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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밥 한 숟가락

▲ 이금태 수필가 한국수필문학회 이사참새 지저귀는 소리에 잠이 깼다. 어제 먹다 남은 개 밥그릇 언저리에 머리를 디밀고 밥알을 쪼아 먹는 참새들은 인기척에도 놀라지 않는다. 먹이를 주면 늘 한 숟가락가량의 밥을 남기는 개 때문에 마당에 참새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어린 시절, 여덟 남매가 다투어 자라던 우리 집에 먼 친척뻘 되는 아저씨가 종종 식객으로 머물렀다. 아저씨는 밖의 일을 보다가도 끼니때가 되면 어김없이 아버지와 상을 마주하였다. 넉넉잖은 살림에 때때마다 오시던 아저씨가 얄밉기도 했지만, 밥상머리에서 입담 좋게 풀어놓는 그분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참 재미있었다. 어머니는 손님 밥을 항상 고봉으로 수북하게 담았지만, 아버지는 그 위에 한 숟가락의 밥을 더 떠서 얹어 주시곤 했다.그 시절 고등교육을 받은 아저씨는 아는 것도 많았고,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넘나들며 같은 이야기라도 귀가 쏠리게 하는 이야기꾼이었다. 그분의 과거사를 어린 우리는 알 수가 없었지만, 부모님은 때를 잘 못 만난 탓이라고 하셨다. 식솔이 많아 끼니 해결조차 절박하던 형편에 아버지는 소복이 떠 얹어주는 한 숟가락의 밥으로 형편이 어려워서 찾아오는 일가붙이에 도와줄 수 없는 미안한 마음을 대신 했으리라. 대소가에서 아버지가 제일 먼저 도시로 이주하셨으니 집 안에는 친가, 외가의 객식구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식구 건사하기도 어려운 처지에 객군에게 한 끼 밥 대접하는 일을 어머니는 버거워하셨다.아버지는 밥을 아주 천천히 드셨는데 늘 마지막 한 숟가락 정도의 밥을 남기셨다. 어머니가 조금 적게 밥을 담는 날에도 어김없이 밥은 남아 있었다. 제대로 된 밥 한 그릇 배불리 먹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니 당연히 아버지의 남긴 밥을 서로 차지하려고 우리는 눈독을 들였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가 남긴 하얀 쌀밥이 먹고 싶었지만, 그 밥은 남자 형제들이나 입이 짧은 언니의 몫이었다. 어쩌다 내가 밥그릇을 차지하는 날이면 어머니는 눈을 곱게 흘기셨다. 어린 마음에 겨우 차지한 밥그릇을 빼앗길까 봐 허겁지겁 밥을 먹느라 목이 막혀 딸꾹질하곤 했다.백수라도 할 것 같이 건강하셨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먼저 보낸 후 손수 수저를 들고 식사를 하지 못하였다. 떠먹여 드리는 한 숟가락의 밥에 집안 대소사며 멀리 사는 자식들의 안부를 몇 번씩 확인하고서야 그 밥을 삼키셨다. 용하게도 한 숟가락 정도의 밥이 남을 즈음이면 어김없이 손을 내 저으셨다.늙으면 먹는 힘으로 사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나는 아버지께서 한 톨의 밥알을 남기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부모는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행복하다는데 자식은 천천히, 겨우 밥을 삼키는 아버지께 어서 드시라고 짜증을 냈다. 지금 생각하면 하루 세끼 밥을 먹여 드리는 것으로 위세를 떨었던 내가 참 부끄럽다.햇살이 마당 가득하던 봄날, 애틋한 눈빛을 남기고 당신은 떠나셨다. 아버지의 제사를 모시고 나면 오빠는 한 숟가락의 밥을 수북이 떠서 접시에 담아 대문 앞에 내놓았다. 윗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제례법이 아니었는데 오빠의 새로운 제례의식에 우리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살아생전 남기시던 밥으로 여덟 남매의 주린 배를 채워 주고 싶었던 당신만의 자식 사랑법이란 것을 철이든 이후 우리들은 알았다.오랜만에 오빠 내외가 집에 왔다. 혼자 살아가는 누이집이라 자주 들리지는 않았지만 끼니때에 맞추어 다니러 온 오빠 내외와 밥을 먹었다. 식사하고 난 오빠의 밥그릇을 보았다. 한 숟가락의 밥이 남아 있었다.“오빠, 요즘 남긴 밥은 부부간이라도 안 먹어.” “아니 그냥 배가 불러서….”멋쩍게 웃는 주름진 오빠의 얼굴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마음이 따뜻해져 온다. 떠 얹어주는 밥 한 숟가락, 남기는 밥 한 숟가락, 밥 한 숟가락은 세상을 향한 아버지의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였다.봄빛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뜨락에 제 밥그릇 한 귀퉁이에 밥알을 남겨둔 채 콧등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늙은 개가 졸고 있다. 후루룩 참새가족이 한마당 날아드는 화창한 봄날이다.

2015-06-26

삼강주막

▲ 김상규수필가·수미문학회 회원 삼강주막을 뒤로하고 빠져나오는 발길이 아쉬웠다. 다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뒤를 돌아보게 했다. 무엇인가 모를 미련이 승용차 안까지 뒤따라와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게 했다. 때에 찌든 마음과 가식이 삼강에 씻긴 듯 홀가분하다. 깃털같이 허공으로 둥둥 날아오르는 기분. 무엇이 이토록 가볍게 만들었을까? 주막 바로 앞 살평상에 주안상을 가운데 두고 문우들이 빙 둘러앉았다. 부침개와 두부, 묵을 안주 삼아 막걸리 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몇 순배 돌았을까? 얌전을 빼던 문우가 해롱거렸다. 냄새도 맡지 못한다던 술을 한 잔이나 마셨다. 풀리지 않던 빗장을 나룻배에 실어 보내고 알몸으로 앉았다. 거추장스러운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나면 저렇게 홀가분할까. 여느 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한 문우의 익살스러운 유머가 술기운과 함께 무르익어 갔다. 배를 움켜잡고 깔깔대며 웃음을 멈출 줄 모르는 문우들. 옛 주막의 농익은 기운을 옮겨 놓은 듯했다. 때론 젊은 시절의 밀폐된 공간을 잠영하듯 엿보다가 잊힌 첫사랑을 떠올리며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순백의 아름다움이 함께 일렁이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는 삶을 터득하기라도 한 듯.긴 강물이 꼬리를 물고 술래잡기하듯 유유히 흐른다. 굽이굽이 산을 돌고, 들판을 가로질러 바다까지 흘러가야 하는 먼 여정이지만 서두름이 없다. 그저 쉼 없이 흐르기만 한다. 낙동강의 흐름을 엿보던 내성천이 지친 몸을 맡기듯 섞여 한 줄기를 이룬다. 숨결을 죽이며 조심스레 다가서던 금천이 큰 강의 손짓에 휩쓸려 등에 업힌다. 모태가 다르고, 성질이 다르고, 빛깔이 다른 물이 몸을 섞어 아무 거부반응도 없이 한 호흡을 이루며 여행하는 모습이 경이롭다.회나무 그림자가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내려와 옷자락을 붙잡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좁디좁은 주막 안의, 멈춰선 시공간 속으로 하나둘 경쟁이라도 하듯 빨려 들어갔다. 좁은 문을 들락거리는 주모의 발걸음이 잦아짐을 엿보았다. 해거름에 한둘씩 모여드는 나그네들이 꽉 찬 공간을 비집고 들어와 살갗을 맞대었으리라. 허기진 마음을 주모의 컬컬한 막걸리 한잔과 곁들인 걸쭉한 농으로 채웠으리라. 주막의 좁은 방안을 가득 메우는 과객의 푸진 이야기가 나그네의 밤잠을 설치게 했으리라. 하루의 고달픔을 풀어 젖히고 잠을 청하는 보부상이 향수가 얽힌 긴 사연을 회나무 가지 끝에 매달았으리라. 삶이란 녹록지 않을 터. 봇짐 속에 꼬깃꼬깃 구겨 넣어둔 가족들의 크고 작은 애환도 함께 잠재웠으리라.쉴 곳이 있다는 것은 꺼질 것 같던 불씨를 활활 타오르게 할 수 있음이다. 동쪽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길게 육백 리를 흘러와 북쪽으로 치솟아 굽이치며 내성천과 금천을 끌어안고 남쪽으로 또 칠백 리를 흘러가야 하는 낙동강의 장대한 기운이 정점을 이루는 곳이 삼강주막이다. 오백 년이 넘는 세월만큼 키를 높인 회화나무의 위용을 등에 업은 여남은 평의 주막이 묵객과 보부상이 마음을 내려놓는데 더할 수 없이 소중한 보금자리였으리라. 방안의 온기가 쌓인 피로를 녹아내리게 하고, 하룻밤이란 짧은 시간이, 살갗을 맞대고 주고받는 정담이 지친 삶을 가다듬게 해 주었으리라. 쉼이란 단순한 쉼이 아닌, 지나간 삶을 뒤돌아보게 하고 다가오는 날들을 알차게 가꾸어가려는 준비 기간이다. 쉼은 정지가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의 진행형이다. 쉼은 마음의 불순물을 걷어내고 삶을 정제하는 시간이다.삼강이 몸을 섞고, 문우들이 둘러앉아 정을 섞고, 묵객과 보부상이 마음을 섞고, 현재와 과거가 공간을 섞어 한데 어우러져 흐르는 것이 강물이고 삶이다. 바다를 향해 흐르는 것이 강물이라면 미지의 세계를 향해 흘러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리라.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를 미워할 것인가. 무엇을 탐하고 무엇을 비울 것인가. 바다를 향해 물길을 연 낙동강을 따라 미지의 꿈을 좇아 내달은 삶의 고단함도 함께 흐르고 있다.오랜 세월을 두고 겹겹이 쌓인 많은 사람의 애환과 피로를 무언의 몸짓으로 끌어안기만 했을 삼강주막의 환영이 땅거미 지는 어둠 위에 깔리고 있다.

