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밥의 항변

등록일 2016-01-08 02:01 게재일 2016-01-08 17면
스크랩버튼
▲ 최종희수필가·여름문학 편집장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보다 각별한 사이도 드물지 싶다. 미안하다는 뜻을 전하거나, 고맙다는 인사말을 대신하거나 보고 싶다는 뜻을 전할 적마다, 내 이름을 거론하며 속내를 표현할 때가 많다. 누구를 막론하고 집에서나 밖에서나 하루에도 몇 번씩 나와의 만남을 즐긴다. 처음에 어색한 이들도 나와 함께 하는 횟수만큼 정이 쌓여간다고 할 정도니 이만하면 그 역할을 짐작하고도 남지 않겠는가.

아마 이러한 지위는 호위무사와 궁녀들을 대동하는 왕의 행차와도 맞먹을 것 같다. 나는 거의 혼자서 상 위에 오르는 법이 없다. 가는 곳마다 육, 해, 공군이 동행하기 마련이다. 채소와 생선과 육류들이 번갈아 따라다닌다. 그래도 그들 위에 군림하기는 싫다. 육즙이 좔좔 흐르는 고기의 자리를 탐한 적도 없고, 푸른 빛깔이 감도는 싱싱한 야채의 자리를 넘보지도 않는다. 예쁘고 화사한 쟁반에서 분에 넘치는 겉멋을 부리기보다, 소담스런 공기에 다소곳하게 담겨 있기를 원할 뿐이다.

그러한 내가 있기까지 나를 거쳐 간 수많은 손길을 기억한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울어댄 소쩍새의 수고로움보다, 한 톨의 쌀을 맺으려고 농부들이 흘린 피와 땀의 노고가 더 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언감생심 거드름을 피울 여유조차 없다. 사람들의 몸속에서 영양분을 만들어 활력을 불어넣는 본연의 의무를 다하기에 분주하다.

가끔은 유구한 역사를 지켜온 나의 자리가 위태롭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지극정성으로 기울인 노력은 오간 데 없이, 시금치를 먹어 건강해졌다며 근육 자랑을 하는 뽀빠이를 보면 섭섭함이 밀려온다. 온갖 재료와 색상으로 화려하게 치장을 한 빵이 호시탐탐 아침 식탁을 넘볼 때는 심기가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누가 뭐라 해도 예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가끔은 들려오는 세상사 소식에 따라 기분이 좌지우지되기도 한다. 어떤 날은 괜히 으쓱해진다. 건강의 중심에서 나를 꼭꼭 챙기는 사람들이 많아 존재의 필요성을 실감할 때나, 배고픈 이들을 위해 선뜻 자신의 몫을 아낌없이 내어놓은 인정스러움에는 가슴이 훈훈해진다. 때론 분노가 치밀 때도 있다. 뇌물죄로 줄줄이 엮어가는 소식을 접하면 기가 막힌다. 자신들의 죄는 뉘우칠 기미가 없고 애꿎은 내 이름을 들먹이며 변명만 늘어놓기 일쑤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짓이라는 핑계가 들릴 때면 억울하기 짝이 없다. 주체하지 못하는 탐욕이 저질러 놓은 마음 탓이면서 오히려 내가 원인인 것처럼 돌려 덮어씌운다. 그러고서도 진작 거물들은 미꾸라지 빠져나가듯 용케 도망쳐 버리고, 조종당한 힘없는 아바타들만 잡혀가는 현실에 한숨이 난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나를 취하기 위해 등이 휘어지도록 삶의 무게에 시달려야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막강한 권력으로 다른 사람들이 차려 놓은 밥상을 빼앗으려 드는 파렴치한 행동에는 분통이 터진다. 이것을 밥그릇 싸움이라 부르며, 마치 생존전략의 대명사인 양 당당하게 나를 끌어들인다. 결코, 내가 모든 원인을 제공한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이제 다시는 함부로 내 이름을 들먹이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이 벌이는 끝도 없는 쟁탈전에 동네북으로 취급당하는 것을 극구 사양한다.

나에게도 소망이 있다. 요즘은 디지털 문화의 발달로 한 개의 상품을 다양한 목적으로 재창출하는 원 소스 멀티유즈(one source multi-use) 시대이다. 영화는 한 개의 상품이지만 극장 상영뿐만 아니라, 비디오, 만화, 게임, 캐릭터 등 다양한 관련 상품을 파생시켜 이익을 낳게 한다.

디지털 시대에 몸담은 나도, 여러 가지 효과를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포만감을 느끼게 하고, 삶의 질을 풍성하게 만드는 징검다리가 되고 싶다. 분홍빛이 감도는 연인들에게 솜사탕처럼 달콤한 사랑을, 마음을 나누고 싶은 벗들에게는 끈끈한 우정을, 외로운 이들에게는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온정을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맡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ssay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