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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불청객

▲ 박영희수필가 “언니들, 여기 와서 노래 한 곡해요.”시아버님의 일흔세 번째 생신날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창밖 시월의 하늘은 더없이 푸르고 내리는 햇살은 투명했다. 나와 동서들은 무난히 상차림을 잘 끝내 가벼운 마음으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때 강둑길을 지나던 낯선 차가 우리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마당으로 들어온 차에서는 낯선 여인들이 내렸다. 커피 보따리며 케이크 상자를 든 그녀들의 옷차림이 어쩐지 예사롭지 않았다. 우왕좌왕하는 사이 시아버님과 그녀들은 호들갑을 떨며 인사를 나누었다.시아버님 친구 몇 분이 더 오시고, 거실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간다. 나는 어머님의 표정을 살폈다. 우려와 달리 크게 언짢아 보이지는 않는다. 큰어머님과 고모님도 덤덤하다. 남편은 일찌감치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시동생 두 명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나와 동서들은 떨떠름한 기분이 되어 무심한 척 주방에서 얘기를 나누지만, 왠지 저쪽이 궁금하다. 그래도 고개를 들고 쳐다보기가 민망하다.파티가 끝나고 커피를 잔에 부어 앉아 계신 어른들께 쭉 돌린다. 향긋한 커피 향이 온 집안 가득 풍긴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방으로 들어가 있던 남편이 갑자기 거실로 나오더니 화난 목소리로 여인들을 향해 이제 그만 가보라고 버럭 한마디 한다. 갑자기 찬물이 확 끼얹어진 듯 분위기는 어색하고도 냉랭하다. 평소 고지식하기로 소문난 남편이다. 그도 뭔가 불편했던 모양이다.저녁이 되어 삼 형제 부부는 대구로 향했다. 차 안에서 돌아본 시댁은 정적이 감돌았다. 마을을 벗어나자 남편이 여기저기 전화를 하더니 정체불명의 불청객이 정 다방의 여인들 임을 확인한다. 통화하는 목소리에 화가 덜 식었음이 역력하다. 가족들이 모처럼 모인 집안 행사에 그것도 아이들도 있는 집에 갈 데 안 갈 데 구분 못 한다면서 안 좋은 소리를 퍼붓는다. 평소 같으면 말렸을 나도 묵묵히 앉아있다. 다음날 어머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경로회장인 시아버님의 생신을 축하해 주기 위해 단골 다방에 친구가 전화해서 이벤트를 부탁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해하라고 한다.다음 해 시부모님 두 분은 예고도 없이 홀연히 하늘나라로 가셨다. 장례를 치르고 첫 명절이 되어 거실에 모여 앉았다. 시동생의 고향 친구들도 함께였다. 아직도 고향을 지키고 있는 그들은 남편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생을 살고 있다. 그들에게 남편의 유연하지 못한 스타일은 배꼽 잡을 얘깃거리다. 그들은 술자리에서 그때 사건을 끄집어낸다. “그건 행님이 잘못했니더.”라며 하늘 같은 형님에게 충고한다.그들의 관계를 불건전하게만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마음을 다해 어르신들을 챙기는 다방 아가씨들의 인간적인 면모에 관해 얘기한다. 그들의 말투는 익숙하지 않지만, 세상의 또 다른 지혜를 깨닫게 해 준다. 그들은 술이 거나하게 취해 밤늦도록 얘기꽃을 피웠다. 천방지축이던 자신들 젊은 날의 치기와 예사롭지 않던 시부모님과의 추억담 한 구절씩을 읊으며 많이 웃고 울며 우리는 시부모님과 그날을 그리워했다.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문득 시동생 친구의 말이 떠올랐고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 남편도 그랬던 것 같다. 우리 부부는 다방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다 불건전하다는 생각을 굳게 깔고 있었던 것 같다. 시골에 남아 있는 할아버지들과 다방 아가씨들 사이에 새롭게 형성된 문화를 굴곡의 시선으로만 보려 했다. 남편은 왜 그렇게 화를 냈으며 난 그것에 동조했을까. 남편과 나는 어떤 가치의 잣대로 그리 경계를 치고 싶었던 것일까. 돌이켜보니 그날의 사건 이후 한동안 시아버님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 같지 않았다. 섭섭하셨다는 거다. 우리 자식들이 부모님 마음을 헤아리는 것 이상으로 지켜야 할 더 중요한 그 무엇이 있었단 말인가.시아버님은 생전에 무척 살가운 분이었다. 오늘따라 아버님이 무척 그립다.

2015-10-09

달로 가는 길

▲ 이아세수필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매서운 추위였다. 마당으로 나온 나는 무심코 올려다 본 까만 하늘에 깊이를 알 수 없는 희고 큰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보았다. 순간 그 자리에 멈추었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였다. 저것이 무엇일까. 구멍에서 하얀 빛이 꿈처럼 쏟아져 내렸다. 마당은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주의 이름 모를 외계의 생명체가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주변의 모든 것이 숨죽이고 숙명처럼 빛을 받아내고 있었다. 나도 빛 속으로 들어갔다.매서운 추위가 자신의 힘을 한껏 발휘하던 깊은 밤. 나뭇잎 하나 없는 앙상한 가지가 그 구멍에 살짝 걸쳐져 있지 않았다면 난 그것이 달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추위가 따뜻한 방으로 들어가라 내 등을 떠밀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달의 유혹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빛 속의 나는 이제 막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온 새끼였다. 처음 본 것을 어미라 여기 듯 저 나뭇가지만 잡으면 나는 달에 갈 수 있었다. 밤이 깊어가고 달이 커져가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가지가 내 속을 태웠다. 그렇게 환한 밤이 거짓말처럼 이야기가 되어 깊어갔다.아침에 올려다 본 나무는 열세 살 계집아이가 올라가기에는 너무 높았다. 달로 가는 길을 만들었던 가지는 하늘에 닿아 있었다. 우리 집 마당에 처음부터 있었던 나무. 난 나무에 대해 알아야 했다. 달에 가려면 나무가 출발점이 되는 것이니까.나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의 출발점은 조금씩 잊혀져갔다. 그러다 내가 어른이 된 후 우연히 가죽나무에 대해 알게 되면서 달로 가는 길을 찾던 유년의 기억이 떠올랐다.대나무처럼 순을 먹는다 하여 죽(竹)나무라 불리는 나무가 있다. 그런데 이 죽나무와 너무나 흡사한 나무가 하나 더 있다. 생김새는 같은데 냄새가 지독하고 독성이 있어 그 순을 사람이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가짜 죽나무라는 의미로 가죽나무라 불리게 된다. 쌍둥이처럼 닮은 것 중 쓸모없는 하나를 가죽나무라 이름 붙였으니 다른 하나를 그냥 죽나무라 부르기 심심했는지 진짜를 의미하는 참죽나무라 불렀다. 다른 한편에서는 가죽이 가짜 중을 의미하는 가승(假僧)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름의 유래야 어찌되었든 가죽나무는 가짜라는 것이다.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가죽나무의 순을 따서 먹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 가죽나무의 순은 사람이 먹을 수 없다 하였는데 어찌된 일일까.어쩌다 이런 오해가 생겨났는지 모르겠지만 가죽나무라 불리는 나무가 사실은 참죽나무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진짜를 가짜라 부르면서도 그 순을 따서 먹고 있다. 그럼 진짜 가죽나무는 무엇이라 부를까. 그것도 그냥 가죽나무다. 진짜도 가짜, 가짜도 가짜가 되어있다.그래도 신기한 것이 사람들이 말로는 다 가짜라 하면서도 진짜를 은연중에 찾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경험한 겨울밤의 이야기가 꿈인지 현실인지 굳이 구별하지 않아도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있는 것처럼.살다 보면 종종 어느 것이 가죽나무인지 참죽나무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리고 내가 보는 나의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신이 서질 않을 때도 많다. 흑과 백을 구별하는 것이 모호하거나 아니 굳이 구별을 해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도 있다.그럴 때 난 눈을 감고 유년의 아름다웠던 겨울 저녁을 떠올린다. 맑은 달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던 진짜이면서 가짜라 불리는 나뭇가지를 잡아 본다. 그럼 두 번 다시 경험할 수 없는 그날 밤의 하얀 빛이 내 몸 구석구석 피가 되어 돌아다닌다. 항상 바로 눈앞의 현재를 살아야 하는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 나에게 달로 가는 길을 만들어 주었던 가죽나무의 가지는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게 한다.

2015-10-02

차향에 마음을 뺏기다― 다산 초당을 찾아서

▲ 박경혜 수필가조붓한 산길이 마음을 잡는다. 가을볕이 설익었는데도 구절초, 들국화가 한창이다. 봄꽃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수수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이 가을꽃의 매력이다. 눈길 닿는 곳마다 자잘한 꽃들이 한껏 풍만해지려고 몸을 부풀리는 중이다. 이른 시간이라 길을 안내하는 이슬 맺힌 풀들의 모습이 더 청초하다. 다산 초당 가는 길. 그분이 걸어가신 유배 길을 따라 걷는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걷던 길이라 생각하니 애달픈 마음이 먼저 길을 나선다. 불혹의 나이에 유배라는 이름으로 산길을 오르며 그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 풀꽃 하나, 나무 한 그루에도 모두 그분의 눈길이 스쳐 가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길섶의 모든 풀이 예사롭지 않다.귀한 인연은 따로 있는 것일까. 귀양을 간 다산은 주막에 들러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고 한스러워 한숨만 쉬고 있었다. 낙망하고 있는 그분이 범상해보이지 않았던지 주막집 여주인은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기르셔야 하지 않겠는가!”하고 따끔하게 충고했다. 흘려듣고 말수도 있었을 한갓 늙은 주모의 말이 다산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던가. 그는 주막의 방 한 칸을 얻어 사의재(四宜齋)라 이름 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집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니 귀하디귀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많이 배우고 잘 난 사람만 좋은 스승이겠는가. 적재적소에서 만난 사람이 가장 좋은 인연이고,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산이 걸어 오르던 산길이다. 드러난 뿌리들이 밟히고 밟혀 반질반질 윤이 난다. 땅 위로 솟구친 나무뿌리가 세월을 엮어 만든 아치가 있다. 이곳을 다녀간 한 시인이 `뿌리의 길`이라 이름 붙이고 시를 지었다. 다산은 모든 길의 뿌리였다는 그의 말에 깊이 공감하며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나이도 더 된 것 같은 뿌리를 어루만져 본다.초가로 지어진 다산초당이 허물어지고 없다. 대신 그곳에 기와를 올린 건물이 우뚝하니 서 있다. 소박하고 정갈한 초당의 모습을 기대했는데 아니어서 좀 실망스럽다. 다만 작은 연못에 돌을 쌓아 만든 아담한 연지석가산이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린다.일행이 걸음을 재촉한다. 다산이 차를 배우러 수없이 걸었던 백련사 가는 길을 따라 밟는다. 도중에 `해월루`가 있다. 사방이 훤하게 트였고, 멀리 강진만이 내려다보인다. `바다 위에 뜬 달`이라는 뜻으로 지었다니 그 이름에 걸맞게 수려하다. 정말이지 팔베개하고 누우면 시 한 수가 절로 읊어 질 것만 같은 풍광이다. 다산의 주옥같은 시들 중 다수가 이곳에서 탄생했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혜장선사와 자주 만나 담소를 나누고 우정을 쌓던 곳도 바로 여기다.이른 아침이다. 수확한 차 중에서도 가장 향이 좋고 으뜸인 우전차를 들고 백련사를 나선 혜장과 따뜻한 물을 준비해 초당을 나선 다산이 해월루에서 만난다. 온 산에 가을이 깃들고 풀벌레소리도 요란한데 서로 반가이 마주하여 안부를 확인한다. 은은하게 우러나는 차향에 마음을 담아 주거니 받거니 시 한 수가 뚝딱이다. 찻물이 떨어지고 햇발이 성글어 질 때까지 지칠 줄 모르는 담소가 이어진다. 해가 서산에 걸릴 즈음에야 내일을 기약하며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서로 돌아선다.현대인은 빨리 빨리라는 말에 길들어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며 산다. 성급한 인스턴트에 익숙해질 후대의 자손들에게 차를 덖고 말리고 향을 우리는 느긋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가르쳐주기 위해 다산은 그리도 열심히 공부했던가. 차를 만들고 우려내는 일은 짙은 향과 더불어 상대방을 오래 내 몸에 간직하고 기억할 시간을 만드는 작업이다. 문득 그런 사람이 내게 몇이나 되나 짚어보는데 생각이 진전되지 않는다. 가슴에 돌멩이 하나가 얹힌다.나는 누군가의 뿌리가 되어준 시간이 얼마나 있었던가. 살아오며 깊은 향이 나는 사람을 소홀히 하여 잃은 적은 없었는지, 또 내가 누군가의 향 짙은 차이기를 무심결에 놓쳐버린 적은 없었는지.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을 거쳐 다시 뿌리 길을 되짚어 돌아오는 동안에 기억을 더듬으며 생각이 많다. 어느새 가을볕이 제법 이울어 있다.

