 몸과 마음이 지쳐 쓰러졌다. 한 번도 잉태하지 못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환청은 귓가에서 소용돌이치더니 물살처럼 투명하게 울리며 하늘로 아득히 높아졌다.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벽에 걸린 카디건을 걸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허청걸음으로 치맛자락을 밟으며 언덕을 올라갔다. 하늘엔 둥그런 보름달이 떠 있었다. 채워지지 않아 구멍 나 있던 그 가슴으로 보름달이 푸르게 비쳐들었다. 달빛이 출렁거리자 간절함이 저절로 끓어올랐다. 달빛 아래서 가슴을 터놓았다. 투명한 보석처럼 달빛과 밀착했다. 몸 속 깊이 들어와 빛으로 가득 채워주길 바라며 몸을 열었다. 단전에 힘을 모으고 달의 기운을 흡입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자궁은 작은 달, 여인의 몸은 달의 정기의 탯줄이 달려 있어 달마다 새롭게 정혈을 모아 보름달처럼 차오르면 쏟아버린다. 그것을 쏟아버리지 않고 모아두어야만 생명이 만들어진다. 달의 정기를 한껏 들이마셔 몸속에 그대로 머물게 하여 생명을 잉태하고 싶었다. 언젠가는 둥그런 보름달처럼 그녀도 환한 달빛을 품에 안고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사람들은 그녀가 아이를 낳지 못하니 캄캄한 밤 같다하여 그믐이라 불렀다. 그믐날은 달이 뜨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하로 내려가 숨은 것이다. 찼다 이울었다 하는 달이 먹통 같은 그믐엔 지하에서 혼자 만월이 되어 조금씩 차오를 준비를 하는 것처럼 그녀도 달과 같이 호흡 한다고 생각했다. 당장은 칠흑 같지만 언젠가 지상위로 떠올라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만월을 꿈꾸고 있다.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소문은 금세 살이 붙어 통통해졌다. 남의 남자를 빼앗아와 벌을 받는다느니 씨를 만들지 못해 버림받은 남자와 산다느니, 하룻밤 사이에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기도 했다. 부질없는 소문처럼 그녀에게도 철마다 계절이 바뀌어 비어있는 가슴을 달빛이 대신 채워주었으면 했다. 옹이가 박힌 그 자리에 수도 없이 들락거리는 바람을 재우는 일은 달을 품는 것이었다.남들처럼 한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굳이 아들을 낳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아들이든 딸이든, 뱃속에 열 달 동안 품을 수만 있다면 만족했다. 그저 자식 하나 두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보는 게 꿈이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은 오래 산다지만 그러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몫으로 주어지는 긴 생을 반으로 잘라 하나의 생명과 바꾸고 싶다.그 남자, 대문간에 사과 한 알 두고 돌아섰다. 밖에서 기다리던 자동차에 몸을 구겨 넣더니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가지 마, 가지 말라고!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는 뒤통수에 대고 고함치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초저녁부터 무슨 흉흉한 꿈일까. 생생한 꿈속을 더듬으며 그녀는 마당으로 나왔다. 공중엔 달빛이 가득했다. 장독대 앞으로 다가가 걸음을 멈추었다.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달빛이 피부에 닿자 소름이 끼쳤다. 시린 빛 한 줄기가 그녀의 등을 스윽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2014-10-31