2015-06-19

등(燈)

▲ 노정희수필가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 등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 존재한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는 말이 크게 다가오는 사월초파일. 원래는 부처님을 목욕시키는 `욕불절(浴佛節)`이라 하는데, 암흑에 빠진 중생을 밝음으로 이끄는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연등행사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에 등을 밝히는 것을 등석(燈夕) 또는 관등절(觀燈節)이라고 한다. P씨는 불심이 돈독하다. 차량봉사는 물론 절의 행사에도 지극정성이다. 부처님 오신 날, 불자들이 등을 밝히느라 북적였다. 등불을 밝히듯 지혜를 밝힘이 우선되어야 하지만 현실은 물질이 우선되어야 `낯이 서는` 모양이다.언젠가부터 종교도 사업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떠돌아다니는 것에 마음이 편치 않다. 시선은 두둑한 지갑에 꽂힌다. 푸른 지폐의 개수에 따라 등 모양과 크기가 다르고, 등이 자리하는 위치도 달라진다.연등접수가 한창인데 노쇠한 할머니 차례가 되었다. 할머니는 속곳에서 꼬깃꼬깃 접어두었던 돈을 꺼내었다. 삼만 원, 아들 며느리 손자 이름까지 빽빽하게 적어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또 부탁했다. 부처님을 모신 법당 안에 등을 달고 싶단다. P씨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할머니와의 대화를 지켜보던, 옆자리에서 연등접수를 함께하던 보살이 `어찌 그럴 수 있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형평성을 따지며 삼만 원짜리 등은 감히 법당 안에 달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P씨는 가난한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부처님의 자비가 아니겠느냐며, 사람마다 돈의 가치는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할머니의 삼만 원은 `있는 집`사모님의 삼십만 원보다 더 큰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반론했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며 패가 나뉘어졌다. 되느니 안 되느니 소란이 벌어지자 급기야 큰스님이 달려와서 중재하였다.옛날 인도 사위국 여인 `난다`는 부처님께 등불을 올리고 싶었다. 그러나 형편이 어려워 공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구걸하여 얻은 동전 두 닢으로 기름을 사서 작고 초라하지만, 정성껏 등불공양을 올렸다. 법회가 끝나고 시간이 흐르자 다른 등불은 꺼졌으나 난다의 등불만은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참된 공양과 보시는 물질이 아닌 정성이었음을 일깨워주는 일화가 아니겠는가.P씨는 속이 상했다. 참된 교리가 무엇인지 회의를 느끼는 중인데 마침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거금을 희사하겠으니 등을 달아 놓으라는 것이었다. P씨는 정성을 다해 등을 달아주었다. 얼마 후, 한껏 위세 등등하게 절에 도착한 친구는 법당 안팎을 둘러보며 자신의 등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소위 특석에는 등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P씨를 찾아온 친구는 자신의 등이 보이지 않는다고 의아해 했다.P씨는 손가락으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해우소를 가리켰다. 친구는 안색이 하얗게 변해갔다. 법당 안에서도 눈에 띄는 자리에 떡하니 달아야 할 등을, 법당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외곽지고 허름한 화장실 앞에 걸어두다니. 거금에 맞지 않는 처사라며 울분을 토했다.P씨는 친구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었다.“부처님은 어두운 곳에 불 밝히는 사람을 좋아한다네. 어두운 해우소 앞에 등을 밝혀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 부처님 뜻을 받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2015-06-12

오란비

▲ 문혜란 수필가 오후의 볕살이 하도 오달져서 뒷산을 오르다가 비를 만났다. 반환점을 눈앞에 두고서다. 숱 많은 굴참나무 밑동에 기대어 비가 멎기를 기다린다. 토독 토독 톡 토독, 살찐 빗방울이 흙 위에 동그란 발자국을 찍는다. 비와 교접하는 마른 대지가 숨 가쁘게 뿜어내는 흙냄새는 엄마의 젖가슴을 열었을 때처럼 비릿하면서도 구수하다. 베어 말리는 풀 향기도 섞여 있다.소나무 침엽 끝에 매달린 물방울이 진주처럼 반짝인다. 도심의 포도 위에 콩 튀듯 쏟아지는 소란스런 빗소리가 젊은이들이 즐기는 테크노음악이라면, 잘 썩은 부엽토 위에 사뿐사뿐 내리는 비는 차분한 클래식이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비는 시든 나뭇잎을 위한 탱탱한 수유의 시간이다. 청진기를 갖다 대면 가지마다 쪼르륵 쪼르륵 제 몸속으로 물 길어 올리는 소리 들리겠다.그해, 망종도 되기 전에 시작된 장마는 논바닥에 베어 눕힌 보리를 갈무리할 새도 없이 붉덩물에 잠겨버렸다. 고슬고슬 마르지 않으면 도리깨타작은 불가능하다. 여우볕에 말려보려고 물에서 건져낸 보릿단을 안고 밭두렁으로 산비탈로 옮겨 다녔다. 오랜 투병환자의 욕창을 막기 위해 수시로 닦고 돌려 눕히는 병수발이었다. 거두어 쌓아둔 보리 더미에서도 두엄냄새가 피어올랐다. 한 알의 이삭이라도 건져보려고 뒤집고 헤집기를 계속했지만 거둘만하면 다시 젖기를 반복했다. 한 달여 계속된 장마에 보리는 결국 아래로는 뿌리를 내리고, 위로는 잎을 키웠다. 힘 좋은 머슴들도 어찌해볼 수 없는 애간장 타는 일이었다.보리는 가난과 배고픔의 상징이다. 전해에 수확한 양식은 바닥나고, 보릿고개를 참지 못해 영글지도 않은 풋보리를 삶아서 죽을 쑤어 먹던 집들이 있었다. 가난한 농가에 보리양식은 곧 생명줄이었다. 한 톨의 밥알도 먹을거리에 대한 훼손은 금기였으니 배고프지 않아도 되는 집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어머니의 한숨이 밤마다 한 음씩 높아가더니 종내는 끙끙 앓는 신음소리로 변해갔다. 농사일을 두량 하며 몸을 혹사해온 어머니에게 곡식은 자식이나 진배없었다. 가축이 텃밭의 남새 한이랑 짓이겨도 탈기를 하는 것이 농부의 심정인데 수확을 앞둔 곡식을 곱다시 썩히는 일임에랴. 잠자리에 누워 듣는 빗소리는 가슴이 졸아드는 고문이었으리라.“제발, 다 떠내려가도 내버려둬라. 끙끙 앓는다고 건질 방도가 있나. 한 해 보리농사 실패한다고 굶어 죽는 것도 아니고.”벽을 타고 건너오는 아버지의 위로는 어머니의 신음보다 더 가슴이 저려왔다. 아버지는 와병으로 공직에서 물러나 휴양 중일 때였다. 세상사엔 어린아이 같아서 부처님 가운데 부분 같다는 남들의 평가였지만, 일가를 책임져야하는 가장의 입장에선 덕담으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곁자리에 누워 밤마다 어머니의 한숨을 들어야 했을 아버지. 나처럼, 보리가 썩는 걱정보다 어머니의 한숨에서 달아나고 싶지는 않았을까.어머니가 잠든 새벽녘이면 내방 봉창 너머로 아버지의 숨죽인 발자국소리가 지나갔다. 조심조심 뒤란으로 돌아가 짚 동 사이에서 소주병을 꺼내 홀짝이셨다. 아버지께 술은 금물이었고 가슴이 철렁했지만 나는 아는 체 하지 못했다. 몇 모금의 술이 위안이 될 것이라 여겼다. 아버지의 심중을 헤아린답시고 눈감은 것이지만, 나 또한 고통스런 신경 줄 하나를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는 척 엎드려 있었지만, 온몸의 신경 다발이 그리로 향한 체 오그라들곤 하였다. 비만 그쳐준다면, 그러면 모든 걱정이 일시에 해결될 것 같은 간절한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어머니의 한숨과 아버지 음주의 비밀과 코스모스씨앗처럼 홀쭉해진 쓰디쓴 보리밥을 먹던 기억이 비에 섞여 내린다. 내 성장의 언저리에 옹이를 박고 관통해간 그해 여름의 오란비처럼. 아버지가 드신 술이 그것만은 아니지만, 술이 아버지의 명을 단축시켰음을 부인할 수 없는 까닭이다.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는다. 점점이 떨어지는 빗방울이 아버지의 기나긴 말줄임표 같아 서럽다. 오란비 계절이면 나는 아버지가 못다 하신 이야기 몇 문장 풀어 읽으려고 물음표로 서 있곤 한다.

2015-06-05

선물

▲ 류재홍 수필가 손끝에 따끈한 열기가 전해진다. 놀란 잎들이 가쁜 숨을 토해낸다. 코끝에 스미는 아릿한 향. 취할 것 같다. 수많은 연꽃이 어른거린다.어젯밤 연꽃단지에 갔다. 푸른 잎 사이로 봉긋하게 솟아오른 연분홍 꽃이 고혹적이었다. 열이레 둥근 달도 불콰한 얼굴로 연밭에 빠져있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나도 모르게 슬몃슬몃 연잎을 따고 있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러느냐는 남편의 걱정도 안중에 없었다. 깨끗한 걸 따려고 애쓰다 발이 미끄러졌다. 하마터면 연밭에 고꾸라질 뻔했다. 무엇에 쓰려고 이러나.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나도 연향에 빠져버렸나. 아니 어쩌면 그 친구 흉내를 내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이태 전이었다. 전원주택으로 이사한 친구가 자기 집에서 모임을 주선했다. 산기슭 아늑한 마을에는 봄이 한창이었다. 차려놓은 밥상에도 봄나물 천지였다. 우리는 며칠 굶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배를 채웠다. 수다 삼매경에 빠져들자 친구가 차를 내어왔다. 작년 가을에 처음 해 본 국화차라 했다. 첫 서리가 내리고 열흘 안에 딴 꽃이라야 한단다. 온 산을 헤집고 다니느라 여기저기 긁히고 멍투성이가 되었다고 했다. 조금밖에 만들지 못했으니 맛이나 보라 했다.한마디로 뿅 가버렸다. 그윽한 향과 쌉싸래한 맛도 그만이지만, 다기 속에서 활짝 웃고 있는 꽃이라니. 뜨거운 물속에서 어쩌면 그리도 태연하게 앉아 있는지.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일이었다. 아홉 번 삶고 말렸음에도 또다시 피어나는 저 힘은. 작고 여린 몸으로 비바람에 맞서다 얻은 자생력이라 해도 얼마나 대단한가. 앙증맞은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그해 늦가을,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지하철역에서 잠깐 보자는 말만 하고 끊었다. 십수 년 동안 모임을 함께 하면서도 특별히 도타운 사이는 아니었다. 만나면 반갑고 헤어지면 또 그뿐인 친구가 무슨 일일까. 궁금증을 안고 지하철로 향했다. 그녀는 예쁘게 포장한 조그만 병을 내놓았다. 얼마 전에 만든 국화차라 했다. 자기가 만든 차에 환호하던 내게 꼭 주고 싶었노라 했다. 나를 생각하며 만드는 내내 즐거웠다고 덧붙였다.가슴이 먹먹했다.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무엇이든 가지고 나올걸. 미안하고 고마워 밥이라도 한 끼 하자고 했다. 친구는 바쁜 일이 있다며 손사래를 쳤다.구증구포로 가을을 다 보내버렸다는 그녀의 입가에 행복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누군가를 그리며 하는 일은 힘들어도 고생이라 생각되지 않는 법이다. 친구는 신나게 국화차를 만들었을 것이리라. 총총히 사라지는 그녀 등 뒤로 나눔의 기쁨이 따라가고 있었다.연잎을 덖는다. 오그라든 잎에서 마지막 숨결인 듯 뽀얀 김이 올라온다. 불을 끄고 깔아놓은 천에다 쏟아 붓는다. 차를 비비는 데는 멍석이 제격이라지만, 집에 있는 대 발 위에 광목을 깔았다. 면장갑을 끼고 문지르며 비빈다. 퍼런 물이 스며든 흰 천을 보자 내가 멍이라도 든 듯 뜨끔해진다. 자연 속에 그냥 두지 못한 자책인지도 모르겠다. 얼른 솥에다 넣고 다시 불을 켠다. 네 번 다섯 번, 횟수를 거듭할수록 푸른 잎맥이 퇴색되고 물기가 잦아든다. 다 되었다는 신호인가. 바짝 마른 잎에서 숭늉 냄새가 올라온다. 본래의 향은 어디다 두고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지. 향도 단련되면 이렇듯 숙성된 맛을 내는 모양이다.아홉 번을 덖고 식히다 보니 하루해를 다 써버렸다.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은 아니다. 내가 먹겠다고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 연잎 차가 어떤 이를 반하게 해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아침부터 매달리느라 다른 일이 산더미처럼 밀렸다. 연기와 땀으로 몸도 칙칙하다. 하지만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마무리에 열중이다. 누구를 주겠다는 설렘 때문인가. 아니면 연잎이 선물한 성취의 기쁨인가.