2015-09-18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자꾸 오는 것이었다 ― 토산못 이야기

▲ 이경희수필가·경일대 외래교수 토산못에 노을이 내려앉는다. 못둑 너머로 보이는 서녘 하늘에 한 무리의 새떼가 날아간다. 흑백으로 떠오르는 토산못의 풍경은 내 무의식과 육체에 깃들어 있다가 미명 속에서 하나둘씩 형체를 드러내는 물체처럼 되살아난다. 실체가 없는 그림자를 좇아가듯 나를 찾아 나선다. 토산못은 내 생의 수원지 혹은 뿌리의 은유와 같은 공간이니까. 못둑에 도열해 있던 큰 나무가 환영처럼 떠오른다. 작은 여자아이가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동무와 같이 못둑을 걸어간다. 이 못에서 멱을 감고 스케이트를 타던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내 의식 속 유년기의 공간은 빛나는 폐허다. 생의 기저를 이룬 공간에 대한 천착은 파편화된 시간에 대한 복원작업이다. 시간에 매몰된 기억을 하나씩 건져 올려 꿰매고 연결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최근이다.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자꾸 오는 것`이라는 시구를 발견하던 시점부터다. 솔직히 몇 년 동안 낡은 언어와 진부한 감상이 직조된 회고조의 글쓰기에 조금 질려있던 참이다. 하지만 나도 늙음을 향해 간다는 자각은 냉혹한 진실이 아니던가. 생의 비등점에서 끓어오르는 비애가 목까지 차오르면 유년기의 고향을 떠올린다. 그곳은 무쇠 난로의 온기처럼 따스하다.토산못은 내 고향 경산 진량에 있는 저수지다. 큰 강을 모태로 두지 못한 대지는 늘 물이 귀했다. 게다가 지층이 청석이라 물을 오래 머금지 못하고 흘려보낼 수밖에 없다. 토산못은 대구 근교의 낚시터로도 유명했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논에 필요한 물을 대는 중요한 수원지였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 아낙들의 빨래터였으며,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지금은 일부가 매립되어 예전보다 크기가 줄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마을 앞산에 골프장이 들어서기 전까지 토산못에는 가시연꽃, 물밤, 말나물 등이 자랄 정도로 맑은 물이 그득했다. 못둑에는 아름드리 물버드나무가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했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삶의 터전이었던 셈이다.바다를 처음 본 것이 초등학교 6학년 수학여행 때였다. 그때까지 토산못이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큰 바다였다. 억울하게 죽은 아기 귀신이 다른 아이를 잡아간다는 속설이 난무하던 시절, 토산못에는 익사사고가 잦았다. 여름 방학과 얼음이 녹을 무렵 동네 아이가 한 명씩못에 빠져 죽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식들을 별나게 단속했다. 무더운 여름날이면 동네 아이들은 낡은 팬티만 걸치고 토산못으로 뛰어들었다. 세숫대야를 앞에 쥐고`쫑대`라 부르는 보 근처에서 헤엄을 치면서 놀았다. 겁이 많았던 나는 나무 그늘에 앉아 줄지어 기어가는 개미를 바라보거나 그것도 심심하면 풀각시 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봄볕이 도타워지면 못둑에 연둣빛 풀이 돋아났다. 놀다가 배가 고픈 아이들은 간식으로 삐삐순(삘기순)을 뽑아 먹었다. 피막을 까면 나오는 연한 새순을 먹으면 단맛이 났다. 삐삐순이나 찔래순을 먹고 나면 입안에 풀 향기가 가득했다. 초여름 손이 미처 닿지 못하는 풀숲에 숨어있던 산딸기를 향한 유혹은 얼마나 강렬하던가. 성장기의 공간과 그 공간에서 만난 몇 개의 풍경은 흩어진 기억들을 모아 입체적으로 복원시켜 준다. 그 첫 번째 공간이 토산못이다. 다행스럽게도 토산못은 아직도 고향에 남아 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토산못의 풍경은 변했다. 가장 안타깝고 아쉬운 것이 못둑의 나무들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그 나무가 만들어주던 그늘의 넉넉함과 그 사이를 불어오던 바람의 결은 아직도 생생한데 말이다.본래 생이란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의 보행처럼 지난하고 완강하지 않던가. 그 길에서 가끔 돌아보는 유년의 시공간은 생생하고도 아련하다. 유년기는 식물성의 시간이다. 경쟁이나 생존의 절박함이 없는 무균실과 같은 시간이기에 순결한 자연의 나를 만날 수 있다. 존재와 공간은 운명적으로 엮어진다. 그 공간에 피어나던 작은 풀꽃 같던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고, 늙어간다는 사실은 슬픈 진실이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쓸쓸하지만 감미롭다. 실존적 삶에 매장당한 기억과 공간을 탐사하는 일은 미래의 나를 맞이하는 준비이기도 하다. 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자꾸 오는 것이기에.※에세이 제목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자꾸 오는 것이었다`는 이문재의 시 `소금창고`에서 따왔다.

2015-09-11

찔레꽃

▲ 임영길 수필가올해도 찔레꽃이 피었다. 하얀 찔레꽃을 보노라면 무명치마저고리 한 벌로 청춘을 다 보낸 어머니 생각이 난다. 짓궂은 바람 한 줄기 여린 꽃잎을 흔들며 지나간다. 청아한 향기에 가슴이 설렌다. 왜 너만 피면 코끝이 시큰거릴까. 아마도 기억 저편 남모르는 그리움 때문이리라.하루해가 다 가고 개밥별이 돋도록 산나물을 뜯으러 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제 어미가 안 오고 있는데 감자만 먹고 있다며 벼락을 내렸다. 놀란 형은 안고 있던 감자 바가지를 밀쳐놓고 기둥에 매달려 있던 남포등을 벗겨 들었다. 심지를 한껏 돋우어 불을 키우고는 큰골을 향해 집을 나섰다. 그 길은 새벽에 어머니가 산나물을 뜯으러 간 길이다.들판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동네를 벗어나 다랑논이 있는 들길 어귀에 이르러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풀숲에서 반딧불이 몇 마리가 푸른빛을 내며 날아갔다. 무논에서 극성스럽게 울어대던 개구리가 발걸음 소리에 울음을 뚝 그쳤다. 대체 어머니는 지금 어디쯤 오고 있을까.좁은 들길을 지나 산길 초입에서 어머니를 불렀다. 어디선가 “오냐!” 하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으면 좋으련만, 내 목소리는 금세 어둠에 묻히고 적막이 우리를 에워쌌다. 어쩌면 어머니가 어둠 속에 길을 잃고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늦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점점 그 생각이 굳어지면서 나도 몰래 그만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한참 훌쩍이는데 큰골 초입 어둠 속에서 “오냐!” 하는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소리를 향해 달려갔다.어머니는 산나물로 가득 채운 커다란 보퉁이를 등에 지고 어둠을 더듬어 내려오고 있었다. 우리를 보자 맥이 풀렸는지 길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머니의 긴 날숨에서 휘파람 소리가 났다.열여덟에 아버지와 혼인한 어머니는 딸 둘을 낳고 남편을 징용에 보냈다. 일제 수탈이 절정에 이르던 때라 굶어 죽지 않으려면 송기도 벗기고 무릇도 캐야 했다. 군불조차 넉넉하게 때지 못하는 엄동설한에는 두 딸을 끌어안고 아침을 맞았다. 남편 없이 홀로 지켜낸 어머니의 세월을 내가 어찌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원망으로 변해 갈 즈음인 해방을 한 해 앞둔 어느 날 아버지가 돌아왔다.남편이 돌아왔지만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북해도에서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며 탄광에서 일한 아버지의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도회지 큰 병원에 가면 나을 수 있다고 했지만, 읍내 의원조차 마음 놓고 갈 형편이 못 되었다. 설마 죽기야 하겠냐며 버티던 아버지는 끝내 한쪽 다리를 병마에게 내주어야 했다.설상가상이라고 그 와중에 육이오가 일어났다. 그리고 일 년 뒤 사내아이가 하나 또 태어났으니 그게 나였다. 큰 누님이 출가도 하였는데 동네 사람 보기도 부끄러웠다. 복중에서 호된 고통을 치르고도 나는 섣달 어느 날 건강하게 태어났다. 미역을 사지 못해 첫 국밥을 뭇국으로 때우고 빈 국그릇을 눈물로 채웠노라고 틈만 나면 되뇌었다.어머니 무덤가 돌담 틈에 찔레나무 한그루가 돋아났다. 어떻게 뿌리를 내렸는지 반갑고 고맙기 그지없었다. 정성스레 가꾸어 당신 보듯 하리라 마음먹었는데 이듬해 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뿌리가 깊으면 산소에 해를 입힌다고 형님이 지난 한식날 찔레나무를 캐내고 영산홍을 심었다. 봄마다 영산홍은 화려하게 피어나지만, 어머니는 늘 찔레꽃 속에 있다. 다소곳이 앉아 있던 꽃잎들이 기다리기라도 한 듯 불어오는 바람결에 하얀 나비가 되어 하늘로 날아오른다. 꽃을 떨군 빈 가지는 외로움에 파르르 떨고, 나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에 가슴을 움켜쥔다.수목원 산책길에 질박하게 피어난 찔레꽃을 본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눈부시지 않고 소박한 모습에 마음을 뗄 수가 없다. 기다리지 않아도 때가 되면 꽃은 다시 피건만 네 마음의 찔레꽃은 필 줄을 모른다. 마음을 옮기지 못하고 찔레꽃 속을 서성이는데 오월의 바람 한 줄기 옷깃을 스치고 지나간다.

