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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이

등록일 2016-04-08 02:01 게재일 2016-04-08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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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진숙 수필가
시장에서 사 온 냉이를 씻는다. 옆으로 벌린 잎에 비해 뿌리는 아래로 벋어 전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뿌리째 먹는 나물로는 냉이가 으뜸일 것이다.

흐르는 물에 잎을 흔들어 씻은 다음 뿌리를 쓰다듬어 내린다. 긴 겨울, 땅속에서 견뎠을 고난이 내 손끝에 고스란히 전해온다. 순탄치 못한 삶을 말해 주듯 살갗이 거칠기만 하다. 제법 큼직한 흉터가 나 있기도 하다. 흉터의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싸한 아픔이 가슴께에 밀려든다. 지난날 내가 겪은 상처의 뿌리도 뽑아내면 이 냉이 뿌리와 닮지 않았을까. 상처 난 뿌리에서 향기가 풀려 나온다.

소녀 시절, 이맘때면 이웃 또래들과 함께 냉이를 캐러 다니곤 했다. 가까운 밭이랑을 살피며 캐다가 양에 차지 않으면 아예 들로 나갔다. 때로는 철둑 넘어 산비탈 밭을 헤매기도 했고, 강 건너 마을 과수원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그것은 여자아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새봄맞이 행사였다. 나물 캐기는 여자아이들이 외출할 수 있는 합당한 명분에 속했다.

이른 봄의 속삭임을 엿들으러 나선 발길. 강물이 깨어나는 소리, 햇살이 데워지는 기미, 새싹이 꿈틀대는 기척들과 설레는 만남이었다. 밭이랑에 파릇파릇 움터 있는 냉이를 찾는 일은 앳된 소녀들이 희망의 무지개를 찾는 일이었다.

사과나무 아래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나 계집애들은 눈망울을 탐험가처럼 두리번거렸다. 채 물러가지 않은 추위 속에서 냉이를 발견했을 때의 그 기분이라니. 이른 봄의 차가운 기온도, 멀리서 걸어온 피곤도, 스르르 녹이는 환희였다. 땅바닥에 최대한 납작 등을 맞대고 추위를 견디며 무성히 자라 꽃피울 날을 기다리는 냉이. 그 낮은 기다림 속에 시골 소녀의 꿈이 얼비치기도 했다.

할머니는 냉이 나물을 좋아했다. 냉이 나물이 밥상에 오르면 맛나게 먹었다. 내가 마구잡이로 캐 담은 냉이 바구니를 던져 놓고 놀러 가버리면 할머니는 귀찮은 줄 모르고 하나하나 다듬었다. 흙을 털어내고, 떡잎을 떼어내고, 잔뿌리를 잘라내어 말끔한 새 인물로 바꾸었다. 활동이 어려워 적적하던 할머니의 소일거리로 안성맞춤이었을까. 할머니는 냉이를 다듬으며 지나가버린 봄날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쳤는지도 모른다.

냉이를 살짝 데쳐 물에 담가 둔다. 저녁 식탁에 올리려고 나물을 무치려다 보니 담갔던 물이 냉이의 잎보다 더 진한 초록빛이다. 어디서 그런 고운 빛이 나왔을까? 초록의 신비로움에 사로잡혀 눈을 뗄 수가 없다. 한참만에야 주방의 좁은 창으로 하늘을 내다본다. 연청색 하늘 자락에 구름 조각들이 냉이꽃처럼 피어나 있다.

냉이 무침을 식탁에 올려놓으니 집 안에 향내가 넘친다. 들판의 봄이 실내에서 활짝 기지개를 켜는 듯하다. 그 향기로운 맛을 본 가족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추위가 다 가시지 않은 오늘, 시장에 들러 냉이를 사온 게 얼마나 잘한 일인지. 가족들의 냉이꽃 같은 미소를 바라보는 마음이 뿌듯하다.

냉이 무침에 절로 젓가락이 간다. 입 안에 냉이 향이 가득하다. 고향의 산과 들이 눈에 잡힐 듯 선연하다. 냉이 나물을 씹기 시작한다. 달고 고소하다. 씹으면 씹을수록 몸 안에 새봄의 기운이 퍼져간다. 냉이 뿌리를 닮은 내 마음의 뿌리에 난 상처에서도 봄 향기가 풍겨 나올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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