소나무

▲ 김정현수필가 친구가 귀향을 했다. 삼십 년 세월을 객지에서 월급장이 노릇을 하다가 귀거래를 한 것이다. 귀향한 지 반 년이 지나도록 얼굴을 비추지 않기에 무슨 재미가 그리 쏠쏠할까 싶어 달려갔다. 막걸리잔을 나누면서 시골살림살이를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다가 보니, 친구의 소꿉놀이 같은 삶이 내심 부럽기도 했다. 그런데, 마당귀에는 어린 소나무 몇 그루가 심겨 있는 것이 아닌가. 환갑이 다 된 사람이 소나무를 심어 언제 그 아름다움을 취할 수 있으랴싶어 나무를 심으려면 유실수를 심던가 아니면 벚나무 같은 것을 심으라고 권했다. 이 나이에 소나무를 심는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말에 친구는 그저 담담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학교에 재직하고 있을 때다. 교장선생님이 갑작스레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조경된 향나무를 캐내고 소나무를 심자는 것이었다. 수령 30년이 넘는 향나무를 캐내고 뚱딴지같이 소나무를 심자니…. 내심 반감이 솟았다. 목장지에서 나무를 사 들이고 나무 이식 전문가와 크레인을 동원하여 심고 나니 나무 한 그루에 300여 만원이 넘게 들었다. 그런데 이듬해가 되자 나무는 3분의 1 가량이 말라 죽고 말았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공자가 세한연후에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라고 했던가. 한 해 두해를 지나면서 학교 정원의 소나무는 기품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슬비가 내리는 날 창가에 서 있으면 내가 깊은 산에 들어 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식을 하면서 잘라낸 가지의 흔적이 사라질 무렵이 되자 소나무가 고결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무를 심고 몇 해가 지나서야 노교장의 혜안에 감탄을 하게 된 것이다.우리 나라의 산이란 산에 지천으로 자라고 있는 것이 소나무다. 그래서인지 우리 민족은 소나무와 가장 친근하게 살아 왔다. 땔감에서부터 집은 짓는 재료,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 심지어 구황식품에 이르기 까지 소나무는 우리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었다. 변변한 땔감이 없는 여름 장마철에 소깝 연기가 자우룩하게 피어오르면 그네들은 팍팍한 삶 때문인지, 연기 때문인지 모를 눈물을 흘리면서 어서 빨리 가을이 오기를 염원했고 늦가을이 되면 갈비를 끍??모아 아궁이를 지핀다. 갈비가 솔솔 타들어가는 모습은 정겹다.소나무의 용도가 어디 땔감에만 국한되랴. 이른 봄, 해토가 되면 농부는 진흙을 이겨 담장을 새로 수선하고 소깝을 덮어 치장했다. 마을 뒷산에서 잘 생긴 섯가래 감을 구해 집을 고치고, 외양간도 새로 손질을 했다. 밋밋하게 잘 자란 소나무는 기둥감이나 들보감으로 쓰였고, 특별히 잘 생긴 소나무는 대궐이나 북촌 대갓집 대들보로 뽑혀 서울 구경을 가기도 했다. 밑둥치가 두 자쯤 되는 나무는 관재로 쓰려고 특별히 아껴 둔다. 또 당산의 아름들이 소나무에는 신이 들어 있어서 마을을 수호한다고 믿었다.소나무는 자라면서 격을 갖추어 간다. 초부의 낫을 피한 소나무는 자라면서 나무로서의 격을 갖추어 나간다. 기둥감 정도만 되어도 사람들은 나무를 함부로 대하지 않게 되고, 100 여년 세월을 넘기면 족히 한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톡톡해 해낸다. 동네 당산 아름드리 소나무 쯤 되면 이미 경외의 대상이다. 고향 마을 입구를 늘어선 늙은 소나무는 갑옷을 입은 장수처럼 변함없이 마을을 수호하는 것이다.소나무에는 우리 민족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질곡의 세월을 겪으면서 자라났고 늙을수록 더욱 정정하고 기품이 서리는 나무가 바로 소나무가 아닌가. 우리 민족은 역사의 수많은 굽이굽이를 슬기롭게 헤쳐왔다. 그러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미 소나무가 아니겠는가. 소나무는 어울려 살아야 멋이 난다. 정이품송이니 석송령이니 하는 수백년 묵은 소나무의 기품도 대단하기는 하지만 어울려 숲을 이루고 있는 소나무만이야 하겠는가. 자식이 없는 친구는 어린 소나무를 자식처럼 생각하고 심었을지 모른다. 우리집 뜰에도 소나무 여섯 그루가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80에 가까운 노송, 50이 넘은 소나무, 그리고 스물이 갓 넘은 소나무가 더불어 숲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이나 아닐까. 친구의 그 미소가 솔향기처럼 싱그럽게 떠오른다.