2015-09-04

마지막까지 안전은 필수

▲ 이강동 대구북부소방서장 경산수필회원뜨거운 태양의 열기가 한풀 꺾인 느낌이다.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결이 다르다. 파란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이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같다. 휴가철인 8월은 많은 사람이 산과 바다를 찾는다. 교통체증도 무릅쓰고 산으로 바다로 떠나는 이유는 무얼까. 세상살이에 지친 심신을 자연에서 위로받기 위해서이다. 올여름에는 다행히 큰 사고 없이 8월이 끝날 것 같다. 시민들의 안전에 대한 의식도 예전보다 높아졌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사고는 늘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느닷없이 찾아오니까.정지용의 연작시 `바다9`는 여름 바다의 풍경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면서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를 보고 `바다는 뿔뿔이/ 달아나려고 했다/ 푸른 도마뱀 떼같이`라고 표현했다. 푸른 도마뱀 떼처럼 청춘들도 여름이면 바다로 몰려간다. 무쇠도 삼킬 청춘에게 바다는 도전과 모험의 상징이다.생명의 시원인 바다에 대한 아쉬움이 많았을까. 뒤늦게 바다의 낭만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해수욕장을 찾는다. 물놀이하는 사람도 드물고, 안전요원도 철수한 한가한 해수욕장. 늦더위가 찾아온 터라 모래사장에서 느끼는 체감온도는 아직 여름이다.용기와 도전은 젊은이의 특권이다. 하지만 지나친 만용은 화를 부른다.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고 뒤늦게 바닷가로 여행을 떠난 젊은이들이 있었다. 바닷가 모래사장에 텐트를 치고 입대를 앞둔 친구의 송별회를 겸한 늦은 휴가였다.청춘의 낭만을 만끽하던 일행은 누군가의 제안으로 밤바다를 향해 질주했다. 파도가 밀려오는 밤바다는 매혹적인 광경을 연출했다. 바다를 향해 달려가 몸을 담그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추위에 입술이 새파래진 몇몇이 다시 모래사장으로 나왔다. 텐트로 돌아온 일행은 배가 고파 라면을 끓여 먹기로 했다. 그런데 친구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곧 돌아오겠거니 여겼다. 라면을 다 먹고 밤이 이슥토록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제야 사건의 심각성을 깨달은 일행은 밤바다를 향해 친구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한 시간여를 목 놓아 불렀건만 파도 소리만 되돌아왔다. 뒤늦게 119구조대에 신고를 하고 수색을 했다. 다음날 오후에 친구는 말이 없는 시신으로 돌아왔다. 사망 원인은 심장마비였다. 갑자기 낮아진 바닷물에 술을 마신 채 뛰어든 것이 화근이었다. 임계점을 넘어선 청춘의 열정은 사선을 넘고 말았다.물놀이 익사사고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막을 수 있다. 어른들은 음주 후 갑자기 물에 뛰어들었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할 확률이 높다. 수영 실력을 과시하거나 혹은 수영 미숙으로 인한 사고도 있다. 어린이는 함께 간 부모의 무관심 속에 혼자서 물놀이를 하다가 사고를 당하는 사례가 많다. 수영금지라는 표지판이나 익사사고 위험구역이라는 표지판이 있는 장소는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깊은 소가 수면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건강상태가 좋지 않을 때나 몹시 배가 고프거나 식사 후에는 수영하지 말아야 한다. 야외의 강이나 저수지의 물은 표면 온도는 따뜻하나 깊이에 따라 온도가 낮아지므로 신체에 이상이 올 수 있다.자연은 인간에게 위안처이다. 도시생활과 삶에 지친 사람들이 산으로, 바다로 행렬을 이루며 떠난다. 바다나 산은 인간에게 많은 혜택을 베풀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악마의 얼굴을 드러낸다. 폭풍우가 치는 바다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가. 자연 앞에서 겸손을 잃고 거만해지는 순간 자연은 인간을 용서하지 않는다. 이성과 과학의 힘으로 자연을 정복했다지만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미물과도 같은 존재일 뿐이다.대부분의 사고가 `설마`하는 안전 불감증에서 비롯된다. 바다나 계곡으로 떠날 때에는 안전수칙을 필수품처럼 챙겨가야 한다. 제대를 앞둔 병사들은 군대 말년을 조심해야 한다는 격언을 가슴에 새긴다. 휴가의 절정기는 지났지만 해수욕장이나 물놀이장이 폐장한 이후에도 안전사고의 위험은 늘 잔존한다. 마지막 남은 여름을 안전하고 건강하게 잘 보내야 한다. 곧 여름이 끝날 테지만, 물놀이의 안전수칙은 아직도 유효하다. 파도가 연잎처럼 오므라들었다 펼치는 늦여름의 바다에 안전의 비상등을 꺼서는 안 된다.

2015-08-28

토룡의 수난

▲ 원용수수필가 동이 틀 무렵에 범어공원 등산로를 오르다가 길바닥으로 기어 나온 지렁이를 보았다. 한두 마리가 아니고 여러 마리이다. 그들은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지나간 자리에는 고상한 빗살무늬가 그려진다. 지렁이가 산 아래로 내려가는 것으로 보아, 산 밑에 개울이 있으리라 믿는 것 같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개울에는 물이 없으니, 이를 어쩌랴. 한 달 가까이 비가 오지 않고 폭염주의보만 내린다. 낮은 찜통더위이고 밤은 열대야이다. 그들이 움직이는 속도로 보아 물이 없는 개울이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차례오동이다. 길바닥을 자세히 보았더니 사람들이 토룡을 밟아서 성한 놈이 없다. 지렁이는 몸에서 나온 진액으로 땅에 엉겨 붙어있다. 개미가 달려든다. 쇠파리가 경고 사이렌을 울리며 넘보기 시작한다. 모르고 한 짓이지만 생명이 죽어가니 이를 어찌하랴. 다윈은 지구 표토의 20인치는 지렁이의 체내를 통과한 흙이라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지렁이를 지구의 창자라 하였다. 사람들이 지렁이가 유익한 용(龍)인 줄 알았으면 밟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 모르고 한 짓이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살갗으로 숨을 쉬는 지렁이는 비가 많이 올 때 땅 위로 나온다. 땅속에 습기가 많아서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왜 나왔을까? 땅 속에 습기가 없어서 더 나은 곳으로 갈려고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땅 위에는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 습기가 없다. 몸에 마른 먼지가 닿으면 움직이지 못한다. 아침 해가 솟아오르면 몸은 마르기 시작한다. 가도 가도 딱딱하고 메마른 땅이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 살아서 움직이는 토룡을 숲 속으로 던져 본다.내 인생에 이렇게 절박한 때가 있었던가. 지렁이는 미물이지만 유익한 생물이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지 못하는 내가 너무 한심하다는 심정이다. 나는 행운아였다. 잘 먹고 잘 입지는 못 해도, 끼니를 잇지 못하여 물만 마시고 팔을 벤 적도 없고, 남루한 옷에 벌벌 떨어본 기억도 없다. 우리 이웃들도 모두 편안하게 살고 있다. 굶어죽는 국민이 없다. 열대지방처럼 식수를 찾아 헤매는 국민도 없다. 이렇게 살기 좋은 나라에서 토룡이 수난을 당하다니 뜻밖의 일이다. 철새들은 살기에 적합한 곳을 찾아 이동하고, 연어나 은어는 산란하려고 떠났던 곳을 다시 찾아온다. 그들은 오랜 기간 이동에 필요한 준비를 하고 몸을 단련해 둔다. 그러나 한 곳에만 머물러 사는 토룡은 이동에 필요한 훈련을 하지 않았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지내다가 갑자기 당하는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는 처지가 안타깝다.살아서 잘 움직이는 댓 마리를 흙과 함께 종이컵에 담고 밭둑에 받아둔 빗물을 조금 넣었다. 집으로 와서 화단에 구덩이를 파고 쏟아 놓았다. 기운이 없는지 꿈적도 하지 않았다. 화단 흙이 조금 마른 것 같아 수돗물을 한 바가지 부어주었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다. 수돗물의 약 기운에 취한 것 같기도 하다. 그냥 두고 아침 식사를 하러 들어갔다.우리 마당에는 지렁이가 많이 있다. 집에서 생산되는 음식쓰레기는 그들이 다 먹어치운다. 지렁이 기르는 상자를 별도로 만들지 않고 음식 쓰레기를 칼이나 가위로 잘게 썰어서 흙으로 덮어둔다. 짠 음식은 물에 씻어서 준다. 그들이 먹고 만들어내는 분변은 비료가 된다. 화학 비료를 사용하지 않아도 화초나 채소들이 잘 자라고 있다. 토룡이 다칠까 봐 농약은 사용하지 않는다. 가끔 병충해가 발생하면 직접 잡거나 천적을 이용한다. 내가 겪어보니 토룡은 착한 청소부요, 퇴비를 생산하는 비료공장이요, 새 흙을 만드는 농부이다. 토룡(土龍)은 말 그대로 땅을 관장하는 용(龍)이다.아침을 먹고 나갔더니 지렁이가 모두 없어졌다. 그들의 모습을 보려고 땅을 파다가 한 마리를 겨우 찾았다. 가느다란 몸이 통통해 졌다. 붉은 갈색이 검붉게 변하였다. 몸에서 윤이 났다. 잡아당겨도 잘 나오지 않았다. 손끝에 와 닿은 촉감이 좋았다. 다른 녀석들도 모두 튼튼하게 변했으리라. 한편 산에서 죽어가는 토룡이 생각났다. 소나기라도 한 줄기 왔으면 좋으련만, 폭염이 너무 오래간다. 며칠 뒤, 밤에 비가 내렸다. 그날에는 길에 토룡이 나타나지 않았다. 아침마다 죽어가던 토룡이 보이지 않으니 앓던 이가 빠진 것 같았다.