2015-05-29

난전국수

▲ 강찬중 수필가 난전은 사전에서 `허가 없이 길에 함부로 벌여놓은 가게`를 말하고, 난전국수는 난전에서 파는 국수를 일컬어 써본 말이다. 본당 70대 이상 노인들의 모임인 요셉회에서 이번 크리스마스 축제 때 `야곱의 우물에서 예리코의 여인숙까지`의 성극을 하기로 했다. 시나리오는 영문학자가 쓰고 연출은 회장이 맡아 배역을 정하고 소품준비와 연습에 들어갔다. 10여 분 내외의 단막극으로 각 배역의 대사는 몇 마디 안 되지만 나이가 드신 분들이라 소화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관객들의 재미를 생각하고 대사를 똑똑히 전하는 데 최선을 다하자며 서로를 격려한다. 내게 주어진 배역은 `착한 사마리아인`이었다. 의상으로 개량한복이 좋을 것 같아서 전에 입던 걸 찾아달라고 했더니 오래되어 헌 옷 수거함에 넣었다고 한다.“ 왜 그걸 버려?”하고 짜증을 냈더니 한 벌 새로 장만하잔다. 옷은 취향이나 치수도 맞아야 한다기에 떨떠름했지만 따라나섰다. 집 앞 마트나 골목시장에는 가끔 같이 나가기도 하지만 좋은 물건을 고르는 의미보다 들고 오는 짐꾼 역을 위해서다. 서문시장 입구에 들어섰다. 평일이고 날씨가 추운데도 사람들이 붐빈다. 아마도 이름난 재래시장이어서 그런가 보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이리저리 돌아서 가는데 점심때가 되었으니 잔치국수 한 그릇 먹고 가잔다. 그래, 그러자고 했다. 시장 길가에 두세 사람이 끼어 앉을 나무의자를 두고 가게마다 국수나 수제비, 또는 어묵들을 팔고 있는데 빈자리 없이 앉아 먹고 있다. 집사람은 가끔 난전에서 사 먹는다고 했지만 나는 그런 경험이 전혀 없어 서먹하다. 난전이라도 식탁이나 의자도 있고 비닐로라도 가려진 곳이 아닐까 했는데 그게 아니다. 길가 모퉁이에 둥근 플라스틱 의자가 대여섯 개 널브러져 있는데 그게 식탁이고 의자다. 2천500원 짜리 국수와 김치 한 접시를 빈 의자에 놓고, 앉거나 서서 먹고는 국수 값을 내고 가면 그만이다.물론 넥타이를 맨 사람도 없고 성장한 여인네도 없다. 전혀 남을 의식하지도 않는다. 여기에 후식이니 커피니 하는 건 아예 있지도 않고 사치일 뿐이다. 국수를 먹고 있는데 늦게 온 한 아저씨가 국수 한 그릇을 받아 들고 빈 의자를 찾다가 몸의 균형을 잃고 한 여자 분의 웃옷에 국수를 쏟아 버렸다. 그 옆에서 국수를 먹던 두세 사람이 “어이구!”하며 벌떡 일어나더니 주머니에서 휴지나 손수건을 꺼내 국수를 걷어내고 닦아준다. 주인아주머니는 상(床)을 닦던 물걸레를 가져와 훔치며 마르면 괜찮을 거라며 웃어 보인다. 쏟은 사람도 멍하니 서서 있고 국수 벼락을 맞은 갈색 점퍼의 여인도 선 채 덤덤하다. 주인아주머니는 빈 그릇에 새로 넉넉하게 한 그릇을 만들어 주면서 천천히 드시고 가란다. 그 정경이 추운 겨울을 녹이고 있다. 만일 고급호텔의 레스토랑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수습되었을까? 비록 난전에서 국수로 점심을 때우고 있지만,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서문시장에는 `할머니 국수집`이 있단다. 물론 테이블이라야 한두 개일 테지만 자리가 없어 줄을 선다고 한다. 국수 값도 2천원을 받는다고 하던가? 할머니는 국수를 말아주고 손님이 드시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모자라는 느낌이 들면 사리를 손으로 집어서 얹어주며, 늙거나 젊거나 “많이 먹어!” 하신단다. 배고픈 사람이 덤으로 넉넉하게 먹고는 위생이 어떻고, 반말이 어떠니 하면서 불평을 늘어놓을까? 아마도 덤으로 배불리 먹은 사람들은 할머니의 단골이 되었으리라. 서로 어려운 사정을 알고, 인정을 베푸는 그곳에 다시 가고 싶지 않으랴!버스를 탄다. 난전에서 국수 한 그릇을 먹고, 선한 사람들의 실수가 낳은 용서와 사랑을 보면서 그렇게 행복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 몇 만 원짜리 잘 차려진 뷔페보다 더 맛있게 먹었다. 이제는 가끔 길가에 서서 국화빵도 사 먹고, 붕어빵도 사서 손녀에게 갖다 주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빵도 사 먹어보련다. 그까짓 체면치레가 뭐 그리 대순가? 행복이 멀리 있지 않다는 걸 느낀 흐뭇한 오후다.

2015-05-22

나를 운전하다

▲ 조정이수필가 집안이 어지럽다. 식구들이 휘젓고 간 자리를 치우느라 손길이 분주하다. 식탁 위는 더 가관이다. 기름기 묻은 접시를 뜨거운 물로 씻어 내린다.사람이 지나간 자리가 이렇게 지저분할 수가 없다. 꽉 찬 음식물 쓰레기통을 내다 버린다. 제때 버리지 않아 독한 냄새를 풍긴다. 진공청소기로 방을 밀고 다닌다.매일 반복되는 집안일이 끝이 없다. 어쩌다 손을 놓으면 집은 엉망이 되어버린다. 가끔 나는 누구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서두른다.약속이 있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이십 년 전에 취득한 운전면허증은 서랍 속에 잠자고 있다.시간이 지나고 나니 당신은 무사고, 무벌점이라며 녹색 면허증이 훈장처럼 주어졌다.면허증을 취득하고 한 번도 운전대를 잡아 본 적이 없다. 남편의 반대에 부딪혀 포기하고 말았다. 안전에 민감한 그는 내가 운전만은 하지 않았으면 했다. 급한 것도 아니고 해서 그의 말을 따랐다.버스를 이용하면 다른 삶을 엿볼 수 있다.느리게 가는 대신 주변이 보인다. 무거운 짐을 든 사람을 보면 삶의 무게를 느낀다. 버스 손잡이를 꼭 붙잡고 있는 어르신을 보면 머지않은 나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다. 빌딩이 즐비한 도심의 길 위에서 밤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얼굴 생김새가 다르듯 살아가는 모습 또한 다양하다. 버스를 타고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 속에는 삶의 향기가 있고 인생이 있다.포도를 팔고 있는 아주머니가 보인다.일행이 늦은 시간에 포도가 팔리겠느냐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얼마 남지 않은 포도를 팔기 위해 오가는 사람에게 맛보라며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다.열심히 사는 그녀를 보며 나를 본다. 살면서 한 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해 본 적이 언제였나 싶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조연이 아닌 주연으로서 당당히 살고 싶다. 누구의 아내, 엄마 대신 내 이름으로 살고 싶은 것이다. 언제부턴가 심장 소리는 들리는데 가슴이 뛰지 않는다.큰 소용돌이 없이 살아온 것 같다.내 삶을 음식 맛에 비유한다면 심심하기 그지없다. 자리에 누워도 쉬이 잠들지 못한다. 일이 생겨도 부딪히는 것이 싫어 내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위장된 평화도 진짜 평화처럼 느껴졌다.어디를 가도 내 존재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톡톡 튀는 성향을 부러워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어우렁더우렁 사는 것이 모나지 않게 사는 거라 여겼다. 가족들 뒷바라지에 나를 잊은 지 오래된 것 같다.요즘은 반란이라도 하듯 나의 색깔을 한 번쯤은 드러내고 싶다. 미지근한 삶은 안정되어 보일지 모르나 박제된 표본처럼 생기가 없다.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 배운다. 변화가 두려워 애써 외면하며 살아왔는지 모른다. 나 자신한테 좀 더 솔직하지 못했다. 안정된 삶이 행복이라 여기며 지금까지 살아온 것 같다.삶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이다.이제 내 삶의 운전대를 누구에게도 맡기고 싶지 않다. 내가 원하는 대로 감정이 흐르는 대로 맡겨 두고 싶다.자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누구의 그늘이 아닌, 스스로 그늘을 만들어 갈 것을 다짐하며 오늘 첫 시동을 켠다.`부르릉~부르릉~ ` 경쾌한 시동 음이 구름 속으로 울려 퍼진다.

2015-05-15

▲ 여소녀 수필가 현관을 들어서며 폭풍의 위력을 가진 친구의 한숨이 싱크대 앞에 서 있던 나를 확 밀어냈다. 고충이 심했거나 아니면 오랜만에 나를 보니 그동안 속을 끓였던 게 한꺼번에 뿜어져 나왔나보다. 그녀의 친정어머니가 다리 골절로 박아 놓은 철심을 빼느라 며칠 전 수술을 하셨단다. 같은 부위를 수술한 게 벌써 몇 번째다. 수술할 때마다 엄청난 비용과 시간을 쪼개가며 간호하는 것이 쉽지 않을 터였다. 친정어머니를 힘겨워 하지 않고 고작 한숨으로 풀어내는 것은 그녀의 반듯한 성품과 타고난 인내심이라 짐작했다.아이의 짐을 꾸려 집으로 가야하는데 온천지가 눈밭이라 눈에 갇혔다. 빈 박스를 구해 간신히 짐은 꾸렸는데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 길이 미끄러워서 택배는 아예 엄두를 못 내고 마지막으로 생각해 낸 것이 이삿짐센터였다. 짐이란 처음에는 한두 개에서 이것저것 모으다보면 금방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대개 이삿짐을 쌀 때 버리려 하다가 언젠가 한 번은 쓰겠지 하며 도로 짐을 꾸린다. 여러 군데 연락을 했다가 마침 한 이삿짐센터에서 대구로 내려가는 길이라 겨우 승낙을 얻었지만 문제는 비용이었다. 평소 같으면 얼토당토않은 가격이었으나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딸아이와 둘이서 기차로 먼저 내려왔다. 이삿짐은 약속시간을 1시간 반이나 넘기고 도착했다. 기다리는 나보다 미끄러운 초행길을 찾아 왔을 운전기사가 훨씬 더 가슴 졸였을 게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온 가족이 동원되어 짐을 날랐다. 운전기사가 짐을 내려놓고 대구까지 또 가야하니 내 마음이 덩달아 바빴다.수고비를 드리고 짐이 다 내려졌는지 확인을 하는데 시커멓고 커다란 체인 꾸러미가 눈에 들어왔다. 차가 너무 가벼우면 궂은 날에는 헛바퀴가 돌거나 미끄러지기 십상이라 적당한 짐은 오르막이나 내리막길에서 균형과 힘을 실어준단다. 그때까지 짐은 고통과 동의어로 생각해 무조건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것을 네 것에 실어 떠 넘겨 버려야 홀가분해지리라 여겼다.시어머니가 팽팽하던 정신줄을 놓자 느슨해진 실타래가 꼬이고 엉켜 버려 어린애가 되셨다. 곁에서 수족이 되어 보살펴 드려야 하는데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평소 어머니의 뜻을 잘 헤아리고 끔찍이 여기는 신랑이 손을 들었다. 사실 아들이 할 일은 의외로 적고 온전히 내 차지였다. 자식이 아홉이나 되는데 왜 하필 막내며느리인 내가 감당해야 하는지 속을 끓였다. 아침마다 마음을 다잡고 각오를 하지만 문만 열면 악취에 숨이 멎고 현기증이 일며 속이 울렁거렸다. 기저귀를 열면 어머니는 희미해져 가는 정신을 더듬어 여자로 되돌아오시는 듯 이불 귀퉁이를 아랫도리로 끌어당기셨다. 때로는 아이가 된 어머니가 가엾어서 밝게 인사를 나누고 죽을 입에 넣어 드리면 한 그릇을 뚝딱 비우셨다. 비록 나에게 말씀은 하실 수 없지만 마음이 편안해 식욕도 돌아오는 듯했다.어머니는 드시는 양보다 배설하는 양이 훨씬 많았다. 마음의 짐을 하나씩 내려놓으시며 삶의 애착도 조금씩 옅어졌다. 어머니는 아홉이나 되는 자식을 건사하시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을 잊고 사셨다. 농사일은 많고 식구들 챙기는 일이 만만치 않아 당신을 위한 일은 꿈도 꾸지 못했으리라. 내 어머니 이전에 꽃 피고 바람이 불면 가슴 설레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던 여자이셨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어머니께 여쭈어 보거나 세심하게 살피지 못했다.며칠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쪽빛 한복에 색조 화장까지 하시고 꿈에 나타나셨다. 깨끗한 벽지에 윤기 나는 대리석으로 마감한 거실에 앉아 미소를 지으셨다. 평소 어머니는 몸단장 하시는 걸 좋아하셨다. 때로는 좀 까다롭게 옷감의 질과 색상과 디자인을 고르셨다. 세상사 다 내려놓으시니 마음이 홀가분해져 행복한 모습을 내게 보여 주셨나보다.어머니는 짐이 아니라 내 반려자와 손주들을 주신 뿌리이며 내가 올곧은 어른이 되도록 버팀목이 되어 주셨다. 짐도 때로는 비바람에 끄떡없이 나를 지켜주는 보루가 되어 언덕을 오르고 나면 내리막길에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을 실어온다.