2014-10-24

편지

▲ 임수진수필가 학창시절 내 취미는 편지쓰기였다. 국군 아저씨는 물론이고 먼 친척에게까지. 구구절절 편지를 써서 하얀 봉투에 넣고는 긴 치마를 팔랑대며 우체국에 갔다. 우체통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입을 벌리고 서 있다. 나는 우체통의 빨간 이마를 사랑스럽게 톡톡 쳐준다. 편지를 부친 날부터는 집배원 아저씨를 기다린다. 나의 두 번째 연인은 집배원 아저씨다. 가슴 조이며 누군가를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기다림이 얼마나 사람을 애태우는지.당시 나는 유치환의 시에 푹 빠져 있었다. 마음에 드는 시를 공책에 베껴 쓰며 열심히 외웠다. 한 구절 한 구절 어찌나 절절한지. 시인은 곧 나의 대변인이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 하나니라` 내 안의 감각들. 일제히 비늘을 세우며 일어섰다.들길을 산책하며 네 잎 클로버를 찾았다. 행운의 네 잎 클로버를 편지와 함께 동봉하고 싶었다. 마음은 이미 네 잎 클로버를 받고 기뻐할 사람을 떠올린다.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진다. 목 언저리까지 달아오른 기쁨이 손가락에 불을 밝혀 꼭꼭 숨은 네 잎 클로버도 놓치지 않는다.집배원 아저씨가 우리 집을 그냥 지나친 날은 갑자기 할 일을 잃어버린 것처럼 멍해졌다. 대문을 빠끔히 열고 내다봤다. 멀어져 가는 집배원 아저씨의 모습이 야속했다. 아주 귀한 것을 나만 받지 못한 듯 서운하고 허탈했다. 처마 밑에서 한가롭게 지지배배 거리는 제비를 향해 팔을 휘휘 내저었다. 가슴에 구멍이라도 난 걸까. 바람이 제집인 양 드나든다.간절하게 기다린 건 펜팔친구의 편지다. 2년 가까이 편지를 주고받았다. 정서적인 면에서 잘 맞았다. 그 애에게서 근 한 달 가까이 소식이 없다. 평상시 같으면 편지가 와도 두서너 통은 왔을 텐데, 불안하고 애가 탔다. 내게 온 편지가 있는데 집배원 아저씨가 깜박 잊은 건 아닌지, 쫓아가 확인하고 싶었다.그로부터 일주일 뒤 답장이 왔다. 읽어 내려가던 내 얼굴이 붉어졌다. 어머니가 심장 수술을 하셨단다. 그런 줄도 모르고 답장을 하지 않는다고 서운해 하면서 애를 태웠다. 