2015-08-21

할매와 손녀

▲ 이재경 수필가 # 머리 빗기할매 : 어린 손녀를 앞에 앉혀 머리를 빗기고 있다. 빗질을 하면서도 까다로운 손녀가 신경이 쓰인다. 마무리 머리통을 쓰다듬어도 더 예쁘게 되질 않는다. 벌써 머리통을 흔들어대는 손녀의 모습에서 불만이 느껴진다. 손녀가 머리칼 묶은 고무줄을 당겨 풀어버린다. 곱게 묶여 있던 머리칼이 순식간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눈으로 잘 보이지도 않는 가는 머리칼을 얼마나 힘들게 싸잡고 고무줄을 댕겼는데. 괘씸하기보다 성질 부리는 손녀를 어찌해야할지 막막함이 앞선다.손녀 : 머리는 이모가 빗겨주는 걸 좋아한다. 할매는 머리도 맘에 들게 묶지 못한다. 아무리 말을 해도 대답만 할뿐 머리를 빗어주는 모양은 같다. 이모가 빗겨주고 출근하면 좋겠는데, 할매는 이모의 출근이 늦다고 그냥 가라며 등을 떠밀다시피 했다. 맘에도 안 들게 묶으면서 이모를 그냥 보낸 할매가 밉다.# 시장가기할매 : 집에서 놀고 있으면 얼른 다녀오겠구먼, 어린 걸음에 맞춰 시장을 보려면 힘이 든다. 복잡한 시장 통에서 아이를 잃어버릴까 얼마나 신경 쓰이는지 아이는 모른다. 몇 년 전 할배가 시장에서 아이를 잃고 얼마나 놀랐는지 일주일을 생 몸살을 앓았지 않은가. 그 일이 있은 뒤 시장을 데려가기가 꺼려진다. 오늘따라 집에서 놀고 있으라고 하는데도 꾸역꾸역 따라온다. 눈을 부라려도 한 팔을 들고 때리는 시늉을 해도 그때뿐이다. 돌아서면 또 따라온다.손녀 : 시장에 꼭 따라가고 싶었다. 할매가 없는 빈집에서 해질 때까지 놀아야 하는 게 얼마나 지루한지 모른다. 할배는 목침을 베고 코를 골며 자거나 산삐알 밭에 물을 들고 오라고 했다. 양동이에 물을 담고 걸어가다 보면 물은 흘러 치마를 적시고 얼마 남지 않는다. 무겁고 하기 싫었다. 할매를 따라 시장에 가면 시장 입구에 있는 큰 가게에서 마론 인형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운이 좋으면 만져 볼 수도 있다. 오늘은 때를 써도 통하지 않았다. 할매는 나를 안 사랑하나보다.# 껌 훔치기할매 : 어릴 때 한번은 겪는 일이다. 어떻게 넘겨야할 지 걱정이 된다. 가겟집 아줌마가 손녀가 동네 큰 아이들이 시켜서 껌을 한 통 훔쳐갔다고 했을 때 부끄러움과 걱정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손녀를 불러 안방에 꿇어앉히고 방문의 잠금 쇠를 걸었다. 아이의 큰 눈은 손에 쥐고 있는 빗자루만 쫓아다닌다. 빗자루를 거꾸로 들고 엉덩이를 세게 때려도 울음소리를 삼키며 눈물만 흘린다. 아이가 경기라도 안 하려는지 걱정이다. 고운 아이 매 한 대 더 때리기가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던가.손녀 : 무서운 언니가 불렀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언니는 가게를 가리키며 저기 가서 껌을 한통 들고 나오란다. 돈이 없다니까 그냥 가져오면 나중에 언니가 돈을 준단다. 심부름하는 거라며 그래야 착한 아이란다. 언니 말을 안 들으면 우리 집 고양이가 저주를 받아 죽는단다.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고양이가 유일한 친구인데 고양이가 죽으면 심심할 때 같이 놀아줄 친구를 잃게 된다. 안방을 나오는 할매의 손에 빗자루가 들려져 있다. 들어오란다. 껌 때문임이 틀림없다. 할매는 도둑질이 젤 나쁜 짓이라고 말했었다. 빗자루가 지나간 자리는 아팠지만 고양이를 생각하며 참았다. 껌을 훔쳐 고양이를 살렸다. 지금 나는 맞아도 고양이는 산다. 고양이는 고마워 할 거야.할매와 손녀는 43년을 함께 살았다. 이별이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지난 날 할매가 죽고 싶다고 한탄 섞인 말을 뱉으면 허락 없이 죽으면 그 구덩이에 같이 묻힐 것이라고 악다구니 치던 손녀였다. 손녀는 43년 뒤 숙연한 맘으로 할매를 고이 보내드렸다. 몸은 갔어도 기억으로 추억 속에서 함께한다. 할매와 늘 함께하고 있음을 손녀는 느낀다. 심장이 뜨겁게 뛴다. 만지면 평온을 찾던 할매 찌찌의 몰캉함이 생생하다. 그때처럼

2015-08-07

봉수와 자전거

▲ 백승분수필가·열린수필 동인 시원한 강바람을 가르며 자전거가 `쌩`하고 지나갑니다. 강변을 따라 난 자전거 길에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신나게 질주합니다. 주로 혼자지만 더러는 뒷자리에 예쁜 아가씨를 태우고 놀며 쉬며 가는 모습도 보입니다. 무슨 이야기가 그리 재미있는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그림 같은 풍경에 이끌려 세월을 되돌려봅니다.시골아이들이라면 누구나 타는 자전거를 나는 타지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이나 되었지만 겁이 많아 배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5리가 넘는 길을 걸어 다니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옆집 봉수 자전거 뒷자리에 타게 되었습니다. 걸어 다니는 내가 안쓰러워 봉수어머니가 생각해 내신 거였지요. “봉수야, 승아는 체구가 작아서 태워 다녀도 되겠다. 인정머리 없이 혼자 먼저 달아나지 말고 뒷자리에 태워줘라.”나는 겁나고 부끄러워 싫었지만 아침잠을 더 잘 수 있겠다는 생각에 못 이기는 척 뒷자리에 올라앉았습니다. 그러나 생각처럼 편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엉덩이도 아프고 울퉁불퉁한 길을 지날 땐 곧 떨어질 것 같아 좌불안석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남학생의 허리를 끌어안을 수도 없어 옷자락만 겨우 잡고 있자니 불안했습니다. 첫날은 천천히 가더니 날이 갈수록 어찌나 속도를 내는지. 할 수 없이 봉수 허리를 힘껏 끌어안았습니다. 무서움을 이기지 못한 부끄러움은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학교에 도착할 때면 봉수는 땀을 비 오듯 쏟았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다음부터는 가방만 싣고 나는 걸어가겠다고 했더니 봉수가 사색이 되어 손사래를 쳤습니다.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자전거 타는 실력을 얕보는 거냐며 버럭 화를 냈습니다.“이 바보야, 천천히 가면 힘도 덜 들고 나도 무섭지 않을 텐데 왜 그렇게 쌩쌩 달리냐.” 볼멘소리를 하며 달려드니 봉수도 지지 않았습니다.“네가 자전거를 탈 줄 몰라서 그래. 빨리 가는 게 훨씬 쉽단 말이야.”추우나 더우나 봉수 자전거 뒤에 타고 다니며 호사를 누렸습니다. 아쉽게도 봉수는 6학년이 되자 전학을 갔습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한데다 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남달랐던 봉수 부모님께서 중학생이 되기 전에 도시로 보낸 것이지요. 떠나던 날 그믐밤같이 캄캄한 봉수의 표정을 보고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쉬운 건 내 쪽인데 봉수가 왜 저럴까 싶었지요. 의문을 풀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었으니까요. 봉수를 다시 만난 건 40여 년이 지나 어느 날 동창회였습니다. 세월은 봉수와 나를 어린 시절의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로 바꿔 놓았습니다. 그럼에도 옛날 모습 그대로라며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스러운 거짓말로 서로 위로했습니다.“승아야! 나는 세월을 되돌릴 수 있다면 초등학교 5학년으로 가고 싶다. 아침마다 너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달리는 그 기분이 어땠는 줄 아니. 빨리 달리면 달릴수록 내 허리를 어찌나 꽉 잡던지 신이 나서 자전거 바퀴가 저절로 굴러가는 것 같았어. 그런데 넌 여자아이가 왜 그리 눈치가 없냐.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정신이 없는데 넌 무섭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없는 아이 같았거든. 내 마음을 몰라 주어 섭섭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속마음을 알아차릴까 봐 두렵기도 했어.“이 나쁜 녀석! 겨우 옷자락만 잡고 앉아 있는데 빨리 달린다고 꼭 잡으라는 바람에 네 허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잖아. 그걸 노렸구나. 늑대 같으니라고. 그때 네 흑심을 알았다면 절대로 타지 않았겠지. 그런데 니네 어머니가 태워 주라고 하셨을 땐 투덜거리며 싫어했잖아.”“선뜻 대답하면 속마음을 들킬 것 같아 싫은 척한 거지. 사실 지금까지 우리 엄마가 그때만큼 내 마음을 잘 알아준 적이 없었다는 것 아니냐.” 봉수와 나는 초등학생이 되어 실컷 웃었습니다. 아마 봉수가 조숙했던가 봅니다. 나이가 두 살이나 많았거든요. 고운 추억을 접어 가슴 깊숙한 곳에 넣고 강을 따라 걷습니다. 쨍쨍한 햇살이 강물 위에 내려앉습니다. 눈이 부십니다.

2015-07-31

제3의 맛

▲ 이기창수필가 수미문학회장 고대 빙하기에 `맘모스`라는 동물이 살았다고 한다. `맘모스`는 먹이를 찾아 유라시아 대륙에서 아메리카 대륙까지 이동했는데, 이때 인류도 사냥감인 `맘모스`를 따라 아메리카 대륙까지 가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른바 `소금길`이라고 하는 `맘모스 스텝(Mammoth Step)`이다. 먹이를 찾아 한발 한발 스텝을 옮기는 거대 동물과 인류의 발자취에는 `소금`이 있었다. 소금과 관련된 진한 추억이 있다. 고등학생 시절 일 년여 동안 자취 생활을 했다. 한 번씩 시골집에 다녀오면 쌀 한 포대와 얼마간의 반찬을 가져왔다. 어느 겨울날 한 번은 친구 여럿이 몰려오는 바람에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 한꺼번에 쌀과 반찬을 축내고 간 까닭에 시골 다녀오기 전에 바닥이 났다. 주머니도 비어서 하는 수없이 쌀은 주인집에 사정해 빌렸으나 반찬까지 빌릴 수는 없었다. 며칠을 간장만 가지고 밥을 먹었다. 그때 간장에 비벼 먹은 밥맛을 잊을 수가 없다. 처음엔 그런대로 먹을 만했지만, 나중에는 짠맛에다 쓴맛 덩어리 밥을 찬물 도움으로 넘겨야 했다. 간장이 소금으로 만들어졌으니 짠 건 당연하지만, 연탄불 피우느라 흘린 눈물까지 보태어졌으니 짠 정도가 아니라 소태맛이었다. 그래도 탈나지 않았던 건 그때 간장이 천일염으로 담은 자연식품 덕이 아니었던가 싶다.인류 최초의 맛인 소금의 짠맛에다 단맛, 매운맛에 향료와 화학조미료가 첨가되면 묘한 감칠맛이 난다. 현대 과학의 산물인 이른바 `제2의 맛`이라는 조미료 맛이 우리 입맛을 점령했다. 천연 양념으로 맛을 낸 음식을 즐기던 우리가 `제2의 맛`에 감염되어 그 대가를 값비싸게 치르고 있다. 만연하고 있는 각종 암이나 성인병이 화학조미료가 내는 감칠맛의 비싼 대가라는 말이 있다.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수년 전에 `제3의 맛`을 예고했다. 제3의 맛은 식품 그 자체가 손맛과 숙성의 시간을 통해 만들어내는 살아있는 맛이다. 발효식품이 그것이다. 이미 우리 조상이 오래전부터 즐기던 맛을 서양의 미래학자가 새삼스럽게 주장한 것이다. 발효 시품은 우리의 된장과 김치가 기본이고 각종 젓갈류에다 식초가 있고 전통 술이 있다.거의 반천 년 전에 조선의 선비 김유(綏)가 쓴 `수운잡방(需雲雜方)`이라는 조리서는 한식의 사전이 되었고, 그로부터 백여 년 뒤에 장 씨 부인이 한글로 쓴 `음식디미방`은 한식의 `레시피 (recipe)`로 다시 태어났다. 한류의 인기에 더해져 한식이 소스 맛에 찌든 서양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니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다행히 우리 부부가 수년 전부터 발효식품을 담가 온 것이 헛된 일은 아닌 듯싶다.해마다 춘삼월이 오면 매화가 만발한다. 봄바람이 매화 향기를 실어 나르니 꿀벌이 생명 잔치를 벌인다. 꽃은 머지않아 열매를 맺고 비바람과 구름을 벗하며 온전한 매실로 자랄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굵어지는 올몽졸몽한 모습이 농부에게는 꽃보다 당신이다. 하지(夏至)가 가까워지면 열매는 황금빛을 띠면서 그윽한 향기를 낸다. 이때쯤 농부는 한 알 한 알 거두어들이느라 비지땀을 흘린다. 물맛 좋은 지하수를 길어와 매실 식초를 담근다. 숨 쉬는 옹기에 삼사 년 동안 잘 숙성시키면 비로소 제3의 맛을 지닌 매실 식초가 탄생한다. 옹기 속에서 익어가는 식초가 여러 사람의 입맛을 돋우고 건강을 지켜 주리라 생각하면 그동안 흘린 땀방울이 잘 익은 매실처럼 커지는 보람을 느낀다. 자연 본래의 맛은 살아 있기에 숙성이라는 시간을 타고 맛깔스러운 맛으로 진화를 거듭한다. 간장이나 식초를 오래 숙성시키면 살아있는 효소가 스스로 진화해서 보약 같은 귀한 식품이 된다고 한다.`맛`이라는 말은 참으로 오묘한 데가 있는 말이다. 바다처럼 넓고 깊은가 하면 새털처럼 가볍기도 하다. 우리네 전통 음식의 참맛은 깊고 은근함이 가없어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다. 음식 맛뿐만 아니라 사람 사는 맛처럼 깊은 맛은 세월을 통해 오감으로 느끼고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맛이다.한마디로 멋있는 맛은 숙성이라는 이름으로 진화한 맛이 아닐까 싶다.