2015-05-08

엄마의 병풍

▲ 구은주 시인 엄마한테서 병풍을 받아 왔다.매년 해온 것처럼 사남매와 사위들이 모여 올해로 일흔 여덟 번째를 맞는 엄마의 생신을 축하하는 오찬 자리를 함께 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복사꽃이 가려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막 봉오리를 터뜨리고 있는 날이었다.병풍 뒷면에는 자수를 완성한 `1971.2.24.`라는 날짜와 함께 엄마의 이름을 새겨놓았다.“내 나이 서른세 살 때였구나, 벌써 40년이 훨씬 넘었네, 참!” 감회가 깊으신 듯 병풍을 어루만지셨다. 오랜 세월의 더께가 쌓이는 사이에 표구 상태가 낡고 수놓아진 검정색 비단을 받치는 원단의 색이 바래기는 했으나, 여덟 폭에 한 땀 한 땀 수놓아진 그림에 서린 엄마의 정성과 공력이 절절히 배어나오는 듯했다.포도 무늬가 새겨진 백자와 비취빛 상감청자, 금빛 찬란한 신라 왕관, 전설 어린 에밀레종의 모습 등 우리나라 국보급 유물 열여섯 점이 한 폭에 두 점씩 예서체로 보이는 유물 이름을 새긴 글자와 함께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다. 정교하게 새겨진 그 이름의 글자들도 유물 모습과 함께 찬연한 무늬를 이루고 있다.엄마가 직접 바느질해 만드신 병풍 덮개를 조심스럽게 풀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햇살 밝은 마루 끝에 앉아 곱게 수놓기에 열중하시던 엄마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때 엄마는 수놓으신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文梅甁)`의 빛깔처럼 곱고도 단아하고 청초한 모습이셨다. 병풍 속에 엄마의 젊은 날 모습이 다소곳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오래 묵은 세월의 냄새가 확 안겨왔다. 엄마의 세월 향기인 것 같아 눈물이 핑 돌았다.아버지께서도 생전에 엄마의 병풍을 무척 아끼시고 좋아하셨다. 안방 장롱 오른쪽 벽에 언제나 고아한 자태로 서서 고고한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는 병풍을 즐겨 바라보곤 하셨다. 아버지는 엄마가 수를 놓거나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시는 것도 무척 좋아하고 사랑하셨다.그 아버지가 일흔넷 되시던 생신날 아침 폐렴으로 갑자기 쓰러지신 뒤 사흘 만에 가족들이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참으로 애통하게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와 함께 이십 년 넘게 행복을 다독이던 이층 주택에서 조그만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 병풍은 굳게 싸여 장롱 위에 올려졌다. 아버지의 방을 잃은 집은 병풍이 서 있을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세월이 흘러갔다. 어느새 나도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지명(知命)을 넘어서고 그 곱던 엄마도 산수(傘壽)를 바라보시게 되었다. 어느 날 문득 그 병풍이며 엄마의 고운 손길이 생각났다. 불현듯 전화를 드렸더니 장롱 위에 고이 얹히어 있다고 했다.오늘 조촐한 생신연의 자리에서 엄마는 병풍을 흔쾌히 내놓으셨다. 소박한 선물과 약간의 용돈으로 감사의 마음을 드렸지만, 무엇으로도 값을 매길 수 없는 소중하고도 값지고도 따뜻한 명품 선물이었다.엄마는 예술적인 재능이 많으셨다. 어려운 시절을 살아오시느라 전문적인 공부는 못하셨지만, 아름답게 수를 놓는 솜씨 말고도 매듭 공예에도 소질이 있으셨고, 한국화와 서예에도 빛나는 재능을 보이셨다. 음색 고운 노래도, 바느질도, 요리 솜씨도 아주 뛰어나셨다.그런 엄마의 예술적인 감각과 재능을 고스란히 맏딸인 내가 물려받은 것 같다. 나도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아 미술 공부를 하였고, 시와 음악이 좋아 시를 쓰고 있고 노래도 즐겨하고 있다. 요즈음은 시와 음악을 아우르는 시낭송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다.엄마가 나에게 당신의 고귀한 재능과 유산을 물려 주셨듯이 나는 나의 딸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수 있을까. 어떤 예술작품을 남겨 그들의 따뜻한 유물이 되게 할 수 있을까. 새로 시작한 그림이 이젤 위에서 저만의 색깔을 기다리고 있다.우선 새로 왼 시 한 편 딸들에게 들려줄까.

2015-05-01

엄마가 준 선물은 아닐까?

▲ 백순일 수필가엄마는 요양병원에 모셔진 후 병이 깊어졌다. 가끔 나를 보고는 `애기엄마`라고 부르며 해맑게 웃곤 하신다. 그런 엄마를 두고 어디를 간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살아계실 때 많이 보고 잘해 주자고 다짐했는데 여행갈 일이 생겼다. 갈등하는 내게 지인들은 사람 목숨 그리 쉬이 끝나는 거 아니라며 마음을 흔들어댄다. 내가 하는 일과 연관되어 좋은 기회라는 건 알지만, 나 없는 사이 엄마가 어떻게 되지 않을까 싶어 결국 포기하기로 했다. 그런데 출발 일주일 전 쯤 단체 회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 사람이 갑자기 못 가게 되었다며 꼭 같이 갔으면 한다. 희한하게도 그 무렵 엄마는 눈빛도 맑아지고, 목소리도 분명해지셔서 이승에 머물 시간이 조금은 더 남은 듯 했다. 병원에서나 오빠도 괜찮을 거라며 다녀오기를 권했다.“엄마, 일주일 동안 숨 열심히 쉬고 있어. 중국 갔다 올게.”“응! 잘 갔다 와!” 하며 웃으신다.북경에 도착하니 해는 기울었다. 엄마는 잘 견디고 계시는지 걱정이다. 요양병원에서 엄마는 `스마일할머니`로 불린다. 누구에게나 수줍은 미소로 대하며 겸손하시다. 옛 기억도 청춘도 풍선에 바람 빠져나가듯 사라졌는데 그 미소만큼은 한결같다. 맨 잇몸을 드러내며 함박웃음을 웃으실 땐 영락없는 어린아이다. 화사한 웃음은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는 엄마의 간절한 기도 같다. 아프고 고단했던 많은 날들을 순박한 웃음으로 덮어놓고 해탈하신 듯 평온해 하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아리다.지는 해를 보며 멍하니 서 있으니 일행 중 한 명이 손을 잡아끈다. 눈앞에 북경시 최대 규모의 농산물전문도매시장인 `신발지농산물유통재래시장`이 보인다. 도로는 자동차와 자전거, 사람까지 뒤섞여 부산스러웠고 거리는 지저분했다. 하지만 규모는 무척 커서 품목마다 우리네 시장 하나정도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곳곳마다 잘생긴 농산물들이 내일 새벽 출하를 위하여 하역되어지고 있었는데, 꾀죄죄한 중국 노동자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 일행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북경은 최고들이 모이는 곳이다. 사람도 아무나 들어와 살 수 없고 농수산물 또한 최고여야만 반입이 가능한 곳이다. 중국은 마약이나 식품에 대한 법이 몹시 엄격하여 최고 사형까지 집행하지만, 그래도 돈에 눈이 먼 자들이 종종 있다고 한다. 먹지도 못할 것들을 우리에게 팔아치우는, 중국인들의 파렴치함을 토로하자 가이드가 일침을 놓는다. 수입하는 자가 싼 가격의 저질 농산물을 원하기 때문이니 혈압을 올리지 말라한다. 중국에선 도리어 우리나라의 그런 소수들을 욕한다고 한다. 그런가? 일리가 있다.북경의 밤은 조용하고 근엄했다. 건물들은 웅장했고 백화점은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과 고급 상품들로 아름답게 진열되어 있다. 100m나 되는 거리의 포장마차가 깨끗하고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로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여섯시를 넘기자 휴대전화 벨이 울린다. 큰조카가 엄마의 임종소식을 알린다. 뒤이어, 엄마 잘 모실 테니 일행에게 소란 떨지 말고 일정 끝내고 오라는 오빠의 당부가 따른다. 몇 달 동안 애달파 하고 수없이 흘렸던 눈물 탓인지 의외로 담담하다. 그 후 입안이 연신 마르고 다리의 무게는 천근처럼 느껴져 힘들었지만, 엄마가 마음먹고 보내준 여행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달랬다.기대하던 문화체험을 하며 오고 감에 대한 생각은 깊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위인들도 어디론가 떠나 자취만 남아있고, 일생 노심초사 자식걱정에 몇 날 편하기나 하셨을까 싶은 엄마도 사랑만 남기고 돌아가셨다. 가시는 길 이 부디 평안하시길 기원하며, 더 주지 못하여 늘 안타깝던 엄마의 극진했던 사랑을 되새겨 볼 뿐이다. 사노라면 뜻하지 않은 일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돌아오니 딸과 아들이 그간의 일들을 휴대전화 영상으로 보여준다. 아흔을 넘기고 떠나신 엄마의 장례식은 심각함이나 비통함 없이 예를 갖춘 의식이었다. 엄마의 맑은 미소를 떠올리며 그 평온함을 닮아 가야지 애써 마음을 다독여보지만 삼킴 장애로 음식 넘기기가 힘들어 나는 며칠을 앓아누웠다.

2015-04-24

봉 톡스를 아시나요?