다행히 경과가 좋단다. 마음이 놓였다.이후에도 우린 참 많은 이야기를 글로 주고받았다. 친구는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내게 잘할 수 있을 거라며 격려해 주었다. 그 시절만큼 편지를 많이 쓴 적이 있었던가. 낭만이 줄줄 흘렀던 만큼 감성이 비 온 뒤 새순처럼 나고 자랐다. 구름이 몰려오면 몰려온다고, 비가 내리면 비가 내려서, 맑은 날은 그 맑음에 반해서 편지를 썼다.정성이 깃든 편지 한 통의 여운은 길다. 깊은 맛이다. 밤새 고아낸 사골 곰탕이 이런 맛일까. 시원하고 깔끔하다. 읽은 걸 읽고 또 읽어도 재밌다. 마음이 보신한 듯 기운이 난다. 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넣고 답신이 오기를 기다리는 일이 답답하다. 더디게 회신이 오는 걸 참지 못한다. 보낸 즉시 회답이 와야 속이 시원하다. 그래서 요즘은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이용한다. 내 조급성에 어울리는 통신임이 틀림없다. 사랑한다는 문자를 몇 초면 보낼 수 있고 답신이 오는 것도 1분을 넘지 않는다.편지는 잊었다. 그나마 신혼 시절에는 남편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그 일도 귀찮아지면서 내 안의 감성은 치매에 걸렸다. 우편함은 각종 고지서와 광고물로 가득하다. 일방적 통보역할에 그친 인쇄물은 내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않는다. 그 속에 반가운 사람의 편지 한 통이라도 들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가끔 뼛속까지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편지 한 통에 대한 갈증인지도 모른다. 깊은 울림이 없는 관계의 지속에서 오는 허전함일까. 가벼운 말장난 같은 문자의 남발에서 오는 진실의 부재일까. 바닥을 치고도 기운을 회복하지 못하는 마음.남루한 누더기를 걸친 듯 볼품없이 버석거리던 들과 숲도 새순을 틔우는데 잃어버린 내 감성 내년 봄에는 되찾을 수 있을까. 문자나 이메일이 아닌 친필의 편지 한 통을 우편함에서 꺼내 드는 두근거림을 맛보고 싶다.