2015-07-24

된장을 담그는 까닭

▲ 임은주 수필가 비채 인성교육센터 원장 식사 초대를 받았다. 일 년 전에 진 빚을 갚겠다고 하셨다. 막상 당일이 되니 폐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망설여졌다. 빚이라니!, 내가 그분께 빚 받을 게 있었던가. 여러 해 전인가 보다. 지인의 소개로 그분과 인연이 닿았다. 어느 모임에서 내가 만든 된장이 도마 위에 올랐는데 지인의 맛있다는 칭찬에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때마침 그해 우리 집 된장이 맛있어져서 혼자 먹기도 아깝고 자랑도 하고 싶어, 된장과 간장을 보내 드린 적이 있었다. 며칠 뒤 “도시처녀가 시골에 전학 와서 처음 맛보는 시골 맛에 얼굴이 붉어지더라.” 라는 고맙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 인연이 벌써 여러 해, 어느 해는 된장이 떨어졌는데 언제 줄 거냐고 연락이 오기도 했다. 비싼 것도 아니고 귀한 것도 아닌 것을, 늘 빚이라 하며 이자까지 쳐서 맛있는 음식을 사 주시곤 한다.주말주택을 하면서 이웃에 계신 할머니께서 맛보라며 된장 간장을 조금 나누어 주셨는데 첫맛에 마음을 홀딱 빼앗겨 버렸다. 그날 이후 밥 먹을 때마다 생각이 나서 할머니를 졸라 된장 담그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특별한 비법은 없으며 공기가 좋고 물맛이 좋고 햇빛이 좋으면 좋은 된장이 된다고 하셨다. 더 추가한다면 정성과 손맛이라 하셨다.큰 항아리를 씻어 말려놓았다. 짚에다 불을 붙여 항아리를 소독하고 물을 부었다. 일 년 동안 간수를 뺀 소금을 넣고 큰 주걱으로 휘휘 저으면서 소금을 녹인다. 팔이 아프도록 젓고 나서 달걀을 넣어 농도를 맞추고 메주 한 말을 망 두 개에다 나누어 넣었다. 뒷밭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메주를 누르고 대추 몇 알과 붉은 고추 몇 개를 넣고 마지막으로 숯을 띄우고 한지로 입구를 밀봉하여 항아리 뚜껑을 덮었다. 의식을 치르듯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올해도 맛있는 된장을 먹을 수 있게 해 주소서.`두 달이 지나 된장과 간장을 분리하는 날, 새끼손가락으로 간장을 찍어 먹었는데 그 맛이 달콤한 꿀맛 같기도 하면서 우물 속처럼 깊었다. 오랜 세월 주부로 살아오면서 아직 간장 맛이나 된장 맛에 매력을 느껴 보지 못한 터였는데 이 오묘한 맛을 어디에 비교할 수 있으랴.맛있는 간장을 혼자만 먹기 아까워 온 동네방네 자랑을 했다. 어떤 지인은 가소롭게 보는 이도 있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내 손으로 만든 된장 간장 맛이 이렇듯 맛있는데 무슨 문제가 될 것인가. 맛있는 간장을 혼자만 먹기 아까워서 여러 지인과 나누어 먹었고 또 먹은 이들이 맛있다며 감사하다는 말을 전할 때 난 세상의 부자가 부럽지 않았다.내가 무엇으로 부자가 될 수 있겠는가. 세상에는 부자들이 많다. 난 공무원의 아내로 살아온 지 이미 오래다. 경제적으로 부자 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럼에도 나는 늘 부자였다.어릴 적에는 가난이 싫었다. 돈이 없다는 것이 창피해서 가난한 내색은 절대 하지 않았다. 가끔 심부름으로 누런 봉투에 쌀을 사왔던 기억. 넉넉한 것이라곤 딸이 많다는 것뿐이었다. 엄마는 돈이 생기면 제일 먼저 쌀독에 쌀을 먼저 들여놓고 다음에는 연탄 100장을 들여놓는다. 그런 날이면 배가 부르고 부자 부럽지 않다고 하셨다. 어린 나이라 그때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마흔을 넘기면서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그렇게 엄마를 닮아 가고 있었다.김치를 담아도 10포기, 총각김치 8단, 열무김치, 파김치를 넉넉하게 담는다. 매년 제철이 되면 마늘지, 깻잎지, 오이지, 마늘장아찌, 다시마지 등 저장 음식들도 담는다. 누가 맛있다고만 하면 언제든지 한 그릇 퍼 줄 수 있는 여유가 좋다. 누가 찾아와도 빈손으로 보내지 않게 무엇이든 퍼 주어야 마음이 편안하다. 어떤 이는 오지랖 넓은 사람이라고도 하고 친척들은 퍼주기 좋아하고 아낄 줄 모르는 성격 때문이라고도 한다. 누가 뭐래도 내가 좋으면 그만 아닌가. 남을 위해서가 아니고 나를 위한 일이다. 내가 부자가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나는 늘 부자였던 것 같다.

2015-07-17

알몸의 추억

▲ 이상도 수필가·이상도 신경과의원장 5월 중순인데도 낮 기온이 체온보다 더 오르는 성급한 여름이다. 아까시나무의 가지들은 부풀어 올라 뜨겁게 꽃을 피워 숨 멎을듯한 향기를 천지에 뿜어낸다. 짙은 쑥 향기를 풍기며 쑥대는 실팍하게 자라 들녘을 풋풋하게 채운다. 그 황홀한 향기들을 맡으며 풀벌레들도, 산새들도 생명의 환희를 노래한다. 달려온 여름이 취하도록 좋아 채소밭의 들깻잎과 마늘 대는 한층 풍성해지며 온실 속 풋고추들도 쑥쑥 자라 불뚝불뚝 힘깨나 쓰고 있다. 여름의 문턱에 서면 이십여 년 전 5월 어느 날 싱가포르 창이공항에서의 황홀감을 잊을 수 없다. 비행기 탑승구를 내린 순간 온몸을 휘감아 전율시킨 아열대의 열기와 습기, 그로 말미암은 젊은 생명력의 숨 가쁜 팽창! 그때 `아! 나의 조상은 아프리카인이었을 거야`라 탄성하였다.계절은 도심의 거리에서 비로소 체감된다. 젊은 아이들의 치마와 반바지가 한껏 올라간 여름의 동성로 산책길은 매력이 넘친다. 자랑스레 한껏 드러낸 노출된 몸에는 곧 터질듯 한 젊음이 가득하다. 그래 벗어버리자, 거추장스런 문명을 모두 벗어던지고 원시의 순진무구한 알몸으로 다시 돌아가자. 오래전 아프리카에서처럼, 태초의 낙원에서처럼. 아담과 이브가 되어 서로의 알몸을 감고 감기며 뜨거운 여름보다 더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보자.벗어버리면 얼마나 자유한 지를 처음 느낀 곳은 학회차 방문한 캐나다 밴쿠버에서였다. 명문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근처에 나체 해변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애써 가보았다. 대학 뒤편에 캠퍼스와의 경계를 이루는 지방도로가 있고 그 차도를 건너 몇 분간 숲 언덕길을 내려가니 해변이 있었다. 해변은 넓디넓었고 조그만 인공물도 보이지 않아 자연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바닷가에는 알몸들만이 있었다. 더러는 바닷속에 있었으나 대부분은 혼자 또는 여럿이서 모래 위에 눕거나 앉아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알몸으로 바다로 뛰어 들어가 수영을 즐겼다. 그 경쾌한 평안함은 한 올이라도 걸치지 않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경지였다. 수영복 걸친 상태로 물속을 잠영하며 형형색색의 열대어와 함께 즐겼던 필리핀 세부 섬 리조트의 맑은 비췻빛 앞바다는 이곳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으나 여기서 느낀 낙원의 자유함을 선사하지는 못했었다.남김없이 벗어야 비로소 얻게 되는 자유함. 에덴의 낙원은 자연처럼 모든 것을 벗어버릴 때 다가온다. 한 올이라도 걸치면 실락(失)의 삶이 시작된다. 진리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는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나며 똑똑하여 스스로를 가리는 자에게는 가려진다. 사실 감추어둔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져서 드러나게 마련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알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부활하였다. 갓 태어난 세존(世尊)은 알몸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설파하였다. 경허(鏡虛) 대선사는 속세의 어머니를 위한 특별법회를 열고 참석한 어머니와 대중 앞에서 알몸을 드러내어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여주는 무언(無言)의 법문을 하였다.여름은 자연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서 자연이 되고픈 계절이다. 산과 계곡, 강과 바다에 머무르면서도 자연이 되지 못하는 것은 그곳에서도 벗지 못하고 꼭꼭 감추어둔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원죄 같은 치부가 있다. 그것이 드러날 경우 자존감이 손상되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견딜 수 없는 불안과 불안정에 휩싸여 인간은 은밀히 그리고 필사적으로 이들을 감춘다. 옷과 함께 마지막 남은 꼬장꼬장한 체면마저 던져버리고 알몸으로 서면 하늘과 땅이 그를 자유인으로 새롭게 낳을 것이다.몇 년 전 그리스 로도스 섬에서의 추억이 아련하다. 북쪽은 에게 해, 남쪽은 지중해 양 바다가 만나는 폭 일 미터 정도의 섬 서쪽 좁은 땅에서 알몸으로 두 바다를 헤엄쳤다. 바다를 나오니 경계 없이 부는 바람이 온몸을 남김없이 포옹해주었고 분별심 없는 햇볕이 젖은 몸을 말려주었다. 아름다운 이국(異國)의 바다가 한없이 평온한 자유와 기쁨을 준 것은 모든 것을 벗어 버리고 자연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리라.