▲ 박순이 수필가·구미수필 회장이번 주말에는 강원도 집에 가기로 했다. 여름내 한껏 자라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막막한 풀을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매년 풀 베는 일에 시달려 지쳐있던 남편은 올해는 그냥 제초제로 쉽게 해결하자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번이 기회란 생각에 흙이 살아야 인간도 산다며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라고 말한 뒤, 그동안 남편이 위험하다고 반대해왔던 귀엽고 빨간 전동제초기를 서둘러 구입했다. 날이 선 옥수수 잎에 얼굴을 베이지 않으려고 먼저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그 위로 초록 양파 망을 뒤집어썼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빨간 고무장화와 빨간 고무장갑, 남방 칼라 깃을 자존심처럼 치켜세우는 것으로 패션을 완성시켰다.그런 다음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빨간 전동제초기를 손에 들고 보무도 당당하게 남편이 수확을 끝내고 지나간 뒤를 따라가며 옥수수 대와 잡초를 베어내기 시작했다. 위험하다며 처음부터 제초기 사는 것을 여러 차례 반대했던 남편은 어지간히 말 안 듣는 고집 센 마누라의 일하는 모습을 못마땅한 듯 힐끗 한번 돌아보기만 할 뿐 별말이 없었다.나는 제초기를 어깨에 메고 나도 이렇게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라는 듯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힘껏 휘둘러댔다. 왱왱 소리를 지르며 돌아가는 제초기의 무지막지한 횡포에 꼿꼿하게 서 있던 옥수숫대와 잡초가 힘없이 쓰러졌고 파편은 허공에 마구잡이로 흩어졌다. 재미있다. 그동안 나를 묶어놨던 끈을 끊어 내는 듯 홀가분하고 짜릿한 것이 아주 상쾌했다. 누가 시키면 이렇게 할까?평소 어지간히 더워도 땀을 흘리지 않던 나에게도 얼굴을 타고 목으로 흘러내리는 서늘한 땀줄기가 느껴진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앞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정말 재미있는 장난감에 신바람 발동이 걸린 나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때였다. 흩어지는 파편 속에서 모자 밑 초록 양파 망과 내 얼굴 사이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난 것 같았다.땀이 범벅이 된 얼굴과 귓불이 갑자기 불같이 달아오르며 따갑고 아프기 시작했다. 통증이 너무 심해 서둘러 집안으로 뛰어 들어온 나는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거울을 보니 눈 밑과 입술 주위가 치과에서 마취주사를 맞은 것처럼 마비가 되며 붓기 시작했다. 벌에게 얼굴 여러 군데를 물린 것 같았다. 급한 마음에 밖을 향해 소리 질렀다.“나 돔 바요 나 돔 바~~빤니 와 바요~.”입이 열리지 않아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서둘러 따라 들어온 남편의 눈이 황소의 그것만큼 커졌다. 그사이 나의 왼쪽 눈은 런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탄 레슬링선수 눈처럼 퉁퉁 부어올랐다. 뜨는 것조차 힘들었다.약사 앞에서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었다. 대놓고 웃지 못해 그런지 얼굴이 시뻘게진 약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는 듯 약간은 무뚝뚝한 얼굴로 약을 제조해 주었다. 20분이 지났으니 괜찮을 거라는 약사님 말에 안심이 된 나는 남편의 의심에 찬 눈을 뒤로하곤, 씩씩한 척 앞장서 소머리국밥집으로 들어가 저녁을 해결했다.다행히 무사히 하룻밤을 넘겼다. 다음날 아침 거울을 보니 전체적으로 고르게 부어 펑퍼짐해진 내 얼굴은 15라운드를 뛴 권투선수보다 더 험상궂어져 있었다. 진심으로 걱정이 되는지 고소해서 그런지 괜찮아? 하며 나를 보고 웃는 남편을 보며 나도 따라 웃었다. 우린 서로를 쳐다보며 자꾸자꾸 웃었다.두문불출 며칠 만에 다시 사람들을 만나니 얼굴이 훤하니 좋아졌다고 이구동성 난리다. 나는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듯 자랑스럽게 사건의 전말을 실감나고 재미있게 이야기 해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예뻐진 건 아마도 봉 톡스를 맞아 주름이 펴진 까닭일 거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그나저나 나는 정말 운이 좋은 것 같다. 얼굴 여섯 군데 허리 한 군데 총 일곱 군데를 벌에 쏘이고도 당분간 얼굴이 좀 남세스러워 그렇지 이렇게 무사히 살아있지 않은가. 그것도 무료로 말이다.

2015-04-17

친구 한 명

▲ 이순화시인 진실한 친구 한 명만 있으면 부자라는 옛말이 있다. 나는 그 말에 매달려 오로지 한 친구에게만 마음을 터왔다. 평생을 내 옆에서 살 줄 알았던 그 친구가 작년 이맘때쯤 고향인 예천으로 이사를 갔다. 친구는 거기서 화장품 가게를 한다. 그러니 일을 끝내고 충분히 우리 둘만의 시간을 가지려면 적어도 밤 열시는 넘어야 한다. 친구는 가게 문을 닫고는 늘 내게 전화를 했다. “내일 올래? 그럼 모레는 올 수 있어?”그녀의 간청에 어렵사리 남편에게서 1박2일의 휴가를 얻었다. 몸이 멀면 마음도 멀어질까봐 십 수 년이나 되는 지나간 세월을 곱씹으며 그녀에게 가려고 집을 나선다. 서둘러 나왔는데도 간발의 차로 4시33분 기차를 놓쳤다. 다음 기차는 밤 8시33분에 있다. 4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집에 가서 쉬었다 나와도 시간은 충분하다. 하지만 가슴 조이면서 나온 외출인지라 괜히 들어갔다가 발목이라도 잡히면 어쩌나 싶어 도서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시간 보내기에는 그곳만큼 좋은 곳이 없다. 도립도서관 간행물 열람실 문을 밀었다. 형광등 불빛이 하얗게 쏟아져 내린다. 딱히 할일 없어 얼쩡거리고 있는 내 속을 들킬세라 에세이집도 들춰보고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잡지도 뒤적인다. 벽시계의 분침은 멈춘 듯하다. 시간이 이렇게 더디 갈 수도 있는 모양이다. 내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가슴이 조여든다. 건성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내 모습을 남들이 눈치 챌까봐 숨죽여 도서관을 빠져나온다. 땅거미가 스멀스멀 밀려들고 있다. 시내 2번도로로 발길을 옮긴다. 꼭 봐야할 볼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또박또박 걷는다.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지만 시간은 짙어가는 어둠에 눌린 듯하다. 자꾸만 진이 빠진다.오래전 이 거리에 우리들의 아지트였던 로즈라는 레스토랑이 있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뭉크라는 현란한 간판이 붙어있다. 그래도 나는 로즈에 잠긴다. 발끝만 내디뎌도 쿵덕쿵덕 소리를 내는 컴컴한 나무계단을 몇 굽이 올라가야 로즈가 나왔다. 요즈음의 매끄러운 자동문과는 사뭇 달랐다. 뻑뻑하고 무거운 통나무 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거기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감미로운 음률이 흔들리는 조명아래 가득히 흘렀다. 성적인 매력이 온몸을 감고 도는 `Love Me Tender` 이나 `Let Me` 의 비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포퓰러 뮤직이라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열정을 다 쏟아서 좋아했던 시절이었다. 잡다한 추억에서 벗어난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치고 배도 고프다. 자꾸만 쓸쓸해진다. 로즈의 추억도 잠시 나는 어둑한 거리에서 자꾸만 우울하다. 갑자기 흙먼지를 흠뻑 실은 바람이 등을 떠민다. 지루한 시간 줄이기를 끝내고 기차역을 향해 뛴다.대합실 안에는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으슥한 구석 의자에 앉아서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본다. 거세진 바람이 굵은 비를 몰고 오더니 갑자기 장대비로 변했다.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노루 몰이꾼에게 쫒기 듯 뛰고 있다. 우산을 준비해 왔다는 사실에 살짝 쾌감을 느낀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나는 얼마나 얄팍한가. 친구와 나는 오늘처럼 을씨년스러운 날에는 금오시장 골목에 있는 포장마차에 가곤했다. 회포를 담아 기울이는 술잔들이 분주한 곳. 안주 감으로는 산낙지가 제일이었다. 말짱한 정신으로는 먹기가 징그러워서 쓴 소주 한잔을 꼴깍 마셨다. 목젖을 타고 흐르는 짜릿한 맛. 점점 초점이 흔들릴 쯤 안주감에 젓가락이 갔다. 온 몸이 토막 난 채로 있는 힘을 다해 꿈틀대는 산낙지를 굵은 소금장에 꾹 찍었다. 자잘하게 잘린 낙지는 미꾸라지에 소금 뿌려 놓은 것처럼 몸부림쳤다. 엉겨 붙은 살점을 떼어내어 간신히 입에 넣었다. 입천장에 달라붙은 살점들이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 나도 뒤질세라 혼신을 다해 혀를 굴렸다. 목구멍으로 넘어가기까지 낙지와 나의 싸움. 오늘도 역시 나의 승리로 끝났다. 그 맛에 포장마차를 찾았던 것 같다.머무르고 싶은 세월의 끈을 놓고 주위를 둘러본다. 북적대던 대합실의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정지되었던 시간은 껑충 두 세 시간을 뛰어 넘었다. 영주 행 기차가 들어오고 있다는 안내방송에 가슴은 겉잡을 수없이 두근거린다. 어느새 비는 가랑비로 잦아들어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사위는 온통 뿌연 안개, 플랫폼 건너 가로등 밑에서 친구가 살포시 웃음 짓고 서 있다. 우산 펴들 겨를도 없이 빗속을 뛴다. 어둑했던 마음이 차가운 빗물에 말끔히 씻겨 내린다.

2015-04-10

베이비박스

▲ 정상미 시인#여자 1휘젓기만 하고 떠난 바람 때문인지 모른다. 그녀에게 남자는 바람이었다. 그녀는 학교를 더 다녔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중에 꼭 다시 찾으러 오겠다며 입술을 깨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젖은 얼굴로 두리번거리며 박스를 열었고 아기를 내려놓았다. 손은 사시나무처럼 떨렸으며 심장은 쿵쾅거렸다. 걸음이 휘청거리고 머리는 매가 쪼아대는 것처럼 아팠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무겁고 창백한 얼굴로 돌아섰다. 짭조름한 액체가 흘러 입으로 들어왔다. 모르겠다. 사물들이, 저 앞 빌딩이, 횡단보도가 다 흐려 보였다. 그녀는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여자 2그것은 불장난이었다. 게임이었다. 소녀는 재수가 없어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덜컥 겁이 나긴 했지만, 미안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키울 마음은 애초에 없었다. 눈물 하나 흘리지 않고 손가락 하나 떨리는 것도 없었다. 다만 누가 자신을 보지나 않을까 그것이 두려울 뿐이었다. 그리고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거추장스러운 쓰레기를 치우듯 말랑말랑한 물건을 밀어 넣었다. 소녀는 시끄러운 음악과 번뜩이는 조명이 돌아가는 클럽으로 갈까 하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곧장 어두운 피시방으로 향했다.#남자남자는 철없는 아내를 원망한다. 친자일 확률 0.001 퍼센트! 그는 도덕군자가 아니다. 두 딸을 키우기만도 빠듯한데, 어쩌란 말이냐. 생각 같아선 확 갈라서고 싶지만 딸들을 위해 참는다.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쉰다. 그러다 또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기 어렵다. 아내를 참 많이 사랑했는데 지금의 아내는 옛날의 그 아내가 아니다. 헤어질 생각은 없다지만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그는 온몸에 힘이 빠져오는 것을 느낀다. 이건 내가 원했던 바가 아니야, 눈 한 번 질끈 감고 결국 그는 철제문의 손잡이를 당긴다.#아기저벅저벅 발소리와 함께 왔다. 무거운 발소리였다. 소리가 끊겼다. 손잡이가 당겨지자 띠~, 하는 벨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나를 내려놓았다. 사막이었다. 혼자였다. 온기에서 떨어져 나올 때 나는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축축해지며 두려웠던 것일까. 포대기에 싸여 있었지만 사람의 품과 손맛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본능, 그러나 훗날 나를 꺼내준 누군가의 손길을 원망하게 될 울음이었다. 날카로운 가시도 시퍼런 칼날도 들어있는 울음이었다.아기들이 버려지고 있다. 첫울음을 터뜨린 지 채 며칠도 되지 않은 여린 생명들이다. 누가 그렇게 버리고 갈까. 어디에다 버리는 것일까. 아기를 낳았지만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부득이하게 키울 수 없을 때 아기를 넣어두는 곳이 `베이비박스`란다. 이곳에 아기를 두고 가야하는 사람들의 수많은 상황이 있겠지.처음 베이비박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아기를 넣어 다니는 캐리어이거나 일시적으로 아기를 맡겨두는 작은 공간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런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불법이지만 합법적인 것처럼 영아를 유기하는 것이 베이비박스였다. 방망이로 세게 한 방 얻어맞은 것 같다. 그러니까 그건 사물함에 가깝다. 그렇다면 아기가 사물이란 말인가.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많은 아기를 입양해 가는 스웨덴 정부의 사람들이 베이비박스의 실태를 조사하러 왔다. 먼 길을 날아온 그들이 차고 넘치는 서울의 베이비박스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좀 더 주의를 기울이고 조심했더라면, 미리 사회적 차원의 대책을 세웠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다.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두고 가는 사람들은 죽는 날까지 무거운 짐을 안고 괴로운 심정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중에는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들도 언젠가는 후회하고 마음 아파하게 되리라. 그곳에 버려진 아기도 평생 상처를 안은 채 험난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벚꽃이 진다. 갈 곳 모르는 꽃잎들이 어지럽게 흩날리고 있다.