2014-10-17

참으로 고마웠던 선물

▲ 임정순수필가·전 EBS작가 더위에 길게만 느껴지던 여름도 어느새 가고 아침 저녁으로 바람결이 한결 선선해졌다. 방학이라 집에 와 있던 아들이 얼마전 미국으로 갔다. 떠나기 전 신형기기에 익숙치 않은 엄마를 위해 태블릿pc에 필요한 어플과 좋아하는 음악 등을 챙겨주고 가서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다. 여섯 살 터울의 형과 비교돼 늘 못미덥고 걱정이 많았는데 엄마를 생각하는 곰살맞은 마음이 찡하게 다가와 방학내 잔소리만 해댔던 게 벌써 후회된다. 작년에도 갈 때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CD로 만들어줘 아들이 보고싶을 때 들으면 적잖은 위로가 됐었다. 그래서 “녀석이 좋은 선물을 하고 갔구나 ”여러번 감동했었다.조금전 친구가 SNS에 딸이 첫월급을 받아 사보낸 선물을 찍어 올려 대화창이 환성으로 시끌시끌했다. 부모를 생각하고 정성껏 준비한 흔적이 묻어나 보는 사람도 덩달아 흐믓하고 대견하다.나도 큰 아들이 첫 월급을 받아서 주었던 수표를 차마 통장에 넣기도 아까워 한동안 간직했던 기억이 새롭다.한 친구는 얼마전 추석에 시댁에 가서 음식준비에 몸이 지칠 때 쯤 시아버지께서 슬며시 건네주신 아이스크림 봉지에 피로가 다 풀리더라고 한다. 애쓴 며느리를 위한 속깊은 촌로의 정이 느껴져 나까지 찡해진다. 오토바이를 타고 큰동네까지 나가서 사다주신 거라니 얼마나 감사했을까?때때로 서로 나누는 것들이 이처럼 마음이 담기고 상대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면 즐거움과 감동이 된다는 생각을 새삼 가져본다. 포장만 화려하고 실속없는 값비싼 물건을 형식으로 건넨다면 오히려 부담이 될 것이다.그러고 보니 내가 살면서 받은 선물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일이 떠오른다. 몇 년전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회장을 맡은 친구가 내게 총무를 맡겼을 때의 일이다. 부담스럽다는 생각에 안 한다고 펄쩍 뛰었지만 일년에 몇 번 연락 정도만 해주면 된다며 거듭 부탁했다. 지리산 주변 시골이라 우리 학년이 두 학급이었는데 연락되는 친구도 그리 많지 않고 언젠가 한번씩은 감당해야 할 일이라 끝까지 뿌리치지 못했다. 그 후 어쩌다 고향에 가면 반갑게 전화라도 해볼 친구가 있다는게 든든하고 감사했다. 그 친구는 줄곧 묵묵히 고향을 지키고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동안 동창모임에도 잘 나오지 않던 친구였다.어느날 그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감자를 수확했는데 친구들에게 보내주고 싶으니 명단을 알려달라고 한다. 친구들을 생각하는 그 친구의 넉넉한 마음이 어찌나 고마운지 가슴이 벅찼다. 이른 봄부터 밭에 나가 애써 지은 농사인데 쉽지 않은 일인걸 잘 안다. 그렇다고 수 십명에게 보내라고 하기도 염치없는 일이고 꼭 필요한 사람이 누굴까, 혹 섭섭한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 등등 고심 끝에 부모님이나 일가친척이 고향에 있는 사람들을 제하고 몇 명인가의 이름을 골라 주었다. 친구들을 생각하는 그 마음만도 감사해 나는 감자가 있노라고 단단히 일렀는데 며칠 후 내게도 택배가 왔다. 비닐테이프로 간신히 틀어막은 감자 박스를 보니 하나라도 더 넣은 정성이 그대로 전해졌다. 실한 것은 팔고 작고 못난 것들을 보내도 됐을 텐데 모두가 튼실한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여태껏 받아본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고 값지게 느껴져 감히 이웃들한테 몇알씩 나누는 것도 참았다.결혼하고도 쭉 시골부모님한테 온갖 것들을 다 얻어먹으면서도 솔직히 그렇게 뭉클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부모님은 항상 해주시니 당연하게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감자를 받은 한 친구도 행여 껍질을 두껍게 깎을까 조심하고 동창자랑을 많이도 했다고 한다. 고향을 떠나 도회지에서 살다 새삼 고향의 정, 친구의 정성을 느껴 정말 고마왔다고 입을 모았다.살면서 무슨 기념일이나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을 때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것이나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닌 기억에 남을 감동을 주는 선물들이 오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떠나면서 아들이 남기고 간 편지나 꺼내봐야겠다. 또 눈물이 핑 돌겠지만….