2015-07-10

친구, 잘 가게나

▲ 김창석 수필가·홍익출판사 대표 우리는 저마다 고유의 향기를 지니고 태어났다. 삶에 있어 만남은 필연일까. 귀중한 친구가 한둘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유년시절의 우정은 더욱 남다르게 느껴진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처럼`인생은 굵고 짧게 살아야지`하던 친구가 생각난다.사무실에 자주 드나들던 친구가 어느 날 대학병원 응급실이라며 연락이 왔다. 학교에 근무하면서 주유소도 경영하는 친구였다. 지나친 욕심이 과오를 불렀을까. 금융사고로 IMF가 시작될 무렵 직장과 함께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도피 생활을 하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새벽부터 끼니도 거른 채 막노동으로 그날그날 벌어먹고 살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몸에 이상을 느끼고 동네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이렇게까지 몸을 혹사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당장 큰 병원으로 가 정밀검사를 받으라고 소견서를 내밀었다. 곧바로 대학병원 응급실로 찾아간 친구가 가장 먼저 나에게 연락을 한 것 같다. 그는 동네 병원에서 늘 건강검진을 받아왔지만, 이번 만큼은 자신도 겁이 났던 모양이다.친구의 입원 사실을 친구들에게 알렸다. 그는 입원하여 치료를 받으면 십 여일 후엔 퇴원할 수 있을 거라고 혼자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병실에 누워있는 친구에게 적은 돈을 건네며 쾌유를 빌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친구의 병은 호전되지 않았다.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답답한 친구의 부인은 좋은 사람들 옆에 놔두고 왜 저리 누워있는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더 이상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친구는 아들 삼 형제를 두었다. 그중 막내가 군복무 중에 달려왔다. 자식을 알아보기는커녕 의식도 없이 거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정작 본인은 퇴원 날짜만 기다리고 있을 터인데 힘을 내라고 마음속으로 아무리 응원을 보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무심한 운명의 시간만이 턱밑에서 기다릴 뿐이었다.멀리 있는 친구들에게도 연락을 보냈다. 이곳에서 다들 모이기로 했다. 꺼져가는 촛불을 바라보며 병실을 나와 식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위중하다는 기별에 늦게 도착한다는 친구도 있었지만 그리운 친구들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친구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한바탕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신은 좋은 사람을 먼저 데려간다더니만 열심히 일하고 인생도 즐기며 살아갈 한창 좋을 나이에 데려가다니. 오늘따라 저승사자가 야속하기만 하다. 분위기 메이커로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었던 친구의 영정을 바라본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진 속의 친구는 젊은 모습으로 환히 웃고 있다.조화를 주문했다. 미처 연락 못한 친구들에게도 기별을 넣었다. 한자리에 모인 친구들은 자기 발로 걸어 들어가 불과 십여 일 만에 죽어 나온 그에게 허무함을 감추지 못했다. 숨이 붙어 있는 친구를 보고자 뒤늦게나마 먼 길을 달려온 친구도 인생의 무상 앞에 끝내 참았던 눈물을 보였다.친구의 아내는 먼저 간 남편이 불쌍하다며 우리를 붙잡고 오열했다. 왜 하필이면 오늘이냐고 통곡을 했다. 아차, 그러고 보니 오늘이 친구의 생일이었다. 이럴 수가! 친구는 처음 세상에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는 중이었다. 죽음은 곧 삶이고 삶은 곧 죽음이란 말인가. 어쩌면 죽음은 새로운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못다 한 삶을 천국에서 이어가길 바라본다. 마음을 비우니 친구의 모습이 편안해 보인다. 친구의 무덤에 언제 또 올 수 있을까. 고인이 평소 좋아한 소주 한잔을 따라놓고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한 잔의 술이 위로가 될 순 없지만`죽음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야. 잘 가게 친구. 다음 세계에서 꼭 만나세.` 속으로 되뇌며 고개를 숙인다. 생명의 마지막 종착점이자 새로운 출발지인 이곳에 친구만 남겨두고 발길을 돌린다.비가 내린다. `인생은 굵고 짧게`를 외치던 그 친구가 오늘은 못내 그립다. 나도 이제 늙긴 늙었나 보다. 없던 눈물도 생겼으니 말이다. 내가 병마와 싸울 때 누구보다도 먼저 걱정해 주었던 친구. 다가오는 제삿날엔 친구가 아꼈던 술 한 병 사 들고 찾아가 지난날을 추억하며 회포를 풀리라.빗방울이 굵어진다. 떠난 영혼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2015-07-03

밥 한 숟가락

▲ 이금태 수필가 한국수필문학회 이사참새 지저귀는 소리에 잠이 깼다. 어제 먹다 남은 개 밥그릇 언저리에 머리를 디밀고 밥알을 쪼아 먹는 참새들은 인기척에도 놀라지 않는다. 먹이를 주면 늘 한 숟가락가량의 밥을 남기는 개 때문에 마당에 참새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어린 시절, 여덟 남매가 다투어 자라던 우리 집에 먼 친척뻘 되는 아저씨가 종종 식객으로 머물렀다. 아저씨는 밖의 일을 보다가도 끼니때가 되면 어김없이 아버지와 상을 마주하였다. 넉넉잖은 살림에 때때마다 오시던 아저씨가 얄밉기도 했지만, 밥상머리에서 입담 좋게 풀어놓는 그분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참 재미있었다. 어머니는 손님 밥을 항상 고봉으로 수북하게 담았지만, 아버지는 그 위에 한 숟가락의 밥을 더 떠서 얹어 주시곤 했다.그 시절 고등교육을 받은 아저씨는 아는 것도 많았고,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넘나들며 같은 이야기라도 귀가 쏠리게 하는 이야기꾼이었다. 그분의 과거사를 어린 우리는 알 수가 없었지만, 부모님은 때를 잘 못 만난 탓이라고 하셨다. 식솔이 많아 끼니 해결조차 절박하던 형편에 아버지는 소복이 떠 얹어주는 한 숟가락의 밥으로 형편이 어려워서 찾아오는 일가붙이에 도와줄 수 없는 미안한 마음을 대신 했으리라. 대소가에서 아버지가 제일 먼저 도시로 이주하셨으니 집 안에는 친가, 외가의 객식구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식구 건사하기도 어려운 처지에 객군에게 한 끼 밥 대접하는 일을 어머니는 버거워하셨다.아버지는 밥을 아주 천천히 드셨는데 늘 마지막 한 숟가락 정도의 밥을 남기셨다. 어머니가 조금 적게 밥을 담는 날에도 어김없이 밥은 남아 있었다. 제대로 된 밥 한 그릇 배불리 먹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니 당연히 아버지의 남긴 밥을 서로 차지하려고 우리는 눈독을 들였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가 남긴 하얀 쌀밥이 먹고 싶었지만, 그 밥은 남자 형제들이나 입이 짧은 언니의 몫이었다. 어쩌다 내가 밥그릇을 차지하는 날이면 어머니는 눈을 곱게 흘기셨다. 어린 마음에 겨우 차지한 밥그릇을 빼앗길까 봐 허겁지겁 밥을 먹느라 목이 막혀 딸꾹질하곤 했다.백수라도 할 것 같이 건강하셨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먼저 보낸 후 손수 수저를 들고 식사를 하지 못하였다. 떠먹여 드리는 한 숟가락의 밥에 집안 대소사며 멀리 사는 자식들의 안부를 몇 번씩 확인하고서야 그 밥을 삼키셨다. 용하게도 한 숟가락 정도의 밥이 남을 즈음이면 어김없이 손을 내 저으셨다.늙으면 먹는 힘으로 사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나는 아버지께서 한 톨의 밥알을 남기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부모는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행복하다는데 자식은 천천히, 겨우 밥을 삼키는 아버지께 어서 드시라고 짜증을 냈다. 지금 생각하면 하루 세끼 밥을 먹여 드리는 것으로 위세를 떨었던 내가 참 부끄럽다.햇살이 마당 가득하던 봄날, 애틋한 눈빛을 남기고 당신은 떠나셨다. 아버지의 제사를 모시고 나면 오빠는 한 숟가락의 밥을 수북이 떠서 접시에 담아 대문 앞에 내놓았다. 윗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제례법이 아니었는데 오빠의 새로운 제례의식에 우리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살아생전 남기시던 밥으로 여덟 남매의 주린 배를 채워 주고 싶었던 당신만의 자식 사랑법이란 것을 철이든 이후 우리들은 알았다.오랜만에 오빠 내외가 집에 왔다. 혼자 살아가는 누이집이라 자주 들리지는 않았지만 끼니때에 맞추어 다니러 온 오빠 내외와 밥을 먹었다. 식사하고 난 오빠의 밥그릇을 보았다. 한 숟가락의 밥이 남아 있었다.“오빠, 요즘 남긴 밥은 부부간이라도 안 먹어.” “아니 그냥 배가 불러서….”멋쩍게 웃는 주름진 오빠의 얼굴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마음이 따뜻해져 온다. 떠 얹어주는 밥 한 숟가락, 남기는 밥 한 숟가락, 밥 한 숟가락은 세상을 향한 아버지의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였다.봄빛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뜨락에 제 밥그릇 한 귀퉁이에 밥알을 남겨둔 채 콧등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늙은 개가 졸고 있다. 후루룩 참새가족이 한마당 날아드는 화창한 봄날이다.

2015-06-26

삼강주막

▲ 김상규수필가·수미문학회 회원 삼강주막을 뒤로하고 빠져나오는 발길이 아쉬웠다. 다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뒤를 돌아보게 했다. 무엇인가 모를 미련이 승용차 안까지 뒤따라와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게 했다. 때에 찌든 마음과 가식이 삼강에 씻긴 듯 홀가분하다. 깃털같이 허공으로 둥둥 날아오르는 기분. 무엇이 이토록 가볍게 만들었을까? 주막 바로 앞 살평상에 주안상을 가운데 두고 문우들이 빙 둘러앉았다. 부침개와 두부, 묵을 안주 삼아 막걸리 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몇 순배 돌았을까? 얌전을 빼던 문우가 해롱거렸다. 냄새도 맡지 못한다던 술을 한 잔이나 마셨다. 풀리지 않던 빗장을 나룻배에 실어 보내고 알몸으로 앉았다. 거추장스러운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나면 저렇게 홀가분할까. 여느 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한 문우의 익살스러운 유머가 술기운과 함께 무르익어 갔다. 배를 움켜잡고 깔깔대며 웃음을 멈출 줄 모르는 문우들. 옛 주막의 농익은 기운을 옮겨 놓은 듯했다. 때론 젊은 시절의 밀폐된 공간을 잠영하듯 엿보다가 잊힌 첫사랑을 떠올리며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순백의 아름다움이 함께 일렁이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는 삶을 터득하기라도 한 듯.긴 강물이 꼬리를 물고 술래잡기하듯 유유히 흐른다. 굽이굽이 산을 돌고, 들판을 가로질러 바다까지 흘러가야 하는 먼 여정이지만 서두름이 없다. 그저 쉼 없이 흐르기만 한다. 낙동강의 흐름을 엿보던 내성천이 지친 몸을 맡기듯 섞여 한 줄기를 이룬다. 숨결을 죽이며 조심스레 다가서던 금천이 큰 강의 손짓에 휩쓸려 등에 업힌다. 모태가 다르고, 성질이 다르고, 빛깔이 다른 물이 몸을 섞어 아무 거부반응도 없이 한 호흡을 이루며 여행하는 모습이 경이롭다.회나무 그림자가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내려와 옷자락을 붙잡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좁디좁은 주막 안의, 멈춰선 시공간 속으로 하나둘 경쟁이라도 하듯 빨려 들어갔다. 좁은 문을 들락거리는 주모의 발걸음이 잦아짐을 엿보았다. 해거름에 한둘씩 모여드는 나그네들이 꽉 찬 공간을 비집고 들어와 살갗을 맞대었으리라. 허기진 마음을 주모의 컬컬한 막걸리 한잔과 곁들인 걸쭉한 농으로 채웠으리라. 주막의 좁은 방안을 가득 메우는 과객의 푸진 이야기가 나그네의 밤잠을 설치게 했으리라. 하루의 고달픔을 풀어 젖히고 잠을 청하는 보부상이 향수가 얽힌 긴 사연을 회나무 가지 끝에 매달았으리라. 삶이란 녹록지 않을 터. 봇짐 속에 꼬깃꼬깃 구겨 넣어둔 가족들의 크고 작은 애환도 함께 잠재웠으리라.쉴 곳이 있다는 것은 꺼질 것 같던 불씨를 활활 타오르게 할 수 있음이다. 동쪽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길게 육백 리를 흘러와 북쪽으로 치솟아 굽이치며 내성천과 금천을 끌어안고 남쪽으로 또 칠백 리를 흘러가야 하는 낙동강의 장대한 기운이 정점을 이루는 곳이 삼강주막이다. 오백 년이 넘는 세월만큼 키를 높인 회화나무의 위용을 등에 업은 여남은 평의 주막이 묵객과 보부상이 마음을 내려놓는데 더할 수 없이 소중한 보금자리였으리라. 방안의 온기가 쌓인 피로를 녹아내리게 하고, 하룻밤이란 짧은 시간이, 살갗을 맞대고 주고받는 정담이 지친 삶을 가다듬게 해 주었으리라. 쉼이란 단순한 쉼이 아닌, 지나간 삶을 뒤돌아보게 하고 다가오는 날들을 알차게 가꾸어가려는 준비 기간이다. 쉼은 정지가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의 진행형이다. 쉼은 마음의 불순물을 걷어내고 삶을 정제하는 시간이다.삼강이 몸을 섞고, 문우들이 둘러앉아 정을 섞고, 묵객과 보부상이 마음을 섞고, 현재와 과거가 공간을 섞어 한데 어우러져 흐르는 것이 강물이고 삶이다. 바다를 향해 흐르는 것이 강물이라면 미지의 세계를 향해 흘러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리라.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를 미워할 것인가. 무엇을 탐하고 무엇을 비울 것인가. 바다를 향해 물길을 연 낙동강을 따라 미지의 꿈을 좇아 내달은 삶의 고단함도 함께 흐르고 있다.오랜 세월을 두고 겹겹이 쌓인 많은 사람의 애환과 피로를 무언의 몸짓으로 끌어안기만 했을 삼강주막의 환영이 땅거미 지는 어둠 위에 깔리고 있다.