2015-04-03

누워서 크는 콩나물

▲ 이은경수필가수필시대 기행 연재중 어릴 적 늦잠을 잘라치면 우리 할머니 잔소리 중 하나가 `해가 똥구녕을 찌르게 생겼다`였다. 그 꾸중은 굉장히 자극적이었다. 잠들면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져서 웬만한 자극에도 꿈쩍 않던 나를 벌떡 일으킬 정도였다.지난 저녁에는 손님을 치르느라 몹시 피곤하였다. 피곤을 핑계로 해가 머리 꼭대기에 오도록 늦잠을 즐기려는 참이었는데 딸네 식구들이 출동했다. 자식을 먹이는 일에는 제 몸 아픈 것도 불사하는 것이 어미라니 피곤을 무릅쓰고 일어났다.아이들 조반준비를 하며 부엌바닥을 쓸다가 허리를 삐끗했다. 혼자서 돌아눕지도 못해 끙끙거리는 와중에 서울 사는 친구 J에게서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오고 있는 중이라는 연락이었다. 점심 시간 무렵이니 밥이라도 한 끼 먹여야 하는데 내 상태는 그럴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외식이라도 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좀체 움직여지지 않는 허리가 걱정스러웠다.친구가 왔고, 나는 등산스틱을 의지하고 나섰다. 남편과 친구는 내 꼴이 우습다고 킥킥거리며 웃었다. 통증을 표내지 않으려고 기꺼이 따라 웃었다. 허리를 반으로 접고 아슬아슬하게 걸어 마당을 내려갔다. 그런 내 모습에 할머니 모습이 겹쳐졌다.할머니는 허리를 반 접어 몇 발자국 걸으시다가 두 손바닥을 양 허리에 갖다 붙이시곤 허리를 천천히 피곤 하셨다. 다리는 동그라미를 그리듯 벌리고 무릎은 다 펴지 못하신 체였다. 늙어 고부라진 허리와 퇴행성관절염은 거동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 몸으로 장사하시는 어머니를 대신해 우리 남매들을 먹이고 입히는 가사 일을 도맡아 하신 할머니였다.“한 시루 안에서 누워 자라는 콩나물이 있단다.” 무슨 이야기 끝이었는지 친구가 그렇게 말했고 뜬금없는 소리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앉아 있는 것도 통증 때문에 수월하지 않아서 할머니 생각에 잠기며 대화를 건성으로 하고 있던 참이어서 왜 그런 표현이 나왔는지 의아했다.“그래? 그 참 재미있는 표현이구나!”친구는 말갛게 웃으며 그 큰 입을 찢어 귀에 걸고는 말했다.“모르나, 첨 들어봤나? 니는 먼 놈의 작가라는기 그마이 무식하노?“그동안 나는 꽤나 잘 난 척 했던 모양이었다. 내가 모르는 것이 그렇게나 신나는 일인지 몹시 흥분해서 웃어 제치는 것이었다.무식한 나는 움직이지 말고 안정해야 할 허리를 반 접고 등산스틱을 의지 삼아 친구에게 의리를 지키고 사흘을 드러누워 있다. 자꾸만 불어나는 체중을 말리려고 시작한 지난 보름간의 걷기운동이 도루묵이 되어 버렸다. 누워 있다 보니 밟히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노력이 아까운 운동도 그렇거니와 때맞추어 김치도 떨어지고 해야 할 집안일이 산더미다.할머니는 가끔 어머니께 아픈 다리를 하소연하시면서 손녀가 집 안 일을 조금이라도 돕게 하라고 청할라치면 어머니는 손사래를 치셨다.“시집 가믄 하기 싫어도 해야 할 부엌일을 뭐 하러 미리 시킨다는 거이야요. 기냥 두시라요” 나는 엄마의 응원에 힘입어 할머니의 아픈 다리나 허리를 모르는 척 했다.아이를 낳지 못해 소박을 당했다는 할머니는 피난민이었던 할아버지를 만나 살림을 차렸다. 할아버지의 장성한 아들이었던 내 아버지의 모난 눈총을 받으면서도 묵묵히 집안일을 도맡아 하셨다. 정화수 한 사발을 떠 놓고 가족을 축원하느라 손바닥이 닳도록 비비는 삶, 여느 어머니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사신 할머니의 인생은 참 지난했다.시루 안의 콩나물들처럼, 사촌들까지 모여 복작거리는 집에서 계집애라고 나 하나였지만 알아서 할머니의 고단함을 덜어드리지 못했다. 덜어드리기는커녕 친구들을 데려다 밥 먹이기 다반사였다. 나는 바로 할머니의 콩나물시루에서 누워 크는 콩나물이었던 것이다. 시집와서 소종가의 대소사를 거반 혼자서 감당해야하는 많은 일들은 그때 할머니를 돕지 않은 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2015-03-27

생애 가장 길었던 전화

▲ 전상준 수필가대구수필문예대학 강사 재윤이와의 통화다. 내 생애 가장 길었던 전화다. 그는 첫돌 지나지 않는 둘째 손자다. 사십 여분 전화기를 귀에 대고 숨소리만 들었다. 처음엔 `행복은 찾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이란 말을 떠올리며 즐거운 여행을 한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다녀간 녀석의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댄다. 며늘아기는 서울 가면 쉽게 볼 수 없으니 있을 때 실컷 정 나누기해야 한다며 연신 손자를 안겼다. 생각만으로도 행복하다. 며칠째 몸살감기로 앓아누운 아내가 급하게 나를 찾는다. 병원 응급실에라도 가자고 할 줄 알았다. 예상과 달리 손에 전화기를 들고 받아보란다. 며늘아기다. “아버님 집에 있는 전화기 아직 통화료 내지 않아도 되지요.” 엉뚱한 질문이다. 순간 평소 잘 통화되던 전화기에 문제라도 생겼나 싶어 긴장했다. 엉겁결에 아직은 무료라 답하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재완이가 갑자기 놀이터에 가자고 못살게 한단다. 재완이는 첫째 손자로 재윤이 형이다. 형은 네 살이고 동생은 두 살이다. 재윤이가 잠이 막 들어 같이 데리고 갈 수도 없고 주위에 부탁할 사람도 없단다. 큰놈 데리고 어린이놀이터에 잠깐 다녀올 테니 작은놈 좀 봐 달란다. 한 고집하는 재완이니 달래기가 힘들겠다는 생각에 이해가 간다. 한데 손자는 서울 있고 나는 대구에 있다. 아이를 돌본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참 희한한 세상이다.잠든 재윤이 옆에 전화기를 두고 놀이터에 나간다. 오 분 정도의 간격으로 전화 수화기를 들어봐라. 재윤이가 잠에서 깨어나 우는 소리가 들리면 자기 휴대전화로 연락해라. 설명을 들으니 아주 간단하다. 신문이나 책을 보면서도 아이를 볼 수 있겠다 싶어 대수롭지 않게 허락했다.전화기를 귀에 대어본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깊은 잠에 빠져 행복한 꿈을 꾸고 있나 보다.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예찬`이 생각난다.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을 모두 모아서 그중 고요한 것만을 골라 가진` 어린이의 자는 얼굴을 `평화라는 평화 중에 그중 훌륭한 평화만을 골라 가졌고` `고운 나비의 나래, 비단결 같은 꽃잎, 세상에 아무것으로도 형용할 수 없이 보드랍고 고운 얼굴`로 `더 할 수 없는 참됨과 더 할 수 없는 착함과 더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갖추고 그 위에 또 위대한 창조의 힘까지 갖추어 가진 어린 하느님`으로 만들었다. 어린이의 참모습을 바라본 마음이다. 영혼까지 맑게 하는 힘을 느낀다.가슴 깊은 곳에 숨어 있던 행복이 `내 여기 있소`하며 미소 짓게 한다. 그것도 잠깐이다. 방해하는 사람도 없는데 글을 읽을 수가 없다. 가끔 느껴지는 재윤의 새근거리는 숨소리에 신경이 쓰인다. 시계를 본다. 아직 이십 분도 지나지 않았다. 전화기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고요하다. 전화기를 너무 멀리 놓고 간 것은 아닐까. 요에 솜이 많은 것은 아닐까. 잠버릇이 좋지 못해 엎어 자는 것은 아닐까. 방정맞은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괜히 불안하다.완하게 가는 시계만 거듭 본다. 재윤이에게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울기라도 해 울음소리라도 크게 들리면 좋겠는데…. 옆에 자는 아내에게 불안한 속내를 드러내며 전화해도 괜찮을까 묻는다. 몸이 불편한 아내는 세상이 귀찮은 모양이다. 마음대로 하지 왜 자는 사람 자꾸 깨우느냐며 타박이다. 일각이 여삼추다.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 조바심이 나 안절부절못하겠다. `그래 재완이도 삼사십 분은 놀아야지` 하며 위로를 삼는다.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전화기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린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드디어 일이 났구나. 재윤이가 자다가 일어나 어미가 없으니 방 밖으로 기어가다가 머리를 문에 크게 부딪친 모양이다. 울렁거리는 마음을 진정하며 며늘아기에게 전화했다. “아버님, 재윤이 벌써 울어요.” 하며 대답이 예사롭다. 초조한 심정을 그대로 전달할 수도 없고 “그래 `쿵` 소리가 났다. 집에 빨리 가 봐라.” 하고는 전화기에 온 신경을 모은다.답답함을 참으며 기다린 지 십 여분. “재윤이 아직 자고 있는데요.” 거참, 이럴 수가! 분명히 `쿵` 소리가 났었는데. 다행이다.