2014-10-10

물벼락 맞은 날

▲ 이상렬수필가사립도서관 돼지등 관장 비 오는 날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우산살을 타고 떨어지는 빗물, 그 사이로 보이는 세상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질주하는 차들의 소음과 사람들의 왁자한 소리도 빗소리에 잠겨 고요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서서히 내 품으로 다가와 곁눈 한 번 주고 안긴다. 이런 날, 빗속 풍경을 보며 사물의 언어를 길트기로 요리조리 끼워 맞추는 맛이 그만이다.하지만 이 빗속 감상은 곧 현실에 부딪혀 깨어진다. 우루루~ 사람들이 도로를 건너간다. 신호가 바뀌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여기는 2차선 도로의 횡단보도다. 몇 걸음 폴짝 뛰면 1~2초 만에 건너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서 신호를 지키자니 멍하니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무단횡단을 하자니 마음 한 쪽 구석에 숨어있던 `착한 아이 콤플렉스` 가 졸금졸금 고개를 들어 기분 찜찜하게 만들 것 같다.이곳이 그런 생각의 회색지대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신호와 상관없이 용감하게 도로를 횡단한다. 학생이나, 어른이나, 할머니나, 아이를 등에 업은 젊은 엄마나,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주저함 없이 무단으로 도로를 건넌다.이럴 때면 어김없이 내 속에는 두개의 법이 싸운다. 뭐든 과감하게 내지르지 못하면서 착하지도 못한 쪼다본성, 그리고 화인(火印)맞은 양심으로 용감하게 정도(正道)를 거스르는 본성이다. 휴…. 살다보면 그리 중요하지도 않는 이런 일에 툭하면 내적 소모전이 벌어진다.오늘도 착한 아이의 본성이 우세했다. 우산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질주하는 차들 너머로 보이는 빨간 불을 얼빠진 사람처럼 응시하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건너려고 한 발을 내디디는 찰나였다. 승용차 한대가 신호를 무시하고 내 앞으로 횡~지나갔다. 순간, 도로에 고인 물이 나를 덮쳤다. 차는 굉음을 내며 멀리 사라졌다. 피할 사이도 없이 내 옷은 흠뻑 젖었다. 법을 지킨 결과다.먼저 건넌 사람들이 뒤돌아서서 내 참담한 몰골을 보며 히죽 히죽 웃었다.꼬질꼬질한 세줄 슬리퍼를 끌며 걷던 여학생 두 명은 까르르 대면서 수군거린다. “어이구 이 등신아, 도덕군자처럼 행동하더니 꼴좋다.” 라고 말하는 같았다.난 늘 이게 문제였다. 어렸을 적 아이스깨끼 먹고 난 나무꼬치를 버릴 곳 찾지 못해 하루 종일 주머니에 넣고 다녔었다. 눈싸움 하다 내가 던진 눈덩이에 맞은 순이 얼굴이 어른이 되어서도 잊히어 지지 않았다. 이제는 어줍은 눈치의 결과, 이른바 그 놈의 철딱서니라는 `세상물`이 좀 들법한 나이인데도, 아직까지 물벼락 맞아 생쥐 꼴을 면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 용감한 횡단자들의 눈빛 말마따나 `어이구 이 등신` 이 맞다.법을 지키는 사람이 날벼락을 맞는 세상, 잽싸지 못하고 어슬렁거리면 사회의 낙오자로 치부되는 세상, `약삭빠름` 만이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반듯함`이 경시되는 세상에서 이 흐름을 거슬러 산다는 것이 오늘따라 참 버겁게만 느껴진다.툴툴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반대편에서 딸 아이의 손을 잡은 젊은 엄마가 걸어오고 있었다.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걸 보니, 맞은 편 횡단보도에서 나처럼 신호를 대기하면서 이 상황을 지켜보았던 모양이다. 옆을 지나면서 엄마는 아이에게 뭐라고 소근 소근 말하고 있다. 다 건너갈 즈음 뒤를 돌아보았다.아이의 시선은 끝까지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아저씨 등신 아니예요?”적어도 저 아이 만큼은 나처럼 물벼락 맞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니면 잽싸게 피하든지.

