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걷기 운동을 위해 길에 나선다. 매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기분 좋은 날이면 가끔 혼자서 걷는다. 집에서 출발하여 가산산성 입구 진남루를 거쳐 남원리를 돌아오는 코스는 한 시간 정도 걷기 운동에 적당하다. 짙은 솔향기를 마음껏 마시며 열심히 걷는다. 시골에 계시는 연로하신 부모님 걱정, 또 서울에 홀로 떨어져 직장생활을 하는 아들 생각, 도토리 키 재듯 고만고만하게 잘 자라고 있는 손자 녀석들의 화사한 얼굴을 그린다.
팔공산 자락에 민가가 많지 않아서인지 이른 아침이나 저녁 시간에는 인적이 드물고 한적하다. 게다가 밤이라고는 하지만 한여름의 열기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요즘 같은 날씨에는 산책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수월찮다. 참으로 다행이다. 호젓한 산길을 걷고 있는데 저만치 한 쌍의 남녀가 다정스럽게 손을 잡고 천천히 걷고 있다. 같은 색 같은 모양의 운동복으로 보아 아마도 신혼부부인 것 같다. 부러울 만큼 다정스러워 보인다.
누구나 신혼 시절에는 풋풋한 사랑으로 가득하다. 그러다 이런저런 세파에 시달리며 살다 보면 때로는 사랑을 잊고 살 때가 잦다. 그냥 무덤덤하게 친구처럼 동반자로서 사랑의 감정은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고 살아가고 있다.
얼마 전 신문에서 본 기사가 생각난다. 기혼자들에게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하겠느냐?`라는 질문이 있었다. 대다수 여성은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대답했고, 남자들은 지금의 아내와 다시 결혼하고 싶다고 답했단다. 결과는 나의 예상을 빗나갔다. 우리나라 고유의 유교적 관념으로는 `여필종부(女必從夫)라고 하여 여자는 남자를 따르는 것이 미덕으로 알고 있다. 그런 면에서 아내는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남편을 선택하리라 믿었다.
우리 부부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떤 답을 할까? 특히 아내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당신이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나와 결혼하겠느냐고 장난삼아 물어볼 수도 없다.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그때의 기분은 어떨까. 여성 대다수가 아니라고 답했다고 하니 아내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시작된다. 나 역시 모든 남자의 대답과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나도 또 다른 여자를 만나 살아보고 싶은 욕망은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당장 내 곁에서 살 비비며 살아가는 곱고 순수한 내 반쪽을 남에게 내어준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내가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한 상실감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어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당장은 명쾌한 답이 나올 것 같지 않다,
앞서서 걸어가는 젊은 부부를 뒤로하고 열심히 걷는다. 갑자기 아니지, 그건 아니지 싶다. 하늘의 축복이 있어 만약에 당신과 내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단호하게 당신을 놓아주고 싶다. 22살 어린 나이에 나를 만나 그 많은 사연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해낼 수 있을까. 가난한 살림의 집안 8대 종부로 들어와 크고 작은 일들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시난고난하게 살아왔다. 그래도 남자의 자존심은 있어 고생하는 아내 등 한 번 다독여주는 일에도 인색했지만, 아내의 고생만큼은 잘 알고 있다. 혹시라도 절대자의 능력에 의해 다시 태어나는 기회를 준다면 좋은 사람 만나 고생 좀 덜하고 행복하게 잘 살아보라고 축복해주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당신이나 나나 어떤 운명에 의해 부부의 인연을 맺어 이제까지 잘 살아왔으니 남은 삶이라도 아름답게 보내고 싶다. 살아가야 할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게 남은 것은 분명할지니, 조금은 서럽고 억울하더라도 붉은 입술 꼭 깨물며 두 손 마주 잡고 따뜻한 사랑의 정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