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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훈장

등록일 2016-02-05 02:01 게재일 2016-02-05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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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형호수필가
오랜만에 가족들과 동해로 여행을 갔다. 늦은 오후 철썩이는 파도가 창을 밀고 들어올 듯한 민박집 2층에 짐을 풀었다. 멀리 대왕암이 손에 잡히는 대본 앞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민박집 2층은 다섯 개의 방이 붙어있다. 아침에는 떠오르는 해가 수평선 위를 걸어오고, 밤에는 달빛이 물결 타고 춤추는 선경이 펼쳐진다. 저녁 8시가 좀 지났을까. 왼쪽 방으로 남자 손님들이 들어가는 기척이 난다. 조립식 건물로 방음시설이 약해 조용히 누워 있으면 옆방의 소리가 간간이 들린다. 따로따로 방에 있지만 한 방에 있는 느낌이다.

자려고 누웠지만 방바닥이 너무 뜨거워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체기가 있던 막내아이는 오전의 내연산 산행이 피곤했는지 벌써 깊은 잠에 빠져 다행이다. 벽 저편에서 주고받는 소리가 높아진다. 옆방에서 술자리가 벌어진 모양이다. 들리는 목소리로 짐작해보니 70대 후반의 노인인 듯싶다. 걸걸하고 쉰 목소리의 한 분이 길게 얘기를 하고, 나직한 목소리의 두 분이 맞장구를 치는 듯하다. 한세월 살아온 분들이 삶의 필름을 돌리고 있다.

술이 혈관 속을 한 바퀴 돌았을까? 갑자기 노래가 들려온다. 쉰 목소리의 주인공이 천천히 엔카를 부른다. 느린 듯 감돌아 이어지는 트로트 곡조 비슷한 노래이다. 일행들도 서너 소절을 따라 부르더니 곧 잠잠해진다. 술잔을 주고받으며 지난날의 얘기를 이어간다. 한 잔의 녹차가 식을 무렵 또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이런 여행지의 옆방에서 늦은 밤 일본노래를 듣는 기분을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다. 무슨 연유로 이런 노래를 부를까? 일본 노래를 부를 연배면 아마 여든을 넘긴 분들이 아닐까?

여든이라! 고희(古稀)를 넘기고, 다시 강산이 한번 요동친 나이다. 가장 감수성이 강한 청소년기를 일제 강점기 말기라는 암흑기에 보낸 분들 일 것이다. 해방을 맞자마자 한국전쟁을 겪고, 격랑의 산업 전성기와 민주화시기를 거쳐 오늘까지 살아온 분들.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면서 무슨 얘기를 하였을까? 흘러간 청춘의 봄날이 그리워 그 시절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

사람은 기쁜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생길 때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 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노래는 젊은 시절 배운 유행가일 것이다. 적당한 분위기와 곡차 한 잔이 들어가면 금상첨화이다. 세월은 가는 게 아니라 쌓인다고 했다. 켜켜이 쌓아온 세월 속에 술잔을 앞에 놓고 삶을 되돌아보는 것일까? 열이틀 휘영청 달빛에 젖은 감포 앞바다를 창 밖에 두고, 죽마고우와 살아온 세월의 훈장을 꺼내 보는 것이리라. 가슴 벅차게 행복한 날도 있었을 테고, 설움에 겹도록 마음 저린 날도 있었을 것이다. 애절한 가락에 나도 코끝이 찡해진다.

가만히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이순이 지난 나이이다. 내 청춘의 봄날은 언제였을까? 지난날은 돌이켜 볼 수 있지만, 앞날은 가늠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갖은 상념이 동영상처럼 지나가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떠오르기도 한다. 먼 훗날 삶을 돌아보면 내 세월의 훈장은 어떤 것일까?

문득, 몇 달 전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옆방의 노인들과 비교해본다. 전문 관리직으로 퇴직한 팔순 노인의 사건이다. 대기업 임원의 자식을 둘이나 두고 노년에도 짜인 건강관리로 활기차게 살아왔다. 누가 봐도 복 받은 분으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 분이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외로움이 원인이었다.

다음날 아침, 1층 식당에서 옆방 손님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80대로 추측되는 깔끔한 노인 세 분이셨다. 백발이 멋있는 한 분과, 골이 파인 팔자 주름과 저승꽃이 듬성듬성 핀 두 분의 얼굴에서 세월의 훈장을 읽을 수 있었다. 막역지우들과 겨울여행을 나온 것이리라. 멋지게 사는 분들이다. 아름다운 우정을 상상해본다.

“해장해야지.”

하면서 반주로 맥주 한 병을 주문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창밖의 수평선으로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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