2014-10-03

▲ 백두현수필가박달재엘피씨 관리이사 나의 주말농장 부근 산자락에서 덫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고라니 한 마리를 보았다. 여러 명의 이웃들과 같이 보았는데 각자 설왕설래했다. 지난 계절의 만행을 생각하면 죽어 마땅하다는 사람들과 불쌍하니 놓아주자는 사람들의 의견이 저마다 분분했다. 옥수수나 콩 농사를 망친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얄미웠을까? 그대로 죽기를 바랄 것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껌벅거리는 고라니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니 측은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고라니가 많아졌을까? 요즘 차를 타고 운전하다 보면 길거리에`로드킬`을 당한 고라니 숫자가 엄청나다. 게다가 이렇게 덫에 걸리거나 사냥꾼의 총에 쓰러지는 숫자도 부지기수다. 산을 떠나 위험을 무릅쓰고 고라니가 이렇게 마을까지 내려오는 이유는 먹이 때문이다. 농작물이라도 먹지 않으면 생존이 어려운 것이다. 그들의 터전에 먹이가 부족하게 된 것은 자신들의 개체수가 너무 많아진 까닭이다. 아마도 개체수를 조절하던 호랑이나 삵 같은 최상위 포식자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리라. 산속의 환경은 그대로인데 고라니 숫자만 많아지니 그도 살기위해 몸부림치다 그만 덫에 걸린 것이다.그렇더라도 고라니는 살기위해 인간의 작물을 탐한 것이다. 살기위해 자신의 몫이 아닌 인간의 농작물을 먹어야만 했다. 사람들도 고라니를 먹어야만 했다면 서로 먹고 먹히며 그나마 개체 수 조절이 될 텐데 사람들은 고라니를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갈수록 먹을 것이 남아도는 세상인데 질기고 노린내 나는 고라니고기를 먹을 이유가 없다.숲에서는 최상위 포식자가 사라지고 사람들은 고라니 고기에 관심이 없으니 점점 고라니 수는 더 많아졌다. 그래서 사람들이 덫을 놓아 인위적인 개체 수 조절에 나선 것이다.동물이든 사람이든 모두는 자신이 살기위해 살생을 한다. 나를 지탱하고자 세상에서 취하는 것 중 생명 아닌 것은 거의 없다.사실 생(生)의 의미 자체가 다른 생을 취해야 하는 것이 우주만물의 이치이긴 하다. 문제는 고라니 같은 동물의 살생이 오히려 인간보다 인간적이라는 사실이다. 동물들은 배고플 때만 다른 생명을 취한다. 대개가 나의 배고픔에 큰 지장만 없다면 크고 작은 동물들 간 다툼이 별로 없다. 유독 사람만이 나의 생명유지와 상관없이도 다른 생명을 취한다. 지금 당장 배고프지 않더라도 살생을 하고 일종의 쾌감이나 욕심 때문에도 생명을 취한다. 어이없게도 군대에서 맞아죽기도 하고 돈 때문에 청부살인도 당하는 세상이다. 이에 비하면 단지 살기 위한 고라니의 노략질이야말로 얼마나 인간들보다 인간적이란 말인가.그뿐인가. 동물은 생존본능을 위해 발정기에만 암컷을 품지만 사람들은 수시로 이성을 품는다. 동물들은 번식을 위해 스스로 정한 짝과 교미를 하지만 사람들은 돈으로도 사랑을 산다. 경기도 포천의 한 빌라에서 발견된 사체처럼 치정에 얽혀 남편이 아내에게 살인까지 당하는 것이 인간세상이다. 덫도 마찬가지다. 동물의 덫은 종족보존을 위해 다른 동물들에게만 놓지만 인간의 덫은 욕망 때문에 인간들 스스로에게도 설치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놓은 비정한 탐욕의 덫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인간답지 못한 슬픈 덫이다.몽고지방의 사람들에겐`천장`이라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죽은 시체를 화장하거나 매장하지 않고 나뭇가지에 걸쳐놓아 지나가던 배고픈 동물이나 독수리 같은 새들이 먹도록 한다는 것이다. 시체의 살이 모두 먹이로 제공되고 나면 남은 뼈도 땅에 묻어 식물의 거름에 소용되도록 한다. 참으로 소름끼치는 일이나 그래도 그 의미는 숭고하다. 살면서 취했던 그 많은 생명들을 위로하고자 나도 누군가의 생을 위해 제 몸을 바치는 것이다. 죄 많은 인간들도 죽어 산에라도 묻히면 부디 그 시체라도 거름이 되어 좀 더 숲이 무성해지길 바란다. 그래야 온갖 덫이 많아져 상처투성이인 이 세상에서 고라니 덫 하나라도 줄어들테니까.