2015-06-19

등(燈)

▲ 노정희수필가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 등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 존재한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는 말이 크게 다가오는 사월초파일. 원래는 부처님을 목욕시키는 `욕불절(浴佛節)`이라 하는데, 암흑에 빠진 중생을 밝음으로 이끄는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연등행사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에 등을 밝히는 것을 등석(燈夕) 또는 관등절(觀燈節)이라고 한다. P씨는 불심이 돈독하다. 차량봉사는 물론 절의 행사에도 지극정성이다. 부처님 오신 날, 불자들이 등을 밝히느라 북적였다. 등불을 밝히듯 지혜를 밝힘이 우선되어야 하지만 현실은 물질이 우선되어야 `낯이 서는` 모양이다.언젠가부터 종교도 사업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떠돌아다니는 것에 마음이 편치 않다. 시선은 두둑한 지갑에 꽂힌다. 푸른 지폐의 개수에 따라 등 모양과 크기가 다르고, 등이 자리하는 위치도 달라진다.연등접수가 한창인데 노쇠한 할머니 차례가 되었다. 할머니는 속곳에서 꼬깃꼬깃 접어두었던 돈을 꺼내었다. 삼만 원, 아들 며느리 손자 이름까지 빽빽하게 적어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또 부탁했다. 부처님을 모신 법당 안에 등을 달고 싶단다. P씨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할머니와의 대화를 지켜보던, 옆자리에서 연등접수를 함께하던 보살이 `어찌 그럴 수 있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형평성을 따지며 삼만 원짜리 등은 감히 법당 안에 달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P씨는 가난한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부처님의 자비가 아니겠느냐며, 사람마다 돈의 가치는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할머니의 삼만 원은 `있는 집`사모님의 삼십만 원보다 더 큰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반론했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며 패가 나뉘어졌다. 되느니 안 되느니 소란이 벌어지자 급기야 큰스님이 달려와서 중재하였다.옛날 인도 사위국 여인 `난다`는 부처님께 등불을 올리고 싶었다. 그러나 형편이 어려워 공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구걸하여 얻은 동전 두 닢으로 기름을 사서 작고 초라하지만, 정성껏 등불공양을 올렸다. 법회가 끝나고 시간이 흐르자 다른 등불은 꺼졌으나 난다의 등불만은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참된 공양과 보시는 물질이 아닌 정성이었음을 일깨워주는 일화가 아니겠는가.P씨는 속이 상했다. 참된 교리가 무엇인지 회의를 느끼는 중인데 마침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거금을 희사하겠으니 등을 달아 놓으라는 것이었다. P씨는 정성을 다해 등을 달아주었다. 얼마 후, 한껏 위세 등등하게 절에 도착한 친구는 법당 안팎을 둘러보며 자신의 등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소위 특석에는 등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P씨를 찾아온 친구는 자신의 등이 보이지 않는다고 의아해 했다.P씨는 손가락으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해우소를 가리켰다. 친구는 안색이 하얗게 변해갔다. 법당 안에서도 눈에 띄는 자리에 떡하니 달아야 할 등을, 법당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외곽지고 허름한 화장실 앞에 걸어두다니. 거금에 맞지 않는 처사라며 울분을 토했다.P씨는 친구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었다.“부처님은 어두운 곳에 불 밝히는 사람을 좋아한다네. 어두운 해우소 앞에 등을 밝혀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 부처님 뜻을 받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2015-06-12

오란비

▲ 문혜란 수필가 오후의 볕살이 하도 오달져서 뒷산을 오르다가 비를 만났다. 반환점을 눈앞에 두고서다. 숱 많은 굴참나무 밑동에 기대어 비가 멎기를 기다린다. 토독 토독 톡 토독, 살찐 빗방울이 흙 위에 동그란 발자국을 찍는다. 비와 교접하는 마른 대지가 숨 가쁘게 뿜어내는 흙냄새는 엄마의 젖가슴을 열었을 때처럼 비릿하면서도 구수하다. 베어 말리는 풀 향기도 섞여 있다.소나무 침엽 끝에 매달린 물방울이 진주처럼 반짝인다. 도심의 포도 위에 콩 튀듯 쏟아지는 소란스런 빗소리가 젊은이들이 즐기는 테크노음악이라면, 잘 썩은 부엽토 위에 사뿐사뿐 내리는 비는 차분한 클래식이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비는 시든 나뭇잎을 위한 탱탱한 수유의 시간이다. 청진기를 갖다 대면 가지마다 쪼르륵 쪼르륵 제 몸속으로 물 길어 올리는 소리 들리겠다.그해, 망종도 되기 전에 시작된 장마는 논바닥에 베어 눕힌 보리를 갈무리할 새도 없이 붉덩물에 잠겨버렸다. 고슬고슬 마르지 않으면 도리깨타작은 불가능하다. 여우볕에 말려보려고 물에서 건져낸 보릿단을 안고 밭두렁으로 산비탈로 옮겨 다녔다. 오랜 투병환자의 욕창을 막기 위해 수시로 닦고 돌려 눕히는 병수발이었다. 거두어 쌓아둔 보리 더미에서도 두엄냄새가 피어올랐다. 한 알의 이삭이라도 건져보려고 뒤집고 헤집기를 계속했지만 거둘만하면 다시 젖기를 반복했다. 한 달여 계속된 장마에 보리는 결국 아래로는 뿌리를 내리고, 위로는 잎을 키웠다. 힘 좋은 머슴들도 어찌해볼 수 없는 애간장 타는 일이었다.보리는 가난과 배고픔의 상징이다. 전해에 수확한 양식은 바닥나고, 보릿고개를 참지 못해 영글지도 않은 풋보리를 삶아서 죽을 쑤어 먹던 집들이 있었다. 가난한 농가에 보리양식은 곧 생명줄이었다. 한 톨의 밥알도 먹을거리에 대한 훼손은 금기였으니 배고프지 않아도 되는 집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어머니의 한숨이 밤마다 한 음씩 높아가더니 종내는 끙끙 앓는 신음소리로 변해갔다. 농사일을 두량 하며 몸을 혹사해온 어머니에게 곡식은 자식이나 진배없었다. 가축이 텃밭의 남새 한이랑 짓이겨도 탈기를 하는 것이 농부의 심정인데 수확을 앞둔 곡식을 곱다시 썩히는 일임에랴. 잠자리에 누워 듣는 빗소리는 가슴이 졸아드는 고문이었으리라.“제발, 다 떠내려가도 내버려둬라. 끙끙 앓는다고 건질 방도가 있나. 한 해 보리농사 실패한다고 굶어 죽는 것도 아니고.”벽을 타고 건너오는 아버지의 위로는 어머니의 신음보다 더 가슴이 저려왔다. 아버지는 와병으로 공직에서 물러나 휴양 중일 때였다. 세상사엔 어린아이 같아서 부처님 가운데 부분 같다는 남들의 평가였지만, 일가를 책임져야하는 가장의 입장에선 덕담으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곁자리에 누워 밤마다 어머니의 한숨을 들어야 했을 아버지. 나처럼, 보리가 썩는 걱정보다 어머니의 한숨에서 달아나고 싶지는 않았을까.어머니가 잠든 새벽녘이면 내방 봉창 너머로 아버지의 숨죽인 발자국소리가 지나갔다. 조심조심 뒤란으로 돌아가 짚 동 사이에서 소주병을 꺼내 홀짝이셨다. 아버지께 술은 금물이었고 가슴이 철렁했지만 나는 아는 체 하지 못했다. 몇 모금의 술이 위안이 될 것이라 여겼다. 아버지의 심중을 헤아린답시고 눈감은 것이지만, 나 또한 고통스런 신경 줄 하나를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는 척 엎드려 있었지만, 온몸의 신경 다발이 그리로 향한 체 오그라들곤 하였다. 비만 그쳐준다면, 그러면 모든 걱정이 일시에 해결될 것 같은 간절한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어머니의 한숨과 아버지 음주의 비밀과 코스모스씨앗처럼 홀쭉해진 쓰디쓴 보리밥을 먹던 기억이 비에 섞여 내린다. 내 성장의 언저리에 옹이를 박고 관통해간 그해 여름의 오란비처럼. 아버지가 드신 술이 그것만은 아니지만, 술이 아버지의 명을 단축시켰음을 부인할 수 없는 까닭이다.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는다. 점점이 떨어지는 빗방울이 아버지의 기나긴 말줄임표 같아 서럽다. 오란비 계절이면 나는 아버지가 못다 하신 이야기 몇 문장 풀어 읽으려고 물음표로 서 있곤 한다.

