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의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인간의 삶이란 것이 진정 탄생도 죽음도 창조주의 시간 속에 예정되어 있는가.
갑자기 시곗바늘이 빙빙 돌아가는 착시현상을 일으키며 한 여인의 얼굴이 나타나서 함께 회전한다. 오직 하느님만 바라본 인간의 시간을 살다가 하느님의 시간 속으로 홀연히 사라진 여인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문밖출입을 제한했던 그는 끝내 홀로 죽었고 임종의 시간은 아무도 몰랐다.
부음을 접한 날, 신을 향한 사랑으로 세상의 유혹에는 두 눈 친친 동여매고 하얗게 늙어갔던 그의 일생을 떠올리며 신을 원망했다. 삶의 내용이 어떠했던 독신의 말로는 혼자 쓸쓸히 죽어 나가는 것뿐인가. 언제든 닥칠 우리의 죽음은 어떤 현실로 주변에 알려질까.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는 소설 `이방인`의 첫 문장처럼 우리의 죽음도 한 통의 전보로 혈육인 누군가에게 전해질까. 독신의 지인들은 너울처럼 덮치는 불안에 전율했다.
선대부터 부유했고 고위공직자의 딸이었던 그는 호사스럽게 성장했지만 일찍부터 수도자의 길을 선택했다. 뼛속까지 서린 자존심과 호의호식을 미련 없이 버렸다. 수도원에 입회한 날 그는 환하게 웃었지만 정신에 반해 몸이 견디지를 못했다. 수도생활 중 가장 혹독하다는 수련기에 걸핏하면 쓰러졌다. 수련기를 마치고 병자 같은 몰골로 그가 휴가를 나온 날, 수녀원에서 조그만 보따리가 배달되었다. `본원의 규칙을 수행하기 어려운 부적격자로 결정되었다`는 쪽지가 든 소지품이었다.
수도생활이 좌절되자 그는 독립된 공간을 원했다. 딸이 애련했던 부친은 본가와 외길로 이어진 언덕진 곳에 유럽의 엽서에서나 봄직한, 70년대 초반의 소도시에서는 보기 드문 그림 같은 집을 지어주었다. 부모의 슬하를 떠나면서 그는 자신의 거처를 수도공간으로 삼고 부모 외에는 누구이든 예고 없는 방문은 차단했다.
일찌감치 많은 재산을 물려받자 어느 날부턴가 그는 `언덕 위의 여자`로 불려졌다. 새로 부임한 지역의 은행지점장이 그의 집에 인사를 간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게다가 문밖출입이 없자 언덕 위의 집은 더욱 높게만 보였고 그는 점점 베일에 싸여갔다.
얼굴을 감춘 지 십년이 훌쩍 넘어갔다. 선망이 슬금슬금 악의적 소문을 토해냈다.
정신병에 걸렸고 귀신같은 몰골로 변했다는 괴상한 소문이 너풀거릴 즈음 그의 집을 방문했다. 계단을 한참 올라 당도한 대문에는 덩굴장미가 화려했고 담장이 성벽처럼 둘러쳐졌다. 초인종을 누르자 까만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대문을 열었다. 소문과는 달리 활짝 웃으며 포옹을 해주었는데 어둔 구석이 없었다.
대문이 닫히고 언덕 위의 집을 방문했던 나와 일행은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왔다. 너나없이 얄팍한 월급으로 청춘의 한때를 통과하고 있었기에 그의 삶에 무한한 동경을 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독실한 신앙도 없었고 평생 허리띠를 졸라매도 따라잡지 못할 부도 탐만 났지 가질 길은 요원했다. 입을 꽉 다물고 걷던 누군가 갑자기 괴성을 질렀다. 불공평하다고 하늘에 주먹질을 해댔고 무거운 기분을 털어내느라 소리 높여 웃었다.
며칠인지도 모른 채 발견된 주검, 장례미사에 참석한 지인들은 평생을 하느님만 바라본 그의 종말이 처연해 인간의 기준으로 신을 원망했다. 그러나 그의 조카신부는 아무도 몰랐던 임종의 시간을 `고인은 세상 누구도 모르게, 오직 하느님만 아는시간에 하느님 곁으로 떠났다`고 장엄한 의미를 부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