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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형시대

등록일 2016-02-26 02:01 게재일 2016-02-2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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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옥순수필가
햇장을 떴더니 짜다. 소금이 많이 들어갔던 모양이다. 매사를 건성으로 듣고 해치우는 삶의 방식이 문제였다. 이 무슨 낭패인가. 된장은 일 년 동안 밥상에 올라갈 긴요한 음식이다. 장 담는 일은 연중 가장 큰 행사인데 무신경, 무성의로 짜다 못해 소태가 된 저 된장을 어떻게 할까. 친정어머니가 보시더니 생콩을 흐물흐물하도록 삶아 된장에 잘 섞어두라고 하셨다. 이를테면 된장에 성형을 한 셈이다. 두어 달 뒤 장독 뚜껑을 열었더니 샛노란 된장이 빛깔도 고와 군침이 돈다. 잔뜩 기대하고 한 뚝배기 끓였는데 장맛이 영 아니다. 콩 특유의 비린내에다 시큼한 냄새까지 나는 것이 장맛도 아니고 콩 맛도 아니다. 이번에는 콩을 많이 넣어서 싱거워진 모양이다. 게다가 일찍 뚜껑을 연 나의 성급함까지 보태어졌으니! 성형용으로 들어간 콩이 분수 모르고 설쳐대면서 된장과 화합도 못 하고 저 스스로 숙성도 못한 결과였다.

다시 어머니의 지시가 떨어졌다. 이번에는 소금을 골고루 뿌리고 꼭꼭 눌러서 없는 듯이 한쪽에 밀쳐두라 하셨다. 성급하게 뚜껑을 열었다가는 된장을 아예 망치게 된다고도 엄포를 놓으셨다. 시간을 충분히 두라는 뜻이리라. 지시대로 그렇게 했다. 빨간 고무대야를 덮어서 눈에 안 띄는 장독대 구석에 멀찌감치 두었다. 이태가 흘렀을까. 조심스레 된장독을 열었다. 된장독 뚜껑을 여는데 가슴이 두근거리고 떨리기는 처음이었다. 이번에도 잘못되면 큰일이 아닌가. 만약에 저번처럼 된장을 못 먹게 된다면 저 많은 된장을 어찌해야할까. 요즘은 버리는 일도 예삿일이 아니다. 위층에 꺼멓게 딱지가 두껍게 앉아있었다. 마치 어릴 때 넘어져서 상처가 아문 무릎에 생긴 딱지 같았다.

조심조심 딱지를 걷어내고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았다. 뜻밖이었다. 된장은 완벽했다. 성형용으로 들어간 생콩이 짠 된장과 더불어 오랜 세월 동안 발효되고 숙성되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것이었다. 무법자처럼 침입한 콩을 수용하자면 짠 된장 역시 고충도 많았을 터였다. 한쪽은 밀어내고 또 한쪽은 파고들다가 뒤엉켜서 충돌한 시기도 분명 있었을 것이었다. 자리와 틈을 내주지 않으려는 짠 된장과 비집고 들어오려는 콩의 생존경쟁이 아니었겠는가. 그 둘은 오랫동안 부딪치면서 어떻게 살아남느냐를 깨달았을 것이다. 묵은 장과 성형의 하모니였다. 화합의 결과물인 된장을 보니 문득 한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결혼으로 소식이 끊겼던 친구를 다시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친구가 우리 동네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이었다. 안부를 나누는 동안 내 눈길은 그녀의 얼굴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어릴 적 그녀는 사각 턱이었고 볼우물이 패여 있었는데 성형을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턱을 깎고 지방이식을 한 친구의 얼굴은 울퉁불퉁하고 이상한 모습이었다. 부동산으로 졸부가 되면서 저질러진 일이었다. 경제적 풍요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교만과 우월감에 젖어 살았었다.

친구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칩거생활을 했다. 얼굴 윤곽이 제자리를 잡고 자기 피부로 젖어들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었다. 그동안은 후회와 괴로움의 시간이었다. 또한, 자기성찰의 시간이었다. 친구는 그 시간이 자기 안의 허영심을 발견하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과도한 욕심으로 망가진 얼굴이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 친구는 복지시설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진정한 생의 의미를 찾은 친구를 보니 아팠던 만큼 얻은 것이 더 많았음을 알 수 있었다. 도도함과 사치로 휘날리던 그녀의 모습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외형의 모습과 내면의 것들이 부딪히면서 빚어낸 얼굴은 삶의 모습까지 바꾸어 놓은 것이었다.

모처럼 그 친구를 초대했다. 조촐한 나물 반찬에다 묵은 장으로 된장을 끓였다. 오랜 시간 묵히고, 삭이며, 어르고, 달래며 저 스스로 숙성된 된장을 보니 참으로 귀하다. 이참에 나도 성형이나 한번 해 볼까. 거울을 보니 뜯어고칠 것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아서라, 다 그만두고 가슴이나 뜯어고쳐야겠다. 사랑과 양보의 미덕으로 후덕하게 살아가는 넉넉한 가슴 말이다. 벨이 울린다. 친구가 온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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