2015-06-05

선물

▲ 류재홍 수필가 손끝에 따끈한 열기가 전해진다. 놀란 잎들이 가쁜 숨을 토해낸다. 코끝에 스미는 아릿한 향. 취할 것 같다. 수많은 연꽃이 어른거린다.어젯밤 연꽃단지에 갔다. 푸른 잎 사이로 봉긋하게 솟아오른 연분홍 꽃이 고혹적이었다. 열이레 둥근 달도 불콰한 얼굴로 연밭에 빠져있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나도 모르게 슬몃슬몃 연잎을 따고 있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러느냐는 남편의 걱정도 안중에 없었다. 깨끗한 걸 따려고 애쓰다 발이 미끄러졌다. 하마터면 연밭에 고꾸라질 뻔했다. 무엇에 쓰려고 이러나.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나도 연향에 빠져버렸나. 아니 어쩌면 그 친구 흉내를 내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이태 전이었다. 전원주택으로 이사한 친구가 자기 집에서 모임을 주선했다. 산기슭 아늑한 마을에는 봄이 한창이었다. 차려놓은 밥상에도 봄나물 천지였다. 우리는 며칠 굶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배를 채웠다. 수다 삼매경에 빠져들자 친구가 차를 내어왔다. 작년 가을에 처음 해 본 국화차라 했다. 첫 서리가 내리고 열흘 안에 딴 꽃이라야 한단다. 온 산을 헤집고 다니느라 여기저기 긁히고 멍투성이가 되었다고 했다. 조금밖에 만들지 못했으니 맛이나 보라 했다.한마디로 뿅 가버렸다. 그윽한 향과 쌉싸래한 맛도 그만이지만, 다기 속에서 활짝 웃고 있는 꽃이라니. 뜨거운 물속에서 어쩌면 그리도 태연하게 앉아 있는지.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일이었다. 아홉 번 삶고 말렸음에도 또다시 피어나는 저 힘은. 작고 여린 몸으로 비바람에 맞서다 얻은 자생력이라 해도 얼마나 대단한가. 앙증맞은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그해 늦가을,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지하철역에서 잠깐 보자는 말만 하고 끊었다. 십수 년 동안 모임을 함께 하면서도 특별히 도타운 사이는 아니었다. 만나면 반갑고 헤어지면 또 그뿐인 친구가 무슨 일일까. 궁금증을 안고 지하철로 향했다. 그녀는 예쁘게 포장한 조그만 병을 내놓았다. 얼마 전에 만든 국화차라 했다. 자기가 만든 차에 환호하던 내게 꼭 주고 싶었노라 했다. 나를 생각하며 만드는 내내 즐거웠다고 덧붙였다.가슴이 먹먹했다.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무엇이든 가지고 나올걸. 미안하고 고마워 밥이라도 한 끼 하자고 했다. 친구는 바쁜 일이 있다며 손사래를 쳤다.구증구포로 가을을 다 보내버렸다는 그녀의 입가에 행복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누군가를 그리며 하는 일은 힘들어도 고생이라 생각되지 않는 법이다. 친구는 신나게 국화차를 만들었을 것이리라. 총총히 사라지는 그녀 등 뒤로 나눔의 기쁨이 따라가고 있었다.연잎을 덖는다. 오그라든 잎에서 마지막 숨결인 듯 뽀얀 김이 올라온다. 불을 끄고 깔아놓은 천에다 쏟아 붓는다. 차를 비비는 데는 멍석이 제격이라지만, 집에 있는 대 발 위에 광목을 깔았다. 면장갑을 끼고 문지르며 비빈다. 퍼런 물이 스며든 흰 천을 보자 내가 멍이라도 든 듯 뜨끔해진다. 자연 속에 그냥 두지 못한 자책인지도 모르겠다. 얼른 솥에다 넣고 다시 불을 켠다. 네 번 다섯 번, 횟수를 거듭할수록 푸른 잎맥이 퇴색되고 물기가 잦아든다. 다 되었다는 신호인가. 바짝 마른 잎에서 숭늉 냄새가 올라온다. 본래의 향은 어디다 두고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지. 향도 단련되면 이렇듯 숙성된 맛을 내는 모양이다.아홉 번을 덖고 식히다 보니 하루해를 다 써버렸다.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은 아니다. 내가 먹겠다고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 연잎 차가 어떤 이를 반하게 해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아침부터 매달리느라 다른 일이 산더미처럼 밀렸다. 연기와 땀으로 몸도 칙칙하다. 하지만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마무리에 열중이다. 누구를 주겠다는 설렘 때문인가. 아니면 연잎이 선물한 성취의 기쁨인가.

2015-05-29

난전국수

▲ 강찬중 수필가 난전은 사전에서 `허가 없이 길에 함부로 벌여놓은 가게`를 말하고, 난전국수는 난전에서 파는 국수를 일컬어 써본 말이다. 본당 70대 이상 노인들의 모임인 요셉회에서 이번 크리스마스 축제 때 `야곱의 우물에서 예리코의 여인숙까지`의 성극을 하기로 했다. 시나리오는 영문학자가 쓰고 연출은 회장이 맡아 배역을 정하고 소품준비와 연습에 들어갔다. 10여 분 내외의 단막극으로 각 배역의 대사는 몇 마디 안 되지만 나이가 드신 분들이라 소화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관객들의 재미를 생각하고 대사를 똑똑히 전하는 데 최선을 다하자며 서로를 격려한다. 내게 주어진 배역은 `착한 사마리아인`이었다. 의상으로 개량한복이 좋을 것 같아서 전에 입던 걸 찾아달라고 했더니 오래되어 헌 옷 수거함에 넣었다고 한다.“ 왜 그걸 버려?”하고 짜증을 냈더니 한 벌 새로 장만하잔다. 옷은 취향이나 치수도 맞아야 한다기에 떨떠름했지만 따라나섰다. 집 앞 마트나 골목시장에는 가끔 같이 나가기도 하지만 좋은 물건을 고르는 의미보다 들고 오는 짐꾼 역을 위해서다. 서문시장 입구에 들어섰다. 평일이고 날씨가 추운데도 사람들이 붐빈다. 아마도 이름난 재래시장이어서 그런가 보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이리저리 돌아서 가는데 점심때가 되었으니 잔치국수 한 그릇 먹고 가잔다. 그래, 그러자고 했다. 시장 길가에 두세 사람이 끼어 앉을 나무의자를 두고 가게마다 국수나 수제비, 또는 어묵들을 팔고 있는데 빈자리 없이 앉아 먹고 있다. 집사람은 가끔 난전에서 사 먹는다고 했지만 나는 그런 경험이 전혀 없어 서먹하다. 난전이라도 식탁이나 의자도 있고 비닐로라도 가려진 곳이 아닐까 했는데 그게 아니다. 길가 모퉁이에 둥근 플라스틱 의자가 대여섯 개 널브러져 있는데 그게 식탁이고 의자다. 2천500원 짜리 국수와 김치 한 접시를 빈 의자에 놓고, 앉거나 서서 먹고는 국수 값을 내고 가면 그만이다.물론 넥타이를 맨 사람도 없고 성장한 여인네도 없다. 전혀 남을 의식하지도 않는다. 여기에 후식이니 커피니 하는 건 아예 있지도 않고 사치일 뿐이다. 국수를 먹고 있는데 늦게 온 한 아저씨가 국수 한 그릇을 받아 들고 빈 의자를 찾다가 몸의 균형을 잃고 한 여자 분의 웃옷에 국수를 쏟아 버렸다. 그 옆에서 국수를 먹던 두세 사람이 “어이구!”하며 벌떡 일어나더니 주머니에서 휴지나 손수건을 꺼내 국수를 걷어내고 닦아준다. 주인아주머니는 상(床)을 닦던 물걸레를 가져와 훔치며 마르면 괜찮을 거라며 웃어 보인다. 쏟은 사람도 멍하니 서서 있고 국수 벼락을 맞은 갈색 점퍼의 여인도 선 채 덤덤하다. 주인아주머니는 빈 그릇에 새로 넉넉하게 한 그릇을 만들어 주면서 천천히 드시고 가란다. 그 정경이 추운 겨울을 녹이고 있다. 만일 고급호텔의 레스토랑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수습되었을까? 비록 난전에서 국수로 점심을 때우고 있지만,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서문시장에는 `할머니 국수집`이 있단다. 물론 테이블이라야 한두 개일 테지만 자리가 없어 줄을 선다고 한다. 국수 값도 2천원을 받는다고 하던가? 할머니는 국수를 말아주고 손님이 드시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모자라는 느낌이 들면 사리를 손으로 집어서 얹어주며, 늙거나 젊거나 “많이 먹어!” 하신단다. 배고픈 사람이 덤으로 넉넉하게 먹고는 위생이 어떻고, 반말이 어떠니 하면서 불평을 늘어놓을까? 아마도 덤으로 배불리 먹은 사람들은 할머니의 단골이 되었으리라. 서로 어려운 사정을 알고, 인정을 베푸는 그곳에 다시 가고 싶지 않으랴!버스를 탄다. 난전에서 국수 한 그릇을 먹고, 선한 사람들의 실수가 낳은 용서와 사랑을 보면서 그렇게 행복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 몇 만 원짜리 잘 차려진 뷔페보다 더 맛있게 먹었다. 이제는 가끔 길가에 서서 국화빵도 사 먹고, 붕어빵도 사서 손녀에게 갖다 주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빵도 사 먹어보련다. 그까짓 체면치레가 뭐 그리 대순가? 행복이 멀리 있지 않다는 걸 느낀 흐뭇한 오후다.

2015-05-22

나를 운전하다

▲ 조정이수필가 집안이 어지럽다. 식구들이 휘젓고 간 자리를 치우느라 손길이 분주하다. 식탁 위는 더 가관이다. 기름기 묻은 접시를 뜨거운 물로 씻어 내린다.사람이 지나간 자리가 이렇게 지저분할 수가 없다. 꽉 찬 음식물 쓰레기통을 내다 버린다. 제때 버리지 않아 독한 냄새를 풍긴다. 진공청소기로 방을 밀고 다닌다.매일 반복되는 집안일이 끝이 없다. 어쩌다 손을 놓으면 집은 엉망이 되어버린다. 가끔 나는 누구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서두른다.약속이 있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이십 년 전에 취득한 운전면허증은 서랍 속에 잠자고 있다.시간이 지나고 나니 당신은 무사고, 무벌점이라며 녹색 면허증이 훈장처럼 주어졌다.면허증을 취득하고 한 번도 운전대를 잡아 본 적이 없다. 남편의 반대에 부딪혀 포기하고 말았다. 안전에 민감한 그는 내가 운전만은 하지 않았으면 했다. 급한 것도 아니고 해서 그의 말을 따랐다.버스를 이용하면 다른 삶을 엿볼 수 있다.느리게 가는 대신 주변이 보인다. 무거운 짐을 든 사람을 보면 삶의 무게를 느낀다. 버스 손잡이를 꼭 붙잡고 있는 어르신을 보면 머지않은 나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다. 빌딩이 즐비한 도심의 길 위에서 밤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얼굴 생김새가 다르듯 살아가는 모습 또한 다양하다. 버스를 타고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 속에는 삶의 향기가 있고 인생이 있다.포도를 팔고 있는 아주머니가 보인다.일행이 늦은 시간에 포도가 팔리겠느냐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얼마 남지 않은 포도를 팔기 위해 오가는 사람에게 맛보라며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다.열심히 사는 그녀를 보며 나를 본다. 살면서 한 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해 본 적이 언제였나 싶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조연이 아닌 주연으로서 당당히 살고 싶다. 누구의 아내, 엄마 대신 내 이름으로 살고 싶은 것이다. 언제부턴가 심장 소리는 들리는데 가슴이 뛰지 않는다.큰 소용돌이 없이 살아온 것 같다.내 삶을 음식 맛에 비유한다면 심심하기 그지없다. 자리에 누워도 쉬이 잠들지 못한다. 일이 생겨도 부딪히는 것이 싫어 내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위장된 평화도 진짜 평화처럼 느껴졌다.어디를 가도 내 존재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톡톡 튀는 성향을 부러워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어우렁더우렁 사는 것이 모나지 않게 사는 거라 여겼다. 가족들 뒷바라지에 나를 잊은 지 오래된 것 같다.요즘은 반란이라도 하듯 나의 색깔을 한 번쯤은 드러내고 싶다. 미지근한 삶은 안정되어 보일지 모르나 박제된 표본처럼 생기가 없다.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 배운다. 변화가 두려워 애써 외면하며 살아왔는지 모른다. 나 자신한테 좀 더 솔직하지 못했다. 안정된 삶이 행복이라 여기며 지금까지 살아온 것 같다.삶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이다.이제 내 삶의 운전대를 누구에게도 맡기고 싶지 않다. 내가 원하는 대로 감정이 흐르는 대로 맡겨 두고 싶다.자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누구의 그늘이 아닌, 스스로 그늘을 만들어 갈 것을 다짐하며 오늘 첫 시동을 켠다.`부르릉~부르릉~ ` 경쾌한 시동 음이 구름 속으로 울려 퍼진다.

2015-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