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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서 멀어지는 것은

등록일 2016-03-04 02:01 게재일 2016-03-0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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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철순 수필가
독 안에서 시큼한 냄새가 난다. 뚜껑을 여니 검은 봉지 틈으로 새순들이 핼쑥하게 목을 빼고 있다. 당근, 감자를 사서 잠시 넣어둔다는 게 한 달이 지났다.

저들이 싹까지 틔우며 얼마나 구시렁거렸을까. 싱크대 바닥에 쏟으니 곪은 상처에 상한 물이 배었다. 그 와중에 감자 세 알은 탄탄히 버티고 있다. 이들은 내 기억 밖에 있었다. 생명이 있는 것들을 무심하게 독에 가두어 저들의 꿈을 저버렸다. 싹 한 잎 틔우는 농부의 정성보다 화폐의 가치만 느끼던 무지가 부끄럽다. 상한 뿌리가 살아서 내 물컹한 건망을 깨운다.

한 친구를 참 좋아했다. 그녀는 음악을 즐기고 사색적이라서 이야기가 잘 통했다. 여행도 같이 다니고 좋은 생각이 나면 편지도 자주 보냈다. 그녀는 이루지 못할 지독한 사랑을 하고 있었다. 아내 있는 남자를 사랑했다. 우연히 만난 인연에 그녀는 흠뻑 빠졌다. 상기된 사랑 이야기 끝은 늘 어두웠다.

그들 사랑은 멀리서 바라보는 신비로운 늪이었다. 아쉬운 만남은 그녀를 더 황홀하게 하고 물안개 같은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그 남자는 한 사람을 선택했다.

그녀는 비 맞은 꽃잎처럼 젖었다. 내팽개쳐진 연정이 어두운 골목을 굴러다녔다. 언젠가 건너야 할 세찬 강물이었다.

그리움도 강물처럼 흘려보내고 미련을 남기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깊은 사랑의 빈자리에 어둠은 질척이며 몸을 삭힌다.

한참 후 친구는 고향에 있는 사과밭에 머무르며 넉넉한 시골 냄새로 마음을 식히고 있었다. 가끔 살이 오른 풋사과를 자기 마음인 양 청색 잉크로 그려 내게 보냈다. 그것은 겉모습이었다.

매미가 자지러지던 여름날, 친구는 수면제를 마시고 잠자듯 떠나버렸다. 풋사과 같은 생을 열병으로 녹였다. 주체할 수 없는 아픔을 영원한 평온으로 감당했다. 설익은 생이 우물 안에서만 하늘을 보았다. 막내딸을 보내는 노모의 한이 절절했다. 세상에는 재주 많은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 울타리도 맥없이 허물어졌다.

내 삶도 한동안 사는 게 무력했다. 슬픔의 응어리는 내게 통증이었다. 꿈속에 불쑥불쑥 나타나 바스러지도록 웃기도 하고 해진 옷차림으로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그녀의 잔상에서 벗어나려고 다른 일에 몰두했지만, 문득문득 다가오는 목소리에 괴로웠다.

벗어날 수 없는 시간에 통째로 흔들렸다. 나를 움켜잡던 생각들도 차츰 작은 날갯짓을 하며 날아갔다. 혹독한 시련이었다. 모든 것은 그렇게 행인처럼 지나갔다.

그녀의 흔적을 태우는 연기 속에 누가 내 신발까지 태워버렸다. 그녀의 슬리퍼를 끌고 강으로 갔다. 헐거운 슬리퍼가 마음이 편했다. 그녀는 스물네 해를 부수어 한 줌 가루로 강물에 몸을 뉘었다. 내 저린 속울음도 흰 물살 위에 띄워 보냈다.

끝없이 흘러가다 갈대를 만나면 노래를 부르고 물살이 세어지면 가슴이 확 뚫리도록 달릴 것이다.

오래 잊는다는 것은 마음에서 멀어진 것이다. 생각이 깜박거릴 때는 번개처럼 살아나지만, 건망의 수위가 높아지면 불씨까지 꺼진다. 꼭 해야 할 일도 기억 저편에 물러앉아 나를 시험하듯 기다린다.

마음속에 지우고 싶은 생각은 돌덩이가 되어 더 심술을 부린다. 지독한 몸살을 앓은 후에야 슬며시 자리를 비킨다. 힘든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면 그 또한 고통이다. 잊힌다는 양면성에 아쉬워하기도 하고 평온해지기도 한다. `망각은 신이 준 귀중한 선물`이라는 명언에 수없이 밑줄을 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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