2015-03-20

명이

▲ 김숙현수필가 봄나물이 택배 상자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하얀 줄기 위로 날개를 펼친 명이 이파리가 소담스럽다. 절인 명이가 먹고 싶다던 작은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물을 절여서 애들 먹일 생각에 손길이 분주해진다. 짙은 고동색 간장에 투명한 식초를 섞고 하얀 설탕을 함께 해서 팔팔 끓였다. 온 집안에 간장과 식초 냄새가 진동한다. 반가운 고향 나물을 받아들고도 한편으론 애처로운 쓰라림을 느낀 것은 생면부지인 그의 소식을 함께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즈음이었지. 어릴 적 고향에선 정월 대보름이 지나면 동네 아낙들이 커다란 행주치마를 허리에 두른 채, 목에다 걸개를 하고 산천을 누비며 명이 나물을 뜯으러 다녔다. 가까운 야산을 한 바퀴 휘돌아오는 아낙의 보자기는 산달이 꽉 찬 산모의 배처럼 불룩해져 있었다. 산 어귀에서부터 허리춤을 실룩거리며 안고 온 아낙의 나물 보따리를 풀어헤치면 망사처럼 생긴 껍질을 한 겹 두른 명이 나물이 방 한가득 이었다. 내가 어릴 적 명이는 아주 이른 봄에 눈 속에서 자라는 산나물이었다. 울릉도를 개척할 즈음, 긴 겨울을 지나고 굶주림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눈이 녹기 시작하면 산에 올라가 눈을 헤치고 이 나물을 캐다 삶아 먹으면서 생명을 이었다고 해서 그 이름을 명이라고 불렀다고 전해 들었다. 내가 아는 명이는 그것이 전부였다.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명이를 뜯기 위해 산을 찾는 아낙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대신 등산화를 신고 포댓자루를 짊어 진 남정네의 발길들이 산으로 산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뿌리를 뽑아 먹던 명이가 어느 날부터인가 잎을 먹는 고급 쌈 채소로 둔갑을 하더니 몸값이 천정부지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명이 철이 되면 바다를 건너온 낯선 사내들이 울릉도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전문 산악 장비를 갖추고, 자일을 메고 이른 새벽 산으로 출근하는 산사나이들은 땅거미가 지고도 한참이나 지나서 서너 개의 나물 자루를 산 아래로 굴리며 내려오곤 했다. 그들은 한 철 금싸라기를 긁어모으고 명이가 자취를 감추는 늦봄이 되면 명이랑 함께 동네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어디서 온 아무개가 올봄에는 얼마를 벌어서 갔다더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더 이상 명이는 명을 이어가는 산나물이 아니었다. 봄이 되면 건장한 사나이들을 산으로 유혹하는 금싸라기가 되어 있었다.고향을 떠나온 뒤 소문으로 전해 들은 그도 그런 부류의 사나이였다. 덥수룩한 콧수염과 구레나룻으로 봤을 때 젊은 시절 여자 꽤나 울렸을 거라는 고향 지인의 말을 이따금씩 전해 들었다. 지인은 그가 하루 나절에 칠팔십만 원을 거뜬하게 벌어 온다며 아마도 그는 전생에 산다람쥐였을 거라는 칭찬을 했었다. 그랬던 그는 돌아가는 길도 남달랐다. 명이철이 끝나기도 전에 산에서 실족사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그는 울릉도가 화산섬이라 푸석한 바윗돌이 해동되며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는 생리를 간과했을 것이다. 노다지를 캔다는 생각은, 봄을 맞은 산속의 생명이 제 흥을 못 이기고 흙 위에 들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얀 눈 속에 숨어 있던 명이의 생명력은 차가운 얼음의 한기를 품고 자란 매정함에서 온다는 진리도 그는 몰랐던 게다. 날이 풀리고, 얼어붙었던 바위가 녹으면, 들떠 있던 흙들도 자리를 잡아가고 나무들도 뿌리를 다지며 함께 살아간다는 섬마을의 진리를 간과한 채, 뿌리가 들뜬 나뭇가지에 자일을 메고 몸을 의지한 게 스스로 명을 단축한 원인이 돼버렸다. 가슴을 더욱 쓰리게 하는 건 산다람쥐를 닮은 그처럼 노다지를 캐다가 유명을 달리하는 이들의 얘기가 해마다 한두 번씩은 꼭 들린다는 것이다.명이 잎이 검푸른 멍으로 서서히 물든다. 반지르르한 푸르름을 포기하고 검푸른 투명함으로 새로운 모습을 보인다. 이제는 숙성 기간이다. 간장의 짠맛과 식초의 새콤함, 그리고 설탕의 달콤함까지 어우러지고 나면 환생하는 명이의 맛이 될 것이다. 다시 태어난 명이는 달콤쌉쌀한 맛만 남아서 입안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다. 그러나 가슴 한구석에 남는 알싸한 느낌은 무슨 맛으로 표현해야 하는지 답이 없다.명이는 더 이상 명(命)이 아니다.

2015-03-13

등대

▲ 서혜정수필가·서진종합상사 대표 천장이 빙그르르 돈다. 아침밥을 먹고 석양이 지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하던 일을 멈추고 부엌으로 간다. 냉장고에는 여러 종류의 먹거리로 가득 찼지만 내키는 것이 없다. 한참 망설이다 두유 하나 꺼내 들고 창가로 간다. 어둠살이 내리기 시작했으니 고향으로 벌초 간 아버지가 돌아오실 시간이다. 한껏 목을 빼고 골목 어귀를 내다본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맵다. 다소 맹랑하긴 하나 내가 기다리는 건 아버지가 아니라 고모가 살뜰히 챙겨줬을 보따리다. 한 번도 예외가 없었으니 오늘도 틀림없이 우리 부녀 입맛에 꼭 맞는 것들을 보냈을 터다. 이번에는 뭘 주었을까? 지난번에 보내 준 고추 튀각은 고소했고 우엉 김치는 밥도둑이 따로 없었는데 생각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드디어 양손에 짐 보따리를 든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한껏 상기된 얼굴로 짐을 받아 든다. 허리가 휘청인다. 무엇이 들었기에 이렇게 무거운 걸까? 손톱이 얼얼할 정도로 용을 써 매듭을 풀어보지만, 쉬이 열리지 않는다. 요리조리 돌려가며 겨우 푼 보자기 안에는 어른 주먹만 한 감자와 양파, 아침 이슬이 묻어날 것 같은 진보라색의 가지. 줄 세워 둔 군인처럼 반듯한 미나리며 상추, 부추가 손질되어 있다. 입성이 걸지 않은 아우는 감자볶음을 좋아하고 조카는 생나물 없이는 숟가락을 들지 않으니 맞춤 식재료이다. 또 다른 보따리는 눈보다 코가 먼저 반응한다. 구태여 확인하지 않아도 단박에 알 수 있는 것이 토종의 냄새다. 마늘과 청양고추를 넣고 버무린 쌈장과 검지만 탁하지 않은 간장, 거기에 맑은 노란빛의 참기름까지. 여기서 끝이면 서운하다. 공들여 화장한 듯 고운 빛깔을 내는 깻잎 무침과 군내나지 않은 김장 김치, 구색도 골고루 갖췄다.고모 나이 아홉 살, 전쟁 통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 충격이 잦아들기도 전에 돌림병으로 아우 둘까지 한날에 놓쳤다고 한다. 그리고 남은 동생이 아버지와 막내 고모다. 하루아침에 가장이 된 할머니는 남은 자식들 키우느라 밤낮없이 일만 하였고, 고모는 다니던 학교마저 관두고 동생 둘을 건사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아우들을 향한 내리사랑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언제였던가. 고모가 농사일로 몸살이 났다. 안타까운 마음에 퇴직하고 집에 있는 아버지에게 일을 시키라고 했더니 아까워서 못 그러겠다고 한다. 고모 인생에서 동생은 자식과 버금가는 존재인가 보다. 그런 동생이 장가가서 얻은 조카였으니 그 사랑이 얼마나 극진했겠는가.유년 시절 나는 잘 걷지 못했다. 조금만 걸어도 다리가 아파서 중간중간 쉬어야만 했다. 한 날은 유치원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십분 남짓 걸리는 짧은 거리를 걷지 못하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거짓말처럼 고모가 나타났다. 밭에서 일하는데 까마득히 먼 곳에서 시작되던 내 울음소리가 점점 선명해지더라는 거였다. 그 길로 쫓아 왔노라 말하는 고모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몇 해 전, 오랫동안 계획했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준비 기간도 길었지만 온 열정을 바쳤던지라 상심이 컸다. 여러 달을 허송세월로 보내던 중에 고모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청구를 듣겠거니 했는데 뜬금없이 당신 등대의 불이 꺼지려고 한다는 거였다. 수수께끼 같은 말에 반응이 없으니 내가 당신의 등대라고 했다. 밤바다를 항해하는 배를 위해 불을 비춰주는 것이 등댄데 어찌 내가 그런 존재란 말인가. 몸도 성치 않고 엄마가 없어서 밑반찬까지 신경을 써줘야 하니 고모에겐 짐 덩어리가 맞다. 놀리는 듯한 고모의 말에 불퉁거렸더니 인생을 살다 보면 짐이 사람을 살리는 약일 수도 있다고 했다. 당신이 아니면 지켜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근심 덩이인 내가 삶의 의미가 되어 버린 것일까? 그때는 이해되지 않던 말이 고모의 허리가 굽어질수록 아버지의 검은 머리칼 숫자가 줄어들수록 알 듯하다.`삐리링. 삐리링` 밥이 다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음이 지난날을 걷고 있는 나를 깨운다. 큰 대접에 하얀 쌀밥을 뜬다. 오늘만큼은 소식(小食)하는 우리 부녀의 오랜 식습관이 무너지리라. 아버지에게는 어머니 같은 누나, 나에게는 생명수 같은 고모가 마련한 밥상임을 알기에 푸지게 먹을 것이다. 모쪼록 더디게 소화가 되었으면 좋겠다.