2014-09-26

달 뜨는 소리, 별 헤는 밤

▲ 송은경수필가아동복지 교사 결혼하고 나니 친정 식구들끼리 얼굴을 보기가 힘들다. 전국도 모자라 외국까지 나가 있으니 이웃보다 못하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입시 전쟁과 취업 준비로 바쁜 아이의 뒷바라지가 부모를 찾아뵙는 일보다 더 우선시되는 사회 풍습도 한 몫을 한다. 올해는 딸 넷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몇 년 전에 결혼한 남동생 가족도 왔다. 타국에서 근무하는 큰 형부와 캐나다에 유학 중인 조카까지 모두 모이니 시골집이 왁자하다. 스물아홉의 큰조카부터 이제 세 살이 된 동생의 아이까지 대가족이다. 식사 시간이 되면 거실에 상이 몇 개가 차려진다. 주방에는 온종일 음식을 준비하는 손길이 분주하다. 기분 좋은 노동이다.확히 말하면 아버지 자리만 비었다. 여름에 쓰러지신 아버지는 지금 요양병원에 계신다. 어찌 보면 편찮으신 아버지가 자식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 것이다. 그날 밤을 넘기기 힘들 거라는 의사의 말에 총출동된 가족이 눈물로 지새운 날이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고비를 넘기고 조금씩 건강을 회복하셨다. “낼모레쯤 퇴원해도 되겠다” 하시며 부축하려는 손을 마다하고 혼자 걷는 연습을 하신다.올여름엔 누구 하나 휴가를 제대로 보내지 못했다. 다섯 자식 모두 중환자실에서 교대로 아버지를 간호하느라 휴가를 다 써 버렸다. 누구 하나 망설임 없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 세상이 변해도 핏줄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느끼는 시간이었다. 덕분에 결혼하고 자주 보지 못했던 언니들과 모처럼 오랜 얘기도 나누었다.병실을 지키면서 딸 막내라는 이유로 나는 중환자실에서 자주 쫓겨났다. 쉰을 넘긴 큰 언니도, 나보다 훨씬 작은 체구의 작은 언니도 항상 동생 걱정을 먼저 했다. 교대로 잠깐씩 눈을 붙이려고 휴게실에 가져다 놓은 이불은 언제나 내 차지였다.아버지 곁에서 새로 쌓은 자매의 정은 더 끈끈해졌다. 이 후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 생활하다 가을의 어느 날, 홀로 계신 어머니 곁으로 다시 모인 것이다. 아버지가 편찮으신 와중에도 어머니는 논밭에서 부지런히 수확한 곡식을 다섯 보따리씩 만들어 놓았다. 저녁 무렵, 요양병원에 계신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는 옥상에 말려놓은 토란 줄기와 도라지를 또 가져오신다. 집으로 향할 트렁크에 짐이 그득하다. 당신의 몸이 불편한 중에도 병원을 찾은 손자의 용돈을 챙기는 아버지의 마음과 참기름부터 고춧가루까지 자식에게 줄 양념을 준비하느라 며칠 동안 방앗간을 오고 갔을 어머니의 사랑이 시골집에 넘친다.해가 진 하늘에 달 뜨는 소리가 들린다. 조금 기울긴 했지만, 여전히 그 빛은 환하다. 마당에 서서 가을바람 사이로 별을 센다. 별자리도 찾아본다. 반짝반짝 빛나는 별 무리를 보니 어릴 때 서로 자기별이라고 부르던 생각이 난다. 나이 들어 올려다본 하늘에 수많은 별이 빛나고 있지만, 휘영청 말 없는 달 옆에 내 별은 이제 기생충 자리로 이름 지어야 할 것 같다. 몸은 독립해서 가정을 이루었지만, 아직 부모님 없이는 먹는 것 하나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주는 대로 주섬주섬 차에 싣는 내 모습이 너무 익숙하다. 편찮으신 중에도 자식들 걱정이 먼저인 그 삶에 흡착하여 나머지 등골마저 빼먹고 있는 것 같아 죄송스럽다.자식은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부모의 살아온 모습이 그대로 자식들에게 대물림되고 생각을 이어 받아 산다는 뜻이다. 아이에게 늘 당당하던 모습이 부모님 앞에 서니 한없이 작아진다.초록의 몸을 세운 잔디가 저녁 이슬에 촉촉하다. 후텁지근한 낮의 공기와 달리 저녁이 되니 바람이 차다. 그럼에도 떠나야 할 가족들이 마당에서 서성거리며 차마 발길을 못 떼고 있다. 희미하게 보이는 서로의 얼굴과 몸짓에서 이미 익숙한 도시의 피로가 엿보인다. 잠시라도 머무를 이유를 찾은 사람처럼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사진을 찍고 별자리를 찾는다고 야단법석이다.

2014-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