2015-03-06

침대는 섬이다

▲ 이다안수필가 침대에 몸을 눕힌다. 아들 녀석이 귀가하는 시간까지 완전한 자유다. 종일 침대에 누워있어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조용하고 편안하다. 꼭 섬에 온 듯하다. 침대 위가 섬이라고 상상해 본다. 어느 한적한 남해의 작고 예쁜 섬. 한가로이 바다를 바라보며 피곤한 일상을 위로받는 심정으로 눈을 감는다. 정말로 바다가 보이는 것 같다. 배를 타고 저 멀리 보이는 나의 섬에 도착한다. 내 섬 주위에는 손만 뻗치면 전화기, 핸드폰, 노트북, 리모컨과 몇 권의 시집과 소설집이 이리저리 뒹굴고 있다. 생리적인 현상을 해결하는 일 말고는 섬에서 나오지 않아도 된다.정렬되지 않은 널브러진 물건들이 긴장감을 풀어준다. 책 읽다가 잠 오면 자고, 지루하다 싶으면 TV보고, 그것마저도 재미없다 싶으면 인터넷사이트를 유영하기도 한다.두어 평 남짓한 `침대섬`. 섬에 있는 동안 내가 디딘 거실과 주방, 집안 곳곳은 뭍이 된다. 뭍은 오늘 나와 떨어져 있다. 하기에 뭍에서의 나는 없고 오직`침대섬`에서의 나만 존재할 뿐이다. 한마디로 이곳은 게으름 그 자체를 누릴 수 있는 곳이다. 이런 시간을 즐기기 위해 나는 열흘에 이틀 정도는 아무런 약속을 하지 않고 섬 생활을 즐긴다. 부족한 잠과 결핍된 생각들을 채워주는 보약 같은 시간이기 때문이다.어떻게 종일 그렇게 지낼 수 있을까 싶지만, 이 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시간 개념 없이 `침대섬`에서 즐기는 거드름은 에너지로 다시 생성된다.바쁘게 코앞의 일만 처리하며 살다 보니 놓치는 일들이 많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과 잠시 잊고 살았던 사람들도 생각나고 무엇보다 여유가 생겨나 좋다. 사색과 공상에 잠기다 보면 뜻하지 않았던 생각을 퍼 올릴 수 있다.때로는 좋은 생각과 나쁜 생각들이 뒤섞여 본성을 건드리기도 한다. 내 위주로 판단한 모든 것들을 개조해 보고 싶기도 했다가, 이내 나를 알아주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또 살아가는 맛을 찾는다. 인생이 이분법인 줄 알았는데 아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어떤 생각을 가지고 방향을 돌려가며 생각하다 보면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없다. 다만 차이일 뿐이다.어느새 섬에도 어둠이 내려앉는다. 낮과 밤이 만나는 시간은 왠지 허전하고 쓸쓸해진다. 낮도 아닌 밤도 아닌 경계의 시간은 어쩌면 시간 속에 없는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일까? 이 시간은 민감하고 예민해진다. 나도 그 시간 속에는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 탓일까? 길 잃은 아이 마냥, 갑자기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주위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처럼 잠시 방향감각을 잃는다.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눈에 익은 살림살이가 낯설게만 느껴진다.예전에 나는 행주와 걸레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유난히 깔끔을 떨며 살았다. 눈 뜨면 닦고 눈 감기 전에도 닦는 일을 충실히 했다. 전업주부인 나는 주부로서의 본분을 다한 셈이다. 그 성실함에 부지런함까지 있었으니 그야말로 성실한 부지런함을 가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성실하면서 부지런하기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어 부지런함을 부정하고 싶었다. 성실하기만 하면 되는데 부지런하기까지 한 삶이 재미없어졌다. 주부라는 본분은 성실히 하되 조금은 게을러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내가 요즘 생각하는 성실한 게으름이다. 가정주부로서 밥상은 책임지면서 매 끼니때마다 설거지 하는 것이 아니고 가끔은 오늘처럼 게으름을 피우면서 한꺼번에 하는 요령을 알았다. 이제는 행주와 걸레를 싱크대 위와 바닥에 있는 것으로 구별하면 되는 게으름의 도를 터득한 것이다. 이렇게 살아보니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유도 생겼고 고단한 몸도 훨씬 편해졌다.나는 성실한 게으름으로 일상의 피로를 가끔 침대섬에서 보낸다.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으로 그만이다. 눕고 싶으면 눕고, 앉고 싶으면 또 그렇게 하고 누구의 간섭,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어떤 격식과 형식이 필요 없는 이곳이 좋다.좁아도 한없이 넉넉하고 외로워도 행복한 섬, 그 어떤 섬도 내겐 나의 침대섬만큼 편안한 곳은 없다. 그런 성실한 게으름이 나는 참 좋다.

2015-02-27

그 여자의 사랑

▲ 조병렬수필가 사랑만큼 고귀한 것이 있을까? 그 여자의 사랑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랑은 아니었다. 먹구름이 몰려와 하늘 한 귀퉁이에 남아 있는 푸른빛이 애처롭게만 보이던 어느 날. 28세 처녀가 충청북도 음성꽃동네를 찾아왔다. 그녀는 고아로서 18세가 되면서부터 보육원에서 나와 독립된 삶을 살아야만 했다. 주위에 아무도 돌봐 줄 이 없는 세상에서 힘겹게 살아가다가 결국에는 몸을 파는 수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고의 십 년 세월에 마지막으로 붙은 이름은 자궁암 말기 환자였다.평소에 그녀가 어머니로 부른 그분은 다행히 악덕 포주는 아니었다. 그분은 죽살이 고개를 힘겹게 넘고 있는 그녀의 생명을 연장하고자 서울의 큰 병원에까지 가 보았으나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다시 지필 수는 없었다. 많은 노력을 했지만, 성과를 얻지 못한 채 마지막으로 찾아온 종착역이 이곳이었다. 평생토록 한 번도 옳게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받게 하면서 마지막 생을 보듬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그때부터 그녀는 오로지 중환자실에서 전혀 거동하지 못하는 다른 환자들을 돌보는 것으로 밤낮을 잊고 봉사의 길을 걸었다.그런 생활을 하던 중에 27세가 된 한 청년의 병간호를 하게 되었다. 그는 경직성 마비증 환자로서 말도 할 수 없고 몸 하나 까딱하지 못하였다. 단지 큰 소리로 우는 것과 눈꺼풀을 움직여 의사 표시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런 남자 곁을 수개월 동안 온갖 정성을 다하여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함께 지내는 날이 계속되었다.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은 점차 정분이 쌓여 갔을까? 보통 세인의 눈으로 보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고 비극적인 만남이라고 쉽게 단정해 버릴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애절하여 간단히 보아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사랑의 가치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잘 알 수는 없으나, 이들 남녀의 정분도 사랑이라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런 사랑과는 분명히 다를 것만 같았다. 이들의 사랑은 이수일과 심순애의 사랑도, 시베리아로 유형(流刑)을 떠나는 카추샤의 뒤를 따라가는 네플류도프의 사랑도 아닐 것이다. 설렘이나 열정의 사랑뿐만 아니라 위안과 치유의 사랑도 더없는 고귀한 사랑이 아닐까 싶었다.사랑의 힘은 육체적 통증도 잊게 하였던가. 그렇게 불편한 육체를 가진 두 사람의 몇 개월도 사랑이고 행복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태울 수 있었던 위안의 사랑과 생명의 불꽃도 불과 8개월 정도뿐이었다. 마지막 혼불을 태우듯 그녀는 최후의 막음불질을 끝으로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다.자신의 모든 장기를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기증하면서, “이런 몸도 필요한 사람이 있을까요?”라는 한마디 말이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가 죽던 날 밤, 아무도 청년에게 그녀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청년은 하염없는 눈물만 쏟고 있었다고 한다.사별의 순간에도 사랑의 심령(心靈)은 서로 통하는 것일까. 사랑의 힘은 육체적 아픔과 죽음의 고통마저도 잊게 할까.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숭고하고도 비장한 사랑의 힘 앞에 나는 그냥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절망을 사랑으로 승화한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이곳 꽃동네의 푸르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오래도록 전해지고 있었다.극단적인 절망의 늪에서 한 오라기의 행복을 갈구했던 삶 앞에서 그들이 보여준 숭고한 사랑의 의미를 오래도록 내 가슴에 담아 두고 싶다.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따뜻한 사랑으로 보듬어 줄 수 있는 마음을 담지 못한다면 어찌 인생을 고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구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남에게 뿌려줄 사랑의 씨앗이 담겨 있고, 남으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아야만 행복의 싹을 틔울 수 있는 씨앗도 뿌려져 있다.누가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이 없는 인생이란 한 줄 외줄에 걸린 슬픈 존재라고.

2015-02-13

커피를 마신다

▲ 정아경수필가·독서지도사 `향이 나는 사람`이라는 문자를 받았다. 순간, 내 후각은 예민해졌다. 오른팔 왼팔을 번갈아가며 내 냄새를 맡는다. 셔츠의 목을 쭈욱 당겨 얼굴을 셔츠 속에 박고 들숨을 길게 마셔보기도 한다. 젖가슴에서 올라오는 것은 냄새라기보다 먼저 후끈한 열기다. 무수한 냄새가 뒤섞인 듯도 하고 그저 작고 작은 것들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도 같다. 은근하지만 밀도 높은 살 냄새, 분명 냄새를 맡고 있지만 나는 나의 냄새를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런데 그는 내게서 무슨 냄새를 맡은 것일까? 향은 존재의 문이다. 운식이는 내게 논술 수업을 받는 중학교 일학년생이다. 녀석이 부모님과 어디 여행을 다녀오느라 이주일만에 나타났을 때 녀석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소리쳤다.“입구부터 쌤 냄새가 나요.”“냄새? 운식아, 쌤 냄새가 어떤 거야?”“그런 거 있어요. 쌤 냄새~.”“좋아? 나빠?”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향은 기억의 통로이다. 팔공산으로 가는 과수원을 지날 때는 가끔 퇴비냄새가 난다. 그러면 나는 차문을 열고 서행하며 깊은 숨을 들이쉰다. 생각지도 못한 고향의 기억들이 불쑥불쑥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흙에 묻혀 사시는 아버지가 떠오른다. 산사입구에 들어설 때 옅게 피어오른 향내에서도 나는 아버지를 생각하곤 한다. 향을 피우고 독경하는 정갈한 아버지의 모습을.향은 사랑의 촉매이다. 연애할 적 그와 다툰 뒤 소원해진 적이 있었다. 먼저 화해를 신청할 줄 알았던 그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고 냉전은 꽤 길어졌다. 어느 날 나는 그의 자취방을 말없이 찾아갔다. 남산동 골목 끝자락 후미진 문간방. 그곳에는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은 우리 둘 만의 올망졸망한 시간이 있었다. 그곳에서 그 시간들을 다시 확인하고 나면 뭔가 선명해질 것도 같았다. 방은 비어 있었다. 나는 벽에 걸린 그의 재킷에 얼굴을 묻었다. 순간, 그의 냄새가 내 가슴으로 들이쳤다. 그의 냄새가 부드럽게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고 내 등을 토닥였다. 나는 그 따뜻함에 울컥해져 방안을 둘러봤다. 윗목에 소주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 역시 나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구나. 지금도 냉전이 길어지면 그의 옷에 얼굴을 묻어본다.향은 에로스의 완성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에로틱한 장면을 생각하면 커피향이 먼저 떠오른다. 영화였는지 책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진 않는데, 주인공인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기 전엔 으레 커피를 마시곤 했다. 게임하듯 서로를 탐색하는 긴 시간이 흐르고야 하나가 되려는 갈망의 시간이 온다. 그녀는 매번 뜨거운 커피를 아주 천천히 마신다. 연인의 어깨에 기대어 소로록 커피를 마시는 그녀에게 생은 온전히 그녀 편인 듯했다.어느 날, 내게도 그런 명장면을 연출할 기회가 왔다. 두 아이가 캠프를 떠났다. 집근처 구이 집에서 소주를 마시고 오랜 만에 그의 팔짱을 끼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느리게 걸었다. 그리고 침대에서도 느리게느리게 걸었다. 나는 가능하면 몽롱한 상태에서 깨어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그에게 속삭였다.“커피 좀 타줘.”순간 들려온 무뚝뚝한 그의 목소리는 내 꿈을 산산조각 냈다.“늦은 밤에 무슨 커피, 하여튼 중독이야.”완전한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꿈 꿀뿐. 너와 나의 만남은 너와 나의 시간 속에서 항상 미끄러진다. 결국 완전한 만남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한다. 아니, 모든 시간은 떠나온 다음에야 비로소 완전해진다. 떠남은 내 속에 그대의 집을 짓고, 그대 속에 나의 집을 짓게 한다.향은 존재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우리 육신이 물과 바람과 먼지로 돌아간 후에도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것은 향이 아닐까 싶다. 자신만의 고유한 향이 한줌 남아 허공을 맴돌다 어느 시간 어떤 공간에서 누군가에게 기억의 문을 열어주는 것은 아닐까.나는 오늘도 커피를 마신다. 커피향을 맡으며 당신의 문을 두드린다.

2015-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